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닿으려는 인간들의 종교적인 열심, 우리의 이름을 하늘에 닿게 하기 위한 바벨성을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시고 언어를 혼잡케 하셨습니다. 오늘날 이 땅의 교회들이 다들 다른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늘의 절대 언어는 성도들만 알아들으니까요. 그래서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고 하셨나요.
걸어서 하늘까지 올라가려는 사다리를 무너뜨린 후에 하늘로부터 동아줄이 내려오는 것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날마다 가면을 바꿔쓰고 나타나는 가장무도회처럼 우리 안에 있는 수많은 애벌레 자아들이 계속 튀어나오는 게 우리의 육이에요. 영화 ‘완벽한 타인’을 보면 사건들이 모두 조작이 되요 실체가 없는 현실, 조작된 욕망으로 살아가는 인간 현실을 잘 보여줍니다. 종교도 이와 같습니다. 보이는 현상계가 각자의 욕망에 의해 그 실체를 잃어버린 가상현실인 것을 감추기 위해서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이 도덕과 윤리, 법체계, 종교입니다. 바울은 이런 것들을 신랄하게 고발을 합니다.
(로마서 1장)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내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나만 쏙 빼면 안 돼요.
‘완벽한 타인’에 보면 동성애를 하는 남자가 나오는데, 나는 동성애 하지 않는다고 상관없다고 하지 마세요. 모든 인간은 동성애자입니다. 씨 가진 신랑은 예수 한분이기 때문에 사람들끼리의 사랑은 모두 동성애입니다. 이땅을 다녀가신 그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들은 로마서 말씀처럼 이미 동성애로 심판을 받은 거에요
디모데전서에 보면 여자가 거룩함에 거하여 해산을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잖아요. 그럼 해산을 못하면 구원을 얻지 못하나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여자입니다. 남자는 예수 한 분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어린양의 신부라고 해요. 계시록에 보면 성도를 가리켜서 이들은 여자와 더불어 자신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라고 하잖아요. 이런 성경 구절 때문에 수도원 운동이 있었고, 결혼을 하지 않고 신부와 수녀가 되곤 했는데 성경의 의미는 그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신랑과 연합된 관계 안에서만 존재이고 생명 있는 자입니다.
이 세상에는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없습니다. 세상 좀 살아보신 분들은 아실 거예요. 참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질 때만 사랑을 알게 됩니다. 펌프에 마중물을 부어야 물이 올라오듯이 원래 우리에게는 사랑 자체가 없습니다. 믿음도 소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지나 결단을 믿음으로 착각하고 막연하게 내일이라는 희망에 속아서 살아갈 뿐입니다. 이런 우리의 희망을 깨고 부수고 들어오는 것이 하늘 소망입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욕정과 이기심, 집착, 상대를 향한 정욕 자기확장을 위한 투사, 이런 것들을 부수고 들어오는 것이 하나님의 믿음이며 진짜 사랑입니다.
세상은 전체가 가면무도회입니다. 바울 자신에게는 그런 세상으로부터 구원받을 자격이나 능력이 전혀 없었음에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다 이루심과 계시로 말미암아 복음이 작동하는 새로운 세계, 새로운 현실로 옮겨진 것이 ‘그리스도 안’이라는 세상에 감추어진 영역 곧 새 창조의 세계인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복음에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구원이란 그렇게 본의 아니게 이루어진 것에 대해 눈이 열리는 거에요 그리고 그것은 절대 되돌릴 수 없는 현실입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주기도문의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말은 단순히 우리 가 지은 죄를 사해달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 약속하신 그 빚 갚아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빚을 지고 계십니다. 창세전 약속의 빚입니다. 우리가 있기도 전 우리의 어떤 행위가 있기 이전에 하나님의 약속이 먼저 있었는데 그게 아들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들을 완성하시겠다는 에베소서 1장에 나오는 그 약속이에요 그래서 그 약속대로 성자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언약의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십자가의 다 이루심의 그 약속이 믿음 안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몇 가지 윤리 도덕적인 죄가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안에 이미 죄가 있었고 그 죄는 아들의 피로 이미 속량을 받은 것이었음을 알게 됨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담대히 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셨던 약속이 지금 이루어지게 해 주시옵소서 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이것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주기도문의 내용입니다. 그 빚 갚아주시라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 죄를 사해달라는 단어가 오페일레마타인 거에요 빚 갚아 주세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를 피로 덮으심으로 인해 우리가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 꿇게 되고, 우리에게 그 약속이 실행됨을 알게 되고, 내 안에 씨, 곧 약속의 말씀이 있어서 복음의 현실을 살게 되면 나도 내 이웃에게 복음의 빚을 진 자가 됩니다. 그렇게 교회는 세상에 복음의 빚을 갚고 있는 겁니다. 그게 교회의 본무란 말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존재해야 할 이유는 그것입니다.
이것을 프로슈코마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원하는 것 달라고 조르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기도의 본질은 이것입니다. 복음에 빚진 자에 의해 복음이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기도입니다. 성령께서 탄식하면서 우리 대신 기도하신다는 말씀은 우리는 기도가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약속을 알아야 구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있기도 전에 있었던 그 약속이 무엇인지 모르니까 자꾸 엉뚱한 것만 구하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시고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다 주신다고 하신 거에요 주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약속의 하나님을 안다는 뜻이니까
하나님은 자기 약속에만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자기 약속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만 사랑하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기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뜻이지 모든 세상을 다 사랑하신다는 말이 아니에요 만인구원설 그런 거 없단 말입니다. 우리로서는 굉장히 섭섭한 얘기지만 하나님은 우리 행복한 인생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고 행복해지려고 하지 마세요. 인생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하나에요 하나님 자신을 주신 복, 아들 예수 안에 있는 영생 그 복 외엔 없습니다. 삼중 축복 오중 축복 그런 거 전부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던 마귀가 준다고 했던 거에요. 젊은 사람들에게 말하기 좀 그렇지만 모든 인생은 실패로 끝납니다. 우리가 그렇게도 원하던 돈, 명예, 권력, 건강, 인기 이 모든 것들 죽음 앞에서 무용지물입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해요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공평한 겁니다. 옛날 분들이 그랬잖아요 죽은 사람이 입는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고.
우리에겐 세상에는 없는 진짜 복이 있습니다. ‘생명’이에요. 하늘의 생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있기 전부터 이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 안에 있게 된 그 복음의 현실을 살아낸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날마다 죽는다고 한 거에요 너희를 향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한다면서 죽음과 생명에 대해 다시 정의를 해준 게 부활의 장이라고 하는 고린도 전서 15장이란 말입니다.(고전15:31) 그 죽음을 이긴 사랑 안에 있었기에 교통수단도 없던 그 시절에 아시아에서 유럽까지의 먼 길을 헐벗고 굶으면서 도시의 위험, 동족의 위험, 광야의 위험 등을 무릅쓰고 복음(생명)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바울처럼 그 생명의 가치를 안다면 그렇게도 욕망했던 것들 가지고 싶은 것들로부터 자유할 수 있게 됩니다. 바울은 가장 귀히 여겼던 것들을 배설물로 알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로는 필요한 것들도 채워주시고, 위험한 것들도 사전에 막아 주시고 힘들 때 토닥여 주시고 하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만 바울은 자신을 세상의 찌끼처럼 취급을 받았고 포로로 잡힌 패잔병처럼 미말에 끌려갔다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전쟁의 패잔병들을 옆구리를 쇠꼬챙이로 꿰어서 끌고 갔습니다. 바울이 말한 자기에게 사단의 가시가 있다고 한 게 그런 쇠꼬챙이에 꿰어져 있다는 말이거든요 그가 이것 때문에 세 번(수도 없이)이나 기도했으나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그렇게 자기 목적이 아닌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목적지로 끌려가는 사람들이에요 사도 바울이든 우리든 누구나 자기목적을 위해 자기 영광을 위해 살아가고 있고 조건과 환경이 주어지면 언제라도 하나님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죄인들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세상과 다른 점은 하나님이 믿음이라는 띠를 띠어 원치 않는 길로 데리고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다는 그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사단의 가시가 다 있습니다. 그게 있어야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자식이 애를 먹이던지, 몸에 병이 있든지, 사업이 실패를 하든지... 하나님께서 나의 존재 가치를 내 안에서 찾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예수 안에만 있음을 계속 확인시켜주시는 거예요. 십자가 은혜의 필연성, 이것을 고린도후서에서는 “우리 산 자가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우는 것은 우리 죽을 육체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함이라”고 하고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성도에게는 십자가가 실제화 되는 삶이 반복됩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럴 때마다 자신은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영원한 생명 안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 세상 것을 다 잃어버려도 좋은 영원한 생명 안에 있음을 그때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의 본향 우리의 시민권은 이 세상에 있지 않음을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찬송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란 그런 것입니다.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을 지켜 경건하게 사는 모든 과정이 복음이라는 진리를 아는 데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이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핍박하는 악행이었다는 것을 알았던 바울은 복음은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고 인간에게서 배울 수도 없는 것임을 편지 시작부터 못을 박고 그리스도의 계신인 복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뿐 아니라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교회에게 그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예수를 선택한 것도 복음을 선택한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너희들이 믿고싶은 예수는 가짜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내가 믿는 예수는 가짜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만나 주시는 예수만 진짜입니다. 죽음 안에서 만나는 하나님, 약속의 죽음 안에서 나누어지는 생명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이 사랑입니다.
창세전 어린양의 죽음 그 십자가가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그 구원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며 우리를 위한 구원도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위해(엡1:10) 우리가 그 약속에 그 선한 일에 죄인으로 참여된 것입니다.(빌1:5-6)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 선한 일 복음의 실행을 위해 이 세상에는 진리도 생명도 없어야 하고(요1:1-14) 오직 주로 말미암고 주를 위해서 주께로 돌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약속대로만 우리 성도들에게 실행되고 있습니다(롬11:32-36) 이것을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라고 합니다. 이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기 위해서 우리가 지음을 받았고 또 세상 속에서 구별되어 불리어 나온 것입니다. 그들을 성도(거룩한 무리), 에클레시아, 교회라고 합니다. 이렇게 피로 사신 교회에게 바울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제가 1장 후반부를 길게 설명했는데요, 여러분들이 갈라디아서뿐만이 아니라 모든 바울 서신서를 읽을 때 이런 관점에서 읽게 되면 바울을 좀 더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 복음을 우리에게 설명해주기 위해서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었고, 조상의 유전에 특심했고, 혈육까지도 배제당한 채 사도들과 먼저 교제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인한 복음과의 사귐먼저 있어야 했던 겁니다.
여러분들은 예수 믿어서 남 주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예수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바울은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한다고 했습니다. 예수의 죽음이 우리 안에서 작동될 때 우리는 세상에게 쓰레기처럼 보이겠지만 복음은 우리의 그런 죽음을 통해서 전파됩니다.
바울이 유대교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일꾼으로 불리어 나왔다는 말은 우리 모든 성도 역시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유대교가 섬기던 하나님을 부정하고 다메섹에서 만난 하나님이 참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었음을 인정하려면 먼저 우리 역시 본성적으로 그 유대교의 하나님을 섬길 수밖에 없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냥 하나님을 믿으면 되지 왜 꼭 십자가 지신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는 이 생각이 바로 우리가 예수를 살해한 근본 원입니다.
유대교 안에는 오늘날 개혁주의 가르침 안에서 행하는 모든 것들이 다 들어있습니다.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도 다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고, 그런 기적적인 구원을 받은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하고,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하고, 하나님의 선택 외에는 어떤 구원도 없다는 것이 유대교의 교리입니다. 오늘날 개혁주의 신앙과 다를 것이 하나 없어요.
그렇다면 우리 입맛에 딱 맞는 이런 유대교에서 우리가 어떻게 나올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강권적인 침노와 탈취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유대교의 하나님에 대한 헌신은 엄청납니다. 그들은 적군이 쳐들어왔을 때 성전 마당에서 죽을 각오로 성전을 지켰던 사람들입니다. 전쟁 중에도 안식일에는 율법을 지키려고 뛰지를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만큼 특심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바리새인들은 바벨론 포로 귀환 후 자신들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 그런 수치를 당했다면서 율법행위에 부족했던 자신을 회개 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이를 더 악물고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러니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고 했던 바울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고 하니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러 다녔던 거에요
하나님의 선민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일컫는 이스라엘에게 반드시 있어야 했던 것이 성전과 율법이었습니다. 스데반이 죽은 이유도 하나님이 거룩한 이름을 두신 성전을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아까 누가 성전 신앙 얘기를 했는데, 오늘날 교회도 예배당을 지으면서 성전 건축이라고 하잖아요. 예배당도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성전이라고 가르칩니다. 또 이스라엘이 율법을 받은 것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켜야 할 말씀(성경)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율법처럼 오늘날도 성경 공부 교리 공부 신학을 합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주셨고 성경이 구원의 척도이며 성경 외에는 다른 구원이 없다고 말을 합니다. 우리 죄인들은 육신이 약해서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데 성령이 오시면 말씀도 지킬 수 있고 차츰 성화가 되어 성령의 열매도 맺을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상급도 있다고 말하는 이것이 유대교 그대로입니다. 문제는 그 주체도 결과물을 챙기는 것도 자기라는 겁니다. 유대인들이나 오늘날 교회인들이나 다를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사실 우리는 바울이나 경건한 유대인들처럼 말씀을 지키지도 못하잖아요. 기껏 주일 성수나 십일조 정도이지 교회를 나서면 지키는 것도 없어요.
그런데도 요즈음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옛날의 제사법은 없어졌지만 도덕법은 살아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에 비중을 크게 둡니다. 성령론도 그런 셀프성화에 도움을 주는 성령이에요그렇다면 예수님의 산상수훈 자체를 성경에서 빼버려야 합니다.
산상수훈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처럼 하나님의 계명을 예수께서 산에 올라 재해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산에 올라 입을 열어 가라사대”라는 말씀을 기록한 겁니다. 하나님이 주셨던 열 말씀을 진의대로 해석을 하시는 거예요. 이웃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한 계명을 쭉 설명하시는 거예요. 남의 물건을 탐하기만 해도 도둑질을 한 거다.. 여자를 보고 음욕만 품어도 간음한 거다.. 형제를 보고 라가라 욕만 해도 살인한 거다..... 이런 새 계명을 누가 감히 지킬 수 있다고 합니까?
이런 말씀을 두고 어떻게 지켜야 할 도덕법이 살아있다고 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 윤리 도덕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다 다릅니다. 예를 들어 옛날에는 인간 취급을 하지 않았던 수전노가 자본주의 사회에선 최고의 선이잖아요. 오늘날 경제학에서는 돈 많은 게 선이고 돈을 못 벌면 악이라고 규정합니다. 아프리카나 에스키모 사회는 손님이 오면 자기 부인을 침실에 들여 보냅니다. 그것이 그곳의 윤리 도덕이기 때문에 지키지 않으면 부족으로부터 쫓겨납니다. 이렇게 인간의 정의와 윤리 도덕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양심과 윤리와 도덕과 사회법이라는 것들은 우리 자신 위한 겁니다. 안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있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들이 규정한 법을 부정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 율법입니다. 힘써 지켜보고 안 되면 죄인의 불가능에 절망하고 생명나무이신 예수께로 가라고 주신 겁니다. 그래서 율법을 몽학선생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한 몽학선생이에요. 그럼에도 이걸 지켜서 의롭다 함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고 오늘날 대한 유대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율법 아래 있는 자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율법 어느 한가지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죄인들이 율법행위로 의에 이르려고 하는 것 자체가 탐심이고 죄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십자가 다 이루심을 부정하는 것이 종교인들의 은혜 더하기 율법 행위입니다.
제가 강남 모임에서 먼저 갈라디아서를 시작한 이유가 무언가 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 예수, 십자가, 언약의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들을 새로 시작하기 위해서입니다. 갈라디아서의 주제가 ‘복음의 자유’잖아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예수 믿고 나서 자유합니까? 삶이 가벼워 졌습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는데 교회생활 하면서 쉼이 있었습니까? 그러니까 대부분의 교인들이 자유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는 겁니다. 복음을 알면 술도 한잔 할 수 있고, 주일에 바쁘면 교회 안 갈 수도 있고, 십일조 안 하는 자유 목사한테 대들 수 있는 자유.. 이런 것이 복음의 자유가 아닙니다. 참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자유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이라고 편지 서두에 자신을 소개합니다. 복음 안에 있는 자유는 그렇게 그리스도의 종 된 자유입니다. 나에게 주가 계심을 아는 자유에요 저기 어던 목사가 가르치는 것처럼 막사는 게 자유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심을 안다는 말은 그분이 하신 아버지와의 약속이 어떻게 십자가에서 성취되었는지를 아는 거에요. 우리가 있기도 전에 이루어진 그 약속이기에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어떤 행위도 선악으로 카운트하지 않으십니다. 율법의 정죄 아래 있지 않다는 말이에요 다시 말하면 우리에겐 사랑의 빚만 있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막산다?
그건 주가 누구신지 모르는 사람, 주님의 사랑이 부어진 적이 없는 자만 할 수 있는 소리에요
저는 유대교와 다를 바 없이 된 오늘날의 기독교를 대한 유대교라고 부릅니다. 인본적인 교리 인간을 위한 하나님 내 구원을 위한 십자가 그런 종교인들의 가르침에 가두어 놓은 교회는 유대회당입니다. 그곳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서 복음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부터 나오라’고 부름 받은 사람들이 여러분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복음에 빚진 자들이에요. 기회가 되면 일요일에 대형 교회 앞에 서서 누구처럼 “이건 성전이 아닙니다”라고 외치고 싶어요. 구약에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지시대로 이건 성전이 아니라 성전이 아니라 고 했다가 수염이 다 뽑히고 두드려 맞고 그랬잖아요. 오늘날이라고 달라진 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 종교인들에게 핍박 당하고 쫒겨난 세상 나그네의 운명입니다. 큰성 길가에서 외치는 두 증인이란 말입니다. 그들이 이땅에 오신 예수님의 운명에 연합된 자들이에요. 유니언 크라이스트란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들이에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5:10-12)
말씀에 소유된 자들은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상을 향해 아니요를 외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성전에 애착을 가졌던 것만큼 오늘날 교인들이 애착을 가지는 것이 예배당이라는 건축물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가 성전이니까 오늘날도 역시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이 교회를 세웠으니까 그 교회를 지키고 관리하고 날로 확장 시켜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알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그 교회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광은 그 영광이 아니라는 걸 모르니까 그런 상태로 내어버려 두신 것을 심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미혹의 영을 보내 거짓것을 믿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에요 (살후2:11-12)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유대교를 주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복음을 주셨습니다. 율법과 성전 제사 등을 통해서 오실 그리스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유대교의 신학이 왜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지, 다시 말하면 오늘날 이 땅의 교회들이 왜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지를 아는 것이 복음을 아는 것이 됩니다. 성도들의 그 믿음을 위해 이 땅에 다른 복음, 비진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아닌 이것.. 그런 배치물이나 환경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지식으로밖에 알지 못해요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바로 담을 그릇이 없어요. 그래서 이 세상과 역사가 필요합니다. 율법의 교회, 사단의 회당에서 신음하고 고통을 받는 것도 유익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하신 약속 때문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430년간 노예 생활을 한 것이 그런 거에요. 무엇이 그들을 세상으로부터 별세하게 하는가 출애굽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치시는 역사인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400년 전에 한 그 약속 때문에 애굽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그 애굽이 전부인 줄 아는 거에요 태어났더니 애굽이었던 것이지요 그들은 조상의 약속을 몰랐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어나보니 세상인 겁니다. 우리가 세상을 선택한 게 아니고 우리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난 게 아니잖아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를 선택해서 믿은 것도 아닌 거에여 피조물인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보이는 모든 부정적인 것 모형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알면 됩니다. 그 은혜의 필연성을 고백하고 돌아가면 되는 거에요 멸망할 세상에 뭘 남기겠다고 그 야단들인지 참, 수천억 예배당 지어 놓으면 그거 뭐할 거에요 대형교회들 쌓아놓은 돈 뭐할 거냐고 말세에 재물을 쌓는 게 심판을 불러 오는 거라고 하는데 그런 너희들이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다는데 십자가 걸린 교회가 그짓을 하고 있는 거에요 이 악당들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찬송하는 것 이것 한 가지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심이라’.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창세전 하나님 약속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아들들(하나님 나라)이 있습니다. 여러분 각자가 예수님의 공로로 성취된 약속의 땅이고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여러분이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의 순결한 신부가 되는 것으로 완성이 됩니다. 십자가 안에서 우리 이름이 모두 삭제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영원토록 찬양받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님이신 예수 우리 신랑이신 예수를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상 심판 속에 그냥 버려두셔도 할 말 없는 죄인들인데 저희를 세상 속에서 불러내시고 예수 이름으로 모이게 하시고 예수 이름만 찬송할 수 있는 교회가 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 평생에 주님의 인자하심과 용서가 그 주님의 동행이 함께 하셔서 우리가 아버지의 집에서 영원을 살 수 있는 그날까지 저희들을 이 광야에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