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수필문예대학 32기 수필심화반 작품 모음
삼순이 이야기
대구수필문예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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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수필문예대학 32기 수필심화반 작품 모음>
· 책을 엮으면
차 례
· 김태선 / 작은 배려 큰 기쁨 -----------------
흔적 ---------------------------
· 김향연 / 스도쿠 속의 세상 -----------------
카멜레온의 여행 - ---------------
· 마예란 / 사과의 교훈 ---------------------
무릎의 충고 ---------------------
· 성정분 / 우리 집 개 박득구 -- ------------
나의 귀걸이- --------------------
· 손근호 / 당신의 감정은 안녕하십니까 - -----
다시 잡은 손 -------------------
· 오경희 / 자두 향기 ---------------
내리 사랑 ----------------------
· 이미경 / 낙화(落花) ----------------------
피로 회복제 ---------------------
· 이종금 / 맨발 걷기 ---------------
아브라카다브라 ------------------
· 이진아 / 특별한 시집 ---------------------
촌므파탈 -----------------------
· 이해진 / 나도 할 수 있을까 ----------------
달아난 송아지 -------------------
최경식 / 삼순이 이야기--------------------
태풍 ---------------------------
· 최의숙 / 딸에게 엄마는--------------------
작은 배려 큰 기쁨
김태선
신혼 때 주말부부였다. 남편 직장이 서울이고 나는 대구에 살았다. 큰딸이 태어나자 휴직하고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육아휴직 수당도 없던 시절이라 남편 월급만으로 생활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딸을 위해 각종 유아용 교구와 동화전집 할부금까지 지출하면 생활비에 여유가 없었다.
어려운 살림이니 남편도 헛된 돈은 쓰지 않았다. 단 하나 예외가 있다. 가족이 외출했다가 택시를 타고 돌아올 때 매번 기사에게 "감사합니다. 잔돈은 안 주셔도 됩니다." 했다. 요금이 만만찮아 택시를 탈 때마다 요금 미터기에 신경이 쓰인다. 특히 신호등 앞에서 기다리는 동안에도 재깍재깍 요금이 쑥쑥 올라갈 때는 속이 탄다. 집에 들어오면 남편께 "아니, 잔돈을 왜 안 받는 거예요. 갑부 아들도 아닌 사람이 말이야." 하며 잔소리를 했다. 거기에 신호등 앞에서 미리 내렸으면 요금이 더 적게 나올 수 있다는 말까지 보탰다.
어느덧 남편의 그런 행동에 익숙해졌다. 혼자 택시를 탄 어느 날, 손에 든 짐이 많아 잔돈을 받기 좀 번거로웠다. "수고하셨습니다. 거스름돈은 안 주셔도 됩니다." 택시 요금을 주며 그이가 하던 대로 말했다. 택시기사가 "손님, 감사합니다. 복 많이 받으실 겁니다." 한다. 덕담에 진심이 느껴졌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 "고맙습니다. 기사님도 복 많이 받으세요." 답인사를 했다. 그때 기사의 기뻐하는 환한 표정을 봤다.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택시 요금을 올림 해 지불한다. 30년이 지났다. 그동안 잔돈의 가치가 많이 떨어졌다. 그런데도 여전히 택시기사를 기쁘게 해줄 수 있다. 지금은 세상이 편리해져 택시 요금을 카드로 결제할 수 있지만, 나는 현금을 준비해 택시를 탄다. 택시를 타고 돌려받는 거스름돈이 길에 떨어져 있어도 아무도 줍지 않을 만큼 적은 금액이지만 그 기쁨이 기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다. 앞으로도 그 소소한 행복을 계속 누리고 싶다.
큰딸이 어릴 때, 택시 요금의 거스름돈 때문에 잔소리 대상이던 남편이 어느 때부터 멋진 사람으로 보인다. 어려운 서울 살림살이지만 작은 행복이 숨어 있던 추억이다. 작은 배려에 미소 지을 수 있음은 큰 기쁨이다. 소소한 삶 속에서 소중한 행복을 깨닫게 해준 그이가 고맙다.
흔적
김태선
무엇이든 시간이 지나면 흔적이 남는다. 요즘은 지을 수 없는 흔적을 자주 떠올린다. 미소 짓게 하는 것도 있고 아쉬운 것도 있다.
첫째를 출산했을 때다. 생후 1년 동안의 다양한 경험과 자극이 두뇌 계발과 집중력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정보를 믿었다. 아이에게 도움을 주려 육아휴직을 했다. 유모차에 태워 곳곳을 데려 다녔다. 눈에 보이는 것마다 알아듣지도 못할 설명과 이야기를 했다.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더 다양한 자극을 주고 싶었다.
6살 터울로 둘째가 태어났다. 같은 이유로 육아휴직 했지만 첫째 때와 달랐다. ‘아이가 기억도 못 할 텐데 힘들게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보여주고 이야기해 줄 필요가 있을까? 지나친 과욕일 거야’라고 합리화하며 힘이 덜 드는 편한 방법으로 돌봤다. 다양한 경험과 자극에 대한 영아기 엄마의 역할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두 딸이 자라면서 집중력 차이가 보였다. 함께 동화책을 읽을 때 첫째는 읽는 속도에 맞추어 책장을 넘기며 끝까지 잘 들었다. 듣는 태도가 좋아 많이 읽어줬다. 반면에 둘째는 읽는 속도에 맞추지 않고 책장을 마구 넘겼다. 집중하지 않으니 읽어준 양이 훨씬 적었다.
첫째가 고1 때 영어 과외를 했다. 과외선생님의 수업방식이 자유분방해 수시로 외화를 봤다. 딸은 영어 듣기가 목적인 외화보기 수업을 즐기며 집중했다. 어느 순간 '영어에 귀가 열렸다'고 했다. 그 이후로 영어를 듣거나 읽을 때 해석 없이 바로 이해했고, 영어성적은 늘 1등급을 받았다. 엄마로서 천군만마를 얻은 듯 매우 든든했다. 둘째도 고등학생이 되면 같은 선생님께 영어 과외를 시키면 영어성적은 문제없겠다고 생각했다.
둘째의 고1 때 그 선생님께 영어 과외를 받게 했다. 첫째처럼 영어 귀가 곧 열리리라 기대를 잔뜩 했다. 한달, 두달, 일년이 지나도 그러지 못했다. 두 딸의 집중력 차이를 간과하고 같은 효과를 기대한 것이 착오다. 두 딸에게 영아기 때 남긴 나의 흔적 차이다.
그 흔적이 육아 일기장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첫째 딸의 것에는 시간 단위로 자세하게 기록해 여러 권이다. 그때의 아이와 함께한 경험과 일상이 모두 담겼다. 둘째의 것은 달랑 한 권으로 기록이 간단하다. 딸들의 영유아 때 자란 흔적을 보니 나의 정성이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영향이 컸다는 생각이다.
첫째가 사춘기 때 육아 일기장을 보여줬다. 엄마의 정성에 감동했는지 사춘기의 반항심이 사라졌다. 학업에도 더 집중했다. 일기 쓴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둘째에게는 언니와 차별했다는 상처를 줄까 봐 육아 일기장을 꼭꼭 숨겼었다. 잘 성장한 두 딸 모두 고맙지만, 둘째가 더 기특한 것이 그때 내가 보인 차이 때문이다.
결혼을 앞둔 딸에게 육아 일기장을 건네려 한다. 손주의 두뇌 계발과 집중력 배양에 최선을 다하는 엄마가 되기를 기대하면서….
스도쿠 속의 세상
김향연
규칙은 오로지 하나이다. 81칸으로 나누어진 정사각형에 1에서 9까지의 숫자를 넣는데 가로와 세로줄에 같은 것을 넣지 않아야 한다. 먼저 제시된 것도 몇 개 있으나 나머지를 찾아 넣노라면 재미도 있고 사념도 없어진다. 일간지 신문에서 스도쿠를 처음 풀 땐 틀리지 않고 정확히 칸을 채우기에 급급했다. 첫째 줄을 모두 맞추니 전혀 관계없는 곳에 똑같은 것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다시 처음부터 맞추기 시작해야 한다. 반복되는 숨바꼭질에 오기도 생긴다.
하루 2개 정도 스도쿠의 정답을 채우니 만만해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감이 생겼다. 더 어려운 것을 하고 싶다. 더 복잡하고 많은 문항이 필요했다. 엡에 찾아보니 81칸 문형만 아니라 256칸이 있고, 평면형 외 입체형도 있다. 늘 해 왔던 81칸에도 쉬움, 보통, 어려움, 전문가급 등으로 나누어져 있다. 낯선 것들이다.
막막하다. 풀어지지 않는다. 숫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81칸으로 많은 연습을 해왔으니까 256칸도 쉽게 풀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니었다. 착각이 나를 괴롭힌다.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한다. 머리 아프게 꼭 풀 필요가 있을까? 스스로 위로한다. 정답을 찾지 못한 미련에 집착하는 내게 실망하는 중이다. 한 번만 더 풀어보자며 정리하는 사이 어디가 잘 못 되었는지 보이기 시작한다. 빈칸을 메워지니 기분이 좋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스스로 다독인다. 힘들 땐 잠깐의 휴식이 필요함을 깨우친다. 충전의 시간은 오래지 않다. 잠깐만 다르게 생각해도 새로운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81칸을 모두 빈 사각형을 그렸다. 그곳에 9개의 숫자를 무작위로 채웠다. 임의로 정한 것 외 나머지 칸에 들어가야 할 글자를 맞췄다. 의외로 재미있고 쉽고도 어려웠다. 풀이를 마쳤다. 특이한 것은 첫 번째 칸의 숫자를 정하면 다음 칸에는 그것에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다. 첫 줄이 완성되지 않으면 다음 줄을 풀 수 없었다. 신기했다. 내가 만든 멋진 스도쿠다.
기성 스도쿠에 내가 만든 것을 포개 본다. 같은 숫자가 있는 칸도 있으나 대부분 다른 숫자가 겹쳐진다. 기성의 것은 숫자가 서로의 위치에 영향을 주며 처음 것이 마지막까지 영향을 준다. 각자의 위치에서 전체의 위치를 결정하고 있다. 한칸 한칸의 숫자가 상호보완하고 있다. 반면 내가 만든 것은 한 칸씩 한 줄씩 맞추어 가는 정도지 멀리 있는 칸에는 별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 채운 숫자가 상호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않다.
스도쿠의 빈칸을 채우며 인생을 생각한다. 삶이란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이다. 나도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으며 살고 있다. 빈칸의 숫자가 다른 빈칸에 영향을 주는 것처럼 내 삶의 자리는 늘 함께하는 사람들에 의해 정해진다. 스도쿠에서 겹치는 글자를 줄여 가며 빈칸을 메우는 것처럼 내 삶도 이렇게 저렇게 그렇게 내 자리를 찾아간다. 중년이 되면서 치매란 질병이 나를 불안하게 한다. 좋은 기억과 생각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삶은 상상하기 싫다. 두렵다. 정상적인 사고 능력을 지키기 위해서 무엇인가 노력해야 한다. 그것을 예방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스도쿠 놀이다. 처음은 심심풀이와 재미로 시작했지만 함께하는 삶과 치매 질병 예방까지 도움이 되고 있다.
‘人’(사람인)이란 글자는 혼자서는 절대 설 수 없고 서로 의지하고 지탱해야 하는 글자라 한다. 깊은 뜻을 숨긴 한자다. 나도 독불장군처럼 멋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이웃하고 있는 모든 사람과 관계를 속에 있다. 스도쿠 놀이의 가르침이다. 오늘도 ‘數獨(수독)’이라는 스도쿠를 만난다.
카멜레온의 여행
김향연
카멜레온은 태어날 때 대부분이 푸른색을 띤 연한 초록색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주위의 색채에 의하여 피부색을 바꾸며 생존하는 동물이다.
나는 카멜레온이다. 태어날 때의 색은 알 수 없다. 무채색의 흰색을 가졌을 것이다. 노랑의 따뜻함과 초록색의 온화함과 몽실몽실 피어나는 붉은색이 주위에 있다. 나는 마음껏 그 색을 취할 수 있었다. 나에게 절대로 해를 끼치지 않는 엄마의 색이다.
여행을 시작하였다. 나와 닮은 색들을 찾아간다.
‘쾅’하고 문이 닫히면서 화산이 폭발하듯 분노한 빨간색이 내 앞에 성큼 다가온다. 씩씩대며 다가온 아들놈이다. 친구와 말다툼을 하여 화가 났단다. 나도 얼른 붉은색으로 변한다. 색도의 차이를 두는 것도 잊지 않는다. 파란색을 먼저 보여주었다면 그 녀석의 색은 검붉게 변할 것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흰색을 조금씩 섞어간다. 내가 처음 본 맑고 밝은 붉은색이 될 때까지.
방문을 열었다. 푸르죽죽한 색을 띠고 이불 속에 누워 있는 한 아이가 있다. 친구와의 헤어짐으로 세상이 검다고 생각하는 예쁜 딸이다. 안으로 첫발을 디디며 노랗고 파릇한 색을 가지고 가볍게 다가간다. 엄마라는 자격으로 친구라는 이름을 빌려 딸의 말을 들어 주니 어느새 나의 노란색이 아이에게 스며들어 녹색으로 변하고 있다. 잠시 후 다시 노란색이 되겠지.
어디선가 쿵쾅거리는 노랫소리가 들린다. 이곳은 무지개의 색이 함께 어울려 있다. 춤을 추는 것을 좋아하는 막내는 가끔 자신의 색을 이렇게 보여준다. 그중 하나의 색이 나의 시선을 끌고 있다. 검은색이다. 테니스를 배우지 못하게 한 반발의 색이다. 못 본 척 모르는 척 뒤돌아 온다. 초록색이 된 녀석이 뒤에서 나를 안는다.
나의 엄마도 카멜레온이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나의 색깔에 언제나 알맞은 색으로 변화되어 나를 감싸고 있다. 정작 당신은 빨간색으로 변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감추고서 세상 아름다운 색을 보여준다. 나를 아름다운 색으로 변하게 도와준다. 내가 받은 예쁜 색들을 그대로 자식들에게 모두 보여주고 싶다. 빨강인 아들과 노랑 초록인 딸들에게 예쁘게 색깔을 내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싶다.
나의 방에 들어섰다. 깜깜하다. 나도 검은색이 되었다. 본래 나의 색이 궁금하다. 흰색이 너무나 많은 색을 흡수해서 검은색이 되었을까? 아니면 근본적으로 검은색이어서 모든 색을 만들 수 있을까? 궁극의 색은 같다. 흰색이 다른 색을 흡수하든 검은색이 다른 색을 뱉어내든 옆에 있는 색들과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색이 되고자 한다.
오늘도 카멜레온은 세상을 여행하며 모험을 한다.
사과의 교훈
마예란
사과는 정겨운 과일이다. 늘 가까이에 있지만, 항상 새로움으로 다가온다. 딸기나 수박, 복숭아, 포도 같은 것도 좋지만 이것을 당할 것이 없다. 과일을 먹자면 딸기는 봄에, 수박과 복숭아는 여름에, 포도는 가을이 되어야 부담 없이 살 수 있다. 반면 사과는 사철 어느 때나 사 먹을 수 있다. 종류도 많고 저장성이 좋기 때문이다. 나들이 갈 때 챙기기도 쉽다. 딸기나 포도, 바나나는 포장을 잘해야 하나 사과는 그렇지 않다. 순박한 시골 아이 대하듯 손쉽게 가져갈 수 있다.
나는 사과를 좋아한다. 밥은 굶어도 사과는 먹어야 한다. 어릴 때부터 사과를 좋아해 오빠에게 넌 과수원집으로 시집가라는 놀림을 받았다. 사과를 빼놓고는 과일을 이야기할 수 없다. 내게 사과는 과일의 대명사다. 크기가 적당하고 가족이 둘러앉아 조각내어 먹기가 좋다. 새콤달콤한 맛에 사각사각 식감이 좋고 물기가 많다. 또 다른 과일에 비해 저장성이 좋아 일 년 내내 즐겨 먹을 수 있다.
사과는 사계절의 색상을 가진 소우주다. 아오리는 싱그러운 연두색은 봄이다. 새콤한 맛이 보기만 해도 더운 여름 입맛을 돋운다. 홍옥의 매혹적인 빨간색은 여름이다. 아리수와 홍로의 선홍색과 진빨강은 가을이다. 선홍색은 사과를 가꾼 농부의 땀방울이고, 진빨강은 태양의 정열이 담긴 가을 단풍이다. 부사의 불그스레한 색깔은 겨울이다. 선명하지 않은 색깔이 사과나무의 고달픈 세월의 무게를 안고 있는 듯하다.
사과는 자주 정물화 소재가 된다.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 속에서 아름다운 색상을 유지하며 품위를 잃지 않는다. 유명한 박물관의 소장 작품에도 큰 저택의 거실에도 자리를 잡고 있다. 우리 집 아이 공부방에도 도화지에 그린 사과 그림이 있다. 이것은 그림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예쁜 바구니나 접시에 담아 거실 장식장에 놓기도 한다. 나는 홍옥을 사 와 먹다가 신맛을 감당하기 어려우면 미련 없이 싹싹 닦아 접시에 담아 장식장에 놓아둔다. 향을 맡으며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사과는 세상을 원만하게 살게 한다. 사과는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빈다는 ‘사과(謝過)’와 동의어다. 늘 겸손을 생각하게 한다. 노르스름한 육질을 리듬감 있게 베어 먹을 때 향기가 마음을 정화한다. 동그랗게 잘 익은 사과를 보면서 모난 세상 둥글둥글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가족이나 직장 동료나 이웃까지도 둥글게 대할 작정이다. 둥글게 사는 것이 원만한 삶이 아닌가.
사과는 내 삶의 동반자다. 집에 손님이 와도 함께 자리하고 아이들과 소풍 갈 때도 챙겨간다. 목이 말라 갈증을 느낄 때도 쉽게 해결해 준다. 소중한 사람과 만남이든 소박한 분과 한 자리이든 늘 함께한다. 언제 어디서나 겸손하고 둥글게 살라 한다. 사과 덕분에 더 착하게 사는 것 같다. 고맙다 사과야!
무릎의 충고
마예란
현관에서 갈등한다. 앞코가 뾰족한 굽 있는 높은 구두를 신을까? 발가락이 편한 통굽 구두를 신을까? 허리를 드러내는 원피스나 정장을 입은 날이면 언제나 망설인다.
119에 신세를 진 적이 있다. 오 년 전, 초록이 무성하고 나들이 가기 좋은 날. 겨울 이불을 정리하면서 솜을 앞축 팩에 겨우 밀어 넣고 일어서는데 이게 웬일인가? 뾰족한 무엇이 무릎을 찌르는 것 같았다. 앉지도 서지도 못한 자세로 들것에 실려 갔다.
십오 년 전 학생들과 현장학습 가서 무릎을 다쳤다. 인대만 늘어난 줄 알고 반깁스하고 근무했다. 내가 아니면 우리 반 아이들이 잘 못 되기라도 할까 봐. 출근 안 하면 업무가 마비될 줄 알았다. 학교 화장실에 양변기가 없던 시절이다. 화장실 가는 게 큰 어려움이었다. 밥도 물도 조금씩 먹었다. 반깁스 상태에서 볼일 보다가 넘어지기도 했다. 미련하게 십오 년을 버티다 제대로 탈이 났다.
긍정적인 성격도 한몫했다. 많이 걷거나 오래 서서 근무한 날은 무릎이 아파 잠을 설쳤다. 남편은 정밀검사를 강요했지만 다친 무릎이라 그렇다고 우겼다. 당시에는 정밀검사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검사비를 걱정했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지금 생각하면 학생 인솔로 다친 것이라 공상 처리하고 병원에서 충분히 진료받을 일이다. 아플 때마다 학교 근처 한의원을 옮겨가며 진료를 받았다. 정형외과도 몇 곳이나 찾아다녔다. 그때마다 통증이 사라지기에 그럭저럭 견뎌왔다.
정밀검사를 했다. "인대가 늘어난 게 아니고 십자인대가 끊어졌던 겁니다." 하는 의사의 말에 돌로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다. 끊어진 십자인대를 그대로 두면 주변 연골까지 손상된다. 인대 재건 수술을 받고 연골을 치료해야 한다. 수술이 잘되어도 기능이 정상인의 20%라 말했다. 맥이 확 풀렸다.
수술 날짜가 정해지니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전과 다르게 샤워기의 물줄기가 반짝거리고 예뻤다. 적당한 수압의 따뜻한 물이 살에 닿으니 행복했다. 주위 사람들의 반듯하게 걸어가는 모습, 배드민턴 치는 모습, 자전거로 달리는 모습이 부러웠다.
수술을 받았다. 건물 계단의 경사로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휠체어를 타고 가는 사람, 목발 짚은 사람, 허리를 굽혀 겨우 걷는 사람, 부추김을 받아야 이동하는 사람이 눈에 많이 띈다. 목발 신세를 지고 회전문 앞에 설 때마다 긴장되었다. 마치 어릴 때 긴 줄넘기 놀이를 하면서 돌아가는 줄 속에 뛰어들 때처럼.
퇴원하던 날 "어떤 운동도 하지 마세요"라는 의사의 말에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의사의 말은 참고로만 할 거야', 지금까지 선생님의 지시, 의사의 처방, 상사의 말을 거역해 본 기억이 별로 없다. 이번만은 오기가 생긴다. 헬스장에서 하체 근력운동을 시작했다. 재미없는 헬스를 3년이나 한 결과 낮은 산 산책, 가벼운 자전거를 타는 정도는 가능하다.
범어 산을 오를 수 있는 날이 왔다. 오솔길 나무들의 싱그러운 표정과 풀꽃들의 풋풋한 미소가 나를 들뜨게 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향기와 빛깔, 바람 소리가 주변에 머물고 있었구나. 세상을 다 얻은 기쁨이다. 참 행복했다.
망설이다가 원피스에 어울리는 굽 있는 뾰족구두를 신고 출근했다. 제대로 갖춰 입었기에 낮 동안 기분이 좋았다. '이젠 괜찮겠지' 예상이 빗나갔다. 무릎이 말한다. "나를 방치해 십 년 이상 힘들게 하더니, 이젠 굽 있는 신발로 나를 괴롭히네요. 내가 버티지 못하면 걷지도 못할 걸요, 여기서 멈추세요" 구두를 쳐다보고 무릎을 만져본다. 허탈하다.
우리 집 개 박득구
성정분
득구는 20년 전에 남편 친구에게 선물 받은 닥스훈트다. 딸 소영이가 6학년 때, 강아지 한 마리만 사 달라 졸라서 데려온 녀석이다. 득구 아빠가 미국 ‘도그(dog)경연대회’의 챔피언이라 했다. 자라서 챔피언이 되라고 당시 권투선수 김득구 이름을 따서 득구라 하고, 남편의 성씨를 붙여 박득구라 부르기도 했다.
이놈이 얼마나 힘이 센지 모른다. 고집도 여간 아니고 말도 안 듣고 뭐든지 제 마음대로 하려 든다. 목소리는 앙칼진 소프라노로 한 번 짖으면 귀가 따갑다. 몸은 검은색으로 연고동색 포인트가 참 예쁘다. 화가가 그린다 해도 표현을 못 할 정도로 배합이 절묘하다. 데리고 산책하면 동네 사람에게 인기다. 다리가 짧아 걸을 때 거시기가 땅에 닿곤 했다. 서 있는지 누웠는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키가 작아 보는 이마다 배를 잡고 웃는다.
득구는 종일 혼자 집에 있다. 처음에는 떼쓰는 아이처럼 애를 먹이더니 차츰 잘 적응했다. 그게 고맙고 기특해 식구들이 저녁에 집에 오면 함께 슈퍼도 가고, 차에 태워 멀리 바람도 쐬어 줬다. 그러나 오줌을 마구 싸는 버릇이 있어 집안 곳곳에 실례한다. 그래도 밉지가 않았다.
키운 세월만큼 정이 들어 지금은 득구가 무슨 생각하는지도 알 것 같다. 가끔은 내가 업고 다닌 적도 있다. 밖에 볼일로 나갔다가 혼자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득구 때문에 마음이 급해지기도 한다. 무엇이든 잘 먹고 혼자서도 잘 놀 때는 개가 아니라 식구같이 느껴진다.
득구가 제일 좋아하는 먹거리는 황태 삶은 살과 물이다. 주방에서 황태를 끓이기라도 하면 가스레인지 앞에서 풀쩍풀쩍 널뛰기하며 좋아한다. 일 년에 황태 5·60마리는 먹는다. 거기에 여름엔 수박, 가을엔 단감을 간식으로 즐겨 먹는다. 그래서 득구는 행복한 견생(犬生)을 보낸다.
보통 닥스훈트 평균수명이 10년이라 한다. 득구는 올 8월에 스무 살이 되었다. 워낙 노견(老犬)이다 보니 지금은 온갖 병을 앓는다. 한번은 피부병이 심해 이런저런 연고를 발라 줬지만, 효과가 없어 내가 바르는 연고를 발라줬더니 다행히 나았다. 상처가 아문 자리에 털이 자라지 않아 보기에 흉해 늘 옷을 입혀 놓는다.
작년부터 눈에 띄게 기력이 약해졌다. 그 모습이 안쓰럽게 보이더니 올해 봄부터 치매 증상까지 보인다. 주인인 나도 몰라볼 때가 있다. 곧잘 찾아 먹던 물도 챙겨주지 않으면 어디 있는지 모른다. 누워있다가 스스로 일어서지도 못한다. 몸이 몹시 말라 어디 부딪히기라도 할까 걱정되어 온 사방 벽에 스펀지를 두르고 바닥엔 두툼한 비닐 장판을 깔아 주었다. 걸음도 겨우겨우 서너 걸음 걷는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식빵 조각을 던져 주면 덥석 받아먹었는데 이젠 그것도 제대로 못 한다. 계란프라이나 발효 요구르트, 명태 삶은 물 정도가 득구의 요즈음 일상 식사다. 목숨을 연명하는 정도만 요기하는 셈이다.
종일 잠만 자는 득구를 보면 안타깝고 안쓰러워 가슴이 미어진다. 인생살이도 늙어지면 다를 바가 무엇인가 싶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늙음은 어떻게 피할 수 없다. 10. 너무 보기가 딱해 안락사를 생각해보기도 했다. 식구들이 모두 죽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서 돌봐 주어야 한다고 반대했다. 정이 깊이 들었구나 싶어 마음이 쓰리다. 행여 득구가 내 곁을 떠나도 후회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함께 보내고 있다.
여름이면 에어컨을 켜주고 겨울엔 전기요를 깔아 주며 온 식구의 정성과 사랑을 쏟았는데 요즘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다. 가족 중 한 명이 옆에서 꼭 지켜봐 줘야 한다. 얼마 전에는 청도 고향 선산을 찾아 득구가 사후에 누울 자리를 둘러보고 미리 터도 닦아 놓았다. 이번 겨울에 떠나면 땅이 얼어 파기도 힘들겠지, 차라리 더 추워지기 전에 자는 자리에 편안하게 갔으면 좋겠다고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득구가 없는 삶을 생각해 본다. 몸은 조금 더 편해질지 모르지만, 마음의 허전함은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다. 누구보다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개다. 득구는 받은 사랑을 온전하게 표현할 줄도 알았다. 그이가 집에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그때까지 밥을 안 먹었다. 남편이 귀가해야 허겁지겁 밥을 먹곤 했다. 20년을 저녁마다 그이와 산책했다. 남편의 책상 아래에서 그이의 발을 베개 삼아 잠들곤 했다. 자식처럼 애지중지 애틋하게 함께한 가족이다. 득구는 아무것도 못 하고 죽을 때만 기다린다. 개가 누워있는 모습만 봐도 눈물이 핑 돈다. 득구가 떠나면 얼마나 서운하고 섭섭할까. 벌써 눈물 바람이다. 득구가 있어 삶이 아름다웠다. 득구야, 고맙다. (11.4)
나의 귀걸이
성정분
귀걸이를 한 지는 20년이 된 것 같다. 어느 저녁에 동네 미장원에 갔는데 시장의 아는 아지매를 만났다. 그가 미용실 원장에게 귀 좀 뚫어 달라는 걸 보고 속으로 뜨끔했다. 아이고, 귀 뚫으면 아파서 어떡하나 싶었다.
한의사였던 시아버지가 살집이 많은 나를 보고 풍이라도 오면 큰일 난다며 귀를 뚫어 보라 했었다. 생각만 해도 너무 아플 것 같아 차일피일 미루어 왔었다. 아지매가 겁도 없이 귀를 뚫는 모습을 보고 얼떨결에 나도 그만 귀를 뚫었다.
우리 집도 가족력이 있다. 친정아버지가 풍으로 고생했었다. 언니 역시 중풍으로 많은 고생을 겪었다. 지금처럼 혈압약이라도 있었다면 그렇게 애먹지 않았을 텐데 뒤늦은 후회에 마음이 쓰라리다. 그래서 나는 풍이란 병이 더 겁이 나고 무섭다. 피붙이들의 몸 고생 마음고생을 가까이서 지켜본 탓이리라.
귀를 뚫고 귀걸이를 하고 다니니 어색하고 부끄러웠다. 그래서 귀걸이를 하다가 안 하다가 반복하니 겨우 뚫어놓은 구멍이 다시 막히는 것 같았다. 두 번 경험해보기는 싫어서 억지로라도 하고 다니지만, 사실은 달기 싫을 때가 더 많다. 귀걸이를 여기저기 던져 놓았다가 몇 개나 잃어버리기도 했다. 요즘은 정신이 예전 같지 않아서 매일 귀걸이를 달고 있다. 중풍 예방에 효과가 있다니 계속하는 셈이다. 의학적으로 근거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나는 효과가 있다고 믿고 싶다. 귀걸이를 항상 하고 있어서 그런지 내 혈압이 언제나 정상수치이다. 참 다행한 일이다.
열심히 운동도 한다. 무엇보다 걷기가 최고란다. 휴대폰에 만보기 앱을 설치하고 매일 만 보씩 걷는다.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막상 아파보면 알 수 있다. 건강 걱정 안 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 이 소박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 간단한 걷기 운동부터 함께 해야겠다. 나 혼자 건강하게 백수를 누린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만족하면서 더불어 잘 살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 나는 귀를 뚫고 귀걸이를 열심히 달고 다닌다.
당신의 감정은 안녕하십니까
손 근 호
집 현관문을 여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아내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따라서 내 기분도 별로다. 인간의 감정은 일상의 사소한 일에도 끊임없이 변한다.
몇 달 전 인사이동 때다. 나를 위하여 애를 많이 쓴 사람이 있었다. 다른 사람의 인사를 위해 담당자를 찾기는 참 어렵다. 그는 인사과에 부탁하고, 내게 ‘이렇게 해야 한다.’ 하면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고마웠다. 용기를 내어 처음으로 인사 상담을 하고 신청했다.
인사가 났다. 결과가 내가 원하는 것과 멀었다. ‘이것이 뭐지’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다. 나의 인사에 조언을 준 사람의 진정성이 의심스러웠다. 본인과 같은 부서에 있는 직원의 승진을 위해, 내가 부담스러웠던 것이 아닐까? 그에게 나쁜 생각까지 들었다.
감정이란 무엇일까?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이나 현상, 사물에 대하여 느끼어 나타나는 심정이나 기분’이다. 슬픔·기쁨·좋음·싫음 따위 마음이나 심리 상태다. 표출하는 방법은 달라도 감정이 없는 사람은 없다.
어느 유명한 스님은 마음속에 나쁜 감정이 일어날 때 조용히 그것을 지켜보기만 해도 사라진다고 한다. 부모들은 사춘기 아이가 방황할 때 어르고 달래면서 거기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심리전문가도 나쁜 감정은 조용히 기다리면 차츰 평정심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내 인사에 대한 들뜬 마음도 조용히 지내다 보면 사라지지 않을까?
오늘은 아이들이 아내의 말을 듣지 않아 목소리가 높아졌다. 감정이 태풍으로 가기 전에 잘 다독여 산들바람으로 만들었다. 지금 나의 감정날씨는 구름 낀 뒤 화창이다.
다시 잡은 손
손 근 호
오늘도 나는 설렘과 불안함을 안고 너를 만나러 간다. 맑음, 흐림, 우중충 등 다양한 표정 중에 어떤 것일까? 어! 맑음이다. 어제는 약간 우중충했는데, 하루하루가 너로 인해 새로운 날이다. 열일곱 번의 만남과 세 번의 어긋남, 잠깐의 이별과 재회.
너와의 첫 만남은 우여곡절이었지. 처음 만나기 전 몇 날 며칠을 먼발치에서 지켜보았지. 너의 표정은 다양했다. 활짝 웃어다가 울고 짜증을 내고···. 저 멀리서 너를 보고 만나고 싶었는데 방법을 찾지 못해 애를 태웠지. 그때 우연히 너를 잘 아는 사람을 알게 되어 얼마는 기뻤는지. 너는 모를 거야. 속으로 BTS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좋아했다. 그 사람을 통해 너와 만날 장소와 시간을 알았을 때 또 그 춤과 노래가 나오더라. 드디어 만났다. 너는 의외로 조용했지. 먼발치에서 본 너의 모습과 달라 당황했었다.
너는 쉽게 곁을 주지 않아 제안했지. 스무 번 만남 후에 계속 만날 것인지 결정하자고. 나는 도도하다고 생각했어. 얼마나 잘 났는지 두고 보자는 심정으로 너의 제안을 받아들었지. 계약한 만남이 시작되었다.
두 번째 만남에 설레는 마음을 안고 약속 장소로 조금 일찍 갔지. 너는 아직 오지 않았어.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만질 때 활짝 웃는 얼굴로 들어왔어.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했지. 날씨, 영화, 연예인, 서로의 관심사 등을 이야기하면서 서로의 다양한 표정을 봤지. 나는 우리가 어느 정도 맞는다고 생각했어. 몇 번의 어긋남도 있었지만, 만남은 계속되었어.
어느 순간 왠지 낯설고, 다른 사람 같고, 너에 대하여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았지. 너와의 만남에 대해 고민이 되었어. 잘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왜 이럴까. 시시콜콜한 신변잡기만 이야기하다가 너는 내게 심각하고 진지하게 이야기할 때가 있었지. 나는 도통 무슨 이야기인지 머리가 아팠어. 아마도 그때부터인 것 같아.
처음에는 별문제 아니라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네가 버겁고, 어려워졌어. 이것을 이겨 내기 위해 여러 사람과 영화 보기, 게임 하기, 여행 가기 등 많은 것을 시도했지. 또 네 이야기를 내가 이해 못 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어. 처음으로 책을 샀어. 이해가 안 되고, 어렵고, 잠만 왔어. 이런 나를 한심하다고 생각하겠지. 그래도 끝까지 읽었어. 너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
이런 나를 너도 눈치를 챘지. 사람들과 어울릴 때 평소보다 지나치게 행동하면서 분위기를 맞추었지. 대화할 때도 어려운 부분은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하려고 했어.
큰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관계가 많이 개선되지 않은 채 마지막 날이 다가왔지. 나는 이런 만남이 불편하다고 잠시 헤어지자고 했어. 너는 계약 조건이 스무 번 만남이니, 마지막 날이 아니고 3일이 남았다고 했지. 그렇지만 서로를 위하여 잠시 헤어지기로 했지. 잠시가 될지 영원이 될지 모르겠지만.
헤어지고 난 뒤, 너를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했어. 잠시와 영원 사이에서. 내가 원해서 만남을 시작했지, 영원히 헤어지기는 아쉬웠어. 그래서 너에 대해 조금 더 아는 시간을 가지면서 다시 만날 준비를 했었지. 책도 읽고, 독서 모임도 가고, 네가 관심 있어 하는 분야를 좀 더 알려고 노력했지.
독서 모임 가는 길에 우연히 먼발치에서 너를 다시 보았지. 너의 표정은 여전히 다양하더라. 아는 체를 할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지. 뒤돌아 가려 할 때 네가 내 앞에 나타났지. 그렇게 우리는 다시 만났지. 처음에는 서로서로 서먹했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색함이 사라졌어. 우린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지. 어렵게 다시 잡은 손, 놓지 않을게 수필아. 오늘은 어느 날보다 하늘이 화창하다. 나는 너를 만나 지금도 관찰, 고찰, 통찰, 성찰하는 중이다. 고맙다.
자두 향기
오경희
휴대용전화기가 어둠 속에서 몸을 바르르 떨며 운다. 이른 새벽 전화벨 소린 반갑기보다 걱정이 앞선다. 연로하신 어머님이 시골에 홀로 계신다. 우리 부부는 서로 의문의 눈빛을 교환하며 멈칫거린다. 남편이 전화를 받더니 허겁지겁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간다. 10분쯤 지나 얼굴이 보름달이 되어 들어온다. 빨갛게 영근 자두를 가득 안고서….
보는 것만으로도 입안에 침이 고인다. 오늘은 행운의 날인가보다. 꼭두새벽부터 좋아하는 자두 한 상자나 선물 받았다. 빨간 자두 하나를 골라 입에 넣는다. 새콤달콤함이 몸을 깨운다. 나무에 달린 채 완숙된 것이라 맛과 향이 기가 막힌다. 누구와 나눠 먹을까? 다정한 얼굴 하나하나 떠올리느라 마음이 바쁘다.
비닐봉지 한 움큼 들고 자두 상자 앞에 앉았다. 고향의 향기가 난다. 고향 언덕 자두나무 아래다.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몽실몽실 피어오른다. 설익은 자두를 올려다보며 침을 꼴깍꼴깍 삼키는 여자아이가 서 있다. 새콤한 과일을 좋아했지만, 그때 시골에서는 돈을 주고 간식이나 과일을 사 먹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찍 수업이 끝난 날, 자두나무 아래서 하염없이 탐스러운 자두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살포시 눈을 감으니 향기는 더욱 진하게 다가온다. 자두를 집어 봉지에 담으려고 보니 터지고 짓눌려 오래 두고 먹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나눠 먹을 수도 없는 심각한 상태다. 이런 상황을 초래한 이는 초보 농사꾼이다. 출하할 시기를 놓쳐버려 상품 가치는 없지만, 맛은 둘이 먹다 한 명이 쓰러져도 모를 지경이니, 이웃에 선심이라도 써야겠다는 마음으로 따온 것인데 아래로 내려갈수록 더 엉망진창이다. 자기네 끼리 부딪히고 누르면서 하룻밤을 더운 자동차 속에 갇혀 있었으니, 꼴이 말이 아니다.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눈앞이 깜깜하다. 버리자니 아깝고 씨앗 때문에 음식물 쓰레기도 아니고 쓰레기봉투에 넣어 버리기도 애매하다. 무엇보다 일 년 동안 애쓴 농사꾼의 노고를 생각하니 양심이 허락지 않는다.
반갑고 고마워 오두방정을 떤 조금 전 상황이 오래전 일인 듯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그렇다.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크든 작든 사건은 계속해서 발생하고 그것은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 끝없이 변화하는 흐름에 적응하다가 때로는 너무 막막해 목 놓아 울지 못할 기막힌 일도 생긴다. 별것 아닌 것에 마음이 휘둘려 좋았다 나빴다 반복하며 천국과 지옥을 넘나들기도 한다.
숨 쉴 수 있는 것은 살아있기 때문이고 살아서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리운 이를 그리워할 수 있음은 축복이다. 죽고 사는 일 아니면 큰일이란 없다. 마음을 비워야 진실이 보이는 법, 욕심이나 허상이 앞을 가리면 진실은 그늘 속에 숨겨져 보이지 않는다.’ 자두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내게 이른다. ‘잘 생각해봐, 깊이 생각해봐야지’ 한다. 순간 ‘번쩍’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에 벌에 쏘인 듯, 발딱 일어섰다.
쨈을 만들어야겠다. 침울하던 집안에는 다시 활기가 넘치고 좋은 기류가 흐른다. 한쪽으로 밀어 버렸던 봉지를 잽싸게 집어 들고 자두를 분류했다. 터지고 짓무른 형편없는 것들은 흐르는 물로 씻어 솥에 넣고 불을 켰다. 나머지 자두는 쨈 만들기 성공하면 나눠줄 얼굴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냉장고에 보관했다. 잠시 여유로움에 기대어 향긋한 커피 한 모금을 삼키는데 솥뚜껑이 들썩들썩하며 빨간 국물을 하염없이 토해낸다, 놀라 뚜껑을 열었지만 넘쳐나는 선홍빛은 교통사고 현장을 떠올리게끔 했다,
솥 바깥으로 흐르는 국물은 보니 농부의 눈물을 보는 듯 가슴이 아리다. 자식처럼 가꾼 자두를 돈도 받지 못하고 이곳저곳으로 배달한 그를 떠올리며 빨간 눈물 자국을 쓱쓱 문질렸다. 올해는 과일값이 유난히 싸다. 수입 과일은 곳곳에 넘쳐나고 인건비는 고공행진이다. 비료, 박스, 자제 값은 해마다 올라가고, 농산물 가격은 내려가니 농민들 한숨 소리 끓이질 않는다. 어쩌면 어젯밤 농부는 고단한 삶을 막걸리 한잔으로 달래다가 전화할 시간을 놓쳐 새벽에 한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날수록 달콤함은 집 안 구석구석에 스며든다. 보글보글 짜글짜글 졸여지며 새콤달콤한 쨈이 완성되어가는 모습을 귀히 지켜보며 불 앞에 서 있으려니 땀범벅이 되었다. 뜨거운 국물을 연신 혀끝으로 맛을 보며 대단한 일이라도 하는 양어깨가 으쓱하다. 쨈을 나눠줄 얼굴을 머릿속으로 헤아리며 유리병을 사려 나섰다. 조금 전 비가 내려 거리는 검은 융단을 깐 듯 발을 옮길 때마다 폭삭거려 마음도 산뜻하다. 이 얼굴 저 얼굴을 떠올리며 크고 작은 유리병을 고르다 보니 담아보지 않았지만 쨈이 모자란다. 종종걸음으로 돌아와 얼른 자두를 꺼내 씻으며 반가워할 표정 하나하나를 그리니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상황에 따라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내 마음에 피식 웃어주고, ‘자두 한 봉지로 쨈을 만들면 세 명은 충분히 나눠줄 텐데, 그게 뭐 대수냐’ 병을 헹굴 때마다, 미소 띤 얼굴이 하나씩 나타나, 활짝 웃고 가고 맛있는 향기는 꽃구름처럼 피어올라 행복감에 흠씬 젖는다.
그렇다. 별것 아닌 것이 특별함으로 바꿨다. 행복은 늘 가까이에서 나에게 손짓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오늘은 소소한 행복을 배우고 실천에 옮긴 특별한 날이다. 쓰레기가 될 뻔한 자두로 쨈을 만들며 ‘세상에는 쓸모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걸, 자두에게 배웠다.
오늘따라 새들이 유난히 휘파람 불며 재잘재잘 댄다. 그들도 나처럼 새로운 경험을 한 모양이다.
내리 사랑
오경희
구순을 넘은 할머니가 고추밭에 앉아 있다. 해 질 녘 젊은이도 열사병에 걸릴까 조심하는 한여름인데 걱정이 앞선다. 땀인지 눈물인지 분간할 수 없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야들은 어디까지 갔을까? 아무 탈 없이 가야 할 텐데’ 홀연히 왔다가 훌쩍 떠나버린 아이들 생각뿐이다. 감당할 수 없는 쓸쓸함을 잠재우려고 밭에 왔지만, 힘도 없고 고추를 따기도 싫다.
할머니 집 마당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임시 수영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물속에서 모양과 색깔이 다른 풍선 빼앗기 놀이에 서로 다투느라 왁자지껄했다. 그들 중에 나이가 가장 많은 아이의 이모가 그에게 눈짓한다. ‘그냥 줘 오빠잖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아래위로 끄떡이며 환하게 웃는다. “오빠가 양보한다 양보해” 하며 가진 풍선을 모두 휙 던진다. 이유도 모르는 어린아이 엄마가 “역시 오빠가 최고네 최고” 하며 엄지를 치켜세운다.
할미라고 하지만 뭐 하나 해준 것도 없는데 잘 자라준 것이 그저 대견할 뿐이다. 증손자·여의 재롱을 보며 이미 엄마가 되어버린 손녀의 어릴 적 모습을 떠올렸다.
“어화둥둥 내 사랑/ 금을 준들 너를 사랴 은을 준들 너를 사랴/ 어화둥둥 내 사랑“
오랜만에 들어보는 노랫가락이다. 40여 년 전 손녀딸에게 자장가로 불려주시던 그 노래를 다시 들으니 왠지 콧등이 시큰하다. 손녀딸 셋과 증손 다섯이 방학했다고 할머니 집에 여름휴가를 왔다. 3박 4일간 한 공간에서 먹고 지내며 병아리처럼 삐악거리고 팬티 대신 기저귀 차고 오리 엉덩이로 뒤뚱뒤뚱 걷다 넘어져 배꼽 잡고 웃게 만들더니 구름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가버렸다.
내년 방학 때 다시 온다고 철석같이 약속하고 손가락까지 걸었다. 하지만 내년에도 이 집에서 그들을 맞을지는 알 길이 없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지는 몸 상태를 짐작해 볼 때 장담할 일이 아니다. 생각하니 아쉬움이 곱절이나 된다. 고사리 같은 손을 흔들며 “왕 할머니 안녕히 계십시오” 그 목소리만 귓전에서 벌 나는 소리처럼 앵앵댄다, ‘지금껏 혼자서도 그럭저럭 잘 살았는데 내가 왜 이럴까, 이러다 돌아버리지나 않을까?’ 혼자라는 외로움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서글픈 마음 달랠 길이 없다. 하늘을 배회하던 까마귀가 위로라도 하고픈 양, 감나무 가지에 내려앉으며 눈치 없이 ‘까옥까옥’ 아는 체한다.
전화기가 울다 지쳐서 조용하더니 다시 울기 시작한다. “부재중” 11이라는 숫자가 낙인처럼 찍혀있다. 정이 많아서 눈물도 많은 할머니, 만나면 뛸 듯이 반가워하지만 헤어질 땐 언제나 눈물 바람인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손녀들이 번갈아 가며 전화를 한 것이다. 연락이 닿지 않자 급기야 내게 할머니의 안부를 확인해 달라 성화다. 혹시나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부랴부랴 도착하니 대청마루에 미동도 없이 누워있다. 숨은 쉬고 있나 의문이 들 만큼 초췌한 모습을 보며 울컥 서글픔이 밀려든다.
뜬금없는 아들과 며느리의 방문에 다시 생기가 돌고 눈빛도 살아났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표가 난다”로 시작한 어머님의 넋두리가 끼니때도 잊게 했다. 두서없는 입담에 서산의 걸린 해도 주춤거리며 우리를 지켜본다. 몇 번의 계절을 함께 할 수 있을까?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자, 서글픔이 밀려와 얼른 내 발등을 내려다본다.
내 안에는 나도 모르는 내가 숨어 산다. 어머니가 계셔서 좋기도 하지만 혹시나 거동이 불편해지면 자유로운 모든 것들이 달아날까 무척 겁이 난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준비해두었다. 하지만 도시의 편리함에 길들어진 나. 어머님 보필하며 불편함을 감내할 능력이 있을까, 어떤 때는 잘할 수 있을 것처럼 용기가 생겼다가, 남편이나 어머니가 내 마음 몰라주면 ‘엄마 젖 먹고 보살핌받은 자식들이 해야지 내가 뭣 하러’ 하며 속으로 토라진다.
맏며느리로 시집와 딸 셋 두 살 터울로 낳았다. 가족의 실망감은 태산 같았고 산후우울증에 힘들어할 때, 어머니는 “내가 아무리 서운해도 네 마음만 하겠냐. 네 잘못 아니다. 모든 것은 하늘의 뜻인 기라.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되는 것도 있다. 딸이 암만 많아도 호랑이가 와서 내놓으라 하면 누굴 줄 있겠나. 하나도 줄 수 없다.” 하시며 나를 위로하셨다. 그 자애로우심을 잊지 않으려 애쓰며 열심히 살았고, 덕분에 고부간의 신뢰도 두툼해졌다. 조모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나쁜 기억보다 좋은 추억이 훨씬 더 많다. 그것은 어머니의 편견 없는 내리사랑 덕분이다.
그 후 늦둥이로 손자를 봐서 세상을 다 가진 듯 좋아했지만, 그 이후로도 손녀 손자 큰 차별 없이 모두 사랑하시고 오히려 터를 잘 팔았다며 셋째 손녀를 무척 예뻐하셨다. 우리 집은 아들로 대를 잇는 옛 방식 대신 어머니가 실천하신 내리사랑을 대물림해야겠다.
매미의 노랫소리 잦아지고 가을이 살그머니 실눈을 뜨는 계절에 나는 두 눈 꼭 감고 두 손을 정성스레 가슴팍에 모은다. 내년에도 그다음 다음 해에도 어머님과 함께 있게 해달라고.
낙화(落花)
이미경
근무 마지막 날까지 유화는 센터에 나오지 않았다. 혹시나 올까 봐 가방에 매일 넣고 다닌 어린이용 세계사를 센터에 기증하고 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거리에 2월 바람이 뼈를 시리게 했다. 무력감이 밀려왔다. 지키지 못한 약속과 집에 갇혀 있을 유화의 하루하루를 생각하니 숨이 막혔다. 제인 그레이의 처형장에서 고개를 돌리고 망연자실하게 주저앉아있는 그림 속 여인처럼, 유화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안쓰러운 기분을 떨칠 수가 없다.
수업이 끝난 자유 시간에도 유화는 내 곁을 맴돌았다. “선생님 이 사람은 왜 눈을 가리고 있어요? 숨바꼭질하는 거예요?” 아이는 내가 보고 있는 명화집의 ‘제인 그레이의 처형’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림 속의 제인 그레이는 눈을 가린 채 자신의 목을 칠 단두대의 위치를 손으로 더듬고 있었다. “영국 여왕이었는데 왕이 된 지 9일 만에 쫓겨나 처형되는 장면이야.” “나쁜 왕이에요?” “나쁜 왕이 아니라 원치 않게 왕이 되었던 불쌍한 여왕이야.” “그런데 왜 죽여요?” 유화는 잘못도 없이 처형되는 어린 여왕을 보고 놀라는 것 같았다. “그때의 영국 역사는 아주 복잡한데……. 지금은 학교에서 배운 거 공부하고 겨울방학 때 자세히 가르쳐 줄게” 아동센터에 이듬해 2월까지 계약이 되어 가르쳐 줄 수 있다고 생각해 손가락을 걸었다. “꼭 가르쳐 주세요. 꼭!” 호기심 가득한 유화의 맑은 눈을 보며, 부모의 욕심으로 희생된 제인 그레이의 삶을 어떻게 이야기해 줄지 고민했다.
수년 전 서울시가 추진한 아동복지사업에 참여했다. 아동센터에서 방과 후 교사로 근무한 때 유화를 만났다. 아홉 살 유화 머리에는 군데군데 머릿니가 할퀸 핏자국이 있고, 서캐가 잔뜩 붙었다. 또래 아이들이 모여 놀 때 늘 무표정으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개인 면담기록장에는 1학년 성적이 평균 65점이고, 일용근로자인 부모님과 언니·오빠가 있는 평범한 가정이다. 부모님이 자녀가 많다 보니 셋째 유화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겠다 싶어 관심을 가졌다.
센터 아이 대부분이 공부에 흥미가 없다. 몇몇은 학습 의욕 상실로 수업 도중에 아예 바닥에 누워 버린다. 학습계획을 수정해, 그날 학교에서 배운 것을 다 복습하면 자유 시간을 줄 수 있다고 당근을 줬다. 숙제를 마친 아이들이 블루마블·체스 게임을 하며 놀았다. 공부방이 게임장이 되어 왁자지껄할 때 유화는 혼자 문제집을 풀었다. 한 단원이 끝나면 그다음 내용을 궁금해했고, 마치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가르쳐 준 것을 잘 소화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놀이에 빠진 것처럼 눈을 반짝인다. “잘했어! 유화야” 머리를 쓰다듬으니 무척 좋아했다.
기말고사를 치른 아이들은 대부분 70~80점대의 평균점수를 기록했다. 기대치와는 먼 점수였으나 센터장은 그전보다 훨씬 좋아진 성적이라며 치하했다. 민망하게 웃으며 인사를 받고 있을 때 유화가 상기된 얼굴로 들어왔다. 집에 들렀다가 오느라 늦었다며 평균 98점을 받았다고 했다. 부모님께 먼저 알리고 숨이 차게 뛰어왔다. “대단하다 유화야! 부모님께서 좋아하시지?” “아빠가 평생 센터에 다니랬어요!” 센터장은 기적이라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그가 품에 안기며 환하게 웃었다.
겨울방학이 되어 영국 역사를 가르쳐 주기로 약속한 날이다. 유화가 오지 않았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사흘 후 사회복지사가 가정방문하고 와서 고개를 저었다. “유화가 아무래도 센터에 못 나올 것 같아요” 그가 문전박대당하고 주변을 탐색해 겨우 알아낸 정보를 들려주었다. 유화 아빠가 엄마를 때려 병원에 가고 난리가 났었다며 자주 있는 일이라 했다. 폭행으로 엄마가 많이 다치고, 집안 사정이 외부에 알려지는 게 싫어 아이를 센터에 보내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가정폭력은 피해 본 당사자인 엄마가 신고할 의사가 없으면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유화 언니·오빠도 학교에 안 보낸다고 하던가요?” “언니·오빠는 지적장애가 있어 학교에는 출석만 하는 정도입니다” 한다. 그늘진 유화 생각에 내 마음도 가라앉았다.
퇴직 후에 한 달쯤 지났을 때 센터 운영위원 회의록에 사인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사무실로 가기 전, 공부방을 들여다보니 처음 보는 얼굴이 많았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이다. 사무실에서 사인하고 있을 때 3학년이 된 아이들이 들어와 반갑게 인사했다. 오늘부터 선생님께서 다시 나오는지 묻는 아이들 속에 유화는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이 공부방으로 가자, 사회복지사는 그만둔 아이들의 자리에 새로 인원을 충원했단다. 유화의 자리에도 다른 아이가 앉아 있었다.
빈자리가 무심히 채워지는 것에 헛헛함을 느끼며 돌아오는 길가에 만개한 벚나무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여상스럽다. 버스정류장으로 가는데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엄마와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에 성큼 다가가 “유화야!” 하고 불렀다. 아이 엄마가 마주쳤던 눈길을 외면하며, 불편해 보이는 다리로 걸음을 재촉한다. 유화는 두려움 가득한 눈에 몸을 웅크리고 엄마 뒤로 숨듯 따라간다. 그 자리에서 멀어지는 모녀의 뒷모습을 한참 봤다. 한 줄기 바람이 벚꽃을 뿌리며 내 몸을 스친다. 어지러이 떨어진 꽃잎을 밟으며 사람들이 지나간다. 자꾸만 흐려지는 눈에 정류장 가는 길이 현기증 나도록 멀었다.
그 후, 여러 해 벚꽃이 피고 졌다. 꽃 속에 유화의 얼굴이 떠오르고 스러졌다. 눈을 가린 처형장의 제인 그레이처럼, 두려움 가득한 그의 어린 모습이 기억 안에 박제되어 있다. (15.4)
피로 회복제
이미경
까무룩 잠들었다 깨어난 아침이다.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일으키니 거울이 있던 화장대 벽이 휑하다. 못이 헐거워져 떨어졌나 했으나 방바닥에도 보이지 않는다. 밤손님이라도 들어왔었나 싶어 모골이 송연해지고 잠이 확 달아난다. 거실에 거울과 드라이어가 널브러져 난장판이다. 기억의 파편이 해마에 박히며 지난밤이 떠오른다.
올해 초부터 빡빡한 일정에 시달린 몸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헤르페스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코밑을 점령하고 오종종하게 수포를 만든 그놈이 처음이 아니어서 방심한 나 자신을 탓했다. 빼앗긴 지분은 찾기가 힘들었다. 밥 먹을 때마다 상처가 벌어져 좀처럼 낫지 않는다. 연고를 발라도 제대로 아물지 않고 딱지가 떨어져 피가 났다. 코밑에 반창고를 붙이고 출근한 날이 열흘이 넘는다.
하이드로 콜로이드 반창고를 붙인 채 모임에 나갔다. 내 몰골을 본 O 여사는 쑥뜸이 수포 치료에는 최고라며 상세하게 치료법을 설명해 주었다. L 선생은 대상포진 예방주사를 권하며 면역력이 떨어졌을 때의 위험성을 이야기했다. 피로에 절어 사는 모습이 주변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있다. 자기관리 못하는 한심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건강 보조제를 먹어 보기로 했다. 아침에는 간 기능 보조제, 점심 후 비타민제, 저녁에 오메가3, 취침 전 철분제를 먹었다. 정성껏 먹은 덕인지 며칠 지나니 코밑이 깨끗해졌다.
저녁 늦게 들어온 둘째가 여행용 가방을 끌고 와 미술 재료를 챙겼다. 내일 서울 미술대회에 참가한다며 새벽 3시에 깨워달라고 한다. 시계는 어느덧 12시를 향하고 있다. “엄마가 요즘 너무 피곤해서 일어날 수 있을지 걱정이다.” 말하고 한숨을 쉬며 알람을 맞추고, 철분제를 삼켰다. 아들이 고3이 되면서 나도 덩달아 숨 돌릴 틈이 없다. 주말도 추가 수업에 보내느라 늦잠을 잘 수 없다. 학원비와 미술 재료비 등으로 통장 잔고가 인공호흡을 해야 할 지경이다. 내년엔 막내가 고3이 된다. 첫째도 복학해야 한다. 잠들었다 깨어나면 아이들이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고 있으면 좋겠다는 공상에 빠진 적도 있다.
거실 바닥에 널브러진 거울과 드라이어는 새벽에 집을 나서며 아들이 남긴 흔적이다. 엄마를 깨우지 않으려고 거울을 옮겨와 머리를 말렸을 것이다. 바이러스에 몸을 점령당하더니 정신마저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렸나 보다. 부산스러웠을 거실의 기척도 느끼지 못하고, 알람도 듣지 못한 채 잠들어 있었다.
수험생을 두고 천하태평이라는 언니의 힐난을 들어야 했다. 무관심한 엄마라고 원망받게 될 거라 한다. 평소 욕먹으면 오래 산다는 생각에 웬만한 욕은 디저트 정도로 생각했는데, 수화기 너머로 계속 쏟아지는 훈계에 슬슬 부아가 치민다. 태어나서 15년을 서울에서 살던 녀석인데 그렇게 야단법석을 떨며 배웅해야 하냐며 전화를 끊었다. 점심 후 비타민제를 챙겨 먹었지만 무거운 기분과 몸은 나아지지 않았다. 스스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이 밤늦게 귀가해 바로 침대에 가서 드러누웠다. 대회 참가 소감을 물어보니 대구가 살기 좋다는 동문서답이다. 전철이 딱 세 개라 편하다고 한다. 거미줄 같은 서울 지하철노선을 머리에 그려보니 적어도 세 시간은 걸리는 이동 거리다. 고속버스와 전철에서 10시간가량 보냈으니 지쳤나 보다. 그래도 힘들었다는 말 대신, 대구가 살기 좋다며 에둘러 말하니 고맙다.
새벽의 배려와 챙겨주지 못한 미안함에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침대가 비좁아 보일 정도로 커버린 아들이 마음 든든하다. ‘고맙다, 미안하다’는 말이 입에서 맴돌다 엉뚱한 소리가 나왔다.
“이발해야겠네.”
“좀 더 있다가…. 이발비용 너무 비싸.”
생각지 못한 아들의 알뜰한 대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 내 머리 많이 이상해?”
어리둥절하게 하는 녀석을 보고 웃음보가 터졌다. 한바탕 웃고 나니 종일 무거웠던 기분이 풀리는 것 같다. 피로 회복제가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는 기분이다. 효과 좋은 피로 치료제는 약이 아니라 가슴 속에 있었다. (10.4)
맨발 걷기
이종금
설을 앞두고 온 가족이 포항 칠포해수욕장에 갔다. 바닷가 젖은 모래는 정전기 흡수능력이 많아 일반 흙길을 걷는 것보다 이삼백 배 효과가 있다. 아들, 딸, 남편과 함께 백사장을 맨발로 걸었다. 일월 하순이라 몹시 추울 것으로 예상했다. 막상 걸어보니 햇살을 받은 모래는 따듯하고 바닷물도 그렇게 차갑지 않았다. 바람에 발등이 조금 시릴 뿐, 한 마리 나비가 된 양 어깨춤까지 덩실덩실 났다. 사랑의 눈으로 마주 보며 응원하고, 발자국으로 하트를 만들어 사진에 담았다. 우리는 마음껏 걷고 달리며 백사장 위에 즐거움 가득한 하얀 웃음과 사랑의 발자국을 남겼다.
그해 12월 저녁 인근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신발을 처음 벗었다. 쌀쌀한 날씨에 발이 시리지 않을까? 겁을 내며 조심스레 맨발로 땅을 밟았다. 차가운 기운이 온몸을 타고 흐르면서 미묘한 변화가 느껴졌다. 마법의 주사를 맞은 것처럼 머리가 맑아지고 침침하던 눈이 환해졌다. 기분이 상쾌하고 가슴 설레든 기억을 잊을 수 없다.
맨발 걷기로 많은 선물을 얻었다. 꾸준히 걷기만 했는데 안구건조증이 사라지고, 위염도 없어졌으며, 아침에 일어날 때 무겁던 등도 가벼워졌다. 몸이 건강하니 마음도 즐거워지고 입가에 웃음꽃이 자주 핀다.
맨발 걷기 정기모임에 참석했다. 학교 운동장에서 걷기를 하고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체험담을 나눈다. 고혈압 정상, 위장장애 극복, 안구건조증 없어짐, 무좀 없어짐, 불면증 해소, 암 극복 등의 이야기를 듣는다. 맨발 걷기가 만병통치약이란 생각이 든다. 처음 시작할 땐 발뒤꿈치 갈라짐, 물집, 요통 등 명현반응이 나타날 수도 있다. 한 번에 30분 이상 걸어야 운동의 효과가 있고, 추운 날도 반드시 찬물로 발을 씻어야 동상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맨발 걷기는 용기가 필요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꾸준히 하기 힘들다.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매일 걷고 SNS 단체대화방에서 백 일 동안 서로 격려하며 응원하는 메시지를 나눈다. 인증사진과 걸은 날 수를 올리면 폭풍 칭찬으로 독려한다. 나도 추운 1월 문경새재를 맨발로 걸은 후 개울물에 발 씻는 사진을 보냈다. “종금샘 대단하셔요. 맨발에 대한 집착력이 대단하셔요. 맨발 영재라고 불러드리겠습니다.”, “나와의 약속을 지키는 당신 멋져요, 백일까지 쭉~”, 하는 격려의 말에 공명하여 힘을 얻고 동기부여가 되었다. 비록 낯선 이의 응원이지만 그들의 따듯한 마음에 용기가 생겼다.
맨발 걷기 여행을 한 적이 있다. 여름 궁전, 노르웨이 오슬로 오뜨 마을의 맨발 걷기를 할 때 그곳 흙의 촉감과 자연풍경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오른다. 조용한 마을에 무법자처럼 들어가서 맨발 인증샷을 남기겠다고 웃고 떠들다가 동네 할머니한테 쫓겨났다. 그날의 웃음소리가 생생하다. 아름다운 명승지와 유서 깊은 유적지를 맨발로 걷고 나면 기억 오래 남는다.
맨발 걷기는 이야기만 듣고 실천하기 어렵다. 오래전에도 여러 번 권유를 받았지만, 발이 시리지 않을까? 아프지 않을까? 땅이 더럽지는 않을까? 벌레가 있지 않을까? 신발을 벗고 걷는 것에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시식하고 맛있으면 그것을 사게 되는 것처럼 맨발 걷기도 체험의 기회를 가져 좋은 점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숲속을 맨발로 걷는 것은 행복이다. 숲은 세로토닌의 보고다. 너무 피곤해 잠이 오지 않을 때 맨발로 숲속을 걷는다. 몸이 쓰러질 것처럼 지쳐 있을 때도 맨발로 조금 걷다 보면 생기가 돋는다. 지친 몸에 미소를 짓게 하고 행복하게 잠들게 한다. 맨발로 걷기 하찮게 보이는 운동이지만 내 몸에 보약 이상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이종금
직장 동료가 친정아버지 상을 당했다. 직원 1명과 함께 서울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가야 한다. 처음에는 동대구역에 12시에 만나 가기로 했다. 그런데 직원이 전날 저녁 역에 확인해 보니 12시에는 서울 가는 기차가 없어 1시 표를 예매했다. 덕분에 1시간 절약되었다. 장례식장에서 상주분이 흐느끼면서 멀리 서울까지 와 줘서 고맙다며, 많은 위로가 된다고 되풀이한다. 상주 친정어머니께서도 멀리서 와주어 감사하단다. 문상 오길 잘했다.
늦은 점심을 먹고 장례식장을 나섰다. 역에서 기차표를 산 후 커피숍에 갔다. 스마트폰을 만지는 어떤 아주머니 옆자리에 앉았다가 탑승 시간이 지난 것을 확인하고 급히 승강장으로 이동하고 있을 때 옆 아주머니가 가방 가져가라고 해 챙길 수 있었다. 그러나 기차는 놓치고 말았다.
다시 기차표를 샀다. 표를 파는 승무원이 해당 시간에 동그라미까지 쳐 주면서 시간 잊어버리지 말라고 했다. 둘은 승차하자마자 문상을 함께 오게 되어 감사하다며 수다를 떨었다. 토닥토닥 서로의 마음을 나누며 이야기에 심취해있는데 승무원이 다가와서 자리를 이동했냐고 물었다. 표를 보자고 해 보여주었더니 “동대구역 지났는데 왜 안 내렸어요?” 한다. 여기는 밀양이란다. 우리가 난감해하니 원래는 내려서 표를 다시 발매해 기차를 다시 타야 하는 데 오늘은 그냥 타고 가라며 1224번 기차 무궁화호 ‘오승 안내장’을 한 장 주었다.
기분 좋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녀와서인지 보통 때는 차만 타면 잠에 빠지는데 왕복 4시간을 눈 한번 안 붙이고 왔는데도 에너지가 넘친다. 실수의 연발인데도 그때마다 은인들이 나타나서 도와주었다. 감사하다는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감사한 일이 많이 생긴 하루였다. 아브라카다브라다.
워렌버핏은 부자가 되기 위한 첫째 조건이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라 했다. 또, 일본 마쓰시다 전기의 창업자이며 현대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마쓰시다 고노스케도 신입사원 면접 때 반드시 “당신은 지금까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을 했다. 아무리 우수한 인재라도 운이 좋지 않았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채용하지 않았고, 반대로 운이 좋았다고 하는 사람은 채용했다. 스스로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면 실제로도 좋은 일들이 뒤따라 오고 더 놀라운 일은 ‘운이 좋은 사람’과 함께 있으면 그 사람의 운도 함께 좋아진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에서 직원 채용할 일이 생겼다. 면접을 보는 데 업무의 역량과 관련된 여러 가지 질문 끝에 “당신은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었다. “예,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라고 답하는 사람이 인상도 좋고 여러 가지 면에서 함께 일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서류면접 점수는 가장 낮았지만, 그 사람을 채용했다. 어떻게 그런 말만 믿고 채용할 수 있느냐고 너무 순진한 것이 아니냐며 태클을 거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지만 운 좋은 사람들을 채용했더니 일도 열심히 하고 직장 분위기도 한결 밝아졌다. 운 좋은 사람과 같이 근무하니 웃을 일이 더 많아져서 내 운도 더 좋아지는 것 같다.
우리 집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다. 딸아이가 유독 수학 과목을 싫어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기적의 계산법’이라는 책을 사서 아들과 같이 풀게 했다. 단순 문제를 반복해서 풀면서 계산 시간을 기록하여 빠르게 계산할 수 있도록 하는 책이다. 아들이 2분도 안 되어 푸는 문제를 딸은 30분이 넘게 끙끙거리며 땀을 뻘뻘 흘리며 풀었다. 남편과 나는 딸아이의 인내심을 크게 칭찬해주며, “너는 앞으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거야.” “넌 정말 대단해.” 하며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중·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수학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기적의 계산법’ 풀 때를 상기시키며 “넌 끝내 수학과의 싸움에서 이길 거야”라고 격려해주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수학 전교 6등 했다. 그때 딸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초등학교 때 ‘기적의 계산법’ 문제 풀 때 엄마, 아빠가 우리 딸 끈기 대단하다고 부추겨주어 끝까지 참고 풀었다고.”
시어머님은 87세로 치매 증상이 있다. 식사하는 방법도 잊어버리신 것 같다. 휴가라서 아들과 딸 모두 모였다. 정성스레 식사 준비를 했다.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식탁에 앉았다. 수저를 드는데 어머님이 “밥이 왜 이래 뜨겁노? 왜 내만 밥 많이 주노?” 하며 이것도 너 먹어라. 저것도 너 먹어라. 젓가락으로 반찬통을 빌며 퉁명스럽게 하면 우리 집 식탁에는 먹구름이 낀다. 식구들의 얼굴에도 그늘이 진다.
제발 옮기지 말고 그냥 두라고 짜증스레 말을 하면 바로 소나기가 내려서 함께 하는 모든 사람의 기분은 꽝이다. 그런데 어머님! 얼마나 좋으세요. 다른 집은 할머니 혼자서 식사하시는데 손자, 손녀, 아들, 며느리와 함께 식사하고요, 또 굶는 사람도 있는데 맛있는 것 많이 있으니 ‘감사합니다’라고 해야지요? 하면 금방 아기천사처럼 환하게 밝은 표정으로 앵무새처럼 “감사합니다”라고 말씀한다. 식탁 위에 햇살이 쫘악 쏟아진다. 먹구름은 사라지고 밝은 햇살에 방긋방긋 웃는 꽃처럼 가족들 표정도 환해진다.
말은 상대에게만 아니라 말하는 사람에게도 메아리가 되어 돌아옴을 알기에 매일 아침 어머님께 사랑의 언어, 축복의 언어를 건네며 왁스칠을 한다. 어머님이 활짝 웃으며 “감사합니다.”로 답례하면 기분 좋게 하루를 연다. 우리 집도 아브라카다브라다.
특별한 시집
이진아
엄마 시집의 편집 후기다.
엄마는 오랫동안 시를 써 오셨다. 생각날 때마다 한 편씩 쓰다 보니 그것이 어느 정도 쌓였나 보다. A4 용지에 출력해 놓기라도 하고 싶은 참이었는데 마침 잘됐다고 하셨다. 원고가 순식간에 해결되었다. 파일을 받아서 한글로 문서 작업을 했다. 작품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의견을 주고받고 함께 다듬었다. 엄마는 그 순간 나와 그런 작업을 하는 것만으로도 무척 기쁘다고 말씀하셨다. 문서 작업을 하는 동안은 나도 신났다.
책을 만들 때는 ‘인디자인’이라는 프로그램을 사용한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리고 유튜브 강의도 보면서 조금씩 서식을 입혔다. 당장은 여유가 없었지만, 잘만 익히면 편리하고 유용한 기능이 많았다. 며칠에 걸쳐 드디어 본문 작업을 끝냈다. 이제 표지 작업을 해야 한다. 가장 큰 난관은 디자인이었다. 제목에 어울리는 적당한 그림이나 사진을 찾아 쓰려 해도 저작권 문제가 있어 조심해야 했다. 무료로 쓸 수 있는 것 중에는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고심 끝에 앞표지는 그냥 백지로 해야겠다고 스스로 타협을 보았는데 아무래도 너무 허전했다. 꽃잎이라도 몇 개 넣을까 싶었지만, 제목과 어울리지 않는다. 인쇄 넘기기 하루 전날, 그림을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겨우 구한 이미지 사진을 보며 그림판에 따라 그렸다. 그림 실력이 없는 데다 마우스로 그리자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선을 그리고 지우길 반복하며 간신히 그림 하나를 완성했다.
인디자인 작업을 시작하고부터는 몹시 힘들었다. 정말 책을 만들 수 있을까, 과연 제대로 된 책이 나올까 하는 의구심과 엄마 책이라 잘 만들어 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교차하며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인쇄 권수를 정해야 해 엄마께 여쭤보니 생각보다 많은 수효를 말씀하셨다. 처음 책을 만들어 보는 나로서는 잘 나올지 어떨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우선 소량만 찍었으면 했다. 하지만 엄마에게 중요한 것은 책의 완성도가 얼마나 높은가 하는 것이 아니었다. “엄마는 인쇄가 좀 삐딱하게 돼도 상관없어. 글자만 안 잘리면 돼. 우리 진아가 엄마 책 만들어 준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좋은데.”
시집을 만들기로 하고 문서 작업을 할 때 엄마한테 서문을 쓰시겠냐고 물었다. “뭐 그런 거.” 하시더니 나중에 “엄마는 서문을 쓰고 딸은 후기를 적으면 의미가 있지 않을까.”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듣고 모든 시를 한 편 한 편 찬찬히 음미하며 다시 읽었다. 전에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그때는 보이지 않던, 느껴지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느껴졌다. 그렇게 편집 후기를 썼다. 엄마는 서문도 시처럼 간단하게 적어 보내셨다.
완성된 책을 보던 엄마가 감격에 겨웠는지 눈물 젖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딸이 책을 만들어 줘서 너무 좋다고. 나는 기뻐하시는 엄마를 보는 것이 좋았다. 다시 책을 본다. 처음 한 것치고는 잘 만들었다. 아쉬운 부분도 눈에 띄지만 그 정도면 만족한다. 무엇보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내 손을 거친 거라 소중하기 그지없다. 서문과 편집 후기를 실음으로써 의미도 깊어졌다. 책을 나눠 주며 엄마는 스타가 됐다. 엄마와 딸이 만든 특별한 시집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으신단다.
“사람 사는 일이란 자잘하고 소소하다. 그럴수록 더욱 감동받고 여운도 길다. 일상의 감동과 여운이 모여 이야기가 되고 글이 되고 시가 된다”라고 한 엄마의 서문은 당신이 이제껏 살아온 인생과 생활 태도를 짐작게 했다. 처음에는 ‘뭐가 이렇게 평범하고 소박하지?’라고 생각했으나 그 짧은 글에는 그간의 세월 속에서 형성되고 다져졌을 엄마의 인생관이 녹아나 있었다. 엄마가 살아오면서 느끼고 생각한 것들은 시 안에서 일상의 옷을 입고 나타나 조용히 바람을 일으켰다.
촌므파탈
이진아
순정도 그런 순정이 없다. 애 딸린 미혼모인데도 매일같이 꽃다발 사다 바쳐, 집 앞까지 데려다줘, 아주 지극정성이다. 얼마 전에는 그 여자를 구하기 위해 불구덩이에도 뛰어들었다. 그러고는 이제 지치니 고만 결혼하잔다. 나는 지금 그 남자한테 빠져 있다.
요즘 용식이가 인기다. KBS 2TV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주인공 황용식. 겉모습만 보면 촌스럽기 그지없는 시골 청년이다. 한데 볼수록 빠져들게 되는 건 상대방을 존중하고, 계산할 줄 모르고, 오직 직진밖에 모르는 불도저 같은 매력 때문이다. 순박한 똥개 같은데 어떨 땐 섹시하기까지 하다. 이 남자를 지칭하는 신조어가 바로 ‘촌므파탈’(촌놈+옴므파탈)이다.
이 말을 처음 봤을 때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저런 조합을 생각해 냈을까. 기발함과 창조력에 놀랐다. ‘촌놈’과 ‘옴므파탈’은 첫 모음이 같아 합쳐도 입에 착 붙고, 의미도 한 번에 와닿는다. 무엇보다 재미있다. 도저히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두 가지 특성을 합침으로써 전에 없던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 냈고, 그게 안방극장에 먹혀들었다. ‘촌므파탈’은 용식이란 인물을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말이다.
재미있고 기발한 신조어는 주로 방송이나 연예 기사에서 접할 수 있다. ‘청순가련’은 명함도 못 내밀 ‘순박섹시’(순박하면서 섹시함), 밀고 당기는 것 없이 투박한 직구(直球)로 냅다 지지를 쏟아붓는 식의 로맨스를 의미하는 ‘폭격형 로맨스’, 활짝 웃는 모습을 표현한 ‘잇몸 만개’,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질 정도로 설레게 될 것을 경계하라는 뜻을 지닌 ‘심쿵 경보’,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등의 감정으로 인해 감기를 앓듯 그 누군가에게 빠져들 때 사용하는 ‘○○ 앓이’(예: 강하늘 앓이)……. 이러한 표현은 재미와 놀라움에 호기심까지 안겨 준다.
그런데 이것이 바람직한 표현일까? ‘촌므파탈’과 ‘순박섹시’는 한자와 외국어의 합성이라 어색하고, ‘폭격형 로맨스’는 과격하다. ‘잇몸 만개’는 원칙적으로 어울릴 수 없는 두 단어의 조합이다. ‘심쿵 경보’는 앞의 말이 비정상적인 줄임 형태인 데다 뒤의 말이 일반적인 쓰임에서 벗어났다. ‘앓이’는 접미사가 아니고 사람 이름 뒤에 쓰는 것이 부자연스럽다. 주변에서 이런 식의 표현은 얼마든지 더 찾아볼 수 있지만 대부분 비문법적인 구성이다.
문법은 말의 구성 및 운영상의 규칙으로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구성원 간의 약속이다. 새로운 말을 만드는 것은 지금 사용하는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거나, 함축적인 표현이 필요할 때다. 시대가 변하고 사회가 발달함에 따라 모든 것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말도 계속해서 만들어져야 한다.
언어를 사용하는 목적은 의미를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언어의 변형을 어디까지 수용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언어의 사용 목적을 생각할 때 그다지 심각한 것이 못 된다. 광고 분야처럼 새롭고 창의적인 것을 추구하는 쪽에서는 언어를 비틀어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그들의 생각을 깨우기도 한다. 대중의 호응을 얻을 때, 그것은 살아있는 언어가 되어 공식적으로도 사용하게 된다.
신조어 사용에 유연성을 가질 때 언어생활이 한층 풍부해질 것이다. 고정된 사고 속에서는 새로운 것이 생겨나지 않는다. 인간은 유희하는 존재다. 이왕이면 재밌는 것을 선호한다. 참신하고 맛깔나는 새로운 말은 앞으로 계속 생겨날 것이다. 용식이는 언어의 감옥에 갇혀 있던 나를 해방되게 했다. ‘촌므파탈’ 새로운 표현의 확장이란 면에서 다시 생각해본다.
나도 할 수 있을까
이해진
아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광주에서 2019 광주 세계 마스터즈 수영선수권 대회(아마추어 수영선수를 위해 국제수영연맹(FINA)이 마련한 세계대회)를 마치고 하루 전에 제주에 먼저 왔다. 3일간 시합해서인지 얼굴이 푸석하고 피곤해 보여 차 열쇠 달라니, 자기가 운전한단다.
운전대를 잡은 아들이 “옆에 앉아 편히 쉬세요!” 한다. 아들이 벌써 이렇게 컸나 가슴이 뿌듯하다. 8월 중순의 제주도도 상당히 덥다. 제주 고등어와 갈치 정식으로 식사하고, 내일 서핑(Surfing: 파도타기라 불리는 운동 종목)하려면 힘을 축적해야 하니, 일찍 숙소에 가 푹 쉬자고 한다.
북포항의 어느 바닷가, 젊은이들이 서프보드에 엎드려 높은 파도를 뚫고 나가다가 어느새 뒤돌아 일어서더니 멋진 포즈로 파도를 탄다. 철썩! 철썩! 시원한 파도 소리 들으며 한참을 바라보다가 나도 저거 탈 수 있을까? 하니 아내가 하는 말, “당신 나이를 생각해요.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끌려 나오려고 그래요!” 아니야 저 정도는 나도 탈 수 있다고 큰소리쳤으나 가슴은 두근거린다. 아내가 아들에게 전화로 여름휴가 때 서핑해보자고 한다.
중문 해수욕장 한편에 있는 서핑장 앞바다에 수영복 차림으로 서핑하는 젊음과 모래사장의 그늘막에 기대어 가벼운 옷차림의 늙수그레한 중년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서핑강습소에 도착하자 아빠! 난 타지 않을래! 라는 딸아이의 말에 새로운 것에 대한 갈등이 많았구나 싶었다. 나도 생소한 바다 서핑의 두려움도 있었으나, 아내와 아이들에게 난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을, 강습 숍 직원에게 이야기하여 딸의 강습비와 대여비를 다행히 환불받았다. 지금 날씨가 더워 수트를 입으면 땀이 차서 피부 마찰로 상처가 날 수 있단다. 수영이 가능하면 수영복으로 서핑하라는 강사의 말에 아들이 자기의 얇은 상의 수트를 입으란다. 나도 개 수영은 할 수 있다고 했다. 강사가 웃는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사실이라 못 이기는 척하고 입었다.
중문 해수욕장 생소한 바다다. 서핑장이 있는 바다에 젊은이가 수영복 차림으로 서핑한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나도 서핑할 수 있다고 한 말에 갈등이 일어난다. 솔직히 두렵다. 지금 날씨가 더워 수트를 입으면 땀이 차서 피부 마찰로 상처가 날 수 있단다. 수영을 할 수 있으면 수영복으로 서핑하라는 강사의 말에 아들의 수트를 입었다. “개 수영은 할 수 있다” 나의 농담에 강사가 웃는다. 강사를 따라 웃고 있으나 가슴이 두근두근한다.
강습을 신청한 사람이 모두 올 때까지 멋진 모습으로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아내가 불안함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어머니, 제가 아버지 옆에 있으니 걱정은 마세요” 하며 아내를 안심시킨다. 서핑 준비를 마친 나를 딸아이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수영의 자유형처럼 팔을 젓는 “패들링”, 윗몸을 일으키는 “푸시업”, 두 다리를 앞으로 끌어오는 “테이크 오프”, 파도를 타고 전진하는 “라이딩”, 용어 설명부터 모래사장 위에서 바다에서 하는 것처럼 여러 차례 반복연습하였다. 마치 기초군사훈련 같다. 강사가 이제 바다로 가서 한 사람씩 차례로 보드를 잡아 밀어준단다. 펼쳐질 미래를 두려워 말자.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권아 넌 여동생 뒤에서 해라! 하고, 나도 약간은 무거운 2.5m의 보드를 들고 뒤따랐다. 바닷물이 적당히 시원하다. 앞에 나간 전원이 푸시업도 하기 전에 바닷물에 풍덩 빠졌다. 드디어 내 차례, 파도가 옵니다. 배운 대로 하라고 하면서 강사가 내 보드를 밀었다. 오른발을 당기고, 상체를 일으키고, 왼발을 앞으로 아뿔사, 미끄러져 바다에 꼬꾸라졌다. 바닷물이 너무 짜다, 눈도 따갑다. 바다 깊이가 가슴 아래 정도이므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발목에 묶인 보드 줄을 당기고 다음 차례를 기다렸다.
물에 빠지기를 여러 차례 반복되니 욕심이 생겼다. 남보다 먼저 강사에게 밀어달라 부탁하여 이번엔 균형을 잘 잡아 파도와 한 몸 되어 질주하는 모습을 아내에게 보여주자, 드디어 왼발을 당기고 반쯤 일어나 자세를 잡고, 하나, 둘, 셋, 앞을 보니, 저 앞에 한 아가씨가 있다. 바로 가면 부딪힌다. 생각할 틈도 없이 풍덩 빠졌다. 아 정말 아깝다. 하필이면 정면에 나타나서…. 그러나 안전이 우선이라 서프보드를 옆에 끼고 차례를 기다려 다시 타 보았지만, 균형이 잡히지 않는다. 짠 바닷물 맛을 여러 차례, 눈이 따가워 모래사장으로 나왔다. 아들은 몇 차례 반복하더니 서프보드 위에서 자세를 잡고 긴 거리를 빠르게 질주하고 있다. 딸은 나처럼 몇 번 빠지더니 그만 타잔다.
“눈이 쌓여야 눈사람을 만든다.” 했는데, 한 번만 더 탈게 하고 다시 바다로 가서 탔지만, 파도가 매섭게 뺨을 때렸고, 보드가 수없이 뒤집혔다. 역시 실패, 파도가 점점 높이 춤을 춘다. 아내와 딸이 그만하고 가자고 한다. 더는 나에게 무리다. 운동신경이 나쁜가?, 나이가 중년이라서?, 풀이 죽은 나를 보고, 3시간 동안 성공한 사람은 몇 명 되지 않는단다는 아내의 말과 몇 차례 강습받아야 성공한다고 강습직원의 말에 딸아이는 다음에 탈 수 있다고 장담한다.
9. 고수들이 춤추듯 큰 파도를 타는 장면을 한참 바라봤다. 저 멀리서 서프보드를 타고 자유자재로 파도를 타고 다니는 아들이 뿌듯하게 느껴지나 보드에서 일어나 불과 몇 초 밖에 서 있지 못한 자괴감도 찾아온다. 강습소 직원의 말을 위안 삼아 다음에는 꼭 성공하리라.
달아난 송아지
이해진
초승달에 비친 낙엽이 바람에 을씨년스럽게 날린다. 부스럭 소리가 날 때마다 바짝 긴장한다. “백두산!” 하고 암구호(야간에 아군 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정하여 놓은 말)를 보내도 응답이 없다. 옆에 있는 김 일병이 두려운지 내 쪽에 바짝 붙는다. 오늘 밤 간첩이 이 구역을 지나갈 수 있으니 경계를 철저히 하라는 사령부 지시를 받았다.
김 일병은 초저녁부터 눈물을 찔끔댄다. 안쓰러워 어깨를 토닥이며 “야! 내가 태권도 유단자야 간첩 몇 놈 정도는 해결할 수 있어, 넌 날 엄호만 해” 하며 귓속말로 안심시켰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낙엽 소리 외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고요함이 흐르는 밤이다. 서리가 내리는 새벽녘이 되니 귀가 아리다. 김 일병은 천연덕스럽게 내 어깨를 베개 삼고 있다. 드디어 동이 튼다. 긴장한 탓인지 피곤이 엄습해온다. 부대로 복귀하니 5분대기 순서다. 아침 식사보다 잠이 우선이다. 군화를 신은 채 모포 한 장 덮고 침상에 누워 쪽잠을 청한다. 눈꺼풀이 천 근이 되는 듯 저절로 내려온다.
땡땡땡! 땡땡땡! 5분대기조 비상 타종에 기계적으로 무전을 받는다. “oo 산 7부 능선 연기 나는 쪽 긴급 출동!” 수상한 자가 있단다. 일주일 전 무장간첩 몇 명이 휴전선을 넘어와 민간인 두 명과 휴가 복귀 병 일 명을 사살하고 철책을 넘어갔다. 잔당이 한두 명 남은 것으로 추정된다며 그날 이후 계속 비상사태다.
목표지 산 아래 도착해 총의 실탄 잠금장치를 풀고 개울을 건넌다. 엊저녁 서리맞은 군화가 마르기도 전에 또 신고 살얼음이 낀 개울물을 건넌다. 물이 들어와 차갑고 무겁다. 순식간에 육부 능선이다. 세 개 조 선두에 분대장인 내가 먼저 간다는 수신호를 한 후 출발했다. 모닥불 위치를 발견하고 손을 대어보니 온기가 있다. 뒤돌아보는 순간 육중한 무엇이 부딪친다. 넘어지면서 권총 손잡이로 내리쳤다. 조원들이 신속히 포승줄로 묶었다. “수상한 자 검거 완료” 무전을 날리고 하산하여 사단 헌병대에 보내고, 부대 정문을 지나니 중대원들이 모여 간첩 잡았다고 손뼉 치고 난리다.
“포상금 나오면 반은 조장님하고, 우리도 골고루 줄 거죠?” 하며, 통신병이 침상 머리에서 나를 본다. 아니야, 송아지 아홉 마리 사 포상휴가 때 각자 집에 한 마리씩 가져가고, 나머지는 중대 회식비로 하자고 했더니 다들 엄지척이다. 늦은 아침을 먹고, 5분대기조는 행복의 잠을 청했다.
어제는 고스란히 날밤으로 밝히다가도 포상금을 생각하니 뭉게구름 타듯 오만 가지 망상이 더 한다. 욕심도 생긴다. 그러나 사나이 약속은 중천금이라 했다. 비몽사몽 간에 누가 깨워 일어나니 벌써 오후 일과가 끝날 시간이다. 몸이 한결 가벼운 것 같다. 행정반에서 찾는다고 해 들어가니 간부들이 회의 중에 “이 하사! 수고했어! 아침에 잡은 수상한 자는 행불자 걸인이라고 연락이 왔어.” 간부들의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충성” 하며 경례한 후 나왔다. 벌써 소식 듣고, 모인 우리 조원들이 어깨를 내리고 나를 쳐다본다.
토요일 오후, 부대 앞 가게에서 술 없는 회식이다. 간부들이 낸 찬조금이 적어 모자라는 돈은 외상이다. 송아지 대신 불고기를 먹고, 일 계급 특진과 휴가 대신 함께했던 5분대기조 전원이 2시간 특별외출을 가졌다. 비록 걸인을 간첩으로 오인해 송아지 몰고 포상휴가 가는 꿈은 사라졌으나 그때 뜬구름 잡던 이야기는 군대 생활의 추억으로 남았다.
삼순이 이야기
최경식
딸바보 아빠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딸바보, 딸 앞에서 바보가 될 정도로 딸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엄마나 아빠를 이르는 말이다. 나도 그중 하나다. 유별난 딸 사랑은 아내가 혀를 내두를 정도다. 조그만 산골 마을에서 태어난 나는 소싯적부터 어린아이를 무척 좋아했다. 이웃집 숙모가 우는 아이를 못 달래 쩔쩔매고 있을 때 내가 달려가 아이를 어르면 울음을 그쳤다. 남의 집 아이도 그 정도로 좋아했으니 내 핏줄을 타고난 맏딸이야 오죽했겠는가.
신혼 때, 아내는 퇴근하고 들어오는 내 얼굴이 늘 백지장 같다고 했다. 학창 시절 큰 병을 앓은 까닭이다. 처진 어깨와 피로에 찌든 쉰 목소리로 아내를 슬프게 했다. 지루한 일상이 이어지던 그때 아내의 임신은 내 생활을 확 뒤바꾸어 놓았다. 하늘이 내려준 이 귀한 선물은 커다란 삶의 활력소가 되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피로는 저 멀리 사라졌다. 얼굴에도 생기가 돌았다. 태교는 직접 하리라 마음먹었다. 매일 기타를 연주하며 동요를 들려주었다. 태교를 시작한 지 수개월이 지났을 때 배 속의 아기가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기타 연주를 하며 노래를 들려주면 가만히 있던 아이가 노래를 멈추면 떼를 쓰듯 엄마 배를 발로 찼다. 다시 시작하면 조용하다가 멈추면 또 발차기를 반복했다. 하도 신기하여 이 이야기를 글로 써서 당시 ‘정오의 희망곡’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보냈다. 내 사연이 채택되어 전국으로 전파를 탔다. 부상으로 유아용품 교환권을 받아 각종 아기용품을 푸짐하게 장만하였다.
나이 33살에 딸아이를 얻었다. 태어난 달과 월이 3월 3일이고 시간이 오후 3시, 몸무게가 3.3kg이다. 신기하게도 3자가 일곱 개가 되었다. 이름을 짓기 전에 삼순이란 별명으로 불렀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가 3과 7이라는 통계도 있다고 한다. 막연히 아이가 우리 가정에 행운을 가져오리라 믿었다. 그 후로 내 삶도 변했다. 매일 천국에서 사는 듯 행복했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딸을 볼 수 있다는 기대에 하루의 피로가 절로 풀렸다. 세상이 달라졌다.
두세 살쯤, 퇴근길에 마중 나온 삼순이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함박웃음을 머금은 채 종종걸음으로 달려오던 딸의 얼굴에서 내 빛바랜 돌 사진 속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나의 분신이 아장아장 걸어오고 있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의 의미를 그제야 깨달았다. 흐르는 세월 속에 이따금 몰아치는 거센 물보라도 삼순이가 있어 능히 헤쳐나갈 수 있었다. 유치원 학예회 때는 삼순이와 함께 노래를 불렀다. 음악에도 소질이 있어 피아노도 곧잘 치고 어깨너머 배운 기타 솜씨도 제법이었다. 아빠의 태교 덕분이라고 아내를 향해 어깨에 힘을 주었다. 초중고를 마칠 때까지 학교 행사에도 자주 참석했고, 교외 봉사 활동도 함께 하며 아주 오랜 세월을 지독한 딸바보로 살았다.
삼순이가 우리에게 온 지 스물 하고도 두 해가 지났다. 어엿한 여대생이 되어 가끔 화장한 모습도 보였다. 남자 친구에 대하여 아내와 얘기하는 것을 먼발치에서 어렴풋이 듣기도 했다. 사실 딸에게 남자 친구가 생긴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아빠와의 대화도 많이 줄었고, 평소에 거리낌 없이 해주던 뽀뽀도 외면하기 일쑤였다. 덜컥 걱정이 앞서니 잔소리가 늘어만 간다. 늦게 들어오는 아이를 향해 통금시간을 정하겠다고 협박도 해보았다. “세상에 남자는 아빠 빼고는 다 나쁜 놈이야.” 하면서 으름장도 놓는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가 기가 막힌 듯 혀를 끌끌 찬다.
시내 번화가에서 차마 못 볼 것을 보고야 말았다. 은행에서 회사업무를 보고 복잡한 시내를 따라 천천히 운전하고 있었다. 젊은 연인 한 쌍이 손을 꼭 잡고 도로 한가운데로 걸어온다. 웃음소리가 세상을 다 가진 듯 흥겹다. ‘참 좋을 때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을까?’ 혼자 흥얼대며 비켜달라는 경적을 울리려 손을 옮겼다. 문득 고개를 들어 차창 밖을 보니 눈에 들어온 얼굴이 아주 낯이 익다. 세상에 이런 일이! 그 아이는 다름 아닌 내 딸 삼순이었다. 경적을 울리려던 손은 핸들 위에서 꽁꽁 얼어붙었다. 뒤통수에 망치라도 한 대 맞은 듯 얼얼하다.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혼란스러운 머리를 수습하는 사이 둘은 이미 사이드미러 저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불안하게 이어오던 직감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가끔 남자 친구에 관해 아내와 딸의 속삭임을 들으면서도 애써 외면했는데, 불과 몇 발걸음 앞에서 기막힌 광경을 보니 충격이 상상외로 컸다. 딸이 어른이 되어 가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나 보다. 이제 더는 품 안의 자식이 아니라 생각하니 섭섭하고 울적한 마음에 자꾸만 헛웃음이 나왔다. 아내에게 복잡한 심경을 토로하니 빙긋이 웃으며 한마디 한다. “당신 만날 때 내 나이가 몇이였는 줄이나 아세요? 아마 지금 딸내미 나이 언저리일걸요. 이제 서서히 이별 연습을 해두는 것이 좋을 듯하네요.” 심각한 내 마음은 아랑곳없이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아내의 말에 며칠 동안 말문을 닫고 단단히 삐쳐 있었다.
삼순이에게 부담을 안 주었으면 좋겠다고 아내가 충고했다. 그저 지나가는 인생의 한 과정일 뿐이란다. 아빠가 충격을 받을까 봐 남자 친구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더라는 딸의 말도 전했다.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이들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해서 인터넷 검색도 해보았다. 딸을 향한 염려가 지나친 집착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의외로 나와 같은 생각과 고민을 하는 아빠들이 상당히 많았다. 어지러운 세상 풍파에 휩쓸려 혹시라도 자식이 잘못된 길로 들어설까 걱정하는 딸바보들의 마음이 글 속에 애달프게 묻어 있었다. 그저 딸 가진 아빠가 한 번은 치르고 넘어가야 할 통과 의례에 불과할 뿐이라는 결론을 내리며 마음을 추슬렀다.
3학년이 되면서 시작한 자취 생활이 고달픈가 보다. 모처럼 집에 온 딸이 지친 모습으로 잠들어 있다. 아빠 눈에는 여전히 아기의 모습이다. 잠든 딸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긴다. ‘은서’라는 예쁜 이름이 있지만, ‘삼순이’라는 촌스러운 별명을 오히려 좋아하며 해맑은 미소를 잃지 않았던 아이다. 숱한 희로애락을 반복하면서 살아온 삶 가운데에서 그래도 딸 키우는 재미가 가장 좋았다. 딸바보 아빠로 살아오면서 나약한 아이로 키우지 않았는지 돌이켜본다. 대학생이 된 딸에게 ‘이건 이렇게 해라, 저건 저렇게 해라, 술 많이 마시지 마라. 일찍 귀가해라, 공부 열심히 해라.’며 잔소리해 온 날들이 조금은 후회스럽다. 새장 속의 앵무새처럼 애지중지 키워 왔던 내 딸 삼순이. 이제 세상 밖으로 훨훨 날아가 마음껏 뜻을 펼 수 있도록 그동안 내 마음속에 채워 놓았던 새장의 빗장을 살포시 벗겨 놓는다.
태풍
최경식
어머니의 전화다. 고향 마을에 물난리가 났다. 태풍에 제방을 넘은 물이 마당과 텃밭을 스쳐 지나갔단다. 작년 이맘때 태풍이 할퀴고 간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또 홍수가 났다. 팔순이 넘은 어머니의 힘으로는 마당 치우는 일조차 버거울 것이다. 고향 가는 길 고갯마루에 올라 차를 세웠다. 먼발치에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태풍에 휩쓸려 쓰러진 벼들이 먼저 눈에 띄었다. 산비탈에도 여기저기 사태가 났다. 이태 연이어 찾아온 불청객이 한바탕 휘젓고 지나간 상흔이다.
어스름한 시간인데도 어머니는 밭에 있다. 범람한 개천과 골짜기 물이 합세해 밭을 진흙탕으로 만들었다. 옥수수 대가 여기저기 널브러졌다. 갓 자란 채소도 흙탕물을 뒤집어썼다. 형체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자식들에게 줄 김장거리를 손수 장만하기 위해 애지중지 키우던 배추였을 터이다. 산에서 쓸려온 나무뿌리와 힘겨루기 하는 노모의 모습이 실루엣으로 다가온다. 하늘 가득 메운 하루살이의 춤사위 아래 당신의 굽은 어깨가 유난히 슬퍼 보인다.
낮일이 무척 고되나 보다. 어깨를 주물러 달라더니 금세 코를 곤다. 자그마한 몸을 동그랗게 구부리고 비스듬히 누웠다. 허리가 굽어 반듯하게 눕지 못한다. 평생 농사짓느라 시달린 탓이다. 어깨와 허리를 조심스럽게 만진다. 그새 더 많이 야위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어머니의 구부정한 어깨에 고단했던 삶의 여정이 그려진다.
어머니의 삶은 늘 태풍의 소용돌이 곁에 머물러 있었다. 태풍의 씨앗은 가난이었다. 가난은 숙명처럼 우리 집안을 따라다니며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술 좋아하던 아버지는 밖으로만 나돌았다. 농사짓는 일은 어머니의 몫이 되었다. 자식 뒷바라지도 당신이 감당했다. 두세 살 터울의 4남매는 올망졸망 엄마 뒤만 쫓아다녔다.
끝내 아버지는 몹쓸 병을 얻었다. 아버지의 긴 투병에도 어머니는 싫은 내색 없이 병간호하며 가정을 지켰다. 내 어릴 적 어머니의 삶은 산의 정상을 향해 바위를 밀어 올리는 일을 되풀이하는 그리스 신화 속 시시포스와 같았다. 가난의 수렁에서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모진 고통을 감내하며 지낸 세월이다. 나는 당신의 삶을 보면서 다짐했다. ‘어른이 되면 어머니를 편히 모셔야지. 아버지 같은 사람은 절대 되지 말아야지.’ 오늘은 눈물이 난다.
어머니는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읍내 노래자랑에 나갈 만큼 실력도 있었다. 노래는 당신의 가슴속에 휘몰아치던 태풍을 잠재우기 위한 비책이었는지 모른다. 나도 어머니의 노래를 따라 부른 적이 있다. 벼를 베는 논에서도, 고구마를 캐는 밭에서도 당신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설날이나 추석 때 술이라도 한잔 드시고 가수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와 ‘여로’를 멋들어지게 불렀다. 어머니 쉰 중반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어머니의 노랫소리도 멈췄다. 그 노래가 아버지에 대한 투정과 원망, 고단한 삶에 대한 한탄이었음을 안 것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였다.
어머니는 자식을 모두 결혼시키고도 시골집에 홀로 지낸다. 좀처럼 자식들 집에 오지 않는다. 우리 집에 와서도 아파트가 감옥 같다며 사흘을 넘긴 적이 없다. 육신의 아픔도 숨겼다. 어느 날 허리가 심상찮아 병원에 갔을 때는 이미 수술 시기를 놓친 후였다. 점차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 갔다. 유모차 없이는 걷기조차 힘들어한다. 요양보호사 도움마저 거절했다. 자식에게 제대로 해준 게 없으니 받을 염치도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힘들 텐데 인제 그만 주물러라.”
적막을 깨고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머니는 잠잘 때가 가장 힘들다. 허리를 펼 수 없어 뒤척이다 깨는 날이 많다. 그래도 참을만하다면서 괜찮단다. 자식들이 부모 잘 못 만나 어린 시절을 힘들게 보냈으나 엇길로 새지 않고 바르게 커 준 것이 고맙다고 했다.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홀어머니 건강조차 챙기지 못한 불효가 가슴 아프게 한다. ‘한 부모는 열 자식을 거느려도 열 자식은 한 부모를 못 거느린다.’ 옛 속담이 꼭 맞다. 오랜만에 밤이 늦도록 나누는 모자간의 대화를 창 너머 북두칠성이 다가와 듣고 있다.
태풍이 물러간 화창한 휴일이다. 앞산에는 가을빛이 완연했다.
“엄마, 가을 나들이 가야지. 다 치우고 같이 대구 가자.”
“집은 누가 지키고?”
“집 걱정하지 말고 이제는 자식들 집 오가며 편하게 살아요.”
“나는 여기가 편하다. 허리가 꼬부라져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빈껍데기만 남은 몸, 집 나서면 짐만 된다. 나는 너희만 잘되면 아무것도 필요 없다. 어서 마당에 쌓인 흙이나 치우자.”
가정을 지키려 모든 것 다 바치고도 이제 마지막 남은 육신조차 자식들을 위해 거름이 되고자 하는 당신의 자식 사랑에 할 말을 잃었다.
어둠살이 내릴 무렵 시골집을 나섰다. 산마루에 올라 고향 마을을 되돌아본다. 태풍이 물러갔으니 곧 원래의 모습을 되찾으리라. 두 손을 모았다. 고향 마을을 멍들게 한 태풍의 상처가 빨리 아물기를…. 어머니의 가슴에 평생 회오리치던 태풍도 이제는 평온해지기를 소망한다. 모진 세월 켜켜이 쌓여온 노모의 주름살 위에 계절이 또 하나의 깊은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 가을이 쓸쓸하다. 조용히 ‘동백 아가씨’를 불러본다. 서쪽 하늘에 석양이 깔린다. 땅거미가 내리고 있다.
딸에게 엄마는
최의숙
현관에 들어서니 오래 보이지 않던 신발이 눈에 띈다. 반가움에 “딸랑구!” 하고 불렀다. 딸이 여름방학을 이용해 유럽을 여행하고 한 달 만에 왔다. 환한 얼굴이 더 예뻐 보인다. 여행을 왜 하는지 조금 알 것 같다. 떠나기 전에 여러 가지 안 좋은 일이 있었다. 잦은 여행으로 저축의 묘미를 모르는 듯하다. 딸아이의 생활 방식과 사고에 적응하기가 힘들다. 내가 자랄 때와 비교할수록 이해가 안 된다. 가끔은 그저 지켜보기만 한다.
우린 서른두 해 동안 함께 사느라 은근히 서로 질렸는지 모른다. 딸이 여행 떠난 후 안부도 한번 묻지 않고 정신적인 평화로움에 빠졌다. 딸도 돌아오는 시각을 알려주지 않았고, 나도 짐작만 하고 묻지 않았다. 바쁜 탓도 있지만 이젠 딸에게 푸대접을 좀 하고 싶다. 딸에게 너무 잘해 주면 결혼을 안 한다는 친구들의 충고가 한몫했다.
딸 방에는 늘 포장된 상자가 가득하다. 택배로 크고 작은 것들이 자주 배달된다. 씀씀이가 걱정되어 이번 여행에는 용돈을 주지 않았다. 곁눈으로 찾아보니 내 선물이 없다. 상관없다. 딸이 없을 때 그 방을 수시로 드나든다, 비싼 향수는 다르다. 내가 사용하는 것보다 상큼하고 젊은 향이 난다. 몰래 애용한다. 백화점에서 사 온 비싼 헤어오일도 슬쩍 사용한다. 그날은 머릿결이 더 부드럽다.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머릿결이 좋다는 말까지 듣는다.
직장 생활이 힘들어 보일 때 가 있다, 공부를 잘했던 딸은 돈을 더 잘 벌 수 있는 직업을 갖지 못해 불평이다. 대학진학에 많이 관여했던 나를 가끔 원망한다. 엄마가 편안하고 만만한 한 모양이다. “딸을 넷이나 키워도 네가 너무 힘이 든다.” 하던 친정어머니 말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난다. 하늘나라에 있는 엄마가 “꼭 너 닮은 딸을 낳아서 고생이 많구나” 하지 않을까. 하늘 한번 쳐다본다.
매일 아침 운동을 한다. 딸이 여행에서 돌아온 첫날부터 혼자 아침 챙겨 먹고 출근하는 게 맘에 걸린다. 운동을 포기했다, 내 마음과는 달리 식탁을 본체만체 출근하느라 신발을 신고 있다. 얼른 뛰어나가서 두유 하나를 쥐여 주었다. 운동을 가지 않으니 시간 여유가 많다. 차려 놓은 딸아이의 밥을 대신 먹으며, 창문을 열고 딸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사랑스럽다. 고슴도치가 따로 없다.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집안을 둘러본다. 어제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느낀다. 거실에는 딸이 집에 온 흔적이 즐비하다. 큰 여행 가방이 펼쳐있고 화장실도 물기로 질퍽하다. 거울에는 이 닦은 흔적이 드러난다. 치약이 제자리에 없고 클렌징 비누도 고개를 젖혀 찾아야만 한다. 하루 만에 본래의 모습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여행 때 입은 옷가지가 거실 한쪽을 차지한다, 누군가에게 줄 크고 작은 선물이 줄을 서 있다. 정리하려다가 그만둔다. 질서가 있다. 잘못 만져 흐트러지면 또 곤란해진다. 눈으로 구경만 한다. 아마도 일주일은 족히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나에게 딸은 늘 갑이다. 어제까지는 모두가 내 손길대로 있었는데, 갑이 나타나자 나는 다시 을이 된다. 자연스레 모든 것이 갑의 중심으로 돌아가 있다. 머리로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이 그렇게 반응한다. 처음에는 예뻐서 이래도 저래도 봐주다가 딸의 자리를 갑으로 만들어 줬다. 자랄 때 대접받고 시집가서도 복 받고 살라고 양보하고 부추겨줬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을이고 딸은 갑이다. 이 자리는 영원하리란 생각이다. 지금 나는 을이기를 거부감없이 받아들인다. 딸을 둔 대부분 엄마처럼….
엘리베이터에서 퇴근하는 딸을 만났다. “엄마 겨울방학 때는 같이 여행 갈까?” 무심히 쳐다보는 내게 십 년 만에 보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반가워한다. “엄마 나 결혼하면 엄마랑 가까이 살래.” ‘시집가거든 먼 곳에 집을 구하고 가끔 만나자꾸나.’ 하는 말이 목에서 나오려는 것을 참는다. “엄마 끓여주는 된장 얻어먹어야 하거든….” 된장 소리에 마음이 확 풀린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딸 편이 되어 나는 맘속으로 조용히 기도를 올린다. ‘내 딸아, 네가 가는 길에 이 엄마는 항상 박수를 보내며 너를 응원한단다.’
오늘도 현관문 앞에 작은 택배 상자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