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우선 그가 속한 가문인 '시마즈가' 는 대대로 전봉 경험이 단 한번도 없던 최고의 무장 명문가입니다.
그리하여 시마즈가는 당대의 다른 다이묘들보다 압도적이라 할 수 있는 토착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 전봉 : 제후의 관할영지를 다른 곳으로 옮김
즉 영주(제후)의 입장에서는 기존 영지에서 쌓아왔던 지역민들의 유대, 행정 이점이 모두 무용화된다.
중앙정부에서는 유력 제후들의 권한이 커져가는 걸 견제하기 위해 때로는 이들을 전봉시키기도 했다.
(ex.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관할지를 미카와 국에서 관동 지방으로 이전)
그리고 그 시마즈가가 지배한 사츠마 지방은 일본의 중앙정부와 매우 거리가 멀고 밀무역이 성행했으며
대외적으로 알려진 수많은 왜구 일파들의 근거지로 존재한 사실처럼, 상무적 기질이 유독 다분했습니다.
이에 기반하여 시마즈가는 개개인의 전투력과 충성도가 최고인 사병집단 '사츠마 군' 을 보유했습니다.
거기에 더해 시마즈가는 '츠리노부세(釣り野伏せ)' 라는 유인매복 전법과 철포 무기사용법을 발전시켰습니다.
곧이어 이토와 사가라, 아소, 류조지, 오토모 등의 다이묘 가문들을 제압해가면서 규슈의 패자로 올라섭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그 시마즈가의 중심 무장으로서 규슈 정벌에 앞장섰습니다. 대표적인 당시의 전적으로는
1572년, 숙적인 이토 요시스케의 3천의 군사를 300명에 불과한 병사들로 궤멸시켰던 '키사하가라의 전투' 와
1578년, 당시 북규슈의 최강자 오토모 소린의 중심전력을 증발시킨 '미미카와 전투' 를 꼽아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규슈의 통일을 앞둔 시점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규슈 전역에 최소 20만 이상의 대군을 투입합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분전했지만 중과부적 상황을 극복할 수 없었고, 결국 당주인 형 시마즈 요시히사를 따라
시마즈 요시히로도 역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굴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당연하게 임진왜란에 참전하게 됩니다. 원래는 시마즈 요시히사가 참전하라는 압박을 받았으나
병을 핑계로 나서지 않았기에 시마즈 요시히로가 당주의 대리자격으로 사츠마 군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에서 이렇다 할 전공은 없었으며, 당시 아들인 히사야스를 조선에서 풍토병으로 잃게 됩니다.
2차 진주성전투 이후로 일본이 남해안 일대에 왜성들을 쌓고서는 일부 병력만 남겨놓고 철수함에 따라
시마즈 요시히로와 그가 이끄는 사츠마 군도 일본에 돌아옵니다.
* 2차 진주성 전투(음력 1593년 7월)가 시마즈 하시야스의 사망(음력 1593년 9월)보다 더 이전입니다.
서술순서 때문에 헷갈리는 일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모두가 아시는대로 고니시와 심유경의 외교 사기극이 벌어짐에 따라 정유재란이 발발합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칠천량해전에서부터 도도 다카토라와 함께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을 궤멸하더니
그 여세를 몰아 곧바로 조명연합군이 지키던 남원성을 함락, 호남의 중심지인 전주성도 함락시킵니다.
그러나 이순신의 명량해전 이후 보급난을 다시 실감한 일본군들이 전체적으로 남해안 일대로 이동
시마즈 요시히로도 역시 기존에 쌓아두었던 왜성 중 하나인 사천성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후 본국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함에 따라 전 일본군에게 철수 명령이 떨어지게 됩니다.
이를 알게 된 조명연합군 연시 사로병진 작전을 전개하며 남해안에 갇힌 일본 전군을 압박했습니다.
그러나 시마즈 요시히로는 사천성에서 휘하의 병력 7천으로 동일원과 정기룡이 이끄는 4만의 조명연합군을 궤멸
사로병진 작전을 무산시키고 명나라로부터 '귀신 시마즈(鬼石曼子)' 라 불리우며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후 그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요청에 따라 타치바나 무네시게, 소 요시토시, 데라자와 마사시게 등의 장수들과
수백여척의 대규모 연합함대를 구성, 순천 예교성에 갇힌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원하고자 노량해협으로 진입하는데...
이 영화를 본 모두가 아는 바처럼 어쩌면 일생에서 이와 같은 굴욕은 없었을지도 모를 엄청난 패배를 겪습니다.
소위 말해 걍 영혼까지 탈탈 털립니다. 『명 신종 실록(明神宗實錄)』 과 『정한위략(征韓偉略)』 의 기록검증을 통해
제일 큰 대장선이 격침당하고, 중형 전투선(세키부네)으로 갈아타가며 목숨을 겨우 겨우 부지할 정도로요.
그러나 그렇다고 이순신에게 패배한 '일본장수 1' 로만 시마즈 요시히로의 평가를 단순히 끝마쳐서는 안됩니다.
마지막으로 무장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증명할 사건이 그에게 또다시 펼쳐지거든요.
그 후 그는 차후 일본의 운명을 두고 동서로 격돌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측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그가 서군측으로 참여한 이유를 떠나서... 어찌되었든 간에 결국은 실제 역사대로 서군이 패배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마즈 요시히로는 최소 9만명의 포위를 휘하 병사 1,500명과 함께 맞닥뜨린 최악의 상황이었죠.
이에 시마즈 요시히로는 할복을 결심하지만 조카인 토요히사의 만류로 결국 이들을 돌파하기로 결정합니다.
문제는 퇴로가 끊겼고 후퇴할 곳은 후방의 험한 산맥이었습니다. 다만 이곳은 이동하기에는 너무 힘들었으며
서군의 지휘부에게 전투 출전을 볼모로 사로잡힌 자신들의 식솔들도 오사카 성을 거쳐서 구해야만 했죠.
이에 시마즈군은 적진을 돌파해서 앞으로 퇴각한다는 결정을 합니다. 적이 대부분 앞쪽 진영에 밀집되어 있기에
퇴각로의 병력들이 한산하다는 점이 유리한 점이었죠. 그렇다 하여도 이 작전의 성공 확률은 극히 미미했지만...
시마즈 군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걸 성공합니다.
여기서 시마즈 요시히로는 시마즈가 고유의 전술인 '스테가마리(捨て奸)' 를 활용합니다.
본진이 도주하는 동안 후미에 남은 유인부대의 사수들이 추격해 오는 적 부대의 지휘관을 저격하고,
저격 후 사수는 총 혹은 화살을 버리고 적진에 돌입, 백병전으로 시간을 버는(이후 반복) 전술입니다.
당연한 소리지만 이 스테가마리라는 전술은 시간 벌기로 투입된 유인부대의 전멸이 확실하기에
인망 혹은 덕성이 없는 지휘관은 실제 전투에서는 절대로 쓸 생각조차 할 수가 없는 전술입니다.
이것만 보아도 시마즈 요시히로가 휘하 사병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죠.
또한 패전을 인지하고 감행한 퇴각전이었음에도 불구, 적에게 입혔던 타격 또한 컸습니다.
포위망이 뚫리는 과정에서 동군 전체의 전열이 무너졌고, 백병전 과정에서 사병들의 피해도 컸습니다.
'동국무쌍' 이라 불리는 당대 최고의 용장 혼다 타다카츠도 추격 과정에서 집중공격을 받다 낙마했으며
이이 나오마사와 그의 사위인 마츠다이라 타다요시도 저격당해서 사경을 헤매이기도 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본진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 매우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시마즈 요시히로, 혹은 그의 가솔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시마즈 요시히로, 이번에 뜻하지 않게 적이 되어 싸우다가
지금 막 (당신의)진영 앞을 지나 본국 사츠마로 돌아갑니다.
내 마음에 대해선 훗날 바로 말씀 올릴 것이외다."
면전(?) 능욕 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
물론 시마즈 요시히로도 그 과정을 겪으며 조카 토요히사와 가신 쵸주인 모리아츠를 잃었습니다.
또한 휘하 사병도 80명밖에 남지 않았을 정도로 포위망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많은 희생을 치뤘지요.
그러나 본인은 결국 목표로 삼았던 생존에 성공하였고, 이후 오사카 성에서 식솔들을 구출한 이후
무사히 자신들의 근거지인 사츠마로 귀환합니다. 그리고 이는 '시마즈의 퇴각' 이라 불리게 됩니다.
* 노량해전의 양상도 이와 비슷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엄연히 다릅니다.
노량해전은 동일한 전력으로 맞붙어서 전술적으로 완전히 (변명의 여지 없이) 일본측이 패배한 거고
시마즈의 퇴각은 전력상 패배를 확정받은 상황이나 마찬가지였음에도, 기적적인 전술적 성과를 낸 것
그렇기에 지휘능력의 긍정적 요소로 바라봐야 되는 사안은 '시마즈의 퇴각' 이 더 적합하다는 것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시마즈가의 공격 계획을 세우지만 '시마즈의 퇴각' 사건 때의 영향으로
시마즈가가 보유한 사병인 '사츠마 군' 의 전투력을 떠올리게 되면서 부담스러움을 느끼게 되었고
전쟁 장기화에 따른 각지 다이묘들의 불만도 고려함에 따라 곧바로 이를 철회했다고 합니다.
또 도쿠가와 가문은 전봉 없이 그대로 시마즈가가 사츠마 지방을 다스리게 했으며
이후 당주인 시마즈 요시히사의 아들이 없어서 요시히로의 아들 타다츠네가 시마즈가의 당주가 되고
시마즈가의 당주는 그 이후부터 시마즈 요시히로의 직계후손들이 계승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계승된 시마즈 가문은 훗날 막부세력에 반기를 들며 황정 복고와 유신을 선도했고
오늘날에도 일본의 정 · 재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유력가문으로서 그 영향이 크다고 합니다.
P.S ) 개인적으로 영화 노량에서 시마즈 요시히로와 관련된 역사적 배경이나 서사들을 좀 더 풀어줬다면 어땠을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장수를 압도적으로 완파한 이순신 장군의 역사적 위업도 그 효과가 살 수 있는 것이고
관객들은 '시마즈 요시히로' 란 캐릭터에 대해 좀 더 몰입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기고...
일본의 (자국 전국시대를 다룬)전략게임에서도 시마즈 요시히로가
차지하는 위상이 능력치로 어떠한지를 보여주며 이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