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10일(주)
* 시작 기도
주님...
주님께서 아모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암 7:7-8)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이삭의 산당들이 황폐되며 이스라엘의 성소들이 파괴될 것이라. 내가 일어나 칼로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
지금 이스라엘의 운명이 경각간에 달려 있음을 다림줄 환상을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그 이스라엘은 바로 나를 가리킵니다.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와도 같은 욕심과 정욕대로 행하는 자임을 고백합니다.
이런 나는 마땅히 죽어야 할 자임에도 주님께서는 긍휼을 베풀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마음을 고정시키지 못하고 파도에 치이는 돛단배를 영혼의 닻이 되신 주님께서 붙잡아 주시고 아버지 품으로 인도하여 주심은 기묘함 그 자체입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오늘은 주일입니다.
공동체 예배를 통하여 주님을 뵈옵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히 6:13-20
제목 : 영혼의 닻 되신 주의 말씀으로 아버지 품에 들어가다
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14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15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
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19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 나의 묵상
히브리서 기자는 가혹한 심판의 말씀으로 경고한 후에 위로의 말씀으로 성도들을 권면한다.
신앙의 성숙에 이르지 못하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지 않으면 누구라도 배교의 가능성을 면치 못한다고 촉구하였다.
그러나 창세전에 약속하신 영생을 얻은 자들은 더 좋은 것 곧 구원의 소망을 가지고 살 것을 확신한다.
하나님은 결코 불의하실 수 없으시기에 성도들이 행한 일과 성도들을 섬긴 일을 잊어버리지 않으신다.
다만 간절히 바라는 것은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을 확신하고 게으르지 말고 믿음과 인내를 가지고 나아가면 하나님의 약속 곧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창세전 이 약속은 곧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면서 재차 확인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당신의 이름으로 맹세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을 주고 네 자손을 번성하게 하겠다’고 하셨다.
아브라함은 오랫동안 인내하면서 결국 이 약속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가 한 말을 확증하기 위하여 자기보다 더 높은 사람이나 큰 것을 가지고 맹세한다.
이것은 논쟁을 피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약속을 확증하셨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라도 거짓으로 약속하시거나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이 두 가지 사실은 하나님께로부터 피난처를 찾으려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된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이 소망은 영혼의 닻과 같이 튼튼하고 견고하다.
그래서 그 든든한 소망은 우리로 하여금 하늘의 거튼인 휘장을 열고 그 안에 들어갈 수 있게 한다.
먼저 그 하늘의 커튼을 열고 하늘 지성소로 들어가신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시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대제사장과 친히 그 제물이 되셔서 그 단단하게 봉해진 문을 깨트리고 아버지 집으로 들어가신 것이다.
한국에 있는 수많은 기도원들마다 빼놓지 않고 기도원 입구나 곳곳에 큼지막하게 새겨서 붙여놓은 성구가 있다.
그것은 렘 33:3절과 히 6:14절 말씀이다.
(렘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히 6:14)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비단 기도원만 아니라 교회나 일반 성도들의 가정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성구이다.
언젠가 훈련을 받을 때 선교회 간사가 나와서 렘 33:3절 말씀을 암송하면서 이 말씀을 붙들고 우리도 부르짖으면서 기도하자고 하였다.
그러자 모든 학생들이 주여!를 외치며 목이 터져라 기도하는 것을 보았다.
렘 33:3절 말씀은 오늘날 기도원이나 교회가 부르짖는 기도를 하게하는 단초를 마련하게 한 성구임은 틀림없다.
물론 부르짖는 기도 자체가 잘못된 것은 결코 아니다.
어느 누구라서 지금 죽을 지경인데 부르짖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
그런데 부르짖는 기도의 근거를 렘 33:3절에서 찾는다는데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개인에게 주신 말씀이다.
이 말씀의 앞뒤 문맥을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렘 31장에서 새 언약과 그 내용을 약속하셨고 이제 그 새 언약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말씀하시는 장면에서 이 말씀이 나오게 된 것이다.
크고 은밀한 일은 우리가 원하지만 쉽게 얻을 수 없는, 마치 베일에 싸인 비밀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약속하신 선한 말 곧 새 언약을 이루실 것을 의미한다.
(렘 33:14-1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대하여 일러 준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
여기에 나오는 ‘한 공의로운 가지’가 바로 새 언약을 성취하실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다.
또한 히 6:14절 말씀도 마찬가지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 말씀을 구약 창세기 22장에서 인용한 것은 곧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자손과 땅의 복이다.
(창 15:5, 7)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신 자손의 약속은 두 차원이다.
먼저는 역사적인 차원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독자 이삭이다.
그 다음은 구속사적 차원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갈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아브라함은 이처럼 독자를 주시마고 약속을 받았지만 오랜 시간동안 그 약속대로 아들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무려 25년 후에야 아들 이삭을 받았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신다.
아브라함은 그 다음날 새벽 같이 일어나 아들과 두 종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올라간다.
올라가는 길에 아들 이삭이 묻는다.
“아버지 번제에 쓸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순간 아버지 아브라함은 아마도 가슴이 미어졌을 것이다.
그러면서 대답하기를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친히 자기를 위하여 준비하실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아들을 붙잡아 칼을 들이대려는 순간 하나님께서 그를 막으셨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내가 알았다.”
이 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오늘 본문 14절에 나오는 말씀이다.
(창 22: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땅을 가리켜 여호와 이레라고 명명하였다.
그것은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호와 이레’에서 이레는 ‘라아’라는 히브리어 ‘보다’는 말에서 나왔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동을 다 지켜보고 계셨다는 말이다.
그가 믿음으로 행할 때 그것을 보시고 그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을 더 크게 가지고 있는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인 마태복음 6장에서 이 말씀을 하신다.
(마 6:31)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우리가 구할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 義이다.
그러면 ‘라아’의 하나님께서 다 지켜보시고 필요를 채우신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주시되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아브라함은 이 복을 오래 참음으로 받았다.
25년이라는 세월, 죽음이라는 그 혹독한 시험 앞에서도 참고 기다리며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소망 가운데 바라봤던 것이다.
급기야 이삭을 다시 받게 되었으며 그 이삭은 오실 그리스도요 오늘 우리의 입장에서는 다시 오실 그리스도이심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나는 많은 한국교회나 여느 성도들과 다름이 없이 이 말씀을 오해했었다.
복이라고 하니까 물질의 복, 세상의 성공과 명예, 자녀의 번성에 초점을 맞추어 금식하면서 부르짖어 기도하기도 하였다.
조금 그 차원을 달리하여 고급스럽게 나만 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성도들의 그런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중보기도라는 이름으로 함께 부르짖으며 기도했었다.
그렇게 기도하는 나를 보면서 어떤 사람들은 감동을 받기도 하고 감사의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을 감동시킨다 할지라도 이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면 신앙은 맹신이 되고 무속신앙과 결코 다르지 않다.
기독교를 종교의 범주에 넣는 것이 좀 그렇기는 하지만 기독교와 불교는 고등종교에 속한다.
고등종교란 경전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자기를 부인하는 종교이다.
이 땅의 불교가 무속신앙으로 다 변질되고 말았다.
그런데 어디 불교뿐이랴?
그 무속신앙이 기독교까지 다 변질시키고 있는 형국이다.
하나님의 복인 영생의 복을 세상에 속한 기복으로 오해하여 금식하고 부르짖으면서 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창세전 약속인 영생에 대한 무지의 소치이며 그 결과 하나님을 만물 안에 갇힌 신이요 우상으로 전락시키는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나는 내 자신을 바라볼 때 이들과 전혀 다름없음을 깨닫는다.
그런 나는 죽기에만 합당하며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임을 고백한다.
내 안에 아담의 생명 곧 음란 정욕 술취함 방탕 향락 그리고 무법한 우상숭배로 가득 차 있던 내게 주님은 복음을 주셨다.
그리고 그 복음을 통하여 만들어진 아담의 생명에서 태어난 아들의 생명으로 바꿔 주셨다.
나는 오늘도 그 생명을 이어가기 위하여 영생으로 인도하는 솟아나는 샘물인 말씀을 성령에 의지하여 주님과 교제하며 사귐을 갖는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삶이요 영생을 현재로 누리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영원에 잇대어 산 사람이었던 것처럼 오늘 나 또한 주의 말씀에 의지하여 영원에 잇대어 사는 하루요 영생의 날이 될 것을 확신한다.
이 소망이 나의 영혼을 방탕의 쓰나미 곧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가지 않고 영혼의 닻이 되어 온전히 휘장을 열고 들어가신 아들을 따라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힘쓴다.
그 나라가 바로 아버지 품이요 내가 거할 성읍이며 주님께서 항상 계셨던 ‘나 있는 곳’임에 틀림없다.
바로 이 자리에 동녘에 해가 떠오르는 것처럼 아버지의 영광의 빛이 임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옵소서.
주의 말씀이 생명이며 그 생명이 복인 것을 알지 못하고 그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만을 쫓던 자가 여기 있나이다.
나의 영혼을 주님의 손에 맡기오니 영혼의 닻이 되어서 주님께서 당신의 몸을 찢으시고 친히 들어가셨던 그 영광스런 아버지 집에 나도 날마다 들어가게 하소서.
바로 그곳에서 주님과 연합하여 날마다 아버지의 영광을 보는 자 되기를 원합니다.
썩을 것에 몸과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하시고 우리 조국 교회와 온 열방이 주님의 참 뜻이 무엇인지 깨달아 알게 하소서.
이 일을 위하여 저를 세우셨사오니 오직 복음만이 참된 복을 주는 생명의 길임을 선포하게 하시고 어느 곳에 있든지 복음을 전하는 사도요 선지자요 교사로 세우소서.
내게 주신 은혜가 너무 커서 감당할 수 없나이다.
주님, 오늘도 주의 날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