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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역사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잉걸
▶ 『 일본산고(日本散考) 』 : ‘일본을 살펴보고(考) (쓴) 산문(散[순수한 배달말로는 ‘줄글’])들’이라는 뜻을 지닌 책 이름.
▶ 옮긴이(잉걸)의 말 : 나는 박경리 선생님의 유고 산문을 모은 책에서, 한국인을 비롯한 누리(‘세계’/‘세상’/‘천하’를 일컫는, 순수한 배달말이자 옛 배달말)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일본과 일본인을 마주할 때 도움이 되는 문장들을 추려서 이 글에 모았다. 부디 이 글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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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서기 – 옮긴이) 1950년(이 해에 코리아[Corea] 반도에서 6.25 전쟁이 일어났다 – 옮긴이) 일본서 초판을 발행한 『 세계문예사전 동양 편 』 을 보면, < 문예사조(文藝思潮. ‘문화[文]와 예술[藝]을 다룬 사상[思]의 흘러들어감[潮]’ → 한 시대의 문학 예술을 만들어내는 데 뿌리가 되는 사상의 흐름 : 옮긴이) > 항목에 무려 26페이지가 일본 문학을 위해 할애되어 있고,
중국(올바른 이름은 ‘제하[諸夏]’ - 옮긴이) 문학이 12페이지, 인도(올바른 이름은 ‘바라트’ - 옮긴이) 문학이 약 5페이지, 아라비아/페르샤(오늘날의 이란. 넓게는 아프가니스탄이나 타지키스탄을 포함하는 ‘범 페르시아권’ - 옮긴이)/남방아세아(남[南]아시아. 부탄/네팔/시킴/몰디브/방글라데시/파키스탄/바라트/스리랑카가 있는 곳이다. 여기서는 바라트를 뺀 나머지 남아시아 나라들을 일컫는 말로 쓰였다 – 옮긴이)가 각각 1페이지 안팎,
다음은 ‘일본 주변 문학’으로 묶었는데, 아이누(또 다른 이름은 ‘야운쿠르’ - 옮긴이),
유구(류쿠.[한자로는 ‘유구(琉球)’고, 유구 현지의 발음으로는 유구를 ‘루추’로 부른다 – 옮긴이]), 대만 순으로, 그중에서도 맨 끄트머리에 '조선 문학(朝鮮 文學)'이라 하여 반(半. 순수한 배달말이자 옛 배달말로는 ‘가봇’ - 옮긴이) 페이지를 쓰고 있다.
(그 책에 – 옮긴이) 수록된 (근세조선의 – 옮긴이) 작품에서도 『 춘향전(春香傳) 』 과 『 구운몽(九雲夢) 』 을 간신히 찾을 수 있었지만, 이퇴계(본명 ‘이황’. ‘퇴계’는 그의 호다 – 옮긴이)의 이름 하나, 그들에게 협력했던 한국의 대표적 작가(이자 친일파 – 옮긴이) 이광수(李光洙. 나는 그를 ‘미X 짐승’이라는 뜻을 지닌 ‘광수[狂獸]’로 부르자고 제안한다. 실제로, 대일 항전기 때 친일파로 돌아선 이광수에게 화가 난 한국 사람들이 그의 이름 가운데 ‘광’자를 ‘빛 광[光]’ 대신 ‘미칠 광[狂]’으로 바꿔 불렀다. ‘光’과 ‘狂’의 한국식 발음이 똑같이 ‘광’인 점을 이용해, 한 글자를 바꿈으로써 이광수를 ‘미X 놈’이라고 욕한 것이다. – 옮긴이)의 이름조차 눈에 띄질 않았다.
책장에서 우연히 뽑은 책 한 권으로부터 비근한(卑近한. ‘[나/우리에게서] 낮고[卑] 가까운[近]’ → 흔히 주위에서 보고 들을 수 있을 만큼 알기 쉽고 실생활에 가까운 : 옮긴이) 예를 들어 본 것이지만, 사실 이 같은 일쯤은 다반사요, 사례로서 두드러지는 것도 아니며, 일본에서는 ‘대단치도 않은 일’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문화를 홀대(忽待. 소홀한[忽] 대접[待] → 푸대접 : 옮긴이)하는 일본의 처사가 어제오늘 시작된 것도 아니다.”
- 14 ~ 15쪽
“나(박경리 선생 – 옮긴이)는 언제부터인지, 그들(일본인들 – 옮긴이)도 마찬가지로 우리(한국인들 – 옮긴이)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들의 의식 깊은 곳의 원한이 더 오래이며, 큰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정확한 생각이고, 나도 열네 해 전부터 그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 옮긴이).
우리가 저들에게 피해 준 일이 없고, 값진 문화를 전수했으며, 나라의 기틀을 잡아주었거늘(사실은 나라 자체를 세웠다 – 옮긴이), 원한을 가질 이유가 없지 않은가. 반문해 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사실은 배달민족이 일본에게 ‘가해자’였던 적이 있기는 하다. 고대인 서기 9세기에 이른바 ‘신라 해적[한자로는 <신라구(新羅寇)>]’이 일본을 약탈한 적이 있고, 중세시대에는 몽골제국에 무릎 꿇은 후기 고리[高麗]가 군사를 내어 몽골제국 원나라의 일본 침략을 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왜구[倭寇]의 후기 고리 노략질과 침략이 ‘무죄’가 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며, 서기 1592년에 일어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근세조선 침략전쟁[줄여서 ‘6년 전쟁’]이 ‘옳은 일’이 되는 것도 아니다 : 옮긴이).
‘잠재된 과거의 열등감이 우리 민족문화를 짓이기려 든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일본인이 근세조선과 한국에서 폭력을 휘두른 것은, 세계 어디서나 나타나는 – 옮긴이) ‘정복자의 속성’이라는 꽤 ‘관대한’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집요함은 ‘열등감의 발로’나, ‘정복자의 속성’으로는 설명이 충분치 않았던 것이다.”
(아마 박 선생님은 일본의 고대사를 전공한 역사학자가 아니라, 작가였기 때문에 이 의문을 완전히 풀지는 못하신 것 같다. 그러니, 이젠 갈마[‘역사’를 일컫는, 순수한 배달말 낱말]를 전공했고, 열 살 때부터 지금[마흔다섯 살]까지 역사책을 손에서 놓지 않은 내가 대신 대답할 차례다.
내가 볼 때, 일본인의 코리아[Corea] 반도에 대한 집착과 배달민족[한국인과 조선 공화국의 공민(公民 : 국가 사회의 일원으로 독립된 삶을 사는 자유인. ‘시민’/‘국민’과 같은 뜻)과 온 누리의 코리아(Corea)계 민족들]에 대한 혐오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보수적으로 따져도, 그러니까 『 일본서기 』 에 나온 기사나 일본에 있는 지방/가문의 옛 기록들을 그대로 믿는다 하더라도, 서기 6세기에 후기가야[가야 연방]가 중기신라에게 망할 때 가야 유민들이 신라에게 무릎 꿇기를 거부하고 왜국[倭國]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서기 663년 남부여 부흥군이 신라/당 연합군에게 깨지고 남부여 본국이 완전히 망하자, 역시 많은 남부여 유민들이 신라와 당에 굽히기를 거부하고 왜국으로 달아났다. 서기 668년 이후에는 전기 고리[高麗]의 유민들이 왜국으로 달아났으며, 그들은 서기 716년에 오늘날의 일본 간토 지방의 일부인 ‘사이타마’ 현으로 옮겨가 뿌리를 내렸다. 전기 고리 유민들은 서기 9세기 말 ~ 10세기 초에는 일본 혼슈 섬의 북쪽 끝인 ‘아오모리’ 현의 ‘쓰가루’라는 벌판에도 뿌리를 내렸으며, 이들은 그대로 혼슈 섬 동북[‘도호쿠’] 지방의 일본인이 되었다.
또한 서기 2000~2010년대에 한 한국인 학자가 한 연구에 따르면[그는 서기 1982년에 활약한 다른 한국인 학자의 연구를 참고하고, 그것을 계승/발전시켰다], 코리아 반도로부터 일본열도[왜 열도/‘왜국’]로 난민들이 달아난 일은 서기 6세기 이전에도 일어났는데, 그것은 온 예순여섯 해[166년] 전인 서기 396년에 일어난 일이며,
고구리[高句麗]의 태왕[太王]인 광개토왕[이름은 ‘고담덕’. 정식 시호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호태왕’]이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치고 도읍이었던 곰나루[한자로는 ‘웅진(熊津)’]를 비롯한 수많은 성과 마을을 깨부수어 백제 사람들이 고구리 군사의 창칼을 피해 코리아 반도 밖으로, 왜 열도로 달아나 그곳에 먼저 와서 뿌리내린 사람들인 조몽인과 야요이인을 제압하고 망명정권[고분시대의 왜국 정부]을 세우고 이른바 ‘왜인[고분시대의 일본인]’이 된 일이다.
바로 이런 사실[史實]들 때문에, 서기 4세기/6세기/7~8세기의 ‘일본인’들은 자신들을 고국에서 내쫓거나 자기 나라 사람들을 죽인, 코리아 반도와 이른바 ‘만주’에 남아있던 신라인/고구리 사람들을 미워했고, 서기 668년[이 해에 전기 고리가 멸망하고 일단은 ‘통일신라시대’가 시작된다] 이후에는 그 미움이 ‘중기신라를 향한 미움과 분노와 원한’으로 바뀌었으며, 그것이 『 일본서기 』 [서기 8세기 전반에 정리되었다]에 나타나는 신라를 비난/경멸/혐오하는 마음이 된 것이다.
실제로 일본의 고대 기록, 그러니까 ‘헤이안 시대’인 서기 8~9세기의 기록에는 ‘달갑지 않은 나라는 신라[新羅]로다.’는 글귀가 나올 정도니, 그 원한과 반감이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이 가리라.
이 기억은 고대가 막을 내리고 중세가 시작되면서 – 그리고 무사들이 정권을 잡고 서로 싸우기 시작하면서 – 잊혀졌으나, 근대 이후, 그러니까 서기 1945년 이후 한국과 일본 역사학이 다시 고대사를 파헤치기 시작하면서 되살아나기 시작했고,
그 뒤 일본 우익들은 – 마치 에도시대 말기부터 싹튼 국수주의 학문인 일본의 ‘국학[國學]’을 바탕으로 삼은 근세조선 멸시가, 메이지 시대에 와서는 이른바 ‘임나일본부 설’로 바뀌어 근대 일본이 ‘우리[근대 일본]는 <잃어버린 우리 땅>인 조선을 <되찾을> 뿐이다.’는 주장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듯이 -
‘그렇다면, 피난민의 후손이거나, 그 피난민을 받아준 사람들의 후손인 우리들[일본인들]이 <조상의 땅>을 <되찾지> 말아야 할 까닭이 뭔가?
어차피 <조선반도(일본이 코리아 반도를 부르는 말)>에 지금 살고 있는 것들은 우리 선조들을 죽이거나 몰아내고 뿌리를 내린 것들이거나, 설령 우리 선조들의 <동족>이었다 하더라도, <비겁하게> 침략자[신라군이나 당군]에게 굽혀서 살아남았고, <더럽게도> 한족[漢族]의 문화를 받아들여 우리들과는 달리 자신의 <전통>을 잃어버렸는데, 그런 것들보다는 <전통>을 <있는 그대로 지닌> 우리가 <조선반도>로 건너와서 사는 편이 더 바람직하지 않아?
그리고 땅에 사는 것들을 죽이는 게 뭐가 문제야? 오래 전의 <앙갚음>을 할 뿐이고, 우리 선조들의 원한을 풀어 드리는 것일 뿐인데!
게다가 그것들을 쥐어짜고, 그것들이 가진 것을 빼앗아서 우리 호주머니에 넣는 것도 잘못된 일이 아니야. 우리 선조들에게서 땅을 빼앗고, 우리 선조들이 그 땅에서 누렸던 것들을 <부당하게> 누리고 살아온 것들이 그것들인데, 그것들을 좀 쥐어짜면 어때서 그래? 이건 <올바른 복수>고, <당연한 앙갚음>이야!’
하고 생각하게 된 건 아닌지.
이는 서기 19세기 말 이후 시온주의를 내세우며 ‘우리의 옛 땅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기 시작한 유럽계 유대인들[‘이슈케나지’로 불린다]이 1800년 전의 기억[로마군에게 쫓겨나기 전까지 오늘날의 필리스틴 땅에 살았던 사실]을 떠올리며,
‘우리 조상들이 오래 전에 그곳에 살았으니, 오늘날의 우리가 그곳으로 <돌아가서> 총칼을 들고 떠나기를 거부하는 아랍인들을 죽이거나 내쫓고, 그 <빈 땅>에 뿌리내리는 건 당연한 거야.’하고 주장하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불행히도, 북아프리카나 서아시아나 북동 아프리카 출신인 유대인들도 이 일에 가담했다!].
[덧붙이자면, 걸프 전쟁과 미국의 이라크 침략 전쟁도 '바빌로니아 제국의 후손'을 자처한 이라크를, 바로 그 바빌론 때문에 짓밟히고 끌려가서 포로로 산 적이 있는 유대인들이 '복수를 하고 싶어서' 자신들과 친한 미국 정부를 부추겨 그들이 이라크를 치게 했던 전쟁이라고 설명하는 글도 있다. 내가 오래 전 그 글을 직접 읽었기 때문에, 어렴풋이나마 기억하는 사실이다.
이를 일본에 대입해서 생각하자면, 일본은 서양 열강의 묵인과 지지를 바탕으로 근세조선과 대한제국을 침략해서, 끝내는 무너뜨렸는데, 이것이 단순한 '식민지 확보'가 아니라 - 일본 지배층의 무의식을 바탕으로 말하자면 - '고대에 우리가 일본열도로 쫓겨난 것을 복수한 것'이었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나를 비롯한 한국인들은 이 사실을 더 '소름끼치고, 집요하고, 끔찍한 일'로 이해해야 한다. 고대의 원한을 되살려서 근대에 폭력을 휘두른 것이니까.
그리고 내가 십수 년 전에 읽은 신문기사에 따르면, 유럽 백인들은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를 '자신들이 지배하고, 통제하고, 억누르고, 다스려야 하는 곳'으로 생각하는 무의식을 강하게 품고 있고, 이런 무의식은 제국주의 시대가 끝난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고 한다.
실제로 비엣남(Vietnam)은 포기하고 물러나자고 했던 프랑스 백인들도, 알제리만큼은 악착같이 가지고 있으려고 했고, "프랑스의 알제리!"라는 구호를 내걸며 알제리 독립군을 잔인하게 탄압했다.
이는 2차 대전이 끝났을 때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와 중화민국의 점령지/식민지는 포기해도, 코리아 반도와 이른바 '만주'와 대만만큼은 끝까지 가지고 있으면서 "만약 그곳에서 독립 운운하는 원주민이 있으면 용서 없는 탄압을 가한다!"고 딱 잘라 말했던 근대 일본의 지배층들이 드러낸 태도를 떠올리게 한다(다행히, 이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친일파가 청산되지 못한 건 사실 아닌가? 그리고 그들이 한국을 만주국처럼 일본의 괴뢰국가나 반식민지로 만들 수 있지 않은가?).
'알제리'를 '한국'으로, '비엣남'을 '오세아니아와 중화민국의 식민지/점령지'로, '프랑스'를 '일본'으로 바꾸면 딱 한국과 일본의 이야기가 된다! 이러니, 나는 이 일을 '지나간 옛날'이나, '남의 이야기'로 여기지 못할 수밖에 없다]
지나친 추측이 아니냐고? 추측이 아니다. 사실이다. 나는 스물여섯 해 전인 서기 1997년, 그러니까 내가 열아홉 살이던 해에 『 한국인이 본 왜인전 』 [‘장찬우’ 지음, ‘동신출판사’ 펴냄]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장 선생은 일본에 유학하고 오랫동안 일본인들을 만나거나 이야기를 나눈 사실을 바탕으로 그 책을 썼다.
그 책에서 장 선생과 한 일본인 대학생[그때 20대였으므로, 지금은 40대 중반이나 후반일 것이다]이 갈마를 놓고 말다툼을 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내가 그 책을 읽은 기억을 되짚어서 말하자면,
그 대학생은 말다툼을 하다가 더 이상은 장 선생에게 반박할 수 없게 되자, 화를 내며 장 선생에게 ‘네가 한 말이 다 옳다. 실은 그 때문에 우리[일본 - 잉걸]의 [한국을 침략한 - 잉걸] 전쟁은 따지고 보면 다 <고향을 찾아가는 일>이고, 우리는 <잃어버린 옛 것>을 되찾으려고 한 거야!’ 하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 정부와 일본 정치인들과 일본 언론들과 일본 학계와 일본 우익은 이 대학생의 말에 지금까지 단 한 마디도 반박을 한 적이 없다. 나아가 이 대학생은 이 말을 한 뒤 일본 경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거나, 일본 감옥에 간 적도 없다.
그렇다면, 이 대학생의 말은 진담이자 진심이고(사람은 원래 화가 나면 속마음을 드러내는 법이니까), 이 대학생은 일본 사회가 품고 있던 속마음을 정직하게 드러냈을 뿐이며,
오늘날에도 일본 정부와 우익은(어쩌면 왕실도) 그 속마음을 바탕으로 한국인을 죽이거나 몰아내거나 세뇌해서 ‘한국인의 몸에 일본 우익 인사나 국민의 머리를 달아놓은 족속’으로 만든 뒤, 한국과 조선 공화국을 다시 한번 침략하고 정복하고 점령해서 식민지로 만들려는 계획을 밀고 나가는 건 아닌가? 나는 그런 의심을 안 할 수가 없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근대/현대 일본의 한국 혐오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힘 있는 가설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고대의 원한/고대의 실패가 오랫동안 잊혔다가, 현대에 되살아나서 오늘날의 배달민족을 향한 혐오로 탈바꿈했다는 것. 그것이 오늘날 한국인을 욱죄고 괴롭히는 문제고, 그것이 사라지지 않는 한 한국과 조선 공화국과 일본 사이에는 어떤 참된 평화도 없을 것이다.
[덧붙이자면, 나는 고대의 원한과 실패와 피난을 바탕으로 현대의 한국인을 혐오하고 죽이려고 벼르는 오늘날의 일본 우익들을 보면서, 중세시대와 근세의 정복전쟁을 떠올리며 근대나 오늘날의 무슬림들에게 이를 가는 바라트의 힌두 민족주의자들을 떠올렸다.
둘 다 아주 오래 전에 자신들의 조상들에게 일어났던 일을 떠올리며, 가해자의 후손들에게 이를 갈고, 그 후손들에게 ‘복수’를 하려고 한다.
공교롭게도 둘 다 자신들의 분노와 혐오와 복수심을 근대(!) 이후에, 그러니까 제국주의 시대부터 키우기 시작했다는 점도 마음에 걸린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지금(또는 근대 이후)에 공격당하는 사람들(그러니까, 오늘날의 한국인이나, 바라트의 무슬림들)이 자신이 입은 피해만 강조한다고 해서 될 일인가? 당연히(!) 우리는 신국(神國) 사상이나 힌두 민족주의의 편을 들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대안’이자 ‘해결책’이 배달민족의 국수주의나 이슬람주의가 될 수도 없다. 고대/중세/근세의 전쟁을 합리화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고. 우리는 ‘제 3의 대안’을 찾아야 한다]
- 옮긴이)
- 16쪽
“물질과 계산에 편중한 일본인들, 그들은 지난날(중세 말 왜구[倭寇]의 후기 고리[高麗] 노략질/서기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근세조선 침략 전쟁[줄여서 ‘6년 전쟁’]/서기 1870년대부터 서기 1910년까지의 근세조선 - 대한제국 침략/대일 항전기 : 옮긴이)을 잊은 듯 부담 없이 이 땅을 밟는다. 어디서든 흔히 마주치게 되는 일본인, 그러나 상투적인 그들 표면보다 내면에 숨겨졌을 서늘한 칼날(거의 모든 일본인 안에 들어있는, 한국을 혐오하는 마음. 줄여서 ‘혐한’ - 옮긴이)이 왜 자꾸 가슴에 와 닿는 걸까.”
- 18쪽
“일본은 아이누, 유구, 대만에 대해서는 (그 존재를 – 옮긴이) 부인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조상(祖上)에 관한 한, 민족 원류에 관해서 그들은 (존재도, 사실도 – 옮긴이) 부인한다. 한국의 원류를 부인하면서, 한국의 모든 것을 부인한다. 집요하게, 광적으로.”
(사실이다. 내가 스무 해 전에 구해서 읽은 책인, 『 환경은 세계사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하는 제목을 단 책이자, 일본인 교수들이 쓴 책에는, ‘일본의 야요이 시대가 코리아 반도의 남쪽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연 시대였다는 기존의 설명은 틀렸고, 대신 오늘날의 제하 남부인 남중국 지방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간 사람들이 연 시대였다는 학설이 옳음이 밝혀졌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일본인들이 이 정도로 자신들의 고대사가 한국과 관련되었음을 철저하게 부정하려고 든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고고학이나 역사학이 밝혀낸 것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한국인을 비롯한 누리 여러 나라 사람들은 알아야 한다 – 옮긴이)
- 19쪽
― 이상 『 일본산고(日本散考) 』 ( 작은 제목 「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에게 미래는 없다 」. ‘박경리’ 지음, ‘다산북스’ 펴냄, 서기 2023년 )에서 발췌
- 단기 4356년 음력 7월 14일에, 국치일에, ‘어차피 한국인들이 민족주의와 갈마와 정의를 추구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는 한, 일본과의 새로운 전쟁은 피할 수 없다. 일본은 지금 교련 과목을 되살리고, 자위대를 군대로 바꾸려고 하며, 한국 안의 친일파들을 조종해서 한국을 만주국이나 “식민지 조선”처럼 만들려고 하고, 길거리에서 “<조센징>을 죽여라!”하고 시위하는 넷우익을 내버려 두거나 부추기지 않는가?’ 하고 생각하며(만약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나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근세조선의 의병이나 동학군이나 정미의병이나 대한 독립군이나 의열단을 본받아 총을 들고 싸우리라.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몰래 숨어서 독립투사들을 도와서라도 일본과, 친일파들과, 친일국가의 정부나 친일국가 출신 ‘사냥개[일본 정부/우익을 돕는 작자들]’들과 맞서 싸울 것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 손자병법 』 의 구절에 따라, 적인 일본을 제대로 알고 파헤치기 위해 이 글을 인용하고, 소개하고, 주석을 단 잉걸이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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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역사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잉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