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선비가 들려주는 대구의 선비 & 문중 이야기
19. 【순천박씨】
아무리 님이라 한들 님 마다 다 쫓으랴, 사육신 박팽년
글·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전 성균관청년유도회 대구광역시본부 사무국장)
프롤로그
[사진57 취금헌 박팽년 선생 흉상] 달성 역사 인물동산(출처:송은석)
[사진58 묘골 원경] 정남향인 묘골은 나지막한 와룡산에 의해 360도 에워싸여 있다(출처:송은석)
관광으로 이름난 도시에는 그 도시를 대표하는 인물 스토리텔링이 있기 마련이다. 이것은 문화관광에 있어 인물 스토리텔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한 예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물 마케팅’ 혹은 ‘인물 스토리텔링’의 성공조건은 무엇일까? 의외로 간단하다. 어떠한 형식으로든 도시와 인물 사이에 연결고리만 있으면 된다. 물론 이 주장에 대해 그 연결고리가 너무 느슨해서는 안 된다는 이견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실상은 꼭 그렇지도 않다.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도시 ‘베로나’. 그리고 춘향이와 이몽룡의 도시 ‘남원’. 이 두 도시는 그야말로 인물 스토리텔링으로 먹고사는 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남원은 ‘춘향이’ 마케팅으로 재미를 톡톡히 본 모양이다. 근래 들어 ‘흥부의 도시’, ‘변강쇠의 도시’로까지 인물 마케팅에 공을 들이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하지만 ‘로미오·줄리엣·춘향·흥부·변강쇠’는 모두 실존인물이 아닌 작품 속 가상인물이다. 그렇다면 다음의 이 인물은 어떠한가!
‘사육신 박팽년’
이 인물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가 알고 있는, 이른바 전국구 인물이다. 이번 이야기는 사육신 박팽년 선생과 우리 달성과의 ‘관계 설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다들 무심코 놓치고 있었던 ‘박팽년’ 선생과 ‘달성’과의 관계, 그 놀라운 사실 속으로 한 번 들어가 보자.
사육신(死六臣) 박팽년
옛 선비들은 자신 혹은 타인을 남에게 소개할 때 어느 정도 정형화된 ‘자기소개서’ 양식이 있었다. 마치 요즘도 ‘자기소개서’ 양식이 있듯이 말이다. 박팽년 선생의 소개를 옛날식 ‘자기소개서’ 양식에 맞춰 작성하되, 문투는 요즘 식으로 고쳐보면 어떨까? 아마도 다음과 같지 않을까.
-----------------------------------------------------------------------
선생의 자는 ‘인수’, 호는 ‘취금헌’, 시호는 ‘충정’이다. 1417(태종17)에 태어나 1456년(세조2)에 졸하였다. 본관은 순천으로 고려 개국공신인 삼중대광 박영규와 고려에서 정승을 지낸 평양군 박난봉을 먼 선조로 한다. 중시조인 고려 보문각 대제학 박숙정이 고조이며, 증조는 고려 전서 박원상이다. 조는 사후에 이조판서에 증직된 박안생이며, 부는 이조판서 문민공 박중림이다.
선생은 박중림의 다섯 아들 중 장남으로 지금의 대전시 동구 가양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총기로 세상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15세인 1432년(세종14)에 생원시에 합격, 17세인 1434년(세종16)에 알성문과에 급제해 집현전 학사가 되었다. 31세인 1447년(세종29)에 중시에 합격하여 사가독서 및 청백리에 뽑혔다.
선생은 문장·도덕과 경학에 밝았으며 서화에도 재능이 있어 세종 때의 각종 편찬사업에 직접 관여했다. 특히 선생은 집현전 학사 시절 ‘경술·문장·필법’이 모두 좋아 동료 학자들로부터 ‘집대성’이라는 최고의 칭호를 얻기도 했다. 40세인 1456년(세조2)에 단종복위사건의 주모자로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무려 270여년이 지난 1691년(숙종17)에 이르러 신원 복관되고 비로소 충신으로 평가되었다. 1758년(영조34)에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충정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선생을 추모하는 서원·사우 및 유적지로는 ‘사육신묘(서울)·유허지(대전)·불천위사당(충주)·창절서원(영월)·박팽년세거지(세종)·동학사 숙모전(공주)·육신사(대구)·충곡서원(논산)·숭절사(대전)·박팽년집터(서울)’ 등이 있다.
----------------------------------------------------------------------------
[사진59 충의사(忠義祠)]
박팽년 선생의 아버지인 박중림 선생의 사당으로 육신사 경내에 있다(출처:송은석)
한편 선생의 부친인 박중림은 세종 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라·경기의 관찰사를 지낸 인물이다. 문종 때는 공조참판으로 명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왔으며, 집현전·예문관·수문전 대제학을 역임했다. 또한 집현전 학사로 이름을 날렸던 박팽년·성삼문·하위지 같은 출중한 인물들을 아들과 제자로 두었으니 그야말로 당대의 위인이자 대학자였다. 이렇듯 박중림·박팽년 부자는 조선전기 ‘세종·문종·단종’ 조에서 왕좌지재(王佐之才·왕을 보필하는 뛰어난 인물)로서의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었다.
하지만 1456년(세조2) 음력 6월, 이들 부자를 비롯한 그 가족들은 참혹한 화를 당했다. 부자를 포함해 박팽년 선생의 4명의 남동생과 3명의 아들, 이렇게 3대 9명의 남자가 모두 죽음을 당했던 것이다. 또한 이들의 부인·며느리·딸 등은 모두 관청이나 공신 집에 노비로 예속되었다. 세상은 이 끔찍한 일을 ‘사육신사건·단종복위운동·병자사화·병자화란’ 등으로 부르고 있다. 이번 이야기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육신 사건의 전말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한 번 살펴보자.
1455년(세조1) 수양대군은 자신의 나이 어린 조카이자 조선의 제6대 임금이었던 단종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자신이 직접 조선의 제7대 임금인 세조에 등극했다. 그리고 1년 뒤인 1456년(세조2) 6월, 드디어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이른바 사육신으로 일컬어지는 여섯 충신에 의해 비밀리에 추진 중이던 단종복위운동이 그만 좌절되고 만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사육신은 물론 약 200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죽음을 맞았다. 이 사건이 일어난 해가 병자년이므로 ‘병자화란’ 또는 ‘병자사화’라고도 하는 것이다.
익히 잘 알려져 있다시피 사육신 사건은 ‘김질’이라는 한 밀고자에 의해 거사를 일으켜보지도 못하고 실패한 사건이다. 당시 세조는 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단종을 모시고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연회를 열 계획이었다. 이때 연회장의 별운검[경호원]으로 선정된 성승·박쟁·유응부 등이 연회장에서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다시 왕위에 복위시킨다는 것이 이른바 단종복위운동의 전모였다. 하지만 희대의 모사꾼 한명회에 의해 별운검 배치계획이 그만 취소되고 말았다. 연회장이 너무 좁다는 게 그 이유였다. 여하튼 이렇게 거사에 차질이 생기자 거사에 동참했던 인물 중 한 명인 ‘김질’이라는 자가 그만 변심을 하고 말았다. 바로 이 김질의 밀고로 인해 단종복위운동은 실패하고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이 일에 연루되어 죽음을 맞았던 것이었다.
당시 박팽년 선생은 국문을 받은 후 옥중에서 졸하였고, 류성원 선생은 자신의 집 사당에서 자결하는 등 무려 200여명이 이 사건에 연루되어 죽음을 맞았다. 특히 사육신들의 경우는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시신을 찢어 죽이는 거열형(車裂刑)을 받았다. 사육신들의 머리는 저자거리에 내걸렸고, 찢어진 사지는 팔도에 내려 보내 백성들이 보게끔 하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육신을 포함한 주모자들의 경우는 3대를 멸족시켜 완전히 그 종족의 씨를 말려버렸다. 앞에서 잠깐 언급되었지만 3대를 멸족시킨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박팽년 선생의 경우를 예로 들어 한 번 살펴보자.
선생의 부친인 박중림은 당시 이조판서의 신분으로 단종복위운동에 직접 가담했으니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선생의 동생들인 ‘박인년·박기년·박대년·박영년’ 4형제도 죽음을 당했으며, 선생의 3아들인 ‘박헌·박순·박분’ 역시 죽음을 당했다. 이처럼 남자들의 경우는 3대에 걸쳐 9명이 모두 죽음을 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 ‘대명률[중국 명나라 법전]’에 의거해 주모자들의 여성들은 공신 또는 관아의 노비로 보내졌다. 그런데 기록에 의하면 당시 의금부에서는 이 일을 두 달이 넘도록 시행하지 못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의금부 관헌들이 조정의 중신이자 한때 자신들의 동료이기도 했던 인물들의 처·첩·딸·며느리들을 하루아침에 노비로 만드는 일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세조가 직접 나서 공신들에게 분배할 명단을 작성했으니 이로써 충신·열사의 여인네들이 모두 노비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쯤에서 한 가지 의문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지금까지 살펴본바, 사육신의 경우는 후대에 와서 양자를 따로 세우지 않고서는 그 대를 이어갈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참 묘한 일도 다 있다. 사육신 여섯 어른들 중 박팽년 선생은 ‘양자’가 아닌 분명한 ‘혈육’으로 지금까지 대를 이어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560여 년의 세월을 그것도 우리지역인 달성군 하빈면 ‘묘골’에서 말이다.
묘골은 ‘묘(竗)골’ · ‘묘(妙)골’ · ‘묘(廟)골’로 설명이 가능하다
필자는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이다. 2016년 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골 ‘육신사’와 구지면 도동리 ‘도동서원’에서 해설사로 근무하고 있다. 또 필자는 ‘문화유산방문교육교사’이기도 하다. 지역의 초·중·고등학교에 나가 문화유산을 주제로 수업을 하거나 혹은 현장답사를 진행하기도 한다. 2016년도에는 인근 대구·경북의 전통마을 4곳을 주제로 수업을 진행했다. 물론 이중에는 ‘묘골마을’도 포함이 된다.
특히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묘골마을을 주제로 교실수업을 할 때, 필자는 수업시작과 동시에 칠판에다 큰 글씨로 ‘묘골·묘골·묘골’이라고 ‘묘골’을 3번 쓴다. 오늘 수업의 핵심 키워드 3개를 먼저 제시하는 것이다.
“묘골은 ‘묘골·묘골·묘골’로 설명이 가능해. 이미 눈치를 챈 것 같네. 맞아. 한글로는 같지만 한자로는 다 다르게 쓸 수가 있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한자지만 우리가 한자를 쉽게 놓아버리지 못하는 까닭이 바로 이러한 한자의 묘한 매력 때문이지···”
처음에 한글로 쓴 ‘묘골·묘골·묘골’ 옆에다 다음과 같이 각각의 한자를 덧붙인 뒤, 계속 이야기를 이어간다.
‘묘골[竗洞]·묘골[妙洞]·묘골[廟洞]’
마을 터가 묘하다고 해서 ‘竗洞’
[사진60-1 묘골 모형도. 사육신기념관](출처:송은석)
[사진60-2 1970년대 초 묘골. 사육신기념관]
사진 맨 뒤쪽에 태고정(우)과 관리사(좌)가 보인다(출처:송은석)
“‘竗’ 이 글자는 ‘땅이름 묘’라는 한자야. 특정 지역의 땅 모양이 묘하게 생겼을 경우, 이 글자를 붙이는 것이지. 실제로 묘골은 땅 모습이 묘하게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야. 풍수지리에서는 이곳 묘골을 용이 누워있는 땅으로 보지. 그래서일까. 이 묘골을 360도 빙 둘러싸고 있는 야트막한 야산의 이름도 와룡산이란다. 실제로 마을 바깥에서 보면 이곳에 동네가 있는지 없는지 전혀 알 수가 없어. 그만큼 묘골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인 것이지. 게다가 동네가 남향이고 산으로 둘러싸인 탓에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기까지 하니 정말 묘할 묘자 묘골이야.”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면서 칠판에 그럴듯한 솜씨로 ‘풍수형국도[땅 모양을 그린 그림]’ 하나쯤을 그려주면 금상첨화다. ‘백문불여일견’이라. 시각적인 정보가 곁들여져야 이해가 쉽고 빠르기 때문이다. 여하튼 3개의 키워드 중 첫 번째 키워드 ‘竗’는 가급적 짧게 이야기하고 넘어간다.
마을의 유래가 묘하다고 해서, ‘妙洞’
[사진61 의관장묘(상), 박일산 부부묘(하)]
의관장묘(衣冠葬墓)는 박팽년 선생의 둘째 아들부부의 묘이다. 둘째 며느리인 성주이씨의 체백과 남편인 박순의 의관[옷과 갓]이 합장되어 있다. 박일산[박비]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박팽년 선생의 유복손이다(출처:송은석)
[사진62 조선왕조실록 선조36년(1603) 4월 21일 기사]
오른쪽에서 8번째 줄 가운데 부분에서부터 두 줄로 유복손 박일산[박비]에 대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등재되어 있다. ‘박충후는 문종조의 충신 박팽년의 후손이다. 세조가 육신(六臣)을 모두 주살한 뒤에, 박팽년의 손자 박비(朴斐)는 유복자(遺腹子)이었기에 죽음을 면하게 된 것이다. 갓 낳았을 적에 당시의 현명한 사람을 힘입어 딸을 낳았다고 속여서 말을 하고 이름을 비(斐)라고 했으며, 죄인들을 점검할 때마다 슬쩍 계집종으로 대신하곤 함으로써 홀로 화를 모면하여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되었다. 박충후는 곧 그의 증손으로서 육신(六臣)들 중에 유독 박팽년만 후손이 있게 된 것이다’ (출처: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 (忠後乃 文廟朝에서 다음 줄 彭年有後云까지 작은 글씨로 두 줄로 기록된 부분)
“다음 키워드는 ‘妙’인데, ‘妙’는 ‘묘할 묘’라는 글자야. 옛날 사람들은 나이 어린(少) 여자(女)를 묘(妙)라고 표현했다지. 그런데 뭐가 그렇게 묘해서 동네 이름에다 묘자를 썼을까? 답부터 먼저 이야기를 하자면 이 마을의 역사와 유래가 묘하기 때문에 ‘묘골’이라고 했단다. 사실 묘골의 역사는 무려 560여 년이 넘었어. 그래서 그 긴 역사만큼이나 흥미롭고 묘한 사연을 많이 지닌 마을이기도 하지.
세조에 의해 왕위를 빼앗긴 어린 왕 단종. 바로 그 단종의 복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여섯 충신을 우리는 사육신이라고 하지. 그런데 이들 사육신들은 세조에 의해 아버지·형제·아들에 이르기까지 3대가 멸족되는 참혹한 화를 당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육신 중 유일하게 자신의 혈육을 남긴 인물이 있었지. 바로 이곳 묘골의 주인이 되는 박팽년 선생이야. 묘골은 사육신사건 당시에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던 박팽년 선생의 손자가 태어나 숨어 살았던 곳이지. 그 후 손자의 후손들이 번창하여 560년 내력의 묘골박씨 마을을 만들었으니 그곳이 바로 묘골마을이야···”
물론 이 대목의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다. 주지하다시피 당시 임신을 하고 있었던 박팽년 선생의 둘째 며느리는 사내아이를 낳았다. 사전에 사내아이면 그 자리에서 죽이라는 세조의 엄명이 있었지만, 기적적으로 이 아이는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거의 같은 시기에 출생한 둘째 며느리의 친정집 여종의 딸과 바꿔져 17년 동안 남몰래 키워졌기 때문이다. 참고로 믿기 힘든 이 미스터리한 이야기는 수많은 옛 기록들은 물론이요,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재되어 있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자, 우리 달성군이 놓치고 있는 너무나 중요한 관광·인문학의 소재이기도 하다.
사육신을 모신 사당이 있다고 해서 ‘廟洞’
[사진63 숭정사] 실제 사당의 이름은 ‘육신사’가 아닌 ‘숭정사(崇正祠)’로 되어 있다(출처:송은석)
[사진64 숭정사 향사](출처:송은석)
“마지막 키워드 ‘廟’. 이 글자는 ‘사당 묘’라고 해. 이른바 돌아가신 분들의 신주·위패 등을 모셔두고 제사를 지내는 집을 말하지. 묘골에는 사육신 여섯 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 육신사가 있어. 육신사가 이곳에 처음 세워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500여 년 전의 일인데, 수많은 우여곡절들을 겪으면서 지금에까지 이른 것이지. 여하튼 옛날부터 이 마을에 사육신을 모시는 큰 사당[묘]이 있었다고 해서 묘골이라고 했다는 거야···”
일반적으로 서원이나 사당은 그 서원·사당에 모셔지는 인물과 어떤 식으로든지 연고가 있는 곳에 세워지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제향인물의 출생지·근무지·유배지·은거지·절명지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도 다 있다. 단종복위를 도모하다 순절한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육신사(六臣祠)가 우리 대구·달성 땅에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언뜻 생각해보면 사육신과 우리 대구·달성은 정말이지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인다. 사육신묘가 있는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역의 ‘민절서원’, 단종의 유배지이자 단종의 능인 장릉이 있는 영월 땅의 ‘창절서원’, 김시습에 의해 사육신의 초혼제가 열렸던 계룡산 동학사의 ‘숙모전’ 등은 그 존재이유가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렇지만 우리 대구·달성 땅에 세워진 이 육신사에 대해서는 솔직히 그 존재의 이유를 잘 알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어 보이는 ‘사육신’과 ‘달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바로 우리 달성의 묘골에 육신사가 세워져 있다는 사실이다.
본래 이곳 묘골에는 박팽년 선생의 사당만 있었다. 그런데 선조 임금 대에 이르러 선생의 사당 외에 사육신 여섯 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하나 더 세워진다. 이것저것 묘하다고 해서 묘골인 만큼 여기에도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이 숨어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사육신 사건 당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던 박팽년 선생의 유복손 ‘박일산[초명은 박비]’. 그는 슬하에 외아들 ‘박연손’을 두었다. 박연손은 다시 ‘박계창’과 ‘박필종’ 두 아들을 두었으니 이들은 박팽년 선생의 현손(玄孫·일명 고손자)이 된다. 이중 선생의 현손이자 종손인 박계창이 꾼 ‘꿈’을 연유로 하여 달성 땅에 육신사가 있게 된 것이다. 의미심장한 꿈 이야기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줄거리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
박팽년의 현손 박계창이 어느 날 꿈을 꿨다. 자신의 고조부인 박팽년의 사당 앞에서 몰골이 초췌한 5분의 선비들이 서성대는 꿈이었다. 꿈에서 깬 박계창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날이 바로 자신의 고조부인 박팽년의 제삿날이었기 때문이다.
‘아! 우리 고조부님과는 달리 저 5분의 어른들은 여태껏 제삿밥조차 얻어 자시지를 못하셨구나···’
그날부터 박계창은 자신의 고조부 외에 ‘성삼문·이개·류성원·하위지·유응부’ 이렇게 5분의 신위를 고조부의 사당에 함께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당시 이 소문을 전해들은 인근 성주의 대학자 정구는 박계창에게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개인 사가의 사당에서 6분의 신위를 모두 받들어 모시는 것은 아무래도 예에 미안한 감이 있습니다. 굳이 6분의 제사를 다 받들고 싶다면 기존의 고조부 사당은 그대로 두고 따로 별묘를 하나 세워 사육신을 함께 모시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정구의 이 제안은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기존의 박팽년 사당 외에 이때 별도로 세워진 사당이 달성 묘골 육신사의 원조가 되는 셈이다.
------------------------------------------------------------------------
사실 세 번째 키워드 ‘廟洞’은 최근에 필자가 발굴한 옛 기록에 따른 것이다. 그 내용을 잠깐 소개하자면, 1713년에 발간된 유회당 권이진 선생의 문집에 ‘육신사(六臣祠)’라는 시와 함께 그 보충설명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온다.
‘묘동육신사재대구(庿洞六臣祠在大丘)’
이는 ‘묘동 육신사는 대구에 있다.’라는 뜻이다. 문집에는 ‘廟’가 아닌 ‘庿’로 되어 있는데, ‘庿’는 ‘廟’의 옛 글자체로 그 음과 뜻이 같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廟洞’을 묘골의 키워드로 설정한 배경인 것이다. 참고로 권이진 선생은 우암 송시열 선생의 외손자이자 명재 윤증의 문인으로 동래부사·호조판서·평안도 관찰사 등을 역임한 조선후기 문신이다. 아래의 시가 권이진 선생의 ‘육신사’라는 시이다.
---------------------------------------------------------------
當年朴婢事如何(당년박비사여하) 그 옛날 박비[박일산]의 일은 어찌된 것인가
祠屋嵬然起洛阿(사옥괴연기낙아) 사당은 낙동강 언덕에 높이 솟았도다
自是聖朝崇節義(자시성조숭절의) 다만 성조가 절의를 숭상한 까닭이니
莫言天道佑忠多(막언천도우충다) 하늘이 충신을 도왔다고는 말하지 말라
--------------------------------------------------------
[사진65 유회당집]
왼쪽에서 5번째 줄에 ‘當年朴婢事如何···’라는 시가 보이고 그 다음 줄에 작은 글씨로 ‘묘동육신사재대구(庿洞六臣祠在大丘)’라는 문장이 보인다.(출처:한국고전종합DB 홈페이지)
혼(魂)은 충주, 백(魄)은 노량진, 이름과 혈육은 대구·달성에 남겨
[사진66-1 박팽년 선생 표준 영정]
충남대 윤여환 교수의 작품으로 묘골 사육신기념관에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다(출처:송은석)
[사진66-2 박팽년 선생 친필 초서 천자문] 사육신기념관에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다(출처:송은석)
유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혼승백강(魂昇魄降)’이라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본다. 이는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내려간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박팽년 선생의 ‘백’은 분명 서울 노량진의 사육신묘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선생의 ‘혼’은 어디에 있을까?
현재 선생의 종택과 불천위사당은 충북 충주에 있다. 현 종손의 10대조가 달성의 묘골에서 충주로 거주지를 옮겼기 때문이다. 이유는 당시 충주에 있었던 선생의 부인인 천안전씨의 묘소를 관리하기 위함이었다고 전한다. 여하튼 ‘혼승백강’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선생의 혼은 충주에 있는 선생의 불천위사당에 귀의하고 있을 터이다.
그런데 옛말에 이르기를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막연히 역사 속의 인물이라고만 생각되었던 박팽년 선생. 그런 위인이 우리 달성과 이렇듯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는 우리 대구·달성의 시군민들조차도 미처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시라. 대전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관직을 살다 서울에서 의로운 죽음을 맞이한 박팽년 선생. 선생의 혼은 충주 땅에 선생의 백은 노량진에 남았다. 그렇다면 선생의 이름과 혈육은 어디에 남아있는가!
선생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유복손 박일산[박비]. 그는 이곳 달성의 묘골 외가에서 17년 세월을 죽은 듯 숨어 살았다. 그리고 비로소 17세가 되자 직접 임금인 성종을 찾아가 자수를 하고, 성종으로부터 ‘박일산[朴壹珊 또는 朴一珊·하나 남은 귀한 산호라는 의미]’이라는 이름까지 하사 받았다. 그 뒤, 그는 자신을 길러준 외가에 의지해 삶의 터전을 잡았으니, 그곳이 바로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골인 것이다. 사실 그는 할아버지인 박팽년의 분신이었다. 따라서 ‘박일산’이라는 존재의 등장은 ‘박팽년’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박일산 이후 560여년 이어져온 묘골의 역사, 이래도 대구·달성과 사육신 박팽년 선생 간에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다고 할 것인가!
에필로그
[사진67 태고정] 임난 때 소실되었다가 1614년에 중건되었다(출처:송은석)
[사진68 낙빈서원]
하빈사(河濱祠)가 처음 창건된 것은 1674년(현종15)이다. 이후 1691년(숙종17)에 낙빈서원(洛濱書院)으로 승격되고, 1694년(숙종20)에 비로소 사액서원이 된다. 하지만 1866년(고종3)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된다. 이때 사육신의 위패는 서원 뒷산에 묻었는데, 이 매판소(埋板所)를 한동안 가묘(假廟)로 삼았다고 한다. 그 뒤 1924년에 원래의 위치에서 약간 뒤쪽으로 물린 현재의 위치에 서원을 복원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의 낙빈서원은 사당은 물론이거니와 동·서재도 없이 강당 한 동만 복원된 상태이다. (출처:송은석)
[사진69 사육신 기념관] 기념관 좌측에 보이는 비각이 삼충각(三忠閣)이다.(출처:송은석)
[사진70 삼충각] ‘박팽년·박순·박일산’ 3대에 걸친 충절을 기린 정려각(출처:송은석)
[사진71 재령군수공 묘소]
박일산[박비]의 외조부모의 묘소로 지난 530여 년간 친손인 ‘성주이씨’를 대신해 외손인 ‘순천박씨’ 문중에서 외손봉사를 해왔다. 1980년대 이후부터 성주이씨 문중에서 봉사를 하고 있다(출처:송은석)
[사진72 박두을 여사 생가]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처가이다(출처:송은석)
사육신 중 직계혈육을 남긴 인물은 박팽년 선생이 유일하다. 그리고 유일하게 남겨졌던 선생의 손자 박일산 이후, 무려 560년 내력의 ‘묘골박씨[박팽년 선생의 직계후손인 순천박씨 충정공파의 별칭]’ 세거지로 성장한 곳. 그곳이 바로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골이다. 그 오랜 역사만큼이나 현재 이 묘골에는 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다. 특히 박팽년 선생과 그 직계후손들 관련한 유적지로서는 양적·질적인 면에서 전국에서 단연 독보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잘 모른다. 달성 묘골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공간인지를 말이다.
우선 묘골에는 사육신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육신사’가 있다. 이는 전국적으로 단 4곳뿐인 사육신 사당이다. 그리고 이곳에는 보물 제554호로 지정된 ‘태고정’이라는 아주 오래된 정자가 있다. 이 정자에 걸려 있는 ‘일시루’ 편액은 선생의 절친으로 알려진 안평대군의 친필로, 박팽년 선생 생전의 거처에 걸려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또한 사육신 사건 당시 이조판서의 신분으로 사육신과 함께 참화를 당한 선생의 아버지 박중림의 사당도 이곳에 있다.
어디 그뿐인가! 조선시대를 통틀어 대구·달성에 단 5곳뿐이었던 사액서원 중 하나이자, 사육신을 제향했던 ‘낙빈서원’ 역시 이곳에 있다. 또 마을 입구에는 ‘사육신기념관’이 있으며, 그 곁에는 ‘삼충각’이라 불리는 ‘박팽년·박순·박일산’ 3대의 충절을 기린 정려각도 있다. 그리고 선생의 유복손을 세상에 남겼던 선생의 둘째 아들 부부의 묘소[일명 의관장묘]를 비롯해, 수대에 걸친 후손들의 묘 역시 이곳에 남아 있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세조 정권 하에서 목숨을 걸고 선생의 손자를 17년간이나 숨겨 키웠던, 손자의 외조부모의 묘도 이 마을 바로 곁에 있다. 당시의 고마움 때문이었을까? 이 묘소는 무려 530여 년간이나 주인인 성주이씨가 아닌 박팽년 선생의 후손들이 외손봉사를 해온 묘소로도 유명하다. 이처럼 사육신 박팽년 선생은 자신의 이름 석 자와 함께 자신의 유일한 혈육 역시 이곳 대구·달성 땅 묘골에 남겼던 것이다.
2017년은 박팽년 선생 탄신 6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세종시는 2-3년 전부터, 대전시는 작년부터 선생 탄신 600주년 기념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얼마 전 묘골을 방문한 대전시 문화단체협의회장의 따끔한 충고가 지금도 필자의 귓가에 맴돈다.
“세종시와 대전시는 박팽년 선생을 자신들의 지역인물로 만들려고 민관이 똘똘 뭉쳤답니다. 그런데 정작 제일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대구는 긴장감이 없네요. 그건 그렇고. 삼성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의 처가가 어디에요? 박두을 여사 생가라고 역시 이 동네에 있다는데···”
묘골은 진정 달성을 대표하는 스토리텔링의 보고임에 틀림없다.
---------------------------------------------------------------
금생여수(金生麗水)라 한들 물마다 금이 나며
옥출곤강(玉出崑岡)이라 한들 뫼마다 옥이 나랴
아무리 여필종부(女必從夫)인들 님마다 좇으랴
취금헌 박팽년 선생의 시조(나의 님은 단종이므로 세조를 따를 수 없다는 의미)
------------------------------------------------------------------
이상끝...
2017년 3월 20일...
砧山下 풍경산방에서
訥齋 송은석拜
☎018-525-8280
-------------------------------------------------------------
※ 지역의 유교유적, 유교문화, 문중 등은 기존의 자료가 충분치 못한 관계로 내용 중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오류를 발견하신 경우 전화 또는 댓글로 조언을 주시면 적극 경청하고 수정토록 하겠습니다. 많은 관심과 격려 당부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