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1417. [역경의 열매] 김철륜 <1-12> ‘멜빵에 나비넥타이 맨 멋쟁이’ 칭찬에 가린 장애 고통
다섯 살 때 소아마비 여동생도 장애… 아버지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찬송
2014년 11월 서울 여의도 KBS홀에서 열린 ‘제26회 아리 평화의 콘서트’에서 지휘하고 있는 필자.하나님은 이른 비를, 때로는 늦은 비를 내려주신다. 돌이켜보면 지나온 내 삶은 고비마다 ‘늦은 비’를 맞은 인생이었다.
초등학교 땐 몸이 아파 1년 정도 쉴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도 중도에 그만뒀다가 간신히 졸업장을 받았다. 대학은 연탄 배달을 하다가 뒤늦게 입학했고, 해외 유학은 자녀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간 뒤에야 떠났으니 남들보다 한참 뒤처졌다. 박사학위는 20년 만에 받았다. 지도 교수가 생존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남들보다 늘 한걸음 늦은 지각 인생인 셈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이뤄진 일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6·25전쟁 통에 태어난 나는 다섯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았다. 척추가 휘어지고 왼쪽 다리는 신경이 마비되어 똑바로 앉아 있지도 못했다. 설상가상 턱밑 임파선이 부어오르면서 곪아 터져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피란 중이라 의사도, 약도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어머니는 강했다. 오직 ‘내 아들은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칼을 불에 달궈 목에 가득 차 있던 고름을 빼냈다. 그때 생긴 흉터가 아직 남아 있다.
소아마비와 목에 난 흉터는 내 패션을 바꿔놓았다. 꼭 ‘가분수’ 같은 몸매이기에 항상 멜빵을 하고 다닌다. 그렇지 않으면 바지가 흘러내린다. 또 목에 난 흉터를 감추느라 와이셔츠 깃을 세워 놓고 나비넥타이를 매고 다닌다. 멜빵에 나비넥타이는 칠순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 이 순간도 ‘김철륜’의 트레이드마크로 통한다. 나를 잘 모르는 이들은 멋쟁이라 부를지 모르지만 이런 사연이 있었음을 이 자리를 빌려 고백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 등에 업혀 등교했다. 냇가에 다리가 없어 징검다리를 건너다녔는데, 부모님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경북 울진으로 이사해서는 우리 가족에 더 큰 고난이 닥쳤다. 하나뿐인 여동생이 우체국장 집의 높은 툇마루에서 놀다가 거꾸로 떨어져 그만 목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말았다. 척추장애인이 된 여동생은 더 크지 못했다. 얼굴도 기형으로 변했다.
그 무렵 아버지는 교회를 오가며 이런 찬송을 나지막하게 부르신 기억이 난다.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갑니다 자유와 기쁨 베푸시는 주께로 갑니다.”(찬송가 272장)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 마음을 이해한다. 아버지 멍에는 다름 아닌 나와 내 여동생이었던 것이다. 장애를 지닌 아들딸 앞에서 대놓고 말씀하시진 않으셨지만 그 찬송 속에 아버지의 심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장애로 무척이나 움츠려 있던 초등학교 4학년 때 사건이 벌어졌다. 체육시간이었다. 60m 달리기를 하는데, 나는 늘 그렇듯이 아이들 옷가지를 지키며 운동장 한쪽에 앉아있었다. 그런데 담임선생님이 나를 부르셨다. “철륜이 너도 나와.” 뛰어보라는 표정이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선생님은 막무가내였다. 뛸 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출발선으로 나오라는 선생님이 야속하기만 했다. 나는 버텼다. 그런데 선생님이 내게로 성큼성큼 다가오시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내 멱살을 잡고 번쩍 들어 올리시더니 출발선에 턱하고 세워놓으셨다.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 [역경의 열매] 김철륜 <1> '멜빵에 나비넥타이 맨 멋쟁이' 칭찬에 가린 장애 고통
* [역경의 열매] 김철륜 <2> 중학생 때 일주일에 열두 번 교회 종 쳐… 신앙 쑥쑥
* [역경의 열매] 김철륜 <3> 연탄 배달하자 굽은 다리에 ‘기적’… 하나님 뜻 깨달아
* [역경의 열매] 김철륜 <4> 연탄 배달하며 성악 연습… 교회음악과 입학
* [역경의 열매] 김철륜 <5> 20여년 지휘… 힐링과 은혜 '찬양의 힘' 만끽
* [역경의 열매] 김철륜 <6> "하나님, 달덩이가 떴습니다" 첫눈에 반한 그녀
* [역경의 열매] 김철륜 <7> 100일 만에 프러포즈 "세례 받고 결혼합시다"
* [역경의 열매] 김철륜 <8> "나도 교회 다녀, 너 잘난 체하지 마" 상사의 폭언
* [역경의 열매] 김철륜 <9> 첫 '루터 찬송가' 주제 논문으로 박사학위
* [역경의 열매] 김철륜 교수 <10> "목사 하려면 이혼해" 아내 반대 부딪혀
* [역경의 열매] 김철륜 <11> 노엘찬양단 창단… 12년간 자비량으로 봉사
* [역경의 열매] 김철륜 <12·끝> 이른 비처럼, 때론 늦은 비처럼 베푸신 복에 감사
약력=△1951년 강원도 양양 출생 △연세대 교회음악과, 대한신학교(안양대 전신) 신학과 졸업 △독일 레겐스부르크 대학교 철학박사 △안양대 부총장 △노엘찬양단 지도목사 △예안교회 담임
***[역경의 열매] 김철륜 <2> 중학생 때 일주일에 열두 번 교회 종 쳐… 신앙 쑥쑥
자다가 깨 교회 달려가 새벽예배 종 쳐 알고보니 자정… 교회 사람들 혼비백산
경북 울진의 월송초등학교 졸업식을 마친 뒤 어머니 어숙녀(89) 권사와 함께한 필자.같은 반 급우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출발선에 선 내가 정말 달릴 수 있나 한번 지켜보자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옆에 서 있던 선생님이 갑자기 앞으로 달려 나가시는 게 아닌가. 뒤뚱거리며 뛰시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헉헉 숨을 몰아쉬면서 다시 내 앞으로 달려오신 선생님이 말했다. “뛰어!”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다시 한 발을 내밀었다. 내 인생 최초의 달리기였다. ‘나도 뛸 수가 있구나.’ 한참을 지나서야 겨우 출발선으로 되돌아왔는데, 그 앞에서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나를 부축하려 했다. 그러자 선생님이 벼락같은 소리를 질렀다. “절대 도와주지 마.” 억지로 몸을 일으켜 절뚝거리며 출발선을 넘어 들어오자 선생님이 나를 와락 끌어안으셨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철륜아!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용기와 힘을 주던 선생님의 말씀이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분명 하나님께서 선생님을 통해 베푸신 ‘소아마비의 은총’을 경험케 하신 일이리라.
그 은총의 경험은 지금도 누리고 산다. 계단 오르내리는 일은 여전히 내게 힘들다. 지하에 있는 우리 교회 예배당에 드나들 때면 교인들이 나를 양쪽에서 부축해준다. 대학교수 시절, 4층 강당에 가기 위해 계단을 오를 때면 남녀 학생 가릴 것 없이 양쪽에서 나를 부축해줬다.
양쪽에 서서 나를 부축하는 학생들 목에 내 양팔이 걸쳐지면 마치 물지게를 지고 고개를 건너듯 학생들은 힘차게 계단을 오른다. 어떨 땐 하늘로 들려 올라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매일 반복되는 이런 일상을 36년 동안 동행해준 학생들에게 감사와 사랑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중학교 교사인 아버지가 근무지를 옮길 때마다 이사를 했다. 경북 영덕군 영해에 살 때였다. 중학교 때였는데, 내 신앙의 성장기라 할 수 있다. 3년 동안 영해교회 종지기를 했다. 매일 새벽예배 전에 치는 종부터 수요집회, 목요학생집회, 토요청년집회와 주일예배에 이르기까지 일주일에 적어도 열두 번의 종을 쳐야 했다.
한 번은 ‘새벽예배 전인 오전 4시30분에 꼭 종을 쳐야 한다’는 부담 때문인지 무심코 잠에서 깨어 교회로 달려가 종을 쳤는데, 자정이었다. 뜬금없는 교회 종소리에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던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잠옷 차림으로 달려 나온 일도 있었다.
종을 치면서 늘 찬양을 불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교회 종지기 일이 교회 음악가로 키운 숨은 동력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또 하나는 학교에서 음악 선생님이 음악 공부를 독하게 시켰는데, 나에겐 큰 도움이 됐다. 선생님의 교수법은 특별했다.
일례로 선생님은 “선생님의 애인 이름이 ‘라미’씨인데, 그녀는 파도소리가 나면 온다”라는 문장을 설명하면서 “파도소리에 라미씨가 오더라”라고 외우도록 가르쳤다. 이건 곧 ‘파도솔레라미시’, 높은음자리표가 붙는 순서였다. 이런저런 방식으로 열정을 다해 가르쳐 주던 음악 선생님 덕분에 중학교 시절, 찬송가 정도는 얼추 작곡할 수 있을 정도였다.
교회 종지기를 하면서 찬양과 음악 공부에 푹 빠져 있는 시절도 잠시, 집안 사정이 너무 좋지 않아 여섯 식구가 흩어져야 했다. 어머니는 나를 서울로 보내셨다. 장애를 가진 몸으로 상경한 나에게 안식처라고는 교회 말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역경의 열매] 김철륜 <3> 연탄 배달하자 굽은 다리에 ‘기적’… 하나님 뜻 깨달아
새벽기도 후 온종일 배달…다리에 힘 붙어 “음대 진학할 생각해보라” 주위서 권유
상경하기 1년 전인 포항 영해고등학교 1학년 때 신현석 담임선생님(가운데) 등과 함께한 필자(왼쪽).혈혈단신 서울로 떠나는 날, 어머니는 먼지가 풀풀 나는 신작로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으셨다. 고등학교도 마치지 못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아들을 홀로 떠나보내야 하는 그 마음이 도무지 편치 않으셨던 거다. 어머니의 맘을 이해하면서도 내 맘속 한편으로는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듯한 설렘과 기대감도 교차했다. 그때가 1969년 5월이었다.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에 있는 서울 산정현교회. 서울에 도착해 알음알음 찾아간 교회는 흙벽돌로 지어진 예배당이었다. 교회 지하 기도실을 찾았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를 드렸는데, 무심결에 이런 기도가 터져 나왔다.
“하나님, 이 허기진 배만 채울 수 있다면 평생 저의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겠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기도를 통해 내 마음 깊은 곳에 넣어 두셨던 사명을 끌어내게 만드신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내가, 서울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딱 하나 찾았는데 연탄가게 점원이었다. 연탄 주문을 받는 일을 주로 했다. 시커먼 쪽방이 거처였지만 단잠을 잘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주문만 받다가 한 장, 두 장씩 연탄도 배달하기 시작했다. 남들은 보통 넉 장씩 배달하는데, 나는 한 장을 배달하기도 힘들었다. 새벽기도가 끝나고 배달을 시작하면 자정이 되어서야 일이 끝나기도 했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덕분에 형편이 조금씩 나아지면서 나중에는 아예 연탄가게를 차렸다. 당시 동네 사람들은 나를 ‘다리 아픈 총각’이라고 불렀다.
연탄배달을 하면서 몸은 파김치가 됐지만 주일에는 꼭 교회에서 찬양 봉사를 했다. 교회학교 교사로도 열심히 섬겼다. 아이들 집에 심방도 다녔다. 그때 심방을 하며 기록했던 심방카드가 지금도 산정현교회 기록관에 보관돼 있다.
연탄배달 일을 한 햇수는 총 11년. 그런데 7년째 되던 해로 기억한다. 내 신체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소아마비로 아픈 왼쪽 다리에 조금씩 힘이 붙는 게 아닌가. 신기했다. 리어카를 끌고 골목을 누비는 동안, 하나님께서 내 다리에 힘을 불어넣어 주신 것으로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이전까지는 왼쪽 다리를 90도 가까이 굽히고 허벅지를 짚으며 다녔다. 하지만 이제는 허리를 펴고 걸을 수 있었다. 한번은 시골 친구가 찾아와 상태가 한결 나아진 내 다리를 보며 “이쪽으로 걸어 봐, 저쪽으로 걸어 봐”하면서 깜짝 놀란 표정을 짓기도 했다. 하나님께서 왜 내게 이렇게 힘든 연탄배달을 시키셨는지 비로소 깨닫게 됐다.
회기동에는 ‘떡정거리’가 있다. 떡을 팔다가 남으면 오후에 ‘걱정거리’가 된다는 말에서 유래한 것 같다. 하지만 그때 나는 별로 걱정해본 적이 없던 것 같다. 회복케 하시고 치료해 주시고, 또 예비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당시 교회에선 “음악에 소질이 있으니 음대 진학을 생각해보면 어떻겠느냐”고 내게 권유하는 이들이 더러 있었다. 대학 진학은 생각도 못해 봤는데, 교회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진지하게 고민하며 기도했다. 그러면서 새벽기도를 마치고 틈틈이 성악 발성 교본의 일종인 ‘코르위붕겐’과 ‘콘코네’를 연습했다. 그러던 중 마음에 소원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김철륜 <4> 연탄 배달하며 성악 연습… 교회음악과 입학
교회 성가대 주제로 석사 논문 써… 복음성가 연구 위해 신학교 편입
뒷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중학교 2학년 때의 필자, 막내 남동생, 어머니 어숙녀 권사, 첫째 남동생, 아버지 김근오 안수집사, 여동생. 아버지는 1993년, 여동생은 2004년 하늘나라로 먼저 떠났다.장애에는 눈에 보이는 장애가 있다. 지체 장애를 비롯해 청각, 시각, 척추 장애 등이다. 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장애도 있다. 정신 질환이나 ‘마음의 병’ 같은 것들이다. 현대사회에서 많은 사람이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
그런데 이런 장애적 현상을 개인의 심신 차원을 넘어 일반 사회, 심지어 교회에서도 종종 확인할 수 있다. 장애적 현상이란 다름 아닌 장애인에 대한 이유 없는 차별 문제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한 피조물이다. 그런데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 종종 벌어지기도 한다.
연탄 배달을 하면서 틈틈이 성악 발성 연습을 하는 동안, 마음속에는 ‘음대에 가고 싶다’는 간절함이 샘솟았다. 구체적으로 연세대 교회음악과에 들어가고 싶었다. 시험을 준비하고 응시했다. 실기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했다.
당시 교회음악과 교수 한 분이 면접 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자네는 왜 교회음악과에 지원했는가?” “예, 저는 훌륭한 장로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장로요.” 면접관들이 파안대소했다.
필기와 실기에서 합격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신체검사를 다시 받으라는 것이었다. 청천벽력 같았다. ‘아니 언더우드 선교사가 설립한 기독교 대학에서 이런 차별이 있을 수 있나’ ‘연탄배달을 하면서 얼마나 힘들게 준비했는데, 신체검사에서 떨어지면 어쩌지.’ 온갖 생각이 머리를 복잡하게 했다. 결과는 조건부 합격이었다. ‘재학 기간 중에 신체적으로 어떤 일을 당해도 학교는 책임지지 않는다’는 각서를 썼다.
교회음악과에 입학했지만 기대 이하였다. 교회음악 커리큘럼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성악을 했는데, 일반 성악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더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같은 대학 교육대학원에 진학했다. 공부하면서 ‘교회 성가대’를 주제로 석사 논문을 쓰고 싶었다.
그런데 지도교수님으로부터 제목에 대한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교회 성가대가 어떻게 석사학위 제목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밤 11시에 교수님 자택을 찾아가 설득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허락을 받았다. 국내 최초로 교회 성가대를 주제로 한 석사 논문은 그렇게 빛을 보게 됐다. 복음성가에 대한 신학적 연구를 위해 대한신학교(안양대 전신)에 학사 편입을 했다. 연세대 교육대학원에 다닐 때처럼 주경야독했다.
내가 지금까지 한 우물을 파고 있는 교회음악의 핵심은 ‘하나님 음악’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음악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음악이 교회 음악이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문화가 오늘날 혼란스러움에 빠진 건 음악 때문이다. 교회 예배는 문화 강좌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음악은 음악 감상용으로 듣거나 공연을 위해 연주되어선 안 된다. 오직 하나님 찬양이 목적이어야 한다.
대한신학교에 편입해 공부하면서 서울 신당동 문화교회 찬양대 지휘도 맡았다. 지휘도 지휘지만 길거리 전도를 많이 했다. 대학로 근처에서 악기를 다루는 음악인들이 주된 전도 대상이었다. 음악인에게 집중한 이유가 있었다. 내가 다니는 교회에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79명까지 전도해 교회에서 전도상을 타기도 했는데, 그보다 기쁜 일은 음악인 출신 19명을 모아 오케스트라를 꾸린 것이다. 그러면서 가슴 벅찬 일을 시작하게 됐다.
***[역경의 열매] 김철륜 <5> 20여년 지휘… 힐링과 은혜 ‘찬양의 힘’ 만끽
신학대 교회음악 학과·과목 이름에서 ‘교회’ ‘신학’ 빼는 추세… 안타깝고 착잡
20대 중반 연세대 교육대학원 재학 시절의 필자. 방학을 맞아 충남 태안의 연포해수욕장 인근에서 아르바이트하던 때다.서울 신당동 문화교회에서 찬양대 지휘를 17년 이어갔다. ‘영혼의 멜로디’라는 복음성가집을 편집해서 오후 찬양예배까지 찬양을 인도하곤 했다. 어느 날, 당시 문화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허일찬 목사님 소개로 뜻밖의 일을 요청받았다. 대한신학교(안양대 전신)에 교회음악과를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
흔쾌히 승낙한 나는 커리큘럼 준비부터 학생 모집에 이르기까지 모든 준비를 도맡았다. 무엇보다 학생이 중요했다. 학과가 생기더라도 학생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궁리 끝에 고향인 강원도로 달려갔다. 이 학교 저 학교를 다니면서 학과를 소개하고 신입생을 모집했다. 30명 정원에 22명을 입학시켰다. 그리고 그들에게 혼신의 힘을 다해 교회음악을 가르쳤다. ‘반드시 교회음악인으로 키워내야 한다’는 뚜렷한 사명 때문이었다.
만 36년 동안 학생들에게 교회음악을 가르치면서 고집했던 원칙이 있었다. 반드시 교회 성가와 한국 가곡을 부르도록 한 것이다. 또 중간 수시고사와 기말고사는 모두 실기 평가로 치르도록 했다. 학과는 지금 일반음악과로 바뀌었지만 이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
교회음악을 향한 열정은 지경을 조금씩 넓혀갔다. 한국교회음악학회를 창설해 학술분과 위원장과 부회장을 맡았다. 한국기독교음악학회를 만들어 학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지금은 교회음악협회 이사를 맡고 있는데 바쁜 탓에 활동은 뜸한 편이다.
12년 전부터는 ‘노엘찬양단’을 조직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찬양단은 ‘전국구’다. 찬양단의 특징은 어디를 가든지 자비량으로 활동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연에서는 반드시 말씀과 함께하는 ‘힐링 찬양예배’를 드린다. 찬양대원들은 공연을 준비하면서, 또 공연 중에 ‘찬양의 힘’을 시시때때로 경험하곤 한다. 그 은혜와 기적 속에 찬양대원들은 힘을 얻곤 한다.
찬양예배는 자연스럽게 음악회로 발을 넓혔다. 그동안 개최한 음악회는 모두 장애인을 돕는 행사였다. 지체 장애나 중증 장애를 지닌 이들, 특히 시각장애인을 위한 개안수술비 마련을 위한 음악회를 여러 차례 열었다. 성금을 통해 개안수술을 받고 기뻐하는 이들을 볼 때마다 더할 나위 없는 보람을 느낀다.
교회음악이라는 한 우물을 파면서, 특히 찬양대 지휘를 20년 넘게 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 교회가 찬양대 지휘자를 선발하는 기준이 소위 ‘명문대 음악과’ 출신이 돼선 안 된다는 점이다. 최소한 교회음악, 즉 하나님 음악을 전공했느냐가 중요하다.
지금 많은 신학대가 음악 관련 전공과목을 개설하면서 ‘교회’나 ‘신학’ 글자를 빼고 있다. 교육부 정책의 영향일 수도 있다. 나로서는 교회음악과라는 학과 명칭이 바뀌거나 없어지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가장 안타까운 건 30년 이상 유지돼 왔던 이화여대에 종교음악과가 폐지된 것이다. 속상한 마음에 장문의 글을 써서 이대 총장에게 보내기도 했지만 소식이 없었다. 전국적으로 보면 교회음악이 혼란기에 놓여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교회음악’이 아니라 ‘음악’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신학적인 바탕이 없는 교회음악은 위험할 수밖에 없지만 교회음악은 면면히 이어져야 한다. 이렇게 한평생 내가 교회음악을 사랑하게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그보다 앞서 음악을 가까이하는 여인 또한 예비해 두셨다.
***[역경의 열매] 김철륜 <6> “하나님, 달덩이가 떴습니다” 첫눈에 반한 그녀
“차 한잔 할래요?” 만우절 고백 성공… 우여곡절 끝에 결혼해 올해로 40주년
1977년 4월 19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장로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며 반지 서약을 하고 있는 필자. 올해가 결혼 40주년이다.장애인이 결혼을 한다는 건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가진 재산이 없고 직업이 불확실할 때는 더욱 그렇다. 대학원 시절, 돈도 시간도 없는 어려운 때였다. 그런데 잠잠하던 내 마음이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한 여인을 봤을 뿐인데, 머릿속엔 온통 그녀 생각뿐이었다.
그녀는 상당한 부잣집 딸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40여년 전이었던 그때, 자가용으로 등하교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큰 욕심 없이 그녀와 차 한잔 마시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래서 기도를 시작했는데, 시골 목사님의 조언이 생각났다. “기도는 절대로 중언부언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종이에 기도를 직접 써서 하는 편이다. 그것도 길게 늘어지는 문장이 아니라 제목만 적어 놓고 집중 기도를 한다. ‘하나님, 달덩이가 떴습니다, 달덩이가.’
기도한 지 한 달 만에 응답을 주셨다. 서울 산정현교회 지하실이었다. 기도 중에 이런 음성이 들렸다. “뭘 그리 걱정하니, 만우절이 있잖니.” 무릎을 칠 만한 아이디어를 주셨다. 차 한잔 하자고 했을 때 그녀가 거절하면 ‘만우절’이니까 그냥 넘어가면 될 것 같고, 받아주면 좋은 거고, ‘밑져야 본전’이었다. ‘하나님이 장애인인 내가 거절당했을 때를 생각하셔서 마음을 위로해 주려고 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976년 4월 1일 만우절, 서울 신촌 연세대 한경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용기를 냈다.
“신애씨, 차 한잔 하실래요?” 놀랍게도 그녀는 좋다고 했다. 버스를 타고 종로로 갈 생각이었는데, 그만 의견 충돌이 생겨 광화문에서 각자 돌아섰다. 의견 충돌은 다른 게 아니었다. 그녀는 나에게 대뜸 테니스를 칠 줄 아냐고 물었다. 나는 당연히 못 한다고 말했는데, 그녀는 왜 못 하느냐고 되물었다. 내가 장애인인 걸 알면서 묻는 것 같았다. 서로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헤어진 것이다.
그날 밤 집에서 한숨도 못 잤다. 약이 오르고 분했다. 그런데 새벽기도를 하면서 이런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해보려고 시도도 하지 않니?” ‘그래, 한번 도전해보자’고 결심했다. 테니스 라켓과 공 세 개를 사서 학교 테니스장으로 갔다. 강사로 보이는 분이 내 사정을 들은 뒤 말했다. “두 다리는 붙어 있잖아.” 그러면서 테니스장 한쪽을 가리켰다. 한 사람이 외다리로 테니스를 치고 있었다. 세브란스병원 치과의사라고 했다. 한 달 뒤 그녀에게 다시 용기를 내 말했다. “테니스 한번 치실래요?”
테니스 파트너가 된 그녀가 지금의 내 아내다. 목사의 사모이기도 하고 손자손녀를 둔 할머니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다. 독일 유학 시절, 아내는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피아노 교습소를 운영했다. 그때 척추장애인인 내 여동생도 교습을 도왔다. 동생은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열심히 배워 가르칠 만한 실력을 충분히 갖췄다.
어느 날, 한 학부모가 항의를 했다. 이유인즉슨, 괴물같이 생긴 장애인에게 자식을 맡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 원장이었던 아내의 답변은 단호했다.
“여기는 피아노를 잘 가르치는 곳입니다. 그만한(여동생만큼 실력을 지닌) 선생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선생님에게 배울 수 없다면 저희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아내는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임에 틀림없었다.
***[역경의 열매] 김철륜 <7> 100일 만에 프러포즈 “세례 받고 결혼합시다”
연애하느라 먼길 출퇴근 힘든 줄도 몰라… 양가 반대 극심… 장모에게 따귀 맞기도
첫아들 돌잔치 때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집에 모인 양가 식구들. 맨 왼쪽이 아내 허신애 사모이고, 맨 오른쪽이 필자.결혼에 골인하기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처음 만났을 당시 아내는 종교가 없었다.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는 내 신앙관에 배치됐지만, 그녀를 포기할 수 없었다. 너무 좋아했기 때문이다. 연애 시절, 우리는 주로 서울 불광동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만났다.
당시 나는 파주공고에서 음악 교사로 교편을 잡고 있었기에 퇴근 시간에 맞춰 그녀가 주로 기다려주곤 했다. 나는 집이 있었던 회기동에서 불광동까지, 거기서 다시 경기도 파주 용주골까지 출근만 3시간 가까이 걸렸다. 출퇴근만 왕복 6시간이 걸렸는데, 아내와 연애할 때는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그녀와 만난 지 100일째 되는 날, 프러포즈를 했다. “신애씨! 결혼합시다.” “그럽시다.” ‘답을 너무 빨리 주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조건 3가지가 따라붙었다. “첫째, 일주일에 한 번은 꼭 함께 외출해야 해요. 둘째, 한 달에 용돈 10만원을 주세요. 셋째, 결혼에 앞서 아버지를 설득해 주세요.”
첫 번째 조건은 들어줄 만했다. 그런데 두 번째 요구는 말도 되지 않았다. 당시 은행원 초봉이 대략 4만8000원 정도이고, 교사는 5만3000원 정도였다. 그래도 “오케이”했다. ‘일단 결혼부터 하고 보자’는 심산이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요구도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군인 출신의 사위를 보고 싶어 했던 장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군대도 못 간 장애인을 사위로 맞아야 하는 상황이니 설득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오케이”했다.
나는 그녀에게 한 가지 조건만 제시했다. 세례를 받은 뒤 결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도 그러겠다고 수긍했다. 그리고 결혼에 이르기까지 험난한 여정이 시작됐다. 양가 모두 반대했다. “부잣집 딸이 가난한 집에 와서 살기 힘들다.” “교인이 아니라서 더 힘들 거다.” 우리 집의 반대 이유였다.
상대 쪽도 마찬가지였다. 장인 댁에서는 나를 만나지 못하게 하려고 딸을 아예 집에 붙잡아뒀다. 어느 날은 집에 찾아갔다가 장모에게 따귀를 맞았다. 그날 우리 집 식구들은 그녀 집이 있는 보광동에 찾아가서 한바탕 난리를 피우기도 했다. 옛날부터 우리 집은 내가 맞고 오면 식구 전체가 ‘응징’을 하곤 했다.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손찌검을 하는 거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신애씨 식구들에게 소리를 쳤다. 내 동생들도 가세했다. 내가 소리쳤다. “다들 제발 조용히 하세요. 그리고 예의를 갖추세요.” 순간 조용해졌다.
며칠 뒤, 장인 내외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장소는 서울 이태원에 있는 해밀턴호텔 커피숍이었다. 장모될 분은 내 뒷조사를 모두 마친 터였다. 우리 집 연탄가게도 다녀갔다. 그리고 나에 대해 모든 게 맘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집도 없고, 군대도 안 다녀오고, 음악을 하고, 교사이고, 교회를 다니는 것까지…. 그래서 결혼은 안 된다고 했다.
나는 모두 맞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얘기했다. “사람이 사는 이유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아닌가요. 잘은 모르겠지만 신애씨가 나와 결혼하지 않으면 분명 행복하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먼저 일어났다. 그날 저녁, 장인 댁에서는 긴급 가족회의가 열렸다.
***[역경의 열매] 김철륜 <8> “나도 교회 다녀, 너 잘난 체하지 마” 상사의 폭언
술·담배·인사문제 등 의견 충돌 잦아… 기도 후 독일 유학길 올라 공부 몰두
독일 유학 시절이었던 1985년, 남편을 보기 위해 한국에서 온 아내와 함께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성을 방문한 필자.“그놈, 옥에 티가 너무 크더라.”
우리 집 식구들이 한바탕 난리를 피우고 돌아간 뒤, 장인 되실 분이 가족회의에서 내뱉은 말이었다. 나중에 그 얘기를 전해 들은 나는 쾌재를 불렀다. 왜냐하면 나를 ‘옥’으로 봐주셨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몇 번의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우리는 만난 지 1년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장모님은 “석 달도 못 채우고 친정으로 돌아올 것”이라며 혼수도 별로 해주시지 않았다. 신혼여행지는 춘천. 돈을 아끼기 위해 장인의 차를 빌려 다녀왔다. 어느덧 올해로 결혼 40주년을 맞았지만, 아내는 여전히 친정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
대한신학교(안양대 전신)에서 교회음악과를 맡아 근무하던 중 마음이 힘들 때가 있었다. 당시 학교 내 높은 직책에 있었던 K 때문이었다. 성격도 괄괄하고 다혈질인 그는 술 담배에 자유로웠다. 그는 “신학교 외에 일반학부 학생들도 배려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신학교에 재떨이까지 등장했다. 어느 날, 그가 나를 부르더니 교회음악과 강사 한 사람을 추천했다. 이력서를 살펴보니, 교회음악을 가르치기에는 부적절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조심스럽게 의견을 전달했다. “다른 사람을 추천해주시면 어떨까요.”
곧바로 폭언이 날아왔다. “까라면 까는 거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나도 교회 다니는 사람이야, 당신만 잘난 체하지 마.”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자 그는 교수들이 모두 모여 있는 식당에서 피우던 담배를 발로 비벼 끄면서 한마디 던졌다.
“야 김철륜! 내가 너를 이 담배꽁초 비벼 밟듯이 뭉개 주겠어.”
황당했다. 하지만 학교에서 내 목숨이 그에게 달려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를 피할 수 있는 길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속에 ‘유학을 떠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걱정 말고 다녀오라고 격려해줬다. 당시 아이가 둘이었다. 첫째는 초등학교에 입학한 상태였다. 마침 독일 레겐스부르크 대학에서 오르간을 전공한 선배에게 유학에 대한 정보를 얻고, 그 대학으로부터 초청장도 받았다.
1984년 9월, 독일행 비행기를 탔다. 알래스카를 경유해 22시간이나 걸려 현지에 도착했을 때는 앞이 깜깜했다. 대학에서 기숙사를 배정받았는데, 4층이었다. 엘리베이터 없이 며칠 오르내리다 그만 무릎 관절에 탈이 났다. 학교 학생처 직원에게 사정을 얘기했더니 깜짝 놀라면서 “내 잘못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왜 사전에 장애인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면서 장애인 전용 기숙사로 옮겨줬다.
그곳에서 나의 독일어 어학 교사 볼프강을 만났다. 법률학을 전공한 볼프강은 전신이 불편한 장애인이었지만, 나에겐 최고의 어학 강사였다. 1년 만에 독일어 과정 최고급까지 마쳤다. 중급까지만 하면 입학이 가능했지만 공부가 재미있어서 계속했다. 독일어로 시까지 써서 2권이나 냈다. 돈이 필요할 때면 번화한 거리로 나가 큰 소리로 읽으면서 권당 9마르크(약 3000원)에 시집을 팔기도 했다.
대학원 생활은 매일 오전 9시 도서관에 나가 밤 9시 기숙사로 돌아오는 강행군이었다. 그러던 중 파사우대학교에 있는 음악교육과 교수 허락으로 그곳에서 박사 논문 쓸 기회를 얻었다. 잘 풀리는 것 같았다.
***[역경의 열매] 김철륜 <9> 첫 ‘루터 찬송가’ 주제 논문으로 박사학위
親가톨릭 교수 반대로 논문 통과 좌절… 신학과로 옮겨 다시 시작 총 20년 걸려
2010년 한국을 방문한 독일 레겐스부르크대 슈바르츠 교수(왼쪽) 내외와 함께한 필자.‘루터의 찬송에 대하여’가 박사 논문 제목이었다. 지도교수의 최종 허락을 받아 논문을 제출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교수 한 사람의 반대로 박사 논문 통과가 무산되고 말았다. 당시 독일 대학에서는 소속 학부 교수 가운데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논문이 통과되지 않았다. 자초지종을 파악해 보니 반대 이유가 황당했다.
파사우는 독일 내에서도 가톨릭 정서가 강한 지역이다. 과거 이 지역에서 종교개혁자인 마르틴 루터의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을 전파했다는 이유로 화형당한 곳이기도 하다.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는 지역의 대학에서 루터에 관한 논문을 통과시킬 수 없다는 게 내 논문 통과를 반대한 교수의 논리였다.
깊은 낙심에 빠졌다. 그때 나를 건져준 이는 다름 아닌 레겐스부르크대의 슈바르츠 교수였다. 그는 나에게 루터 찬송을 주제로 논문을 다시 쓰게끔 허락했다. 대신 신학과에서 다시 시작했다. 독일 남부 지역 대학에서는 같은 전공으로는 타 대학에서도 박사 과정을 밟을 수 없었다.
신학과 공부는 여러 모로 힘든 결정이었지만 모든 과정을 마쳤다. 500쪽 분량의 논문을 썼는데, 지도교수는 300쪽가량을 걷어냈다. 그리고 한국교회에서 나타나는 루터의 영향과 루터 찬송에 대한 내용을 첨부하라고 조언했다.
논문이 통과된 후 구술시험을 앞두고 있었는데, 이전보다 더 까다로워져서 걱정이 앞섰다. 논문 내용에 대한 발표를 먼저 한 다음, 발표장 안에 있는 교수와 청중의 질문에 모두 답변해야 하는 시험이었기 때문이다. 간간이 유머를 섞어가며 간신히 마쳤다. 청중이 모두 퇴장한 뒤에 심사를 맡은 교수들의 판정이 이어졌다. “합격!”
이런 과정이 이뤄지기까지 무려 20년이 걸렸다. 1984년에 시작해서 2005년에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그사이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논문 준비를 했기 때문이다. 그 긴 세월 동안 루터의 찬송을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을 받을 수 있었던 건 무엇보다도 슈바르츠 교수 덕분이었다. 지금 80대에 접어든 그가 생존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박사 학위를 받았을 당시만 해도 루터 찬송을 주제로 발표한 논문은 처음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논문 심사장 바깥으로 나오자 발표를 기다리고 있던 한국 유학생들이 큰 박수로 축하해줬다. 교회음악을 전공한 학자로서 꼭 연구하고 싶었던 루터의 찬송을 깊이 있게 연구할 수 있도록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루터는 총 36곡의 찬송을 만들었다. 이들 곡 가운데 유일하게 한국 찬송가에 실린 곡은 ‘내 주는 강한 성이요(585장)’이다. 이 곡은 1700년대 중반 ‘근대 음악의 창시자’로 불리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1685∼1750)가 지금과 같은 형태로 편곡한 것이다.
이 찬송은 1529년 루터가 종교재판을 받기 전날 밤, 그의 추종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기 위해 지은 곡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시 46:1)’라는 시편 구절에서 영감을 받았다. 한국 찬송가에 실린 뒤로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빛을 발했다. 당시 신사참배와 무신론 사상을 거부하면서 ‘일사각오’의 믿음을 고수하고자 했던 믿음의 선배들이 목숨을 걸고 이 찬송을 불렀다.
***[역경의 열매] 김철륜 교수 <10> “목사 하려면 이혼해” 아내 반대 부딪혀
10년 만에 아내 마음 문 열고 OK… 2005년 예안교회 창립 예배
지난 7월 말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세실아트홀에서 예안교회 주일예배를 마친 뒤 성도들과 함께한 필자(앞줄 왼쪽 두 번째).오래전부터 목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삶의 현장은 좀처럼 목회의 길로 인도해주지 않았다. 대학원을 졸업한 뒤 서울 광나루에 있는 장로회신학대학원에 원서를 넣었다. 그러나 마음속 한쪽에선 청지기적 사명을 감당하기엔 나에게 흠결이 많다는 생각이 가시지 않았다. 학비 마련도 큰 문제였다.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신학에 대한 관심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신학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생겼다. 대한신학교(안양대 전신)에서 교회음악과를 창설하는 멤버로 참여한 뒤 교수로 바쁘게 활동하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복음성가에 대한 견해 차이로 학생과 논쟁이 벌어졌다. 학생은 나름 많은 정보와 지식으로 무장해 설명하고 반박했다. 그때 나는 또다시 깨달았다. ‘신학적 배경 없이 교회음악 이론을 논하는 건 무용지물이구나.’
이 일을 겪고 난 뒤 대한신학교 야간 신학교 과정에 학사편입을 했다. 교수가 교수한테 배운다는 것이 쉽진 않았다. 하지만 신학 공부는 훗날 ‘교회음악 교육학’, ‘교회찬양학 개론’ 같은 책을 출판하는 데 큰 도움이 됐음은 물론이다.
문제는 목사 안수를 받는 일이었다. 아내의 반대가 여간 심한 게 아니었다. 전도사와 강도사까지는 잘 넘어갔는데, 목사 안수만큼은 결코 안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교수 부인이면 됐지, 목사 사모로 살아갈 자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자신은 사모 깜냥이 안 된다는 거였다.
이런저런 이유는 또 있었다. 화려한 원색 계통의 옷을 즐겨 입는 자신에 대해 교인들의 시선이 곱지 않을뿐더러 자신은 마음껏 웃고 떠드는 것이 좋다고 했다. 목사 사모가 되는 순간, 여러 가지 제약이 자신의 삶을 망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꼭 목사를 하려면 이혼을 하자고 날뛰었다. 할 수 없이 기다리기로 했다.
꼭 10년을 기다렸다. 아내에게 의사를 물었더니 ‘오케이’했다. 마침 목사고시가 있었고, 응시했다. 2003년 10월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내의 마음 문이 열린 게 신기하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선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2005년 예안교회를 개척했다. 교회 명칭은 ‘예수님의 눈으로’라는 뜻을 담았다. 찬양을 중심으로 사역하는 특수목적 교회다. 7월 첫째 주에 3명이 창립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아내는 한 달이 지난 뒤에야 아들 손에 이끌려 예배에 참석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목사 사모로서 예배당에 서는 게 엄청난 부담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설교 중간에 아내가 사라졌다. 예배를 마친 뒤 집으로 돌아가던 차 안에서 아내 전화를 받았다. 어디냐고 물었더니 아직 교회라고 했다. 차를 돌려 교회로 향했는데, 아내는 교회 여자 화장실에 있었다. 아내는 무언가 모를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아내의 바지는 다 젖어 있었다. 가방으로 아내의 바지를 가린 채 차에 올랐다.
집으로 오는 내내 생각했다. ‘남편이 목사가 되어서 목회를 하는 게 아내를 이토록 힘들게 하는 일이던가.’ 그런데 이 일이 있은 후, 아내는 예배에 어려움 없이 참석하기 시작했다. 신기했다. 아내는 딸의 권유로 서울 온누리교회에서 하는 사모학교에 등록했다. 몇 개월에 걸친 교육을 받으며 사모의 사명과 역할에 대해 배웠다. 나는 아내가 수료증을 받은 뒤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됐다.
***[역경의 열매] 김철륜 <11> 노엘찬양단 창단… 12년간 자비량으로 봉사
꿈에서 “왜 찬양사역 하지 않느냐” 음성… 전문 음악인들과 병원·고아원 등서 공연
지난해 봄 경기도 포천의 한 포병부대 교회에서 찬양예배를 드린 뒤 장병들과 함께한 노엘찬양단원들. 뒤에서 둘째 줄 왼쪽 세 번째가 필자다.2005년 5월쯤이었다.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는 비행기 안이었다. 피곤에 지쳐 깊은 잠에 빠졌는데, 꿈속에서 이런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왜 너는 찬양사역을 하지 않느냐?” 내가 대답했다. “예, 찬양사역을 하겠습니다.” 잠에서 깼을 때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찬양사역을 하라고 요청하신 거구나.’
이 경험은 ‘노엘찬양단’을 만든 중요한 계기가 됐다. 찬양단을 만들기로 하자마자 테너와 소프라노, 피아니스트 등 전문 음악인이 하나둘 합류하기 시작했다. 20명에 달했다. 모두 다 찬양사역에 집중하는 교회 사역 방향에 공감한 이들이었다. 이들 찬양대원은 자연스럽게 예안교회 창립 주역이 됐다.
노엘찬양단에는 6가지 불문율이 있다. 첫째, 이단 등 불건전한 단체를 빼고 부르는 교회나 단체는 어디든지 찾아간다. 둘째, 자비량으로 봉사하며 사례비를 받지 않는다. 셋째, 찬양곡만 찬양한다. 오로지 하나님만 높인다. 넷째, 반드시 연주복을 갖춰 입고 무대에 선다. 다섯째, 가능한 한 식사대접을 받지 않는다. 여섯째, 반드시 말씀과 함께하는 ‘힐링 찬양예배’를 주관한다.
이런 원칙을 품고 지난 12년 동안 달려 왔다. 강원도 산골 교회에서 도시 대형교회들에 이르기까지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다. 어떤 때는 찬양단원 수보다 적은 교인이 있는 교회에서 찬양예배를 드렸다. 병원과 고아원, 양로원도 마다하지 않았다.
충남 대천에 있는 한 교회에 들렀을 때였다. 클래식 음악인들이 찬양한다고 하니까 성도들이 그다지 반기는 기색이 아니었다. 하지만 찬양과 성경 메시지가 이어지면서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찬양예배를 마칠 때 즈음에는 은혜의 공동체를 경험했다. 어떤 할머니 성도는 거칠고 투박한 손을 내밀어 쓰다듬어 주시며 고마움을 표했다. 주님의 능력과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또 하나 있다. 2년 전 어느 봄날, 전남 여수 애양원에서 드린 찬양예배였다.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순교자이신 손양원 목사님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곳엔 30년 넘게 갈라진 채 예배를 드리던 두 교회가 있었다. 그런데 노엘찬양단이 온 날, 양 교회 성도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찬양예배를 드렸다. 노엘찬양단이 두 교회를 하나로 모이게 만든 메신저가 됐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단순한 음악회가 아닌, 찬양예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크나큰 기쁨이다.
교회음악 전문가 입장에서 예배 찬송에 관한 나의 지론은 확고하다. 예배 찬송은 그 대상이 반드시 하나님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 찬양을 서서히 잃어버리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준비 찬송’처럼 예배를 준비하기 위한 도구로 찬송을 부르거나 짧은 예배시간에 쫓겨 4절까지 있는 찬송을 “1절, 4절만 부릅시다”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예배와 찬송의 본질에서 어긋난 행태다.
이렇게 변질된 데는 예배 초점을 하나님이 아닌 인간에게 맞춘 탓이다. 한마디로 화살이 과녁에서 벗어난 것이다. 한국교회에서 빚어지는 분쟁과 갈등의 중심을 들여다보면 하나님보다는 인간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발생하는 일이 대다수 아닌가. 그런 단면들이 가장 중요한 예배 찬송에까지 나타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역경의 열매] 김철륜 <12·끝> 이른 비처럼, 때론 늦은 비처럼 베푸신 복에 감사
장애에도 소망 품은 건 주 사랑 덕분… 6대에 걸친 믿음의 족보도 소중한 축복
7년 전 4대가 한자리에 모여 가족사진을 남겼다. 앞줄 왼쪽 두 번째부터 필자의 아내 허신애 사모와 어머니 어숙녀 권사, 필자.“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놀라운 주님의 사랑과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 역사하심이 성도들의 소망과 사업 위에….”
축도할 때마다 이 문구 뒤에 반드시 덧붙이는 축원(祝願)이 있다. “우리 내면 저 밑바닥에 있는 외로움까지도 함께해 달라”는 내용이다. 나 자신이 장애로 인해 깊은 외로움을 경험했을 뿐 아니라 외로움에 지쳐 삶을 마감하는 이들이 요즘 들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조금만 위로해주는 이들이 그들 곁에 있었더라면 극단적 선택은 피했을 텐데…. 유명 인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과 더불어 외로운 이들을 보듬어야 한다는 각오를 다지게 만든다.
지난 내 인생을 돌아보면 부족할 뿐이다. 그다지 내세울 것 없는, 부족하고 부끄러운 삶이지만 이런 나를 통해서도 위로를 얻는 이들이 있길 바란다. 소아마비로 한평생 살아오면서 차별과 불이익을 당하고, 남모를 고통을 겪으면서도 소망을 잃지 않았던 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찬양 덕분이었다.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이른 비처럼, 때로는 늦은 비처럼 크고 작은 복을 베풀어주셨다. 가족을 향한 복도 그 가운데 하나다. 우리 가족은 증조할머니부터 손자 손녀에 이르기까지 6대에 걸친 믿음의 족보를 써 내려가고 있다.
우리 자녀들은 모두 유아 세례를 받았다. 손자 손녀들은 할아버지인 내가 직접 세례를 베풀었다. 며느리 또한 내가 세례를 베푼 뒤 아들과 결혼식을 치르게 했다. 아내 또한 세례를 받은 뒤 결혼식을 올렸다. 몇 년 전 홀로 남으신 어머니와 자녀들 가족까지 4대가 한데 모여 기념사진을 찍을 때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이 샘솟았다. ‘아, 하나님께서는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주시는 분이구나.’
동시에 교회음악을 알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신 은혜도 하나님이 주신 열매가 아닐 수 없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딱 한마디만 하자면, 찬송에 있어서도 본질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목회를 하는 목회자와 찬양대에 서는 지휘자와 찬양대원들, 나아가 교회 성도들에 이르기까지 이것만은 명심해야 한다. ‘교회음악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악이다.’
지난해 말부터 일주일에 세 차례 꼬박꼬박 들러야 하는 곳이 있다. 병원 신장 투석실이다. 한번 갈 때마다 4시간씩 보낸다. 누군가 “다시 역경 속을 거닐고 있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얘기하고 싶다. “하나님께서 잠시 휴식의 시간을 주신 겁니다.”
어렸을 때부터 수많은 병치레를 했다. 나를 향한 부모님의 헌신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내게 아버지는 희망의 전령사였다. “베토벤은 귀머거리인데도…”라며 장애를 지닌 아들에게 틈만 나면 “할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아주셨다. 나를 향한 어머니의 헌신은 기도를 빼놓고 설명할 길이 없다. 기도의 힘으로 오늘도 숨 쉬고 있음을 고백한다. “당신의 아픈 다리와 성한 내 다리를 바꾸고 싶다”고 스스럼없이 내뱉는 아내의 말엔 진심이 배어 있다. 그리고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따르는 자녀들과 손주들, 나를 스승이라고 따르는 제자들….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한 역경 자체가 열매이리라. 그렇기에 오늘도 나의 ‘찬양 인생’은 멈추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