두 차례에 걸쳐 숙빈최씨가 태어 났다는 "들마 굼실"을 찾았다.
마을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지화연할머니(당 77세)였다.
숙빈최씨에 대해 여쭤 보니 아주 잘 알고 있다면서 할머니의 집으로 안내했다.
그 터는 원래 할머니의 시어머니인 신안 주씨의 시집이었고
지금은 할머니의 조카가 그 터를 구입하여 옛 집을 헌 뒤 그곳에 새집을
지었는데 2년 정도 되었단다.
동네 모든 사람들이 그 터를 왕비터로 알고 있으며 그 사람이 영조대왕을 낳았다고
알고 있단다.
할머니의 안내를 받아 그 터를 찾으니 밀양시 산내면 산내야촌길 111- 14 번지이다.
집 뒤로는 울창한 대나무 밭이 있고 그 뒤쪽으로는 부엉디미, 농방우, 갈뫼봉이 웅장한
모습으로 벌려 서 있다.
이 날 비가 조금 온 탓에 농방우 주위는 구름으로 뒤덮여 신비로움을 더해 주었다.
마을 이름인 굼실(雲谷, 구름동네)의 유래를 알려 주는듯 하였다.
마침 옆집의 전이장님이 자신의 사랑방으로 안내하여 마을에 전해 오는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러면서 2007년 5월에 발행된 손제문씨의 우리동네(부제 2002 - 2007 밀양의 모습)라는 책자를
보여 준다.
그 곳에는 이 굼실마을이 숙빈최씨의 출생지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그러면서 예전에 동강중학교 황의중 교장이 산내면에 관한 향토지를 펴냈는데 그 곳에도
그런 내용이 들어 있다고 알려 준다.
마을을 나와 가인리에 있는 동강중학교를 찾았다.
교무실에 들러 관련 책자를 빌려 보려고 하였는데 마침 밀양문화원 이사로 있는
李成寧선생님이 있었다.
이성녕 선생의 소개로 교감선생님을 소개 받고 취지를 말씀 드렸더니 도서관에서 책자를
찾아 보여 주었다.
그 책은 황의중 교장이 지은 산내 향토지로서 2002년 5월에 산내향토지발간위원회에서
펴낸 것이었다.
그 책 역시 숙원최씨가 굼실에서 태어 났고 그 터는 욍비터로 알려져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두 책 모두 그 근거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어 아마도 마을에 예전부터 전해
내려 오던 설화를 근거로 하는 것같았다.
숙빈최씨의 출생지를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는 문헌은 없다.
조선왕조실록, 숙빈최씨신도비 어디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1745년(英祖 20년) 7월 15일 영조 스스로 지은 淑賓 海州崔氏 昭寧墓碣文에는 그 출생지가
餘慶坊 私第(지금의 서울 종로구 신문로, 세종로 일부, 중구 태평로, 무교동, 다동 일부임)이고,
숙빈최씨의 가계가 증조부까지 상세하게 나와 있으나 믿기 어렵다.
왜냐하면 해주 최씨 족보상에는 숙빈최씨 선조가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밀양의 설화, 밀주지는 거의 확실한 탄생지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만약 명문인 해주최씨의 자손이라면 궁녀로 들어 갈 때 가장 천한 신분인 무수리로 들어 갈 수는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왕을 낳은 집안에서 그에 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극히 이례적이고
당시의 신분질서 세계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숙빈최씨 집안은 해주최씨도 아닐 뿐더러 가령 그렇다 하더라도 족보상 등재되지 않은
극히 한미한 집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의견이 있다.
장현호씨는 원래 최씨의 아버지는 밀양의 이름난 목수였는데 궁궐 건축관계로 서울로 불려 올라 갈 때
숙빈최씨를 데려 갔고 이어 궁의 무수리로 들어 갔다는 이야기를 전해 준다.
이런 이야기는 그 진위여부는 알 수 없지만 훨씬 더 사실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목수는 천한 계급이었고 한미한 집안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후에 숙빈최씨가 귀한 신분이 되었을 때 자신의 천한 집안 내력에 대해 입을 다물고
더 이상 밀양과의 관련성을 침묵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시대의 신분질서상 왕자의 앞날을 위해 선택한 결정일 수도 있다.
영조 또한 후일 왕이 되었을 때 명문거족이 즐비한 궁정에서 대신들과의 기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도 자신의 외가가 한미한 출신이라는 사실을 숨겼을 수도 있다.
그래서 왕을 낳은 어머니이면서도 이례적으로 모든 사적에서 언급이 되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한다.
현재 왕비터는 새 집이 들어 서 있지만 마을 입구와 그 터 앞에 관련 내용이 적힌 표지판이라도
하나 정도 세워 두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756014E4F5153C705)
포근한 대밭 앞에 놓인 굼실마을의 모습 : 오른쪽 붉은 지붕이 있는 곳이 왕비터임
![](https://t1.daumcdn.net/cfile/cafe/141E1C4E4F5153CA2D)
왼쪽으로부터 부엉디미, 농방우, 갈뫼봉의 모습 : 특히 농방우가 구름으로 쌓인 모습이 인상적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510924E4F5153CC38)
왕비터의 현재 번지
![](https://t1.daumcdn.net/cfile/cafe/1512F54E4F5153CF37)
왕비터에 집이 들어 서 있는 모습
![](https://t1.daumcdn.net/cfile/cafe/1112594E4F5153D136)
집뒤의 대숲
![](https://t1.daumcdn.net/cfile/cafe/1519B04E4F5153D436)
마을의 전이장을 비롯한 주민들이 "우리동네"라는 책을 펴 놓고 설명하는 모습
![](https://t1.daumcdn.net/cfile/cafe/1916694E4F5153D634)
지화연 할머니 : 이 마루에 앉아 설명을 해 주셨다.
첫댓글 井邑市 출생는
용흥사와 숙빈과 인연을 부각하기 위해
재미나게 꾸민 설화에 지나지 않는 것 같고...
서울 궁정동은
밀양의 들마궁실 마을에서 태어나
한양의 궁궐공사로 가는 아버지를 따라가
궁궐 가까운 궁정동에 이사 한 곳으로
물을 길어 나르는 무수리(水賜:수사)를 하면서
아버지와 함께 살았든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장 합당한 설명인가 합니다.
호오....이런 만남도 너무 좋으네요.....
목사님 !
정말 멋진 이야기이지요 ?
네....ㅎㅎㅎㅎㅎㅎ..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