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만주 독립운동 사적지 탐방문(2차)
영주 순흥초등학교
김정한
1. 탐방 목적: 경북인이 펼쳐나간 해외 독립운동 사적지를 탐방하여 선열들의 애국애족정신을 되새기고, 경북인의 독립운동관련 유적지를 관광·교육의 장으로 개발하고자 함
2. 탐방 장소: 중국 만주 독립운동 유적지(심양시,단동시,집안시,통화시,통화현,길림시,서란시,하얼빈시)
3. 탐방 기간: 2018.7.23.-7.28(5박6일)
4. 답사 일정 및 느낀 점
가. 첫째 날 7월23일(월)
이른 새벽 3시 탐방에 대한 기대와 설레임 속에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서 초.중.고 교원 및 경상북도청 직원 2명, 농협인, 사진작가, 시나리오 작가, 인솔 담당자 2명 등 37명이 집결하여 부산국제공항까지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직원의 안내를 받아 오전 6시 출국수속을 밟고 8시 30분 출발 예정이었으나 40분 이상 지연되어 9시30분 정도에 아시아나 비행기가 이륙하였다.
12시 정도에 심양공항에 도착하여 연길 출신 조선족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점심식사를 마치고 청나라 초대 황제인 누르하치와 2대 황제 태종이 선양에 건립한 궁과 일제의 침탈로 이루어진 일명 만주사변의 발생지에 건립된 기념관을 방문하였다. 웅장하고 화려한 궁전이고 지은 지 350년이 넘는 현재가지도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으며 고궁의 한 귀퉁이에는 독서당에 조선의 소현세자가 볼모로 잡혀와 있었다고 한다.
나. 둘째 날 7월24일(화)
오전 7시 아침식사 후 오전 8시 단동의 호텔을 출발하여 전세버스(55인승)를 타고 단동시에 도착하여 수많은 경북의 독립운동가들이 망명과 독립운동을 위해 드나들었었던 곳 6.25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끊어진 단동철교(단동-압록강)에서 북한의 신의주 모습을 보고 멀리 이성계가 명나라 정벌군을 돌려 조선창업의 뜻을 결행한 위화도를 볼 수 있었다. 아쉽게도 우리나라 한반도 땅인 신의주와 위화도를 멀리 눈으로만 보고 단동대교로 왕래하는 북한의 묘향산 관광버스만 목격하여 통일의 염원이 간절하였다. 현지 가이드의 말을 들어보니 미군이 압록강 단동철교 폭파 시 중국의 건물이 파괴되고 목숨을 잃는 사람이 발생하였고, 평소 장개석 총통이 나라를 다스린 자유중국(대만)을 지원한 것에 대한 불신으로 감정이 좋지 못하던 중국이 6.25 전쟁 당시 90만 명의 중국 군인을 지원하여 1951년 1.4 후퇴를 하는 계기가 되어 평화통일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었다고 하니 탄식이 저절로 나왔다.
신의주와 마주한 단동은 수많은 동포들이 먹고 살기 위해 이곳을 넘나들었고, 애국지사들이 압록강을 건너 이곳으로 왔으며, 석주 이상룡 선생도 포함되었다고 한다.
점심식사 후 이어서 고구려의 수도 집안을 방문하여 광개토대왕비와 능, 장군총, 5회분 등을 답사하였다. 집안시는 중국 길림성 남부에 위치하고 고구려 중기 이후의 유적과 유물이 많다. 고구려 수도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고 유적이 8개소, 30여 개소의 고분군에 1만 3,000여 기에 이르는 고구려 최대의 무덤들이 있다. 가장 주목되는 것은 고분벽화로 봉토석실분에서 발견되고 고구려인의 사회생활과 문화의식 등을 연구하는 기초 자료가 되고 있다.
장군총은 동방의 피라미드라고 일컬어질 만큼 크고 웅장함에 그 특색이 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 19대왕인 광개토 대왕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 그이 아들 장수왕이 세웠던 거대한 비석인데 눈으로만 관찰하고 고분벽화와 마찬가지로 사진촬영을 금지하여 아 쉬움이 감돌았다. 5회분(다섯 개의 대형 투구 무덤)5호묘(다섯 개 고분이 일렬로 나란히 서있는 고분군 중 하나로 봉토분)는 보존상태가 불량해 상당히 훼손되었다. 집안시 맞은편에는 북한의 만포제련소가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다. 셋째 날 7월25일(수)
오전 7시 아침식사 후 오전8시 호텔을 출발하여 통화시에 도착하였다. 1911년 독립운동기지 건설의 중심지 자치단체 경학사가 조직되고, 신흥강습소가 설립된 곳인 유하현(삼원포, 추가가)은 석주 이상룡과 김대락의 주요 활동지고 서간도 독립운동지의 중요한 발원지였다. 일성학교, 은양학교, 삼성여학교, 동명학교 등이 세워져 민족교육을 담당할 주역들을 길러냈다. 버스를 타면서 차창 밖을 보니 대부분 논과 밭에는 옥수수가 재배되고 있었으나 통화현에는 땅이 비옥하여 집단적으로 인삼을 재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유하현에 정착하였던 한인지도자들은 통화현 합니하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일정한 군사훈련과 중등교육과정을 가르칠 수 있는 교육기관을 갖추어 식사와 열악한 생활환경 속에서 주린 배를 움켜잡고, 강한 정신으로 무장한 독립군으로 거듭났다. 김동삼이 이끄는 소백차 백서농장은 교통이 불편하고, 물자가 부족하여 영양실조와 각종 질병으로 한계 상황에 시달리다가 1919년 3.1 독립만세 후 한족회의 지시로 문을 닫았다. 지금의 모습은 옛날의 흔적은 없고 옥수수만 볼 수 있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1919년 서로군정서가 만들어지자 주력군이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연길에서는 김좌진을 중심으로 북로군정서가 만들어졌다.1920년 10월 청산리전투 중심에는 이상룡과 김동삼, 그리고 안동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의열단 결성지인 길림시(현재 지린시)에는 옛 모습은 흔적이 없고, 6층 건물이 들어서 있다. 바로 앞에는 지린시 사법국(법률중심)이 있는데, 과거 길림감옥이었다. 길림 대검거사건으로 안창호 등 수십 명 피체가 있었던 대동공장 사적지와 만보산사건 토구회 사적지를 둘러보았다. 현재 시가지가 변하여 예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개인 주택이 들어서 있었다.
라. 넷째 날 7월26일(목)
오전 7시 아침식사 후 오전8 길림시의 호텔을 출발하여 하얼빈 출신 조선족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1926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사임하고 만년을 보내며 손자 이병화 등 청년애국지사들의 활동을 지원했던 곳이고 이후 1932년 그곳에서 순국한 석주 이상룡 순국지(옛묘터) 서란현 소과전자촌을 찾아 옥수수 밭에서 애국가를 부르고 묵념을 하며 애틋한 마음이 들어 숙연해졌다. 또한 석주 이상룡, 아들 이준영, 손자 이병화 등 3대 독립운동가로 길이길이 남을 것이다. 차창 밖으로는 끝없이 펼쳐진 평야(벼 재배)의 모습이 보였다. 오후 안중근의 의거지 하얼빈 역은 1926년 10월 26일, 안중근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사살한 곳이다.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은 안동출신의 김동삼과 영양출신의 남자현 여사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잡혀와 고초를 겪었던 곳인데 현재 화원소학교가 자리 잡고 있었다.
마. 다섯째 날 7월27일(금)
오전 7시경 아침식사를 하고 8시에 하얼빈의 호텔을 출발하여 인류에 대한 일제의 잔악한 행위를 엿볼 수 있는 곳인 일본 관동군 731 세균부대 유적지로 갔다. 대부분 희생자는 중국인이지만 우리나라 독립군도 포함되어 있어 마음이 너무 아팠다.그리고 1920년대 경북인이 개척한 독립운동 기지이자 하동농장이 있었던 곳이자 석주 이상룡의 유해가 묻혀던 곳인 취원창에서 애국가와 묵념을 하면서 애국애족의 정신을 가다듬었다. 취원창에는 현재 한인들이 살고 있지 않다고 한다. 그 후 항일투쟁의 결과가 동북항일연군의 조직과 활동을 엿볼 수 있는 동북항일연군박물관을 관람하였다.
바. 마지막 여섯째 날 7월28일(토)
오전 7시30분에 아침식사를 하고 9시에 하얼빈의 호텔을 출발하여 조린공원에 도착하였다. 1909년 10월 23일 안중근 의사가 구체적 거사를 논의한 장소이고 손도장과 함께 옥중에서 쓴 창초당과 연지의 글귀를 새긴 유묵비가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안중근기념관에 도착하였다. 안중근기념관 내부에는 안중근의사의 사진과 유필, 손도장, 흉상과 단지 한손을 형상화한 청도 조각품 거룩한 손, 안중근의사가 의거를 결행하기까지 하얼빈에서 보낸 11일간의 행적, 체포된 뒤 뤼순 강옥에서의 수감 생활 등을 엿볼 수 있는 각종 사진과 사료 등이 한국어와 중국어로 병기된 설명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점점심사 후 잠시 중국인들의 결혼식을 구경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많은 하객들이 참석하여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축하해주는 모습을 보았다. 오후 12시30분 하얼빈 공항에 도착하여 출국수속을 마치고 오후 14시30분 출방예정이었으나 1시간 연기되어 15시30분 아시아나 여객기기 이륙하여 18시30분 정도에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여 버스로 이동하여 23시35분 경 안동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도착하였다.
5. 2018 만주 독립운동 사적지 탐방을 마치고
중국은 참 이상한 나라이다. 그들은 이민족에 의해 성장한 나라 같다. 자신들은 중화사상을 고집하며 이민족을 오랑캐라 지칭하고 멸시해 왔지만, 그 이민족인 몽고족은 땅덩어리를 넓혀주고 물러났고, 만주족은 문화적으로 난숙한 강희 ․건륭 시대라는 최성기를 이룩해 주지 않았던가. 그리고 근대화 무렵엔 서양인들의 조차지였던 땅들을 자국의 힘이 아닌 다른 나라의 힘으로 되찾으면서 서양인들이 남겨놓은 건물과 기술로 관광, 무역, 경제 등의 중심도시로 키워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민족에게 침략을 당할 때마다 땅덩어리가 피폐되는 것도 모자라 문화적으로 말살 당하고, 역사적 사료까지 강탈당하면서도 아무 말 못하는 우리나라와 비교된다.
그리고 중국인들은 교통질서를 잘 지키지 않고 화장실이 깨끗하지 못한 점은 개선되어야 하겠고 교통신호등의 시간(초)을 표시하는 점은 운전자에게 많은 도움이 되겠으며 우리나라도 실시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연변박물관 교수와 조선족 현지 가이드 2명께서 역사에 대해 자세한 안내가 있어 어느 해외 연수보다 질적으로 우수한 답사가 되었던 것 같아 감개무량하다. 그리고 호텔에서 출발하기 전 빠뜨린 물건을 찾아주는 친절한 모습이 매우 감명 깊었다.
이번 중국의 만주 독립운동 사적지를 둘러보면서 높아진 대한민국의 국력신장에 자랑스러움과 함께 선진 일류국가로 도약하는데 초석을 다지는 대한민국의 교원이 될 것을 다짐해 본다.
또한 만주 독립운동 사적지 답사는 단순한 관광성이 아닌 해외 선진문물을 경험한 잊혀 지지 않는 유익한 답사였다고 생각하며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을 비롯하여 경상북도청 등 관계자께 다시 한 번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초. 중. 고 교원들의 안목과 자세가 달라질 수 있도록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가 주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이렇게 5박6일의 만주 독립운동 사적지 답사는 영원한 추억에 남도록 길이길이 간직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