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우연한 좌석에서 중앙대학교에 계시는 유인호 교수가 말씀하시기를, ‘옛날 (한국/조선 공화국 출신인 – 옮긴이 잉걸. 아래 <옮긴이>) 지독한 반체제(反體制) [인사 – 옮긴이]가 일본으로 건너갔나 보다.’ 모두들 웃었지만, 나는 내심 놀랐다. 피로 점철된 그들의 역사, 잔인무도한 그들 행적을 보며 한반도(코리아[Corea] 반도 – 옮긴이)에서 추방된 흉악한 죄인들이 그들 조상인가 보다 하고 뇌까린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이는 북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영국 식민지가 잉글랜드의 죄수들/정치범들을 내쫓는 곳으로 쓰인 사실과 같다 – 옮긴이).
또 생각하기를, 도대체 그 아득한 옛날(야요이 시대인 서기전 500년부터, 서기 8세기까지 – 옮긴이) 어떤 부류의 한민족(배달민족 – 옮긴이)이 일본열도로 건너갔을까? 식민(植民)의 경우도 그러하지만, 자고로 넉넉한 사람이 내 땅 버리고 떠날 리 없고, 사연 없이 떠날 리 없다.
(한 예로, 서기 19세기 중반에 아일랜드 대기근을 겪은 에이레 사람들이 배를 타고 미국으로 달아난 사실과, 서기 19세기에 로시야 제국의 반유대주의 때문에 유대인들이 캐나다나 미국으로 망명한 사실을 들 수 있다. 일본인의 조상인 야요이인과 고분인도, 그와 마찬가지로 전쟁이나 가난이나 탄압/권력다툼을 피해 고국을 떠나 왜 열도로 달아난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다.
어떤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이른바 ‘야요이인’들은 원래 한국의 삼남 지방에서 살던 사람들이었는데, ‘만주’나 코리아 반도의 북부에서 마한인이나 백제인이나 서나벌/신라인이 내려와 선주민을 제압/정복/점령하자, 그것을 피해 왜 열도로 달아나 뿌리를 내렸고,
다른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전기가야의 시조인 수로왕[뇌실청예 왕]과 허황후[허황옥 왕비]의 일곱 아들과 한 딸이 왕위를 이어받지 못하자, 고향인 김해를 떠나 배를 띄운 뒤 오늘날의 규슈 남부로 가서 선주민의 땅을 뺏기 위해 선주민과 싸웠다고 한다.
또한 어떤 학자는 『 일본서기 』 에 나오는 ‘신라의 왕자 천일창’은 실제로도 신라의 왕족인데, 왕위를 이어받지 못하게 되자 사신으로 오늘날의 구주[九州/규슈] 북부에 있던 왕국인 야마대국으로 건너갔고, 거기서 야마대국의 왜왕인 ‘숭신’과 회담을 한 뒤, 숭신이 추천하는 땅 – 일본열도의 한 지방 - 으로 건너가서 선주민을 제압하고 그곳에 자신의 작은 왕국을 세운 뒤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눌러앉은 사람이라고 한다.
『 삼국사기 』 와 『 정사 삼국지[三國志] 』 에 나오는 ‘왜 여왕 비미호[일본어 발음으로는 히미코]’와 그를 바탕으로 만든 사람으로 여겨지는 『 일본서기 』 의 이른바 ‘신공황후’는, 원래 오늘날의 부산 기장벌에 있던 작은 나라의 지도자였는데, 가야나 신라의 침략/정복전쟁을 피해 고향을 떠나 왜 열도로 달아났고, 규슈 섬에 자리를 잡았으며, 나중에 임나 출신이자, 야마대[야마도]국의 남왕[男王]인 ‘중애’와 혼인하여 그의 왕비가 되었고, 그를 독살한 뒤 그를 따르던 야마대국 사람들을 전쟁으로 제압하고 야마대국의 여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일본의 고대사에 나오는 중요한 사람들이나 세력은 거의 다 코리아 반도와 ‘만주’에서 일어난 민족 대이동/전쟁/권력다툼에서 지고 당시로는 ‘외진 곳’으로 여겨지던 땅인 왜 열도로 달아나 겨우 목숨을 건지거나 새로운 땅을 얻은 사람들이다. – 옮긴이)
하물며 거센 파도에 일엽편주(一葉片舟. 한 척의 작은 배 – 옮긴이)를 띄우고, (고국과의 – 옮긴이) 영원한 이별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 19쪽
“일본 인종(좀 더 정확히는 ‘일본인이라는 민족’ - 옮긴이)에 대하여, 일본 사서에는 결론이 없다.
‘이노우에 기요시[井上 淸(정상 청 – 옮긴이)]’의 저서『 일본의 역사 』 에서 인종에 관한 것을 발췌해 보면 – 조몬 토기시대[繩文(승문) 土器時代. 여기서 ‘繩文’인 ‘조몬’은 ‘줄무늬/새끼줄처럼 생긴 무늬’라는 뜻을 지닌 한자말이지, 야요이 시대 이전의 일본열도 원주민들이 자신을 일컬은 이름은 아니다. 이 원주민들이 만들어서 쓴 토기가 줄무늬가 많은 토기라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 옮긴이], 일본 인종의 원형이 형성되었을 거로 보고 있고,
후에 한국에서 (수준이 좀 더 – 옮긴이) 높은 야요이식 토기 문화[彌生式 土器文化. 여기서 ‘야요이’로 읽는 ‘미생(彌生)’은 지역의 이름이고, 이 문화의 토기가 맨 처음 나온 곳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 ‘야요이’라는 이름도, 이른바 ‘야요이식 토기’를 만든 사람들이 스스로 쓴 이름은 아니다 – 옮긴이]가 들어와 (왜 열도를 – 옮긴이) 지배했는데,
신래(新來 : 새로[新] 온[來] - 옮긴이) 인종(그러니까, 야요이인 – 옮긴이)이 조몬 시대인[繩文 時代人]을 멸망시켰는지, 혼혈이 되어 인종적 특성이 말살되었는지, 그러나 (야요이인은 – 옮긴이) 조몬 시대인에게 흡수되었으리라는 것이 일본 인류학자들의 통설이라 한다.
(사실과는 다른 주장이다. 고고학자와 고인골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야요이인의 수는 조몬인의 수보다 몇 곱절 더 많았고, 전자는 후자와는 달리 여름지이[‘농경’을 일컫는, 순수한 배달말 낱말]와 금속 제련술이라는, 생존에 보다 유리한 수단을 확보했으며, 야요이 시대 초기인 서기전 500년에는 규슈 북부나 혼슈 서쪽 끝에 살던 야요이인은 야요이 시대 말기인 서기 395년에는 규슈 전체와 시고쿠와 혼슈 서부/중부까지 퍼져 살았기 때문이다.
이는 처음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동남쪽 바닷가 한구석에 건너와서 살았던 잉글랜드인 죄수들이, 세월이 흐르면서 원주민을 몰아내거나 죽이고 아대륙의 동쪽 바닷가를 다 차지했고, 서기 19세기 후반이 되면 내륙의 사막 지대나 티위족이 사는 섬 같은 몇몇 지역을 빼고는 오스트레일리아[아대륙]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 사실이나,
서기 17세기에는 북아메리카의 동쪽 끝에서만 살던 프랑스인/잉글랜드인들이 그로부터 2세기가 흐른 서기 19세기에는 북아메리카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그 땅 곳곳에 퍼져 산 사실과 같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까닭은, 총과 쇠라는, 원주민은 몰랐거나 만들지 못했던 수단을 확보했기 때문이었고, 그들이 원주민과는 달리 증기기관이나 공장을 바탕으로 삼은 공업으로 부를 늘리고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었기 때문에 – 나아가 ‘본토’인 유럽에서 얼마든지 백인 인구가 건너와 캐나다인/미국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 원주민보다 유리했음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야요이인과 고분인도 이와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일본인의 역사 기록인『 고사기 』와『 일본서기 』에도 ‘나쁜 신들’이나 ‘땅거미[같은 것들]’나 ‘오랑캐’로 나오는 선주민들은 소잔명존[素戔鳴尊/스사노오노 미코토. 줄여서 ‘스사노오’. ‘신라의 소시모리’와 관련된 신으로 나온다]이나 신무[神武]처럼 코리아 반도에서 건너온 ‘외부인들’에게 정복당하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쫓겨나지, 절대 그들을 몰아내거나, 흡수하거나, 문화로 동화시키는 존재로는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일본 인류학자들의 통설과는 반대로, 일본열도의 원주민인 조몬인이 야요이인에게 멸망당하거나, 피가 섞여 야요이인에게 흡수되거나, 아니면 일본 혼슈[본주/本州] 섬의 동북 지방 같은 야요이인에게서 멀리 떨어진 땅으로 달아났다고 봐야 한다.
이는 오스트레일리아나 캐나다나 미국의 동부에서 원주민들이 맨 먼저 사라진 것이 백인들의 식민과 침략과 점령과 학살과 노예무역과 초토화 작전 때문이고, 북아메리카 원주민들 가운데 일부는 피가 섞여 백인사회에 흡수되었으며, 세 나라의 원주민들 가운데 어떤 민족은 백인들의 땅에서 멀리 떨어진 캐나다/미국의 서부나, 오스트레일리아의 내륙[사막이기도 하다]으로 달아나 끝까지 저항한 사실과 비슷하며,
중세 초기에 브리튼 섬[영국]으로 건너온 앵글로색슨족에게 선주민인 켈트인[브리튼족]이 죽임을 당하거나, 쫓겨나서 평야지대인 잉글랜드를 버리고 그와 좀 떨어진 산악지대인 컴리[‘킴루Cymru’라고도 함. ‘웨일스’의 켈트식 이름이다]로, 그러니까 앵글로색슨족이 쳐들어온 쪽과는 반대쪽에 있는 땅으로 달아나 정체성을 유지한 사실과도 비슷하다. - 옮긴이)
그러면 조몬 시대인과 구석기 시대인은 인종적으로 연속된 것인가, 그것은 의문으로 남겨놨고,
만약에 일본열도가 대륙(동아시아 대륙 – 옮긴이)의 일부였다면, 조선해협(대한해협)이나 중국(제하[諸夏] - 옮긴이) 남부 어딘가에서 육교를 통하여 대륙과 연결이 되었을 것이며, 일본어의 경우, 친족 관계의 가능성이 있는 것은 오직 한국어(배달말 – 옮긴이)뿐(실제로는 사하어나 다우르어나 몽골어나 만주어와도 친족일 가능성이 높다. 만주어인 '샤먼'에서 일본어인 '사마["~님"이라는 뜻]'가 비롯되었다는 학설이 있고, 일본어는 사하[로시야 사람들이 '야쿠트'족이라고 불렀던 민족의 바른 이름]족의 언어/다우르어[키타이 인의 후손인 민족 '다우르'족이 쓰는 말]/몽골어/만주어와 어순/문장 구조가 같기 때문이다 – 옮긴이),
친족으로 가정한다면 공통의 조어(祖語. 조상이 되는 말. 비교언어학에서, 같은 계통인 여러 언어들이 갈려나온 뿌리가 되는 언어를 일컫는 말이다. 한 예로, 유럽 여러나라의 언어와 아르메니아어와 쿠르드어와 파르시[페르시아어]와 방글라데시/파키스탄/바라트 북부에서 쓰이는 언어들과, 로마니[Romany. 영어권에서 ‘집시’로 부르는 민족의 바른 이름]의 언어는 ‘아리아 어’라는 조어를 갖고 있다 : 옮긴이)에서 갈라진 시기는 언어연대학(言語年代學)으로 추정해서 조몬 시대 중기 이전일 것이다.
(이것도 사실과는 다른 추정이다. 실제로는 서기 9세기 이후일 가능성이 높다. 그 무렵에 환무[桓武] 일왕이 ‘옛날 일본이 삼한과 관계가 있다고 다룬, 일본의 옛 역사책들’을 불에 태워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고, 일본 조정이 신라어를 통역하는 관리를 둘 정도로 언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 옮긴이)
대강 이상인데, 진보적 학자로 알고 있는 이노우에 씨에게서도 역사의 애매한 부분에 서둘러 의문표로 마감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두 언어의 – 옮긴이) 공통의 조어에 관해서는, 그 근거가 확실해지면 야요이 시대[彌生時代] 훨씬 이전부터 한반도(코리아 반도 – 옮긴이) 인종이 그곳에 있었다는 얘기가 되고, 일본열도 역시 대륙에 연결된 것으로 가정한다면, 지리적으로 한반도가 보다 가까운데, 먼 중국 남부(남중국인 화중[華中] 지방이나 화남[華南] 지방 – 옮긴이)를 들먹일 필요는 없다.
사실 요즘(서기 2008년 이전 – 옮긴이) 분분한 역사적 확신(서기전 500~300년부터 한국의 삼남 지방과 로시야의 연해주에서 왜 열도로 건너간 사람들이 야요이인이 되었다는 다른 나라 학계의 확신 – 옮긴이)을 일본은 애써 묵살하고 있다. (그들은 그런 확신을 – 옮긴이) 한낱 ‘속설’로 내버려 두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일본 학계와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근세/근대 서양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사실은 순순히 인정하지만, 한국인을 비롯한 배달민족에게서 영향을 받은 사실은 기를 쓰고 부정한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근대에 일본이 대한제국을 무너뜨린 뒤, 한국인들에게 일본식 문화/일본식 제도/일본의 법률을 강요한 사실은 자랑스러워하며 즐거워하고 툭하면 큰 소리로 그것을 강조하며 한국인들에게 "우리가 너희에게 베푼 '문명의 혜택'과 우리 때문에 가능했던 '조선의 근대화'에 감사하라!"고 윽박지른다!
그리고 고대 왜국이 본국인 백제의 문물과 제도를 본받은 사실은 부정하는 일본인들이, 정작 오늘날의 한국에 '국민교육헌장'이나 '자연보호헌장'처럼 근대 일본의 문물과 제도를 바탕으로 삼은 것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을 큰 소리로 강조하며 "이건 일본 걸 베낀 거네?"하고 비꼰다.
이게 옳은가? 그냥 '고대에는 왜국의 왜인이 백제의 문물을 받아들였고, 근대에는 일본식으로 바뀐 근대 서양 문화가 한국인들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사실 그대로 가르쳐야 할 것 아닌가? 왜 전자는 부정당하고 후자는 지나칠 정도로 강조되는가? 왜? - 옮긴이)
- 19 ~ 20쪽
“그러면 신라에서 망명한 왕자(王子) 아메노히보코(천일창[天日槍])는? 여기서 다카아마하라(한자로는 ‘고천원[高天原]’. ‘높은[高] 하늘[天]에 있는 벌판[原]’이라는 뜻이다. 『 고사기 』 와 『 일본서기 』 에 ‘신들의 고향’으로 나오는 곳이다 – 옮긴이)가 한반도와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의문이 생긴다(나는 오래 전, 고천원이 오늘날의 경상남도 내륙지방, 그러니까 가야 연방의 땅이었던 곳에 있었다는 학설을 접한 적이 있다. 그럴싸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도 일본의 첫 지배층은 가야나 임나 출신이었고, 고분시대에 와서야 백제 출신인 지배층이 나타났으니까 – 옮긴이).
얼핏 듣기로, 어느 학자께서도 그런 견해를 말했다 하는데, 이 밖에도 스사노오가 신라를 내왕(來往. 오고[來] 감[往] - 옮긴이)하며 선재(船材. ‘배[船]의 재료[材]’. → 배를 만드는 데 쓰는 자재 : 옮긴이)를 구해 왔다는 둥, (그의 – 옮긴이) 수염이 가슴팍까지 자라는 동안 모국을 그리워하며 통곡을 했다는 기록, 이런 역사의 파편들이 나를 사로잡고, 그 당시(고대 – 옮긴이)의 풍경이 떠오른다. 무리를 짓고 바닷가를 우왕좌왕하는 추방자들의 모습, 바다를 바라보는 절망의 눈동자, 한숨과 눈물과 절규하는 모습들이 마치 영화의 한 신(scene. 장면 – 옮긴이)처럼 클로즈업되어 다가온다.
망명자들, 소위(所謂. 이른바 – 옮긴이) 반체제의 지도자들이 절치부심(切齒腐心. 몹시 분하여 이를 갈며 속을 썩임 – 옮긴이), 권토중래(捲土重來. 흙먼지를 일으키며 되돌아옴 → 힘을 갖춰 되돌아와 예전에 자신을 꺾었던 상대와 싸워 이긴 뒤 치욕을 씻음 : 옮긴이)를 다짐하며 응어리진 유민(流民. 떠도는[流] 백성[民] → 고향을 떠나 이리저리 떠도는 백성/유랑민 : 옮긴이)들을 규합하는 광경이 떠오르기도 한다.”
- 21 ~ 22쪽
― 이상 『 일본산고(日本散考) 』 ( 작은 제목 「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에게 미래는 없다 」. ‘박경리’ 지음, ‘다산북스’ 펴냄, 서기 2023년 )에서 발췌
- 단기 4356년 음력 5월 18일에, '어쩌면, 일본인의 한국 혐오는 고대 말기인 서기 663년[남부여 부흥군이 전쟁에서 완전히 진 해]이나 서기 668년[전기 고리(高麗)가 망한 해], 또는 서기 9세기[환무 왜왕이 다스리던 해]부터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고 판단하는 잉걸이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