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끼다 똥 된다
(전 선 재)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아끼기보다는 즐겨 사용하는 편이다. 소모를 해야 새로운 것들이 다시 내 안으로 들어 올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마음에 든다고 모두 비싸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개는 가격도 세고 마구 사용하다 보면 쉽게 망가지고 소모량도 많아져 많은 비용이 들기 마련이다.
30대 초반, 국군모범장병으로 선발되어 미국 서부지역을 일주일간 견학 및 관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태평양 연안에 접해있는 로스엔젤러스는 아열대지역을 개척해서 인공적으로 건설한 대도시로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결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도시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두 나라 국민들의 모습이 많이 달라 보였다. 일상에 필수적인 물건이나 취미 또는 여가를 즐기기 위한 장비 중 많은 비용이 요구되는 승용차, 레저장비, 가전제품 등을 구매하는데 있어서 더욱 뚜렷하게 대비되고 있다. 우리는 몇 년이고 저축을 해서 목돈이 마련되면 그제서야 필요한 물건을 구매한다. 저축을 위해서는 생활규모를 줄이고, 하고 싶은 것도 못하고, 먹고 싶은 것도 참으며 감내해야 한다.
반면에 미국 사람들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먼저 저지르고 본다.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을 확보하여 보다 나은 문화생활과 문명의 혜택을 일찍부터 경험하는 것이다. 대금은 정해진 기간 동안 천천히 갚아나간다. 감내의 생활 후에 물건을 취득하느냐, 아니면 먼저 확보해서 좀 더 일찍 혜택을 보고 즐기며 사느냐의 차이겠지만 결과는 많이 다르지 않을까 생각된다.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아껴쓰기를 권장한다. 아낀다는 것은 물건, 돈, 시간 따위를 소중하게 생각해서 잘 쓰지 않거나 쓰더라도 조금만 쓰는 것이다. 사람이나 물건은 소중하게 여겨 보살피거나 위하는 마음까지도 담고 있다. 아낌은 절약을 전제로 한다. 함부로 쓰지 아니하고 꼭 필요한 데에만 쓰는 것이다.
나는 직업상 이사를 자주 해야 했다. 삼십여 년 직장생활에 스물다섯 번 이사를 하였으니 거의 1, 2년에 한 번씩은 이사를 한 셈이다. 이사를 하고 나면 집들이를 하고, 집안에 경사가 있으면 손님들을 초대하고, 제법 높은 직위에 올라가니 상사를 모시고 돌아가면서 식사자리를 마련하곤 하였다. 통상 관사에서 하였다. 통신축선 상에 있어 지휘통제 및 상황조치가 가능하고, 일반인의 오해나 시선을 피할 수도 있고, 필요시는 도움의 손길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은 일 년에 한두 번 하는 행사를 위하여 집기류를 장만하곤 했다. 일부러 유명한 곳을 찾아서 쇼핑을 하고, 초대받아 간 집에서 눈여겨보았던 집기류를 검색하여 구매하는 등 다양한 정보와 루트를 통해 고상하고 품위있는 것들을 비축하여 쟁여 놓았다. 그런데 이런 집기류는 대개가 유리나 사기, 도자기들로 충격에 약하고 깨지기 쉬운 것들이다. 이사할 때 마다 꼭 몇 개씩은 파손되는 안타까움을 반복하여야 했다. 어느 해는 행사가 없거나 그냥 지나가기도 하는데 이사할 때 열어보면 이미 유행이 지났거나 초라해 보여 폐기처분해야 하는 것들도 부지기수였다.
아끼는 것 중 특별히 증표나 기념이 되는 것들은 소중하게 여김이 당연하다. 일상에서 사용하는 것 중 아낌을 받는 물건은 고상하고 품위가 있고 희소가치가 있어 구매비용이 비싸고 평소에 풀어놓고 쓰기엔 부담스럽긴 하다.
넓지도 않은 관사에 꼭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쟁여두고 애지중지하다가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이사할 때 깨먹는 어리석은 일들을 이제는 지양함이 마땅하다. 행사가 없더라도 주기적으로 확인하여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일상으로 돌리며, 굳이 행사를 치러야 한다면 주변에서 서로서로 빌려쓰는 전통을 세움도 좋은 방법이 아닐까. 지금은 이런 행사들이 많이 축소되고 간소화되기는 했지만, 공적인 시설인 회관을 이용거나, 관행적인 행사를 위하여 집기류나 필요한 물건들을 대여해주는 시스템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물건을 소중히 간직하고 지금도 필요할 때는 사용하는 것들이 있다. 나는 아직 결혼식장에서 매었던 넥타이를 가지고 있다. 곤색 바탕에 휜색 체크무늬로 색상이나 디자인 등이 세련되고 안정감이 있다. 결혼한 지 40년이 넘었지만 가끔씩은 중요한 자리에 그 넥타이를 매고 자랑스럽게 나가기도 한다. 지금 착용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소중하게 여겨 보살피고 아끼는 마음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적당히 사용하면서 즐긴다. 함부로 쓰다가 금방 망가지면 어떡하나 걱정을 들으면 한마디로 일축한다. “아끼다 똥 된다”고. 아무리 좋은 옷이나 구두, 화장품, 향수도 시간의 흐름만으로 스스로 상하기도 한다. 마음에 드는 좋은 물건을 특별한 때에 쓰려고 아껴두었다가 유행이 지나가거나 유통기간을 넘긴 적이 얼마나 많은가. 무엇이든 가장 상태가 좋을 때 그리고 자신이 가장 원하는 순간에 소비하고 향유하는 게 그 물건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런지요.
인생도 마찬가지다. ‘은퇴하고 나서 해외여행을 실컷 해야지’라거나 ‘지금은 오로지 열심히 일하고 나중에 경제력이 충분해지면 원하는 것을 마음껏 할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인생 역시 ‘아끼다 똥’되는 격이 될 수 있다. 자신만을 위한 행복한 인생 소비는 끊임없이 반복되어야 한다. 소모를 해야 새롭고 즐거운 것들이 다시 내 안으로 들어온다.
체력이 예전 같지 않다거나 기회가 줄었다는 이유로 움츠러들며 쓰기를 주저하면 안 쓰는 물건이 상하듯이 인생도 곰팡이가 슨다. 녹스는 것보다는 끊임없는 사용으로 닳아 없어지는 게 낫다. 인생도 순간마다 즐겁고 행복하게 사용하다보면 소모된 만큼 채워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꼭 아껴야 할 것이 있다. 말이다. ‘말을 아낀다’는 것은 우선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제하라는 의미와 나중에 언젠가는 말을 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가 있다는 의미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말을 아끼나 우매한 자는 생각나는 대로, 나오는 대로 본인의 감정을 노출한다. 세상 살면서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겠는가. 당장의 분노와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하고 싶은 말 다 내뱉다가는 실수할 가능성이 높다. 말을 아끼지 않는 사람은 나중에 기회가 오더라도 잡기 힘들고 본인에게 굴러들어온 복마저 차버릴 가능성이 높다.
그러고 보면 무조건 ‘아껴야 할 것’과 ‘아낌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융통성을 가져야 하는 것’의 차이를 구분하기가 매우 힘들어 보인다. 대체로 무형적 요소인 ‘시간’이나 ‘말’은 ‘아낌’ 위주로 지향하고, 유형적 요소인 ‘사람’이나 ‘물건, 재물’ 등은 너무 아낌에 집착하지 말고, 필요할 때는 과감하게 활용하고 투자하여 여기로부터 창출되는 풍성한 삶의 은혜를 누리는 것도 좋을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