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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불교를 말한다 ! 안녕하세용. 오랜만에 질문 드립니다!!
아사하2 추천 0 조회 258 23.03.14 01:27 댓글 73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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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3.03.22 22:30

    이런 저런 사정으로, 응답이 늦어질 것 같은데요. 이번 일요일까지는 제 생각을 적겠습니다.

    지금 다뤄지는 사항은 흔히 접할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명하진 않더라도, 한번쯤 자기 입장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저는 과거 적은 글에서 밝힌 입장과 같은데요. 제가 원래 잘 변하지 않습니다.

  • 23.03.23 10:03

    근신과 매를 버는 똣으로 말씀드림다..우몽의 십무기에 대한 위 질문은 아시다시피 아사히님이 방문객님에게 추가 질문을 한 것과 는 상관 없슴에 댓글 지면을 어수선스럽게 한 점 ,물은 이미 엎어져서 어찌할 줄을 모르겠습니다..쫄싹쫄싹 끼어드든 버릇이
    참 쉽게 안 고쳐지네요..ㅠㅠ

  • 23.03.23 07:36

    일단 십무기에 대한 제 생각은 ...사실인지 모르나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 그수많았던 부처님 제자들은 위 십무기 내용의 질문을 단 한 사람도 묻질 않았다고하데요...거의 외도들이
    부처님께 질문을 했다고하는 카더라 통신을 어디선가 접했는데..

    우몽은 그 카더라 통신을 듣고 ..탄복스러
    과연 부처님이요 그 제자들이시구나 하며
    무릎이 쳐졌는데 ..이윤즉슨 ..살다보면 대책없이 무식한 사람을 만나면 우몽도
    적지 않게 침묵이나 도망을 가거든요..

    해서 부처님께서는 그 자비로우심에도 째비도 안되게 무식한 넘들에게는 침묵을
    하신 거라 봅니다..그 증거가 부처님 제자들은 십무기 십자도 안 꺼냈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잖아요..

    이상입니다..


  • 23.03.23 07:52

    아!! 그러므로 우몽은 비록 카더라지만 우몽 나름 다양한 식견을 장착하고 덫을 놓은 것인데 자비로운 아사하님이 덥석
    무시고는 시공간이며 수와질량이며 거리감등을 운운키에 우몽 식견으로 생각기에는 아사하님은 아..공부는 많이하신 거 같은데..무식한 지경도 있구나 싶었던 거죠..세상은 누구나
    지 맘대로 무식할 권리도 있슴에 타인에게 크게 상처만 주지 않으면 된다고 봅니다..설령 상처를 입더래도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하고 개물린셈
    치는 권리도 있습니다..아이고 말이 어디로 가는지 ..더 했다가능 ..ㅜㅜ



  • 작성자 23.03.23 14:38

    안녕하세요. 우몽님, 주신 질의와 답변 모두 문제없어 보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 23.03.23 16:47

    @아사하2 덕분에 질 좋은 수혈을 받은 듯합니다. 무례를 용서하시고 앞으로도 유익한 법담
    이끌어 주십시요..()..

  • 23.03.24 04:23

    @우몽 아참 !! 공은 공이고 사는 사라는 말도 있는데 저는 좀 뒤끝 작렬이라서요..

    위 우몽의 덫에 .. 아사하님은 이렇게도 번호를 매기셨네요.. 그 또한 우몽이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봅시다..

    1. 담백하게 저의 상태(견처?)로는 전혀 설명되는 것도 없고 유추할 수도 없습니다^^;;;;;;;;;;;;;

    .......

    위 1번은 혹 아사하님의 눙침이 아닙니까?

    설마 아사하님의 그 동안의 공부로서 위 십무기에 대해서 설명되는 것도 엄고 유추할 수도 없었습니까?

    그렇담 .. 이미 여러모로 생각해 봤다는 지경의 결론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어쩐지 아사하님이 은근히 눙쳐서 뭔가를 숨기는 자세의 스킬이
    아니냔 말이죠..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작성자 23.03.24 05:17

    @우몽 우몽님. 저도 공은 공이고, 사는 사인 사람인데요.

    공과 사를 나눠서 말씀드리자면, 지금 뭐가 문제냐면요.
    제가요..사실 우몽님과 법거량을 하는 것에 별 관심이 없다는게 문제입니다.

    이게 저의 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굳이 눙침이라 표현하자면, 맞는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함께 법담을 나누고, 공부하면 좋겠지만요.
    거칠게 말하면, 서로 깔고 앉은 방석 들춰보면서 노는 것이 뭐가 즐거운지 저도 아는데요.

    개인적으로 현실의 일도 바쁘고, 시간은 새벽에 밖에 나질 않고,
    또 제 위치가 어디인지를 너무나도 잘 알기에 그런 놀음을 통해 무익한 단물을 얻기 보다는 방문객님의 말씀을 듣고 공부하고 싶은게 저의 바람이라, 그냥 조용히 좀 넘어가고 싶었던 겁니다.

    이것이 눙침?이 없는 저의 본심입니다.

    다만, 다시 말씀해주시니 마지막으로 답변 드리겠습니다.
    (사실 거래처에 주기로한 서류를 다 몬만들어서 회사에 있는데, 졸려서 일하기가 싫거든요^^ㅋ)

    1. 무엇보다도 처음 주신 질의와 관련하여서요.
    고민하다가 답변 드렸다는 저의 글은, 같은 질문도 그 의도하는 바가 다르기에, 주신 질문의 의도를 고민하다가 답변을 드렸다는 말씀이었습니다.

  • 작성자 23.03.24 05:03

    @아사하2 2. 십무기와 같은 질문에 대한 논의는요. 도판에서 금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아주 뿌리 깊은 역사를 가진 본질적인 질문이며 많은 이들이 적극적으로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무언가입니다.
    당연히 기독교와 힌두를 포함한 거의 모든 종교의 주요 담론이기도 하구요.
    불가에서는 십무기의 설화로 묶여서 전해내려올 만큼 뿌리가 깊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의 십무기 설화는 그 자체가 위와 같은 뿌리 깊은 질문에 대한 불교의 답변이기도 합니다.

    우리 부처님은 위와 같은 질문에 '대답하지 않음'이라는 대답을 한 것이랄까요.

    그런 의미로, 십무기와 관련하여 논의하거나, 답변하거나, 생각해보는 일은 도판에서 상당히 흔한 일입니다.
    우몽님이 뜬금없이 지나가는 아사하에게 그러한 질문을 던질 정도로 흔한거란거죠.

    그런 즉, 당연히 우몽님도 이런 맥락을 아시리라 간주했고, 설마 저에게 '저 썰에 답변하면 너는 바보'라는 이상한 놀음을 했으리라고까지는 생각을 못한겁니다.
    그냥, 니 깔고 앉은 자리가 뭐냐 정도의 잽이랄까요? 그 정도로 생각을 한겁니다.

  • 작성자 23.03.24 05:18

    @아사하2 근데, 본 글에서 제가, 현재 제가 깔고 앉은 자리가 무엇인지를 방문객님께 여쭤본 것이 아니고,
    우몽님께서는 제 자리를 들춰볼 이유도 없으시니, 위 담론에서 언급된 K-선의 견처와 관련하여 십무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측면에서 답변했을 뿐입니다.

  • 작성자 23.03.24 05:33

    @아사하2 3. 제가 좀 깎아 내리기는 했지만, 위에 K-선의 많은 수행자분들은 뭐가 많이 부족한 사람들이고, 밥 먹을 가치도 없을 정도로 기초가 없어서 십무기에 답변을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리자면, 당연히 그렇지 않다는 말씀도 드립니다.
    다들 현실 열심히 살면서 그 와중에 공부하고, 배우고 똑같이 고민하는 분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도 불자에게 있어서 해당 질문의 의미 정도는 당연히 이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그들은, 불자이면서도, 굳이 위와 같은 질문에 대답을 하려고 하는가 하면요.
    말씀드린대로 십무기 자체가 매우 중요한 담론이기도 하거니와 불자로서의 어떤 이상한 의무감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무감이란 이런 것인데요.

    "부처님은 십무기에 대해 답변을 못했잖아?" 라는 의문에 일종의 항변을 하고 싶은 마음 같은거죠.

    "아니, 우리 부처님이 지금 그걸 몰라서 답변 안하셨겠습니까?"라고 말하는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그런 답변들 중에, '십무기 질문 자체가 말이 안되기에 답변을 안한 것이다'라는 논지를 펼치시는 분들 '도' 많은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 작성자 23.03.24 06:15

    @아사하2 그리고 그 분들은 마치 '슬픔이 포유류입니까?파충류입니까?'라는 질문과 같이,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입장으로 말씀들 하시는 것이죠.
    또 그들이 나름의 견처(인상,느낌)에 수승한 의미[이것이 부처님의 깨달음이다]를 부여하기에, 그러한 견처의 인상을 기반으로, '존재는 있거나 없거나 한 개념이 아니고, 시간 역시 흐른다는 개념이 아니기에, 애초에 질문이 성립되지 않습니다'라고들 답변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더불어, 우몽님의 질문이 제가 여쭙지 않은 제 자리에 대한 질문이었으니,
    저도 위와 같은 인상은 알고 있다는 말씀과 함께 이러한 인상에 기반한 십무기의 주관적 추론은 비약적 사고의 산물로 보이기에, 바른 답이 아닌 것 같다는 답변을 애써 드린 것일 뿐입니다.

  • 23.03.24 08:41

    하따~ 고거 참 ..

  • 23.03.28 01:22

    지적에 대한 답글이 좀 늦어질 것 같습니다. 미안함니다. 가능한한 빨리, 늦어도 이번주까지는 적겠습니다.

  • 23.04.03 00:18

     입장 표명이 많이 늦어졌습니다. 늦어져 미안하고, 기다려줘 감사합니다. 가급적 이미 적은 내용과 중복 피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1. 근간[제행무상, 제법무아]의 동의 속에 결론[공성의 체득]의 분열도 있을 수 있지 않았을까?

     불교가 아닌 것은 불교가 아닌 것이지, 불교가 아닌 것이 불교로 변신하지는 않습니다. 결론에서 달라졌는데, 불교라는 이름으로 묶어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기독교 내부 논쟁이 있더라도 창조주임을 부정한다면 기독교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현실적 이유로요. 세속화된 현대 사회에서 불교를 표방하는 종교집단들이 서로 사이비라고 비난하며 다투는 것은 별로 재미 엄는 일입니다. 대중에게 불교 이미지만 나빠질 수 있거든요. 그러니 불교 종파 지도자가 불교를 표방하는 여타의 특정 집단을 사이비라고 매도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입니다. 이런 경우, 불교를 잘 드러내서 분별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수만 있을 뿐입니다.
     또한 역사적으로, 바르게 성립했던 종파가 어느 순간 그르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종파 내부적으로 문제 해결을 하지 못한 경우, 그 종파는 역사적으로만 불교였을 뿐입니다. 즉 더 이상 불교라고 할 수 없을 겁니다.

  • 23.04.03 00:51

     위의 두가지 어떠한 경우라도, 현실적 역사적 그 어떤 경우이든, 불교가 아닌 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불교가 아니라고 배척할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불교가 아닌 것은 불교가 아닐 뿐입니다.

     불교의 여러 종파는 불교의 여러 모습입니다. 하지만 불교라고 할 수 있은 다음에야, 불교의 여러 모습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애초에 불교가 아닌 것은, 불교가 아닐 뿐, 불교의 여러 모습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2. 화두선 등을 행하는 선불교는 게송으로 견처를 확인하는가?

     만약 화두선 등에서 스승이 게송만으로 제자의 견성을 확인한다면, 그야말로 황당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중에 떠도는 그런 형식의 게송만으로는 알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이지, 알 수 없는 것이 알 수 있는 일이 되지는 않습니다.
     불교에서 스승이 제자의 견처를 유추해야 할 필요성이 없습니다. 그 사람의 견처가 일차적으로나마 불교의 견처라고 이름해줄 수 있는지 아닌지는, 그냥 조금만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보면 너무나 쉽고 자명하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견처가 존재 표상인 것은, 요가등이지, 불교가 아닙니다.

  • 23.04.03 01:15

    .
     3. 1) 오직 연기만이 사실일 때, 연기 그 자체로서 무한히 전변하여 가는 것 외에 연기를 떠난 무언가가 되는 것은 없는 것일까?

     연기만이 사실이라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연기가 아닌 무언가인 경우를 상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째서 그런가? 사실이 아닌 무언가가 사실로 있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즉 연기가 사실이라면, 연기로 성립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조건에서 연기만이 사실이기에, 우리는 연기에 따라 성립합니다. 하지만 "연기에 따라 성립한다"는 것이 "연기 그 자체로서 무한히 전변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연기는 연기 그 자체라 할만한 어떤 실체를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연기에 따라 A가 성립했다 멸하고 B가 성립했다"고 하여, A라는 사실과 B라는 사실에 공통된 실체로서의 연기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냥 A가 연기에 따라 성립했다 멸했고, B가 연기에 따라 성립했을 뿐입니다. A와 B 모두 연기에 따라 성립했다고 하여, A와 B에 공통된 연기@를 상정할 수 없다는 겁니다. 어렵지 않죠?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찾는데요. 무언가를 찾기에, 늘 그 무언가인 겁니다.

  • 23.04.03 01:53

    여기서 갑자기, 최근 눈꽃님이 올린 법구경 제11장 늙음의 품 제 11장 늙음의 품 8번과 9번 게송이 생각나네요.
    <<
     나는 집을 짓는 자를 찾으며
     그러나 발견하지 못하고
     많은 생애의 윤회를 달려왔으니,
     거듭 태어남은 고통이다.

     집짓는 자여, 그대는 알려졌다.
     그대는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꺾였다.
     많은 생애의 윤회를 달려왔으나,
     마음은 형성을 여의고
     갈애의 부숨을 성취했다.
    >>
     이야기하다 보니, 부처님의 게송을 가져왔는데요. 위의 게송만 가지구요, 비록 부처님의 게송이지만요, 저런 게송만 가지고 누군가를 깨달았다고 평가하거나 단정한다면, 그거 정말 코미디입니다. 선불교가 그런다면, 선불교는 불교 종파가 아니라 그냥 개그맨 모임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 중생에게 자신안에 그 어떤 실체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중생에게 자아만큼 사랑스러운 것은 없는데, 그 사랑스러운 것이 그 어떤 실체도 가지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윤회합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춰 냉정히 평가하면요. 중생에게는 윤회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두려워 하기에 중생은 윤회합니다.

  • 23.04.03 02:01

    중복을 피하고 싶지만 다시 한번 위에 언급한 부처님 말씀을 가져오겠습니다. [ 괴로움이 아닌 것, 절대적인 것, 항상하는 것등이 있다면, 그것을 '나'로 취하고 '나'로 삼아라. 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 그렇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것을 소멸까지 알려졌음에도 발견하지 못하셨습니다. 없는 것을 갈구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래서 수용하셨습니다. 두려움을 떨치셨죠. 그렇기에 위에 언급한 법구경의 게송을 읊으시게 된 겁니다.

     3. 2) 연기의 확증은 조건지어진 것이 아닐까?

     연기에 따라 성립하는 일체는 조건지어진 겁니다. 그리고 일체는 연기에 따라 성립합니다. 그러니 연기의 확증도 연기에 따른 성립입니다. 따라서 연기의 확증도 조건지어진 겁니다. 이 역시 너무나 자명합니다.

     조건지어진 일체는 즉 형성된 일체는, 꿈 환상 거품 그림자와 같이 실체가 없고, 해가 뜨면 사라지는 이슬이나 번쩍이는 번개와 같이 찰나적이어서 무상합니다. 금강경 사구게죠?

     그런데요. 여기서 두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는요. 연기의 확증으로 더 이상 태어남이 없다면, 더 이상 연기의 확증은 필요하지도 않고 더 나아가 성립하지도 않습니다.

  • 23.04.03 02:21

    태어나지 않았는데, 연기의 확증만 홀로 성립해 있겠습니까? 연기의 확증이 성립해 있다면, 태어난 거죠. 연기의 확증이 유위법(조건지어진 것, 형성된 것)이니까요.
     둘째는요. 연기의 확증에도 태어난다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연기의 확증을 조건으로 태어남이 있는 흐름이 형성될 거라는 점입니다. 연기의 확증에 조건지어진 상태가 형성될 거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연기의 확증에도 불구하고 완전 도루묵이 되는 것을 상정함은 연기의 이치에 반합니다. 만약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면, 악업으로부터도 완전 도루묵이 될 수 있을 거구요. 결국 연기의 또 다른 모습 중 하나인 인과의 부정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소위 우연론이라고 하는 단견이 되버리죠.

     결국 어떤 경우이든요. 굳건하게 자신을 세우는 삶을 살면 별 문제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스스로의 행위가 스스로를 규정하는 것이, 우리가 조건지어지는 방식입니다. 이러한 점이 선명하면 그만큼 수행의 무상등과 관련한 두려움도 스러지기 마련이고, 이 또한 연기의 확증이기도 합니다.
     어떻습니까? '연기의 확증'이란 것이요. 일차적 그러니까 기본적인 사항들만 놓고 봐도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죠? 특정 경계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렇습니다.

  • 23.04.03 03:00

    ===

     저는요. 멸진정, 소멸요. 알려지면 좋고 알려지지 않아도 그만이라고 생각하구요. 소멸만이 아니라 그 어떤 경계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알려지면 좋은 거니까, 그런 경계들이 무용하지는 않겠죠? 다만 알려져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뿐입니다.
     어쨌건 그 무엇이든 자신에게 의미 있고 수행에 도움이 될만한 어떤 경계가 알려진 경우, 그 경계가 무엇이든 그 경계에 의지하면 편리한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편리함이 그 어떤 경계여야만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이와 관련한 제 생각은, [현재의 기억] 게시판 50번글 [ 숫따 니빠따 ( 경전 모음 ) 05-07 우빠시바 ]를 한번 훑어봐도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

     부족하거나 미진한 부분은 지적하시면 됩니다.

     여담으로 몇 자 적습니다.
     연기가 무엇인지 고찰하는 것이 반야부 경론인데요. 중론등의 언명에서 출발하면 엉뚱한 길로 들어설 위험성이 제법 있습니다. 그러니 니까야나 아함부등에서 말하는 내용에 입각해 과연 연기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중론등의 언명에서 생각하기 보다는, 니까야나 아함부의 언명에서 중론등의 언명을 도출하려고 노력하면 그르칠 위험이 낮습니다.

  • 작성자 23.04.11 21:55

    바쁘신 와중에 답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연기의 확증과, 연기의 확증으로 인한 다시 태어남이 없음 등..적어주신 내용에 대해 공부를 한참 많이 해보아야 될 것 같습니다.

    공부 좀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 23.04.12 03:15

    좀 시간이 걸려도 분명히 대응하니까, 이상하거나 분명하지 못한 부분은 가급적 지적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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