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레길의 영혼들
이기식
《수필과 비평 2024년 3월호. V269》
몇 년 전, 이천으로 이사를 왔다. 자식들과도 떨어져 둘만 살고 있기도 하고 시골에 가고 싶기도 하던 차, 친구의 권유를 얼른 받아들였다. 집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에 이천의 명소, 설봉공원이 있다. 둘레 길이가 약 1km인 호수가 있어 많은 사람이 찾아온다. 호수에는 잉어도 많고, 고향으로 가다가 잠시 쉬고 있는 청둥오리, 바위에서 햇볕을 쬐고 있는 자라들도 보인다. 둘레를 다섯 번 돌면 5km, 만 보 걷기에 적합한 코스다. 주말에는 외부인이나 젊은이들이 오고, 평일에는 근처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많이 오신다. 우리 부부가 이 둘레길을 돈 지 어느새 7년이나 되었다.
아직도 씩씩하게 걷는 할머니, 좁은 보폭으로 위태위태하게 움직이는 할아버지 등이 눈에 띈다. 어느 할머니는 두 손으로 난간을 붙잡고 조금씩 힘들게 전진하신다. 도움 없이 내 힘으로 움직이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그러나 아무래도 곧 지팡이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다. 도중에 앉아서 잠시 쉴 때는, 무표정하고 초점 없는 시선으로 어딘가를 노려본다. 우리한테 보이지 않는 어딘가 다른 세상을 들여다보고 있는듯하다. 무슨 생각을 하시냐고 묻고 싶을 때도 있으나, 그런 분위기는 아니다. 우리 부부도, 서로 말을 안 하지만, 다가오는 우리의 미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벚꽃이 피는 계절이 되면 더 많이 나오신다. 둘레를 돈다는 것은 인생을 한 번만 돌고 그칠 게 아니라, 매번 봄이 찾아오듯이, 그치지 않고 돌았으면 하는 무의식적인 바람일지도 모른다. 얼마 안 돼 꽃은 진다. 그러면 세월이 덧없음을 알고는 허무함을 느끼지만, 다시 내년을 기다리기 시작한다. 인생의 윤회가 계절과 중첩된다.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의 그리스 신화가 떠오른다. 사자 몸통을 하고, 여인의 머리를 한 스핑크스는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아침에 네 다리로 다니고, 낮에는 두 다리로, 저녁에 세 다리로 다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수수께끼를 내고, 답을 하지 못하면 잡아먹었다. 그때, 마침 고향으로 돌아가던 오이디푸스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인간은 늙으면 세 번째 다리인 지팡이를 사용한다’라고 답하자, 스핑크스는 자살했다고 한다. 그 후로 안심한 백성들은, 오이디푸스를 왕으로 받들고 잘 살았다고 한다.
왜 그런 질문을 했고, 대답을 못 하면 애먼 사람들을 죽였을까? 자기 인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적당히 의미 없이 살아가는 인간은 처벌받는다는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일까. 태어나서 닥쳐오는 미래의 굳건한 준비를 위해 네 발로, 청장년 시절에는 정열을 갖고 삶을 개척하기 위하여 빠르게 두 발로 움직이고, 노년기가 되어서는 힘들더라도 지팡이에 의지하면서 젊은 사람들에게 지혜를 베풀라는 뜻이 아닐까. 스핑크스는 그걸 잘 알고 있는 오이디푸스를 만나자 안심하고 죽은 모양이다.
둘레길을 돌면서, 그들은 무엇을 생각할까. 틀림없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표정이나 몸짓이다. 지금 나이에 뭔가 새로운 일을 일으킬 시기는 아닌 것 같고. 지난날에 잘못했던 일, 놓쳐버린 일들을 반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부분은 후회할 일뿐일 것이다. 설령 잘했다고 믿고 있던 일조차도 돌이켜 보면 더 잘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누구나 갖기 마련 아닌가.
아니면 건강한 청춘 시절로 다시 돌아가 오래 살고 싶어서일까. 여하튼 유튜브나 여러 미디어에서는 노화를 막는 방법이나 이에 필요한 음식, 약 등에 관련된 프로그램이 쏟아지고 있다. 노화의 속도를 늦추려는 사람이 많아 시청률을 끌어올리기에 적합한 내용임이 틀림없다. 요즈음은 노년을 황금기라고도 하긴 하는데. 몸이 따라가 주지 않는다. 그래서 보약이나 흑염소를 먹고 회춘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윤회나 해탈 또는 열반을 생각하시기도 할 것이다. 나는 한때는 누구였으며 어디 어디서 무슨 일을 했다가 지금까지의 인생을 보냈는데 제대로 인간답게 살았는지, 또 내 혼은 앞으로 누구로 다시 태어날 것인가를 생각해 보기도 할 것이다. 깊은 깨달음을 얻어 고통과 욕망으로부터 해탈하여, 열반(니르바나)에 들어가신 성인들을 본받고 싶은 분도 계신다. 그러나 어렵다. 이 호숫길을 영원히 돌더라도 윤회를 벗어난다는 보장은 아무 데도 없다.
양자역학에 관심을 가지신 분은 어쩌면 ‘퀀텀 점프(양자 도약)’를 생각할지도 모른다. 원자의 원자핵 주변 궤도에서 회전하고 있던 전자가, 어느 순간 “팍’하고 사라졌다가 다른 궤도로 도약하는 현상이다. 윤회의 많은 궤도 중의 하나일 수 있는 둘레길을 걷다가 보면, 우연히 정말 가기도 힘든 해탈을 위한 궤도로 번개처럼 도약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다. 물질세계와 정신세계, 그리고 차원 이동까지를 섭렵하는 이론이 된다. 정도의 차이지만 누구나 꿈을 꾼다.
걱정되는 부분도 있다. 고령화 시대가 되니, 사람들은 기대하지도 않았던 시간을 갖게 되어 도리어 당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100세 시대라고도 한다. 뇌과학, 의약품의 발달은 예상했던 것보다 10년, 20년의 보너스를 선사 해줬다. 갑자기 받은 시간이라 처치 곤란이다. 그래서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도 늘어난다. 자살률이 계속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한다.
인간이 죽는 형태는 사고사나 자연사다. 닥쳐오는 최후를 맞이하여 깔끔하고 자연스럽게,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존엄사를 맞이하고 싶다. 죽음이 두렵기도 하지만, 삶의 끝이 아니라, 완성이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나머지 삶을 긍정적으로, 낙관적으로 살기 위해 그들은 호수를 힘차게 도는 건강한 혼 들이다. 주위로부터, ‘참 깨끗하게 돌아가신 분’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 틀림없다.
열심히 걷고 계시는 노인들한테는 아직도 물어보지 못하고 있다. 가만히 보니 물어볼 필요가 없는 것 같다. 나 아니면 집사람도 곧 알게 될 것이다. 나중에, 둘이 피안에서 만나면 호숫가를 혼자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었는가를 서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
둘레길을 함께 돌다 보면 굳이 인사는 하지 않아도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이 이제는 꽤 많아졌다. 내세에 영혼으로 다시 만날 수 있는 좋은 인연을 쌓아가는 중이다. [2024/01/23]
첫댓글 '내세에 영혼으로 다시 만날 수 있는 좋은 인연을 쌓아가는 중이다. '
가슴이 뭉클하네요. 이기식 선생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지도편달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