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五章 고향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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꽈앙……!
시뻘건 불길과 거무스름한 연기, 매캐한 내음이 동시에 시야
를 어지럽혔다.
적엽명은 적시에 화약을 쳐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두
개 남은 돛대 중 앞돛은 불길과 함께 사라졌으리라. 뒷 돛만
가지고는 해남도까지 항해할 수 없다. 폭풍이 언제 또 들이닥
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승선한 사람들은 바다의 유랑자(流浪者)가 될 것이고, 필경
은 난파되어 물고기 밥이 되리라.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한광은 화약이 터진 쪽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의 매서운
눈길은 낯선 놈이라 오인했던 적엽명을 놓치지 않았다.
"네 놈이……!"
한광은 급격하게 치솟는 흥분을 가라앉혔다.
적엽명이다. 눈에 익은 초식, 해구비연.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잊을 수 없었던, 지난 시간만큼 세월이 더 흐른다 할지
라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얼굴이 나타났다.
첫 눈에 알아보지 못하다니.
계집애처럼 뽀얗던 피부가 거칠어지고 햇볕에 그을려 구릿
빛으로 변했지만 옛 모습은 여전하거늘. 아무리 수염이 덥수
룩하게 자랐다지만 눈매만 보면 알아볼 수 있는 얼굴.
한광은 자신이 변한 만큼 적엽명도 변했다는 사실을 절감했
다. 적엽명은 그가 간직하고 있는 기억 속의 적엽명이 아니었
다.
팔 년 전의 앳된 얼굴에서 살결에 힘이 박힌 청년으로 변신하
여 나타났다.
한광은 시위 매겨진 활처럼 팽팽하게 긴장된 근육을 풀고
여유를 되찾았다.
적노검법은 말 그대로 평온한 해오라기 같은 심정으로 펼쳐
야 한다. 검로를 파해할 몽환안법과 행동을 뒷받침 해 줄 검
법이 준비되어 있다. 단숨에, 유유히 놈의 목젖을 갈라버리리
라.
옛날에는 너무 긴장했다.
눈으로는 보았으되 초식이 뒷받침되지 않았다. 검을 쳐냈지
만 너무 긴장한 탓에 적노검법의 변화를 펼쳐내지 못했다. 단
일 푼만 검의 방향을 틀었어도.
지금은 옛날과 다르다.
여덟 명을 죽여 살기도 높였다. 적노검법 팔 초식……
각 초식마다 피가 묻어있다. 전에는 실전과 수련의 차이점을
파악하기 못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스르릉……!
검집에 집어넣었던 검이 다시 빠져나왔다.
시퍼런 검광은 유부(幽府)에서 들리는 호곡성(號哭聲)처럼
피를 원했다.
"하하! 능글맞기는 여전하군. 서로 모르는 처지도 아닌데
…… 선착장에서 아는 척이라도 할 것이지."
한광이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군."
적엽명도 마주 웃었다.
목소리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약간 혼탁한 듯 하면서도 듣기 좋은, 뱃속에서 우러난 듯한
저음(低音).
그렇다! 음성이 변했다. 옛날에는 맑고 청량했는데 지금은 목
이 쉰 듯 음정이 두껍게 나온다. 세월이 흐른 만큼 경륜이 쌓
인 것일까? 어떤 공격에도 천년암(千年巖)처럼 꿋꿋하게 버틸
것 같은 묵직함도 같이 우러나온다.
그래서 선착장에서 알아보지 못했다. 옛날과는 전혀 다른 기도,
전혀 다른 음성이었기에.
"오랜만이지."
적엽명의 웃음이 입가만 비틀어진 마른 웃음이라면 한광은
마음속을 활짝 열어 보인 듯 환하게 웃었다. 붉은 입술 사이
로 보이는 하얀 이빨이 깨끗하게 빛났다.
"파문당한 놈이 버젓이 나타났다? 아! 그렇군!"
한광은 무엇인가 생각났다는 듯 왼손을 들어 이마를 '탁!'
소리가 나게 때렸다.
"팔 년이 지났군. 팔 년이 지났어. 하하하!"
한광은 유쾌해 보였다.
해남파 율법(律法)에 따라 파문당한 자는 바로 해남파의 적
이 된다. 팔 년 전, 공공연하게 적엽명을 공격한 것도, 비
가에서 두둔하고 나서지 못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해남파의 손에서 칠 년 동안 살아남으면 상황이 달
라진다.
더 이상 해남파의 적이 아니다. 전 문도가 공격을 가하고도
죽이지 못한 강자이거나, 착실하고 올바르게 살아 죽일 필요
가 없는 경우가 그렇다.
해남파는 죄를 징계하되, 회개할 출로를 열어주었다.
해남파 역사상 파문당한 자는 모두 네 명.
그 중에 두 명은 죽었고, 한 명은 불가(佛家)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었다.
또 한 명.
그는 팔 년이 지난 오늘, 눈앞에 서있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군. 너를 징계할 사람이 아무도 없
어. 이런…… 그리고 보니 검을 괜히 뽑았네."
한광은 검을 뽑은 것이 쑥스러운 듯 어깨를 출썩였다. 하지
만 거둘 생각은 없는 듯 익숙한 손놀림으로 만지작거렸다.
"나는 네가 아직도 예전의 개망나니로 기억되지 뭐야. 하하!
그 때는 참 철이 없었어. 아마 쓰레기 잡종 놈이라고 놀렸지?
아니야. 그것가지고 그렇게 성냈던 게 아니지. 뭐라고 했더라?
기억이 가물거리는군. 대충 창부(娼婦)의 자식이라고 놀렸던 것
같은데. 맞지? 맞아. 그런 다음부터 네 검이 춤을 추기 시작했
어."
한광의 입가에 매달린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창부의 자식!
적엽명은 그 소리를 들은 다음부터 한 자루 청강 장검에 숨
을 불어넣었다. 그것이 무신년(戊申年) 사건(事件)으로 이어
질 줄은 본인도 예측하지 못했겠지만.
"여전하구나."
적엽명은 뜻밖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궁금한 점이 하나 있는데 말야. 창부의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또 검을 뽑을 텐가?"
"……"
적엽명의 눈빛이 반짝하고 빛났다.
소름끼치도록 매운 눈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간에 떠
올랐다 사라져서 마주 선 한광만이 느꼈을 뿐 다른 사람들은
평온한 신색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후후후! 검을 뽑던 안 뽑던 네 자유겠지만…… 조심하는
게 좋아. 이놈이 피 맛을 모를 때는 얌전하더니 이제는 나도
걷잡을 수 없단 말야."
한광은 혀로 검신을 핥았다.
검은 깨끗했다. 중년인의 팔을 잘라버린 검이지만 선혈이
조금도 묻어있지 않았다. 아니다. 그것은 겉으로 봤을 때의
모습이 그럴 뿐, 검은 이미 혈기(血氣)를 베어 물었다. 겉으
로는 아무 표식도 나지 않는 검이지만 혀로 핥을 때는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질게다. 하지만 한광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
히려 피 맛을 즐기는 듯 했다.
"옛이야기는 나중에도 할 때가 있겠지."
적엽명은 눈길을 중년인 일가족에게 돌렸다.
"아! 그래. 옛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하자고. 지금은 이
놈들을 처리해야 하니까. 하하!"
발 밑에 널브러져 있는 중년인.
잘린 팔에서 선혈이 샘솟듯 흘러나온다. 혼절(昏絶)했는지
눈을 꼭 감고 있지만 아직 살아있는 것은 확실하다. 안면 근
육이 쉴새 없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으니까.
어린 소녀는 어쩔 줄 몰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하지만
중년 부인은 여족 여인들이 으레 그렇듯이 침착하기 이를 데
없다. 이런 점만은 한족 여인들도 배워야 한다.
사내들이 바깥에 나가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원인은 바로
아내의 내조가 큰 탓이다.
여족은 상대가 되지 않는 해남파와 싸워온 탓에 자연스럽게
이별에 익숙해져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내가 죽어 돌아와도
담담하게 맞이한다. 재혼(再婚)도 자연스럽다. 새로운 사내는
전남편이 남기고 간 자식들을 친아들 같이 보살핀다. 자신도
어느 순간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여족의 생사관? 개가 물어갈 소리.
그건 단지 약자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방편일 뿐이다.
중년 부인도 딱히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혼절한 사내의
남은 한 손을 꼭 잡고 슬픈 얼굴로 들여다보는 것이 고작이었
다.
한광은 '아빠'를 부르짖고 있는 어린 소녀에게 눈길을 고정
시켰다.
"우화대원은 사지를 보존하지 못하지. 이 자식들은 골수까
지 모두 썩었어. 하하하! 죽고 싶으면 곱게 죽을 것이지 어린
자식까지 동원하다니. 쯧!"
한광은 동정 어린 투로 말했다.
뜻은 분명했다. 중년 부인은 물론 어린 소녀까지 죽어야 한
다는 것.
과거의 적엽명이라면 이런 경우 절대 방관하지 않았다. 제
가 무슨 협골(俠骨)이라고 앞 뒤 가림 없이 참견부터 하고 나
서는 팔불출이 적엽명이다.
우화대원을 잡는다는 생각은 한광의 머릿속에서 까마득하게
사라져버렸다. 늑대인간에 대한 호기심도 사라져버렸다. 기억
속에 잠들어있던 적엽명이란 인간이 눈앞에 나타난 순간, 그
는 '이 놈을 어떻게 요리해야 할까'하는 생각에만 몰두했다.
단 한 번 당했던 패배, 골수에 사무치는 기억. 오로지 적엽
명을 죽이겠다는 살념(殺念)으로 검을 잡던 나날들.
죽이기는 죽여야겠는데 단칼에 베어버리는 것은 너무 싱거
웠다.
"실수한 것 같군. 이들은 내 종일 뿐…… 우화대원이 아냐."
적엽명의 묵직한 입에서는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그는 어린 소녀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소녀에 눈에 비친 간절한 구원의 빛을 외면할 수 없
었다. 살려달라고 애 원하는 눈빛을.
'이들은 내 종일 뿐 네가 생각하는 우화대원이 아니다.'
과연 적엽명은 예쁜 소리를 해주었다.
'그 사람들을 건드리지 마라.' 또는 '부녀자는 건드리지 마
라.'정도만 기대했는데 종이라?
"주인 허락도 받지 않고 팔 하나를 잘랐으니, 해남도에 들
어가서 한가주님께 정식으로 보상요청을 하지. 더 이상 괴롭
히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보상요청? 한광은 배를 움켜잡고 데굴데굴 구르고 싶은 심
정이었다. 걸려도 제대로 걸려들었다. 우화대원이 분명한 자
를 종복(從僕)이라고 두둔하다니. 이제 확인만 하면 된다.
이 순간, 한광은 무척 냉정했다.
적엽명과 흑월이 동일인일 것 같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우화가 고용한 살수, 흑월. 그렇지 않
으면 쓰레기나 다름없는 여족인을 위해 나설 이유가 없지 않
은가 말이다.
흑월의 정체.
어쩌면 비파가 벌써 흑월의 정체를 간파했는지도 모른다.
우화가 행하는 일은 비록 신비롭고 신속하지만 본문의 이목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번 흑월에 관한 일도 본문에서는 벌써 감
지하고 있을 게다.
적엽명이 흑월이라면? 그러면 일은 더욱 재미있어진다.
여족의 씨를 받고 태어난 놈이면서도 어려서부터 알게 모르
게 마음 속을 짓누르던 놈.
놈을 천천히…… 천천히 즐기면서 죽여줄 수 있다.
"뭣!"
한광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얼굴을 일그러트
렸다.
범위는 눈을 감았고, 유소청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무섭
게 노려보았다. 석두만 즐거운 듯 빙그레 미소를 띄었다.
사실 석두의 놀람은 한광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범위와 유소청은 적엽명이 돌아왔다는 것을 사전에 알았지
만 그는 한광처럼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으니. 석두의 얼굴에
서는 웃음기가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가 웃고 있는 것은 오로
지 오랜 세월동안 굳어버린 습관 때문이었다.
우화와 관계된 일에 관여하면 죽음뿐이다.
이 자리에 있는 범위나 유소청, 석두는 중년부부 일가족이
우화대원이란 사실을 확신했다. 적엽명은 배를 타는 순간부터
관심의 대상이었고, 작게 속삭이는 소리이기는 했지만 '흑월'
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확실히 들었으니까. 그것도 바다에 스
스로 투신한 여족 청년들까지 같은 소리를 중얼거렸으니 바보
가 아닌 다음에야……
그럼 적엽명이 바보란 말인가.
그렇다. 그는 바보다. 두어 걸음 앞에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칼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번연히 알면서도 걸어가는 바
보. 어쩔 수 없는 바보. 타이르고 달래고 협박을 해도 듣지
않는 바보. 예전부터 그는 바보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바보였
다.
"믿어지지 않나 본데…… 해안소에서 은을 무려 세 정(錠)
이나 주고 샀지. 팔 하나가 잘려 일을 제대로 못할 것 같으니
한 정은 청구할 생각이야."
외길이었다.
중년부부를 종이라고 말한 이상 서로가 정해진 외길을 걸어
갈 수밖에 없었다.
"아까…… 흑월이란 말을 들었다. 흑월이 누구지?"
"흑월?"
"적당한 핑계를 대봐."
"핑계를 댈 필요까지 없겠지. 흑월이란 죽음을 뜻하는 여족
인들의 흑호(黑號:은어)가 아닌가? 해남도를 오랫동안 떠났던
나도 아직 기억하고 있는데?"
"재미있어. 재미있어. 하하하!"
한광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대소를 터트렸다.
적엽명의 말은 사실이다. 유소청이 들풀이란 말로 죽음을
대신하자고 말한 적이 있지만 여족인들은 오래 전부터 검은
달이 인간의 영혼을 빼내간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투신한 자들이나 중년 부부가 말한 흑월이란 우화대
원들이 사용하는 밀마(密碼)가 분명하지 않은가. 하루나 이틀
정도 조사해보면 백일하에 드러날 일을.
"저 자는 나를 보자마자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것도 변명해
주지?"
"살기(殺氣)를 읽었을 뿐이야."
"호오! 일개 촌민이? 대단하군. 살기를 읽을 수 있다니."
"본능이지. 개나 고양이도 살기는 읽을 수 있어."
"하하! 좋아. 폭약 건은 묻지 않겠어. 보나마나 적당히 중
얼거리겠지. 저 놈은 뭐라고 말할까? 글쎄…… 저 놈도 종인
가? 듣지 않는 게 좋겠군. 도끼를 휘두르는 종이라……"
한광은 죽어 널브러진 거한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호기심을 조금은 남겨둬야지. 그래, 양보하지. 자, 데리고
가."
한광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옆으로 비켜줬다. 하지만 검은
아직 거둬지지 않은 상태였다. 옆으로 다가서기만 하면 가차
없이 목을 베어버릴 것 같은 기세가 은연중에 풍겨 나왔다.
적엽명은 뚜벅뚜벅 거침없이 걸어왔다.
무방비 상태였다. 전신 요혈(要穴)이 활짝 열려 있다. '공
격할 테면 해봐라.'하는 무시하는 태도로도 비춰졌다.
그는 등 뒤에 서있는 한광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중년인의
어깨를 집어 지혈(止血)부터 시켰다. 그리고 품안에서 금창약
(金瘡藥)을 꺼내 골고루 발라주었다.
"해남도에는 아주 살려고 왔나? 아니면 궁금해서 들린 거야?"
한광이 어색한 침묵을 깼다.
"……"
적엽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의원이라도 된 냥 중년인을 치료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떤 의도에서 이 배를 타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쉽게
떠나지는 못할 거야. 하하! 참! 이 말도 해줘야겠군. 그 동안
나이 좀 들었다고 말야, 사람 얼굴을 보면 인생이 보여. 내가
보기에 너는 죽을 상(相)이야. 쯧쯧! 지옥에서 간신히 빠져
나온 것 같은 몰골하고 아주 어울리는 말 아닌가?"
"……"
중년인의 치료가 끝났다.
광목으로 잘려진 곳을 묶어놨지만 이내 새빨간 선혈로 물들
었다.
잠깐에 불과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 흘린 피도 적지 않아 얼
굴색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꽤나 아플 것이다. 하지만 중년인은 이를 악물고 신음소리 한
마디 내뱉지 않았다.
"오랜만에 돌아왔으니 환영식을 해줘야겠지? 묵은 은원도 있
고 말야. 잘 알지? 당시 나는 기습을 받았고, 저기 있는 오
진검은 목검을 들고 나갔다가 당했다더군. 하하하!"
한광은 자신의 치부를 꺼내면서도 극히 태연했다.
적엽명은 태연하지 못했다.
한광의 말을 들을수록 적엽명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한광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다. 윤리나 도덕에 구애받지도
않고, 그러면서도 은연중에 경시할 수 없는 무게를 담고 있
다. 검의 도(道)가 높아지면서 행동에도 자유가 생긴 것이리
라.
'강하다. 석불과 전혈은 만나보지 못했지만 범위나 유매보
다는 강하다.
그것도 훨씬…… 해남오지가 균등한 실력을 보였다더니,
뭔가 잘못됐어. 실력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았어.'
적엽명이 보기에 한광은 범위나 석두, 유소청보다 한 수 높
은 고수였다.
"기회를 주지. 무신년의 오명(汚名)을 말끔히 씻어봐. 중양
절(重陽節)이 어때? 해남오지란 이름을 걸지."
"뭣!"
"아!"
놀람은 다른 곳에서 터져 나왔다.
범위, 석두, 유소청.
그들은 너무 큰 놀람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중양절에 해남오지란 이름을 걸고 싸우자.
이번 중양절은 다른 해와 의미가 사뭇 다르다. 바로 십삼대
해남오지가 정식으로 임명되는 날이지 않은가. 더군다나 해남
오지의 이름을 걸겠다는 것은?
해남오지를 선발한다는 것은 해남십이가의 무공이 이십 년
만에 저울질된다는 의미를 가진다. 장문인의 유고시, 수굴일
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수굴일지가 장문인직을 이어받는다
는 뜻으로 보면 천여 명의 해남 무인 중 후계자를 선정하는
중요한 행사이기도 하다.
법도가 엄격하고 치열한 것은 당연하다.
비무대회부터 중양절 취임식까지의 일 년 동안 해남오지로
내정된 다섯 사람은 뭇 고수들의 표적이 된다.
해남십이가 출신으로 나이가 서른 이전이라면 누구든지 도
전하여 해남오지란 이름을 탈취할 수 있다.
일 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해남오지로 선정된 무인들은 도전
자를 물리침으로써 강자로써의 당당한 면모를 보여주어야 하
는 것이다.
그러나 여태까지 그런 예(例)는 한 번도 없었다.
석 달에 걸친 비무대회를 통해 서로의 실력을 가늠한 후이
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도전할 이유도, 실력도 없었다. 해남
오지는 해남십이가 후기지수(後起之秀) 가운데 가장 강한 다
섯 명이니까.
그렇다. 적엽명은 작년에 치른 비무대회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남오지에게 도전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하지
만 그가 해남오지에 도전하기에는 커다란 난관이 있다.
그의 출신성분이 문제다.
비가가 해남십이가 중 일가임에는 분명하지만 여족 여인의
몸에서 태어났으니 도전권이 없다고 봐야 한다.
아니, 도전권을 말하기에 앞서서 여족인의 피가 섞인 자는 해
남십이가의 자손으로 인정조차 하지 않는 실정이지 않은가.
한광이 말한 것은 적엽명의 신분을 인정하는 것이나 진배없
었다.
적엽명의 어깨가 꿈틀거렸다.
그도 약간의 충격을 받았으리라.
"괜찮은 제의지? 하지만 빈손으로는 안 돼. 우리가 가까운
사이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호의를 베풀 이유가 없지. 파랑검
을 가져와라. 비가주의 신물(信物)이나 다름없는 파랑검을 가
져와야 해남십이가의 일원이라고 본문 어른들을 설득할 수 있
지. 또 해남오지에 도전하고, 개 잡종이란 소리를 다시 듣지
않으려면 그만한 노력은 해야 할 것이고……"
적엽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중년인의 어깨를 부축하고 몸을 일으켰다.
"하하! 만약 내가 이긴다면 말야. 난 파랑검을 분질러 버릴
생각이야. 하하하!"
한광은 밝게 웃었다.
아름답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그의 얼굴은 밝은 웃음과 잘
어울렸다. 군계일학(群鷄一鶴). 그는 언제 어디서나 뭇 사람
들 가운데서 단연 돋보이는 인물이었다.
'싸움을 피했어. 잘된 일이야. 잘 됐어.'
유소청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적엽명의 기도는 날카롭다. 범위와 일수를 교환하는 모습에
서 만만치 않은 무공을 지녔다는 것도 알았다. 그는 강하다.
대륙에서 무슨 일을 하며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피로 점철된
혈보(血步)를 걸어왔다는 정도는 짐작된다.
그러나 상대가 범위와 한광이라면……
범위가 전력으로 해랑검법을 펼쳤다면 과연 맞상대가 되었
을까?
유살검이라는 무명을 얻은 한광이 마음먹고 검을 전개했다
면 과연 지금 태연하게 걸어갈 수 있었을까?
유소청은 마치 자신이 한광과 부딪쳤던 것처럼 가슴이 뛰었
다.
한광이 중양절에 비무하자는 말을 꺼냈을 때는 자신이 기회
를 얻은 듯 기뻤고, 또 한광의 무위(武威)를 생각하면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내심은 이미 겉으로 드러나 범위는 물론 적
엽명의 출현조차 모르고 있던 석두까지도 의미 있는 웃음을
짓고 있다는 사실은 까마득히 몰랐다.
'해남도에 들어서기도 전에 구원(舊怨)이 터지고 말았어.
그토록 염려했는데.'
고물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적엽명의 얼굴에는 우울한 그
림자가 드리워졌다.
어린 소녀의 애통해하는 모습을 외면할 수 없었다.
"왜 나를 살려 주었소?"
중년인이 힘들게 입을 열었다.
"아이 때문에."
"흥!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아!"
어린 소녀가 당차게 말했다.
'죽음을 아는가? 베는 것은 쉽다. 하지만 죽은 시신에서 구
더기가 묻어 나오는 것을 보았는가? 경직된 피부가 썩어 문드
러지는 광경을 보았는가? 그러고도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자
신할 수 있는가?'
적엽명은 어린 소녀의 치기 어린 대답에 실소를 금치 못했
다.
"흑월이란 말…… 함부로 쓰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휴우!"
중년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부터 우화대원이 되었습니까?"
적엽명은 묻지 않아도 좋을 것을 물었다.
이제 해남도까지는 반 시진 정도가 남았을 뿐이다. 파고는
여전히 높지만 범위와 천해원이 있는 한 해남도에는 무사히
도착하리라.
"열 네 살 때부터였소. 휴우! 사십여 년이 흘렀구려."
중년 부인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쯤에서 우화대원이 되었
을 것 같았다. 이제 한참 개구쟁이 짓을 할 어린 소녀가 죽음
이 무섭지 않다고 말할 정도니 그들이 살아온 환경이야 말해
무엇하랴.
"하는 일은?"
"전가의 농장에서 고무를 체취하고 있어요."
중년인 대신 중년부인이 대답했다.
"아까 바다에 투신한 젊은이 중 한 명이…… 흑월이냐고 묻
더군요. 몇 명이나 흑월을 마중 나왔……"
"소협, 목숨을 구해준 은혜는 감사하게 생각하나…… 더 이
상 묻지 말아주시오. 엄연히 따지면 그대는 한족, 우리는 여
족. 나는 지금도 한족을 해남도에서 몰아낼 수만 있다면 내
한 목숨 버려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오."
중년인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적엽명은 늑대를 꼭 끌어안았다.
염왕은 워낙 심한 뱃멀미에 오뉴월 수양버들처럼 축 늘어져
신음소리조차 내뱉지 못했다.
젊은이 중 한 명이 흑월이냐고 묻더라는 대목에서 중년인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식은 아닌 듯 했다. 그는 정말 몰랐
다. 복선(複線)! 우화는 흑월과의 접선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복선을 깔았다. 아마도 바다에 뛰어든 젊은이들이나 중년부부
는 서로를 몰랐으리라.
그렇다면 흑월과 접선하고자 하는 사람이 또 있을 수 있다.
이 배 안에.
"아무리 당분간은…… 비가에 머무는 게 좋겠습니다. 당신
들은 내 종이니까."
비가에 몰아닥칠 풍운(風雲)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
것은 자신이 비가로 가나 안가나 매한가지였다.
적엽명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