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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9: 1 주 안에서 행한 일 - 고전 9: 5 믿음의 자매된 아내
제 9 장 : 자유와 모범
1. 사도의 권리 ( 9 : 1-11 )
1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3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4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6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7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8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9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10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고전 9: 1 주 안에서 행한 일 -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
바울은 종의 신분이 아니고 자유자이었다. 그것은 육신적인 의미에서 뿐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서도 그러했다. 그는 자유자일 뿐 아니라 또한 사도이었다.
1]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여기서의 '자유'는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영적인 자유를 말한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율법주의에서 벗어난 사람이었으므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믿음의 범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8: 13에서 그 자신이 고백한 대로 형제를 위해 그의 자유를 포기하였다.
* 고전 8: 13 -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2] 사도가 아니냐?
이 말 속에는 혹자의 말대로 사도인 바울이 사도로서 자신의 권리를 마음껏 행사할 수 있다는 뜻이 들어 있다. (Godet).
동시에 바울 자신의 사도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두 가지 사실을 제시하였다. 즉 자신이 부활한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것과 고린도인들이 자신의 전도로 인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3]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못하였느냐'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키'(*)는 강한 부정을 나타내는 말로서 바울이 본 절에서 던진 네 개의 질문 가운데 이 구절에서만 사용되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된 근거로 먼저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목격한 사실을 제시하는데, 이 단어가 그 사실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하는 것은 혹자의 말대로 행 9: 3 이하에 기록되어 있는 다메섹 도상(道上)에서 목격한 사실을 말한다. (Godet, Grosheide).
* 행 9: 3-9 –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4]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이 말은 바울이 자신의 사도성을 주장하는 두 번째 근거이다.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를 최초로 설립하였고 또한 자신이 뿌린 씨앗의 열매가 바로 고린도 교인들이기 때문에 자신의 사도로서의 근거는 명백하다고 주장한다.
3: 7의 말씀과 같이 바울 자신이 씨를 뿌렸다 해도 하나님의 인정하심이 없었다면 어떠한 열매도 맺을 수 없었을 것이다.
* 고전 3: 7 -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고전 9: 2 사도 됨을 인친 것 -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찌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친히 보았다. 바울은 사도로서 고린도 교회를 세웠다. 주께서 그를 사도로 세워 복음 전파자로 사용하신 한 구체적 증거가 바로 고린도 교회이다.
1]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바울은 말한다.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바울은 종의 신분이 아니고 자유자이었다. 그것은 육신적인 의미에서 뿐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서도 그러하였다.
모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에 죄와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
바울은 자유자일 뿐 아니라 또한 사도이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친히 보았다. 바울의 사도직은 고린도교회에서 증거되었다. 주께서 그를 세워 복음의 전파자로 사용하신 구체적 한 증거가 바로 고린도교회이었다.
그들은 바울의 전도 사역에서 맺혀진 열매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의 사도직은 주 안에서 그 교회와 교인들에 의하여 확증된다.
2]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그의 사도권을 의심할 근거가 적당치 않았다.
'인'(印)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프라기스'(*)는 어떤 일정한 모양을 새기는 도구를 가리키거나 그 도구를 사용하여 진흙이나 밀납 등에 새긴 소유권과 증명의 표시를 말한다.
바울로 인하여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고, 그들이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은 바울이 사도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분명한 증거였다.
엄격히 말해 사람들의 회개는 성령의 역사이다. 하지만 바울의 복음 전파로 말미암아 교회가 생긴 것은 바울이 하나님의 사도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Hodge).
고전 9: 3 비판하는 자에게 변명할 것 -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할 것이 이것이니 )
바울은 그의 사역을 트집잡는 자들에게 대답한다.
1]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 앞 구절을 지시할 수도 있고 뒷 구절을 지시할 수도 있다. 혹자는 이를 뒷절에 연결시켜 바울이 자신의 언행을 본으로 보이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언급하는 가운데 자기 사도권을 변호하는 것이라 한다. (Grosheide).
그러나 뒷 절은 바울의 사도권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권이 입증된 후에 말할 수 있는 사실들을 열거한 것이므로 앞 구절에 연결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Morris).
'비판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크리누신'(*)은 '엄밀히 조사하다', 혹은 '심문하다'의 뜻이며 '변명할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폴로기아'(*)는 '답변하다'의 뜻으로서 둘 다 법률 용어이다.
즉 바울은 그의 반대자들이 심문하듯이 자신의 사도권을 따진다면 앞에서 말한 내용들, 곧 자신이 부활한 그리스도를 목격하였으며, 이방인인 고린도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회심시킨 뚜렷한 사도 됨의 증거들을 법정에서 증인이 되어 증명하듯이 단호하게 답변하겠다는 것이다.
고전 9: 4 먹고 마실 권리 -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
바울은 먹고 마시는 자유를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스스로 제한했다.
1] 우리가
본 절에서 복수 1인칭 동사 '에코멘'(*, '우리는 가지고 있다')을 사용한 것은 바울이 자신의 동역자 바나바를 의식하였기 때문인 것 같다.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자비량 선교를 하였다(6절).
혹은 '우리' 속에 실라와 디모데를 포함시켰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고린도 교회를 위해 바울과 협력하였으며 바울의 삶의 방식을 따랐었다. (Godet).
2]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권'(權)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수시안'(*)은 '권리'(right, NIV)를 뜻한다.
이는 바울이 고리도 교인들로부터 생계에 필요한 물질적 원조를 받을 권리가 있었음을 뜻한다. (고전 9: 9-11).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사역을 트집잡는 자들에게 대답한다. 무슨 일이든지 사랑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이해할 수 있지만, 문제점을 지적하려고 하면 한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주신 모든 음식이 다 깨끗하며 감사히 받으면 버릴 것이 없지만(딤전 4:4), 그는 다른 성도의 유익을 위해 먹고 마시는 자유와 권리를 스스로 제한하였다.
고전 9: 5 믿음의 자매된 아내 -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
본 절에서 바울은 자신도 역시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결혼할 권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결혼 문제도 그러하다.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는 결혼하였고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녔다.
결혼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스스로 독신의 길을 택하였다. 그것은 좀 더 복음 사역에 자유롭게 전심 전력하기 위해서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는 스스로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한 것이었다. 그것은 가능하고 때때로 필요하고 유익하다.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무엇이든지 포기하거나 제한할 수 있는 것이다.
1]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1) 다른 사도들
사도행전에서는 사도가 예수의 열 두 제자와 바울과 한 두 사람이 더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 행 14: 4, 14 – 4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본 절에서도 사도의 범위가 사도행전의 언급보다 그리 확대되지 않았을 것이다.
(2) 주의 형제들
‘주의 형제들’이란 예수님의 육신적 동생들 즉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등을 가리킨다(마 13: 55). 이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하는 의문에 대해 몇 가지 견해가 있다.
Ⓐ 요셉이 마리아와 결혼하기 전에 전처(前妻)에게서부터 태어난 예수의 형들도 포함한다. (Lightfoot).
Ⓑ 예수님의 사촌 형제 즉 마리아의 동생과 남편 알패오의 소생일 가능성도 있다.
* 마 10: 3 –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 가장 분명한 것은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아들들로서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이 네 사람들이다.
* 마 12: 46 -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 마 13: 55 -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 행 1: 14 -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 갈 1: 19 -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3) 게바
바울은 다른 사도들과 구분하여 '게바' 곧 '베드로'를 따로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베드로가 탁월한 사도이므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두드러진 본보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가 탁월한 사도였다는 것은 고린도 교회 내에 '게바파'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 고전 1: 12 -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또한 본 절은 베드로가 아내가 있는 자임을 추측하게 한다.
* 막 1: 30 -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2]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자매된 아내'라는 말은 헬라어의 관용구로서 '자매'와 '아내' 이 두 단어가 서로 동격(同格)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자매'라는 말 속에는 '믿는 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Lenski).
'데리고 다닐'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리아게인'(*, '사방으로 데리고 다니다')은 '관례적인 선교 여행'에만 적용시킬 수 있는 용어로 당시의 사도들이 아내를 대동시키면서 도움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2세기 말엽,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나 4세기 로마 교회의 부제(副祭)였던 암브로시에스터(Ambrosiaster)에 의하면 요한과 바울을 제외하고 모든 사도들에게 아내가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결혼한 사도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딸린 식솔까지 교회로부터 공궤를 받을 권리가 있었다. 본 절에서 바울은 자신도 역시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결혼할 권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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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은 남에게 나눠 줌으로써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나눔으로써
채워지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베푸는 만큼 행복의 양도 그만큼 많아 집니다.
오늘 하루도 주위 사람들에게 베푸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