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대표작
올해의 대표작은 '끝순이 저 물속에 있다' 와 '박상진 의사, 붉은 꽃보다 더 붉은 서른여덟에' 중 하나를 선택하여 실어주시기를
K 시인 댁에서의 한 철
김태수
서른 초입 섬 국민학교 선생 시절
경상북도 왜관읍 978번지 K 시인 댁에
월세를 살았다
이북 원산에서 내려온 시인이
결핵치료를 위해 오래 머물다 떠난 그 집에는
역시 결핵으로 학교 교장선생님을 빨리 끝낸
아버지가 사셨다
그렁그렁 쇤 목소리와
연신 뱉어내던 빠른 스타카토의* 잔기침 소리
오랜 만의 귀향은 늘 가슴이 서늘했다
명절이나 공일(空日)은 먼 남도(南道)에서
아내와 어린 두 딸 함께 와서는
겹겹이 쌓인 피곤을
문간방 늙으신 친할머니 곁에 눕혔다
날 밝으면 마스크를 하신 아버지
어린 두 손녀와 형님 댁 장손(長孫)을
한 대의 낡은 짐자전거에 빼곡히 태우고는
이웃 여학교 운동장으로 가시곤 했다
보지 않아도 안다 시멘트 의자에
비스듬히 누인 자전거처럼
비스듬히 아픈 몸 기대셨을 아버지
손주들 노는 모습에 환해지셨을 얼굴, 어쩌면
생애 가장 행복한 날이셨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슬프다
하릴없던 한낮은 양철대문 곁 작은 꽃밭
잘생긴 모과나무 아래 마당 경계석(境界石)
손바닥을 받침으로 종이에다 시를 썼다
모과나무도 껍질을 벗는구나
그 때 알았지만
매일 불편한 다리를 끌고 온
K 선생님 처제(妻弟)는 익어가는 열매를
하나둘 세었다
왜 그랬을까 단 한 개의 노란 모과도
단풍 한 잎도 허투루 두지 않았던 그녀 마음
아직 모른다
일천구백칠십 년대 나는 시인(詩人)이었고
가물가물 문단말석(文壇末席)의 어느 해
말 할 수 없는 해괴한 이름의
두 번 째 시집의 담장에는
‘보내주신 옥저(玉箸) 실로 감사하오며
정신적 양식이 되었다’고
부끄러워라 천릿길 한양에서 날아 온
관제엽서에는 굵은 만년필로 ‘K’
공책 첫 장에 붙여
매일 들쳐보던 으쓱함이 싫진 않았지만
당신의 집에 살고 있는
한 젊은 시인을 선생께서는 알지 못하셨다
시인의 외가(外家)가
소월(素月)의 땅 평안북도 구성(龜城) 바로 이웃
희천(熙川)이었음은
더더욱 모르셨을 것이다
얼마 후 그 집에서 친할머니 가시고
이태 후 예순 살 젊은 아버지도
가셨다 임종을 지키지 못했던 그 상처가 깊어
깜빡이는 조등(弔燈)
흐릿한 불빛에도 으스스 몸 떨린다
지금도 무섭다
이후 덕유령(德裕嶺) 산골 학교로 옮겼고
형네 가족들 새집 사서 그 집을 떠났지만
무슨 기연(奇緣)일까 그 곳에서
외할머니 이어 어머니마저 이승 뜨시자
평안도 내 외가(外家)가 송두리째 사라졌다
불행한 일이다
젊어 천방지축 온 세상을 떠돌던
그 한 때 내 가족은
모과나무 노란 열매와 단풍색깔 환장하던
경상북도 왜관읍
K 시인의 집에 살았다
* K 시인 : 1919년 함경남도 원산 출신의 시인, 초기에는 공산치하의 비인간적인 현실을, 이후 그리스도교 사상을 시화(詩化)하였다.
* 스타카토(staccato) : 한 음씩 매우 짧게 끊어 연주하는 음악의 기법
※올해의 대표작
끝순이 저 물 속에 있다
김태수
문방구집 끝순이 저 물속에 있다
작은 길 스무 걸음 위에 우리학교도 있다
학교 언덕배기 아래 우리 집 있다
오늘도 성주호(湖) 잔물결 찰랑이면
눈물이 난다 우리 일곱 살 그대로 있다
※올해의 대표작
박상진 의사, 붉은 꽃보다 더 붉은 서른여덟에
김태수
1. 붉은 꽃보다 더 붉은 서른여덟에
‘다시 태어나기 어려운 세상에
다행히 남자의 몸으로 태어나
한 가지 일도 못 이루고 가니
산이 놀리고 물이 비꼬는구나’
청산리전투에서 독립군이 대승한 지
채 일 년도 안 된 1921년 8월 13일 대구형무소
대한광복회총사령 박상진은
옥중(獄中) 절명시(絶命詩) 한 수(首) 남기고
혹독한 고문으로 망가진 두 팔을 힘껏 들어 올렸다
대한독립만세, 만세, 만세
그리고 담담히 교수대(絞首臺)에 몸을 맡겼다
설워라! 서른여덟,
붉은 꽃 보다 더 붉은 나이에
2. 될성부른 나무
1884년 경상도 울산 땅 송정마을에서
승정원 승지 박시규(朴時奎)의 아들로 태어나
큰아버지 홍문관 교리 박시룡(朴時龍)에게 입양된
박상진은 지천도 구분 못할 다섯 살 때
닭 모이도 안 될 돌투성이 나락을 동냥하였다는
낯선 거지 할머니의 푸념에
어머니를 졸라 성한 나락으로 바꾸었다
상진은 한 동네 김 포수 아들 동갑내기 장쇠와
친구가 되었다 양반 상민(常民) 따위의
차별은 처음부터 없었던 그는
어린아이였지만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될성부른 한 그루 나무였다
소년은 의병장 신돌석(申乭石)을 흠모하였다
고종 황제의 의병 해산 칙령에
잠시 울산에 내려 온 태백산 호랑이 청년 신돌석과
여섯 살 아래 소년 박상진은 의기투합하여
의형제가 되었다 그들의 만남은 운명이었다
고향에서 한학을 익히던 열다섯 살 때
백부(伯父)에게 청하여
종살이 마름들을 땅을 주어 내보낸 상진은
경주 최부잣집 가문 영백(永伯)과 소년 혼례 후
3년 뒤 낳은 외아들 경중을 두고
한성(漢城)으로 갔다
평리원 재판장을 지낸 왕산(旺山) 허위(許蔿)의 문하(門下),
신학문을 익혀 안목을 넓히라는 스승의 말씀을 좇아
양정의숙(養正義塾)에서 법률과 경제를 전공하던
1905년 11월 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이태 후
일제(日帝)에 의하여 쫓겨난 고종황제를 이어
순종이 즉위하자 팔도에서 의병들이 일어났다
그들 중에는 경상도 평해 땅의 의형(義兄) 신돌석도 있었다
스승 허위가 기울어가는 나라를 지키려
의병을 일으키자 제자 박상진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라 구하는데 나이가 무슨 소용이랴
정보를 수집하고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아버지를 설득하여 만든 큰돈으로
함께 할 동지들을 모았고 고향마을 불알친구
울산포수 김장쇠는
상진과 스승 허위를 오가는 전령(傳令)이 되었다
1907년 8월 초하루
일제의 강압을 견디지 못한 임금 순종이
대한제국 군대 해산을 명(命)했다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한 이 죽음 또한 무엇이 아까우랴!’
대대장 박승환이 자결(自決)하자
귀향길에 들었던 젊디젊은 군인들은 너나없이 돌아 와
반납한 총기로 일본군과 맞섰지만
주물(鑄物)을 부어 만든 구식 화승총으로
어찌 일본의 신식총과 대포를 이길 수 있었겠는가?
200여 명의 주검과 500여 포로, 살아남아 더욱 원통한
대한제국의 군인들은
팔도 각지로 흩어져 의병이 되었다
3. 한성부(漢城府)가 바로 눈앞인데
1908년 음력 섣달의 한성진공작전(漢城進攻作戰)에서
박상진의 스승 군사장 왕산 허위는
의병연합군 십삼도창의군(十三道倡義軍)을 진두지휘했다
양주 수택리에서 후속 의병들과 합류하여
망우리고개 청량리를 지나 동대문에서
일본군 주력부대를 친 후 통감부 탈환작전을 수행하러
속속 집결지로 모여들던
팔도 의병 몇 개 부대는 한성부 길목에 매복한
일본군에게
진작 풍비박산이 났다 이들이 거쳐 간
마을의 민초들은 잔학한 총칼에 주검이 되었고
그들이 마구 싸지른 불길은 명절이 코앞인 음력 섣달을
덮쳤다 순식간에 잿더미가 된 초가마을들
도대체 나라님은 어디 있는가 어디 있는가
원성(怨聲)마저 숨죽인 그 길고 긴 혹한(酷寒)의 밤
한성부 부근 마을
공포는 죽음보다 더했으리라
박상진은 양정의숙 학우들과 함께
십삼도창의군은 대한제국 군대임을
각국공사관에 통보하고
한성진공작전 선전포고 임무를 일본통감부에 전달한 뒤
전령(傳令) 김장쇠가 가져 올
군사장 허위의 명령서를 눈 빠지게 기다렸지만
기미가 없었다 이래서 안 되는데 초조해진 박상진이
바짝바짝 타 들어가는 가슴으로 나선
칼바람 부는 거리는
중무장한 채 길바닥에 깔린 일본군들과
그들이 구축한 진지에 버텨 선 커다란 포신(砲身)들
이를 어쩌나 내일이 작전 날인데 이미 엎질러진 물
동이 트자 시작된 전투는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정오 무렵 끝났고
눈 녹아 질퍼덕대는 거리에서 전사한 의병들
꽁꽁 언 얼굴에서 사무친 원한이 눈물 되어 녹아 흘렀다
이건 전투가 아니다 일만 명 의병 중
남은 군졸은 고작 이천팔백 명
죽을 힘 다해 망우산을 넘어 동대문 쪽으로 향한
300명 선봉대는 소식조차 없다 절망이다
한성진공작전이
이렇게 처참하게 끝날 줄을
아무 기약도 없었다 군사장 허위는
당신의 본거지 임진강으로
경상도 영덕에서 천리 먼 길 경기도
양주 수택리까지 온 한성진군작전 교남의병대장
상민(常民) 출신 경상도 의병장 신돌석과
함경도 포수 의병장 홍범도는
썩은 고름보다 더 추한 양반 유생(儒生) 의병장들의 반대로
결국 싸워보지도 못한 채
의제(義弟) 박상진도 만나지 못한 채
애태우다 각각 함경도로 영덕으로 내려갔다
끝내 십삼도창의군을 만나지 못하고 홀로 남아
실패한 작전을 한탄하며
며칠을 지새운 박상진은 동
대문에서 전사했거나 일본군에게 처형되어
즐비하게 너부러진 의병 시신들 속에서 찾아 낸
친구 김장쇠, 유해를 수습하면서
산자와 죽은 자의 상면(相面)이 이토록 참혹할 수 있을까
눈물 한 방울 흘릴 수 없었다 말을 잃어버린
박상진의 눈에서 이글거리는
시퍼런 불빛들
4, 아아, 군사장 허위와 의병장 신돌석
1908년 5월, 제2차 한성진공작전을 준비하던
군사장 허위는 임진강 유역 연천에게
일본군에게 붙잡혀 한성부로 압송되었다
나라가 없으니 제네바협약도 전쟁포로도 있을 수 없는 일
서대문감옥(西大門監獄) 제1호사형수
군사장 허위의 교수형(絞首刑)이 집행되었다
‘충의의 혼은 스스로 하늘에 오를 일
설마 지옥인들 어찌 너희들의 도움을 받을까’
왜승(倭僧)의 명복 기원을 끝내 뿌리친 채 눈을 감았다
늦가을 하늘에 먹장구름 덮이더니
한 줄기 비가 세차게 내렸다
이 일을 어찌할꼬?
위험을 무릅쓰고 서대문감옥으로 간 박상진은
간수를 달래 겨우 스승 허위의 시신을 수습하여
경상도 선산 고향 땅에 고이 모셨다
변장(變裝)하고 장례식에 온 신돌석 의병장과
검은 홰를 치는 호롱불 아래서 부둥켜안고 밤새 울었다
이 원통함을, 깊은 밤 그가 사라진 길을 지우며
대한제국의 운명처럼 짙은 어둠 내려
검은 상장(喪章) 드리우고
그 속에 잠겨버린 의형(義兄)의 뒷모습
오호라, 그게 마지막일 줄을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의 의병부대는
신출귀몰(神出鬼沒) 연전연승이었다 영덕전투를 끝으로
부모처자를 만나거나 농사를 위하여
의병들은 각기 고향으로 흩어지고 홀로 남은
신돌석은 식솔들을 이끌고 영양 일월산으로 숨었다
바깥세상 소식에 갑갑했던 그가
고종사촌 동생이자 부하 의병인 김상렬을 만나러
변복(變服)하고 간 고향 땅 영덕
그의 목에 걸린 엄청난 현상금에 눈 먼
김상렬 형제가 권하는 술이
독약이었음을 어찌 알았으랴 마다 않고
받아 마신 후 쓰러진 의병장에게 이미
신출귀몰은 수식어였을 뿐
온 세상이 얼어붙는 엄동(嚴冬)에 박상진의 의형(義兄)
태백산호랑이 신돌석
1978년 영덕에서 생(生), 1908년 11월 28일 영덕에서 몰(歿)!
서른한 살 한창 일가를 이룰 장(壯)의 나이였다
참혹하게 죽어간 의형(義兄)의 소식을 들은
의제(義弟) 박상진은 영덕 쪽을 보며 몇 날 며칠을 울었다
이 치받치는 설움 어디다 비견(比肩)하랴
뭐,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빌어먹을 이 말 누가 만들었는지
5. 대한광복회총사령이 되다
아버님 저 돌아왔습니다
독립운동을 도우러 만주로 갔던 청년 박상진이
집으로 왔다
켜켜이 쌓인 원한을 안고 집으로 왔다
스승 허위 선생과 의형 신돌석을 보낸 후
대한제국은 이제 나라가 아니었다 나라가 아닌 나라는
슬픈 나날들 뿐
그래 학문을 닦아 이 원수를 갚자 양정의숙을 마치자마자
판사시험에 합격하여 평양재판소 발령을 받았지만
다시 바람이 되었다 만주 중국 독립군을 찾아
휘이 한 바퀴 돌아 온 뒤
동지 김덕기, 오혁태의 이름을 따서 곡물상(穀物商)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열었다
이미 가산을 독립운동에 모두 써 버린
박상진의 상덕태상회는
배운 법률과 경제지식으로 합법적 군자금 모금의
마지막 거점이었다
스승 허위의 친형 허겸(許蒹) 선생이
동생 가족을 이끌고 가 중국 땅에서 운영한
신흥무관학교와 독립결사체 신민회를 지원하면서
오직 대한제국 국권회복은 무력뿐이라고 믿었다
그 해 중국은 중국동맹회를 결성한 쑨원(孫文)이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를 몰아내고
중화민국이 탄생되자
고국으로 돌아 온 청년 박상진은
1915년 음력 칠월 보름 백중날
일본 헌병과 순사들의 눈이 사방에는 번뜩이는
대구 달성공원, 백중놀이 구경꾼으로 가장하여 모인
동지들은 고헌(固軒) 박상진을
대한광복회총사령으로 추대하였다 이듬해
결의형제 김좌진 장군과 채기중, 노백린 등
많은 우국지사들도 힘을 모았다
6. 동포에게 경고하노니
1915년의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일제(日帝)가 경상도 경주, 영일, 영덕 3개 고을에서 거둔
세금을 우편마차로 옮긴다는 정보를 입수한
대한광복단원 장정 여덟 명은
보부상으로 위장하여 대구를 출발 경주 효현교(橋)가
저만치 보이는 산자락 내리막길에 매복한 후
세금 마차를 습격하였다
탈취한 8천 7백 원은 송아지 한 마리 5원이던 시절에 큰돈
그러나 의병들의 군자금으로는 배가 고팠다
독립군양성소를 만들어 군대를 양성해야한다
부자들에게 당부한 군자금을 거절한 친일부역자들
벌교 부자 서도현, 보성 박곡의 양재성을 처단하자
겁을 먹은 대구 부자 서우순은
일본 헌병들을 집안에 숨긴 후 광복단원들을 맞았다
체포된 광복회단원들과 총사령 박상진은
온갖 고문으로 반죽음 되었지만 옥고를 치른 뒤에도
임무를 멈출 수 없었다
일본천황으로부터 작위(爵位)를 받고
일본식민지에 앞장서던 악질 친일관리, 부자
친일예술가들
그 중 경상도 칠곡 땅 오태마을 장승원은
평의원 재판장 스승 허위의 주선으로
경상도관찰사가 되면서 굳게 약조했던
군자금 20만원은커녕
광복회의 헌금 요청마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어디 그 뿐이랴 일본 관헌(官憲)에게 밀고까지 했으니
침략자들에게 온갖 추태를 떨며
나라 땅까지 제 마음대로 였던 그의 만행은
소작인들의 원성이 되어 하늘을 찔렀지만
그는 일본인들 보다 더 악덕 지주였다
‘나라를 찾고자 함은 하늘과 사람의 뜻이 다 같은데
너는 왜 나라와 백성을 팔아 네 잇속만 챙기려 하느냐
그러므로 너의 큰 죄를 꾸짖고 동포에게 경고한다’
대저택에서 권세를 누리며 거들먹대던
매국노 장승원의 부끄러운 삶이
민족의 이름으로 마감된 후
친일족속들은 연이어 광복회의 이름으로 처형되었다
발칵 뒤집힌 조선총독부가 내린
광복회 말살령(抹殺令)에 기댄 지방 부자들은
군자금 기부에 더욱 몸을 사렸고
검거의 광풍 속에서 경상도 문경 부자 조시영과
안동부자 안승국의 집이 털리고
충청도 아산 부자인 도고면장 박용하를 처형하였다
한양 인사동 남일여관 주인 어재하(魚在河)는 여장부
친누이처럼 박상진의 뒤를 돌보았다
동지들의 만남을 위하여 새집도 마련하였다
아산 도고면장 박용하를 단죄한 뒤 체포되어
박상진과 한 날 한 시에 교수대(絞首臺)의 이슬이 된
광복회충청지부장 김한종(金漢鍾) 동지와
광복회부사령이 되어 만주로 떠나는 의제(義弟) 김좌진과
석별의 술잔을 나누는 자리
‘가을 깊은 압록강 너머로 그댈 보낸다
사심 없이 직무를 허락했으니
빛나는 용천검(龍泉劍)으로 부디 공을 세워
큰소리로 개선가를 부르자’
이태 후 1920년 10월 김좌진은
의형 박상진의 적극적인 군자금 지원으로
잘 훈련된 신흥무관학교 출신 독립군들을 이끌고
중국 길림성 청산리에서
일본군 3,300여 명을 일거에 섬멸한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전공을 세울 줄 어찌 알았으랴
7. 아아, 박상진
조선총독부의 검은 손들이 점점 죄어들자
만주로 피신하라는 동지들의 간곡한 권유도 물리친
박상진의 오직 한 가지 바람은
신흥무관학교가 키워낸 젊은 독립군을 위하여
내 땅에 남아 악착같이 군자금을 모으는 일이었다
광복회단원들을 서간도, 북간도 먼 러시아 땅
연해주까지 보내어
독립군 활동에 힘을 보태는 사이
자수한 단원에게 관리와 은사(恩賜)를 내린다는
방문(榜文)이 사방에 나붙었다
더러운 배신이 판을 치는 어느 날
안동 이동흠의 집에 숨어 있던 그의 방문을 두드린 이는
장쇠 죽은 후 박상진이 데려다 키운
그의 외아들 길복이였다
그가 목메인 소리로 겨우 꺼낸 기별(寄別)은
뭐라고? 어머니 녹동 정부인(貞夫人)께서 위급하시다고?
오늘 어머님께 가는 길이 마지막이구나!
한사코 만류하는 동지들을 두고
안동에서 녹동까지 사흘 밤낮을 걸었다
이미 상가(喪家) 주변에 진을 친 총독부 경무국의
무장 경찰과 헌병 300여 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군 지휘관은 말했다
‘짚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들 지라도
박상진은 나타난다
그는 효행을 중시하는 조선 양반의 후손이다’
경주에 들자마자 어머니의 부음(訃音)을 받았고
이튿날 1918년 2월 1일
상가(喪家) 빈청(賓廳)에서 검거된 광복회총사령 박상진
‘나는 죄인이 아니다 어디서 감히 무엄하게……’
일본군인들 어찌 포승을 지울 수 있었겠는가
상복(喪服)을 벗고
흰 바지저고리에다 두루마기를 걸친 후
자신의 말에 올랐다
가는 길은 말고삐를 쥔 길복이의 흐느끼는 울음소리와
일본군 군화소리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1918년에서 1921년까지 해가 세 번 바뀌었다
이런 걸 형극이라고 하는가 종로구치감옥은
물, 전기, 몽둥이질
고문이란 고문들이 모두 동원되었다
잃은 정신 위로 부어지는 차건 물들
그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가물가물한 의식 속에서도 불쑥 일어서는
대한 남아의 자긍심
‘나 박상진은 대한광복회총사령이다.
동지들의 이름이나 일러바칠
그런 위인으로 보이느냐 이 놈들아!’
말씀은 준엄한 채찍이 되어 그를 고문하던
악랄한 일본 순사들 가슴과 머리를 짓부수었다
사형언도를 받은 1919년 정이월
뼈까지 얼어 뚝뚝 부러지는 옥중에서
경술국치 후 10여 년간 연금되었던 고종황제의
승하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3월 1일 대한독립만세운동 소식에
‘이제야 내 조국의 독립이 보이는구나!’
베갯잇을 흥건히 적시는 눈물은 기쁨이었다
대한광복회총사령 박상진 그는
온갖 눈보라도 마다 않고 싸안은 독야청청(獨也靑靑)
한 그루 소나무였다
사형수가 되어 이감한 대구형무소에서
오직 박상진을 흠모하는
밀양청년 항일독립의열단장 김원봉을 알았다
박상진보다 14세 연하인 그는 신흥무관학교를 나온 후
친일 앞잡이와 일본 관리 암살에 앞장섰다
‘아아, 묶인 몸, 김원봉을 진작 만났어야, 만났어야 했는데’
한탄하던 광복회총사령 박상진은
의형을 구하겠다는 김좌진의 파옥(破獄)계획이
채 실행되기 전 1921년 8월 13일
대구형무소 교수대,
안타까워라 활활 타오르던 젊음을 곱게 접었다
채 마흔도 못 채운 서른여덟 살이었다
그리고 울산 송정 고향에서 가까운 경주 내남(內南) 땅
백운대(白雲臺)에 묻혔다 슬픈 일이다
8. 지금 이 나라는 정상인가
대한광복단이 처형한
경상도 칠곡 땅 매국갑부 장상원의 아들
장택상은 어찌 되었을까 해방 후
수도경찰청장이었다가 국무총리였다가
부통령 권한 대행이었다가
천하의 친일파 박정희 때는
가소롭다 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 위원장이었다가
친일부역자들의 이 승승장구는 역설(逆說)인가? 아니면
이 세상 꼬락서니가 역설인가?
이 부끄러움!
날마다 생시이듯 현몽(現夢)한
대한광복회총사령 박상진이 세상에게 묻는다
억눌리고 찌든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는 부자들
지금 있는가고?
반민특위를 해체한
이승만을 국부(國父)라고 믿는 무리들아
국립현충원에 묻힌 친일매국노들을 어찌할 건가고?
아직도 사대주의에 매몰되어 정신줄을 놓고 있는
그대들에게 다시 묻는다
친일세상이 싫어 고향을 떠나 간도에서 북해주에서
러시아 키르키즈스탄에서 백년 유랑인이 된
독립의병들 후손과
내 스승 왕산 허위 선생님의 가족들을 어찌할 건가고?
또 그리고 묻는다
이 나라를 누가 광복(光復)되었다고 말하는가?
아직도 친일이 판을 치는 이 나라는
이 나라는 과연 정상인가고?
※참고도서 : 김태수 공저, 『조국 광복의 횃불 박상진』, 울산교육청, 1996
(독립운동가 기림시선2, 「겨레의 큰 별들」)
※반구대암각화
야문 돌 하나 돌팔매 되어
김태수
온몸으로 묵묵히
반구대 바위를 조각(彫刻)하던
야문 돌 하나 오늘
돌팔매 되어 우리들 이마로 날아든다면
무섭다
사연댐을 허물건
임시로 제방을 쌓건, 생전 들어본 적 없는
키네틱 댐*을 만들건
대곡천(大谷川) 물 참방거리며
또 차오르는구나, 숨 막힌다, 숨이 막힌다
지랄같이 변죽만 울리지 말고
제발
막힌 숨통 좀 뚫어다오
*Kinetic Dam : 철골조에 플라스틱판을 붙여 물을 막는 가변형 댐. 수위 변화에 따라 높낮이 조절, 투명한 벽에 햇빛이 투과 이끼를 막을 수 있으나 2015년 문화재청의 3차례 모의실험이 실패, 막대한 예산만 낭비한 채 사업 중단.
※울산작가 2021 하반기
한 소녀를 기록하다
김태수
1. 한 소녀를 기록하다
서로가 사랑하면 정말 즐겁고 가슴 뛰는 일뿐일까? 그렇다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로도 사랑이 성립되는 것일까?
삶의 황혼기에 접어들어서인지 지나온 일에 대한 회상(回想)의 빈도가 평소보다 많이 늘어나고 있으며 그중 옷깃을 스쳤거나, 알고 지냈거나, 관심 또는 짝사랑했거나, 사랑을 받았건 간에 그 대상이었을 여성들에 관한 기억들로 스스로가 황당해할 때도 있다.
그러한 회상은 ‘아름답다’라는 감정이 지배적이나 그 배후에는 왠지 모르는 안타까움과 애잔함, 가슴 저미는 슬픔의 기억들도 있다. 이러한 기억들은 불면(不眠)을 불러오기도 하며 ‘왜 그랬을까?’하는 안타까움으로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한다.
그러한 기억들이 생겨난 곳을 갔거니 지나칠 때마다 떠올라 마음을 아리게 하는데 특이한 현상은 대부분의 기억들이 확대 재생산되기 일쑤라는 점이다. 왜 그럴까? 알 수 없다. 메말라 가는 감정을 일순 흩트리며 터져 나오는 감성의 덩어리들의 정체를.
한 소녀에 관한 기록
김태수
소나기로 개울물 엄청 불었고
반변천* 건너 신작로는 반나절 새 말랐는지
차창에 반사된
한낮의 땡볕은 수많은 빛줄기를 만들어
강 건너로 쏘아댔다
뽀얀 흙먼지 날리며 지나가는 버스
나는 스물한 살 총각선생이었다
여름방학을 지내러 집으로 오는 길일까
내(川) 건너 미루나무 그늘에
동그마니 서 있던 작은 키의 소녀가 내민
더 작은 손 꼭 잡고
물이 불어 거친 개울을
건넌다 밟히는 돌자갈도 아프지 않았다
산촌(山村)으로 날아 온
가수 이미자(李美子)의 섬마을선생님
소녀는 열아홉 살 섬색시
나는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선생님이었던가
부푼 소문은
삽시간에 온 동네 삽작을 기웃거렸고
얼마 후 그 학교를 떠났지만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 대신
산골은 하얀 찔레꽃만 수 없이 피었다 졌다
오래 잊었다
가슴 아린 그런 사랑이었다고 바보같이
천지를 뿌리 없이 떠돌았고
소녀는 어린 손자 등에 업고 어르면서
예순 나이의 고개를
넘고 있을 것이다 서러운 일이다
그 냇가, 희디흰 목덜미의 열여섯 살 예전처럼
내(川) 건너 이쪽으로
작은 손 힘겹게 내밀고 있을지도
그래서 오늘 소녀를 기록한다
이 부질없음
오오, 물살보다 더 빠른 세월 물끄러미
* 半邊川 : 낙동강 임하댐의 원류
(‘실천문학’ 발표)
1960년대 말, 경북의 북부의 시골학교에 첫 발령을 받았다. 집이 먼 관계로 주말에도 학교 부근만 맴돌았는데 이웃 학교의 발령동기들과 만나는 것이 큰 낙이었고, 그 장소는 주로 읍내 중국집이나 다방 등지였다.
여름방학의 어느 날, 친구들과의 약속으로 읍내에 가야 하는데 출발할 때쯤 소나기가 엄청 퍼부었다. 반변천이라는 물살이 빠르고 너른 개울을 건너야 하는 조바심을 가지고 갔더니 에상대로 물이 엄청 불어 있었다.
바지를 걷고 물을 건너려던 중 나를 태우고 가야 할 버스는 내 건너 신작로(新作路)를 뿌연 먼지를 날리며 떠나버렸다. 난감했다. 한 시간 후에 오는 버스를 기다리느냐 시오릿 길을 걸어가느냐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버스에서 내린 한 여학생이 불어난 물을 건널 엄두가 나지 않는지 내 건너 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여학생을 건너 준 후 한 시간을 더 기다려 읍내 가는 버스를 탔다. 안동에서 학교를 다니다 방학을 맞아 집으로 오는 여중학생이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물을 건너게 해 준 게 작은 문제를 일으켰다. 누군가 담임 반 교실 칠판에다 ‘○○는 선생님 부인’이라는 낙서를 해 놓았고 너무나 난감하여 황급히 지웠지만 소녀의 손을 쥐고 내(川)를 건너는 모습을 본 누군가가 장난삼아 한 낙서일 거라고 이내 잊고 말았다.
동네에 떠돌던 소문 또한 이내 사그라졌다. 이 후 다른 학교로 전근되었고, 또 이후 군대를 제대한 후 공교롭게도 다시 그 학교로 부임한 후에 고등학교 졸업반인 그 여학생을 다시 만났다. 여학생은 내 담임반 애의 누나였고 여린 감성을 가진 문학소녀였다. 학교를 졸업한 후 은행에 취업하였고 몇 번 다방을 갔던 기억이 있다.
문학에 미쳐 있던 나는 학교를 그만두고 대둔산에서 고시 공부하는 친구 곁에서 힘든 고행의 삶을 시작하였다. 그리곤 시인이 되었고 다시 교직으로 돌아와서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 여학생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순수하디 순수한 소녀와의 기억은 오랫동안 애잔하게 남아 있었고 ‘한 소녀에 관한 기억’이라는 시까지 쓰게 하였다.
교정시설 강의를 시작한 4년 전부터 차를 몰고 반변천(半邊川)을 지날 때마다 확대된 기억으로 마음을 아리게 한다.
‘그래서 오늘 소녀를 기록한다 이 부질없음
오오, 물살보다 더 빠른 세월 물끄러미’
아프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2. 그리운 옛날다방
근 이십 년 전쯤의 기억이다. 여행 중이었던 나와 아내 그리고 동행한 소설가 부부는 경상도 김천시의 한 시골다방 앞에 차를 세웠다. 칙칙한 다방 분위와 손님이라곤 우리들 4명뿐이었고 부인들의 말대로 커피 두 잔을 시켰다.
“여보, 두 잔만 시켜서는 안 되겠다. 커피 한 잔에 1,200원인데”
아내의 말에 벽에 붙은 차림표를 보았더니 분명 1,200원이었다. 그때만 해도 듣도 보도 못한 외국 이름의 커피숍들 때문에 도회 다방들은 거의 문을 닫았고 서민들, 특히 주부들은 돈이 아까워 비싼 커피숍엘 쉽게 들어가지 못했다. 그런데 커피 넉 잔을 모두 다 해도 커피숍이라는 곳의 한 잔 값도 안 되니 미안했던가 보다.
다방 종사원은 통통한 몸매의 중년이었다.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띤 그녀가 내온 커피는 온통 새까만 진액이었다. ‘시골 어르신들이 진한 커피를 좋아해서’ 그렇다면서 겸연쩍게 웃는 여인네를 보면서 1970년대 산골 청송의 다방을 떠 올렸다.
옛날 다방
김태수
친구를 만나러 그곳엘 갔다
친구는 면서기, 면사무소에서 제일 먼
다방 귀퉁이에 죽치고 앉아
낮에는 앞 공장에서 커피를 마시고
해거름엔 퇴근한 친구와 뒷 공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칠십 년대의 다방은 공장이었다
도회 공장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간 시골처녀들
산골 다방으로 밀려들었다
가득 채운 도라지위스키 몇 순배(巡杯) 돌고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뒷 공장에서
서러움 모두 내 것인 양 눈물 홀짝거리며 부서지던
그래도 착한 눈망울의 처녀들
기계 대신 찻잔으로 한몫 벌 거예요
내가 다니던 공장은 새벽부터 늦밤까지
보세요 졸다 바늘에 찔린 이 손가락
그래서 받는 돈이 얼만 줄 아세요 사장 놈들
한 잔 술값도 안 되는 것들
금의환향이라니요 그건 사내들에게나 있는 일
아기도 몇 번 지워버린 걸요
아직도 시골 어디에는 옛날 다방이 있다
한길까지 새어 나오는 뽕짝가락
사오십 대의 허리 굵은 장년 여인네 큰 엉덩이
실룩거리며 쓰디쓴 커피 나르고
찻숟갈로 잔 저으면서 이 독한 걸
이 독한 걸 마셔야 하나 고개 갸웃거리며
(‘실천문학’ 發表)
초임교사 시절 산골 읍내에는 젊은이들이 갈만한 곳이 없었다. 고작해야 당구장 등이었는데 술도 마시지 못하고 당구를 칠 줄 모르는 나는 늘 다방이었다. 어쩌다가 아는 어르신들이 들어오면 신문으로 얼굴을 가린 채 갈 때까지 숨을 죽이곤 했다. 지금으론 웃음밖에 나올 수 없는 그런 풍경이겠지만.
방학이나 토요일 오후에는 이웃 면사무소에 근무하는 문우(文友)를 만나러 가기도 했다. 그때 우리들 문학청년들은 글쓰기를 좋아하는 동무들끼리 모여 지금의 동인(同人)들처럼 서로의 글을 읽고는 등을 다독거려 격려하곤 했다.
버스에서 내리면 면사무소에서 제일 멀리 떨어져 있는 다방에 진을 쳤다. 다방이나 심지어는 작은 막걸리 집에도 앳된 처녀들이 많이 종사하고 있었는데 거의가 도회 공장 등지에서 일을 하다 배기지 못하고 빠져나온 이들이었다.
낮에 커피를 팔던 다방도 밤은 술집으로 바뀌었다. 그녀들의 말대로 다방은 앞 공장, 술집은 뒷 공장이었고 우리들이 젓가락 장단에 맞추어 부른 노래는 주로 이미자의 ‘황포돛대’나 ‘섬마을 선생님’이었다. 다방 아가씨들의 서러운 자신에 노래를 부르다 서로가 눈물을 훌쩍일 때도 있었다.
여느 때처럼 마음씨 푸근한 주인은 깨끗한 방에다 풀을 한 까슬까슬한 이불을 내어 우리들을 재워 주었으며 술도 덜 깬 해 뜰 녘 작은 툇마루에는 늘 하얀 쌀밥에다 콩나물해장국이 곁들인 상이 차려져 있었다.
어언 오십여 년 전의 일이다.
3. 그런 복숭아밭
요즈음 차를 타고 가다보면 ‘복숭을 팝니다’라는 화살표가 붙은 작은 간판들이 눈에 많이 보인다.
우리들은 그냥 ‘복숭’이라고 하지만 본 이름은 ‘복숭아’이며, 여름 과일의 여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색과 질감이 부드럽고, 과즙이 풍부하며 향이 달콤한 과일로 품종은 매우 다양하여, 전 세계에 약 3,000여 종이 분포해 있으며, 이 중 국내에서 주로 유통되는 것만 20여 종 이상이라고 한다.
복숭아는 과육이 흰 것을 백도, 노란색을 황도라고 하여 두 가지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이중 백도는 주로 생과로 황도는 주로 통조림용으로 이용된다고 하나 한 입 깨물면 아작아작 소리가 나는 과육이 단단한 복숭아를 좋아한다.
그런 복숭밭
김태수
퇴근하여 느릿느릿 걸어 닿은 하숙집
해가 중천이었다 오뉴월 따끈따끈한 햇살을 받아
눈부시던 푸르던 볏잎, 그땐 내 인생도 저 벼들처럼
푸르렀던가 하숙집 문고리를 당기면 늘 톡 떨어지는
종이학(鶴), 접힌 종이학 하나 펼치면
선생님 복숭 사 먹으러 가요 춘자(春子), 숙이(淑伊)
그렇다 내게도 그런 때가 분명 있었던가 보다
하숙집에서 한 마장 어둑어둑한 논둑길 따라
학교 지나 산모퉁이 또 한 구비 돌아가면
복숭밭, 때론 비 오는 날이면 말숙(末淑)이랑
마을도 가려진 산모퉁이에서 길게 뽀뽀도 하고
또 어쩌다 스물서넛 나이에 장가든 동무들처럼
그걸 왜 못했던가 이 쉰 나이도 중반의
허름한 길모퉁에 서서 생각할수록
너무 슬프다 그런 복숭밭 몇 개 두고 온 것이.
(‘실천문학’ 發表)
경북 산골학교의 초임교사 시절, 소위 새마을운동이라는 게 시작되기도 전이었던 1970년대 초반에는 시골 마을마다 처녀들이 많았다. 밤이 되면 총각교사 하숙집 문에다 작은 돌을 톡톡 던지다가 문을 열면 후다닥 도망치곤 했다.
또 어떤 날은 학교를 파한 후 하숙집 문을 열면 학 모양으로 접힌 쪽지가 톡 떨어졌고 ‘선생님 복숭 사 먹으러 가요 누구누구’라는 글씨가 쓰여 있기도 했으니 아름다운 초대에 젊은 교사의 마음이 어찌 설레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이내 냉철해질 수밖에 없었던 건 나는 교사이기도 했지만 작은 교회에서 신도들을 이끄는 전도사 대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인 생각과, 말과, 행동에 잘못이 있으면 금세 하나님께 잡혀 갈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맹신도(盲信徒)였다.
그 소녀들의 복숭아는 그 더운 계절처럼 마음을 화끈하게 잡아 흔들기에 충분한 유혹이었다. 그토록 환장하게 정겹던 말은 군대 제대 후 다시 그 마을로 갔을 땐 사그리 사라져 버렸다. 새마을운동, 소위 물질문명의 그림자가 마을에 땅거미처럼 내리던 1970년대 중반, 청바지와 기타가 사그리 쓸어 그 많던 처녀 총각들을 모두 도회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오랜 후, 다시 복숭아를 생각한다. 사방에 어둠이 내리는 비 오는 날 예쁜 소녀들과 종이우산을 함께 쓰고 복숭아밭으로 가면서 산모퉁이를 돌아 마을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리고, 그리고.
4. 청송군 어느 국민학교의 기억
교직생활 1년 만에 학교를 옮겼다. 전출이 안 된다는 장학사님을 설득하여 경북 청송에서도 가장 오지에 속하는, 다른 선생님들이 그곳을 요지부동(搖之不動)이라고 하여 근무를 기피하는 부동면 내룡국민학교에 겨우 발령을 받았다.
1970년 3월 1일, 3월임에도 불구하고 진눈깨비가 지천(地天)에 날리는 길, 길이라고 해 봐야 냇가 가장자리를 돌로 다져 만든 울툭불툭한 길을 이불 보따리를 둘러업고 3시간을 더 걸어 학교에 닿았다.
선생님들과 대강 인사를 한 후, 우선 숙소가 만만찮아 숙직실에 이불 보따리를 던져 놓고 옷도 벗지 않은 채 무슨 미역 같은 게 주렁주렁 달려 있는 천장을 쳐다보며 으스스한 기분으로 이불에 몸을 뉘었다가 이내 잠에 곯아떨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누군가가 가슴 위에 올라타서 마구 짓누르는 느낌에 눈을 떠보니 손발이 무엇에 묶인 듯 꼼짝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가슴을 누르며 히히 웃는 듯 한 그 무엇을 떨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주여, 이 마귀를 물리쳐 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했고 기도 덕분인지 얼마 후에 몸이 스르르 풀렸다. 무서움에 뻘뻘 기어 마루로 나갔고 옆방에서 자는 후배 선생님을 깨웠다.
내룡국민학교
김태수
장터 주막에서 국밥 한 사발 말아먹었다
아직 세 마장은 더 가야한다
발령통지서 따라
부동면(府東面)의 소나무 숲은 꿩꿩꿩
꿩 몇 마리 날리고 살여울 곁으로
구불구불 뚫린 눈 덮여 미끄러운 고갯길
꽁꽁꽁 얼음을 더했다
하루 한 대 막차는 눈길이라 면소에서 멈추고
이래서 요지부동인가 들쳐업은
이불보따리를 추스르며
한 일 년쯤 보내리라 길을 재촉했지만
한 일 년쯤만 보내겠다고 등신같이
숙직실 작은방에 잠시 누웠다 가위눌리고
기어 나와 덜 깬 잠
툇마루에서의 소름끼친 귀신울음을 울었다
솔숲을 빠져나온 바람들
왜 그러셨을까
막차로 온 아버지가 꺼낸 영문모를
입대영장을 따라 신 새벽 왔던 그 길 되돌아
떠나왔다 푸르디푸른
스물두 살의 눈물 뿌렸던 내룡국민학교
목이 너무 희어 눈이 시리던 동년배
어쩌면 동성동본일지도 삼 학년 처녀 김 선생
어언 오십 줄에 가까울 일흔 여명의 제자들
딱 보름 남짓 가르쳐 아른거리는 이름 몇
삼십 년도 훨씬 넘겨 그 곳엘 갔다
‘일천구백 년 학생 수의 급감(急減)으로’
인하여 잡풀 속에 묻힌 폐교 표지석(標識石) 하나
이미 버섯단지로 바뀐 운동장이며
창문틀만 겨우 남은 교실에서는 개 짖는 소리
소리, 가위눌렸던 사택 터 위로
아스팔트길이 지나고
수돗가에서 일행을 가리키던 늙은 아낙 몇
그중 제자가 있었을지도 몰라
도망치듯 차를 돌려 나왔지만
선머슴애 이름, 조숙했던 열여덟 살 반장애
종섭이 그리고 막차가 올 때마다
나를 기다리며 눈물 글썽였다는 처녀선생님
스물두 살 푸른 날에 두고 온
내룡국민학교, 억장이 무너지는 이 그리움.
나는 한 때 하나님을 맹신(盲信)했다. 교회의 일이라면 만사를 젖혀놓을 정도로 충실했으며 오지(奧地) 학교를 자원한 까닭도 친구 선생님이 맡아 운영하던 교회 때문이었다. 그 첫날 생각도 하기 싫은 낭패를 겪었다, 알고 보니 소위 ‘가위눌림’이었지만…….
며칠 후, 나는 교회에 붙은 작은 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중학교 입학시험이 있던 해의 6학년 담임인지라 하루 10시간씩의 수업을 마치고 깜깜한 밤길을 한 마을 학생들과 함께 개울 가장자리를 다져 만든 길을 걸어 한 마장쯤 떨어진 교회는 피곤한 내겐 먼 거리였다.
늘 교회의 방은 마을의 여자집사님들께서 따뜻하게 데워 놓았고 새로 지은 하얀 쌀밥에다 생달걀을 깨어 넣고 버터나 마가린을 한 숟갈 얹은 후 간장을 섞어 비벼먹고는 씻는 둥 마는 둥 잠자리에 들곤 했다.
어둑새벽이면 연세 든 집사님들의 통성기도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으며 교회당 안을 보면 예의 악보 없는 찬송가를 펼쳐 든 몇 분들이 몸을 흔들흔들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뒷자리에 앉았지만 비몽사몽(非夢似夢) 간이었으리라.
집사님들은 집으로 가시기 전 꼭 불을 한 번 더 넣어 방을 따습게 해 주었고 하얀 쌀밥도 잊지 않으셨다.
내가 근무했던 학교는 영덕으로 침입한 간첩들이 육지에 잠입하는 통로에 있었다. 3월 어느 날 간첩선이 영덕에다 그들을 상륙시켰고 우리 마을은 삽시간에 군인들 천지로 바뀌었다.
초저녁 어둠이 내린 어느 날 긴 수업에 만신창이가 되어 혼자 시내로 난 길을 걸어 교회로 터덜터덜 걸어가는 데 갑자기 산 쪽에서 ‘정지(停止)’하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시내 자갈에 납작 엎드렸다. 다시 ‘정지’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소총 장전하는 소리가 철커덕 들렸다. 나는 온 힘을 다해 ‘학교 선생이오’ 고함을 질렀고 마침 함께 매복을 하고 있던 학부모가 와서 학교에서 암호를 알려주지 않았는지 물었다.
그때 정지라는 소리는 암호였다. 즉 ‘정지’ 하면 ‘부뚜막’이라고 대답해야 했는데 교감선생님이 깜빡 잊고 말해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간첩이 들어와 작전을 하는데 왜 6학년 학생들이 늦은 저녁까지 중학 입시공부를 하게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리곤 얼마 후에 입대를 하기 위하여 그 학교를 떠나왔다. 오랜 후에 가 보니 학교 운동장은 버섯농장으로 교실은 개 사육장이 되어 있었고, 또 오랜 후에 그곳엘 갔더니 ‘청송얼음골크라이밍스쿨’인가 하는 깨끗한 얼음등반교육장이 들어서 있었다.
학교 부근에 ‘청송얼음골’과 함께 김기덕 감독이 ‘자신이 지은 업(業)은 결국 자신이 받는다’라는 의미를 일깨워 준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촬영하여 이름을 알린 ‘주산지’라는 큰 연못도 있었으나 그때는 전혀 알지를 못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