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
창작판소리 논문을 쓰면서 신재효의 고택과 판소리 고장을 가 보고 싶었다. 수십 년 전 그때는 고창이 부산에서 너무 멀어 엄두를 못 냈다. 산지사방으로 길이 뚫린 지금은 쉬운 일이다. 모임에서 그곳으로 갈 길이 생겼다. 얼씨구 잘 됐다며 따라나섰다. 잘금잘금 자주 내리던 봄비도 멎었다. 많은 봄꽃이 한꺼번에 피고 지고 뜨덤뜨덤 하얀 이팝나무꽃과 보랏빛 오동나무꽃이 피어난다. 거기다 꽃만치 아름다운 싱그러운 녹음이 산을 기어오르는 예쁜 전라도를 달려갔다.
동리 신재효가 살던 집과 판소리박물관이 있는 읍내에 이르러 우선 고창읍성에 올랐다. 조선시대 군사들이 머물던 성을 따라 오르는데 돌담 절벽이 어지러워서 성문이 있는 곳으로 도로 내려와 그늘에 앉아 쉬었다. 이곳은 놀랍게도 온갖 문화가 소복이 모여 있다. 텔레비전에 잘 나오는 하늘 자욱이 군무를 이루며 구름떼처럼 나는 가창오리가 바로 여기 동림저수지이다. 또 운곡 람사르습지가 고창군 한가운데 자리했다.
동학혁명을 일으킨 전봉준 생가터와 농악전수관도 이곳에 있다. 서정주의 미당시문학관과 천년 고찰 문수사와 선운사가 자리 잡았다. 공음면에 무장기포지가 뭔가 했는데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 곳이다. 서쪽 바닷가엔 람사르 갯벌이 펼쳐졌다. 동호와 구시포해수욕장이 위아래에 걸쳐져 있는 멋진 고장이다.
이곳 전 지역이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됐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인 갯벌과 인류무형문화유산인 판소리와 농악이다.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남았다. 세계지질공원으로 등재돼 범바위는 지날 때 눈을 크게 떠 쳐다봐야 하는 놀라운 우뚝 선 산기슭 바위이다. 정말 세계문화유산 도시답다. 특히 조선조에 나온 판소리는 고려 말에 나타난 시조와 함께 세계에 자랑할 우리 민족의 노래이고 문학이다.
거기다 이곳에서 가장 중요시한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고인돌이다. 읍에서 가까운 서북쪽 그 유적지를 찾아갔다. 야트막한 산기슭에 위에서 굴러내린 듯 크고 작은 돌들이 까맣게 이끼로 덮여 헤아릴 수 없이 널렸다. 돌에 신성함과 숭배의 마음을 담아 거석(巨石)문화를 만들었다. 고인돌은 그 문화를 대표하는 무덤이다. 지석묘(支石墓)인 고인돌 외에도 선돌과 열석, 환상열석, 석상 종류가 세계에 분포했다.
6, 7천 년 전인 선사시대와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한반도에는 4만 여기 최대의 고인돌 지역이다. 고창과 화순, 강화에 많으며 세계유산으로 올라 보호되고 있다. 이곳은 그중에서 가장 밀집 분포여서 고인돌 군집 지역이다. 탁자식과 바둑판식, 개석식으로 만들어졌다. 다양한 방식과 크기로 도산리와 죽림리, 상갑리에 걸쳐 500여 기가 확인된 곳이다. 고인돌 형태 변화에 중요한 자료이다.
흔하게 보이는 굴러떨어진 산기슭의 돌들인가 했는데 채석장이 보인다. 뜯어내어 운반하고 축조가 이뤄진 곳이다. 산 위의 큰 바위를 깨트려 아래로 굴러 내려서 무덤을 만들었다. 그 돌산을 깨어낼 때 구멍을 만들어 나무를 박아두면 금이 가 예정한 크기로 갈라져 나온다. 작게는 수십 톤에서 크게는 수백 톤에 이르는 것을 필요한 조각으로 만들어 낸다. 떼어낼 때 둘둘 굴러 멀리 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정한 장소까지 살살 끌고 내려오지만 큰 것은 자칫 내리막을 제멋대로 구르거나 하도 무겁고 커서 꿈쩍도 하지 않아 많은 사람이 밧줄을 동여매어 잡아당겨 내린다. 그래도 끌리지 않을 땐 바닥에 나무를 깔아 구르게 한다. 탁자와 바둑은 흙을 덮어 그 위에 바위를 올리고 털어낸다. 말이 그렇지 그게 얼마나 힘 드는 일이겠나. 뭔데 온통 거기다 세월을 다 보내나. 얼마나 중요하길래 먹고 살기도 바쁜데 그 짓으로 살아가야 하나.
경상도엔 별로 없는데 전라도에는 천지다. 북방식 탁자와 남방식 바둑이 뒤섞여 나타난다. 무덤 짓다가 늙는다. 땅 밑에 죽은 사람을 묻고 돌 얹은 개석과 사방 돌 깔고 그 위에 큰 돌 얹는 바둑식이다. 시신을 눕히고 사방 돌로 막아 그 위에 넓은 돌 올리는 게 바로 탁자식이다.
한반도에서 가장 많이 발견된 무덤으로 부장품이 잘 나오는 게 개석식이다. 그 속엔 배가 불룩한 단지 모양의 붉은 간토기와 간돌검, 독 모양의 덧띠 토기, 돌화살촉, 돌도끼가 있다. 녹슬어 문드러진 요령식 동검과 청동 투검창, 방추자도 출토됐다. 국립진주박물관에 보관된 대동옥도 여기 것이다.
여러 개 돌을 놓고 지붕처럼 덮은 것을 석곽식(石槨式)이라 한다. 개석식(蓋石式) 외엔 모두 밑에 돌을 괴었다 해서 고인돌이라 부른다. 수백 년이 지나면 안에 들었던 시체는 모두 흔적 없이 사라진다. 굵은 넙다리나 등뼈, 머리뼈도 남아있지 않다. 돌이나 쇠붙이는 남아있어도 사람은 간곳없다. 어쩜 이리 흔적도 없을까. 덮었던 돌만 덩그러니 남아있어서 무덤이라 이른다.
흙으로 덮으면 뭉개져 평지가 된다. 나무로 거적을 만들면 그게 오래 가나 낡아 없어진다. 잔돌로 쌓아도 흘러내린 돌무더기로 여긴다. 큰 돌로 하면 오래 가리라 여겼다. 그땐 촌장이니 무슨 어른이라 했어도 지금은 아무 소용없는 돌덩일 뿐이다. 누군지 다 알 수 없는 허망한 바위일 뿐이다.
집 짓고 살다 보면 마당 가에 고인돌 선돌과 함께 산다. 무덤이라는 무서운 생각일랑은 없다. 그 옆에 장독대를 두고 농산물을 올려놓거나 말리는 것으로 사용했다. 오랜 세월 변하지 않는 돌에 마음을 담아 제상으로 쓸 때와 수호신으로 여겼다. 수천 년 아득한 옛날을 이어주는 숨결이 느껴지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