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로 백두산 사진을 촬영한 동판이 발견됐다. 수소문 끝에 인화가 가능하다는 인쇄소 한곳을 찾았다. 꾸러미 속에서는 한 사내의 사진과 백두산 천지를 담은 동판이 나왔다. 1백여년전 촬영된 백두산 천지의 모습이 우리 앞에 선명하게 모습을 나타냈다. 사진의 구도와 각도에 대해 전문가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최언진 명지대학 사진박물관 본부장 "1910년에 사진이 찍혔다고 한다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백두산 사진을 찍은 것이 아닌가..."1921년 동아일보에서 촬영된 최초의 백두산 사진보다 10여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최언진 본부장 "이 백두산 사진 자체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다른 백두산 사진보다 전혀 다른 앵글이라 이거다. 그렇게 본다면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이 사진을 찍지 않았을까..."백두산 동판의 출처는 이 사진의 주인공 홍암(弘巖) 나철(羅喆). 그는 어떤 특별한 의미에서 백두산을 촬영했던 것일까.1920년 벌어진 청산리 전투(靑山里戰鬪). 일본군 사상자만 2천여명에 달했던 이 전투의 지휘관은 우리가 알다시피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 장군이다. 그러나 북로군정서에는 김좌진 장군보다 높은 서열인 총재라는 직위의 인물이 있었다. 그는 대종교도였던 서일(徐一). 당시 청산리 전투에 참가했던 이우석(李遇錫)은 북로군정서가 대종교 정신으로 무장한 군사단체였다는 기록을 남긴다.윤병석 인하대학 명예교수 "홍범도(洪範圖) 장군이 지휘한 봉오동 승첩(鳳梧洞勝捷)에 이어서 1920년 10월에 청산리 일대에서 10여일간 접전이 벌어졌는데, 그때 지휘관이 김좌진 장군이다. 그리고 1933년에 한국독립군과 중국의용군이 일본군 아즈카[飯塚] 부대와 교전을 펼쳤던 대전자령 전투(大甸子嶺戰鬪)가 벌어졌는데 그때 지휘관이 지청천(池靑天) 장군이다. 이 세명의 독립군 지도자들이 모두 대종교인들이다."박환 수원대학 교수 "대종교의 항일투쟁(抗日鬪爭)에 있어서 전체적인 위상은 만주지역의 무장활동을 대표할수 있는 존재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만주의 대표적인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북로군정서나 신민부, 한국독립당이 모두 대종교도들로 이루어진 집단이었다."만주에서 활동했던 독립군 대부분이 대종교도였다는 충격적인 증언, 현재 우리에게 이름조차 낯선 이 종교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리고 백두산을 처음으로 사진 촬영한 인물 나철, 그는 대종교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의문의 실마리를 풀 문서가 일본 외무성 자료 보관실에서 발견되었다. 1942년에 작성된 만주국 종교관련 문서의 기록 가운데 대종교와 관련된 언급이 있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대종교를 종교가 아닌 조선인들을 선동하는 사이비라고 규정지었다. 어떤 연유로 그런 것일까?서울 홍원동의 대종교 총본산, 대종교는 우리 민족의 시조(時祖)인 단군왕검(檀君王儉)을 모시는 신앙에서 비롯되었다. 1909년 나철에 의해 이 민족신앙이 대종교란 이름으로 부활된 것이다. 박영석 전 국사편찬위원장 "단군조선부터 부여, 고구려, 백제, 발해가 존재하던 시절에도 민족종교가 다 있었다. 이 민족종교가 단절된 것은 고려 중엽, 몽고의 침략에 의해서였다. 이것을 다시 재현시킨 것을 중광(重光)이라 한다."1910년 나철과 이기(李沂), 유근(柳瑾) 등으로 시작된 대종교의 불씨는 급격히 번져나갔다. 서일, 김좌진, 홍범도를 비롯한 무장(武裝) 항일투쟁(抗日鬪爭) 세력과 민족사학 및 한글운동을 이끌었던 신채호(申采浩), 박은식(朴殷植), 주시경(周時經), 지석영(池錫永), 또 민족지도자 신규식(申圭植), 이시영(李始榮), 안재홍(安在鴻), 이상설(李相卨) 등이 대종교 사상을 바탕으로 활동했다.이동언 독립기념관 책임위원 "독립운동의 지도자들 대부분이 대종교도였다는 사실이다. 이동녕(李東寧), 이시영, 이병기(李秉岐), 신규식, 서일, 홍범도 등 많은 애국지사들이 대종교를 믿고 있었다는 점만 보아도 대종교가 한국 독립운동史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고 할수 있겠다."1907년 3월 25일, 광화문 거리에서 한발의 총성이 울렸다. 조선총독부의 기밀문서에는 을사오적 암살 미수사건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군부대신이던 권중헌(權重顯)은 국사를 위해 입궐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때 그의 목숨을 노리고 날아든 총탄, 그를 노리던 무리들은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됐다. 1905년 일제의 강압 속에서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었다. 협조했던 이완용(李完用), 이지용(李址鎔), 이근택(李根澤), 박제순(朴齊純), 권중현(權重顯)은 이른바 을사오적(乙巳五賊)으로 민족반역자였다.이동언 위원 "국내 문제부터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자신회라는 조직을 동지들과 함께 규합하고 우선 을사오적을 처단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워 실행에 옮기게 된다."최초의 을사오적 암살 기도사건, 암살계획에 가담했던 결사대원 18명이 현장에서 체포됐고 이 사건의 주모자는 나인영(羅寅永)이었다. 나인영은 나철의 본명. 그는 거사를 위해 자신회라는 비밀결사단체를 조직했다. 거사를 계획한 후 그가 대원들에게 나누어 준 것은 일종의 살인 허가증, 매국노들을 죽이는 것은 하늘의 뜻이기에 이른바 살인을 허가한다는 문구가 적힌 글이었다. 이 암살계획에 동원된 인원만 250여명, 대한계년사에는 부녀자며, 농민들이 의거를 위한 모금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이 계획에 참가했다고 씌여 있다. 재판에 회부된 나철은 10년형을 선고받고 전남 신안군에 유배되었다. 비록 미수에 그쳤지만 이 사건은 후에 항일의열투쟁(抗日義烈鬪爭)의 도화선이 된다.
최초의 테러리스트였던 나철, 그의 어떤 면이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사로잡았던 것일까.나철의 고향은 전라남도 벌교, 후손이 간직하고 있는 유품에는 나철의 경력을 보여주는 서류가 남아있다. 나철의 친필이 씌여있는 이력서, 그는 고종(高宗) 때인 1891년 정3품인 승정원 가주서에 등용된다. 그리고 2년 가까이 관직생활을 한후 다시 징세서장에 등용됐지만 고사하고 낙향한다. 나철에 대해 특이한 점은 바로 영문명함이다. 가난한 하급관리에 불과했던 그에게 왜 영문명함이 필요했던 것일까?일본 외무성에 있는 1908년 요시찰 외국인 기밀문서를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수 있다. 을급비밀 제1257호에 보면 그해 11월 14일 나철과 그의 동료들이 일본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 두달 가까이 걸린 그들의 일본 방문행적은 23원 50전으로 과자를 샀다는 내용까지 일본 밀정에 의해 낱낱이 보고되었다. 그중에서 눈에 띈 것은 그가 접촉한 일본 정치인들에 대한 기록이었다. 나철은 일본 우익의 거두이자 흑룡회의 간부였던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를 비롯해 마츠무라 류노스케[松村雄之進], 토야마 미츠루[頭山滿] 등 일본 정치계의 실세들과 회동을 가진다.삿사 미츠아키 게이오대학 박사 "19세기말 토야마 미츠루는 큐슈의 지사들을 모아놓고 현양사라는 무력단체를 만든 거물급 정치인이었다. 그는 무력(武力)의 일인자인 인물이었고 일본 정계에서도 제1의 발언권을 가진 실력가였다."타케유치 다나카 "아시아의 독립운동에 관해서도 토야마는 매우 큰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손문의 활동이나 필리핀 아시아의 독립운동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일본 도쿄의 태영관(太榮館) 1908년 당시 일본을 방문했던 나철이 묵었던 여관이다. 그가 이곳에 장기체류하면서 만난 일본의 정치인들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는 정치적 라이벌 관계에 있었다. 나철은 이 세력을 이용해 얻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나철은 이토 히로부미의 식민지 정책의 부당함을 알리고 한국의 독립과 한국 국민들의 재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대책을 촉구했다. 한편 일본 밀정의 보고서에 의하면 나철을 따라왔던 정훈모는 동양척식 주식회사의 이사가 되려는 로비 활동을 펼쳤고, 나중에 그는 나철과 갈라서 친일파로 돌아섰다.결국 나철의 외교활동을 통한 한국의 주권 수호를 위한 노력은 일진회(一進會)의 방해로 실패하게 된다.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치른 일본은 제국주의적 팽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미 일본에게 대한제국은 지배의 대상이었지 동등한 외교의 대상이 아니었다. 보다 자주적이고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국운이 쇠퇴하고 있던 이 시기에 나철이 무족한 것은 민족정신의 융합이었다. 1909년 11월 15일 나철은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16열의 동지들과 더불어 대종교(大倧敎)를 중광(重光)한다.그들이 발표한 포명서에는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의 운명을 우리 민족정신으로 지켜나갈 것을 천명하고 있다.박원 수원대학 교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단군왕검으로 시작된 우리 민족의 정기를 토대로 역사의식을 고취해야 한다는 메세지를 나철이 전했던 것이다. 그때 나철이 발굴해낸 민족정신의 재발견은 당시 방황하던 지식인들에게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을 제대로 가르쳐 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고 평가할수 있겠다."중광 이후 나철의 행적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가 공개됐다. 1911년 나철이 장지연(張志淵)에게 보냈던 편지 한통, 장지연은 을사늑약의 울분과 슬픔을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로 표현했던 언론인이었다. 나철이 그에게 보낸 편지 속엔 나철의 명함 한통과 북간도에서 보낸 또다른 편지 한통이 씌여 있었다. 바로 만주 길림성 시도구 지역에 대종교 시교당 제1호를 세웠다는 통고문이었다. 또한 이 소식을 장지연이 주필로 근무했던 경남일보에 기사로 실어달라고 현금까디 동봉했다. 비밀스러운 문건을 주고받았던 나철과 장지연은 어떤 관계였는가. 나철과 유근, 그리고 장지연 그들은 1907년부터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에서 활동하며 유대를 다져온 사이였다.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이었던 유근은 대종교의 핵심멤버였고, 장지연도 마찬가지였다. 나철이 홍보를 위해 일람한 지역은 단군왕검과 고조선 유적도 있었다. 나철은 당시 첨단매체였던 신문과 사진을 통해서 민족의식을 불러 일으키려 했던 것이다.
한편, 나철은 백두산과 만주일대를 답사하며 일제의 눈을 피해 대종교를 포교할수 있는 지역을 물색했다. 그가 주목한 곳은 백두산 바로 아래 마을인 청호마을. 지금도 주민 대부분이 조선족인 이 마을에는 대종교 관련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이경식 "실제 이곳이 나철이란 분이 대종교를 종파하면서 우리 민족의 역사의식을 고취시킨 지역이다."박찬욱 옌벤대학교 교수 "매일 우리 주민들을 모아놓고 상고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시는데 그게 아주 구수한 내용이었다. 몇 시간이 지나도 날이 어두운 줄을 모르고 상당히 재미있게 들었다."대종교의 역사교육은 서적 간행으로 이어졌다. 특히 신단실기는 단군왕검을 포함한 고대사를 중심으로 다룬 역사책이었다. 그당시 그들이 불렀던 애국가에도 민족의 고대사에 대한 자긍심과 만주를 포함한 우리 민족의 영토에 대한 주권 의식이 강하게 표현된다. 대종교의 이러한 역사교육은 신채호와 박은식의 복합사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국사의 기틀이 된 박은식의 한국통사, 단군조선과 발해를 우리 민족의 역사로 끌어안은 신채호는 조선상고사를 통해 나라가 망해도 우리 민족의 국혼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들의 사싱기조에는 대종교 제2대 교주였던 김교헌(金敎獻)의 역사의식이 고스란히 담겨있다.윤명철 동국대학 교수 "그들은 한문에 능통한 최고의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직접 발로 뛰며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유적을 직접 답사하고 글로 남기신 분들이기 때문에 일제의 잔재인 식민사관의 영향을 받았던 강단사학자들보다는 더 정확하다고 볼수 있다."
서광일 한신대학 교수 "대종교단이 편찬한 역사책 단군실기나 신단민사 같은 서적은 만주의 무장 독립운동 세력에 종사하는 항일투사들이 항상 품속에 가지고 다니면서 항일투쟁을 펼쳤다."소설가 조정래 "당시 우리 역사의 기틀을 확립한 박은식 선생같은 분도 대종교도였다는 것은 당시 대종교 사상이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애국정신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지 알수 있는 사실이며, 우리 민족의 의식에 대종교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깨달을수 있다."대종교의 역사의식과 사상은 만주의 타종교 세력에게도 영향을 미쳤다.만주 길림성 화룡현의 대표적인 기독교 학교인 명동학교, 시인 윤동주(尹東柱)와 문익환(文益煥) 목사의 모교로도 유명하다.
문익환 목사의 아우인 문동환 목사는 아직도 명동학교의 교가를 기억한다.
문동환 목사 "한 뫼가 우뚝코 은택이 호대한 한배검이 깃치신 이 터에 그 씨와 크신 뜻 넓히고 기르는 나의 명동"서광일 교수 "김약연(金躍淵)이 설립한 명동학교는 기독교 학교이긴 했지만 언제나 단군의 영정을 걸어놓고 수업을 했으며 예배당에도 언제나 십가자와 단군기를 함께 세워놓고 예배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만주에서 열렸던 문 목사 부모님의 결혼식은 또하나의 예다. 신랑과 신부가 대종교의 신성한 색인 검은 두루마리를 입고 예식을 올렸다고 한다.고 문익환 목사의 장녀 문영금 "거기는 단군의 아들, 딸들이 결혼을 한 거니까 을지문덕이나 이순신 같은 늠름한 아들을 낳으라고 하세요."종교의 차원을 넘어 하나의 민족이념이 된 대종교 사상은 만주의 한민족에게 급속도로 번져나갔다. 결국 나철은 체계적인 활동을 위해 포교제의 관할을 나누고 책임자를 파견했다. 북도본사는 이상설과 이시영, 동도본사는 만주의 무장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서일, 남도본사는 동아일보와 함께 백두산 성산운동를 펼쳤던 강우, 그리고 서도본사는 신규식과 이동녕이 이끌게 된다.대종교의 교세 확장에 당황한 일제는 총구를 겨누었다. 이른바 종교 통제령, 1915년 조선총독부에서는 모든 종교의 신고를 명령했다. 기독교와 불교는 종교로 인정했지만 대종교만은 포교를 금지하였다.미츠아키 박사 "타종교가 유사종교단체로 분류된 것에 비해 대종교는 민족주의자들의 소굴, 다시 말하면 후테이센징들의 아지트이고 이를 유사종교단체로 인정하는 것은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므로 철저한 탄압을 위해 유사종교단체로 인정하지 않았다."포교 금지령이 내려지고 일제의 탄압이 지속되자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나철이 찾은 곳은 구월산 삼성사, 매년 국가에서 단군제를 거행했던 사당이었다. 후에 북한의 부주석이 된 김두봉이 나철의 수행제자로 따라나섰다.1916년 8월 15일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대종교의 정신적 지주였던 나철,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대종교를 위해 민족을 위해 세계를 위해 암흑의 시대에 대한 죽음의 항거였다.
하지만, 나철의 죽음은 또다른 시작이었다.1918년, 무오년. 3.1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된 기미독립선언서보다 한해 앞선 무오독립선언서가 발표된다.
오세창 영남대학 교수 "무오독립선언서라고 하느 것이 1918년, 3.1 운동보다 앞섰고 도쿄의 2.8 독립선언보다 먼저 발표되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1919년 국내에서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서보다 앞서 만주에서 발표된 무오독립선언서, 우리에게는 생소한 역사적 사실이었다. 하지만 1948년 공보처에서 발행한 무장독립운동사나 조선근대사연표 등 여러 사료에는 분명히 그 연도와 내용이 표기되어 있었다.무오독립선언에는 39명의 만주 독립운동가들이 참여했다. 이들 중 25명은 대종교의 핵심 인물들이었다. "1919년의 기미독립선언은 비폭력 평화적 독립운동을 펼치자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1918년의 무오독립선언은 상당히 전투적인 내용이 들어있다. 즉 무력(武力)을 통한 반일항쟁(反日抗爭)을 펼치자는 내용이다."만주의 한민족(韓民族)이 똘똘뭉쳐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조국의 독립을 완수하자는 결의문은 곧 실제 무장(武裝) 항일투쟁(抗日鬪爭)으로 이어졌다. 1920년 6월 홍범도(洪範圖)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이 활약한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를 시작으로, 곧이어 김좌진(金佐鎭)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중심으로 전개된 10월의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는 일본군 사상자가 3천여명에 이르는 대승리였으며, 1933년 7월에 지청천(池靑天) 장군이 지휘하는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이 중국 의용군과 합세하여 일본군 1개 연대 병력을 전멸시킨 대전자령 전투(大甸子嶺戰鬪)로 만주의 무력항쟁(武力抗爭)은 그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이 주요 항일전(抗日戰) 승첩(勝捷)을 이끌었던 독립군 지휘관 세사람은 모두 대종교도였다.박환 교수 "만주에서 활동한 무장 독립운동 세력은 그 대부분이 대종교인들이었고 지도자들 역시 거의 대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었다."청산리 전투는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독립군 연합사단이 일본군 제19사단을 포함, 3개 사단 병력과 정면대결을 벌인 대접전이었다.박영석 전 위원장 "한국 독립군이 일본의 정규군을 격파했다는 승전보에 의해서 한민족이 조국 독립에 대한 자신감을 얻게 됐다는 점에서 이 전투의 의의는 매우 크다고 볼수 있다."
청산리 전투의 패배는 일제를 크게 자극했다. 일제는 만주일대에 군인들을 집결시키고 조선족 거주 지역의 가옥들을 불태웠다. 민간인들을 무차별 학살한 대대적인 보복이었다. 일제는 무력으로 인한 진압과 함께 아예 대종교의 싹을 제거하려는 시도를 한다. 1925년 조선총독부와 만주 군벌 장작림(張作霖)이 맺은 삼시협약에는 대종교가 강제해산되어야 할 불량단체로 명시되어 있다.미츠아키 박사 "대종교인들이 가장 강력한 반일항쟁(反日抗爭)을 전개했기 때문에 일본에게는 가장 골치아픈 존재였다."김동환 국학연구소장 "만주 탄압작전에서 대종교를 합법적으로 포교 금지시키기 위해서 만주 군벌 장작림의 세력과 삼시협정을 맺게 되는데, 서일을 중심으로 한 대종교도들의 무력(武力) 항일투쟁(抗日鬪爭) 집단을 축출하기 위한 내용이었다."이것을 해결한 사람은 박찬익(朴贊翊)으로 임시정부의 외사국장으로서 외교적 노력으로 삼시협정을 풀었다.어떻게 박찬익이라는 한 개인이 만주 군벌의 정책을 좌지우지할수 있었을까? 그의 영결식 사진에 등장한 이승만, 김구, 이시영과 같은 인물들을 통해서 그의 위상을 짐작할수 있다.또한 중국 외교에 있어서도 그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밀사 자격으로 삼시협정을 해결했던 것이다. 임시정부가 대종교 세력을 도운 데는 이유가 있었다.1994년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 5명 유해 봉환식, 헌사를 읽은 사람은 뜻밖에도 대종교 간부였다. 상하이의 임시정부와 대종교 간의 인연은 신규식(申圭植)으로 인해 비롯되었다. 나철과 의형제였으며 대종교 서도본사 책임자였던 그는 1911년 상하이로 건너가 동재사를 세웠다. 그는 이곳에서 정치, 외교적인 인맥을 쌓으며 임시정부의 발판을 마련했다.
신규식은 중국의 신해혁명(辛亥革命)에 참가했던 중국의 외교통이었다. 특히 손문(孫文)과의 친분은 임시정부가 중국 측의 승인을 얻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석원화 상하이 퓨난대학 교수 "손문과 신규식은 대한민국의 독립에 있어 매우 의견이 일치했다. 특히 신규식과 혁명당은 서로 협력하는 관계임을 알수있고 손문과 신규식이 서로 의지하고 믿었던 상황임을 알수 있다."상하이의 임시정부는 각지에 흩어져 활동하던 민족 독립운동가들을 불러모았다. 그중에서도 다수를 차지하는 세력은 대종교 인맥이었다. 1919년 제1회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29명 중 21명이 대종교인이었다. 대종교 정신을 기반으로 움직였던 임시정부는 단군관련 기념일을 국경일로 정했다. 당시 발행된 독립신문에는 임시정부가 개천절과 의천절 행사를 진행했다는 기사가 씌여있다. 이승만과 안창호 같은 타종교 세력들까지 참가하는 민족축제의 성격을 띤 행사였다.1941년을 기점으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면서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극으로 치달았다. 강제징병, 신사참배, 창씨개명 등 일제의 민족정신 말살정책으로 항일운동 세력의 입지는 매우 좁아졌다. 이 시기 우리의 글과 언어를 지키려던 한글 연구자들의 수난이 이어졌다. 이윤재(李允宰), 안재홍(安在鴻), 최현배(崔鉉培) 등 한글보급운동을 펼쳤던 학자들이 조선어학회 사건(朝鮮語學會事件)으로 옥고를 치뤘다.1942년 8년 함흥 영생여고 학생의 일기장이 빌미가 돼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단체로 검거됐다. 공판에 기부된 16명 가운데 이윤재와 한징은 옥사하고 최현배(崔鉉培), 이극로(李克魯), 정인보(鄭寅普) 등 나머지 16명은 징역 2년에서 6년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이 사건의 시작은 세간에 알려진 사실과 다르다.
김동환 연구위원 "당시 대종교 교주였던 윤세복(尹世復) 선생이 조선어학회 회원이었던 이극로에게 단군성가(檀君聖歌)의 가사를 주면서 작곡을 의뢰했는데 그 가사내용이 발견되면서 조선어학회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시 변호사였으며 조선어학회 사건의 직접 연루자인 이인(李仁), 그의 저서 '반세기의 증언'에는 사건의 전말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극로의 책상에 발견된 편지는 윤세복이 이극로에게 단군성가의 작곡을 의뢰하는 내용이었다. 왜 윤세복은 멀리 떨어져 있는 이극로에게 이런 일을 의뢰했을까?조선어학회의 초대 회장인 이극로는 대종교인으로 윤세복에게 감화를 받아 조국의 독립을 쟁취할 목적으로 조선어학회를 세웠다. 그렇다면 조선어학회와 대종교는 어떤 관계인가?1942년 만주와 흑룡강성에서 대종교 지도자들이 일제히 일본 경찰에 의해 검거된다. 임오교변(壬午敎變)이라 불리우는 이 사건 또한 이극로와 연관되어 있었다. 윤세복이 성전 건립을 위한 모금을 위해 이극로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 중 '일어나라, 움직여라, 한배검이 도우신다.'는 문구를 일제는 조선의 독립을 추진하는 반일항쟁(反日抗爭)의 일환으로 보았던 것이다. 일제는 한글보급운동 세력과 대종교를 같은 선상에 놓고 탄압했다. 그 이유는 한글보급운동의 선구자 주시경(周時經)의 사상과 행적을 통해 알수있다. 그는 조선왕조 양반들에게 암클, 언문이라 천대받던 훈민정음에 처음으로 한글이라 이름을 붙인 언어학자였다. 그는 한글의 발생 자체가 단군왕검의 강림과 관련되어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나철의 대종교 사상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이극로가 주축이 되어 결성된 조선어학회 또한 주시경의 사상을 기초로 하여 연구활동을 펼쳤다. 기독교 학교에서 세례까지 받았던 주시경, 그러나 그는 기독교를 버리고 대종교로 개종했다. 서양의 종교를 신봉하는 것 또한 그에게는 정신적 침략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서광일 교수 "우리 글자인 한글이라는 것 또한 대종교도들에 의해서 보급되었던 것이다. 주시경의 한글학회라든가 이극로의 조선어학회 활동 등도 다 대종교에서 연원하고 있다."실제 한글보급운동에 참여한 대부분의 인물들은 모두 대종교인들이었다. 주시경을 비롯해 지석영, 이극로, 이병기 등이 있었고 안재홍도 그중 하나였다. 한글학자와 정치인, 국학자로 명망이 높았던 안재홍 역시 매일아침 단군에 대한 경배를 하면서 남북통일을 기원했다고 전한다.한글연구를 펼치면서 조선사연구 등을 집필하면서 국학자로 활동했던 정인보, 한민족의 얼과 홍익인간을 기초로 한 그의 사상도 대종교 정신을 기반으로 두고 있다.
대표적인 한글학자인 최현배, 그는 민족갱생의 원리와 나라사랑의 길과 같은 저서에서 우리 민족의 이상형으로 단군왕검의 한배나라를 실현하자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은 그 막바지의 불꽃을 타오르고 있었다. 중국 점령과 함께 만주에 괴뢰정권을 수립한 일제는 동북아시아 전체를 손아귀에 넣으려는 진군을 계속했다.
같은 시기, 만주의 대종교 세력은 일제에 대항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 중심기지는 현재 중국의 동경성, 대종교 총본산을 이곳으로 옮기고 발해농장(渤海農莊)을 건설했다. 발해농장은 쌀 3천가마를 수확할수 있는 거대한 규모였다. 땅을 개간하고 뚝을 쌓는 대공사가 이루어졌다. 이동언 책임위원 "발해농장은 외형상으로 보기에는 농업을 통해 경제활동을 하는 곳으로 보기 쉬우나 사실은 무력항쟁(武力抗爭)을 펼치는 독립군에게 지급될 식량을 공급하는 독립운동의 장소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은밀한 사업의 핵심인물은 대종교 제3대 교주 윤세복(尹世復)과 안희제(安熙濟)였다.중외일보를 인수하여 사장이 된 부산의 갑부 안희제는 자금 조달과 교육을 담당했다. 그는 이곳에서 발해학교(渤海學敎)를 세우고 항일투사들을 길러냈다.이동언 책임위원 "당시에 북만주 지역에서 대종교 세력이 상당히 커져갔다. 그래서 일제가 당시에 주목했던 네가지 사항은 동경성 내에 있는 대종교 사민학원의 민족교육, 안희제의 발해농장, 옛 발해 황궁 터에 대종교 교인들에 의한 천진전 건축을 위한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
동경성은 대종교인들이 독립군을 양성하는 독립운동 기지였다. 결국 일제는 대종교를 제거하기 위한 임오교변을 일으킨다.
정영훈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1942년 12월에 발생한 임오교변인데, 일제는 대종교를 조선의 독립을 추구하는 독립운동 단체로 규정하고 전국에서 공권력을 동원하여 교주 윤세복 이하 대종교 지도자 25명을 체포, 혹독한 고문을 가하고 치안유지법을 적용하여 재판에 회부하게 된다."임오교변으로 체포된 대종교 간부들은 만주의 액하감옥에 수감되었다. 중국인들 가운데서도 악명높은 정치범 수용소였다. 높은 담장과 전기가 흐르던 철조망은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안으로 들어가자 감옥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에는 이 건물에 창문이 없었고 오로지 환기구만 있었다. 수감자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서라고 했다.
나철의 손부 이금산 "그곳에서 시아버지(나철의 장남 나정련)를 봤어요. 시아버지가 우리 며느리 참 예쁘게 생겼구나. 앞으로 떡두꺼비같은 손자 낳고 잘 살겠구나. 내가 출옥하게 되면 잘 해줄게.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때 일본 헌병들이 총 개머리판으로 우리 시아버지를 막 때려요. 얼른 들어가라고. 그러면 우리 시아버지가 보지 말아라. 울지말고 나 나올때까지 몸조리 잘 해라. 그러셨어요."현장 목격자 이춘연 "감옥에서 고문받다가 죽은 사람들을 소 달구지에 실어서 끌어내서 매장도 안하고 그냥 거리에 내다버려요. 그러면 까마귀들이 수십마리 날아와 그 시체들을 파먹는 모습을 많이 봤습니다."계속되는 중국인 관리자의 증언은 충격적이었다.중국인 관리자 "저기 보이는 화장실이 예전에는 물감옥이었다. 목 부분까지 물이 차게 만든 후 전기고문을 하던 곳이다."
일제가 악질 반일분자를 고문하던 수옥(水獄)임을 알려주자 후손들이 그곳에 절을 올렸다. 선친들이 이곳에서 죽음을 맞았기 때문이다.
나철의 손녀 나종애 "구덩이를 파서 물을 채운 후 사람을 그 속에 집어넣어서 손가락에 전기줄을 연결시키고 전기고문을 했다고 그래요."
액하감옥의 구조는 살인적이었다. 수감자들의 탈출을 막기위해 땅속 깊이 뿌리박은 담장과 전기가 흐르는 철조망, 폭 8m, 높이 50m의 감옥이 들어서고 그 옆에 수옥이 설치되었다. 깊이 2m의 구덩이에 물을 채우고 그 속에 수감자들을 가두고 고문을 가했다. 정영훈 교수 "임오교변은 일제의 종교 탄압史 가운데서도 사망자 규묘 면에서 가장 큰 사건이라 할수 있는데, 민족운동史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이런 사건이 있었는지를 모르는 분들이 참 많다. 아쿠튼 이 사건으로 대종교는 지도자의 태반을 잃게되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임오교변으로 체포된 대종교 지도자는 25명, 그중 안희제와 나철의 두 아들인 나정련(羅正練), 나정문(羅正紋), 권상익(權相益), 이정(李楨) 등 10명이 잔인하고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옥사했다. 일제 치하 종교탄압사건 중 가장 규모가 큰 사건이었지만 그들은 역사 속으로 잊혀져 갔다.액하감옥을 처음 찾은지 2년이 흘렀다. 다시 찾아간 그곳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중국 정부의 새로운 정책 하에 액하감옥은 모두 철거됐다. 그때를 되새길 흔적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을수 없다. 중국 화룡현에는 대종교 삼종사의 무덤이 있다. 대종교를 중광한 나철과 대종교의 두번째 교주 김교헌, 그리고 무장 반일항쟁의 주역 서일의 묘였다. 하지만 오늘날 이들을 기억하는 이는 과연 누구인가. 흐르는 강물인가. 아니면 매마른 대지인가.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망각 속에 이들 삼종사의 묘도 어느날 흔적없이 사라질지 모른다.
소설가 조정래 "그러한 상처를 더 확대 해석해야만 우리가 그런 비극의 역사를 다시 되밟지 않을 것이고 대종교의 업적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역사의 진실을 파헤치는 것만이 현재를 살고있는 우리의 책무이다."
첫댓글 오늘 이땅에 사는 우리에게는 후손에게 이러한 역사를 전수해야 할 책무가 있는데. 귀한 역사 기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