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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문학 기고
윤동주 서시의 일본 시비詩碑
- 오역으로 윤동주를 두 번 죽여서야
이 해 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11.20.
윤동주가 ‘정병욱 형 앞에, 윤동주 정呈’이라고 써서, 18편의 시를 담은 시고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만든 후, 그 머릿부분에 갖다 놓은 무제無題의 시가 오늘날 우리들이 애송하고 있는 이른바 윤동주의 서시이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중국 길림성 용정 교외의 명동에서 출생, 연희전문을 졸업한 후, 1942년 일본에 도항, 도시샤대학 문학부에서 수학했다. 재학 중이던 1943년 7월 14일 우리 모국어로 시를 썼다는 이유만으로 고종사촌 송몽규(당시 교토대학 재학생)와 함께 사상범으로 교토 시모가모 경찰서에 체포 구금되었다. 재판 결과, 두 사람 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 징역형이 선고되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 중 생체실험 주사를 맞고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옥사했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이처럼 생전에 시집 한 권 내지 못하고 죽은 그의 유고집은 친구 정병욱 님의 정성으로 마루 밑에 숨겨져 보관되다가 해방 후 동생 윤일주에게 전해져서 194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출간되어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의 선배요 사장이라 할 수 있는 정지용은 윤동주 시집의 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아직 무릎을 꿇을 만한 기력이 남았기에 나는 이 붓을 들어 시인 윤동주의 유고에 분향하노라.
겨우 30여 편 되는 유시 이외에 윤동주와 그의 시인됨에 관한 아무 목증目證한 바 재료를 나는 갖지 않았다. …내가 시인 윤동주를 몰랐기로소니 윤동주의 시가 바로 ‘시’고 보면, 그만 아니냐.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우리 나이 - 필자 註)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일제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윤동주가 수학했던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에는 그의 시비가 서 있다. 시비는 1995년 2월 16일 동 대학 코리아 클럽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또 최근엔 그가 살던 아파트가 있던 자리(현 교토조형예술대학)에도 시비가 세워졌다고 한다. 그의 서시는 우리들에게 널리 사랑받고 있지만 그의 목숨을 앗아간 일본 땅에도 시비가 세워지다니 참 뜻깊은 일이다. 그러나 일본어로 번역된 비문을 읽어보면 여기엔 치명적인 오역이 있어 이래서야 윤동주를 두 번 죽이는 게 아닌가 하는 분노마저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먼저 그 시비에 새겨진 서시 옆에 이부키 고(伊吹鄕) 씨가 번역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序詩
死ぬ日まで空を仰ぎ
一点の恥辱(ハジ)なきことを、
葉あいにそよぐ風にも
わたしは心痛んだ。
星をうたう心で
生きとし生けるものをいとおしまねば
そしてわたしにあたえられた道を
歩みゆかねば。
今宵も星が風に吹きさらされる。
(伊吹郷)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을 살펴보면, 먼저 첫 연의 ‘죽는 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에서 ‘하늘’을 ‘空ソラ’로 번역한 것은 잘못이다. 윤동주는 경건한 기독교 신자로서 그리스도의 박애정신과 민족 사랑이 그 정신세계의 뿌리였기에 그의 하늘은 공허한 하늘(空ソラ)이 아니라 신앙으로서의 하늘 혹은 천지신명을 뜻하는 하늘(天テン)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일본의 기독교회가 공통적으로 쓰고 있는 주기도문의 하늘도 '덴(天)'이며, 영어의 경우에도 '스카이(Sky)'가 아닌 '헤븐(Heaven)'이 되어야 옳다. 우리 한글에서는 '하늘'에다 '님'을 붙여 '하늘님' 혹은 '하느님'으로 자연스럽게 사용해 왔다.
다음 두 번째 오역은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하고 다짐한 것을 ‘한 점 치욕(恥辱)이 없기를’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앞으로 어떤 박해나 고난을 당하더라도 자기의 신앙과 민족의 양심 앞에서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다짐한 것인데 ‘한 점 치욕이 없기를’하고 번역했으니 이 또한 그의 시 정신을 올바르게 전하지 못했다. 부끄러울 恥 자만 써도 될 것을 굳이 욕 당하는 일 없게 해달라고 비는 듯한 욕辱 자를 덧붙여서 의미를 왜곡시킬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세 번째는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의 구절을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해야지(生きとし生けるものをいとおしまねば)’로 번역하여 작자의 시 정신을 근본적으로 훼손시켜 놓았다.
'죽어가는 것'이 '살아있는 것'과 어떻게 의미가 같을 수 있겠는가. 암울한 일제의 압제 아래서 사람만이 아니라 민족의 언어도 풍속도 문화도 죽어가는 시대에 이렇게 죽음으로 내몰리는 것까지 사랑하겠다는 시인의 결연한 의지를 ‘모든 살아있는 것을 사랑해야지’로 번역한 것은 이부키 씨가 아무리 이어동의異語同義라고 우긴다 할지라도 치명적 오역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잘못을 바로잡기 위하여 이미 1995년, 구라타 마사히코, 한석희 씨 등, 일본 기독교 문인들이 뜻을 모아 『天と風と星と詩』라는 시집을 새롭게 펴내어 이부키 씨의 시집 『空と風と星と詩』를 반박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한 바 있다.
序詩死ぬ日まで天を仰ぎ一点の恥もないことを葉群れにそよぐ風にも私は心を痛めた。星をうたう心ですべての死んでいくものを愛さねばそして私にあたえられた道を歩んでいかねば。今宵も星が風にこすられる。(일본 기독교 출판국日本キリスト敎出版局)
저명한 윤동주 연구자인 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 전 와세다대 교수(문학평론가)도''서시'의 일본어역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일본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는 '서시'의 일본어 번역에 일부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고, 이부키 고(伊吹鄕) 씨가 번역한 '서시'에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부분을 '모든 살아있는 것을 사랑해야지'로 번역한 것은 원래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이해할 수 없는 번역이라고 지적하고 있다.(‘서시’ 2007. 가을호)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윤동주 시인이 하숙했던 연고지(교토조형예술대학)에 세워진 새 시비에 여전히 이부키 씨의 번역문이 버젓이 새겨져 있다니, 비록 그가 일본에서 처음 윤동주 시집을 완역한 공功의 부분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이는 일본의 역사 왜곡과 맥을 같이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도저히 떨쳐 버릴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