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다해 3월19일 화요일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제1독서 사무엘기 하권 7,4-5ㄴ.12-14ㄱ.16
제2독서 로마서 4,13.16-18.22
복음 마태오 복음 1,16.18-21.24ㄱ
◈ [서울]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2019년 다해 3월19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오늘은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분들 모두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저의 아버님은 8년 전에
하느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말씀을 많이 하시지는 않았지만, 말씀에는
언제나 힘이 있었습니다. 물질적인 재물을 남겨 주시지는 않았지만,
제게는 언제나 높은 산과 같은 분입니다. 언제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셨고, 책을 가까이하셨습니다. 제가 사제가 되는 날에는 손수
붓으로 쓰신 족자를 선물해 주셨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면
아버님께서 써주신 저의 서품 성구를 보곤 합니다. 제게 신앙을
물려주신 아버님께 늘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아버님과 함께했던 추억을 나누고 싶습니다.
제가 처음 본당 신부로 갔던 곳은 재정적으로 여유가 없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저를 위해서 3년간 함께 살았습니다. 아버님은 어머니가
보고 싶으시면 가끔 성당으로 오셨습니다. 성당에 오시면 어르신
복사단을 만들어 주셨고, 어르신들에게 복사하는 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루는 아버님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당 담에 있는 은행나무 가지를 잘라야 합니다.’ 저는 평소에
생각하지 않았기에 ‘왜 그래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담벼락 바깥으로 나간 가지가 바람에 부러지거나, 태풍에 부러질 수
있고, 그러다 지나가는 사람이 다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성당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가을에 은행을 털어서 먹을
생각을 하였는데 아버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아버님의 말씀을 듣고
담벼락 밖으로 나간 가지를 잘랐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수녀원 마당에 꽃을 심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평소에 생각하지 않았기에 ‘왜 그래야 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수녀원 마당에 꽃이 있으면
수녀님께서 꽃을 볼 것이고, 꽃을 보는 수녀님이 기분이 좋을 것이고
그러면 신자들에게 더 잘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수녀원 마당에
부추를 심어서 먹을 생각을 하였는데 아버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아버님의 말씀을 듣고 수녀원 마당에 꽃을 심었습니다. 예쁜 꽃을
보니 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나자렛의 성가정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한 적이 있습니다. 제의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요셉 성인께서 어린 예수님의 손을 잡고 있던
제의였습니다. 어린 예수님께 요셉 성인은 어쩌면 높은 산과 같았을
것입니다. 사랑을 주셨고, 손을 잡아 주셨고, 많은 것을 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힘들고 어려울 때면 요셉 성인을 생각하셨을
것 같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요셉 성인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약혼한 마리아가 임신한 것을 알았을
때, 화가 날 수도 있었지만, 조용히 파혼하려고 하였습니다. 그가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마리아가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멸시를
받지 않도록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요셉은 충분히 자기 할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의 행동에 대해서 비난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꿈에 천사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법대로 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마리아를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요셉 성인은 이제 법대로
살기보다는 하느님의 뜻대로 살기로 하였습니다.
어제의 비로 오늘의 옷을 적시지 말고, 내일 내릴 비 때문에 오늘의
우산을 펴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걱정의 90%는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2% 가능한 걱정
때문에 90%의 삶을 걱정하고 지낸다고 합니다. 오늘 요셉 성인의
축일을 지내면서 모든 것을 마음에 품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았던
요셉 성인을 생각합니다. 요셉 성인이 가졌던 ‘영성’을 배운다면
우리는 다가오는 도전을 이겨내고, 참된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내 탓이오!”에 숨겨진 천상의 지혜
2019년 다해 3월19일 화. 성 요셉 대축일
<“내 탓이오!”에 숨겨진 천상의 지혜>
복음: 마태오 1,16.18-21.24ㄱ
네 명의 젊은이의 목숨을 앗아간 커다란 사고가 미국의 고속도로에서
발생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네 명의 젊은 희생자들의 시체 사이에서
부서진 위스키병 조각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사고의 원인은
음주운전이었던 것입니다.
그 희생자 중의 한 소녀의 아버지는 그의 아름다운 딸이 그러한
뜻밖의 죽음을 당한 것에 몹시 분노했습니다. 그래서 젊은 아이들에게
술을 준 사람을 찾아내 그 한을 풀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음료들을 비치해 둔 자신의 집 찬장에서 뜻밖에도 딸의 쪽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빠, 저희가 아빠의 술 몇 병을 가지고 갑니다. 괜찮으시겠지요?”
내가 남을 심판하게 될 때 나의 불의함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사실
내가 의롭지 못하기에 남의 잘못을 들추어내는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은 자신의 불의를 감출 필요가 없기에 남의 허물을 굳이
들추어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상대가 변화되지도 않습니다.
변화는 질책이 아니라 포옹으로 일어납니다. 이 포옹이 의로움입니다.
돌아오는 탕자를 아버지가 안아 동네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 자신이
맞아주려 한다면 그 아버지가 의로운 것입니다. 아버지마저 자녀를
나무란다면 자신이 그렇게 잘못 키운 것까지 나무라는 것이 됩니다.
남을 나무랄 때 자신도 나무라는 것임을 알아야겠습니다.
주님 앞에 갔을 때 “너는 의로운 사람이다.”라는 말을 듣는다면
“너는 나의 나라에 들어올 자격이 있다.”라는 말을 듣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축일을 지내는 요셉 성인은 의로움의 상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요셉 성인이 어떻게 의로움의 상징이 되었는지 잘
보여줍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약혼자가 임신한 것을 발견하면 매우 격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 성인은 자신이 임신시켜놓고 파혼하는 것처럼
꾸미려합니다. 마리아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은 파렴치한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타인의 잘못을 자신이 뒤집어쓰는 것을 의로움이라
가르칩니다. 어차피 우리의 죄도 예수님께서 다 짊어지시고
인간에게는 죄가 없다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의롭게 되셨습니다.
그 의로움을 받은 우리들이 타인의 잘못을 들추어낸다면 그 사람은
만 달란트를 탕감 받고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나무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를 기억하기 위해 미사 때마다 “내 탓이오!”를 외칩니다.
이는 나의 잘못만 내 탓이 아니라 이웃의 죄도 나의 탓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내 탓이라고 할 때 나에게 잘못한 사람의
잘못까지도 나의 탓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요셉 성인을 닮은
의로움으로 이끄는 기도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셉 성인이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였을 때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시어 성모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신
사실과 그 아기는 세상의 구세주가 되실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의로운
사람만 이런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남의 잘못을 찾아내는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고 어떤 은총도 받을 준비가 안 된 사람입니다. 죄가
많은 만큼 타인의 잘못도 잘 찾아냅니다.
노아가 술을 마시고 벌거벗고 자고 있을 때 세 아들 중 함이라는
아들은 이 사실을 형제들에게 알렸습니다. 나머지 두 형제는 아버지의
알몸을 보고 싶지 않아 뒤로 돌아서 들어가 옷으로 아버지를
덮어드렸습니다. 이렇게 의롭게 된 두 아들은 큰 축복을 받고 함은
저주를 받습니다. 진정으로 진리를 아는 사람들은 남의 잘못을
들추어내지 못합니다. 자신도 큰 죄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로운 사람은 자신들이 원하는 모든 은총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남의 잘못을 나의 잘못으로 삼으며 덮어준 기억이 있나 살펴봤습니다.
불행하게도 잘 떠오르지가 않습니다. 시시비비를 따지며 살아온 것
같습니다. 내가 내심 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시시비비를 가려서라도
나의 불의를 극복하고 정당한 사람이 되려고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내 탓이오!”를 할 때 나에게 잘못한 사람과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잘못된 일에 대해 내 심장을 치려고 합니다. 그렇게 의롭게
인정받아야만 지금 받지 못하는 은총도 받을 수 있습니다. 더 받기
위해 그만큼 달라야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3월19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오늘은 성 요셉 대축일이다. 우리는 성 요셉을 성가정의 수호자,
보편교회의 수호자이시며, 노동자, 가정, 동정자, 환자, 임종자의
주보로 공경 받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성서에서는 ‘의인’,
‘동정녀 마리아의 남편’이며 ‘충실하고 현명한 종’이다. 원죄 없이
잉태 되신 동정 마리아와 더불어 한국교회의 공동 수호자이시다.
복음: 마태 1,16.18-21.24a: 요셉은 천사가 일러준 대로 하였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18절)
이 잉태는 거룩한 신비이다. 성령께서 감추시어 눈에 띄지 않는
성사이다. 이 잉태로 인해 우리는 요셉의 놀라운 모습을 본다. 요셉은
조금도 마리아의 마음을 괴롭게 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그 일을
해결하려 한다. 약혼은 했지만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고, 그 일을 드러내어 마리아를 재판에 넘긴다면
마리아를 죽음에 내주는 것이 된다고 생각하여 조용히 파혼하려 했을
것이다.
이때에 꿈에 천사가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20절) 이것은 요셉이 마리아의 순결을
의심하지 않도록 그 신비를 알려준 것이다. 또한 요셉이 의심이라는
악을 떨쳐버리고 신비라고 하는 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리아는 아무 죄가 없으며 동정잉태를 인정할 수 있었다.
‘요셉’이라는 뜻은 ‘흠잡을 데 없는’이라는 뜻이다.
여기에도 신비가 있다. 창세기에서 악마는 동정이었던 하와에게 먼저
말을 건 다음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이 말은 그들에게 죽음을 건네기
위한 말이었다. 동정잉태의 사건에서는 거룩한 천사가 마리아에게
먼저 말하였고 다음에 요셉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앞의 사건에서는 죄를 위해, 죽음을
위해 여자가 선택되었고, 뒤의 사건에서는 구원을 위해 여자가
선택되었다. 앞의 사건에서는 여자로 말미암아 남자가 넘어졌고, 뒤의
사건은 동정녀로 말미암아 남자가 일어섰다. 그래서 천사는 요셉에게
그렇게 말한 것이다.
천사는 또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21절)라고 했다. 그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했는데 그 뜻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
즉 ‘구원자’라는 뜻이다. 이는 하느님께 어울리는 이름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이요 구원자는 나밖에 없다.’
(참조: 이사 43,3; 호세 13,4)라고 하셨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주셨다.”(이사 49,1) 즉 그 이름은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분의
육에 붙여진 이름이다.
요셉은 천사에게서 계시를 받고 기쁘게 하느님의 뜻에 따른다. 그는
마리아를 맞아들이고 기쁘게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가게 되었다.
천사의 말은 동정 어머니를 그의 아내로 부를 자격을 갖도록 하였다.
요셉 성인이 의롭다고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을 채우려
노력했다고 하는 것이다. 오늘 1독서에서도 보면 다윗은 하느님의
뜻을 따른 사람이었다. 다윗이 하느님의 뜻에 충실했던 상급을
하느님께서는 다윗 가문과의 약속을 통하여 그의 왕권을 튼튼히 해
주시겠다고 하신다.
2독서에 나오는 말씀의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이다. 자식이 없던
아브라함의 모습은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그가 모든 믿는 이들의
조상이 된 것은 그의 자세가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도 하느님을 신뢰하고 의탁하여야 한다. 우리 인간의 나약한
면만을 생각하고 그분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죄의
경중보다도 나를 사랑하시고, 언제나 자비를 베풀어주시며 당신 앞에
나아오기를 기다리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그런 믿음으로
그분께 나아가고 그분의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도 요셉과 같이,
다윗과 같이, 아브라함 같은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요셉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즉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는데 협력하셨던 그 삶을 우리도 본받아,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에 주님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하며 그분을
본받도록 하자. 요셉 성인이 어떤 큰 공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온전한
믿음을 통해서 주님께 인정을 받았다.
우리도 하느님 앞에 무슨 능력보다도 믿음으로, 신앙으로, 참된
삶으로 그분이 의롭게 여기시는 나로 변화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우리의 조그마한 행위 하나 하나가 하느님의 구원사업의 협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요셉 성인과 같이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이루는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도록 깨어있을 수 있는 은총을 구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말없이 사랑하십시오! 침묵 속에 기도하십시오!
2019년 다해 3월19일 화요일 성 요셉 대축일
말없이 사랑하십시오! 침묵 속에 기도하십시오!
살다보면 진국같은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말없이 사랑하는
사람. 말보다 행동이 없서는 사람. 조용히 도와주는 사람. 힘들때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는 사람. 침묵 속에 기도하는 사람. 생각만 해도
마음이 든든하고 힘이 나는 그런 사람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요셉 성인이 그런 분이셨습니다. 복음사가들은
그에 대해 철저하게도 함구하고 있습니다. 사실 구세주의 양부이자,
마리아의 동반자로서, 오랜 세월 구세사의 주역들을 동반하셨던 그의
역할은 참으로 막중한 것이었습니다.
요셉 성인의 특별하고 굴곡진 삶을 글로 쓰자면, 아마도 소설 몇
권으로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그는 과묵하고 진중한 사람, 침묵하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요셉 성인은 하느님으로부터 아주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았으며,
그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일생을 봉헌했습니다. 그 사명은
예수님을 보호하고 양육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마리아의 순결을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비오 11세 교황님께서는 요셉 성인의 사명이 세례자 요한의 사명이나
베드로 사도의 사명에 버금가는 막중한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성 요셉의 사명은 조용히 생각하는 사명이요, 침묵하는
사명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구속 사업의 비밀이 세상 사람들에게 미리
노출되지 않도록 끝까지 침묵을 지켰습니다.”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는 성 요셉의 사명은 곧 오늘날 우리 교회의
사명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성모님과 함께 계실 때의 성
요셉의 사명은 보호와 방위의 사명, 수호와 원조의 사명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도 적으로부터 방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사명은
곧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 역시 이 혼탁한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지키고,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주위에 성장시킬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요셉 성인에 대한 신심이 각별하셨던 요한 23세 교황님께서는 그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성 요셉! 저는 이 성인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저는 가장 먼저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제 하루 일과를 시작할수도, 끝낼 수도 없을
정도로 그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성모님 전문가 쇼사르 박사는 요셉 성인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성 요셉은 우리와 조금도 다름없는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두발을 땅에 딛고 있었으며, 결코 지상 낙원의 꿈을 쫒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나이를 먹지 않는
영원한 청년입니다. 그는 세상 모든 가장들의 모범입니다. 그는 참으로
여성스런 동정녀 마리아와 떳떳하고 올바르게 교제할 수 있었던,
참으로 이상적이고 멋진 남자였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 세상, 성 요셉처럼 침묵의 사명에
충실해야겠습니다. 성 요셉처럼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 만사를
바라봐야겠습니다. 성 요셉처럼 말없이 행동하고, 말없이
사랑해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마태 1, 24)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3월19일 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마태 1, 24)
좋을 때도 나쁠 때도 늘 옆에 있어주는 진실된 사랑의 사람
요셉 성인의 축일입니다.
믿음의 여정에 결코 망설이지 않았던 요셉 성인을
이 사순시기에 다시 만납니다.
믿음의 여정은 하느님을 향한 소중한 경청의 여정입니다.
아름다운 모든 삶은 아름다운 존중에서 시작됩니다.
존중은 긍정적인 삶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긍정적인 태도는 믿음의 관계에서 더욱 구체화됩니다.
하느님을 끝까지 신뢰하셨던 요셉 성인의 삶은 마리아를 기꺼이
자신의 아내로 받아들입니다.
함께 하는 믿음은 그 어떤 어려움도 함께 헤쳐 나가는 큰 힘이 됩니다.
요셉 성인은 소중한 가족들과 나란히 걸어가는 겸손을 보여줍니다.
일생을 통해 보여준 겸손한 삶은 진정한 보살핌이 무엇인지를
깨닫게합니다.
보살핌을 통해 무엇이 더 중요한 지를 알게됩니다.
전혀 새로운 길을 오로지 믿음으로 받아들인 요셉 성인처럼
한 가지 길만 있다고 고집하지 않는 열린 믿음이 중요합니다.
소중한 가족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를 성 요셉의 삶에서 배웁니다.
서로를 구원하는 사랑은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존중이었음을
보게됩니다.
진실한 사람은 서로를 존중하는 사람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청주] 의로운 사람|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3월19일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마태1,16.18-21.24)
의로운 사람
우리는 가끔 화가 났다. 또는 홧 병이 났다는 말을 합니다. 정말 화는
불입니다. 아주 뜨거운 불입니다. 그러나 그 불로는 방을 따뜻하게
덥힐 수도 없고 밥을 지을 수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나무를 태울 수도
쇠를 달굴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속만 태울 뿐입니다. 그러니
병이 날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화를 다스리는 법을 터득하면
좋겠습니다. 화가 나도 무조건 참는다는 것은 용수철을 눌러놓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참는 것이 아니라 벼르는 것입니다. 무조건 누르지
말고 하늘을 보면서 잘 풀어야 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요셉은 정말 화를 다스릴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는 결혼하기 전에 임신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라보는 요셉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신명기22장을 보면 간음에 대한 규정을 말하고 있는데 “젊은 여자의
처녀성이 증명되지 않으면, 그 여자를 제 아버지의 집 대문으로
끌어내어, 그 성읍의 남자들이 그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
(신명22,20-21).고 되어 있습니다. 법대로 사는 요셉이 이러한 규정을
알진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1,19).고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결혼을 준비하며 꿈에 부풀었을 텐데 너무도 황당한
사실에 접하게 된 것이니 실망과 좌절감 속에서 마리아에게 망신을
주고 서운함을 되갚아 주어도 시원찮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드러낼 생각을 갖지 않았다니 그러한 마음이 어디서 왔겠습니까?
돌에 맞아 죽을 허물까지도 덮어줄 수 있었던 것은 사랑 때문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마리아를 사랑했기에 사랑하는
이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입니다. 사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요, 능력입니다. 그리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화를 다스리는 방법은
결국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니 지금까지 내가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사랑받았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1,20).했을 때
곧바로 자기의 생각을 접고 천사가 일러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군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뜻을 따른
겁니다. 깊은 신앙은 어려울 때 드러난다고 했는데 바로 이 순간이
그의 믿음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화를 다스리는 또 하나의 방법은
철저한 믿음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믿음위에 서 있는 사람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요셉 성인은 아주 사소한 일에도 마음 상하고 서운함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우리들의 모범이십니다. 의로운 사람이란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며 기쁘고 진실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요셉이 그런 분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의로움을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생각합니다. 무엇이든지 다 밝혀내서 드러내 놓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된 의로움은 사랑과 자비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요셉은 의로웠기 때문에 마리아를 공공연하게
고발하지 않고 오히려 보호하려고 애섰습니다.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결코 그것에 대해 알려고 하거나 해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받아들이고 살았을 뿐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의로움을 간직한 성인의 마음을 닮아야
하겠습니다. “믿는 이에게는 질문이 없고, 믿지 않는 이에게는 대답이
없다”고 합니다. 오늘은 사랑으로 그리고 믿음으로 화를 다스리시길
바랍니다.
“성 요셉의 침묵과 겸손, 절대적인 신앙이 있었기에 하느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당신의 뜻을 온전히 행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완전히 내맡겨 드린다면 그분은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가경자 알베리오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아버지 품안에서 우리의 구원자로 성장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다윗의 후손이셨습니다. 혼돈의 시대에 부국강병을 이룬
다윗시절에 대한 향수 때문에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이셨습니다. 믿음 안에서 요셉과
더불어 구세주 예수님을 제대로 바라봐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기타] 3월 19일 (화) - 노하는 자와, 성 내는 자
오늘은 ‘노 하는 자와, 성 내는 자’에 대하여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잠언 29장 22절 말씀에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성내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다툼을 일으킨 다고 합니다.
성을 잘 내는 사람은 범죄를 하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 주위에도 보면 이러한 성향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도
어린 아이 때 참 화를 잘 냈습니다. 그래서 나와 동행하는 사람은 같이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나가면 싸우고 오니까 나하고 외출하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
했습니다. 내 스스로 분노하고 내 스스로 성 내는 것입니다. 물론
이유가 있지요. 그 이유는 내 마음에 맞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아니하는 것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나’라는 기준이 나 스스로 분노하게 만들고 내
마음에 들지 않음으로 인하여 성을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성품을 그대로 이어받아 이 땅에 오셨습니다. 단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나를 따르라, 고기 낚는 법보다 사람
낚는 법을 가르쳐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깨서 결코 자기 기준에 맞지 아니하다고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나타내지 아니하고 하나님만 말씀 하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시고, 하나님이 원한다면 자신의 생각은 언제라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내 기준에 맞지 아니하다고 다투거나 성내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