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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이스터 섬, 여서도
2016년 10월 섬학교 <여서도 돌담 특집>
프레시안 기사입력 2016.09.06. 22:26:34 최종수정 2017.11.01. 22:11:41
돌과 바람의 왕국, 한국의 이스터 섬, 여서도.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섬여행가)는 10월 1(토)∼2일(일), 제52강으로 완도 앞의 전설 같은 섬 여서도로 떠납니다. 완도에서는 하루에 한 번밖에 배가 다니지 않는 낙도라 심야인 10월 1일 0시에 서울을 출발해 여서도로 갑니다.
여서도는 한국에서 돌담이 가장 아름다운 섬입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높고 거대한 돌담들이 마을 전체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마을의 집들은 가파른 비탈에 서 있고 그 반은 돌집입니다. 작은 마을이지만 길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어 초행의 나그네는 길을 잃고 헤맬 정도지요. 바람 때문에 밭들까지도 돌담을 쌓았는데 그래서 마을의 돌담들은 모두가 하나로 이어진 거대한 성곽 같습니다.
오로지 이 돌담 하나 보기 위해 여서도로 갑니다. 여호산 트레킹 길도 있지만 가을에는 뱀들이 지천이라 산에 오르기 위험합니다. 그러니 이번 여서도 길은 오로지 마을의 돌담을 거닐거나 낚시를 하거나 해변에서 멍하게 앉아 있거나 아무튼 최대한 한가롭게 지내다 올 예정입니다. 트레킹을 원하는 분은 이번에는 참아주세요 민박집이 작아 선착순 25명만 함께 합니다. 완도에서는 구계등 해변과 상록수림도 거닐다 옵니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10월 답사지인 <돌과 바람의 왕국, 여서도>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돌과 바람의 나라
완도항을 출항한 섬사랑3호는 청산면의 여러 섬들을 거처 여서도로 향한다. 여객선은 완도와 여서도 사이를 하루 한 번 왕래하는 정기선이지만 난바다의 드센 파도로 결항이 잦다. 떠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배다.
완도에서 여서도까지 직항로는 40여 킬로. 여객선은 쾌속선으로 50분 남짓이면 족할 거리를 세 시간에 걸쳐 항해한다. 여서도는 완도군의 200여 개 섬들 가운데서도 낙도다. 육지의 오지처럼 바다의 낙도를 가리는 지표는 거리가 아니라 접근성이다. 소모도와 대모도, 장도, 청산도 등의 기항지를 돌고 돌아 여서도에 입항한 배는 잠시의 주저함도 없이 서둘러 회항한다.
무엇일까. 나그네를 섬으로 데려온 것은. 돌집들, 민가의 담장이라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높고 거대한 돌담들. 이 섬은 돌과 바람의 나라다. 오래된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섬은 마치 사라진 잉카나 이스터 섬의 유적처럼 경이롭다. 이스터의 거석 문명은 붕괴했지만 여서도의 돌 문명은 현존한다. 돌들이 나그네를 섬으로 이끌었다. 이런 섬의 모습이 외부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마을의 집들은 가파른 비탈에 서 있고 그 반은 돌집이다. 작은 마을이지만 길들이 미로처럼 얽혀있어 나그네는 길을 잃기 쉽다. 이 나라 어느 마을, 어느 섬에서도 나그네는 저토록 장대한 돌담들을 보지 못했다. 궁궐의 담장도 이보다 높지는 않을 것이다. 돌담들에 둘러쌓인 마을은 마치 거대한 성곽도시 같다. 작은 섬에 어째서 이토록 큰 요새가 필요했던 것일까. 왜구나 해적들도 사라진 바다에 막아야 할 어떤 적이 더 있는 것일까.
흩어져 있는 돌들을 불러모은 것은 누구일까. 바람이었을까. 바람의 침략 앞에 섬은 늘 불안한 것일까. 섬에서 해적보다 무서운 것이 바람이다. 바람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사람들은 돌담을 저토록 높이 쌓았다. 돌담들은 거주 공간을 분리시켜 주는 동시에 하나로 굳건히 연결되어 섬을 보호한다. 높이 5미터가 넘는 돌담들은 아무리 큰 바람도 막아낼 수 있는 철옹성이다. 바람을 막아줄 무인도 하나 없이 큰 바다를 앞에 두고 산비탈에 의지하여 살 수밖에 없는 섬의 지형이 이런 주거문화를 만들어냈다.
여서도를 찾는 여행자는 희귀하다. 외부인은 대부분 낚시꾼이거나 공사장 인부들이다. 마을 안길로 들어서니 밭에도 돌담이 있다. 사람이 떠난 뒤 집을 허물고 밭을 만들었으나 돌담은 남겼다. 바람으로 인해 돌담은 소멸을 면했다. 바람은 자기 적의 보호자가 된 것이다. 돌담이 없는 곳은 마대자루를 이어 붙여 바람막이를 했다. 고장 나 못쓰게 된 텔레비전조차도 담장으로 쓰였다.
“다 내빌고 가지라우”
북향한 섬마을, 겨울 해는 짧다. 어두워가는 골목, 돌담길을 따라 걷는다. 어느 집 대문간에 연기가 자욱하다. 할머니는 마른 풀을 태워 아궁이 불을 지핀다. 금새 사그라드는 불길을 뒤쫓느라 손놀림이 바쁘다. 산에 나무가 울창해도 땔감을 하러갈 힘이 없어 장작불은 엄두도 못 낸다. 가마솥 안에는 소먹일 여물이 끓는다. 여서도의 소들은 소막에서 키워지거나 산에 방목된다.
"아저씨는 자망하고, 나는 소 키고. 나가 핵교도 안 댕기고, 암 것도 몰라라우."
노부부가 할아버지는 그물로 물고기를 잡고, 할머니는 소를 키우며 산다.
"시킨 일만 하고 부모네 밑에서 살아나서 나는 참말 암 것도 몰라라우. 말도 배와야 하제. 할지도 몰라라우. 우리 애들은 고생도 징하게 했고. 씨어머니, 씨어머니 모시고 삼시로 애들 겔친디 한 번도 못 가봤어라우. 밥 한 끼 못해 줬어라우."
시어머니 모시고 외딴 섬에 사느라 뭍에 나가 공부하는 자식들 한 번도 찾아가 보지 못했던 것이 할머니의 평생 한으로 남았다.
"딸 다섯, 아들 둘인디, 다들 잘 사는디 큰 아들만 학굘 댕기다 말아서 군산에서 배하고 산다우. 저는 배 안타면 좋겠다고 합디다마는 지가 공부 안 했는디 인자 후회하면 머 하꺼시오. 안산서는 딸 하나가 산디, 노화도 사람하고 살어라우. 노화 대당리."
낯선 말소리에 할아버지가 뒤 안에서 나온다.
"요새는 당최 도미가 안와요. 전에는 감생이(감성돔)도 많이 들었는데. 아주 안와. 고기 잡으면 완도까지 싣고 가서 경매 하는디, 우리 배로 왔다갔다 하면 세 시간, 딸뿍딸뿍 하면 세 시간 반이 걸리고. 아주 숨이 왔다갔다 하지라우."
풍랑이라도 거센 날이면 물고기를 싣고 완도까지 내왕 하는 뱃길이 저승의 문턱처럼 위태롭기도 하다. 예전에는 제주 해녀들도 많이들 물질하러 왔었다. 그래서 '제주 처녀 여서도 들어가면 애 배야 나온다'는 말도 생겼다. 할머니는 그 시절이 꿈속 같다.
"물질은 제주서도 오고 여그 사람도 하고 그랬어라. 그때가 사람 사는 것 같았지라우. 그래도 제주서 들어와 산 사람은 두 사람밖에 없어라우. 큰 제주 작은 제주가 살았었는디 지금은 모다 돌아가셨지라."
큰 제주는 먼저 시집와 산 사람이고 작은 제주는 나중에 시집온 사람이었다. 외딴 섬이지만 여서도는 지금보다 옛날이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했다. 어장에 고기가 말라 이제 더 이상 외지 배들이 오지 않는다. 완도의 다른 섬들과는 달리 바람막이가 없는 난바다의 섬인지라 바다 양식도 여의치 않다. 그러니 섬에 들어와 살려는 젊은 사람도 없다. 섬은 적막하고 섬은 아주 늙어버렸다.
요즈음은 섬의 장례 풍습도 바뀌었다. 사람이 죽어도 산이 아니라 완도로 간다. 메고 가 묻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죽어도 고향 땅에 묻히지 못하게 된 사람들. 나이 들고 병들어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는 노인들은 자식들을 찾아 뭍으로 떠난 뒤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생애와 하직한다.
"다 내빌고 가지라우. 몸만 가제. 아깐 집조차, 밭조차 다 내빌고 가제라우."
다 버릴 수 있다는 장담은 쉽지만 실상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 가진 것 모두를 버리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죽은 뒤에는 무엇 하나 가져갈 수 없음을 알면서도 기어코 손에 쥐고 죽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나 여서도의 노인들은 살아서 모두를 버린다. 섬을 떠나는 것이 곧 삶을 떠나는 것이니 가능한 일이다.
"어더지요. 어서 가씨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어서 민박집으로 돌아가라고 할머니는 등을 떠민다.
바람이 묻어온 이야기
8000년 전 신석기 시대 유적이 출토되었을 정도로 이 섬의 사람살이 역사는 길다. 하지만 근세에 사람이 다시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말경이다. 그때 처음 먼 바다를 건너 섬에 정착한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갈 곳 없어 숨어들어온 외딴 섬. 섬이 숨어 살 만하다 생각했겠지.
그러나 그런 생각은 열흘도 못 갔을 것이다. 섬은 숨어 지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갇혀 지내야 하는 곳이다. 숨고 드러냄은 선택이지만 갇히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숙명이다. 옛날 이 난바다의 섬에서 바다를 건너는 일은 곧 생사를 건너는 일이 아니었겠는가. 그 때문일까 뭍에서 먼 섬일수록 사람들의 세계관은 숙명적이다.
여서도는 완도와 제주의 중간쯤에 위치한다. 직선으로 가면 제주도 조천이 40여 킬로 거리다. 여수의 거문도까지는 30킬로, 완도나 제주보다 가깝지만 서로 왕래하지 않는 두 섬은 전혀 다른 세계의 섬들이다. 옛날에는 여서도를 ‘작은 제주’라 했었다. 거리도 가깝고 풍토도 비슷했던 까닭이다. 여서도의 정정석 이장은 오랫동안 마을 이장을 했던 선친을 옆에서 지켜본 탓에 60, 70년대 여서도의 생활상을 비교적 소상히 기억하고 있다. 선친이 여서도 이장을 할 때는 이장을 보좌하던 이 서기까지 있었다. 그는 80년대에 완도로 이주했다가 5년 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여서도는 여서리 200-1번지에서 시작되어 500번지에서 끝난다. 한때 이 작은 섬에 300가구까지 살았다는 증거다. 인구가 줄어 193세대였던 1968년도만 해도 여서국민학교의 학생수가 180명이나 됐다. 지금은 학생이 둘뿐이다. 옛날의 여서도는 제주와 육지의 중간 기착지였다. 여름에는 제주에서 수박이나 과일들을 싣고 가던 풍선(風船)들이 여서도에서 바람을 기다렸고 가을이면 전라도 강진에서 옹기를 싣고 온 풍선들이 바람을 기다렸다. 제주의 고기잡이배들도 많이 들락거렸다. 심지어 그 뗏목처럼 위태로운 테우(떼배)를 타고 큰 바다를 건너와 자리돔을 잡아가는 제주 어부들도 있었다.
완도 본토가 완도군 섬사람들의 생활권이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1968년 완도대교가 생기기 전까지는 완도 역시 섬이었고 대도시와 교통이 원활하지 않았다. 그래서 60~70년대 여서도 사람들은 완도로 나다니지 않았다. 여수가 생활권이었다. 어선들이 여수로 고기를 팔러 다녔고 여수에서 생필품을 사들여 왔다. 보길도와 소안도, 노화도 등 완도 '서삼면(西三面)' 사람들의 생활권 또한 완도가 아니라 목포였다. 섬사람들은 완도-목포간, 완도-여수간 정기여객선을 타고 여수나 목포로 나가야만 서울이나 부산으로 갈 수 있었다.
그때는 여서도 사람들이 지닌 동력선만 50여 척이 넘었다. 섬사람들은 잡아온 갈치나 고등어를 '염장질' 해서 경상도 충무와 삼천포까지 팔러 다녔다. 멸치는 젓갈을 담아 강진 사초리나 장흥 삼신포 등에 내다 팔았다. 귀항 길에는 지붕 이을 볏짚과 쌀, 보리 등 겨울 날 곡식을 사왔다. 봄보리 나올 때까지는 그 식량으로 버텨야 했다. 여름에서 가을 사이 갈치 낚시철이면 뭍의 장사꾼들이 장비를 직접 가지고 들어와 빵이랑 엿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박물장사들은 생필품을 들여와 생선과 물물교환 해 갔다. 인천의 배들까지 갈치잡이를 오곤 했다.
섬사람들에게는 바다 일 못지않게 농사도 큰 일이었다. 작은 섬에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며 살았으니 산밭을 개간하여 곡식 거두는 일에 필사적이었다. 농사철이 지나면 섬사람들은 약초를 캐다 약초수집상들에게 팔았다. 이장은 오래된 사진들을 꺼내서 보여준다. 사진 속의 여서도에는 집들이 빼곡하다. 이제 막 혼례를 치른 신혼부부의 모습이 어제 같다. 이장은 여서도의 역사를 증거해 줄 자료집이라도 만들어 후세에 남길 생각이라 한다.
섬은 산이다!
여서도의 주산은 여호산(352m)이다. 섬 전체가 여호산이라 해야 옳을 듯하다. 마을은 여호산 산자락에 기대 자리잡았다. 여호산 등산로를 따라 걸으면 섬을 한 바퀴 일주할 수 있다. 산정으로 가는 길은 가파르다. 작은 섬의 산이라고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산길을 걷고 싶은 사람은 단단한 채비를 차려야 한다. 산정에 오르니 소모도, 대모도, 청산도, 소안도 등 완도의 섬들이 아스라하다. 구름에 쌓여 오늘은 제주도가 보이지 않지만 맑은 날에는 손에 잡힐 듯이 가깝다.
여호산 산정에서는 길을 잃기 쉽다. 정상에서 하산길이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한참을 헤매다가 왔던 길을 다시 되돌려 kt중계탑 부근에서 길을 찾았다. 당산숲 방향으로 하산을 하다가 해양사의 중요한 유적 하나를 만났다. 여서도 요망대(瞭望臺)다. 돌담으로 쌓아 만든 요망대는 아름다운 돌 건축물처럼 보이지만 실은 군사시설이다. 높은 곳에서 적의 동정을 살피는 곳이 요망대인데 감시초소인 셈이다.
여서도 요망대는 조선조 말 대원군 시절 이양선의 출몰을 감시를 위해 만들어졌다. 요망대는 둘레가 약 20m로 바깥 높이가 1.5m 정도인데 내부의 바닥에는 구들장이 놓여 있다. 추운 겨울 요망대를 지키는 봉군들이 추위를 이기기 위해 깔아놓은 것이다. 요망대 아래쪽에는 봉군들이 숙식하던 집터가 남아있다. 일제강점기에 요망대는 일제의 파수대 역할을 했다. 해방 직전까지도 섬 주민들이 봉군으로 차출되어 요망대 근무를 했고 서양 선박을 발견하면 지서의 일본인 순사에게 보고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요망대에서 마을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여서도의 당산숲이 있다. 마을 윗당이다. 당숲의 경계는 돌담을 쌓아 신성한 영역임을 표시했다. 거목들이 그늘을 드리운 당숲은 신령하기 그지없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섬사람들은 이 당숲을 신성하게 여기고 해마다 당제를 올린다.
알려지는 것이 두렵고, 사라져 버릴 것이 두렵고
돌담길을 따라 동쪽 능선을 오른다. 이 섬도 위성 안테나 덕분에 텔레비전 시청이 편리해 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여전히 구형 안테나를 장대에 매달았다. 바람을 피해 여러 가닥의 끈으로 안테나를 붙들어 두었으나 위태롭다. 안간힘을 써도 안테나가 잡을 수 있는 전파란 기껏 한두 개다. 이 길목에는 사람의 집보다 밭이 더 많다. 많은 집들이 폐가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 돌담길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처럼 낯설고 신비롭다. 현세가 아니라 과거의 어느 시간 속을 걷는 듯하다. 당숲을 지나 마을 서쪽 길로 접어드니 작은 개울이 흐른다. 개울에는 돌다리와 돌우물이 온전하다. 뭍에서라면 이미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마을의 집들을 가르는 경계는 돌담이지만 그 돌담은 또한 이웃과 소통의 공간이기도 하다. 돌담 중간에는 네모난 구멍이 뚫려있다. 물건을 주고받고 소식을 나누던 생활의 통로다. 저 통로로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을까. 바람은 통로를 지나면서 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묻어갔을까. 돌담들이 없이도 이 섬에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돌들은 섬의 수호신인 동시에 살아있는 역사박물관이다.
내연화력발전소를 지나 섬의 서북쪽 산정에 있는 등대로 간다. 무덤들, 산속 유택들의 경계를 가르는 것도 돌담이다. 돌담과 함께 이 섬을 지켜온 또 다른 공로자는 방풍림을 이룬 상록수들이다. 길 가의 동백나무 노거수 한 그루는 이제껏 나그네가 본 동백나무 중 가장 크다. 동백나무는 야물고 단단해서 성장 속도가 아주 느리다. 어른 두 사람이 둘러도 다 못 품어안을 저 정도의 크기라면 5백년이 아니라 천년은 족히 될 것이다. 오랜 세월 나무들은 섬사람들을 지켜주었으니 이제 사람이 나무들을 보호해야 할 차례다.
동백나무뿐이겠는가. 섬 전부를 천연기념물이나 문화재로, 보물로 지정해 보호해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그네는 두렵다. 이 섬의 보물들이 알려지는 것이 두렵고, 알려지지 않은 채 사라져버릴 것이 또한 두렵다. 그러나 끝끝내 숨길 수 없고 숨긴다고 보전되는 것이 아니라면 드러내서 모두가 함께 지킬 방도를 찾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섬 자체가 문화재인 이런 섬은 자치단체 차원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보호관리를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것은 철저하게 주민들의 동의하에 이루어져야 한다. 섬의 문화유산 보존이 주민들에게 이익이 된다는 비전만 있다면 반대할 주민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산정에 오르니 멀리 소모도, 대모도, 청산도, 소안도 등 완도의 섬들이 아스라하다. 가깝고도 먼 것이 섬들 간의 관계다. 바로 붙어있는 듯이 보이는 저 섬들의 삶은 서로 분리되어 있다. 섬들은 제각각 육지만을 지향하는 까닭이다. 등대로 가는 길목에서 '고래' 한 마리를 만난다. 바위는 금방 바다 속을 헤엄치다 숨 쉬기 위해 솟아오른 고래 같다. 고래바위라 이름 붙여준다. 고래는 실눈을 뜨고 입을 벌려 깊은 호흡을 한다. 나그네도 막혔던 숨통이 비로소 트인다.
여서도 앞 바다를 비추는 등대는 태양광으로 작동되는 무인등대다. 등대를 둘러싼 쇠울타리가 통째로 기울어져 있다. 바람의 힘이 얼마나 거셌던 것일까. 건너편 산은 정상까지 밭이다. 지금은 모두 휴경중이지만 비탈밭은 섬살이의 고단함을 증거해 주는 귀중한 사료다. 비탈 같은 삶이 섬뿐일까. 삶의 비탈은 세상의 도처에 널려있다. 오후가 되면서 바람이 잠잠해진다. 내일은 다시 배가 뜰 것이다. 이제 나그네는 섬을 떠나 또 어느 곳으로 가야 할까. 어디를 가든 사람은 결코 삶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을.
여서도(麗瑞島)
완도권 최남단 천혜의 아름다운 섬
요약 : 여서도는 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면에 딸린 섬으로 동경 127°55′, 북위 33°59′에 위치하며 면적 2.51km2, 해안선 길이 10km,
최고점은 362m(큰산). 인구는 48가구 84명(2010년)이다.
지명 유래
‘여서도(麗瑞島)’라는 이름은 1945년 이후에 붙여졌으며 ‘천혜의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태랑도(太郞島)’라 불렀다고 한다.
대륙의 끝 그 너머에 바다가 있고 그 바다 위에는 섬이 있다. 한반도의 남서쪽 끝자락, ‘섬의 바다’ 다도해에서도 신안군 72개 다음으로 섬이 많은 곳. 바로 완도다. 265개 섬들 중 55개 섬에는 사람이 살고 나머지는 인적이 없는 무인도다. 완도는 전에는 뱃길을 따라가야 했는데 이제 대교 하나만 건너면 쉽게 육지에서 닿을 수 있다. 완도교를 지나 청해진에 닿으면 해상왕 장보고의 흔적들도 찾아볼 수 있다. 「어부사시사」로 유명한 윤선도의 유적지 보길도와 아시아 최초로 슬로시티로 지정된 청산도까지 완도에는 볼거리가 넘쳐 난다.
특히 완도 선착장에서 배로 세 시간 정도 거리인 완도 최남단의 섬 ‘여서도(麗瑞島)’는 하루에 배가 두 번밖에 닿지 않는 자연의 풍광을 그대로 지닌 섬이다. 긴 세월 거친 바닷바람에 맞서기 위해 담의 높이가 지붕의 처마까지 닿는 이곳은 대자연 속에서 이어 온 인간의 끈질긴 삶의 흔적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지도에도 없는 섬, 여서도는 면적 2.51km2, 해안선 길이 10km로 40여 가구 84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완도에서 남동쪽 41km 거리에 있으며 제주도와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는 외딴섬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태랑도(太郞島)’라 불렀으나 1945년 이후에 ‘천혜의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에서 여서도로 불리게 됐다. 1950년대에는 최대 240여 가구 1,200명이나 살았고, 1968년도만 해도 여서초등학교의 학생수가 180명이나 됐다.
『완도군지』에 따르면 고려 때인 1077년(목종 10) 탐라(제주) 근해에 일주일간 대지진이 지속된 뒤 바닷속에서 큰 산(섬)이 솟았다고 한다. 고려의 ‘려’자와 상서롭다는 ‘서’자를 따 ‘여서(麗瑞)’란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몇 년 전에 여서도에서 발견된 패총이 7,000년 전 신석기 시대 유적일 정도로 이 섬의 사람 살이 역사는 길다. 여서도는 외딴섬이라서 그전에는 왜구들의 침범이 심했을 것이다. 근세에 사람이 다시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1690년대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100년 가까이 지난 다음에 진주 강씨가 여서도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이다.
‘아름답고 상서롭다’는 뜻의 여서도는 아직까지도 때 묻지 않은 천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섬이다. 특히 30~40m 깊이의 바닷속이 훤히 보일 만큼 맑아서 “여서도로 시집가던 새색시의 앞섶이 풀어지며 옷고름이 바닷물에 빠져 황급히 들어 보았더니 옥색으로 물들어 있더라”라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물이 깨끗한 섬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의 어종과 동식물은 보호할 가치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제주도 특산물인 자리돔(생이리)이 완도에서는 유일하게 이곳에서 잡히고 있다. 주민들의 생계 수단은 대부분 농업과 어업을 겸한다. 농산물로는 고구마·쌀·보리·콩·참깨 등이 소량 생산된다. 근해에서는 도미·숭어·도다리 등이 잡히며, 자연산 돌미역·해삼·전복 등이 채취된다. 여서도 해녀들이 주로 채취하는 것은 미역·소라·전복·해삼 등. 특히 여서도의 자연산 돌김·김·톳·미역·파래는 육지 가까운 데서 양식한 것과는 색깔과 맛이 다르다. 그리고 여서도의 자연산 해초는 최상급으로 그 중에서도 봄에 처음 따는 미역인 초각은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여서도는 완도 섬들 가운데 남쪽에 위치한 섬으로 청산도와 제주 추자도 중간에 있다. 직선거리로 제주까지 약 40km이며 완도까지는 41km, 여수의 거문도까지는 30km이다. 지금 이 섬에는 제주도 출신 아낙네들이 몇 명 있다. 여서도와 제주도가 가깝다 보니 이곳으로 물질을 왔다가 여서도 총각과 눈이 맞은 것이다. 제주도 해녀들이 한번 물질을 오면 계약 기간 때문에 오랜 기간 머물러야 했다. 또 돌아가고 싶어도 여객선도 없고 지금처럼 빨리 달리는 배가 아니어서 마음대로 섬을 떠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외해의 여서도의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섬에 발이 묶이는 경우가 허다했고 그러다 보니 젊은 처녀가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갇혀 있다 보면 자연스레 섬 총각과 가까워졌고 섬을 나올 때면 어느덧 애 엄마가 되었다. 속된 표현으로 ‘파도가 거셌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섬 남자들과 ‘눈이 맞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제주 사람들 사이에선 “여서도에 가면 애 배야 나온다”는 말이 전해진다. 이러한 여서도의 사랑 이야기는 도회지의 이기적인 사랑과 거리가 먼 정말로 인간적인 외로움 때문에 정을 나누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여서도는 옛날부터 제주 풍선(風船)들이 육지로 오면서 이곳을 지날 때면 산돼지를 섬 앞바다에 던져 무사히 지나갈 수 있도록 용왕님께 빌었을 정도로 파도가 세차다. 그 대신 고기가 잘 잡혀서 먹을거리로 괜찮다. 이곳 사람들은 자녀를 유학 보내고 육지에 몇 백 평씩 소작지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자유당 시대의 국회의원 김선태 씨와 김수근(조선대 법대 학장) 등 유능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한때 동력선이 40여 척 있고 고졸 이상의 유학생이 열아홉 명이나 있었다. 이처럼 멀리 떨어져 있어 교통이 불편해도 사람이 살 만한 환경은 있게 마련이다. 무엇보다 물이 부족한 보통 섬과 달리 이곳 여서도에는 7년 가뭄에도 마르지 않은 샘이 아직도 파랗게 솟아나고 있다.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섬 밖에서 들여오는 술은 거의 입에 대지 않는다. 섬에서 나는 물맛이 워낙 좋아 집에서 직접 누룩을 띄워 진한 농주 마시기를 즐기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너무 가난한 섬이기에 ‘처녀가 시집갈 때까지 쌀 세 말을 못 먹는 곳’이 청산도라면, 여서도는 ‘평생을 살아도 쌀 한 가마니를 못 먹는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먹을거리가 궁하고 가난한 섬이다. 이곳에 30~40대는 10여 명 안팎이다. 나머지는 모두 고령의 노인들뿐이다. 생활보호 대상자가 17명, 독거노인이 20여 명으로 섬을 떠나고 세상을 등진 사람들이 많아 빈집도 많다.
완도에서 여객선으로 4시간 정도 달려야 닿을 수 있는 외딴섬 여서도로 향한다. 완도항에서 하루 한 번 출발하는 여객선 섬사랑7호가 이 외딴섬과 육지를 이어 주는 유일한 교통수단이다. 오후 2시에 완도항을 떠난 섬사랑7호는 소모도-대모도-장도-청산도-여서도를 향한다. 이 여객선은 여서도에서 일박을 한 후 아침 7시 30분에 출발하여 청산도-장도-대모도-소모도를 거처 완도항에 입항한다. 그런 뒤 잠시 쉬었다가 오후 두 시에 다시 여서도를 향하여 뱃고동을 울린다. 세계가 지구촌 시대이며 전국이 일일 생활권에 들어간 지 오래이지만 여서도는 한번 들어가면 반드시 일박하고 그 다음 날 아침 일찍이 나와야 한다.
완도항을 떠난 여객선이 큰 섬 청산도까지는 별 일 없이 잘도 간다. 그러나 청산도를 지나면서부터 먼 섬 여서도까지의 물길은 뱃사람들도 늘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바다를 상대하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말 중에 “여자 속마음과 잔잔한 바다는 믿지 말라”고 했듯이 바다는 항상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범선도 아니고 통통배도 아닌, 배가 크고 속도도 빨라서 크게 걱정할 일은 없다. 오히려 그러한 추억이 여서도로 향하는 여행길을 풍성하게 해 준다. 여서도는 먼 바다에 속하는 섬이라 파도가 조금이라도 높은 날에는 결항되기 일쑤. 특히 겨울철에는 더욱 그렇다.
여서도에 닿아 마을을 돌아보니 일반 도서와는 다른 특이한 점이 많아 후일 집중적인 인류학적 조사가 필요한 민속의 섬으로 보였다. 여서도 주민들이 이렇게 먼 바다에서 살아갈 수 있는 첫 번째 비결은 배를 댈 수 있는 선착장 덕분이다. 어머니의 품속과 같다는 이 섬의 생명과 같은 선착장은 이제 현대 시설인 방파제로 변해 바다 바깥쪽으로 나와 있고 외해에는 콘크리트 삼발이가 많이 심어져 있다. 양쪽 긴 방파제 끝에는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가 반긴다. 섬의 모양은 거의 원형이며 동서남북 각각의 해안에 작은 만이 형성되어 있다. 해안은 대부분 암석 해안이며 곳곳에 높은 해식애가 발달해 있다. 북쪽 해안에 형성된 만의 연안 일대에는 집채만 한 바위들이 산재해 있어 특징적인 경관을 이루고 있다.
여서도는 매립으로 이루어진 물양장이 제법 넓고 큰 편이다. 운동장으로 사용해도 좋을 만큼 넓다. 그러나 여느 항구처럼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아 보인다. 하얀 등대가 있는 방파제 쪽의 산을 깎아 매립한 흔적이 보인다. 이곳은 6~7년에 걸쳐 방파제 공사가 끝이 났다. 오래전에 매립 공사를 하는데 660억 원대 공사가 태풍을 두 번이나 맞아 보수하느라 1,000억 원대 공사가 되어서야 끝났단다.
이곳 주민들은 청정 해역에 있는 아름다운 섬에 환경 훼손이 심각하다고 하소연 하였다. 그리고 환경 오염은 물론이고 자연 경관 훼손, 방파제 공사로 조류 소통을 막아 마을 앞 바닷물이 정화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방파제에 원활한 조류 소통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과 마을 오폐수 처리장 시설이 절실하다는 주장이다. 개발도 중요하지만 환경 보호도 절실하다는 모습을 이곳에서 볼 수 있었다.
선착장에서 마을과 선착장이 있는 남쪽 해안이 전부 한눈에 들어온다. 물양장 가장자리에는 마을 표지석이 단순하게 세워져 있다. 그 뒤로 ‘여호 리조트’라는 표지석이 있고 거기에는 조그마한 건물이 있는데 민박(2층)겸 슈퍼(1층)다. 흔히 볼 수 있는 횟집이나 번듯한 건물은 발견할 수 없고 자그마한 민박 간판이 전부다. 선착장에는 크기에 비해 배들은 별로 없다. 모습은 예전 포구 그대로다. 그 뒤로는 언덕인데 주위에는 예전에 군 시설로 썼을 낡은 콘크리트 시설물들이 나란히 있다. 초소와 막사로 사용되었을 건물들이다. 그 앞에는 ‘여서도 치안 센터’ 파출소가 있다.
포구 쪽에 자리 잡은 마을은 거센 바람을 피하기 위해 높은 돌담에 둘러싸여 지붕들만 보인다. 해안이 좁은 탓에 집들은 산자락에서 산 중턱으로 올라갔기 때문이다. 마을로 들어서자마자 바로 담장들이 예사롭지가 않다. 바람이 많은 지역이라 그런지 온통 돌담들로 이루어져 있다. 마치 제주도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높이도 3m 이상은 됨직하다. 거기에다 골목길도 자전거 하나 다닐 수 없는 계단에다 좁은 편이다.
얼마나 급경사 지대에 집을 지었는지 모든 집은 앞집과 뒷집이 돌담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높고 튼튼한 돌담길을 따라가면 몹시 구불구불하며 미로처럼 얽혀 있다. 도로도 좁은 탓에 경운기나 오토바이가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무거운 짐들은 지게로 힘들게 지고 날라야 한다. 집의 담장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돌담들은 오래된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작은 섬에서 왜 이토록 높은 돌담이 필요했을까? 여름에는 태풍과 파도를 막아 주고, 겨울에는 북풍이라는 자연의 재해를 막기 위해 환경이 만들어낸 예술품 같은 것이 바로 돌담인 것이다. 그 많은 섬은 다 어디로 가고 바람과 파도를 막아 줄 무인도 하나 없는 넓은 바다에서 자연 앞에 늘 불안하여 바람과 파도의 공격을 막아 내려고 이곳 사람들은 돌담을 저토록 높이 쌓았다. 이것이 여서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활 양식이라고 하겠다. 지금까지 20년이 넘게 섬을 다니지만 이토록 원형이 남은 돌담은 섬 가운데 최고라 하겠다.
마을 뒤로 갈수록 길은 없어지고 산길이 이어지는데 집들이 거의 폐가들이다. 마치 성벽처럼 층을 이루고 있다. 밭도 그렇게 큰 편은 아니고 작은 것들이 주를 이루고 그 옆으로는 개울이 흐른다. 이것을 ‘다랭이 밭’이라고 해도 되나 모르겠지만 이곳에서는 다랭이 밭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평지가 없고 경사진 곳을 이용하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왼쪽은 계곡인데 계절 탓인지 모르겠지만 흐르는 물은 없다. 그러고 보니 마을은 계곡 사이로 형성되어 있다.
골목길을 걸어 올라가면 밭이 나타난다. 밭에서 보는 마을 풍경이 조금은 억척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밭도 그렇게 넓은 것이 아닌 조그마한 것들의 연속이다. 밭에는 흑염소들이 제법 보이는데 대부분이 묶여 있다. 벌어먹고 살 논도 없고, 마을 산비탈을 깎아 마을이 형성되어 리어카도 들어가기 힘든 척박한 땅이다. 여서도는 먼 바다에 홀로 떠 있기에 바람과 파도 때문에 바다 양식도 불가능해 오로지 고기잡이에 의존해 사는 곳이다. 서로 돕지 않으면 살기 힘든 섬.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남의 일도 자기 일처럼 도우며 가족처럼 산다.
현재 여서도에는 낚시꾼들을 위한 민박 두 곳과 가게 두 곳이 문을 열고 있다. 이 작은 섬은 낚시꾼들에겐 익히 알려진 명소다. 낚시를 즐겨하는 사람들은 여서도를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다. 뱅어돔·감성돔·돌돔·해삼·전복 등 어족이 풍부하기로 유명한 섬이라 이곳을 찾은 낚시꾼들만이 늦은 밤까지 밤낚시로 활기를 띤다고 한다. 봄에는 볼락, 여름에는 돌돔, 가을에는 참돔, 겨울에는 감성돔이 잡힌다.
마을 회관 방향으로 가면 그 앞에 새로운 마을 표지석이 있다. ‘신비의 섬 여서도’라고. 표지석 바로 옆에는 마을 주민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는데 부부의 이름이 나란히 쓰여 있다. 그 옆에는 또 다른 표석이 있는데 마을 연혁이 새겨진 표지석이다. 같은 시기에 세워진 것 같은데 이것에 의하면 2008년에 여서도에는 90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여기에 새겨진 주민 이름들도 모두 90명이다. 이 뒤에는 마을 회관이 있고 그 옆으로는 창고인 듯 보이는데 창고 한 쪽에 부녀 회관이 입주해 있다. 이 앞에는 팔각정 쉼터가 있다.
또 다른 골목 입구에 보건 진료소가 있으며 그 모퉁이에 이정표가 있다. 민박 간판이 있는 돌담 옆에는 마을의 시설물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는데 ‘등산로 입구’라고 쓰여 있다. 6개의 거리가 표시되어 있는데 여기서 여서항까지 5.11km라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한 바퀴 도는 형식으로 표시한 것 같다. 여기서 이 섬의 가장 높은 곳인 여호산 정상까지는 거리가 2.36km란다. 여호산의 해발은 무려 352m다. 여서도의 산은 산림이 상당히 우거져 있어 밀림을 연상하게 하고 육지의 산과는 달리 나무가 우거져 있어 산에 들어가기 힘들 정도다.
마을 안쪽에는 섬마을 교회가 있고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청산초등학교 분교인 여서초등학교가 있다. 섬에서 유일하게 문화를 접하고 향유할 수 있는 곳이다. 시멘트 계단으로 된 입구에는 두 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다. 왼쪽에는 ‘여서도 31번 길 22-8’ 그리고 오른쪽에는 ‘청산초등학교 여서분교장’이 붙어 있다. 문이 없는 교문에서는 멀리 바다가 내려다보인다. 계단을 타고 오르면 바로 운동장. 잡초들로 인해 조금은 폐허가 된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그 뒤로 높은 곳에 학교 건물이 달랑 하나 있다. 기숙사 등 부속 건물은 학교 바로 바깥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여서도에 하나밖에 없던 초등학교 분교였는데 문을 닫았다. 섬의 유일한 학생이었던 주훈이가 중학생이 되어 완도 본섬으로 유학을 떠났기 때문이다. 바다가 유일한 놀이터인 섬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 같다.
학교 옆에 여서도 내연 발전소를 뒤로하고 높지 않는 산 정상에 올라가니 여서도 앞바다를 비추는 무인 등대가 태양광으로 작동하고 있다. 등대를 둘러싼 철조망 울타리는 통째로 기울어져 있다. 여기서 아랫마을과 물량장, 항구의 배들과 건너편 산 중턱에 있는 밭이 보인다. 지금은 거의 휴경지이지만 비탈 밭은 남해의 다랭이 논처럼 섬 살이의 고단함을 보여 주는 귀중한 사료이다.
여서도는 바다의 한 가운데 있다 보니 풍선들이 각종 화물들을 싣고 가다가 여서도에서 바람을 기다렸고, 전남 강진에서 옹기를 싣고 가다가 바람을 기다렸다. 여서도는 서울에서 목포를 가는 데 KTX가 통과하는 광주의 송정리역 정도로 비교할 수 있다. 지금은 배들이 크고 빠른 동력선이기 때문에 먼 바다까지 진출하며 자녀 교육과 편리함 때문에 항구 도시에 생활권을 둔다.
완도가 여서도 사람들의 생활권이 된 것은 1968년 완도교가 생기고부터이다. 전에는 완도 역시 섬이었고 도시와 교통이 불편하였다. 그래서 60~70년대 이곳 사람들은 멀리 있는 여수가 생활권이었다. 어선들이 여수에서 잡은 고기를 팔고 생필품을 사들고 왔다. 그 당시 고기잡이 동력선만 50여 척이 철 따라 고기를 많이 잡았다. 냉동 시설이 미비한 그때에 잡아 온 삼치나 갈치, 고등어를 소금으로 염장해서 여수나 녹동으로 팔러 다녔다. 섬으로 돌아오면서 지붕 이을 볏짚과 식량 등 겨울을 날 곡식을 싣고 왔다. 식구가 많은 그 시절 보리가 나올 때까지는 온 식구가 그 식량으로 버텨야 했다. 여름과 가을 사이에 갈치 잡이 철이면 뭍의 장사꾼들이 생필품을 들여와 생선과 바꾸어 가기도 하였다.
과거에는 이 조그만 섬에 수많은 사람이 북적이며 살았으니 생존 경쟁이 치열하였다. 바다 일 못지않게 농사도 큰일 중 하나였다. 바람이 불거나 날씨가 좋지 않으면 밭으로 달려 나가고, 가축을 기르며, 그물 일을 하고, 산을 개간하여 밭을 만들고 곡식 거두는 일에 필사적이었다. 나무와 숲이 우거진 관계로 약초가 많이 자라기 때문에 약초를 캐다 약초 수집상들에게 넘기도 하였다.
1960년대에는 어업으로 크게 재미를 봤지만 지금은 예년만 못하다. 과거의 어장은 6월부터 9월까지 송진과 솔로 만든 횃불로 멸치잡이를 하고 4월부터 9월까지는 미영(목화)을 타서 물레로 실을 짜서 낚싯줄을 만들어 고등어 잡이를 하였고 7월부터 10월까지는 낚시로 갈치 잡이를 하였다. 건착망(巾着網) 어선이 번성하면서 과거 방식은 없어졌고 현재 고등어 잡이는 안강망(鮟鱇網) 어선이 주로 한다.
당시 멸치잡이를 하던 11명이 승선하는 이앵이배가 있었고 1930년경부터 5장대 배가 나타났다. 이 배에는 12~15명 선원이 타며 10개의 창고가 있다 하여 열간 답이라고도 불렀다. 이 배는 10~15년 전에 없어졌다. 참고로 1장대는 5자에 해당한다. 배의 멸치잡이 어부들이 밤에 뱃전을 치면서 소리를 내면, 멸치들이 튀어 오르면서 횃불을 쫓아 그물 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선주는 선원을 모으기 위하여 선원에게 선금으로 보리 한 가마를 주었다. 일단 선원들이 구성되면 6월부터 9월까지 모두 행동을 같이 했다. 잡은 멸치는 전부 16짓(선원 12명에 12짓이고, 뱃짓이 4짓이다)으로 나누었고 나머지는 술값으로 썼다. 멸치의 양으로 보면 1짓이 1통체리(1통체리는 16통)에 해당한다. 한 배가 잡아오는 양이 15통체리로 240통이 된다.
하지만 이곳은 20년 전부터 멸치잡이를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안강망들이 제주 해협에서 멸치 떼를 미리 잡아버리기 때문에 이곳까지 멸치가 회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민들은 최근에 한우를 방목하여 수입을 올리고 있다. 원래 이곳에는 소 방목으로 유명한 곳으로, 산을 타는 건강한 소들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이 소들은 외지에서 3월 초에 사 들여와 봄철에 산에서 방목하면 겨울에 훈련된 소가 되어 민가로 돌아온다. 20여 가구 주민이 소를 키우고 있는데 운동을 많이 한 여서도 소는 근육이 발달해 육회용으로 많이 찾는다.
또한 이곳 여서리에는 전답이나 마찬가지인 황금 바다를 지키기 위하여 주민들의 배가 매일 갯바위 주변을 순찰한다. 외지 선박이 불법 조업(뻥치기)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자체적으로 돈을 거둬 고향의 바다와 삶의 터전을 목숨처럼 지키고 있다. 정정석 이장님은 “타지 배들이 조업을 하거나 불법 조업을 하고 나면 감성돔이나 농어, 숭어 등 고기가 전혀 잡히지 않는다. 해경과 행정에 진정도 했지만 현장에서 잡지 못하면 현행법상 법적 제재를 할 수 없는 입장이어서 단속이 어렵다고만 한다. 더구나 불법 어장을 하는 것을 뻔히 알고도 잡을 수가 없다. 여서도 주민의 낡은 배로는 타지 배들의 속도를 따라 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여서리 주민들은 다른 지역에서 온 조업 어선들이 800m 안으로 들어오지 말 것을 당부했다. 특히, 불법 어업을 엄격히 단속할 강력한 법 규제를 마련해서라도 섬사람들의 삶의 터전인 바다를 침범하지 않도록 해 달라고 건의했다. 여서도 인근 바다에서 불법 어업 행위가 계속된다면 마을 사람들은 몇 년 후쯤이면 고향 섬을 등지고 모두 떠나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서도를 떠나면서 되돌아보니 여서도는 너무나 외로운 섬이다. 그러나 이러한 섬의 전통적인 모습이 낚시꾼들과 인터넷 매체를 통하여 외부에 알려지고 있다. 너무나 외해이면서 홀로 떨어져 있는 관계로 수산 양식은 파도와 바람과 바다 깊이 때문에 상상도 할 수 없는 섬이었다. 오로지 자연산 해초와 고기들이 많아 낚시꾼들의 천국이다. 다이버와 산과 바다의 고독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곳에서 1년 중 몇 개월 살면 딱 좋은 섬이다.
여서도는 이제 마지막 남은 청정 지역이다. 이곳은 바다만 좋은 것이 아니라 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과 계곡에서 솟아나는 샘물도 좋아 매년 휴가를 보내고 싶어진다. 우리나라에서 손꼽을 정도의 먼 섬인 탓에 우리네 60년대 사람들의 인심이 그대로 살아 있는 여서도는 시간이 멈춰 버린 듯 늘 그리움과 고독의 섬으로 남아 있다.
여서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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