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순신 장군도 첩이 있어…최고 귀족 갑부 이회영은 첩 없이 부인만 사랑해
2006년 ‘한겨레 21’이란 잡지에서 한·중·일 기자 300명을 대상으로 설문하여 현대 아시아의 최고 지도자로 간디를 선정하였다. 10위 안에 한국인은 김대중 전 대통령만 7위에 선정되었다. 이 결과는 간디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외국기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평생 민족과 조국을 위해 헌신한 백범 김구는 49세에 부인 최준례 여사(김신 예비역 공군대장의 모친)와 사별 후 74세에 안두희로부터 저격 받아 운명할 때까지 25년간 여자관계 전혀 없이 홀아비로 살았다. 그러나 그는 10위 안에 들지도 못했고 백범 김구가 선배로 존경한 우당 이회영은 그 이름조차 한국인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우당 이회영은 조선말 명문거족의 대갑부였다, 당시 그러한 위치에 있는 남자들은 당연히 첩을 두고 살았다. 민족의 영웅 이순신 장군도 첩이 있었다. 이회영은 첫째 부인 서씨와 사별 후 둘째 부인 이은숙과 재혼하였는데 그는 첩을 두지 않고 부인만을 사랑했다. 첫째 부인과의 손자로 전 국정원장 이종찬씨가 있다. 부인만을 사랑한 이회영은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거액의 전 재산은 물론 목숨까지도 바친 영원한 자유인이었다. 1932년 11월 일본 제국 정부는 이회영을 체포했는데 그의 인품과 영혼이 너무 두려워 재판에 회부하지 말고 즉시 죽이라고 일제 경찰에 명령하여 여순 형무소에서 혹독한 고문을 해 죽였다.
3. 이회영 육형제 2조원 전 재산 독립운동에 바치고 단 한 명만 살아남아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의 한일합병이 발표되자 44세의 이회영은 형제들에게 만주에 가서 독립운동하자고 제의했고 육 형제 모두 동의했다. 그들은 전국에서 땅 값이 가장 비싼 서울 명동 일대의 거의 모든 토지를 소유한 재벌급 거부였다. 둘째 이석영은 양부인 한양 최대 갑부 이유원(고종 때 영의정)으로부터 전 재산을 물려받았는데 한양 성으로 들어올 때 그의 땅을 밟지 않고서는 들어올 수 없을 정도의 대토지를 소유했다. 그 많은 전 재산을 조국에 다 바친 그는 중국 상하이 빈민가에서 영양실조로 굶어 죽었다.
이회영 형제들은 현재 시가 2조원의 대토지를 빨리 헐값에 모두 매각하여 현금으로 만들어 만주로 가서 독립군양성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기 위해 조국을 떠났다. 육형제 전 가족 40 여명과 기타 일꾼 등 총 60 여명이 나라 빼앗긴 통한의 1910년도 저무는 추운 12월 어느 날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정든 고향 서울을 떠나 북으로 향했다. 신의주에 도착한 그들은 1911년 1월 영하 30-40 도의 살을 에는 날씨에 마차 10 대에 분승해 압록강을 건너 사방이 꽁꽁 얼어붙은 만주로 향했다. 고국을 떠난 이들 육형제 중 오직 한 명만이 해방 후 살아 돌아와 초대 부통령이 되었는데 그분이 바로 성재 이시영 선생이다. 아래는 이회영 선생과 동생 이시영 부통령의 사진이다.
4. 간디 젊은 여인들과 알몸 맞대고 비빌 때 이회영은 모진 고문으로 죽어가
간디는 보아 전쟁에 영국군으로 참전하였고 영국이 인도 독립을 시켜준다는 약속을 믿고 영국의 1차 세계대전 수행을 지지해 많은 인도 청년들이 참전을 지원했다. 이 대가로 그는 영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비폭력주의자가 전쟁을 지지하고 훈장을 받은 것이다, 성욕을 자제하기 위해 늙어가는 부인과 성관계를 끊고 대신 젊은 여인들과 알몸으로 속살을 부비면서 잠을 자는 그는 이율배반적인 사람이었다. 백인 여제자와 사랑도 나누고 젊은 여인들과 발가벗고 이상한 의식행사를 해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은 인도에서 그의 권위는 대단했던 것 같다. 대중의 절대적인 지지와 인기 속에서 발가벗은 여러 젊은 여인들과 알몸으로 이상한 의식을 행할 때 영국에서 공부한 인도의 신지식인 간디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독립운동으로 형무소에서 고문당해 옥사한 이회영은 지금의 재벌급 재산을 소유한 명문대 귀족으로 부귀공명을 다 가지고 있었다. 그도 인간인 만큼 일본제국과 타협하여 부귀공명과 재산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조선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어떠한 타협과 협상도 하지 않고 가진 것 모두 다 조국에 바쳤다. 1932년 11월 간디가 젊은 여인들과 발가벗고 혼욕하고 속살을 맞대고 비빌 때 이회영은 중국 땅 여순 형무소에서 혹독한 고문의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 왜 한국인들은 지배자인 영국의 전쟁을 지지하고 젊은 처녀, 여인네들과 이상한 의식을 한 간디는 세계적인 위대한 지도자로 알고 있고 자기들의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영원한 한국인 이회영은 잘 모르는 것일까? 아래는 여인들과 함께 있는 간디와 이회영 가족사진이다.
5. 이회영 조선인으로 처음 교회에서 서구식 결혼, 노비 모두 해방시켜
7. 순종 황제가 재가하지 않은 불법 무효 한일합병조약 속여서 발표
우리 기억에 익숙한 고종황제의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 파견은 바로 이회영이 주도적으로 계획한 거사였다. 대한제국이 외국과 맺는 조약은 황제가 최종적으로 재가해야 발효가 되는데 고종 황제는 을사늑약에 재가를 하지 않았다. 헤이그 밀사 파견 목적은 1905년 강제 체결된 을사늑약(조선의 외교권 박탈)은 고종 황제 재가가 없어 완전 무효라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무자비한 방해로 완전 무산되었다, 이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인해 고종 황제는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 당하고 황태자가 황제가 되니 그가 바로 순종이다. 그 후 1910년 8월 22일 이완용이 서명한 한일합병 조약으로 인해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게 되었으나 그 합병조약도 강제로 체결되어 원천적으로 무효였다.
순종 황제도 한일합병 조약에 최종 재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조약은 국제적으로 효력이 전혀 없는 것이었다.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제는 이러한 효력 불가능 사실을 완전히 숨기고 순종 황제가 재가한 것처럼 8월 29일 거짓 발표하여 백성들을 혼동에 빠트려 궐기를 봉쇄하였다. 순종 황제가 재가하지 않았다는 사실만 알려졌어도 전 백성들이 일본과 전쟁을 하려고 일어났을 것이고 그러면 합병은 100% 불가능했다. 무효 조약에 의한 일본의 합병 지배는 완전 불법강탈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피해 배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965년에 한국정부와 일본정부가 체결한 한일기본조약 제2조에 “1910년 8월 22일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 및 협정 등은 모두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라고 명시하고 있으나 조문 해석에 한국과 일본에 차이가 있어 문제점을 안고 있다.
8. 고종황제와 중국에 망명정부 수립하고 일본에 선전포고 계획
이완용 측과 일제 측은 백성들의 궐기가 두려워 마치 대한제국의 황실의 뜻에 따라 합병 조약이 체결된 것처럼 속임수를 쓰느라고 이완용이 날인한 지 7일이 지난 8월 29일에야 발표했다. 조선의 백성들은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합병이 황제의 뜻인 줄 알았기에 궐기를 하고 싶어도 못했다. 1918년 이회영은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불법 강압에 의해 퇴위 당한 고종 황제를 중국 북경으로 모시고 가서 망명정부를 세운 후 황제가 직접 합병조약의 불법 무효임을 전 세계에 발표하고 조선의 대일본 전쟁을 선포하려 했다. 고종황제의 선전포고와 전쟁 명령이 있으면 조선의 전 백성들이 궐기하여 조선 땅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고 강탈당한 주권을 당당히 찾을 수 있었다. 이 계획은 정말 실현 가능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이 언제 새어 나갔는지 망명 직전 고종 황제가 이완용 측이 독약을 넣은 음식을 먹고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이완용이 조선의 자주 독립을 막으려고 고종 황제를 독살한 것이었다. 고종 황제의 붕어로 이회영의 계획은 완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9. 형제들 사재 2조원 출연해 독립운동가 양성 위해 신흥무관학교 설립 운영
이회영은 악랄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불법 강도 집단 일제와 타협과 협상은 100% 불가능한 것이고, 자주적인 독립은 군사력을 양성해서 무력으로 되찾는 방법 이외에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1910년 조국을 위해 형제들과 함께 전 재산 2 조원 상당을 모두 내 놓았다. 그 2조원의 기금으로 독립군 지도자 양성을 위해 신흥무관학교를 만주에 설립하고 운영했는데 고국에서 갖고 온 기금이 1918년 바닥이 나고 만주군벌 장작림과 합세한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해 일단 문을 닫았다.
그러나 신흥무관학교는 8년 간 3,500명의 위대한 독립 운동가들을 양성했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1920년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여 일본군에 대승을 거두었다. 또한 그들을 중심으로 여러 항일 비밀 결사대가 결성되어 일본의 주요시설 폭파와 주요 인물들을 암살하는 한편, 광복군 등으로 활약하여 일본군과 일제경찰의 간담을 얼어붙게 하였다. 아래 사진은 신흥무관학교와 학생들의 모습이다,
10. 일제 요인 암살, 일제 군대와 시설 파괴하는 흑색공포단 조직
이회영은 지도권의 다툼이 예상되어 임정 수립을 반대했지만 처음에는 동생 이시영(건국 후 초대 부통령)과 함께 임정 의정원 의원으로 참가했다. 이회영의 예상은 적중하여 초대 임정 대통령 이승만의 독선과 직무 유기 등으로 내분과 알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회영은 임정을 떠나 1925년에 비밀결사단체인 다물단을 조직했다. 65세 때인 1931년에는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들과 합작으로 독립운동단체인 항일 구국연맹을 조직하여 의장으로 취임하고 전위 행동단체인 흑색 공포단을 조직하였다. 이회영의 아나키즘은 김좌진 장군의 동생 김종진과의 대화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자유평등주의에 기초하여 자유의사에 의한 지방분권적 자치단체들이 연합한 중앙정부체제를 뜻했다, 그의 아나키즘 사상은 자유와 평등, 평화를 가장 중시했다. 흑색 공포단은 이회영이 1931년 정화암, 백정기, 김성수 등의 한국인 아나키스트 3명과 중국인, 일본인 아나키스트 4명 등 총 7인과 함께 결성한 항일구국연맹이었다.
이 조직은 중국내 일제 요인 처단, 일제 기관의 건물과 시설 등을 파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 행동단체였다. 이 단원들은 창단 직후인 1931년에 복건성 하문의 일본 영사관을 폭파하여 건물을 날려 버렸다. 1932년 1월 66세의 노인 이회영은 천진에 흑색 공포단을 파견했다. 그들은 천진 항에 정박해 있는 일본 군수송선을 통쾌하게 폭파시키고 천진 주재 일본 영사관 건물을 폭파하는 쾌거를 한 후 모두 무사히 본부로 귀환하여 일제경찰은 부들부들 떨었다. 1932년 11월 이회영이 옥사한 후 1933년 3월 백정기, 원심창, 이강훈 세 의사가 일본 육군대장과 대사를 처단하려다 계획이 누설되어 체포되었다. 그 중 백정기 의사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나가사끼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그 후 흑생공포단 활동은 침체되었다.
13. 해방후 정치권력자들, 정치적 잇속 따라 이회영보다 간디 선전에 열올려
이회영이 간디보다 2살 위이니 그들은 같은 시대를 산 독립 운동가들이었다. 간디도 부친이 인도의 작은 토후국 포르반다르의 총리를 지낸 그 지역 명문 출신이었다. 이회영은 전통 성리학과 양명학만을 공부했으나 젊어서 기독교 사상으로 개종하고 완전히 패러다임을 전환했다. 간디는 영국에서 공부했으나 평생 힌두교 신자였고 인도의 옛 계급제도와 관습을 유지했다.
독립운동방향에서 간디는 무저항 비폭력이고 이회영은 무력항쟁이었다. 무저항 비폭력 독립운동은 거대 영토와 인구의 인도에게 아주 적합하였고 영국은 무력항쟁보다 오히려 이 독립운동을 더 좋아했는지 모른다. 인도에 비해 아주 작은 영토와 적은 인구의 한국에게는 간디 방법은 매우 불리하였고 일제는 한국인들이 평화적 시위를 해도 무지막지하게 살육했을 것이다. 간디 방식은 무자비한 살육과 생체실험, 위안부 동원 등을 하는 악독한 일본에게 매우 유리했기 때문에 이회영은 자유평화주의자이지만 무력 항쟁을 선택한 것이다.
간디는 언론이 발달하고 민주정치를 하는 영국에 대항하였기 때문에 유럽에 많이 알려지게 된 것이다. 영국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한 간디에게는 옥중생활은 있었지만 이회영처럼 혹독한 고난과 고문이 없었다. 전체주의의 악독한 독재 정치를 하는 일본에 대항하는 이회영에 관한 것을 일본 정부는 모두 감추었다. 독립 후 한국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자기보다 훨씬 더 뛰어나며 권력욕이 전혀 없어 모든 것을 조국에 바친 이회영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았고 친일파를 대거 등용하였다. 이승만은 물론 그 후 정치 권력자들도 세계 최고의 노블리스 오블리주 이회영의 위대한 업적과 민족정신을 국민들에게 알리는 것이 반가울 리 없었다. 대신 한국 정치 권력자들이 간디를 국민들에게 널리 알린다고 해서 정치하는데 손해 볼 것은 전혀 없었다. 이회영과 간디를 비교한 아래 표를 보면 이회영이 더 위대함을 알 수 있다.
14. 한국의 60대는 이회영 선생과 강우규 의사를 배워야
66세 노인 이회영이 일본 관동군 사령관 무토 노부요시 대장을 처단하기 위해 만주로 가다가 체포되어 재판과정도 없이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강우규 의사가 1919년 9월 2일 서울역 앞에서 3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가 탄 마차에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행하였을 때 나이 65세로 백발노인이었다. 강우규 의사는 동족 고등계 형사 김태석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다가 1920년 11월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했다. 김태석은 이 공로로 일제하에서 고속 승진했다. 당시 65세의 나이면 완전 고령으로 지금의 80세 이상의 노인이다. 필자는 지금 64세인데 살아온 인생이 매우 부끄러울 뿐이다. 한국은 60세 이상의 노인이 급증하여 복지비가 계속 증가되고 산업인력이 부족해 향후 국가 경쟁력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60 대여! 국가가 주는 복지혜택 받을 생각만 말고 이회영 선생과 강우규 의사의 정신을 본받아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합시다. 북한 또는 다른 나라가 전쟁을 일으킨다면 20세의 꽃다운 나이의 젊은이들만 목숨 바쳐 싸우라고 하지 맙시다. 우리 60대들 중 사회적 지도자들이 먼저 젊은 군대 시절의 ‘진짜 사나이’로 돌아가 자유 대한을 위해 총을 들고 나갑시다. 그리고 조국을 위해 무엇을 바칠 수 있는가 좀 생각합시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 연설이 생각납니다.
“국민 여러분!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 물어 보십시오.”
강우규 의사는 사형 직전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란 내용으로 청년들에게 유언을 하였다. 사형대 앞에서는 “단두대 위에 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겠는가”라는 짧은 시를 읊고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아래는 옥중 강우규 의사와 신임 총독에 폭탄 투하란 제목의 신문기사다.
조선일보는 창간된 지 6개월도 안되어 30여 번 기사 압류를 당했음에도 강우규 의사 사형선고에 대한 대대적인 보도와 조선인들의 항거 관련 내용이 담긴 “자연의 화”라는 논설을 써 민간신문 최초로 일주일 정간처분을 받았다. 일제는 이렇게 언론을 극렬하게 탄압했으니 이회영이 제대로 알려질 수 없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