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물길 이야기를 하면서
아래 내용은 2023년 12월 11일(월) 창녕지역 역사생태 이야기 나눔방 <따공> 모임에서,
오종식 회장님이 발제한 내용을 바탕으로 다른 자료를 덧붙인 것이다.
여기서 나온 내용에 더 많은 자료를 보충해서, 창녕 역사생태 이야기를 만드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낙동강 1,300리중에 상류 600리는 강폭이 좁아 하천 수준이여서 실제 큰배가 다니기가 쉽지 않다.
낙동강 큰 물길 기준을 보통 문경 삼강나루를 삼는다. 삼강나루 아래부터 실제 배가 다닐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낙동강 상류는 강폭이 좁지만, 풍경이 아름다워 곳곳에 정자를 세워 조선 선비들 모임방 역할을 했다.
가락 동쪽에 있다는 뜻으로 낙동강이라고 하지만, 낙동강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고, 그 이야기 중심에 창녕이 있다.
아래 지도에 보듯이 창녕은 낙동강 중심이고, 동,서,남,북 모두 합쳐서 중심된 고장이 창녕이다.
생태와 역사를 바탕으로 관광상품을 만드는 지방자치단체를 살펴보면 남해안을 따라에는 대부분 이순신장군과 관련된 상품을 내세우고 있다.
바다가 아니더라도 이순신 장군이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백의종군한 내륙길도 관광상품을 만들고 있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이야기나 역사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다면, 조그마한 연결 고리라도 내세워 관광상품을 만들어 홍보하고 있다.
낙동강 물길 발제 자료.
그 고장이 가지고 있는 장단점을 활용해서 관광홍보를 하고 있는 전남 장성군 사례다.
전남 장성군은 전라남북도 가운데 있다. 다른 군에 갇혀 있는 장성군이지만, 전라남북도 가운데 있다는 지리적 장점을 살려 오방색 중심색인 황색을 장성군 상징 색깔로 내세우고 있다.
물길로 황룡강을 곁에 두고 있는 점도 있지만, 색깔로 지역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전남 흑산도에 가면 바닷가 집 지붕을 죄다 빨간색을 칠하고 있다. 유럽 지중해 마을을 보고 만든 것이다.
사람들에게 색이 주는 이미지는 크다. 오방색을 이미지로 만든 오색비빔밥이 대표 상품이다.
우리 전통 색이 오방색을 잘 살리고, 전남북 중심이라는 장성군 생각은 칭찬 받을만 하다.
창녕은 제2의 경주라며 경주와 견주어 역사고장으로 홍보하고 있다. 창녕은 낙동강을 가장 많이 접하고 있는 고장이다.
낙동강과 연계하여 창녕을 다른지역에서 많이 알리고 있는 곳이 우포늪이다. 우포늪 또한 낙동강과 한 몸이다.
<낙동강 물길 중심 창녕>, <낙동강 생태와 함께하는 우포늪>,<낙동강우포늪 생태와 함께하는 창녕> 이름으로 창녕을 대표하는 관광상품이 나왔으면 한다. 창녕 남지에서 낙동강을 활용한 유채축제를 해마다 하고 있다고 하지만.
남지 맞은편 함안에서는 남강, 낙동강을 활용해서 더 많은 행사를 하고 있다.
행사를 많이 한다고 더 좋다고 할수는 없지만, 강을 활용하는 면에서는 함안이 더 앞선다는 생각이다.
장성엘로우시티스타디움 문 여는 날- 파이낸셜뉴스 사진
장성에서 큰운동장을 새롭게 만들었는데, 노란색을 하고 있다. 그런데 엘로우시티스타디움 이라는 미국말을 써서 한번에 이해하기 힘들게 해놓고 있다. 장성의 특징을 살린다고 노란색을 홍보하면서 한국사람들이 들으면 한번에 알아 들을 수 없는 이름을 지어 놓았다. 그냥 장성노란운동장하면 한 번에 알아 들을 수 있다. 선거에 나오는 후보자가 자기를 알리게 위해 만든 명함이 죄다 한자나 영어로 써서 알리는 꼴이다.
창녕군 부곡면 비봉리 바닷물 유입 지도- 지광 민석규 님 블로그 사진.
♣창녕에도 바다가 있었다.
2003년 매미 태풍으로 비봉리 배수장 시설 증설공사를 하다가 발견된 비봉리 패총 유물은 창녕 대표 자랑거리다.
비봉리 유적에서 8,000여년전에 만들어진 소나무 배가 나왔다.
통나무 가운데를 파내서 배를 만든 모양과 비슷한 유물이 주남저수지 부근 다호리에서 통나무관이 나왔다.
이 관은 청동기 시대 유물로 비봉리 소나무와 견주어 훨씬 뒤에 만들어진 배다.
오래된 소나무배와 유물이 나온 비봉리가 비봉만이었고, 창녕이 바다와 가까이 있었다는 점이다.
바다와 가까이 있다는 것은 먹을거리가 풍부하다는 것이고, 바다 물길을 이용해서 여러지역과 교류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먹을거리가 풍부한 곳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창녕 비봉만 시대를 훨씬 지나 조선시대도 남해 바다물이 밀물때면 양산 물금까지는 쉽게 올라왔고, 김해 상동, 김해 삼랑진까지도 밀물의 영향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낙동강 상류에서 내려 올때는 내려오는 물길은 따라 그냥 내려오면 된다.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 가는 물길은 밀물과 바람 그리고 노를 젓어 올라 왔을것이다. 낙동강에 물이 많이 없어 배가 강바닥에 닿을 때는 강 양쪽에서 배를 끌어 주는 고딧줄꾼들이 있었다.
♣고딧줄꾼 이야기 -낙동강이 물이 없어 배가 쉽게 다닐 수 없을 때는 강 양쪽에서 밧줄을 이용해서 배를 끄는 방법을 썼다. 낙동강 물이 적어 배를 끌기 힘든 곳에는 <고딧줄꾼>이 있었고, 고딧줄꾼은 배를 끄는 전문직 업인셈이다. 고딧줄은 삼(麻)으로 엮어 만든 굵은 밧줄을 말한다. -또 배가 강 상류로 거슬러 오를 때 물살이 세거나 한 곳에서도 줄꾼들이 필요했다. 이들은 건장한 장정들로 양쪽 강둑에서 좌초된 배를 모래톱에서 끌어내는 인부들이다. 그들이 부르 던 노래가 전해온다. 우두머리격인 도사공(都沙工)이 선창을 하고 고딧줄꾼들이 후렴을 반복했다고 한다. <고딧줄꾼들의 강배 끄는 소리> 가자가자 어서 가자, 어기여차 어기야(후렴)/ 남지들을 찾아간다(후렴)/ 언제 갈꼬 저 남지를/ 남지 들을 들어서면/ 우리들 목적지/ 콩 팔러 어서가자/ 북풍한설 찬바람에/ 언제 갈꼬 저 남지를/ 발은 얼어빠지는 듯/ 저 사공아 닻을 잡고/ 동풍 오기 기다리자/ 어기여차 어기야... -고딧줄꾼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러시아 중국에도 그 기록이 남아있다. 제정 러시아 말기에 사실주 의 그림을 많이 남긴 일리아 레핀의 <볼가 강의 배 끄는 인부들> 그림이다. 그가 볼가 강을 따라 여행하면서 내륙 운송을 하는 배들은 강을 따라 하류로 갈 때는 물이 흐르는 방 향을 따라 가면 되지만,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때는 많은 동력이 필요하다. 특히 물살이 세거나 한 곳에서는 예전에는 육지에서 줄을 메고 배를 끄는 일들이 있었다. 중국 장강 (長江) 삼협 박물관에 가면 배를 끄는 사람들에 대한 전시물이 있다. -고딧줄꾼들이 부산에서 실은 소금을 남지에 내리고, 남지에서는 콩을 싣고 낙동강을 거슬러 올 라가면서 불렀다. -우리나에서 두 번 째로 긴 강이 두만강이다. 두만강에 두자가 콩두 자이며,만 자는 찰만이다. 두만강 둘레에 콩이 많이 생산되었고, 콩을 실은 배들이 많아서 두만강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창녕 남지 도 모래로 된 넓은 둔치가 많았다. -여러 배에 나누어 실고 강 상류로 거슬러 오르면서, 삼랑진의 뒷기미 나루터를 거쳐 수산, 남지, 박 진, 더 위로는 밤마리(栗旨), 현풍(玄風) 등지로, 또 상주 낙동나루와 안동까지 소금과 해산물을 팔 았다. 그리고 현지에서 나락, 보리, 콩, 팥, 기장, 조 등의 농산물과 바꾸어 싣고 내려왔다. 소금 배와 각종 어물을 실은 배들은 강가 장날에 맞추어 나루터 부근에 정박한다. 소금과 어산물을 팔고 내륙의 나락, 보리, 콩은 곡물과 면화, 광석, 목기, 죽기, 옹기, 한지 등을 사 서 하류로 내려오며 판다. 나루터 장날의 풍경은 수많은 장꾼, 각처에서 온 보부상, 뱃사공 등이 어울리고 여각, 주막 등이 성 황을 이룬다. 소금 배는 소금만 싣는 게 아니다. 사람도 타고 새 문물과 새 소식도 사람과 함께 이웃 고을로 전해진다. 강변 나루터는 세상 물정을 잘 아는 요즘의 역세권 같은 곳이다. 배가 다녔으니 배 세권이라고 해야 할까. |
고대부터 이집트는 나일강이 중요한 교통길이였다. 나일강은 남에서 북으로 흐른다. 남에서 북으로 흐르기 때문에 남에서 북으로 갈때는 물흐르는 길을 따라 가면되고, 북에서 남으로 갈때는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이용해서 돛을 달면 북에서 남으로 쉽게 내려 올수 있다고 한다. 과학이 발달한 지금이 더 나은 세상이라고만 할 수 없다. 자연을 활용한 지혜는 옛 사람들이 더 나을 수가 있다.
♣창녕 자랑 비봉리패총전시관
8,000여년전 비봉만은 바다라고 하지만, 잔잔한 호수 같았다.
깊숙히 들어온 좁은 내만이라 먼바다에서 일어나는 파도 영향이 없었을 것이다.
길이 310cm, 폭 62cm, 두께 2~5cm 작은배를 타고서도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작은 배로 어떻게 바다를 다닐수 있어요? 하는 질문을 아이들이 한다.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었을 수 있다. 필리핀에는 방카라는 배가 있다. 방카는 폭이 좁은 배 양쪽에 대나무를 거치대를 활용해서 좁은 배가 안전하게 다닐 수 있게 하고 있다.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라도 타는 요령만 있으면 작은배라도 뒤집히지 않고 탈 수 있다.
개그맨 김병만 나오는 오지탐험 프로그램에 그런 장면이 나온다.
현지인들은 작은배를 타면서도 파도에 뒤집어 지지않고 잘 타지만, 처음 해보는 한국 사람들은 계속 배가 뒤집혀 배를 제대로 부리지 못했다.
비봉만은 큰 태풍이 불지 않는한, 작은 소나무배를 타고 호수같은 잔잔한 바다에서 고기를 잡았을 것이다.
비봉만에 나온 소나무 배이야기를 가지고 무슨 필리핀 방카까지 들먹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비봉리패총 전시관에 유물을 두고 여러가지 생각을 해보는 놀이는 아이들 창의력에 도움이 되고, 전시관 유물을 재미있게 볼수 있는 방법이다.
필리핀 방카.
비봉리에서 나온 유물 중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이 도토리저장 구덩이와 조개 껍질들이다. 도토리가 많이 난다는 것은 도토리를 좋아하는 동물들도 많이 살았다는 것이다. 도토리를 좋아하는 동물을 다람쥐를 먼저 떠 올리겠지만, 실제 멧돼지들이 더 좋아한다. 비봉리 패총에서 멧돼지 모양 문양도 나왔다.
조개껍질을 비롯한 생활 쓰레기를 한 곳에 모은 것이 패총인데, 패총은 낙동강 건너 주남 저수지 둘레와 창원 김해에서도 많이 발견되었다.
요즘 미국에서는 한국 음식이 한류 바람을 타고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한다.
굴 여섯개가 들어 있는 국밥이 오만원을 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굴양식 기술이 발전하여 김치 담글때도 굴을 넣어 먹기도 하고, 굴전, 굴국밥, 굴구이 까지 굴음식이 다양하게 나오고 있다. 벚꽃 필때 하동 섬진강에서 나는 벚굴은 크기고 크고 맛도 있다.
굴은 남성 호르몬인 테스로스터론을 합성하는데 필수적인 영양소인 아연이 풍부하다.
굴 산란철인 봄에는 굴이 독소를 내기 때문에 이때는 굴을 먹지 않는다. 기술이 발전하여 산란철을 가지지 않는 굴도 연구개발되고 있다고 하니, 우리나라가 굴 산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굴 생산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는 중국이지만, 인구와 견줘어 보면은 우리나라가 굴을 더 많이 먹는다.
유럽사람들도 한국에 와서 굴이 많이들어 있는 국밥을 보고 놀란다고 한다.
지중해는 석회암으로 바닷물은 깨끗하게 보이지만, 유기물 성분이 적어 굴이 다량으로 자라기 힘든 조건이고, 영국과 노르웨이 사이에 있는 북해는 밀물과 썰물이 있는 갯벌이 있지만, 굴이 잘 붙을 수 있는 조건이 아니라고 한다. 굴은 갯벌에서 나오는 유기물이 풍부하고 굴 종패가 붙어 살수 있는 두가지 조건이 맞아야 제대로 자랄수 있다고 한다.
굴이 자랄수 있는 조건이 부족하고, 인건비가 비싼 유럽에서는 당연히 굴이 비쌀 수 밖에 없다.
창녕 사람들은 싸고 영양가 높은 굴을 오래전 부터 먹어왔다.
소나무통나무 배와 함께, 도토리를 바닷물에 담겨 저장했던 구덩이가 많이 발견되었는데, 이 도토리 연대는 지금부터 4,900여년 전 것으로 밝혀졌다,
도토리ㄹ르 바닷물이 들고나는 저장 구덩에 넣어 놓으면, 속껍질에 들어 있는 떫은 탄닌 성분을 없애고, 짠물에 담그 놓으면 벌레가 먹은 것을 방지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요즘은 도토리를 묵으로 해먹기도 하지만, 그때는 돌판에서 갈아서 죽처럼 먹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옥수수나 밀을 돌판에서 갈아서 죽을 끓어 먹는 아프리카 원주민들 영상자료와 견줘어 보면 이해가 쉽다.
다른 유물전시관에 견줘어 크기는 작지만, 상상력만큼은 크고 넓게 할 수 있는 비봉리패총전시관이 창녕에 있다.
황상일, 김정운, 윤순옥 창녕 비봉리 지역의 홀로세 증기 해수면 변동 논문 자료와 지광 민석규 님 블로그 자료.
♣창녕 낙동강 물길을 활용한 사람들 이야기
철길과 고속도로가 생기전에는 강과 바다를 이용한 물길이 중요한 교통수단이였다.
철길과 고속도로가 발달되어 있는 현대에 와서도 운하를 만들려다 국민들 저항에 부딪쳐, 보만 만든 일이 어제와 같다.
낙동강 풍경이 아름답다면 유람선을 띄워서라도 강을 활용하자는 의견이 있다.
낙동강 곳곳은 물을 취수해서 생활용수를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낙동강에 배를 띄우는 일은 쉽지 않다.
강에 유람선을 띄우는 곳은 진주 촉석루 앞 남강을 다니는 유람선과 안동 하회마을에서 낙동강 건너편 부용정을 오고가는 유람선이 있다. 낙동강 하구 부산에서 <낙동강생태탐방선> 이름으로 월,화요일마다 운행을 하고 있다. 영산강이 있는 나주에서도 유람선이 다닌다. 백마강이라고 불리는 부여 금강에서도 유람선이 다닌다. 서울 한강에도 유람선이 다니고 있다.
강을 활용한 관광의 외국 사례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낙동강 유람선은 낙동강벨트 이름으로 다양한 생태관광 자원을 개발할때 생각해볼 문제이다.
조선시대 낙동강을 거점으로 발자취를 남긴 사람으로 곽재우 장군과 한강 정구 선생을 들 수 있다.
곽재우장군이 임진왜란이 끝나고 낙동강변에 정자를 짓고 벗들과 놀았던 곳이 길곡면에 있는 망우정이다.
한강 정구 선생이 제자들과 함께 낙동강을 따라 유람을 했던 이야기가 기록을 남아 있고, 그 뜻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사대강 사업으로 낙동강변에 많은 공원을 만들어 놓았다. 넓은 공원을 관리해야 하는 문제점이 있다.
많은 예산을 들여놓고 관리를 하지않으면 습지식물이 자라는 공간이 될 것이다.
♣ 한강 정구 선생 이야기-오종식 회장님 자료와 그외 여러 곳에서 자료를 빌려왔습니다. ▸한강 정구(1543-1620) 한강 정구 선생은 경북 성주에서 태어났다. 성주 인물로 첫 번째로 꼽는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선 생에게 학문을 두루 배운 학자이다. 말년 중풍을 치료하기 위해 동래 온천을 방문하기 위해 경북 칠곡 지암나루를 출발한 배는 하빈,현풍,고령,창녕, 함안, 영산, 밀양, 김해, 양산을 거쳐 동래로 갔다. 1617년 7월 20일부터 9월 4일 까지 45일까지 낙동강 따라 이어진 여행길이였다. 동래 온천에서 돌 아오는 길은 양산 통도사, 경주, 영천, 하양, 경산을 칠곡 사수로 돌아갔다. 이 여행길에 함께 동행한 제자인 이윤우가 <봉산욕행록-蓬山浴行錄>이라는 이름으로 여행기를 남겼다. 한강 정구 선생의 제자 삼백 여명 중에 낙동강에 따라 있던 209명의 제자중 80명 이상에 함께 했다고 한다. 몸을 치료하기 위 해 나선 길이지만, 한강 정구 선생에 배운 제자들의 결속을 다지는 일종의 ‘낙동강 단합대회’를 한 것이다. * 봉산: 동래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다. 방장,영주와 함께 봉래산은 신선이 산다는 산을 말함. ▸한강 정구 선생과 망우당 곽재우, 함안군수 박충후, 여헌 장현광 등 문인과 제자 서른 다섯 명이 낙 동강에 배타고 놀면서 학문 토론을 벌렸던 일을 기록한 것이 <용화산하동범록>이다. 이후 동범에 참 여한 박진영 장군의 증손 박상절공이 ‘기락편방(沂洛編芳)’을 내어 세상 사람들에게 용화산하동범 록 이야기를 알렸고, 후손들이 모현계(慕賢契)를 맺어, 매년 모현정(함안 칠서면 계내리 소재-능 가사 뒷편)에서 모임을 열어 그 뜻을 기리고 있다. 기락편방 뿐만 아니라 함안 모현정을 중심으로 후 손들이 한강 정구 선생 중심으로 행한 낙동강 뱃놀이를 1964년까지 즐겼다는 기록이 ‘낙강동범계안 부시집(낙강은 낙동강,동범은 뱃놀이, 계안은 계원 명부다, 부시집은 덧붙인 시집)’이라는 책도 있 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조선이 기록나라였듯이 한강 정구 선생도 곳곳에 기록을 남겼다. 한강 정구 선생이 남긴 기록들은 읍 성의 문화를 기록한 향토지이다. 창녕 현감으로 있을 때 쓴 창사지를 비롯해서, 통천지, 임영지, 동복지, 관동지, 함주지를 썼으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함안을 기록한 함주지 밖에 없다. 이런 뜻을 기리기 위해 함안에서는 한강 정구 선생의 기리는 행사를 꾸준히 하고 있다. 부처님오신날이면 함안 이수정에서는 해마다 낙화놀이를 하고 있다. 이 낙화놀이도 한강 정구 선생이 시작한 놀이이다. ▸한강 정구 선생은 홍길동전을 쓴 조선의 천재 교산 허균과도 만남을 가졌다. 허균의 집에 책을 빌려 보고 돌려 주지 않자, 허균 선생은 정중하게 편지를 써서 빌려준 책을 돌려 달라고 했다."옛사람의 말에 빌려간 책은 언제나 되돌려주기는 더디다 했는데, 더디다는 말은 1년이나 2년을 가리키는 것입 니다. 사강을 빌려드린 지가 10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되돌려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벼슬할 뜻을 끊 고 강릉으로 돌아가 그 책이나 읽으면서 소일하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라고 했다. ▸한강 정구 선생이 조선의 이름난 학자와 활발한 교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경상 좌·우도의 중앙인 성주에 있었기 때문에 퇴계·남명 양 학파를 아우를 수 있었다고 한다. ▸창녕군 유어면 미구리 491-2번지에 있는, 창녕 팔락정(八樂亭) 한강 정구 선생이 1576년 창 녕 현감으로 있을 때 세웠다. 8제(8서당)는 관산제(고암면 월미), 부용정(성산면 후천), 술정(창녕 읍 술정), 팔락정(유어면 구미), 옥천정(창녕읍 옥천), 물계정(대지면 왕산), 백암정(고암면 원촌), 만진정(유어면 세진)이다. 부용정․팔락정․옥천정 3곳은 새로 건물을 세웠고, 관산제․술정․물계정․백암정․ 만진정 5곳은 기존에 있던 정자를 활용했다. 각 서당마다 인근의 덕망 있는 선비로 선생을 삼아 가르 치게 하였다. |
♣우포늪과 낙동강을 이어주는 토평천 물길 살펴보기
1916년 일제감정기때 제작한 지도. 경성부립도서관종로분관에서 보관했던 창녕지도.-우포늪과 낙동강을 이어주는 토평천
2023년 구글어스 사진
1916년에 제작된 지도와 지금의 지도를 견줘보면 우포늪에서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토평천이 구불구불한 것에서 완만한 직선이 되어 있다.
유어면 세진마을 지나 우포늪에 둔터가 있다. 임진왜란때 곽재우 장군이 둔터를 활용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낙동강에서 둔터까지 배를 물건을 실어 올수 있었는지를 알아봤으면 한다.
지금은 토평천이 높은 둑이 쌓여져 있고, 토평천 양쪽에는 논이 되어있지만, 1916년 당시는 논은 없고 아무런 표시가 없는 땅으로 되어 있다. 수시로 물이 든다는 얘기일 것이다. 땅 사이로 사람들이 다녔던 길이 표시되어 있다.
♣이방 장터에서 우포늪을 지나 창녕읍을 가는 길
1916년 일제감정기때 제작한 지도. 경성부립도서관종로분관에서 보관했던 창녕지도-우포늪 둘레 지도
위 지도는 이방면 안리에서 우항산 소목을 지나고 사지포에서 창녕읍으로 나가는 길을 파란선으로 표시해봤다.
창녕에는 어느 고장보다 머리에 이고, 등에 지는 보부상 활동이 활발한 고장이다.
낙동강 나루터를 중심으로 상업이 활발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위 지도에 표시한 파란색 길에는 보부상만 다녔을까? 달구지에 짐을 싣고 다니는 길은 아니였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소목이라는 마을 이름은 길목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길목에 보부상이나 달구지에 짐을 옮기던 사람들이 쉬어 가는 주막도 있었을 것이다. 우포늪 둘레에 있는 갈대, 물억새 군락은 소들이 쉬면서 풀을 뜯어 먹었던 아주 좋은 곳이였을것이다.
사지포 언덕 아래는 70년대까지만 해도 우포늪 둘레 마을에서 소를 먹이던 곳이다.
백마리가 넘는 소들이 물억새와 갈대를 먹고 노을진 사지포 언덕을 배경으로 마을로 돌아가는 모습은 멋진 그림이 되었을 것이다. 주매마을 어른들 이야기에 따르면 사지포 팽나무 아래서 소꼴을 먹일때 친구들과 함께 놀았던 곳이라고 한다.
80년대 들어서면서 수입소가 들어오고 사육 방식이 울타리 안에서 가두어 키우는 방식으로 바뀌고, 먹잇감도 점차 사료로
바뀌어 갔을 것이다.
우포늪 둘레 마을에는 곳곳에 소를 키우던 우사가 많이 남아있다.
80년초 새마을연수원장을 지냈던 전00이가 병든소를 수입해서 많은 농민들 원성을 산 일이 있다.
소 잇밥이라고 할 수 있는 물억새가 군락을 이루던 곳에 소벌 풍경을 새롭게 그리기 위해서는 소벌에 소가 있는 풍경을 그려본다.
소달구지와 보부상이 다녔던 우포늪 둘레길에 대해 다시 한번 살펴 볼 일이다.
한가지 덧붙인다면 1930년대 일제 자본에 의해 쌓은 대대제방 축조이야기에 대해 다시 살펴봐야 한다.
어디 기록이 남아 있는지를 알아 볼 필요가 있다.
현 세진마을 이장님 증언에 따르면 대대제방이 더 높게 쌓기 전에는 둑이 계단식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대대 둑 밑으로 집들이 있었다고 한다.
10년 전만 해도 대대제방 입구에 집이 한채 남아 있었다. 이 사진도 구해 봐야 한다.
♣성씨고가 앞 물길 살펴보기
1916년 일제감정기때 제작한 지도. 경성부립도서관종로분관에서 보관했던 창녕지도-성씨고가 앞 지도
2023년 구글어스 지도
1916년 지도에는 성씨고가 옆 마을인 모산,왕산 앞에 토평천이 가까이에 있다. 2023년 구글지도에는 토평천이 둑을 높이 쌓아 굽은 하천을 완만한 직선으로 한 모습을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토평천 물길을 마을 바깥으로 돌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부분도 다시 알아볼 필요가 있다.
1916년에 제작한 지도와 견줘보면서 낙동강과 우포늪 둘레 습지에 대해 생각을 해 보았다.
잘못된 점이나 부족한 부분은 보완해서 창녕 물길 이야기를 새롭게 만들어봤으면 한다.(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