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있는 사람
소논어인으로 살아라
삶의 불행은 물질적 결핍이나 사회적 제약에서만 오는 게 아니다.
익숙한 대로만 세상을 경험하는 사람,
즉 마음이 완고하고 강퍅해서 아름다운 것을 보고도 감동할 줄 모르고,
숭고한 것을 보고도 위대함을 깨닫지 못하며,
거룩한 것을 만나도 경이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불행하다.
'빌둥'(다산북스 펴냄)에서 독일 작가 얀 로스는 감탄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대상에 저항하는 사람을 무교양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꽃을 보고도 무심하고 시를 읽어도 무감하며 음악을 들어도 흥 내지 못한다.
무감각하게 '노잼'의 삶을 살면서 하루하루 공허를 견딜 뿐이다.
교양은 나날의 삶을 인간적 성숙의 길,
더 나은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태도다.
제목에 쓰인 독일어 빌둥(Bildung·교양)은 본래 형성形性 또는 도야陶冶라는 뜻이다.
이 말엔 사람은 태어난 대로 살면 안 되고,
자기 삶을 아름다운 작품으로 빚어가야 한다는 발상이 담겨 있다.
타고난 감각을 가다듬고, 마주하는 경험을 가꾸며,
떠오르는 생각을 갈고 닦아야 참된 인간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일찍이 괴테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입을 빌려 이야기했다.
"영원한 창조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창조된 것은 모두 무(無) 속으로 끌려가기 마련이다!"
악마란, 사악한 존재가 아니라 세상에 의미 있는 것은 없다고 믿는 존재다.
그는 자신이 무엇이든 이미 다 안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자신을 놀라게 하는 일은 없다고 믿는다.
세상사 모든 일은 반복에 불과하다고 믿는 사람,
그래서 이 세계의 신비를 냉소하는 사람의 인생은 악의 유혹에 굴복한 셈이다.
무지를 앎으로, 우둔을 지혜로, 편견을 관용으로, 조야함을 세련됨으로 바꾸지 못한다.
반면 교양 있는 사람은 아름답고 비범한 것을 알아보고,
그 위대함에 감탄하기를 꺼리지 않는다.
그는 낯선 존재를 보거나 놀라운 사건을 마주쳤을 때 익숙하거나 아는 것으로
대상을 섣불리 격하해 생각의 폭을 제한하지 않는다.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정중한 정신적 존경을 표시하며,
호기심을 발휘해서 자유롭게 탐구에 나선다. 이런 사람의 삶은 나날이 좋아진다.
교양이란 더 나은 인생을 살려고,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고민하면서 삶을 창조해 가는 사람의 자질이다.
우리가 문학과 예술, 역사, 과학, 철학의 걸작들을 접하고,
그 어깨에 올라 세상을 보려 하는 것은 그들이 경이와 감동을 불러일으켜
우리에게 더 나은 인간으로 교양하는 길을 열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17세기 일본의 유학자 이토 진사이(伊藤仁齋·1627~1705)는 오규 소라이와 더불어
《논어》 해석에 일대 혁신을 이루어낸 양대 산맥 중 한 사람이다.
두 학자는 주희류의 논어 풀이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해석을 추구했다.
지금도 한·중·일 3국 중에서 논어력(論語力)이 가장 뛰어난 나라는 일본이다.
한국이 그다음이고 중국이 가장 뒤처졌다. 대체로 중국은 문화혁명 때문일 것이다.
일본이 논어력 최고의 나라가 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을 꼽자면
두말할 것도 없이 앞의 두 사람 때문이라 할 것이다.
명군(明君)과 직신(直臣)의 만남은 아닌 듯
이토 진사이는 매우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학이편에 나오는 세 문장은 단순한 서론이 아니라 그 자체가 바로 소논어(小論語)이다.
세 문장 안에 《논어》 전체 내용이 고스란히 들어있다는 말이다.
첫 문장, '문(文)을 배워서 시간 나는 대로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을
정말로[亦] 기뻐해야 한다'는 말이다.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 (學, 亦 기뻐)
문(文)이란 사람이 열정을 다해 일에 임하는 태도다.
글은 그중에서 작은 한 가지 사례일 뿐이다.
이때 문(文)은 문무(文武)의 문이 아니라 문질(文質)의 문이다.
문과 질은 사람을 볼 때 쓰는 핵심 용어였다.
문은 언행이고 질은 내면의 바탕이다.
두 번째 문장,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樂 즐겁고, 예뻐)
"임금에게 뜻을 같이하는 벗과 같은 신하가 있어,
측근·근신들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나 원(遠)에 가서 백성들을 보고
그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을 막 돌아와서 해줄 때 임금이 정말로[亦] 즐거워해야
그 곧은 신하[直臣=朋]는 다음에도 왕을 찾아 듣기 거북한 이야기일지라도
용기를 갖고 있는 그대로 전달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논어》를 가장 잘 체화했던 조선 태종은 신하들을 평할 때 문질의 개념을 잘 활용했다. 태종 11년(1411년) 8월18일자 '태종실록'이다.
태종은 우정승 조영무(趙英茂)를 평해 이렇게 말한다.
"조영무는 질직소문(質直少文)한 사람이다."
과묵하여 소문(少文)이고 마음씀이 곧아서 질직(質直)이다.
그런데 문질 개념을 모르니 기존의 실록 번역은
"조영무는 본래 질박하고 솔직하여 학문이 적은 사람이다"라고 옮기고 있다.
문질 개념을 놓친 오역인 것이다.
문을 배워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은 신하보다는 임금에게 긴요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눈 밝음[明]을 길러가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직(直)은 신하의 덕목이다.
세 번째 문장,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美 남을 먼저 생각하며, 서로 어울려 아름답게 살면, 미뻐)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속으로조차 서운해하지 않아야 정말로 군자다운 신하가 아니겠는가'바로 속으로 조차 서운해하지 않는 불온(不慍)이 바로 곧음[直]이다.
이 문장은 누가 보아도 임금보다는 신하에 해당하는 말이다.
사마천 《사기》 공자세가에 등장하는 공자와 노자의 만남에서
노자가 공자에게 당부한 것 또한
"남의 신하된 자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는 것과도 이어진다.
유종지미(有終之美) 또한 신하로서 최고의 삶을 제시하는 말이다.
현재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윤석열 대통령에 대해 보이고 있는 태도는 분명 곧다고는 할 수 없다.
노골적으로 서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태는 윤 대통령이 자초한 것이다.
그 이유는 밝은 눈으로 살피고(明) 받아드리고,
직언을 할 수 있는 분위이기를 만드는 일이 윤석열이 할 일이다
그러나 지난 총선 때 영부인과 관련해 우회적인 언급을 했다가
두 사람이 상당한 갈등을 빚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윤 대통령은 불역낙호(不亦樂乎)하지 않았던 것이다.
적어도 이 세 문장이 소논어라고 한 이토 진사이의 말 자체는 참으로 명언이라 하겠다.
마음을 잃어
마음이 완고하고 강퍅해서 아름다운 것을 보고도 감동할 줄 모르고,
숭고한 것을 보고도 위대함을 깨닫지 못하며,
거룩한 것을 만나도 경이를 느끼지 못하며
꽃을 보고도 무심하고, 시를 읽어도 무감하며, 음악을 들어도 흥 내지 못한다.
교양 있는 사람은
마음에 이름다움을 추구하고
마음엔 사랑이
가슴엔 감동이
삶에는 윤택이 넘치게
교양은 나날의 삶을 인간적 성숙의 길이다
더 나은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태도다.
자기 삶을 아름다운 작품으로 빚어가는 것이다.
타고난 감각을 가다듬고,
교양있는 사람은
떠오르는 생각을 갈고 닦아야 참된 인간에 이루는 것이다.
논어의 시작은 學이고
끝은 知言이다
논어 학이편의 삼락은
첫문장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 (學, 亦 기뻐)
배우고 익힘이 기쁘고, 즐거워야 한다
두 번째문장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樂 즐겁고, 예뻐)
군신간에, 친구간에 밝음, 너그러움 明 바름과 옳음의 直이 있어
신뢰가 넘쳐야 한다
세 번째 문장,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美, 미뻐)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속으로조차 서운해하지 않는다
자신을 수양하여 남을 늘 먼저 생각하고
자신을 들어 내지 않고 아름다운 삶을 산다
세상 끝날까지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 유종지미(有終之美)
참되고 진실하게(眞 기뻐)
선하고 인자하게(善 예뻐)
사랑하며 아름답게 사는 것이다(美 미뻐)
기쁘고(悅,說 기뻐), 즐겁고(樂 예뻐), 사랑으로(愛 예뻐), 아름답게(美 미뻐) 사는 것이다
기뻐, 예뻐, 미뻐로 소논어의 삶을 산다
삶을 밝고, 맑고, 향기롭게 하라 불역낙호(不亦樂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