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평진전 심효첨원작 서낙오평주
二十九、論時說拘泥格局 29. 논 시설 구니 격국
* 시에서 격국에 얽매임을 논함
八字用神專憑月令,月無用神,台尋格局。
月令,本也;外格,未也。
今人不知輕重,拘泥格局,執假失真。
팔자의 용신은 오로지 월령에 의존하는데, 월령에서 용신이 없다면 비로소 격국(格局:外格)에서 찾는다.
월령은 본(本)이고 외격(外格)은 아니다.
지금 사람들은 그 경중(輕重)을 모르고서 격국에 얽매어서 거짓을 집착하고 진실을 잃어 버렸다.
凡看命造,須將八個字逐干逐支配合,打成一片,而抉其樞紐所在,不能放過一字。
月令為當旺之氣,旺衰進退,胥由此而定(詳用神節)。
即月令無用而取外格,亦必有一篇議論,合於五行正理,方有可取,否則,支離附會,未可盡信。
무릇 명조를 볼 때는 8글자를 차례로 천간과 지지에 나아가 배합을 살피고서 하나로 합쳐야(打成一片) 하는데, 그 핵심(樞紐)이 있는 곳을 가려낸다면 한 글자도 간과(看過)할 수 없다.
월령은 왕에 해당하는 기이고 왕쇠(旺衰)의 진퇴(進退)는 모두 이로 말미암아 정해진다. 곧 월령에 용신이 없으면 외격에서 구하는 것이나 또한 반드시 한 편으로 논의해야 할 것이 있으니, 오행의 바른 이치에 부합해야만 비로소 취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면 종잡을 수 없어서 억지로 끼워 맞추어서 이루다 신뢰할 수 없다.
今入一知半解,又不細心研究,見一二字之相同,即謂合於某格,是不特無主宰,並相沿之格局,亦未曾看明白,至為可嗤。
因其不明原理,故拘泥執著而不知其非也。
지금 사람들은 하나만 알고 반쯤 깨달은 것으로 여기고 세심히 연구하지도 않고서, 한 두 글자가 서로 같다고 생각되면 곧바로 어느 격에 부합된다고 한다.
이는 생각에 주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답습한 격국에 연연하여, 또한 일찍이 옳게 본 적도 없었을 터이니, 웃을 수밖에 없다.
원리(原理)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얽매이고 집착하여서 그 잘못된 것을 모르고 있다.
故戊生甲寅之月,時上庚申,不以為明煞有制,而以為專食之格,逢甲減福。
고로 戊 일간이 甲寅 월에 생하여 시가 庚申이면 분명 칠살이 제복을 만난 것으로 하지 않고 전식격(專食格)으로 甲을 만나 복이 감소되었다고 한다.
《喜忌篇》云:“庚申時逢戊日,名食神專旺之方,歲月犯甲丙卯寅,此乃遇而不遇。”
夫時上食神專祿亦多矣,何以必取戊日庚申時,則以庚申暗合乙卯,為戊土之官星也。
暗合取用,是否可信姑置不論,《三命通會》明言:“月令若值財官,當以財官論”。
財官即用神,月令有用,從月令取也。
又云“戊午、戊寅,難作此格”,可見不僅月令,四柱有扶抑,即當別取也。
희기편《喜忌篇》에 이르길, 庚申 時가 戊日을 만나면 식신이 전왕(專旺)한 곳이라 하니, 년, 월에서 甲丙卯寅을 만나면 이는 곧 만났어도 만난 것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무릇 시상 식신전록도 많이 있는데, 어찌하여 반드시 戊日의 庚申 시만을 취한단 말인가? 곧 庚申이 乙卯를 암합해 와서 戊土의 관성이 되기 때문이나 암합(暗合)을 취용(取用)하는 것은 믿을 만한 것이 못돼서 우선 놔두고 논하지 않는다. 삼명통회《三命通會》에서 명확히 이르기를, 월령에서 재관(財官)을 만나면 마땅히 재관으로 논한다고 한 것인데, 재관이 용신이고 월령에 용신이 있으니, 월령으로부터 취하는 것이다. 또 이르길, 戊午、戊寅 일은 전식합록격을 이루기 어렵다고 한 것인데, 이는 월령뿐만 아니라 사주에서 억부(扶抑)할 것이 있다면 마땅히 별로로 취해야 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丙生子月,時逢巳祿,不以為正官之格,歸祿幫身,而以為日祿歸時,逢官破局。
丙 일주가 子月에 생하여 시에서 巳 록(祿)을 만나면 정관격으로 귀록(歸祿)이 방신(幫身)한다고 하지 않고 귀록격이 정관을 만나 국을 파했다고 한다.
《喜忌篇》云:“日祿歸時沒官星,號曰青云得路。”
희기편《喜忌篇》에 이르길, 일록귀시(日祿歸時)가 관성이 없으면 청운의 길을 얻는다고 하였다.
시에서 일록(日祿)을 만나 방신(幫身)하는 것으로서 용한다.
가령, 夫時逢日祿幫身為用,如:
鹽業總商王綬珊君命造。
염업 총상 왕수산 군의 명조이다.
小日報主入黃光益君命造。
소일보 주인 황광익군의 명조이다.
此兩造皆日祿歸時也。王君月令正財太旺,歸祿幫身,運至比劫而致富,所謂“四柱沒官星,青云得路”也。
黃君官煞太旺,恃巳祿為日元之根,尚須通關用印,運至印地最美。
比劫幫身敵煞雖為美運,巳落二乘歸祿,以見官為破格者,正以身煞相敵,故以不見為美也。
이 두 명조 모두 일록(日祿)이 시에 있다. 왕수산의 명조는 월령에 재성이 태왕하고 귀록(歸祿)이 방신(幫身)하고 있는데, 비겁 운에 치부(致富)하였으니, 이른바 사주에 관성이 없으면 청운의 길을 얻는다고 한 것이다. 황광익의 명조는 관살(官煞)이 태왕해서 巳 록(祿)이 일주의 뿌리인 것에 의지하고 있으니, 반드시 통관으로 인수를 용해야 하는데, 인수 운에 가장 좋았다. 비겁 운은 일주를 돕고 칠살과 대적하니 비록 좋은 운이라지만 기울었다가 다시 일어나는 운이었다. 귀록격이 관을 보면 파격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일주와 칠살이 서로 대적하기 때문에 관성을 보지 않는 것이 좋다고도 할 수 있다.
가령, 如:
為先叔某命造。
傷官生財為用,雖受遺蔭,富而不貴,且無子。
숙부 모(某)의 명조이다.
상관생재(傷官生財)를 용한다. 비록 물려받은 유산이 넉넉했으나 귀하지 못하였고 자식도 없었다.
此則月令官星被傷,子丑合住官星,為族弟某之造。
이 명조는 월령의 관성이 손상을 입었다. 子丑으로 관성을 합거한다. 친족 동생의 명조이다.
可見日祿歸時,不過幫身,不可以沒官星,便作貴論。
若月令官星清,身旺用財生官,何嘗非貴格乎。
일록(日祿)이 시에 있는 것은 일주를 돕는 것에 불과하니, 관성이 없어야 귀격이 된다고 논해서는 안 된다.
만약 월령의 관성이 청하고, 신왕하여 재성이 관성을 생하는 것을 용하는데, 어찌 일찍이 귀격이 아닌 적이 있었겠는가?
辛日透丙,時遇戊子,不以為辛日得官逢印,而以為朝陽之格,因丙無成。
辛日에 丙이 투출하고 시에서 戊子를 만나면 辛日이 관성을 얻고 인수를 만났다고 하지 않고, 조양격(朝陽格)이 丙 때문에 성격되지 못했다고 한다.
《喜忌篇》云:“六辛日時逢戊子,嫌午位運喜酉方。”
以戊丙同祿於巳,戊為辛印,牽動丙來辛之官星也。
희기편《喜忌篇》에 이르길, 六辛日이 시에서 戊子를 만나면 午를 꺼리고 서방 운을 좋아한다고 하였다.
戊와 丙은 巳가 녹(祿)이고 戊는 辛의 인수가 되는데, 巳중 丙을 요동시기고 합래(合來)해 와서 辛의 관성이 된다.
가령, 如:
此滬上名入朱葆三命造,相傳為朝陽格也。
其說支離,姑置勿論,即以朝陽格言,《三命通會》明言生甲寅乙卯月,只以財論,是以財為用也。
又云生四季月以印論,丙午丙寅丙戌月以財官論,是仍以月令為重,四柱扶抑為也。
이는 호상(滬上)의 유명한 주보삼(朱葆三)의 명조인데, 조양격이라고 전해져 온다.
그 학설은 지리멸렬하여 우선 놔두고 논하지 않으나 조양격으로 말하자면 삼명통회《三命通會》에서 명확히 이르길. 甲寅, 乙卯月에 생하면 단지 재성으로 논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재성을 용신으로 삼은 것이다.
또 이르길, 사계(四季:辰戌丑未) 月에 생하면 인성으로 논하고. 丙午, 丙寅, 丙戌 月에 생하면 재관(財官)으로 논한다고 했으니, 이는 곧 월령을 중시하고 사주의 억부(扶抑)를 용신으로 한 것이다.
財逢時煞,不以為生煞攻身,而以為時上偏官。
재성이 시에서 칠살을 만나면 재성이 칠살을 생하여 일주를 공격한다고 하지 않고 시상편관격이라고 한다.
財逢時煞者,月令財而時逢煞也。
《喜忌篇》云:“若乃時逢七煞,見之未必為凶,月制干強,其煞反為權印。”
原文甚明,干強者,身強也。
七煞本為剋身之物,然日元強,七煞有制,反為權印。
不僅時上如是,凡用煞皆然也。若以時上偏官,不問日元強弱,不問制化之有無,即以為合於一位貴格,則大謬矣。
재성격이 시에서 칠살을 만나는 것은 월령이 재성인데 시에서 칠살을 만난 것이다. 희기편《喜忌篇》에 이르길, 만약 시에서 칠살을 만나면 반드시 흉이 되는 것은 아니다, 월에서 제복하고 일간이 강하면 칠살은 오히려 권위의 징표가 된다고 하였으니, 원문에 매우 명쾌하게 밝혔는데, 간강(干強)이란 신강한 것이다. 칠살은 본래 일간을 극하는 기물이나 일간이 강하고 칠살이 제복된다면 도리어 권위의 징표가 된다. 이와 같이 시상(時上)에서만이 아니라 칠살을 쓸 때는 모두 그러하다. 만약 시상편관격(時上偏官)을 가지고 일간의 강약(強弱), 제화(制化)의 유무(有無)를 따지지 않고, 시상일위귀격(時上一位貴格)에 부합된다고 여기면 큰 오류인 것이다.
癸生巳月,時遇甲寅,不以為暗官受破,而以為刑合成格。
癸 일주가 巳月에 태어나 시에서 甲寅을 만나면 寅巳 형으로 합해오는 巳중 암관(暗官) 戊가 파손된 것이라 여기지 않고, 형합격이 성격되었다고 한다
《喜忌篇》云:“六癸日時逢寅位,歲月怕戊己二方”,即指刑合格而言。
格局之中,刑合、遙巳、遙丑等格,最不可信,較之暗沖之說,尤為支離。
巳遇申為刑合,巳見寅則刑而不合也。
總之不有其原理,雖書有此格,亦不知其用法。
譬如醫家診病,不知病理,而抄服舊方,寧有對症之理?
雖知舊有此格,存而不論可也。
희기편《喜忌篇》에 이르길, 六癸日이 시에서 시에서 寅을 만나면 년, 월에서 戊, 己를 보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했는데, 이는 형합격을 지칭하여 말한 것이다. 격국중에 형합격(刑合)、자요사격(遙巳)、축요사격(遙丑)등은 모두 믿을 수 없는데, 이를 암충의 학설에 견주어 보면 더욱 근거가 없어 종잡을 수 없다. 巳申은 형합(刑合)이고 寅巳는 형이지만 합은 되지 않는다. 한 마디로 그 원리가 분명하지 않고, 비록 고서에 이런 격이 있다고 하더라도 또한 그 용법을 알지 못한다. 비유하면, 의사가 병을 진찰하는데, 병리(病理)를 모르고서 옛 처방을 본떠서 복용시킨다면 어찌 병증에 대처하는 이치가 있겠는가? 비록 옛날에 이러한 격이 있었다는 것을 알지만, 존재하더라도 논하지 않는 것이 옳다.
癸生冬月,酉日亥時,透戊坐戌,不以為月劫建祿,用官通根,而以為拱戌之格,填實不利。
辛日坐丑,寅年,亥月,卯時,不以為正財之格,而以為填實拱貴。
癸 일주가 동월(冬月)에 태어나 酉日, 亥時이고 戊가 투출하고 戌에 자리하면 월겁격, 건록격이 통근한 정관을 용하는 것이라 여기지 않고 戌을 공협(拱挾)하는 공록격(拱祿格)이 전실(填實)되서 불리하다고 한다.
辛日이 丑에 앉고 寅年,亥月,卯時이면 정재격이라 하지 않고 공귀격(拱貴格)으로 寅이 전실(填實)되었다고 여긴다.
拱祿夾貴,四柱不明見祿貴,而地支整齊,亦足以增旺助用。
如袁項城命造是也(見星辰無關格局篇)。
究之八字本佳,喜用清純,綿上添花,益增其美,若八字平常,雖有拱夾,何所用之,祿貴不可以為用,況虛而不實之拱夾乎,填實亦未破格,如袁項城造,初運壬申,非填實貴入乎,庚午運非填實丁祿乎?
足見當以用神喜忌為主,不可執枝葉而棄根本也。至於夾官拱庫,究以何意義而取,殊不可解。
공록(拱祿)과 공귀(夾貴)는 사주에 분명히 녹(祿)과 귀(貴)가 없어도 지지가 정돈되고 가지런하면 또한 충분히 승왕(乘旺)되어 용신을 도울 수 있다. 가령 원왕성(袁項城)의 명조가 이러하다.
丁 丁 癸 己
未 巳 酉 未
팔자를 살펴서, 본래 아름답고 희용신이 청순하면 금상첨화(綿上添花)라서 더욱 그 좋은 점을 증대시키지만, 만약 평범하다면 비록 공협(拱夾)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녹(祿)과 귀(貴)를 용할 수 없는데, 하물며 허하고 부실한 공협(拱夾)에 있어서야?
전실(填實)된 것도 아직 파격은 아니다. 가령 원항성의 명조는 초년 壬申 운에 申 천을귀인이 전실된 것 아니란 말인가?
庚午 운에 丁 녹(祿)이 전실된 것이 아니란 말인가?
마땅히 용신의 희기(喜忌)가 주가 되는 것이니, 말단에 집착하여 근본을 버려서는 안 된다. 관성을 공협하고 고지를 공협하는 것에 대해서는 결국 무슨 의미로 취하는지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
乙逢寅月,時遇丙子,不以為木火通明,而以為格成鼠貴。
乙 일주가 寅月에 생하여 시에서 丙子를 만나면 목화통명(木火通明)이라 하지 않고 육을서귀격(六乙鼠貴格)을 이루었다고 한다.
《喜忌篇》云:“陰木獨遇子時,為六乙鼠貴之地。”
以產乙起例為丙子時,丙之祿在巳,巳合申,為乙木官星;子又會申,為三合貴會也。
又《神峰》云:“子中癸水合戊為乙財”,戊祿在巳,巳合申,為乙官星,其說更為支離。
總之此種格局,不可盡信,存而不論可也。
희기편《喜忌篇》에 이르길, 陰木이 子時를 만나면 육을서귀(六乙鼠貴)의 자리가 된다고 했으니, 乙丑, 乙卯, 乙巳, 乙未, 乙酉, 乙亥가 丙子時가 되면 丙의 녹(祿)은 巳에 있고 巳가 申을 합래하여 乙木의 관성이 되며 子는 다시 申을 회합하니, 귀(貴)를 삼합 회합으로 끌어 온다는 것이다. 또 신봉통고《神峰》에 이르길, 子中 癸水가 戊를 합하여 乙의 재성이 된다고 하였으니, 무의 녹(祿)은 巳에 있고 巳가 申을 합하여 乙의 관성이 된다고 하는데, 그 이론은 더욱 지리멸렬하다. 한마디로 이런 종류의 격국은 다 믿을 수 없으니, 있다고 하더라도 논하지 않는 것이 옳다.
如此謬論,百無一是,此皆由不知命
이와 같이 잘못된 이론은 백 가지 중에 하나도 없으니, 이것은 모두가 명리를 모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