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마리아의 옷
조 흥 제
어제 정부종합청사 앞을 돌아오니 광화문 앞에 철골로 지은 튼튼한 강연대가 있었다. 왜 그렇게 영구적으로 지었을까? 요즈음 최순실 국정 농단으로 대통령이 물러나라고 연일 촛불 데모를 하더니 대통령이 탄핵되자 이제는 헌재에 몰려가서 빨리 결정하라고 데모다. 그들은 4․19 데모 때 이승만 대통령이 데모대에 의해서 물러난 것을 예를 들면서 대통령더러 빨리 물러나라고 한다. SBS 연속극에 ‘야인시대’라는 프로가 있는데 거기에는 격동기에 아픈 우리 역사가 담겨 있다. 왜정시대 주먹으로 전국을 석권했던 사내! 해방 후에는 반공전선에 서서 빨갱이들을 몰아내고 대한민국을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했던 거한! 자유당 시절에는 국회의원으로 의정단상에서 독재정권과 싸웠던 정치인! 파란만장한 김두한의 일대기를 다루어 암담했던 시절을 재조명할 수 있었다. 그 프로에서 내 눈길을 끈 것은 주인공 김두한이 아니라 이기붕(李起鵬)국회의장의 부인이었던 박마리아 여사였다. 그녀는 병약한 남편을 젖히고 세상을 떡 주무르듯 하려다가 조국 대한민국을 혼란 속에 몰아넣고, 자신도 실패한 우리 역사에 몇 안 되는 악녀 중 하나가 되었다. 청소년 때 그러한 역사를 몸소 체험했던 나는 몰랐던 부분도 극 중에 많이 나와 자주 본다.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여당인 자유당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던 이기붕이 야당 후보인 장면(張勉)에게 패하자 충격을 받아 본인은 병원에 입원하고, 자유당은 초상집으로 변하였다. 내무장관과 치안국장이 병 문안 차 왔는데 박 마리아가 문 밖에 나가 그들을 맞아 선거 패배의 책임을 물으면서 바락바락 악을 썼다. ‘사람들이 염치가 있어야지’ 하고 혼잣말 비슷하게 한다. 그러자 내무장관이 ‘염치요, 무슨 염치, 내 참···, 위로 차 들렀더니’하면서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짓는다. 박 여사는 그 사람들을 파면시키기로 마음먹었는데 찾아 왔으니 자리만 연연하는 몰염치한 사람들로 보였던 모양이다. 박 마리아는 1906년 강릉에서 가난한 농부의 외딸로 태어 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모친을 따라 개성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어머니는 목회자의 가정부로 들어 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박 마리아는 남의 집 어린 아이를 봐 주고 채소밭에 나가 일을 하여 받은 품삯으로 연명했다. 13세에 소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민며느리로 들어가라는 주위의 권유를 뿌리치고 어머니의 주선으로 교회 재단에서 운영하는 개성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교역자의 딸이어서 학비는 면제 받았지만 생활은 어려워 친일파 윤치호의 딸 윤봉희의 도움을 받았다. 졸업 후 어머니를 도와서 교회 일을 하던 중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에 입학했다. 학교생활 4년 내내 반장을 하여 ‘작은 영웅’의 뜻이 담긴 소영(小英)이란 별명을 받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여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 후 모교 호수돈여고보에서 교편을 잡다가 이화여전 선교사 아펜셀러의 추천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32년 마운트 호올리대학과 테네시주 스카아리트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해 피바아디 사범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하여 이화여전 강사를 지냈으며 일본을 찬양하는 친일파로 적극 활동했다. 1935년 이기붕과 결혼하여 대학 강사직을 사임하고 10여 년 동안 YWCA 총무 직을 맡아 일했다. 이기붕은 1896년 충북 괴산에서 몰락한 양반가의 독자로 태어 나 어려운 환경에서 선교사의 도움으로 중학교를 졸업한 후 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을 거쳐 도미하여 아이오와 주 데이버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대한민국회 회장으로 있던 이승만(李承晩)을 만났고 허정(許政)과 함께 삼일신문을 발간하기도 했다. 귀국 후 가회상회를 운영했지만 실패하고 국일관 지배인을 지냈다. 다방을 경영하기도 했고, 건축청부사업소도 개설하는 등 잡다한 일을 하다가 일제 말기엔 허정과 함께 광산을 경영했지만 빛을 보지 못한 채 해방을 맞았다. 이승만이 귀국하자 이기붕은 이승만의 서무담당비서로 일했다. 박 마리아는 YWCA 문화부장 직을 맡는 한 편 이화여대 영문과 교수가 되었다. 이승만보다 늦게 귀국한 부인 프란체스카여사가 먼저 한 일은 그 때까지 이승만을 수발하던 임영신 등 여자들을 몰아내는 일이었다. 한국어를 모르는 프란체스카 여사는 영어에 능통한 박 마리아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박 마리아는 남편인 이기붕의 정치노선을 프란체스카 여사를 통하여 확보했다. 이기붕은 1951년 국방부장관에 임명되어 국민 방위군 사건과 거창사건을 수습했다. 조선민족청년당계와 함께 자유당을 창당해 총무부장이 되었다가 자유당중앙위원회 의장이 됨으로써 자유당의 2인자 자리를 굳혔다. 1954년 민의원 의장에 선출되었고, 이승만 종신집권제인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안의 날치기 통과를 주도했다. 1956년 제 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으로 출마했던 이기붕은 낙선했지만 박 마리아는 당대 최고의 조직력을 가진 대한부인회 최고위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화여대 부총장이 되었다. 장남 이강석을 이승만의 양자로 경무대에 들여보내면서 정치, 종교, 교육, 여성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박 마리아가 살던 서대문 집은 서대문 경무대로 불리기 시작했다. 1960년 제 5대 정부통령 선거에 이기붕이 부통령으로 출마했을 때 지난 선거에서 장면에게 패배했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지유당은 경찰, 행정, 깡패들을 동원하여 대규모 부정선거를 획책하여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켰다. 하지만 4·19혁명으로 제2의 경무대로 불리어졌던 박 마리아의 서대문 집은 데모대에 의해서 불탔고, 이승만대통령이 하야하자 끈 떨어지진 뒤웅박 신세가 된 이기붕 일가는 그 동안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을 찾아 갔으나 전부 등을 돌려 숨을 곳을 찾지 못하였다. 서울 근교를 배회하다가 1960년 4월 28일 경무대로 다시 돌아 와 육군 장교였던 장남의 권총으로 일가족 네 명이 자살로 끝을 맺었다. 정치의 세계, 한 번 빠져들면 이루 말 할 수 없는 마력으로 휘어잡아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하는 수렁이라고 한다. 내노라 하는 사람들이 돈 보따리를 싸 들고 와서 허리를 굽히면서 바치는 데야 싫어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들은 들통이 나도 미안해하는 표정이 없다. ‘다 해 먹는데 재수가 없어서 걸렸을 뿐’이라는 표정이다. 많은 돈을 먹어도 대가성이 없으면 괜찮은 것이 정치법이라나. 거금을 대가성 없이 바치는 얼간이가 어디 있나. 어린애도 웃을 일을 정치권에서는 하고 있다. 이런 세계에 깊이 빠지면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몇 년 전 후배가 등단하여 문학상을 받는 자리에 축하해 주러 갔더니 그들의 대표로 유명한 전직 P의원이 답사를 하였다. 5공 시절 대북관계를 총 지휘했던 그는 6공 시절에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 그는 조용한 마음으로 감방에 누워서 하늘의 별을 보니 자신의 반짝이는 영혼도 보였다. 정치판에서 자신도 모르게 이전투구(泥田鬪狗)하듯 굴러갔는데 감방에서 잃어버렸던 영혼을 찾아 글을 써서 출판사에 보낸 것이 오늘의 영광을 가져오게 되었다고 정치판을 이전투구장으로 비유했다. 강원도 고성 화진포해수욕장 옆에 화진포 호가 있다. 거기에는 이승만별장, 이기붕 별장과 김일성 별장이 있다. 이기붕 별장에 흰 저고리에 검정치마 옷 한 벌이 걸려 있다. 설명은 ‘박 마리아의 옷’이라고 쓰여 있다. 그 옷이 큰 것으로 보아 박 마리아는 체구가 컸던 모양이다. 그만한 체구의 소유자여서 천하를 호령하지 않았을까. 주인은 오래 전에 갔어도 옷은 옛 주인을 생각 하게 하면서 영욕의 덧없음을 일깨워 준다. 이 시대의 박마리아는 최순실이다. 자유당 정권 때 박마리아는 구속되지 않았다. 이기붕만 국민들은 탓했지 박마리아는 제외됐었다. 지금은 최순실이 구속되었다. 4․19 때와는 그것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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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래 전에 써 놨던 것을 오렸습니다. 요즘 정치판이 굴러 가는 것을 보면 양심이란 건 없습니다. 오로지 정파만 있을 뿐입니다. 이러다가 제3의 박마리아가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