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9쪽
인간의 ‘삶’에 음악이 늘 함께하는 것처럼,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죽음’ 곁에도 음악은 항상 존재한다.
17~18쪽
변심한 애인을 죽인다는 설정은 “남성 주인공 자신은 자신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그리고 만족스러운 서사 종결을 위해, 정해진 여성 타자와 만나고 결국은 타자를-길들이든 혹은 제거해 버리든-예속시킨다”는 전통적 서사 도식에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그래서 겉으로 보면 카르멘의 죽음은 그녀가 남성 중심의 이분법적 사회의 ‘피해자’가 됨을 의미하며, 오페라에서의 ‘여성 죽이기’의 일환으로 설명되곤 했다.
그렇지만 긴 머리를 날리며 정열적인 모습으로 「하바네라」와 「세기디야」를 노래하고, 하물며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자유를 부르짖는 노래를 부르는 카르멘은 단지 죽임을 당하는 수동적 여성과는 다르게 보인다. [...] 카르멘의 죽음은 단순히 카르멘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호세의 몰락을 의미하며, 죽음 앞에서 당당한 카르멘의 자유를 향한 갈망은 그녀의 강한 주체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28쪽
셰익스피어에게 불멸은 단순한 죽음의 극복이 아니라, 생명력의 정수, 미의 정화를 시간의 마수 속에서 빼내어 영원히 보관한다는 의미였다. 음악도 바로 그런 존재가 아닐까?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말러도 죽었지만 그 아름다움은 지금까지도 지속된다. 음악은 유한한 인간에게 시간을 초월한 아름다움을 무한히 간직하게 만든다. 단언컨대, 음악은 죽음을 넘어서는 불멸의 존재이다.
39쪽
살리에리는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으나, 창작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관점이라는 이름으로, 소설, 연극, 오페라, 영화를 통해 살리에리의 독살설은 마치 사실인 양 대중에게 전달되고 말았다. 살리에리와 모차르트가 서로 경쟁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모차르트가 살리에리를 더 많이 시기하고 질투했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와 경쟁관계이긴 했지만, 모차르트를 독살할 정도의 적의는 없었다.
52쪽
스무 살의 베토벤에게 이런 대작을 맡긴다는 결정은 다소 의외였는데, 아마도 당시 베토벤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발트슈타인 백작의 입김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계몽군주’이자 ‘이성의 황제’로 통하는 요제프 2세는 베토벤이 특히 존경했던 인물이었으니 요제프 2세를 추모하는 칸타타를 쓰는 것은 베토벤으로서는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베토벤은 매우 빠른 속도로 작곡을 진행했다. 합창과 아리아, 레치타티보가 포함된 총 7곡 구성의 〈요제프 2세 장송 칸타타〉는 요제프 2세 서거 한 달 뒤인 1790년 3월 중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칸타타는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이고 앞서 나간 음악이었기에 사람들의 이해를 받지 못하고 연주를 거부당했다. 그리고 오랜 세월동안 이 작품의 존재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가 1884년 한 경매에서 베토벤의 〈요제프 2세 장송 칸타타〉의 악보 사본이 소개되면서 비로소 이 작품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58~59, 62쪽
베토벤이 스무 살 때 쓴 이 박애주의 멜로디는 부드러운 선율의 곡선미 덕분에 자비로운 느낌을 전해 준다. 이 선율이야말로 무지한 세상에 빛을 밝힌 ‘계몽군주’ 요제프 2세의 자애로운 성품을 매우 잘 표현해 주며, 그 고귀한 선율은 영웅으로서의 요제프 2세의 사상과 정신을 추모하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베토벤은 이 박애주의 멜로디에 각별한 의미를 두고 있었던 것 같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베토벤은 그의 오페라 〈피델리오〉 말미에 〈요제프 2세 장송 칸타타〉의 박애주의 멜로디를 그대로 인용했다. 주인공 레오노레가 감격하며 “오, 신이시여,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인가!O Gott, welch’ ein Augenblick!”라고 노래하는 순간은 억울하게 갇혀 있던 남편 플로레스탄이 구원되는 바로 그 순간이다. [...] 후에 베토벤은 박애주의적인 성격의 멜로디 양식을 이용해 〈합창〉 교향곡 4악장 「환희의 송가」의 주제를 작곡하게 된다. 물론 「환희의 송가」와 〈요제프 2세 장송 칸타타〉에서 온 〈피델리오〉의 선율은, 베토벤의 ‘절대적 멜로디’라는 성격을 공유하고 있으며 베토벤이 ‘인류애’를 드러내고자 할 때 즐겨 사용했던 선율 유형이다.
74~75쪽
짧은 생애를 살았던 작곡가의 ‘말년의 음악late music’을 이 야기하는 것은 어쩐지 이질적이다. ‘말년의 음악’이 예술적으로 무르익을 대로 익어서 성숙의 경지를 넘어서는 경지에 다다른 예술가의 작품, 그리고 그 속에 배어든 삶의 자취를 찾기 위한 단어라면, 그것은 결코 슈베르트에게 해당하는 단어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문학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 1935~2003가 제안한 대로, 어떤한 예술가가 말년에 이르러 그가 속한 사회적·문화적 관습과 규범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새로운 이디엄을 획득”했을 때, 그의 예술적 문제의식과 태도를 나타내는 용어로 ‘말년의 양식’을 생각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슈베르트는 삶을 꽃피울 나이였던 20대 후반 무렵, 아이러니하게도 사이드적인 관점의 ‘말년의 양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무엇이 그가 새로운 미적 시도를 하도록 이끌었는지 규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20대 후반의 슈베르트를 ‘말년’이라고 규정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은 작곡가 스스로 인지했던 ‘죽음’이었다.
81쪽
그렇게 슈베르트의 말년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과 새로운 예술적 도전이 기묘하게 얽힌 상태로 시작되었다. 죽음 앞에 선 예술가는 베토벤이라는 거장의 음악에 맞서 지금껏 쌓아 온 것들을 새로운 방향에서 해석하려는 열망으로 가득했다. 그것은 이제껏 머물러 있던 ‘노래’와 ‘가정음악’이라는 소박한 사적 영역을 벗어나서 공적인 영역으로 나아가고픈 열망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그의 1824년은 삶에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89쪽
사실 슈만의 죽음이 미스터리일 이유는 별로 없다. 그가 남긴 기록은 적은 편이 아니다. 슈만은 작곡가인 동시에 문인이었으며 평론가였지 않은가. 하지만 유독 슈만의 죽음에 대한 해석은 20세기 들어서야 활발해졌다. 그가 마지막 2년을 보낸 정신병원의 의료 기록이 나온 때가 1991년이다. 마지막 작품인 〈유령 변주곡〉의 신세는 슈만의 말년에 대한 인식을 보다 적극적으로 증명한다. 이 작품은 1939년에야 출판됐고, 피아니스트 외르크 데무스Jörg Demus, 1928~2019가 1973년에 낸 음반이 공식적인 첫 녹음이며 원전 악보가 나온 때는 1995년이다. 21세기 들어 이 작품의 연주와 녹음 빈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슈만의 죽음을 둘러싼 이슈가 지극히 현대적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105쪽
알려진 대로, 클라라는 2년 동안 엔데니히에 한 번도 오지 않았다. 단편적으로 보면 이상한 일이다. 클라라는 결혼식 날 “그가 없으면 기절해 버릴 것 같다”고 쓸 만큼 슈만을 사랑했고 그의 병에 대해 깊은 근심과 혼란을 느꼈다. 클라라는 다만 타의에 의해 엔데니히로부터 가로막혔다. 의사의 권고, 슈만의 상태, 그리고 부정확한 정보들로 인해 방문할 수 없었다. 또한 클라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콘서트 피아니스트로서의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 돌볼 아이들도 있었다. 공교롭고도 역설적이지 않은가. 그 촉망받던 영재 피아니스트가 가족에게 닥친 최악의 위기를 해결해야 했을 때에야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112쪽
삶이 죽음보다 더 많은 것을 앗아 간다. - 요하네스 브람스
115쪽
이처럼 죽음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브람스의 음악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키워드는 다름 아닌 ‘위로’이며, 이는 〈독일 레퀴엠〉op.45의 가사로 인용한 성경 구절에서 무엇보다 잘 드러난다. 1악장의 가사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오”(마태복음 5:4)와 5악장의 가사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이사야서 66:13)는 브람스의 작품이 어떤 목적으로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레퀴엠requiem의 어원이 ‘휴식requies’을 의미하는 라틴어라는 데서 알 수 있듯 전통적인 레퀴엠은 죽은 자의 안식과 명복을 비는 종교적 의미를 띠지만, 브람스는 작품을 통해 무엇보다 산 자, 즉 애통하는 남겨진 자의 고통과 슬픔이 위로받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음악을 통해 전달되는 것은 슬픔에도 불구하고 삶을 이어 나가는 긍정의 힘이며, 절망의 정서나 ‘염세’는 찾아보기 힘들다.
129쪽
말러는 한 인간의 죽음 앞에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왜 사는가? 왜 고통 받는가?” 말러에게 ‘죽음’이란 삶의 의미를 찾게 하는 계기가 된다. 따라서 말러가 죽음에 대해 쓴 이 교향곡은 죽음에 대한 음악을 넘어 삶에 대한 질문이자 그 해답이기도 하다. 말러는 교향곡 2번 5악장에서 해답을 제시하기 전에 먼저 2·3·4악장의 긴 여정을 거친다.
140쪽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
파우스트가 내뱉은 이 말은 매우 중요하다. 애초에 메피스토펠레스와 파우스트가 맺은 계약에 따르면 파우스트가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라고 말하는 순간 파우스트의 영혼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빼앗기게 되어 있다. 하지만 결과는 다르다. 파우스트의 영혼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붙잡히지 않고 오히려 천사들에게 맡겨져 구원의 길로 향한다. 파우스트가 약속한 그 말을 내뱉은 그 순간은 메피스토펠레스가 바랐던 향락의 순간이 아니라 파우스트의 선함이 드러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168쪽
첼로 협주곡에서 윤이상은 독주 악기인 첼로를 ‘한 인간’에, 오케스트라를 ‘사회’에 비유하여 인간과 사회와의 대립관계를 표현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자신이 겪은 정치적 압박과 삶의 굴곡을 강하게 표출한다. 첼로 파트는 그의 생각, 그의 경험, 그리고 그의 느낌들을 대변하는 역할을 한다. 작품 전체를 통해 작곡가 자신이 탄생부터 겪어야 했던 운명, 운명을 극복하고 나아가지만 죽음에 직면하게 되는 상황, 그 상황에서 떠오르는 작곡가의 상념, 이에 대한 반항, 그러나 결국 도달하지 못하는 작곡가의 이상이 애절하게 표현된다. 이에 대해 윤이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첼로 협주곡에서 독주 첼로는 다른 오케스트라의 악기들과 도무지 어울리지 못합니다. 혼자 고행을 할 뿐이지요.”
자신의 옥중 경험을 표현한 2부의 긴 첼로 독주에 이어 3부에서는 첼로가 다른 악기들과 함께 이상향에 도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스스로 꿈꾸던 이상향에는 결국 도달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윤이상은 첼로 협주곡에서도 죽음에 대한 순응을 보여 주고 있다.
184~185쪽
쇼팽의 「장송행진곡」은 곡이 주는 직관적인 비장함과 죽음의 무게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장례 음악의 대명사처럼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글에서 살펴보았듯, 비장함보다는 오히려 유희적인 측면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는 역설을 발견하게 된다. 애도를 끊고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돌아오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 그리고 현실에서의 과도한 사용으로 인한 의미의 퇴색 때문에 「장송행진곡」은 계속 온전한 「장송행진곡」으로 남아 있기 어렵다. [...]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죽음의 전형’이라고 불린 이 곡이 결국에는 유머와 닿아 있음을 발견할 때, 우리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이 죽음이 또 다른 웃음과 희망으로 향하는 출구라고 여길 수도 있지 않을까?
246쪽
바그너가 천국의 음악을 작곡하는 것이 인간의 능력 밖이라 말했던, 그리고 리스트가 결국 포기했던, 그 천국을 나타내는 음악은 과연 무엇일까? 『신곡』에서 천국은 빛으로 이루어진 세계이며, 구원받은 영혼만이 머무는 곳이다. 천국의 빛에서 순례자 단테는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심을 느끼는데, 역설적으로 눈뜨기 어려울 만큼 밝은 곳에서 인간은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아마도 천국의 빛은 단순히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규정해 둔 삶의 구속, 속박 그리고 집착에서 벗어난 인간 영혼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250쪽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세기말 빈Wien, ‘죽음’은 유난히 자신의 얼굴을 가지기 원했다. 회화와 문학뿐 아니라 음악에서도 죽음의 모티브가 자주 등장했고, 예술가는 작품 속에 자신의 방식으로 죽음의 얼굴이 어떠한지, 그 실체가 어떠한지를 담아냈다. 20세기 초 빈의 퇴폐주의, 전쟁, 질병 등의 사회적 요인은 병적이고 히스테릭한 정신상태에 영향을 미쳤고, 상실감과 박탈감을 안겨 주었다. 적극적으로 두려움을 대면하기보다는 도피처를 찾는 삶이 지배했다. 그래서 이 시기 빈 시민은 카바레 혹은 커피하우스의 공간에서 세기말 분위기에 흠뻑 취해 있었고, 음악도 이러한 향락적이고 음울한 울림을 풍겼다.
270~271쪽
보체크와 마리의 죽음은 불평등 경제구조와 젠더질서에 내재된 사회적 폭력의 결과이다. 이러한 사회질서를 구축하고 유지시키는 이상주의적 도덕관과 규율이 신의 정의로 정당화되지만, 실제로 그것은 인간의 자연성에 위배되는, 이기적인 인간이 만들어 놓은 허상이며, 인간성의 훼손 및 사회적 갈등과 폭력을 필연적으로 초래하는 것이다. 오페라의 마지막 장면에 혼자 남겨진 마리의 아이는 이러한 부조리한 세계에서 고립된 인간 실존의 문제를 암시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뷔히너의 예술적 방안은 인간에 대한 ‘동정과 연민’을 바탕으로 하는 사실주의이다. 사랑과 동정에 근거한 그의 미학은 관습적으로 인지된 아름다움과 추함의 분리를 지양한다. 보체크와 마리의 죽음도 이러한 동정의 미학에서 이해받고, 청중의 감정에 울림을 줄 때 현실의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282~283쪽
라이히는 왜 하필 1940년의 자신의 기억을 그 참담한 사건과 나란히 놓기로 결정한 것일까? 홀로코스트에 대한 탁월한 연구로 주목을 받은 사회학자 아렌트와 바우만은 이 비극을 단순히 악랄한 개인이 만들어 낸 이례적인 일로 보지 않는다. 그들은 홀로코스트를 현대 문명 속 ‘사회화 과정의 결과’로 분석했다. 병리적 현상이나 인류의 실패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문명화의 복판에서 발생할 수 있었던 당연한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다.
309쪽
죽음은 개인적인 차원의 사건인 동시에 공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아주 오래전 기원전 1세기에 세이킬로스는 “결코 슬퍼하지 마라, 인생은 찰나 같다”며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를 묘비에 새겼고, 20세기 미국 작곡가 록버그는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에서 느낀 슬픔을 음악에 담으려 안간힘을 쏟으며 「시간과 죽음에 대항하여」라는 곡으로 돌파구를 찾았다. 이러한 개인적인 죽음의 경험과 함께, 음악에서는 사회적 사건으로서의 죽음 또한 중요한 화두가 된다. 쇤베르크의 「바르샤바의 생존자」, 라이히의 「WTC 9/11」, 정태봉의 〈진혼〉 등의 작품에서 우리는 사회적 차원의 죽음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316쪽
존경하는 작곡가를 추모하면서 인용을 통해 존경을 표하는 방식은 물론 음악사에서 종종 나타나는 방식이다. 베리오Luciano Berio, 1925~2003가 말러를 오마주하면서 말러 교향곡을 인용하고, 카겔과 슈톡하우젠이 베토벤을 오마주하면서 베토벤을 인용하기도 했지만, 〈야테콕〉처럼 집약적으로 방대한 추모가 나타난 작품은 드물다. 100여 곡이 넘는 짧은 단편을 통해 세상을 떠난 작곡가들을 쿠르탁 특유의 음언어로 다시 소환하는 이 피아노곡은 그래서 특별하다. 동시에 보르네미사 가곡의 모티브 「우리는 꽃」에 담긴 허무주의적 사고관, 즉 삶의 유한성과 무의미성에 대한 생각이 곡 전체를 관통하고 있음도 주지할 만하다.
345~346쪽
그리제는 10대 때부터 기독교 신앙심이 매우 깊었고 이러한 마음을 일기장에 명확하게 기록했다. 그는 어린 나이부터 스스로 성경을 읽었고, 음악을 하게 된 이유도 예술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었다고 고백했다. 이런 그리제가 인류의 죽음을 마지막 악장에 포진시키면서 인용한 텍스트는 성경의 첫 권인 창세기의 노아 홍수 사건이지만, 음악을 풀어 나간 방법은 사실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의 대재앙이다. 어찌 보면 작곡가는 한 악장 속에 인류의 역사를 전부 담으면서 결국에는 모두가 죽음에 다다를 수밖에 없는 허탈함을 표출하고 있으며, 죽음 앞에 선 인간의 극심한 두려움이 가장 크기에 이 내용을 마지막 악장에 장식하고 있다.
355~356쪽
10년 후인 1993년 2월 26일, 나는 로
출판사 서평
음악은 늘 죽음 곁에 있었다
음악이 없는 장례식을 상상해 보았는가? 그런 장례식이 있다면 무척 쓸쓸할 것이고, 고인에 대한 애도와 남은 자에 대한 위로를 충분히 하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에도와 위로. 한 사람의 삶을 기리고, 남은 사람들에게 온정과 희망을 전하는 것이 장례식의 뜻이라면 음악은 실로 커다란 역할을 감당하는 셈이다.
죽음은 엄연한 현실적 차원에서 음악가의 생계와 긴밀히 결부되어 있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1730년 후원을 청하는 편지를 귀족 에르트만에게 보내면서 라이프치히 공기가 예년보다 좋은 탓에 장례식 수입이 줄었다며 어려움을 토로했고 그의 전임자 쿠나우도 사람들이 비용을 아끼려고 음악 없는 장례식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적기도 했다. 이처럼 인간의 ‘삶’에 음악이 늘 함께하는 것처럼,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죽음’ 곁에도 음악은 항상 존재한다.
서울대학교 음악학과 오희숙 교수와 음악미학연구회의 회원들은 음악이 ‘노래한’ 죽음의 여러 모습을 다양한 에세이로 포착해 한 권의 책에 담았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되어 있다. 첫째, "작곡가들의 마지막 순간"은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슈만 등 위대한 작곡가들의 최후를 다루는 전기적 스케치다. 둘째, "음악이 그린 죽음"에서는 작품 안에 ‘죽음’이 어떻게 표현되었는지를 다룬다. 쇼팽의 '장송 행진곡',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 등 친숙한 곡들과 더불어 라이히, 리게티, 쿠르탁, 그리제 등 현대 작곡가의 작품이 다양하게 다뤄진다. 한편 3부에서는 음악과 죽음을 다루는 학술 논문 두 편이 번역 소개되었다.
킵 페글리는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를 통해 대중의 애도 현상을 집중적으로 탐구했고, 오드리 버거 카대니는 음악이 주는 애도/위로의 효과를 학문적으로 규명한다.
시대가 변해도 추모의 마음은 여전하다. 죽음 앞에 예술가들은 저마다 다르게 묻고 답한다. 그 사투와 창조의 과정은 삶과 죽음, 예술과 일상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더 깊은 혜안을 줄 것이다.
죽음이란 보편적 주제로 전문가와 일반 감상자를 연결하는 책
죽음은 보편적 주제다.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제2의 삶, 행복한 노후, 건강한 노년, 품위 있는 여가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고 노년 인구가 증가한다는 것은 그만큼 주위에서 죽음을 겪을 기회가 많아지고, 또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생각할 시간이 길어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는 사회의 이러한 변화에 맞게 애도하고 위로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가? 죽음에 대한 성숙한 태도, 고인의 존엄성과 남은 자들의 품위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은 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예술 체험은 그 자체로 훌륭한 여가이기도 하지만, 인간다움을 가꾸고 보존하는 학교이기도 하다. 『음악, 죽음을 노래하다』는 이 점에서 반가운 책이다. 죽음 가장 가까이에 있는 예술, 음악을 통해 애도와 위안, 존엄과 품위를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음악사나 음악 이론에 대한 책은 주로 전문가나 소수의 애호가를 위한 책에 머무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 책은 죽음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다루기에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학자, 연구자, 전문가들이 필자로 나서서 깊이 있는 전문 지식도 다뤄지지만, 집필 과정에서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 또 이 책은 다양한 작곡가와 작품을 아우른다. 죽음은 인간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죽음의 상황, 그에 대한 반응은 모두가 다 다르다. 가장 보편적인 동시에 개별적인 경험이 바로 죽음이다. 음악가들은 작품을 통해 인간 보편에 해당하는 추모의 마음과 더불어 그만이 겪을 수 있는 일회적이고 개별적인 경험을 동시에 다룬다.
근원적 질문으로 음악과 인문학을 연결하는 책
죽음은 또한 인문학적 주제다.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이 여기에서 다뤄지기 때문이다. 음악미학연구회 소장 오희숙 교수(서울대)는 프롤로그에서 “죽음은 개인적인 사건인 동시에 사회적 사건”이라고 강조한다. “전쟁과 사고 등 사회적 사건과 자연재해에 의한 죽음은 사망자의 숫자가 많기 때문에 안타까울 뿐만 아니라, 그 원인이 개인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점에서 더욱 억울하다. 음악은 때로는 언어와 연결되어, 때로는 순수 기악음악으로 죽음을 둘러싼 사회의 모습을 오랜 시간 부단히 담아 왔다. 특히 20세기 이후 많은 작곡가들은 역사적 사건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작품을 내놓았다. ‘음악으로 희생자를 위로’하고 이들을 계속 기리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음악들은 단순히 추모, 애도 또는 기도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역사적 메시지를 던진다. 사회의 불합리함과 무책임, 자연 재해, 참혹한 전쟁 등 많은 희생자를 낸 사건들을 인식하고, 그 문제를 비판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음악은 “사회적 정치적 비판의 파워풀한 역할”을 한다.
또한 장유라 박사는 에필로그에서 “크리스테바는 죽음을 성찰하는 ‘예술의 유용성’을 설파한다. 즉 그녀는 미술관에서 접하는 그림과 조각에서 죽음을 마주 대할 수 있다는 ‘죽음의 경험’을 말한다. 우리는 소설과 음악을 통해서 죽음을 바라본다. 언어가 주는 ‘사실성에 대한 묘사’만큼은 아닐지라도 소설가나 작곡가가 작품의 주제를 선정하고 그 작품을 서술하고 작곡하는 과정과 그의 삶을 추체험Nachleben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죽음을 경험한다”고 적는다.
죽음의 순간으로 들여다 보는 작곡가의 인생
『음악, 죽음을 노래하다』의 1부는 작곡가들의 마지막 순간을 추적한 에세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작곡가의 만년을 스케치하듯 그려내는 에세이들은 어떤 의미에서 각 인물들의 최고 정수를 반영한다. 슈베르트처럼 커리어의 정점에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든, 아니면 슈만처럼 격리와 금지 속에서 서서히 창작의 기운을 잃어갔든 관계없이 그들의 마지막 순간은 그의 성취와 인생 전체를 반추하게 만든다. 이성률은 모차르트 독살설과 같은 흔히 알려진 이야기를 화제 삼아 그의 말년에 실제로 벌어진 일들을 세세히 서술한다. 최은규는 베토벤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영웅다움을 키워드 삼아 그의 만년 음악의 특징을 ‘박애주의’의 승화로 읽어낸다. 또 말러를 다룬 글에서는 죽음에 영적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넘어서려는 말러의 정신세계를 서술한다. 정이은은 젊은 슈베르트가 죽음 앞두고 주체적인 예술적 도전을 감행했음을 강조했고, 이와 유사하게 박성우 또한 브람스의 주체적인 고독과 죽음 앞의 의연함을 인상적으로 서술한다. 김호정은 많은 오해를 받아온 슈만의 마지막 작품 〈유령 변주곡〉을 통해 단절 속에서도 끝까지 음악을 붙들고자 했던 작곡가의 의지를 드러낸다. 전정임은 1부의 유일한 한국 작곡가이자 현대 작곡가인 윤이상의 사례를 통해 실제 죽음을 경험한 시기였던 옥중에서의 인생관과 죽음의 충격을 이겨 낸 후 정립된 인생관이 어떻게 달라졌고, 또 작품에 서로 다르게 반영되었는지를 분석한다.
작품 속의 죽음: 극복, 기념, 추모, 기억, 애도, 성찰, 사회적 책임
1부가 작곡가의 인생에 집중된 ‘전기적 에세이’ 모음이었다면, 2부에서는 실제 작품을 다루는 ‘작품론 에세이’가 펼쳐진다. 정다운은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2번 「장송행진곡」에서 쇼팽 음악의 특성이자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와는 일견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유머의 요소를 읽어낸다. 또 지형주는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에서 동경의 대상이자 안식으로서의 죽음이라는 낭만적 관점을 설명한다. 이정환은 슈만의 가곡 〈레나우 시에 의한 여섯 편의 노래 그리고 레퀴엠〉을 아르스 모리엔디, 즉 죽어가는 과정에 대한 형상화로 설명한다. 살아가는 것은 곧 죽어가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과 같다는 점에서 예술 작품은 사는 법/죽는 법의 의미심장한 비유가 되는 것이다. 김소이는 리스트의 〈단테 교향곡〉을 단테 원작과 연결지어 고찰하며 방대한 작품의 핵심 시구의 인상을 교향시적으로 옮겨낸 작곡 방식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위의 네 사람의 작곡가들이 비교적 친숙한 낭만주의 시대 작곡가라면 다음에는 모더니즘과 현대 작곡가들이 그려낸 죽음의 모습이 다채롭게 이어진다. 우혜언은 코른골트의 오페라 〈죽음의 도시〉를 통해 현대인의 불안과 상실의 트라우마, 곧 망각과 죄의식을 죽음의 문제와 연관지어 분석한다. 김미영은 베르크의 유명한 오페라 〈보체크〉를 비인간적인 사회에 대한 책임을 묻는 사회고발적 작품으로 읽어낸다. 김서림은 라이히의 〈다른 기차들〉을 통해 홀로코스트의 파국 이후 현대 음악에 두드러지게 된 추모의 경향을 인상적으로 서술한다. 신인선이 다룬 리게티의 〈위대한 죽음〉, 오희숙이 다룬 쿠르탁의 〈짧은 성무일과-세르반스키를 추모하며〉 또한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가 자기 성찰과 닿아 있음을 지적한다. 노재헌은 그리제의 〈문턱을 건너기 위한 네 개의 노래〉를 통해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는 인간적 영성의 회복을 새로운 현대의 경향으로 서술한다.
이들 작품론적 에세이들은 더러 전문적인 지식들을 요구하는 음악 분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죽음을 바라보고 탐구하는 여러 가지 시선이기도 하다.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 등 20세기의 참상과 폐허는 문명과 인간성, 예술의 역할에 대한 질문을 불러일으켰고, 격렬한 자기 부정과 자기 성찰의 계기가 되었다. 이들 에세이들은 막연히 현대 음악에 대한 낯섦을 느껴온 독자들에게 하나의 이해의 실타래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애도와 추모는 곧 현대 음악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다.
해외 학술 논문 번역 수록
한편 3부 “죽음에 대한 심층 연구”에는 음악과 죽음에 관한 해외 석학의 논문 두 편을 번역해 실었다. 킵 페글리의 논문은 새뮤얼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가 어떻게 공식적인 추모의 자리에서 가장 자주 연주되는 작품이 되었는지를 개인적인 경험과 더불어 서술한다. 반복과 무시간성을 특징으로 가지는 이 곡은 트라우마를 겪는 이들이 느끼는 ‘부유하는’ 느낌을 전해주어 자연스러운 애도를 불러일으키는 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는 그러면서도 “음악은 이중으로 위험하다. 음악은 서로 소통하고 사람들을 감정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능력은 있지만 서술하는 능력은 없다. 음악은 외부 사건에 대한 해설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는커녕, 우리의 감정을 휘젓는 능력이 너무 자주 이상화되어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고 지적함으로서 이러한 애도의 음악이 오히려 공동체적으로 오용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고 경고한다. 한편 오드리 버거 카대니는 전통적인 음악의 효과라 여겨져 온 안정과 완화의 효과를 두 가지 방식으로 분석한다. 한편으로는 음악과 예술이 죽음의 필연성을 강조함으로서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의 화해를 촉구하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예술 작품을 통해 죽음이라는 개념과 안전하게 만나는 장을 제공함으로서 죽음의 의미를 변형시키고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론적 성찰은 막연하게 여겨졌던 음악의 치유 효과나 애도의 기능 등을 보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음악의 사회적 역할을 생각한다
여러 필진들이 쓴 에세이의 모음집이지만, 이 책은 명확한 구심점을 지니고 있고, 논의와 지평에서의 일관성도 보여준다. 그것은 단순히 죽음이 공통의 주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이라는 사건이 음악의 사회적 역할이라는 관심사로 모든 에세이를 수렴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은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인 사건이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죽음을 맞이하는 커다란 사건은 남은 자들에게 모종의 입장 표명을 요구한다. 전통적인 장례식 음악이든, 테러 희생자에 대한 애도를 담은 현대 음악 작품이든 죽음을 다루는 작품들은 그 자체로 사회에 대한 질문을, 더 나아가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는 자와 함께 울라”는 성경의 말씀은 음악의 전통적인 역할인 공감과 애도를 환기시킨다. 그러나 삶이 다양한 만큼 다양한 죽음의 모습은 그러한 전통적 역할뿐 아니라 죽음을 통한 해방과 갱생, 죽음의 기념, 죽음을 통한 고발 등 남은 자들의 사회를 향한 음악의 역할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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