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이씨 (固城 李氏) / 이희필(李希泌) 1325년(충숙왕 12년) 경 추정)∼ 1377년(우왕 3년). 고려의 무신. 시호: 충정(忠靖)
자호 : 시호 충정(忠靖)
고성 이씨 (固城 李氏) /이희필(李希泌) 1325년(충숙왕 12년) 경 추정)∼ 1377년(우왕 3년). 고려의 무신. 시호: 충정(忠靖)문중자료
공민왕 때 홍건적 침입 당시 개성수복에 공을 세워 1등 공신, 기해년 홍건적 침입 당시 또 다시 1등 공신으로 책봉되었다. 1367년(공민왕 16) 판개성부사로 지도첨의(知都僉議) 오인택(吳仁澤), 전 시중 경복흥(慶復興) 등과 신돈(辛旽)을 살해하려고 모의하다가 누설되어 지방에 유배되었다. 1371년 신돈이 주살(誅殺)된 뒤 풀려나 삼사좌사에 제수되었다. 1374년 삼사좌사(三司左使)로서 양광도상원수(楊廣道上元帥)가 되어 그 도의 군대를 거느리고 최영(崔瑩) 등과 함께 탐라를 평정하였다. 우왕이 즉위하자 삼사좌사로서 서북면상원수가 되었고. 1377년 동강도원수(東江都元帥)가 되었고, 전라도에 왜구가 침입하자 최영 등과 함께 무찔러 공을 세웠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이희필은 아버지 이교와 어머니 성산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초명이 이순(李珣)이며, 공민왕 20년 신돈이 제거된 후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후 이희필로 개명했다. 따라서 『고려사』에서는 대체로 이순의 이름으로 활약한 내용들이 많다.
부인 무안 박씨 사이에 2남 4녀를 두었다. 장남 은(慇)은 한성판윤을 지냈고, 차남 근(懃)은 좌부대언으로 있다가 조선 개국공신이 되었다. 이희필은 공민왕 8년 홍건적이 침입했을 당시부터 선봉에서 크게 적을 격파한 이후 승승장구하여 최영·변안렬 등과 함께 격동의 시기에 무장으로 큰 활약을 하였다.
1. 홍건적 격퇴와 공신 책봉
원나라 지배를 받던 고려는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반원정책을 실시했다. 원나라 지배를 받고 있던 중국 각지에서도 한족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홍건적이었다. 대륙에서 원나라 군대에 쫓긴 홍건적은 만주를 거쳐 고려로 밀려들었는데, 공민왕 8년(1359) 12월 모거경이 4만여 명을 이끌고 고려에 침입해 왔다.
고려에서는 이암을 도원수로, 경천흥을 부원수, 김득배를 도지휘사, 이춘부를 서경윤, 이인임을 각각 서경 존무사로 삼았다. 안우와 이방실·최영·이희필·이음 등은 일선 지휘관으로 투입되었다.
홍건적은 의주(義州)를 함락시킨 후 정주(靜州)와 인주(麟州)까지 점령했다. 고려 맹장 안우 등이 이끄는 군사들과 공방전을 벌인 가운데 적들은 서경에서 철수하여 용강(龍岡)과 함종(咸從)에 주둔하였다. 조직을 새로 편제한 고려군은 안우 등이 함종으로 진군하였으나, 우리 군사들이 패하고 말았다.
적이 정예 기병으로 쫓아오는 다급한 상황이 벌어지자, 대장군(大將軍) 이희필이 안우·이방실·김어진 등과 함께 뒤에서 그들을 막아냈다. 숙주(肅州)에 주둔하였던 적 400여 명은 의주로 되돌아갔다.
중랑장(中郞將) 유당(柳塘)과 낭장(郞將) 김경(金景)이 이 소식을 듣고 의주천호 장륜(張倫)을 불러 공격하였다. 정주성으로 들어간 적들을 유당 등이 진격하여 섬멸하였다. 함종전투 승리는 대장군 이희필의 공적이 적지 않았는데, 안우·이방실 등과 함께 한 활약이었다.
불리해진 홍건적은 수비에 급급했다. 우리 보병과 기병들은 포위하여 홍건적의 원수(元帥) 심자(沈刺)와 황지선(黃志善)을 사로잡았다. 적이 증산현(甑山縣)으로 물러나 수비태세를 갖추자 이방실이 연주강(延州江)까지 추격하였으며, 이희필을 비롯한 안우·김득배·김어진 역시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잇달아 도착하였다. 적이 궁지에 몰려 강을 건너다가 얼음에 빠져 죽은 사람이 거의 수 천 명이나 되었다.
사람과 말이 지치자 이방실은 공격을 멈추었다. 나머지 적들이 압록강 건너 달아나니, 이희필을 비롯한 이방실과 안우 등이 쫓다가 미치지 못하여 돌아왔다. 안우를 필두로 이희필·이방실 등의 무장들이 압록강에서 서경, 또 함종으로부터 압록강을 오가면서 9번을 싸웠다.
안우와 김득배가 이희필과 김인언을 보내 승첩을 보고하니, 왕이 노고를 위로하고 소환하였다. 4만이나 되는 홍건적들은 한 때 서경까지 점령하는 기세였지만, 안우와 이희필 등이 이끄는 고려군 반격으로 겨우 300명만이 돌아갔다.
이듬해 홍건적은 20만이 넘는 대규모로 또 침입했다. 1차 침입 당시 이희필은 종3품 대장군(大將軍) 신분이었으나, 2차 침입이 있던 공민왕 10년(1361)에는 예부상서 직임을 수행하고 있었다. 고려시대 예부(禮部)는 주로 과거시험을 주관하는 부서인지라 예부의 수장인 정3품직 상서(尙書)는 주로 지공거로 선임되던 관례가 정착되어 있을 정도로 문장에 능해야만 보임되는 자리였다.
따라서 무장이었던 이희필을 공민왕이 예부상서 자리에 앉혔다는 것은 그의 학문적 경지를 어느 정도 인정했다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런데 그가 예부상서로 있을 당시였던 공민왕 10년(1361)에 홍건적의 2차 침입이 있게 되자, 그 역시 최일선의 전장으로 투입되었음은 물론이다.
홍건적 무리 20만 명이 삭주(朔州)와 이성(泥城)을 침략해 오자, 도지휘사(都指揮使) 이방실이 판사농사(判司農事) 조천주(趙天柱) 등을 보내어 적을 박주(博州)에서 공격하여 패배시켰다. 이틈을 타 예부상서(禮部尙書) 이희필은 태주(泰州)에서 적을 맞아 공격하여 7명의 목을 베었다. 그럼에도 경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공민왕은 부득이 복주(福州:안동)로 피란하였다.
공민왕은 정세운(鄭世雲)을 총병관(摠兵官)으로 삼아 고려 군사를 지휘하게 하였다. 수시중(守侍中) 이암(李嵒)이 말하기를, “지금 적이 난입하여 임금과 신하들이 피난을 떠나니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고 삼한(三韓)의 수치입니다.
그러나 정세운 공이 먼저 대의(大義)를 선창하여 부월(斧鉞)을 잡고 군사를 일으켰으니, 사직(社稷)이 다시 안정되고 왕업(王業)이 중흥하는 것은 이 한 번의 거사에 달렸습니다. 오직 공께서는 힘을 다해주십시오. 우리 임금과 신하들은 밤낮으로 공이 개선하여 돌아오기만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정세운이 출정하려 하니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로 승진시켰다. 서경사람 고경(高敬)이 군영 앞에 와서 말하기를, “서경부의 백성들 가운데 적으로부터 탈출한 자가 무려 1만 명이나 되니 장수를 보내어 위로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정세운이 크게 기뻐하며 예부상서(禮部尙書) 이희필을 보내어 가서 그들을 위로하게 하고 경성으로 가도록 독려하였다.
공민왕 11년(1362)에 드디어 안우·이방실·김득배·황상·한방신·이여경·안우경·이구수·최영 등이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개경 동교(東郊)의 천수사(天壽寺) 앞에 주둔하였다. 이희필도 군사를 거느리고 천수사 앞에 주둔하였음은 물론이다.
총병관으로 지휘권을 잡은 정세운이 명령을 내려 진군하게 하니 이희필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이 경성을 포위하였다. 마침 비와 눈이 내려 적의 방비가 해이해진 새벽에 권희가 기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맹렬하게 공격하자 적들이 놀라 두려워하였다.
이희필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이 이를 틈타 사방에서 급습하였는데, 이성계도 휘하의 친병(親兵) 2,000명을 거느리고 먼저 올라가 크게 적을 깨뜨렸다. 해질 무렵에 적의 괴수 사유(沙劉)와 관선생(關先生) 등을 베니, 적의 무리들이 서로 밟고 쓰러져 엎어진 시체가 성에 가득하였다.
베어낸 머리가 무려 십만여 명이었고, 원나라 황제 옥새(玉璽) 2개, 금보(金寶) 1개, 옥인(玉印) 3개, 금·은·동인(金·銀·銅印), 금은(金銀) 그릇, 패면(牌面) 등의 물품을 노획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함께 말하기를, “궁지에 몰린 도적을 모두 죽이려고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이에 숭인문과 탄현문(炭峴門) 두 문을 열어주니, 잔당 파두반(破頭潘) 등 십만여 명이 달아나 압록강을 건너갔으므로 적이 마침내 평정되었다.
공민왕은 그 해 8월에 홍건적 재침에 대비하여 북방만이 아니라 고려 영토 전체에 대한 수비력을 대폭 강화했다. 이때 공민왕은 밀직사(密直使) 이희필을 도병마사(都兵馬使)로 삼았다. 당대 최고 관직이던 재추(宰樞) 반열 중에서도 핵심이었던 관직이 종2품 밀직사였다. 이희필은 이듬해 윤3월 밀직사의 최고 관직인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서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가 되어, 장암(長巖)으로 나가 지켰다.
공민왕은 개경을 수복한 공신들에게 대대적인 녹훈을 실시하였는데, 경성수복공신(京城收復功臣) 54명이었다. 밀직사사(判密直司事) 이순[희필]은 황상·한방신·안우경·최영 등과 함께 1등 공신 중에서 4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1등 공신이 된 이희필에게 내려진 특전은 공신각(功臣閣) 벽 위에 그의 초상화[圖形]를 걸고, 부모와 처는 세 등급을 뛰어 봉작(封爵)하며, 그 아들 1인에게는 7품의 관직을 주되 만약 아들이 없으면 조카나 사위 중 1인을 8품 관원으로 임명하였다. 구사(驅史)는 5인, 진배파령(眞拜把領)은 7인으로 하였고, 초입사(初入仕)를 허용하고 자손은 음직(蔭職)으로 서용(敍用)하며, 토지 100결과 노비 10구를 하사받았다.
이희필은 연이어 공민왕 12년 11월에 또 다시 1등 공신에 책봉되었다. 기해년(1차 칩입) 당시 홍건적을 물리친 공을 뒤늦게 포상한 것이었다. 모두 24명의 1등 공신 중에는 수첨의시중(守僉議侍中) 경천흥(慶千興), 찬성사(贊成事) 송경(宋卿)·안우경(安遇慶), 전 찬성사(贊成事) 이성서(李成瑞)에 이어 5번째로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이희필의 이름이 올라 있다. 기해년토적공신에 대한 특전도 이전과 동일한 수준이어서 많은 전답과 노비를 하사받았음은 물론이다.
두 차례의 1등 공신 책봉으로 이희필은 무장으로서의 탄탄한 입지를 굳혀갔다.
2. 덕흥군 침입 격퇴
공민왕이 즉위한 지 5년 후(1356) 반원개혁 정치를 추지하면서 친원파의 핵심이었던 기철(奇轍)과 그의 일당 노책(盧頙)·권겸(權謙) 등을 제거했다. 당시 고려를 배반하고 원나라에 가 있던 최유(崔濡) 등이 기철의 누이 기황후와 결탁하여 원나라를 움직이고 있었다. 이에 원나라에서는 1362년경에 공민왕을 폐하고 대신 덕흥군을 고려 국왕으로 세우려 하였다.
덕흥군의 몽고 이름은 탑사첩목아(塔思帖木兒)인데, 충선왕 셋째 아들이었다. 충선왕이 내쫓은 궁인(宮人)이 원나라 사람인 백문거(白文擧)와 결혼해 낳았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일찍이 중이 되었다가 공민왕이 즉위하자 원나라로 도피하였던 덕흥군은 그 쪽에서 따로 정부를 조직하여 신료들을 임명하기까지 했다.
공민왕에게 불만을 품은 원나라는 덕흥군(德興君)을 국왕으로 삼고 기삼보노(奇三寶奴)를 원자(元子)로 삼아, 요양(遼陽)의 군대를 출병시켰다. 최유(崔濡)가 원 황제에게 참소한 것들이 결국 먹혀들어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德興君)을 세훈 후 요양성(遼陽省) 병력을 일으켰고, 이가노(李家奴)를 파견하여 왕의 인장(印章)을 거두려고 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경천흥(慶千興)을 서북면도원수(西北面都元帥)로, 안우경(安遇慶)을 도지휘사(都指揮使)로, 이구수(李龜壽)를 도순찰사(都巡察使), 이희필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각 구역별 전투상황에 대비했다. 특별히 도병마사로 임명 받은 박춘이 이가노가 장차 온다는 말을 듣고 협상을 시도하자, 이가노 또한 두려운 마음을 품게 되었다.
박춘은 지름길로 휘하의 군사를 도체찰사 이희필의 둔소(屯所)로 보냈다. 이희필으로 하여금 이가노를 만나 그 역시 그와 같이 하라고 주문하였다. 경복흥 역시 덕흥군을 따르는 자들에게 격문(檄文)을 보내 회유를 시도했다. 도체찰사 이희필이 또 글을 보내어 최유·나영걸·유인우(柳仁雨)·황순(黃順)·홍법화(洪法華) 등을 설득하고 회유했다.
이렇듯 이희필이 준엄하게 회유하고 통첩했음에도 최유가 덕흥군을 앞세우고 압록강을 건넜다. 도지휘사 안우경(安遇慶)은 병마사 김지서와 옥천계를 시켜 요해처를 나누어 지키게 하고, 송분석은 의주의 궁고문(弓庫門)을 지키며, 호군 김득화는 10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압록강 가에서 기다렸다.
안우경이 몸소 사졸들의 앞에 서서 방천봉 등과 함께 7번이나 싸워 물리쳤다. 여러 번 싸웠으나 고려군이 불리하였고, 아군이 크게 패하고 달아나 안주(安州)를 지키니 적이 선주(宣州)로 들어가 주둔하였다.
공민왕은 찬성사 최영을 도순위사로 삼았고, 또한 이성계에게도 명하여 동북면에서 정예 기병 1,000명을 거느리고 이성(泥城)으로 가게 하였다. 도체찰사 이희필, 도병마사 우제·박춘 등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모이니 아군이 다시 떨쳐 일어나게 되었다. 적의 척후 기병들이 정주(定州)에 도착하자 안우경이 정예 기병 300명을 거느리고 기습하여 깨뜨리고 적장 송신길을 사로잡아 죽이고 조리돌리니 적은 기세를 잃었다.
이에 안우경·이구수·지용수 및 도병마사 나세는 좌익(左翼), 이희필·우제·박춘·이성계는 우익(右翼)이 되었으며, 최영은 중군(中軍)이 되어 진격하니 정주에 이르렀다. 당시 적이 이미 수주(隨州)의 달천(獺川)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성계가 앞장 서 크게 무찔렀다. 적이 교동(喬桐)을 도륙하자 경성(京城)이 크게 동요하였다. 왕이 안우경에게 명령하여 지용수·이희필과 함께 병마사 33명을 거느리고 동·서강(東·西江)에 나누어 주둔시켰으며, 승천부(昇天府)가 그들을 돕게 하였다.
이희필을 비롯한 최영·안우경 등 여러 장수들이 이를 격퇴시키자 최유가 강을 건너 달아났다. 서북면도원수(西北面都元帥) 경천흥과 도순위사(都巡慰使) 최영을 비롯하여 안우경·이희필·우제·이구수·지용수·박춘·홍사우 등이 개선하니, 왕이 유사에게 명령하여 왕을 영접하는 의례와 같이 하게 했다.
백관들로 하여금 국청사(國淸寺) 남교(南郊)에서 노고를 위로하는 잔치를 베풀게 하였다. 여러 장수들에게는 적신(賊臣)의 토지와 가옥 및 재물을 하사했다. 덕흥군은 곧바로 원나라에서 장형(杖刑)에 처해졌다. 끝내 고려로 압송되지는 않았지만, 다시는 고려를 넘보지 못하였다.
3. 신돈의 시대, 유배형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마다 이희필은 중앙 관직인 판밀직사사·판개성부사 등과 같은 직임을 유지한 채 도병마사 혹은 도체찰사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특히 고려 후반기는 출정군 규모와 내용 그리고 지휘체계가 공격 대상이나 막아야 할 외적의 성격과 지역에 따라 달랐기 때문이다.
공민왕 집권이후 반원정책 추진에 따라 기존의 만호(萬戶)·진무(鎭撫)·천호(千戶) 등에게서 군사 지휘권을 박탈함과 동시에 양계 지역 회복에 착수하여 병마사와 병마부사 체제로 변경하였다. 원나라 군사제도로부터의 영향을 배제하고 종래의 전통을 되살리려 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홍건적 또는 대규모 왜구의 침입을 맞아 출정군을 편성하면서는 고려의 전통적인 원수(元帥)·도병마사·병마사 등과 13세기에 주로 두어졌던 도지휘사(都指揮使), 원나라 영향을 받은 만호(萬戶), 그리고 도체찰사(都體察使)·도순찰사(都巡察使) 등이 뒤섞여 파견되었다.
도지휘사·도순찰사·도체찰사·도병마사·순무사는 주요 요충지에 군대를 거느리고 주둔하여 방어를 맡은 장수들의 직임이며, 도순문사에게는 군사 및 군량의 조달이, 도안무사에게는 각 군영을 왕래하면서 군정(軍情)을 살피는 직임이 맡겨졌으니, 이희필이 맡은 도체찰사는 주요 요충지에 군대를 거느리고 방어를 맡은 책임자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원수 임명에 일관성이 없었고, 그 아래의 지휘체계도 장수들의 직함이 다양하여 그다지 조직적일 수 없었다. 그 때문에 큰 불상사가 발생하기도 하였는데, 대표적인 예가 홍건적 토벌 영웅 네 명의 장수가 지휘체계와 관련된 갈등으로 결국 죽임을 당한 사건이다.
수많은 무장 세력들은 공민왕에게 충성 경쟁을 벌여야 했고, 전공을 시기한 평장사 김용(金鏞)의 간계로 홍건적 토벌 영웅이던 정세운·안우·김득배·이방실이 살해되고 말았다.
이처럼 최고위층 무장 세력들이 제거되자, 그 아래에 위치했던 무장들이 커 갈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측면도 있었다. 최영을 비롯하여 조민수·변안렬·이성계 등이 급부상하였던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이희필 역시 신흥 무장 세력군으로 성장해 갔음은 물론이다. 당시 신흥 무장 세력으로 성장해 갔던 축들을 보면, 최영·이희필 등과 같이 권문세족 출신들도 있었지만, 천한 사람들이 벼락출세 한 경우도 많았다. 한편 이성계와 같이 변방에서 올라온 무장 세력이나 고려 왕들이 원나라에서 귀국할 때 배행했던 변안렬 같은 부류도 있었다.
공민왕 집권 초기에는 원나라 간섭을 배제하기 위한 반원정책에 초점이 맞춰졌고, 그리하여 집권 5년 후에는 기철을 비롯한 골수 친원파를 제거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 침입과 흥왕사 난, 공민왕 폐위와 덕훙군 침입 등으로 주춤하게 되었다. 이런 격동기를 거치면서 국왕을 보좌하던 세력 기반이 무너지자, 공민왕은 신흥 무장 세력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배출된 공신의 면모를 보면, 흥왕토적공신을 비롯하여 신축호종공신, 수복경성공신, 기해격주홍적공신 등이 있는데, 1~2년 사이에 무려 349명에 이르는 공신이 책봉되었다. 중복인원을 제외하면 약 285명에 이른다. 그런데 이들 중에는 10여 명의 문신을 제외하면 모두가 무장들이었다. 이희필 역시 두 차례 연거푸 1등 공신으로 책봉되어 전결만도 무려 200결에 달하는 보상을 받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공민왕이 추진하던 개혁정치 의미가 퇴색될 위기에 놓이게 되자, 공민왕 14년경부터 신돈을 영입하여 해결하려 하였다. 이순[희필]이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직을 수행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신돈이 권력을 장악하자 공신과 명문세족들이 대거 숙청당했다.
최영이 고봉현(高峯縣)으로 사냥을 나가자, 신돈이 왕에게 참소하니, 왕이 이희필을 최영에게 보내 꾸짖은 후 최영을 계림윤(鷄林尹)으로 쫓아버렸다. 이렇듯 무장세력 제거는 공민왕의 막후 조정자 역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최영을 비롯한 경천흥·이귀수·박춘 등과 같은 야전 사령관들이 대거 숙청당했지만, 일부 무장들은 신돈 정권에 참여하기도 했다.
공민왕 15년에 왜구가 교동을 노략질하며 주둔하고서 돌아가지 않자, 개경에서는 큰 소동이 일어났다. 왕이 찬성사(贊成事) 안우경·평리(評理) 지용수·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이희필 등에게 33명의 병마사(兵馬使)를 거느리도록 했다. 그리고는 즉각 군대를 출동시켜 동강(東江)과 서강(西江) 및 승천부(昇天府)에 주둔하도록 명령했다.
거듭되는 내우외환 속에서는 무장 세력들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신돈정권에 참여한 무장들이라도 핵심 권력에서는 멀어져 있었다. 죽음을 무릎서고 홍건적을 격퇴시켰고, 이어 원나라 세력을 등에 업고 국경을 넘은 덕흥군 부대를 물리친 이희필을 비롯하여 안우경·우제·지용수·이성계 등과 같은 무장들이 국가 안위를 책임지고 있었지만, 신돈 정권과의 마찰은 피할 수가 없었다.
공민왕 16년 무장 세력들이 비밀리에 모여 신돈을 제거하려는 모의를 했다. 지도첨의(知都僉議) 오인택(吳仁澤)과 경천흥(慶千興)·목인길(睦仁吉)·김원명(金元命), 삼사우사(三司右使) 안우경(安遇慶), 전 밀직부사(密直副使) 조희고(趙希古), 판개성(判開城) 이희필(李希泌), 평리(評理) 한휘(韓暉), 응양상호군(鷹揚上護軍) 조린(趙璘), 상호군(上護軍) 윤승순(尹承順) 등이 참여한 모의였다.
이에 오인택 등을 순군(巡軍)에 가두고 또 신귀와 강원보를 가두어 국문하였으며, 오인택·조희고·경천흥·김원명·안우경·목인길을 곤장을 쳐서 유배 보내고, 그 집을 적몰하였다. 이와 함께 이희필도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나 신돈이 실각하였고, 수원에서 귀양살이 중이던 신돈을 처형한 후에야 최영과 이희필 등과 같은 무장들이 소환되었다. 그리고 복귀하였던 무장들은 정치 일선에 복귀할 수 있었다. 황상과 안우경·최영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이희필은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임명된 것이다.
공민왕 하반기의 정치구조를 보면, 제1재상부인 문하부(첨의사)와 제2재상부인 삼사의 재상들이 고위재상이었다. 신돈이 처형된 후 재상들의 면면을 보면, 문하부 시중에 경복흥, 수시중에 이인임, 문하부 찬성사에 한방신·황상·안우경·최영, 문하부 평리에 김속명과 유연, 정당문학에 이색 등이 포진해 있었고, 판삼사사에 이수신, 삼사좌사에 이희필로 구성되었는데, 한방신과 이색을 제외하면 모두 무장들이었다.
이색은 신돈 정권에 참여하였지만, 중도적인 대학자로 국왕의 신임이 두터웠기에 계속 기용되었다. 이때부터 이희필은 재추(宰樞)의 한 축을 형성하는 삼사좌사를 맡았는데, 우왕이 즉위한 후에도 이어져 그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약 7년 동안 삼사좌사 직임을 이어가는 기록을 세웠다.
삼사좌사에 제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이희필은 안주(安州) 상만호(上萬戶) 임무를 부여받아 오로산성(五老山城)을 공격했다. 찬성사 안우경 역시 서경도만호(西京都萬戶) 임무를 띠고 합세했다. 전투는 승리로 끝을 맺었다. 원나라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합랄불화(哈剌不花, 카라부카)를 사로잡아 돌아오는 공을 세웠다.
4. 목호의 난 진압과 우왕 즉위
원나라는 삼별초가 점거했던 탐라에 군민총관부를 설치하여 다루가치를 두었는데, 충렬왕 때 원 황실의 말을 탐라에 방목하였다. 그 후 충렬왕 21년(1295년)에 탐라가 고려에 반환되었지만, 원 조정의 목장 기능은 그대로 존치하였고, 이곳에서 말을 치는 몽골인들을 목호(牧胡)라 불렀다.
공민왕의 즉위와 더불어 반원정책이 시행되자, 목호와 고려 관리의 대립이 심해져 목호들이 고려 관리를 살해하거나 원 본국에 요청해 만호부를 설치해줄 것을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 원명 교체기에 명나라가 제주마(濟州馬) 2천 필을 요구하자, 제주 목호 지도자였던 석질리필사·초고독불화·관음보 등이 반발하였다.
공민왕 23년(1374)에 결국 목호들이 난을 일으켰다. 고려 조정에서는 탐라 토벌을 위해 정벌군을 편성하게 되었는데, 양광전라경상도통사(楊廣全羅慶尙都統使)에 최영(문하찬성사)을 필두로 양광도원수(楊廣道元帥) 이희필(상원수, 삼사좌사) 등 이름난 무장들이 대거 동원되었다.
이들은 과거 홍건적의 난과 왜구(倭寇), 최유의 난 등 잦은 전란을 진압하고 평정하는 과정에 참여하고 득세한 무인 세력으로써 전투 경험이 많을 뿐더러, 출정군으로 차출되기 전에는 모두 재상급에 해당하는 2품 이상의 관직을 거쳤던 고위층들이었다. 동원된 전함은 모두 왜구로부터 획득한 314척이며, 군사는 총 25,605명이었다.
고려의 토벌군은 8월에 나주(羅州)의 영산포(榮山浦)에서 군사들의 규율을 정했는데, 두려움을 앞세운 군사들이 진군하지 않으려 했다. 최영은 비장(裨將, 하급장교) 한 명을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목을 베고서야 군사들이 해안에 상륙해 목호와 전투를 치렀다. 범섬으로 달아난 목호를 진압하기 위해 최영이 외돌개 바위를 장군 모습으로 치장했다.
최영은 빠른 배 40척을 모아 범섬을 포위하게 한 뒤 정병을 거느리고 범섬으로 들어갔고, 궁지에 몰린 석질리필사는 그의 세 아들을 데리고 나와 항복하고 다른 목호 지도자 초고독불화와 관음보는 벼랑에 뛰어내려 자결하였다.
최영은 항복한 석질리필사와 그의 세 아들을 모두 처형하고, 초고독불화와 관음보의 머리를 베어 지병마사(知兵馬事) 안주(安柱)를 보내어 개경으로 보냈다. 9월 22일 명월포를 출발한 고려군은 역풍으로 회항, 10월 5일에야 추자도를 출발해 풍랑을 뚫고 11월 3일에야 목포 해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최영과 이희필이 여러 장수들과 함께 되돌아오니 왕이 이미 훙서(薨逝)하였다.
공민왕 시해 사건의 주모자는 환관 최만생과 자제위 홍륜이었는데, 홍륜은 이희필의 사위였다. 남양 홍씨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는 공민왕 때의 문하시중 홍언박(洪彦博)의 손자이며, 경상전라도순문사를 지낸 홍사우(洪師禹)의 아들인데, 공민왕 시해 사건으로 홍륜의 친인척들이 온전하게 살아남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희필에게는 화가 미치지는 않았다. 당시 사건 처리를 주도했던 막강한 권력자가 이인임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인임의 고모가 바로 이희필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후일 그의 조카딸이 우왕의 근비가 되었던 것도 이인임 영향력이었다.
탐라 정벌에서 돌아오자마자 이희필은 또 다시 서북면 상원수로 임명받았는데, 그 구체적인 임무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그 직전에 명나라 사신 임밀(林密)·채빈(蔡斌) 등이 돌아가다가 개주참(開州站)에 이르렀을 때, 호송관 김의(金義)가 채빈과 그의 아들을 죽이고 임밀을 납치하여 북원(北元)으로 도주하였고, 장자온(張子溫)·민백훤(閔伯萱)은 도망쳐 돌아왔던 사건이 있었다. 아마 이와 연관되어 이희필이 서북면 상원수로 파견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듬해 9월 이성원수(泥城元帥) 최공철(崔公哲)의 휘하 군사 200여 인이 반란을 일으켜 군사와 백성들을 살해하고 강을 넘어간 사건이 발생하자, 서북면도체찰사(西北面都體察使) 지윤(池奫)이 군사를 동원하여 후방에서 지원하겠다고 청하니, 삼사좌사(三司左使) 이희필(李希泌)은 도지휘사(都指揮使)로 임명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했다.
우왕 3년(1377)에는 왜구가 착량(窄梁)을 노략질하고 강화(江華) 또한 침략하니, 개경이 크게 동요하였다. 이에 최영(崔瑩)을 6도도통사(六道都統使)로, 삼사좌사(三司左使) 이희필(李希泌)을 동강도원수(東江都元帥)로 삼아 왜구를 소탕했다. 또 그해 9월 왜구가 영광(靈光)·장사(長沙)·모평(牟平)·함풍(咸豊) 등지를 노략질하고 또 해주(海州)·평주(平州)를 노략질하자, 우왕이 최영에게 월(鉞)을 주어 원수(元帥) 이희필(李希泌)·김득제(金得齊)·양백연(楊伯淵)·변안열(邊安烈)·우인열(禹仁烈)·박수년(朴壽年)·조사민(趙思敏)·강영(康永)·유영(柳濚)·유실(柳實)·박수경(朴修敬) 등과 함께 왜구를 격퇴하도록 하였다.
이희필은 야전사령관으로 그렇게 전장을 누비다가 그 해 겨울 12월에 생을 마감했다. 시호가 충정(忠靖)으로 내려졌다.
공이 죽자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조시(弔詩)로 이렇게 추모했다.
鐵城門閥盛 철성문중 공훈이 가득하고
公獨擅朝儀 나라위한 공의 뜻 분명함은
慷慨傾千古 의(義)를 행한 선현의 뜻 따름이라
風流盖一時 풍류는 한 시대를 주름잡고
尙書參省事 전곡 출납 삼사의 일이며
元首判戒機 수도 방위의 책임 원수부가
病客今衰甚 병세 위중타 이제 들었건만
菲然自詠詩 상을 당하여 절로 조시 읊조려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