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2대 교황인 ‘바오로 6세’(재위: 1963. 6. 21.~1978. 8. 6)은 로마가톨릭의 성인으로, 본명은 ‘조반니 바티스타 엔리코 안토니오 마리아 몬티니’입니다. 1897년 9월 26일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지방 콘체시오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는데, 변호사였던 아버지 ‘조르지오 몬티니’는 일간지 ‘브레시아 시민’의 편집자로서 반교회적 사상과 투쟁하였고, 어머니 ‘주디타 알기시’는 교회 여성운동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허약한 체질에 수줍음까지 잘 탔지만 총명하고 신심이 깊어 1903년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체사레 아리치 학교에 들어가 1914년까지 공부한 후, 아르날도 다 브레시아 고등학교를 거쳐, 1917년 브레시아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집에서 통학을 해야 했습니다.
1920년 5월 29일 사제품을 받은 그는, 같은 해 11월 로마의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철학과 교회법을, 로마 대학에서 문학을 배웠고, 1922년부터는 교황청 외교관 학교에서 공부하게 됩니다. 이후 1923년 3월에는 잠시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 주재 교황대사 보좌관으로 파견되었으나 그곳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11월 로마로 돌아와 1년 동안 교회법과 외교학을 연구한 후 1924년 10월부터 교황청 국무원에서 근무하게 됩니다. 1925년에는 이탈리아 ‘가톨릭 학생연맹’의 지도신부로 임명되어 파시즘 학생연맹과 대립하여 싸우기도 했는데, 1931년에는 다시 국무원에 근무하면서 교황청 외교관 학교에서 교황청 외교사를 강의하였습니다.
1937년 12월 13일, 완벽주의자로 유명한 교황청 국무원장 ‘에우제니오 파첼리’ 추기경의 비서로 발탁되어 몬시뇰(가톨릭의 3품계 성직자 중 사제품에 해당하는 성직자가 받을 수 있는 명예 호칭)로 임명되었으나 1939년 파첼리 추기경이 교황 ‘비오 12세’로 선출된 후에는 새 국무원장 ‘루이지 막리오네’ 추기경을 보좌하게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포로 문제, 유대인 문제 등에 관심을 두고 활동하며 전쟁으로 집을 잃은 무주택자들을 위해서 헌신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미국가톨릭복지협회’와 교황청 간의 연락 업무를 담당하는 한편, ‘국제 카리타스’와 ‘국제 가톨릭 이주자위원회’의 설립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1954년 11월 1일 밀라노 대교구장으로 임명된 그는,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며 왕성한 사목활동을 펼치게 되는데, 많은 성당을 신축하고 보수하였으며 교회를 떠난 노동자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갖고 많은 작업장을 찾아다니는 등 복음의 사회교리를 설교하여 그들이 교회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앞장섰습니다. 그는 평신도 사도직과 문화 활동을 장려하고 가톨릭 대학교와 신학교에서 사회과학을 가르치도록 건의했으며, 그리스도교 노조 활동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습니다. 또한 청소년 문제에도 큰 관심을 두어 그들의 활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며 교회 활동 참여를 적극 유도하기도 했습니다.
1958년 12월 15일 교황 ‘성 요한 23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된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준비위원회와 실무 조정위원회의 임원을 맡아 공의회 제1회기(1962년)를 주관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1963년 6월 3일 요한 23세 교황이 선종하자 새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콘클라베’가 소집되어 6월 21일 여섯 차례의 투표 끝에 그가 새 교황으로 선출되게 됩니다. 당시 그는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고 합니다. “내 지위는 유일무이하다. 그렇기 때문에 엄청난 고독을 가져다준다. 이전까지 나는 외딴곳에 홀로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지금은 이러한 고독에 대해 완벽함과 경외심을 느끼고 있다.” 그렇게 ‘바오로 6세’ 교황이 탄생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곧 공의회 속개를 발표했고, 1965년 12월 8일 폐막 때까지 4회기를 이어가게 되는데, 마지막 회기에서는 지역 주교들에게 교황에 대한 자문 권한을 부여하는 영속적 기구로서의 ‘주교대의원회’의 설립을 착수하게 됩니다. 또한, 공의회의 후속 조치로 전례 개혁, 미사 중 모국어 사용,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대화, 이웃 종교인 및 무신론자들과의 대화 등 가톨릭교회의 현대화를 위한 개혁 작업도 추진함으로써 교회의 국제화를 계속 이어가도록 기초를 다졌으며, 동방 정교회와 개신교 등 다른 노선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역사적인 만남을 갖고 협정을 맺음으로써 기독교 교파 간의 일치와 관계 개선을 도모하게 됩니다.
그는 비행기와 헬리콥터를 타고 외국을 방문한 최초의 교황으로, 1964년 1월에는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고, 12월에는 세계 성체대회 참가를 위해 인도 뭄바이를 방문하였으며, 1965년에는 미국 뉴욕의 UN 본부를 방문해 평화를 호소하는 연설을 했고, 1967년에는 튀르키예의 이스탄불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1968년에는 남미의 콜롬비아를 찾아 보고타 세계 성체대회와 메데인의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 연합회 총회에 참석하기도 했으며, 1969년에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세계교회협의회 교회 일치사무국’과 중앙아프리카를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1970년에는 아시아를 방문하던 중 필리핀 마닐라에서 암살 시도를 겪는 등 위기를 맞기도 했습니다.
그는 1965년 세계주교대의원회의(주교 시노드)를 제정했으며, 재임 기간 중 추기경단을 꾸준히 늘리고 제3세계 출신을 발탁하는 등 가톨릭교회의 보편성을 구현하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했는데, 1969년에는 한국 최초로 김수환 스테파노 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산아 제한 등에 관한 견해는 서유럽과 북아메리카 등지에서 논쟁을 불러왔으나, 동유럽과 남유럽, 남아메리카에서는 환영을 받기도 했습니다. 한편, 그는 다수의 교황 문헌을 통해 교리를 해석하고 세상 속 교회의 역할에 대한 견해를 밝혔는데, 대표 문헌으로는 성체성사에 대한 전통적 교리를 재해석한 “신앙의 신비”(1965년)와 가난한 나라와 부유한 나라의 공동 발전을 위한 방법들을 제안한 “민족들의 발전”(1967년) 등이 남아있습니다.
공의회 이후 그는 전통주의자들의 반발과 국제 정세의 불안 등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평신도와 여성의 교회 참여를 증진하고 허례허식을 버리는 등 과감한 개혁 의지를 보여주었는데, 공의회 제3차 회기를 앞둔 1964년에는 여성 · 수도자 · 평신도의 공의회 입회를 허용했고, 1970년에는 여성 최초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를 교회 학자로 선포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그는 교황으로 선출될 당시 받았던 삼중관(교황이 공식 행사할 때 쓰는 관)을 팔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하기도 했는데, 그러나 1978년 8월 6일, 교황의 여름 휴양지인 이탈리아 라치오주 로마현의 카스텔 간돌포에 있는 별장에서 미사를 올리다 갑작스러운 심근경색으로 선종하고 말았습니다.
1993년 5월 1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를 ‘하느님의 종’으로 선포하였으며, 2012년 12월 20일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영웅적 덕행을 인정하여 그를 ‘가경자’로 선포하였고, 2014년 10월 19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교황 ‘성 요한 23세’와 함께 가톨릭교회의 현대화와 세계화를 이끈 주역인 제262대 교황 ‘바오로 6세’의 시복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시복식은 그의 재임 중 제정된 세계주교대의원회의(주교 시노드) 제3차 임시총회 폐막 미사 중에 이루어졌는데, 시복은 그의 전구로 일어난 기적을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5월 9일 승인함으로써 결정되었습니다. 그 기적과 같은 이야기는, 본인과 태아의 생명이 위험에 처해 낙태를 종용받던 미국 캘리포니아의 어느 임산부가 한 이탈리아 수녀에게 기도를 부탁했고, 그 수녀가 바오로 6세 교황의 상본(하느님이나 천사 또는 성인을 묘사하여 만든 카드 모양의 화상)과 제의(祭衣) 조각을 임산부의 배에 놓고 기도한 뒤 건강한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2018년 10월 14일 세계 주교대의원회의가 열리는 중에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자신을 시복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오르게 되는데,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성식 미사에서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바오로 사도처럼 새로운 경계를 넘어서, 복음 선포에서나 대화에서나 그리스도의 증거자가 되고,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을 바라보며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외향적인 교회의 예언자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평생을 보내셨습니다.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당신 스스로 지혜로운 길잡이 역할을 하셨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더불어 우리의 공동 소명, 곧 성덕을 향한 보편적인 소명을 살라고 오늘도 우리를 격려하고 계십니다. 대충대충 사는 것이 아니라, 성덕을 살라고 권고하십니다.”라고 그의 성덕을 높이 칭송했습니다. 성인의 축일인 5월 29일은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1920년 사제품을 받은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