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로베르 피레스 (Robert Pires)
생년월일 : 1973년 1월 29일
출생 : 프랑스, 랭스
키, 몸무게 : 187cm, 78kg
포지션 : 측면 미드필더, 쉐도 스트라이커
A매치 기록 : 79경기 14골 (1996.8.31~2004.10.13)
커리어 :
(FC 메츠 1993~1998) (올림피크 마르세유 1998~2000)
1995-96 프랑스 리그 컵 우승 1998-99 프랑스 리그1 준우승
1997-98 프랑스 리그1 준우승 1998-99 UEFA 컵 준우승
(아스날 2000~06)
프리미어 리그 우승 - 2회 (2001-02, 2003-04), 준우승 - 3회 (2000-01, 2002-03, 2004-05)
잉글랜드 FA컵 우승 - 3회 (2001-02, 2002-03, 2004-05), 준우승 - 1회 (2000-01)
FA 커뮤니티 쉴드 우승 - 2회 (2002, 2004)
UEFA 챔피언스리그 준우승 - 1회 (2005-06)
(비야레알 2006~2010)
2007-08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준우승
(프랑스 대표팀)
1998 FIFA 월드컵 우승
2000 유럽선수권 우승
2001 컨페더레이션스 컵 우승
2003 컨페더레이션스 컵 우승
(개인)
1995-96 프랑스 리그1 UNFP 선정 올해의 어린 선수
2001-02 잉글랜드 FWA 선정 프리미어 리그 올해의 선수
2001-02, 2002-03, 2003-04 잉글랜드 PFA 선정 프리미어 리그 올해의 팀
2001 컨페더레인션스 컵 골든볼, 골든슈
포르투갈인 아버지와 스페인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로베르 피레스는 파리 근교의 랭스에서 자라났다. 그는 훗날 포르투갈 대표팀 셔츠와 레알 마드리드 유니폼을 입는 것을 생각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포르투갈의 포르투 데 리마 출신인 그의 아버지 안토니오는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일했다.
어릴적 축구선수가 꿈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그리 넉넉치 않은 형편이었지만 로베르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로베르는 매주 토요일 저녁, 지역클럽 '레스 코르포'에서 공을 차는 아버지를 보고 자랐다. 그는 학교에서 불어를 사용해야 했고, 집에서는 오직 포르투갈어와 스페인어로만 대화하는 부모님 곁에서 힘들었다고 한다. 15살이 되던 해, 그는 랭스 유스 팀에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4년을 보내고 알자스 지방의 메츠 팀으로 스카웃 된다.
카를로 몰리나리 (18살 때 그를 메츠로 데려왔던 구단주)
"로베르는 교육을 잘 받았고 모든 팀들이나 부모들이 갖기를 원하는,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 아주 매력적인 젊은이였죠."
피레스의 1부 리그 데뷔는 1993년 4월 2일 메츠-리옹 경기였다.
그는 유스에서 같이 성장한 공격수 시릴 포예와 함께 (당시 수비력은 강하지만 공격력이 약점이었던) 메츠 팀의 공격을 이끌었다.
1995-96 프랑스 리그 컵(Coupe de la ligue) 우승
95-96 시즌 피레스는 카메룬의 자케 송고 골키퍼, 리고베르 송, 실뱅 까스탕두시 등의 수비진과 좋은 활약을 펼쳤고
리그에서 중위권 팀이었던 메츠를 4위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프랑스 축구선수협회 선정 올해의 어린 선수상을 수상한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그는 프랑스 U-21 대표팀에 발탁이 되었고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 참가하게 된다.
프랑스는 8강에서 포르투갈을 만나 연장전 골든골을 내주며 대회를 마감했다.
피레스는 주로 측면 미드필더로 나왔고, 올림픽 본선 4경기(3선발/1교체) 모두 출전해서 1골을 기록했다.
특히 포르투갈과의 8강전에서는 페널티킥을 얻어내서 플로랑 모리스의 득점을 도왔다.
기자 : 당신은 포르투갈 대표팀을 선택할 수도 있었는데?
피레스 : 시간이 주어졌다면 그럴 수도 있었다. 포르투갈 대표팀에서 뛴다는 것은 아주 즐거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프랑스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나는 프랑스 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고,
지금 나는 푸른 유니폼을 입는 것 또한 자랑스럽다. 그리고 프랑스를 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레이몽 도메넥(당시 프랑스 U-21감독)이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세컨 스트라이커, 측면 포워드, 공격형 미드필더까지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했다
97-98 시즌 FC 메츠는 RC 랑스와 승점은 같았지만 골득실에 밀려 리그 2위에 만족해야 했다.
1996년 스타드 프랑스 건설 현장 방문 (지단 - 데샹 - 피레스)
한편 대표팀에서 피레스는 1996년 8월 31일 멕시코와의 경기를 통해서 성인 대표팀 데뷔를 치른다.
이후 꾸준히 대표팀에 이름을 올렸고 월드컵에도 참가하게 된다.
인테르에서 전성기를 보내고 있는 유리 조르카예프와 거칠것이 없는 신예 티에리 앙리 등과 경쟁이 불가피했다.
하지만 자케의 프랑스 대표팀은 그에게 주전 자리를 부여하지 않았다.
피레스는 자국에서 열린 98'월드컵에서 측면 공격수로 3경기(1선발/2교체)에 출전했다.
32강 조별리그 사우디전(앙리와 교체되어 투입), 덴마크전(선발, 앙리와 교체됨)
왼쪽 발목에 약간의 부상을 입은 앙리와 교체되어 들어간 파라과이와의 16강전
피레스는 로랑 블랑이 터뜨린 골든골의 시발점이 되는 크로스 패스를 해냈다.
피레스 크로스→트레제게 헤딩 떨구기→블랑의 마무리. 이 장면은 진정 아트사커였다.
로저 르메르 코치 - 튀랑 - 바르테즈 - 피레스
월드컵이 끝나고 로베르 피레스의 이름은 일반 축구팬들과 빅클럽에 알려지게 되었고 올림피크 마르세유로 이적한다.
97-98 시즌 마르세유는 전력이 탄탄했다. 파브리지오 라바넬리-플로랑 모리스 투톱 라인은 리그에서 27골을 뽑아냈고
갈라스-도모로-블랑-브론두로 이어지는 4백도 강력했다. 피레스, 구르베넥, 뤼쌩, 브라보 등의 미들진도 흠잡을데가 없었다.
이들은 리그에서 승점 1점 차이로 아쉽게 2위를 거뒀고 UEFA 컵에서는 결승에 올랐다.
vs 튀랑 (1998-99 UEFA 컵 결승전)
5백으로 나선 마르세유는 파르마에게 0:3 완패를 당했다.
20대 중반의 피레스는 필드 구석구석을 골고루 누비면서 너른 활동반경을 보였다.
마르세유에서 2번째 시즌은 최악이었다. 팀의 기둥 블랑이 인테르로 떠났고, 주축 선수들이 줄부상을 당했다.
올림피크 마르세유는 낭시에게 득실차 2점차로 앞서 15위로 강등을 겨우 면했다.
그는 팀의 주장이었던 이유로 팬들에게 더 많은 시달림을 당해야 했다.
경기에서 대패하는 날이면 성난 서포터들이 그라운드로 몰려들었고, 팬들에 의해 그의 자동차가 부서진 적도 있었다.
거의 신경쇠약 직전까지 갔던 그를 구해준 것은 바로 유로 2000 이었다.
유로2000 에서 피레스는 3경기(1선발/2교체)에 나섰다.
8강 진출이 확정된 16강 조별리그 네덜란드와의 마지막 경기에 선발 출전했고 4강, 결승전에서 조커로 기용됐다.
이탈리아와의 결승전에서 86분 리자라쥐와 교체되어 경기에 투입 된 피레스는 좌측 윙백으로 뛰었다.
가까운 곁에서 수비를 하던 드사이는 피레스에게 불같이 소리쳤다. "니가 할수있다는 걸 보여줘!"
결국 그는 다비드 트레제게의 그림같은 골든골을 어시스트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했다.
유로 대회가 끝나고 아스날의 벵거 감독은 바르셀로나로 떠난 오베르마스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피레스를 원했고 그는 아스날의 관심을 받아들였다.
로베르 피레스
"나에게 정신적, 피지컬적인 강함은 없었다. 내가 아스날에 왔을 때, 아르센은 상체를 강화할 것을 주문했다.
왜냐하면 프리미어쉽에 뛰기에는 너무 약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개인적인 프로그램을 소화했고
결국 그것은 두 다리의 강함으로까지 이어졌다. 그 덕택에 태클에도 버틸 수 있었다.
6개월동안 잉글랜드 축구의 피지컬적인 측면에 고생했지만, 결국 그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아스날에서 첫 시즌 피레스는 탁월한 킥력과 돌파후 찔러주는 날카로운 패스로 시즌 14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그는 아스날의 4-4-2 포메이션에서 레프트 윙어였지만
'전형적인 윙 플레이'라기보다 플레이 메이커 성향의 자신만의 독특한 경기방식을 선보였다.
앙리는 그가 처음 런던으로 왔을때 1달 동안 자신의 집에서 머물게 해주면서 피레스의 런던생활 적응을 도와주었다.
00-01 시즌 FA컵에서도 그의 활약은 빛이 났다. 토트넘과의 4강전에서 결승골을 넣으면서
팀을 결승에 안착시켰고 결승전에서도 득점을 올렸으나 리버풀에게 1-2로 패하면서 아쉽게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파트릭 비에이라
"피레스가 대단한 점은 모두가 그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는 팀에 많은 온기와 열정을 가져다 주는 선수이다.
2001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피레스는 앵커맨으로서 맹할약하며 프랑스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는 5경기(4선발/1교체) 3골 2어시스트를 기록했고, 대회 득점왕(골든슈)과 최우수 선수(골든볼)모두 차지한다.
(사진은 컨페드 당시 호주전은 아닙니다)
윌리 사뇰
"나는 이번 컨페드 컵에서 몇몇 선수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특히 피레스에 대해서.
그는 충분히 MVP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매우 사랑스런 친구이다."
로저 르메르
"파트릭 비에이라와 로베르 피레스는 대표팀의 새로운 기둥이다. 특히 피레스는 최근 들어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선수 중 한명이다.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고 있다. 프랑스의 진정한 스타로 꼽을만하다."
특히 브라질과의 4강전에서 조르카예프의 코너킥을 비에이라가 먼쪽 포스트 부근에서
헤딩으로 피레스에게 주었고, 피레스는 그대로 발리슛으로 처리해서 선제골을 넣었다.
이 역시 약속된 세트-피스 전술이었는데 정말 수준 높은 한 장면이었다.
그의 두번째 시즌인 2001-02시즌에는 절정의 기량을 과시하며 자신의 최고 전성기를 구가한다.
순간적인 빠른 돌파와 섬세한 2대1 패스로 위협적인 장면을 여러차례 연출해내는 것은 물론 지능적인 경기운영까지
더해졌다. 리그에서 최다 어시스트(15개)를 기록함과 동시에 9골을 성공시켰다.
데니스 베르캄프
"만약 로베르가 올 시즌 말미에 한아름의 상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공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시즌 전체를 환상적으로 보내고 있다. 나는 그에게 오직 존경을 보낼 따름이다.
그는 틀림없이 PFA 올해의 선수의 강력한 후보다. 같은 팀 선수에게 투표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화나게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내 한표는 100% 피레스에게 갈 것이다."
그러나 2002년 3월, 뉴캐슬과의 FA컵 8강 재경기에서 피레스는 커리어 최대의 불운한 사고를 맞이하게된다.
그리스 수비수 다비자스의 거친 태클을 피하려 점프를 시도했지만, 갑자기 그라운드에 쓰러지며 강도 높은 고통을 호소한 것이다.
무리한 경기 일정을 소화해내느라 무릎에 피로가 누적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십자인대 파열로 '월드컵 출전 불가'라는 충격적인 진단 결과를 통보받은 피레스는 그래도 침착성을 잃지 않으며
애써 흐르는 눈물을 참아냈다. 많은 축구팬들의 안타까움을 불러 일으켰던 순간이었다.
"결코 울지 않을겁니다. 저보다도 불행한 선수들이 많이 있어요.
언젠가는 다시 찾아 올 기회를 붙잡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할거에요."
아스날은 97-98 시즌 이후 다시 01-02 시즌 더블(리그, FA컵)을 달성했다.
데니스 베르캄프
"그는 대단한 지능과 무서운 기술의 소유자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은 볼 소유권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 능력에 관한한, 그는 내가 여지껏 아스날에서 보아온 선수들 중 아마도 최고일 것이다."
폴 맥카시(FWA 회장)
"피레스는 환상적인 시즌을 보냈다. 그는 아스날을 한층 화려하고 세련된 팀으로 변모시켰고,
이러한 높은 수준의 활약은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최고의 평가를 내리게끔 만든다."
D'artanan (다르따냥)
입술 밑 부분에 가느다랗게 길렀던 수염이 영화 "삼총사"에 나오는 달타냥과 닮았다고 잉글랜드 축구팬들에게서 불려진 별명
아르센 벵거
"피레스는 그라운드에서뿐만이 아니라 라커룸에서도 최고의 선수 중 한명이다. 젊은 선수들은 그의 플레이와 함께
팀에 헌신하는 태도, 그리고 인성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 어떠한 감독이라도 그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02-03 시즌 초반 그가 부상에서 복귀하기 전까지 윌토르, 카누의 맹활약으로 아스날의 전력누수는 없었다.
그리고 앙리의 '외계인 모드'로 아스날의 빠르고 정교한 공격력은 절정에 달했고,
피레스는 자신이 볼을 몰고 같이 뛰기보다 수비진이 볼을 가로챘을 때 중앙에서 1차 공격 시작패스와
문전으로 침투하여 흘러나온 볼을 집어넣는 모습으로 플레이 스타일을 바꿨다.
그의 이러한 스타일은 아스날의 화끈한 공격스타일에 너무나 잘 조화되어서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다.
아스날은 지난 시즌에 이어 FA컵 결승 또 올랐고, 이번에는 피레스의 결승골로 사우스햄튼을 1-0으로 꺾고 우승했다.
49 Unbeaten 의 시작
2003년 5월 7일 사우스햄턴과의 홈 경기에서 아스날은 페넌트와 피레스의 해트트릭에 힘입어 6-1 승리를 거둔다.
(이때 마지막 피레스의 환상적으로 감아차는 슛팅은 아직도 많은 이들의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그리고 이 승리를 시작으로 아스날은 2004년 10월 25일 맨유 원정 경기에서 0-2로 패하기 전까지
1년 5개월 동안 49경기 연속 무패(36승 13무)를 기록하는 대기록을 달성하게 된다.
피레스의 어시스트에 이은 윌토르의 골이 터질 경우,
두 선수는 둘째손가락을 서로 맞대며 우정의 골세레머니를 펼치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2003 컨페드 컵에서도 프랑스의 우승에 공헌했다
일본과의 조별리그전은 대표팀에서 유일하게 주장 완장을 차고 뛴 경기이다.
그는 이 대회에서 5경기(2선발/3교체)에 나서 일본, 뉴질랜드, 터키를 상대로 1골씩 기록했다.
판타스틱 4
아르센 벵거 감독은 빠른데도 정교한 축구를 펼치는 아스날 선수들 모두를 '인사이드 드리블러'라 불렀는데
그중에서도 피레스를 '최고의 인사이드 드리블러'라고 칭했다.
벵거는 피레스의 완벽한 슛팅 자세가 선수들에게 본보기가 된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2003-04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무패우승!
유로2004 예선 8전 전승으로 본선행을 따낸 프랑스는 아스날의 '프렌치 커넥션'이 중심이 되어 다시 한 번 우승에 도전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은 클럽에서만큼 조화가 되지 않았고 8강에서 그리스에게 무릎을 꿇었다.
레이몽 도메넥의 점성술에 의해 대표팀에서 축출된 피레스
2004년 10월 키프러스와의 2006월드컵 지역예선전에서 도메넥은 피레스를 별다른 이유없이 하프타임때 교체시켰다.
이에 화가난 피레스는 그대로 키프러스 홈구장을 떠나버렸고 도메넥을 비난했다.
물론 단지 그 이유만이 아니다. 그는 평소 도메넥의 명령, 언행들이 선수단의 긴장감을 유발하는 것에 불만이 있었다.
그 이후로 도메넥 감독은 그를 대표팀으로 부르지 않았고 이유를
"피레스의 별자리인 전갈자리가 서로를 죽이려는 성질이 있어 시기 상 대표팀과 맞지 않다."라는 괴스러운 말로 밝혔다.
프랑스 언론들은 이를 두고 과거 피레스의 연인이었던 에스텔을 도메넥이 질투한 것이라고 주장해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미들라이커'
04-05 시즌 피레스는 리그에서 14골(3시즌 연속)을 넣었고 주포 앙리뿐만 아니라
융베리, 레예스 등의 득점포도 꽤 터지면서 아스날은 프리미어리그 출범 이후 한 시즌 최다골(87골)을 기록하게 된다.
그러나 압도적인 모습으로 승점 95점을 가져간 첼시에게 패권을 내주고 말았다.
하지만 FA컵 결승전에 올라 승부차기 끝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이기고 우승컵을 거머쥘 수 있었다.
루니와의 신경전
vs 리자라쥐 (2004-05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
2005년 7월 31일. 아약스 암스테르담 아레나에서 펼쳐진
아스날-포르투 경기(암스테르담 컵)에서 마라도나와 함께~
"북런던 더비의 해결사"
로베르 피레스 vs 토트넘 핫스퍼
11경기 8골 (5골이 원정골. 3개의 결승골)
05-06 시즌 그는 눈에 띄는 기동력 저하를 보이기 시작했다.
아스날은 2005-06 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서 10경기 동안 무실점으로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진출했다.
왠만한 우승컵은 모두 들어올린 그였지만, 챔피언스리그 타이틀은 마지막 퍼즐과도 같았다.
그러나... 결승전에서 그는 전반 초반 골키퍼 레만이 퇴장 당하고 알무니아와 전반 18분에 교체되었다.
"지난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단 18분밖에 뛰지 못했던 것에 크게 실망했다. 그 결승전은 파리에서 열렸었다.
나의 가족들과 나는 정말로 고통스러웠다." 설상가상 아스날은 역전패를 당해 우승 트로피를 놓쳤다.
피레스는 05-06 시즌이 시작되기 전 이미 아스날에게 1년 계약 연장을 골자로 하는 새로운 계약서를 제시받았지만
그가 2년 연장을 원하면서 챔스 결승까지 아스날이 제시한 계약서에 사인하지 않았다.
결국 계약 기간이 만료된 피레스는 벤피카, AS 로마 등의 구애가 있었지만 '노란 잠수함' 비야레알행을 선택한다.
그는 불운하게도 시즌을 얼마 앞둔 프리시즌 평가전서 왼쪽 무릎 십자인대 파열 부상을 당했다.
비야레알은 그의 6개월짜리 부상으로 인해 스페인 축구협회로부터 '특별허가'를 부여받기도 했으나,
FIFA의 룰과 스페인 축구협회 측이 부여한 특별허가는 스페인 이내에서만 새로운 선수 영입을 허용했기 때문에
칠레의 신성 마티아스 페르난데스 영입을 원하는 비야레알로서는 겨울 이적시장으로 피레스 대체자 영입을 미뤘다.
그의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데뷔전은 27라운드 소시에다드와의 홈 경기에서 이뤄졌다.
비야레알은 12위까지 처지는 상황에 직면했지만 막판 8게임을 모두 이기면서 유로파 리그 진출 티켓을 따냈다.
피레스는 29라운드 아틀레티코전에서 이례적인 퇴장을 당하면서 다음 경기를 나서지 못했지만
복귀하고 안정적인 게임 메이킹으로 카니와 함께 팀의 연승행진을 도왔다. 그의 백업으로 마티아스 페르난데스도 잘해주었다.
피레스 & 카프데빌라 왼쪽 라인
2007-08 시즌 페예그리니 감독은 피레스와 카니, 카솔라를 플레이 메이커로 두고 4-3-1-2 또는 4-2-2-2 전술을 활용했다.
비야레알은 새로 영입된 카프데빌라, 고딘, 카솔라, 쥐세페 로씨가 좋은 활약을 펼쳤고
장기 부상에서 복귀한 니하트, 곤잘로 등 기존의 선수들도 제 몫을 해주면서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성적을 낸다.
비야레알에서 깔끔하고 정확한 원터치 패스와 안정적인 볼 컨트롤로 군더더기 없는 플레이를 펼쳤다.
2008-09 시즌
단기간에 비야레알 팬들에게 사랑받는 선수가 되다
08-09 UEFA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3년여 만에 친정팀을 만나다
그러나 아스날에게 8강 2차전에서 0대3으로 패하면서 탈락했다
'클래스는 여전하다'라는 평가를 받으며 비야레알에서 09-10 시즌까지 활약했다
비야레알과 계약이 끝나고 무적상태의 로베르는 현역 생활을 계속 이어가고 싶었고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스날의 런던 콜니 훈련장에서 훈련을 하기도 했다.
벵거가 같은 프랑스인 울리에 아스톤 빌라 감독에게 피레스를 추천했고, 그는 6개월 단기 계약으로 아스톤 빌라에서 뛰었다.
2011년 12월 14일 호나우두&지단 친구들-함부르크 올스타 자선경기
2012년 2월 7일 앙리와 아스날 훈련장에서 훈련 (1~2년 더 현역생활을 하고싶다는 삐레)
방송국 프로그램 진행자였던 나탈리와 98년 결혼하고 6년 뒤 갈라서고
곧 프랑스 모델 제시카 르마리와 교제를 했다.
2005년 8월 10일, 그들은 딸 나이아를 출산했고 이로 이해 피레스는 삶의 평온함을 되찾았다.
2007년 7월 11일 둘은 결혼했고 이후 둘째 테오(아들)를 가졌다.
2011년 11월 24일 런던에서 테니스 Barclays ATP World Tour Finals <나달-송가>관전
(3시즌 동안 비야레알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카솔라와 ^^)
“산티는 아스날로부터 오퍼가 왔을 때 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때 저는 아스날이 너에게 꼭 맞는 클럽이라고 추천해줬습니다."
공식적인 은퇴선언을 하지 않은 현재 피레스는 FA(Free Agent)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