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잠은 두 아들과 딸을 비롯 7명의 학사와 함께 뱃길을 통해 고려로 망명을 한다. 나주에 첫발을 내디뎠으나, 이후 원나라의 압송 요구를 피해 능성(화순 능주)으로 숨어들었다. 신안 주씨(新安 朱氏)의 시조가 됐다.
화순 주자묘는 1978년 들어섰다. 신안 주씨 문중에서 1905년 창건한 영모당(永慕堂)이 출발점이다. 여기서 해마다 5월 5일 제례를 지내고 있다. 주자묘 옆 동원사에는 청계공 주잠을 주향으로 모시고 있다. 주잠의 묘도 비탈에 자리하고 있다. 묘역이 그의 태자리인 중국 쪽을 향하고 있다.
▲ 한낮에 역광에 비친 주자 동상과 사당. 한적한 농촌마을인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에 자리하고 있다.
정율성은 10살 때 다시 광주로 옮겨가 숭일소학교를 졸업했다. 19살 때(1933년) 독립운동을 하던 형들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전사로 활동했다. '중국인민해방군가(팔로군행진곡)' '연안송' 등을 작곡했다. 중국에서 '군혼(軍魂)'으로 추앙받고 있다.
샹치엔(向前), 샹치엔(向前)으로 시작되는 중국인민해방군가는 대륙을 집어삼키려는 일본에 맞선 인민해방군들에게 진군의 나팔소리였다.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선포할 때 불렸다. 중국 건국 60주년 기념식에서도, 2015년 9월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중국 전승절 70주년 기념행사에서도 불려졌다.
화순군 능주면 관영리에 정율성의 옛집 터가 있다. 화순군이 기념사업을 할 목적으로 최근 사들였다. 기념사업은 내년까지 기념관 건립, 주차장 조성, 주변 정비 등으로 추진된다.
▲ 화순 능주초등학교에 세워진 정율성의 흉상과 타일 벽화. 능주초등학교는 정율성이 어렸을 때 다녔던 모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