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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스크랩 광릉의 세조이시여
황종원 추천 0 조회 4 12.06.18 12:3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어여 천천히 올라 가십시다.


 

형님, 우리집 사람 태운 휠체어를 혼자 밀지 말아요.
손목이 바로 아파집니다.
더구나 여기는 오르막이에요. 함께 밀고 가십시다.

 

 

광릉이면 광릉이지 뉘 계신지 모르고 여기를 지나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지요.

 

 

 

단종의 삼촌이신 세조께서 계신 곳이라니.
우리 눈에는 릉이면 다 똑 같이 무식하니 무식한 구경을 하십시다.
두 분 어르신 세조와 그 왕후 정희왕후 윤씨를 뵈러 가자요.

 

 

능, 원, 묘의 차이
조선 왕릉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 하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원(園)이라 하며,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자식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와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의 무덤을 묘(墓)라 일컫는다.

 

 

 

7대 세조(世祖)
능호 : 광릉
위치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전읍 부평리 산100-1
지정번호 : 사적 제197호
조성시기 : 1468년(예종 1)
능의구성
광릉은 같은 산줄기에 좌우 언덕을 달리하여 왕과 왕비를 각각 따로 봉안하고 두 능의 중간 지점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우는 형식인 동원이강(同原異岡)릉으로서, 이러한 형태의 능으로는 최초로 조영되었다. 좌측 능선의 봉분이 세조의 능이며 오른쪽의 봉분이 정희왕후의 능이다. 광릉은 다른 왕릉에 비해 간소하게 조영되었다.

Gwangneung (光陵)
It is the royal tomb of the 7th King Sejo (世祖, 1417-1468) of the Joseon Dynasty and Queen Jeonghui (貞熹王后, 1418-1483) from the Yun family. The Gwangneung was well protected during the entire Joseon Dynasty by prohibiting even the removal of a mere tuft of grass.


 

 

 

세조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세조의 유언에 따라 이전까지 석실로 되어 있던 능을 회격(灰隔)으로 바꾸어 부역 인원을 반으로 줄이고 비용을 절감하였다.

Today, it is a paradise for animals and plants and a natural museum of the habitat. King Sejo was the second son of King Sejong and was installed as Prince Suyang in 1415. Having great ambition for power, King Sejo raised a revolt, the Gyeyujeongnan (癸酉靖難) in 1452 after the enthronement of King Danjong. With this revolt, he seized power and King Danjong relinquished the throne in 1455.

 

 

 

또한 봉분 주위에 둘렀던 병풍석을 없애면서 병풍석에 새겼던 십이지신상은 난간의 동자석주에 옮겨 새기는 등의 상설 제도를 개혁하였다. 능하구역에는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르는 참도가 생략되어 있다. 이렇게 간소하게 개혁된 상설제도는 이후의 왕릉 조성에 모범이 되었다.

 

 

Even though King Sejo usurped the throne, he was responsible for many brilliant achievements by improving the entire national system:

 

 

정자각입니다.

제사를 모셨지요.

 

externally, he strengthened national power and made two conquests of the northern tribe, Jurchen. Internally, he compiled the Gyeonggukdaejeon (經國大典, Grand Code for State Administration).

 

 

정자각 주위를 한 번 돌아 봅니다.

 

 

 

능의역사


세조의 능은 서울로부터 다소 떨어지고 골이 깊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있다. 광릉자리는 원래 다른 이의 묘자리였으나 풍수상 길지라 하여 묘자리의 주인이 세조에게 바쳤다고 전해지며 일부 풍수가들은 세조의 광릉 자리가 좋아 조선 500여 년을 세조의 후손들이 통치하였다고 전하기도 한다.

1468년(예종 즉위) 11월 28일 주엽산 아래 세조를 예장하고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483년(성종 14) 3월 30일 정희왕후가 승하하자 같은 해 6월 12일 광릉 동쪽 언덕에 예장하였다.

 


 

 

 

세월의 흔적은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정자각 뒤로 갑니다.

 

 

정자각 뒤에서 전면을 봅니다.

 

 

여기가 어디라는 비문이 있지요.

 

 

 

조선국와 세조와 그 왕후의 능이 여길세

하는 표지비입지요.

 

 

제사 음식을 차리던 수라간이요.

참 작은 건물입니다.

수많은 사람들 입을 챙겨 주려면 당키나 했을런지요.

 

 

여러가지 복원을 하면서 여기는 그냥 둔 속 내를 알 수 없네요.

 

 

 

 

보입니다.

 

 

언덕길을 오르기 만만치는 않습니다.

 

 

 

 

예전에는 우리 같은 민초가 감히 여기를 오르내릴 수 있었을까요.

 

 

왕릉이 점점 다가옵니다.

 

 

대단하다고요? 제 눈에는 참으로 소박합니다.

우리 부부가 지리산 화엄사에 갔을 때 일입니다.

절입구에는 의례 세상 떠난 스님들을 모신 부도들이 있지요. 거기서 저는 깜짝 놀랠 부도를 보았지요.

스님은 생전에 겸손하셨을 터이나 제자 스님들은 위풍당당합니다. 그 당당함이 슬프던 부도를 보려면 여기

합장 화엄사 부도군 http://blog.daum.net/semanto/15604895을 한 번 보십시요.

 

그에 비하면 일국의 왕릉은 참으로 소박하지요.

 

 

나는 여기 섭니다.

사육신과 생육신이 통곡하고

단종이 아득한 언덕길을 넘어가고

건국이 막 시작한 나라에서 정통의 혈통을 지키려고 자신의 형제까지 없앤 비정의 왕에게 무슨 맘이 있었을까요.

그 심장이 묻인 여기에 비록 육신은 삭았어도 보이지 않는 티끝 속에 왕은 계실 것이니.

 

 

삼가

 

 

황희의 19대손 소인이 여기 문후를 여쭙니다.

 

 

일배

일배

반배

 

 

 

왕이시여.

제 할배에 대한

왕의 기억을 여기 도와 드립니다.

 

황희(黃喜, 1363년 3월 8일(음력 2월 22일) ~ 1452년 2월 8일)는 고려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재상(宰相)이다. 경기도 출신으로 초명은 수로(壽老), 자(字)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村),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음서로 관직에 나갔다가 문과 급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판서, 재상 등을 지내며 맹사성 등과 함께 세종대왕을 잘 보필하였다.

고려에서 음서(蔭敍)로 출사하여 복안궁 녹사로 관직에 올랐다. 그 뒤 1389년(창왕 1년) 별장으로 과거에 급제했으나, 1392년(공양왕 3년) 고려 멸망 후 은거하였다. 그러나 동료들과 이성계의 부름으로 다시 관직에 올라 성균관학관으로 출사하여 조선에서 형조판서, 사헌부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거쳐 영의정부사에 이르렀다. 사후 1455년(세조 1년)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에 책록되고,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성격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존경 받았으며, 시문에도 뛰어났고 관료생활 중 많은 치적과 일화를 남겼다. 사후 청백리로 규정되어 일반적으로는 청백리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뇌물수수[1] , 간통[2], 부패 등 좋지 않은 물의를 빚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세종대왕의 신임으로 가벼운 처벌을 받거나 복직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어느 뉘도 청렴 결백하다는 그 울타리에 살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가지 비리와 이권 청탁의 의혹이 있었음에도 국가 미래를 내다보는 정확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어 세종은 그의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를 신임했다.[3] 현명함과 냉철한 판단력으로 세종대왕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의 한사람으로서 세종대왕 치세기간 중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였다.

 

 

 

 

 

왕을 지키는 여기 조각들 명칭은 나중에 살펴볼랍니다.

제가 공부가 안 되어 하!하!하!

 

 

앞으로 보고

 

 

옆으로 보고

 

 

뒤로도 살핍니다.

망아지 엉덩짝이 몇 백년이 지난 세월에도 포동포동합니다.

 

 

대신인가요.뭘 들고 있는지요?

 

 

처형

형님

찬찬히 보세요.

 

제 동서가 소리칩니다.

이 사람아. 동생에게 그 따위로 하면 어찌하나.

에고, 형님. 왕의 면전에서 감히 이 사람 저 사람 하지 마세요.

이 분은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이시랍니다.

 

동서가 화 내는 역사를 저 또한 알고 있습니다 .

이런 역사가 있지요.

《세조실록》의 내용

생몰년도 : 1417년 ~ 1468년
재위기간 : 1455년 ~ 1468년

세조는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1417년(태종 17) 9월 29일 태어났다. 세조(世祖)의 이름은 유(?), 자는 수지(粹之)이며, 처음 진평대군 (晉平大君)으로 봉해졌다가, 1445년(세종 27)에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개봉되었다.

 

자질이 영민하여 유교 경전과 사서(史書)에 능통하였고, 무술을 좋아하여 병학(兵學)·역산(曆算)·음률(音律)·의약(醫藥)·복서(卜筮)에 이르기까지 널리 통하였다. 세조는 즉위 후에 군비를 강화하여 두 번이나 압록강·두만강 건너편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이징옥(李澄玉)의 난(1453)과 이시애(李施愛)의 난(1467)을 진압하였다. 또한 안으로 국가의 모든 제도를 정비하고 《경국대전(經國大典)》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편찬하여 조선 왕조의 통치 기반을 완성하였다.

 

세조는 이와 같은 많은 치적을 세워 조선 초기 왕권 확립에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사육신으로 불리는 집현전 학사 출신 관료들이 단종 복위를 계획한 사건이 발각되자 이들을 모두 살해하였을 뿐 아니라 선왕이자 조카인 단종을 유배지에서 죽이는 등 수많은 정적의 피를 보았다.


그러나 그는 12세의 어린 조카 단종이 즉위하자, 한명회(韓明澮)·권남(權擥)·정인지(鄭麟趾)·한확(韓確)·최항(崔恒)·신숙주(申叔舟) 등과 공모하여 단종 원년(1453) 10월에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등을 죽이고 그 일파를 귀양보낸 ‘계유 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켰다. 단종 3년(1455) 윤6월 11일(을묘)에는 선양(禪讓)의 형식으로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였다.

계유정난은 1453년(단종 1) 단종 보위 세력의 정치 주도에 불만을 품은 수양대군이 일으킨 쿠데타였다.

궐 안이 좁다는 이유를 내세워 재상들이 시종을 두고 혼자 들어오게 하여 그들을 순서대로 죽이는 방법으로 미리 작성된 살생부에 오른 인물들에 대한 살육을 시작하였다.

수양대군은 이러한 절차를 거쳐 영의정, 이조판서, 병조판서, 내외병마도통사 등을 겸임하며 실제 정권과 군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세조가 불법으로 왕위를 찬탈하자,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성승(成勝)·유응부(兪應孚)· 권자신(權自愼)·허조 등이 그 해 겨울에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고, 이듬해 6월 1일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자리를 이용하여 세조와 세자를 죽이고 단종을 복위시키려고 하다가 동모자 김질의 밀고로 모두 체포, 처형되었다.

 

 


그 후 1년을 지나 세조 3년(1457) 6월 21일(계축)에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하여 영월(寧越)에 안치하였다가, 그 해 10월에 목매어 죽게 하였다. 이와 같이 세조와 세조조의 소위 정난·좌익 공신인 신숙주·한명회·최항·강희맹·양성지 등은 세조 즉위 당시에 불의한 행동을 하였기 때문에, 예종 원년(1469) 4월 1일 《세조실록》을 편찬할 때, 혹은 그들의 비행을 기록한 사관(史官)의 사초(史草)가 있을까 하여 사초에 사관의 성명을 기록하게 하였다.

 

 

 

 

 

이렇게 이름을 쓰게 함으로 말미암아 민수(閔粹)의 사옥(史獄)이 일어났다. 민수의 사초 가운데에 양성지·신숙주·한명회· 임원준(任元濬)·홍윤성(洪允成)·윤사흔(尹士昕)·김국광(金國光)·강효문(康孝文) 등 세조조의 공신에 대한 비행을 기록한 것이 많았다. 그는 신숙주·한명회·양성지가 주가 되어 《세조실록》을 편찬하자 크게 불안하여, 실록청 낭청 중 친구였던 기사관 강치성(康致誠)을 통하여 사초를 도로 반출하여 위험한 문구를 개찬하거나 삭제하여 바쳤다.

 

 

 

후에 이 사실이 발각되어 민수·강치성과 기타 관계자 10여 명을 하옥하고, 다른 사초도 조사한 결과 기사관 원강숙(元康叔)의 사초 가운데에도 당초 기록을 삭제한 것이 발견되었다. 예종은 친히 이들을 국문하여 마침내 원강숙· 강치성을 사형에 처하고, 민수는 곤장 1백 대를 때려 제주의 관노(官奴)로 삼았다.

 

 

《세조실록》은 세조조의 소위 정난·좌익 공신인 신숙주·한명회·최항·강희맹·양성지가 주가 되어 편찬하고, 편찬 당시 사초에 사관의 성명을 기입하게 하여 민수의 사옥이 일어났으므로, 사관들은 모두 세조 즉위 당시의 일과 대신의 비행을 직필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세조실록》 중에는 세조 즉위 당시의 일이 모두 합법적인 것으로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조조 공신에 대한 비판 기사도 거의 없는 편이다. 그러므로 《세조실록》 중 세조가 단종을 폐하여 죽이기까지 한 권력 투쟁에 관한 기사는 그대로 믿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이 때문에 김종직이 조의제문(弔義帝文)과 술주시(述酒詩)를 지어 세조가 단종을 폐하여 죽인 사실을 초(楚)나라 항우(項羽)가 의제를 죽인 데에 비유하여 기술하고,

 

 

그 제자 남효온(南孝溫)은 《육신전(六臣傳)》을 지어 세조와 신숙주·한명회 등을 통렬히 비난하였다.

 

 

 

왕의 능 뒤에서 섰습니다.

앞산이 보입니다.

그러나 먼산이 보이지 않는군요.

문득 시야가 막힌 여기를 택한 옛 어른들의 심사는 무엇일까요.

 

 

 

세조왕릉에서 정희왕후능으로 가는 샛길이 막혀 있네요.

왜 못가는 것일까?

 

 

일단 왕릉에서 내려와 보자고요.

 

 

 

7대 세조(世祖)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
생몰년도 : 1418년 ~ 1483년
생애이야기
정희왕후는 판중추원사 윤번의 딸로 1418년(태종 18)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났다. 1428년(세종 10) 수양대군과 혼인하여 낙랑부대부인에 봉해졌으며, 세조가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남편인 세조가 먼저 승하한 뒤 그녀의 둘째 아들인 예종이 즉위하였는데, 선천적으로 병약하였던지라 재위 1년 2개월만에 예종 역시 승하하였다. 당시 선왕이 누구로 하여금 뒤를 잇게 할 것인가를 정하지 않고 승하하게 되면, 그 권한은 대비에게 주어졌다.
정희왕후는 이 권한을 통해, 젊은 나이에 요절한 자신의 첫째 아들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자산군을 왕으로 지목하여 대통을 잇게 했다. 그리고는 예종대의 섭정을 이어 7년이라는 기간 동안 수렴청정을 행하게 되었다. 이는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이었다.
1483년(성종 14) 3월 30일 66세의 나이로 온양행궁에서 승하하여 같은 해 6월 12일 광릉 동쪽 언덕에 예장되었다.


일화
조선 선조 때의 이조판서 이기가 쓴 글들을 모은 문집『송와잡설(松窩雜說)』에는 정희왕후 윤씨가 수양대군의 부인이 된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왕실의 혼사를 알아보던 중, 궁궐의 감찰 상궁과 보모상궁이 윤씨 집안에 수양대군에게 적합한 배후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갔는데, 사실 이때 후보자는 정희왕후의 언니였다고 한다.
그런데 궁중에서 사람이 나왔다는 말에 정희왕후가 어머니 이씨 뒤에 숨어서 어른들 이야기를 듣다가 감찰상궁의 눈에 띄고 만 것이다. 언니보다 정희왕후의 자태가 더 비범하다고 대궐에 알려지면서 그녀는 언니 대신 왕실에서 가례를 올리고 낙랑부대부인으로 봉해졌다.
그 후 그녀는 계유정난 당시 사전 정보가 누설되어 수양대군이 거사를 망설이자 손수 갑옷을 입혀 그에게 용병을 결행하게 할 만큼 결단력이 강한 여장부였다. 1468년 그의 아들 예종이 19세에 왕위에 오르자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을 하고, 이후 손자 성종이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기도 하였다.

 

 

 

 

 

왕후릉은 짝수일만 열리는군요.

 

 

Queen Jeonghui was the mother of King Deokjong (德宗) and King Yejong (睿宗). When King Deokjong died young and King Yejong ascended the throne at the young age of 14, Queen Jeonghui ruled as regent for the first time in the history of the Joseon Dynasty. When King Yejong passed away after just one year of his reign, she raised Prince Jasan (King Seongjong), the son of King Deokjong, to the throne. As King Seongjong also ascended the throne at the tender age of 13, Queen Jeonghui ruled as regent again for seven years. She was a woman of strong character, as seen from the episode of encouraging King Sejo during the Gyeyujeongnan and her two regencies.

 

 

멀리 뵙고 문후를 드립니다.

 

 

참고

광릉홈페이지 http://gwang.cha.go.kr/n_gwang/index.html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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