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레스 웃사
삼하 6장 1-11절
주요내용 = 섬김론
베레스웃사란 '웃사와 충돌하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여호와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올 때 잘못하여 제사장인 웃사가 죽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웃사의 죽음은 하나님을 모시려면 올바른 방법으로 모셔야 함을 교훈합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을 바른 방법으로 섬기지 못하면 베레스웃사가 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분명히 다윗의 실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그만 블레셋 사람들을 본 받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김이 곧 왕되신 하나님을 모시는 대관식적인 놀라운 사건임을 몰랐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여호와를 사랑한다는 그 소원 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할까요?
신6:4-5에 그것을 자세히 가르쳐 줍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또 대상28:9에서는 성심으로 즐거히 섬기라고 말씀합니다. 또 막12:30에서는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라"는 말씀이 추가됩니다. 종합하여 보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온갖 기쁨과 즐거움 등의 감정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라는 말씀이 됩니다. 이 사실을 본문을 통하여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하나님은 마음을 다하여 섬겨야 합니다.
1절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뺀 무리 삼만을 다시 모으고"
여기 다시 라는 말은 과거 다윗 자신의 즉위식 때를 이은 제 2차 총회임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대상12:23-40을 보면 다윗 왕의 즉위식에는 35만명인데 여호와를 모셔 오는 데는 고작 3만이었습니다. 십분의 일도 못되는 셈입니다. 물론 단순히 사건 만을 처리한다면 몇 사람이면 족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이 만큼의 군대를 동원한 것은 그래도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한 예전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보시기에는 합당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실패와 성공의 두 번의 사건을 비교해 볼 때 첫 번째는 두 번째에 비해 소극적이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섬기려면 마음을 다하여 섬겨야 함을 보여줍니다. 우리 마음 전체가 아니라 전체가 아니라 한 조각 한 부분으로는 안됩니다. 자신을 위해서보다 못해도 안됩니다. 하나님보다 세상과 가족과 나 자신을 더 사랑하거나 비중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마음을 다하여 섬기라고 교훈합니다.
2.하나님은 뜻을 다하여 섬겨야 합니다.
3절을 보면 처음에는 새 수레를 가지고 법궤를 모시려고 햇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역시 실패의 원인이었습니다. 그는 율법대로 제사장이 메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소가 수레를 끌었고 그래서 웃사가 흔들리는 법궤를 붙들려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수 천년 동안 성전에 나타난 기적은 짐승들이 죽기를 거부하는 일 없는 것이랍니다. 그런데 여기 짐승이 뛰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납치 않음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두 번째는 하나님의 궤를 멨습니다.
여기 뜻을 다하여란 바른 지식과 방법을 다해 섬김을 의미합니다. 그럼 하나님의 방법이란 오늘날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김을 뜻합니다. 다르게 섬겨봐야 그것은 헛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이 예수 없이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지만 그것은 헛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롬10:2에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웃사를 충돌하여 물리치심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물리치셨습니다.
혹은 예수를 믿지만 성령의 도우심을 부인하거나 소극적으로 일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래 믿어도 언제나 제자리 걸음만 할 뿐입니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 어떻게 믿음이 생기고 사랑이 생기고 능력이 생겨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베레스웃사입니다.
3.하나님을 무엇보다 제일주의로 섬겨야 합니다.
13절에 여호와의 궤가 출발하기 전에 제사를 드리고 또 19절을 보면 도착한 후에 또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가서 법궤 만 싣고 오려고 했습니다. 즉 뚝딱 해치우려고 했다고 표현함이 기가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먼저 하나님께 제사하고 메어온 후에 또 다시 하나님께 제사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매사의 시작과 끝에 하나님께 예배하므로 섬겨야 합니다. 이것은 비단 형식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식보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제사장들에게 책망하셨습니다. 말1:6-8에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하시면서 너희가 더러운 떡과 눈 먼 희생과 저는 것 병든 것으로 제물을 드렸다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4.하나님을 그 영광에 합당하게 섬겨야 합니다.
5절과 15절을 비교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 다릅니다. 5절에는 잣나무로 만든 악기와 기타 다른 악기들이 나타나지만 중요한 나팔이 없습니다. 그러나 15절에는 다른 악기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나팔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 나팔이 보여주는 중요한 의미는 나팔은 그 행사의 의미가 무엇임을 뚜렸이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나팔은 다른 악기와 같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러나 나팔은 그 의미가 다릅니다. 나팔은 전쟁시에나 삼하15:10 등을 보면 왕의 즉의식 때 반드시 불어야 하는 악기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모시는 일이란 그냥 일종의 신을 모시는 것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나팔은 우리가 하나님을 만왕의 왕으로 합당하게 모시고 섬겨야 함을 보여줍니다.
5.하나님을 힘을 다하여 섬겨야 합니다.
14절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
그런데 얼마나 기쁨으로 춤을 추었든지 옷에서 몸이 드러난 줄도 몰랐습니다.
여기 중요한 것은 '힘을 다하여' 라는 낱말입니다. 힘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지식의 힘, 지혜의 힘, 경제의 힘, 재주의 힘, 사회적 배경의 힘, 육신의 힘, 영적인 힘 등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맡긴 것의 분량에 따라 요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구약의 제사도 그 힘에 따라 제물을 각각 달리하여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많이 드리는 사람에게 눌려서 낙심하지 말고 자신의 분량이 크든 적든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는 그 양보다 그 비중 퍼센트를 보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6.하나님을 목숨을 다하여 섬겨야 합니다.
10-11절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치우쳐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달을 있었는데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다윗은 베레스웃사의 사건으로 9절을 보면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 했습니다. 그는 전에 블레셋 사람들을 수 만명 독종으로 치시던 그 하나님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잘못하다가는 이번에는 이스라엘을 그렇게 하실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메어 간 곳이 바로 오벧에돔의 집입니다.
여러분, 다윗도 두려워 하던 그 무서운 법궤, 오벧에돔도 사람인데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전에 다곤 신의 목과 팔을 끊어 놓으시던 것처럼 혹시 자고 나면 자기의 목과 팔다리를 끊어 놓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또 블레셋을 온갖 질병으로 치시던 것처럼 자기 가족에게 그렇게 하실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벧에돔은 다윗에게 메어가라고 요청하지 않았고 묵묵히 법궤를 모셨습니다. 그러한 오벧에돔을 얼마나 복주셨으면 불과 삼 개월 만에 다윗궁까지 소문이 났겠습니까? 그럼, 어떤 마음으로 모셨을까요?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모셨을 것입니다. 본래 왕을 섬기는 궁중의 내시들은 영광과 함께 자신의 잘못이 곧 죽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바로 목숨을 다하여 섬기는 원리가 나타납니다. 그랬기에 하나님께서는 오벧에돔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12절에 그의 집과 소유에 복을 주셨다는 것은 불임 중에 자손의 잉태와 짐승들의 다산을 의미합니다. 즉 목숨을 바치고 섬겼더니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스데반의 그 놀라운 생명의 역사는 그의 목숨 바쳐 섬긴 순교적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모두 같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왜 차이가 납니까? 그것은 목숨을 다하여 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섬기는 것에 우리의 목숨을 바쳐서 섬겨 봅시다.
7.하나님을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하므로 섬겨야합니다.
12절에 "기쁨으로" 라고 했고, 15절에는 "즐거이" 라고 했으며, 또 18절에 "백성에게 축복하고" 19절에 "모든 백성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기쁨과 감사의 표시였습니다.
교회에는 노래도 있고 춤도 있고 악기도 있고 아멘도 있고 할렐루야도 있고 웃음도 있고 눈물도 부르짖음도 있고 무엇인가 한 움큼 쥐어 주기도 하고 혹은 내 놓기도 하는 이렇게 성령 안에서 온갖 것들이 진행되는 무언가 훈훈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교회의 모습니다. 혹자는 이를 서민적인 교회라고 부릅니다. 지금 백화점에서 옛날 재래식 장터의 그 훈훈함을 찾기란 힘드는 것처럼 교회가 너무 깔끔하고 엄숙하고 귀족화되면 성령께서 역사하실 틈이 없습니다.
어느 교회의 주보가 교회의 규모에 비해 너무 초라해서 대교회 주보가 왜 이러냐고 질문하니까 주보가 그 정도니까 우리 교회가 성령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하더랍니다. 역설적인 답변 같지만 과연 기계같이 돌아가고 또 돌아가야 하는 그런 곳에 무슨 성령의 역사가 있겠습니까?
8.하나님을 성품을 다해 섬겨야 합니다.
8절 "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곳을 베레스 웃사라 칭하니"
학자들은 여기 분노가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향한 것이었다고 해석합니다. 즉 하나님을 향하여 부족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바로 알지도 못하고 행한 자신을 가슴치며 분노했습니다. 다윗은 그래도 잘 믿는다고 자부했었는데 너무나 엉터리 같은 자신을 바라보고 분노했습니다. 이 분노가 있었기에 그는 두 번째에는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품을 다해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하는 엉터리 같은 자신을 바라보고 분노하십시다. 하나님을 왕으로 부르면서도 진정한 나의 왕으로 높이지 못하며 불성실한 자신을 탄식해야 합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것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오히려 미갈처럼 조롱하는 자신의 모습인 것입니다. 23절에 미갈을 다윗의 아내가 아니라 사울의 딸로 소개하고 있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주관적 구속사의 관점에서 볼 때 아직도 신령한 것을 비웃는 자신의 육신적인 모습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미갈은 그 일로 자식을 낳지 못하는 저주를 받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왕으로 바로 모시면 이제 육신은 더 이상 다른 생각을 낳을 수 없어 지식에가지 새롭게 됨을 의미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다윗처럼 온전히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온전히 우리의 중심에 모시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