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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찾아서 나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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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웅의 푸른나무 스크랩 초례산과 의병장 황경림의 느티나무
이팝나무 추천 0 조회 120 08.11.15 22:02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의병장 면와 황경림이 임란을 마치고 이 곳에 입향하면서 심었다는 느티나무, 시내의 다른 느티나무와 달리 잎이 말라 혁신도시에의 편입을 몸으로 거부하는 것 같다.

 태조왕건이 팔공산 동수에서 견훤을 치고 이 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낸데서 이름이 유래된 초례산, 그러나 일부 사람들에 의해 새부인을 맞기 위해 혼례를 치른 산이라든가 산보다 격이 낮은 초례봉으로 부르고 있어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의병장 면와 황경림이 은거하며 후학을 가르치던 곳에 세워진 승방재


조상들이 물려준 이 땅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돌멩이 하나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전래된 지명의 유래가 잘 못 불러짐은 물론 조상들이 대대로 불러오든 땅이름을 바꾸는 것조차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필자의 생각과 달리 최근 수성구의 내곶동(內串洞, 곶은 관으로도 읽힘)이 대흥동(大興洞)으로, 달서구의 파산동(巴山洞)이 호산동으로 바꾸어졌다. 내곶의 곶(串)자가 내환(內患) 즉 집안의 걱정을 의미하는 환(患)자와 비슷해서, 파산동을 기업 활동의 최악상태를 의미하는 파산(破産)과 발음이 같다하여 주민들이 건의해 바꾼 것이라 한다. 바꾼 후  과연 그런 효과가 일어날 것인가 두고 봐야겠지만 이름을 바꾼다고 가정사 걱정거리가 다 없어지고, 파산하는 기업이 발생하지 않을 것 같지는 않다. 또 이런 사례와 달리 특정 지명(地名)을 자기 멋대로 해석해 왜곡시키는 사람도 있다.

단풍이 짙게 물든 가을 날 오후 동구에 있는 동내동(東內洞)을 찾았다. 나말(羅末)에는 한반도의 패권(覇權)을 놓고 왕건과 견훤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곳이며, 임란 시에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의병들이 활동했던 초례산(醮禮山)과 은퇴한 후 이 곳에 자리를 잡아 여생을 보냈던 면와(勉窩) 황경림(黃慶霖, 1561~1625)이 심은 느티나무와 그가 후학을 가르쳤던 곳에 세워진 승방재(勝芳齋)을 보기 위해서 이다.

특히, 인근 마을의 모(某)씨가 초례산을 두고 고려 태조 왕건이 혼례(婚禮)를 치른 곳이라는 데서 이름이 유래되었고, 면와의 재사였던 승방재를 두고 왕건이 28번째 부인을 맞은 초례청(醮禮廳)이었다고 인터뷰한 기사가 보도되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살펴보려는 의도도 있었다.

마을 초입에서 깜짝 놀랐다. 일부 가옥의 문짝이 뜯겨나가고 없는가 하면 가구가 마당에 팽개쳐져 있어 폐허와 같았기 때문이다. 주위를 살펴보니 마을 전체가 새로 조성하는 혁신도시에 포함되어 어떤 집은 보상을 받고 나가 빈집으로 놔둔 것과 보상을 안 받았는지 아직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 뒤섞여 있었다.

골목 곳곳에는 언제까지 철거해 달라는 시공사의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비록 잘 살게 하려는 것이겠지만 새로운 도시 건설이라는 것이 오래 동안 오순도순 살아오든 한 마을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 버려는 구나 생각하니 기쁘기보다는 서글픔이 앞섰다. 의병장 면와가 마을에 자리를 잡으면서 심었다는 느티나무는 온전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잎이 바짝 말라 있었다. 한창 단풍이 곱게 든 시가지의 느티나무를 보고 공해도 없는 곳이니만큼 단풍이 잘 들었을 것이려니 생각했었는데 실망이 컸다. 문득 이 나무도 온몸으로 도시화를 원망하는 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밭일을 하는 아주머니께 물어보았더니 다행히 보존된다고 했다. 몇 년 전 이 나무로 인해 통성명을 했던 후손 황봉하(黃奉河)님을 다시 만날 행운이 주어지러나 하는 마음으로 집을 찾았더니 마당에 서 있던 황 선생이 5년 전 딱 한번 만났을 뿐인데도 금세 알아보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분 역시 교수로 있다가 은퇴하여 전원생활을 하려고 새로 집을 장만했었는데 개발대상지에 포함되어 보상은 이미 받았지만 새로 얻은 아파트생활이 익숙하지 못하여 통 잠을 들 수가 없어 공사가 시작될 때까지 수돗물만 끊지 말아 줄 것을 일부러 부탁해 내외분이 이곳에서 지낸다고 했다.

그분 역시 최근 신문기사에 크게 분개하고 있었다. 선조(先祖) 면와가 은거하며 후학을 가르쳤던 승방재(勝芳齋)를 태조 왕건이 29번째 부인을 맞은 초례청이라고 소개한 사람에 대해 매우 못마땅했다. 나는 초례산이 태조 왕건이 혼례를 치러 부쳐진 이름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이야기해 주었다.

검증도 없이 아무렇게나 말해 본래의 뜻을 왜곡된 초례산의 유래는 16세기에 간행된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잘 정리되어 있어 과장이나 상상력이 동원될 필요가 없다. 산천 조에 ‘재현서이십리고려태조정견훤우동수등차산제천고내명위(在縣西二十里高麗太祖征甄萱于桐藪登此山祭天故내名爲)’ 즉 ‘고려 태조가 동수에서 견훤을 치고 이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지었다’고 했고 그 후에 간행된 <하양읍지>에도 같은 내용의 기록이 있어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도 혼례를 치러 지어졌다거나, 서무례산(西無禮山)이라는 엉뚱한 이름도 등장한다. 또한 산보다 격이 낮은 초례봉으로 부르고 있는 점도 매우 안타깝다. 문헌은 물론 선각자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에도 분명히 초례산으로 되어 있으니 이후 더 이상 오류나 성산(聖山)의 이미지가 훼손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의병장 면와 황경림의 활동을 기록한 <경산의 의병항쟁, 2000, 경산문화원)에 의하면 그는 주로 하양과 그 인근지역에서 활동했다. 다시 말해서 자기지역을 잘 지켜 고을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곧 나라를 지키는 일이라고 믿었다. 그가 다른 의병장과 힘을 합해 왜적을 소탕한 지역은 하양에서는 와평, 초례산, 도리천, 금호강 등이고 인근 고을로는 경산에서는 반야, 창암 전투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양에만 머물며 적을 기다렸다가 토벌하는 소극적인 태도도 아니었다. 왜적이 날 뛰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영천성 전투가 그랬고 달성전투가 그랬다. 심지어는 망우당 곽재우가 주장으로 있던 화왕산 수성전투에도 참가했다. 1595년에는 권응수 장군과 합세해서 창암전투에서 왜적을 토벌했고, 대구의 의병장 서사원이 주도한 팔공산 에서 이루어진 공산회맹(公山會盟)에도 그의 이름이 보인다. 정유재란을 맞아서는 명(明)의 지원군과 함께 무진에서 왜군을 격파했다. 특히 그가 주목받을 만한 인물이었던 점은 이러한 눈부신 활약에도 불구하고 공적을 일체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그마한 공적을 부풀려 수많은 사람이 공신이 되었지만 그는 그것을 외면했다. 오히려 왜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초례산 중턱 양지바른 곳에 은거하여 후학을 가르치는 것으로 만족했다. 후손 봉하씨는 이 점 매우 아쉽다고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 해가 저물려고 했다. 봉하씨가 승방재를 가보자고 했다. 걷기가 다소 불편해 한때 면와를 기리던 동호사(東湖祠)만 보고 오려고 마음먹었었는데 산을 오르려니 숨이 가빴다. 그러나 그의 정성에 못 이겨 발걸음을 옮겨 승방재에 다다랐다. 오래 손을 보지 아니하여 많이 퇴락했으나 그나마 원형은 보존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해 서둘러 산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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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8.11.22 08:17

    첫댓글 전국 곳곳의 알려지지 않은 유적지들은 이정웅 선생님 오시기를 많이 기다릴 것 같습니다.

  • 08.11.22 10:19

    이곳 황경림 나무를 보러 갔다가 여러 번 맴돌다가 간신히 찾은 적 있습니다. 낮으막하면서도 다부지게 보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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