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향(茶香)이 녹아
섬진강으로 흐른다
<월간 자전거생활에서 옮겨 옴>
보성강은 서출동류(西出東流)다. 서쪽에서 출발해서 동쪽으로 흐르는 귀한 강이다. 우리나라의 강이 대개 동출서류(東出西流)하는 것과는 정반대다. 동쪽으로 흐르는 강 유역은 길지라는 게 풍수의 말이다.
빳빳한 자존심의 땅, 녹차를 빼고 나면 이렇다 할 물산이 넉넉지 않았어도 서편제를 지켜온 멋의 고장 보성, 골짜기를 파고드는 물길은 동복천과 합해져 거대한 주암호를 만들고, 여수, 광양 산업단지까지 강물을 나눈다. 물길 삼백리 끝나는 곳은 이름도 예쁜 압록(鴨綠)이다. 섬진강이 펑퍼짐하게 육덕을 불려가는 아랫녘이다
글·사진 조용연(여행작가, 前 울산지방경찰청장)
강이 저마다 다른 발원지를 주장하는 것은 어디나 같다. 하기야 강으로 가지 않는 실개천이 어디 있으랴. 보성강도 그렇다. 제암산 자락이 발원이라고도 하고, 봉산리 한치재 근처를 들기도 하나, 보성사람들은 용추폭포가 있는 일림산 자락을 연원으로 친다.
제암산(807m), 사자산(666m), 일림산(664m) 연봉의 호남정맥은 말발굽처럼 곰재마을(웅치면)을 아늑하게 감싸 안고 있다. 봄이면 이 산줄기 능선에는 철쭉이 지천으로 핀다. 보성만 을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어 금상첨화다.
보성강, 녹차밭 너머에서 출발한다
용추폭포에서 여정을 시작한다. 겨울 아침이라도 부지런한 산꾼들은 주차장으로 속속 들어온다. 섬진강의 발원이라고 허풍스럽게 안내하지만 밉지 않다. 적어도 보성강물이 섬진강물이니 그리 넉넉하게 주장하는 것이리라.
해가 짧은 겨울, 1박2일에 끝내야하는 강둑길을 이번에는 전기자전거의 도움을 받아볼 요량이다. 가벼운 설렘도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쭈그러드는 알 수 없는 자신감, 실펑크처럼 조금씩 아주 조금씩 빠져나가는 힘에 대한 승복, 그게 내게도 오고 있는지 모른다. 전기자전거가 어떤 처방을 줄는지 그건 미지수다. 차체가 묵직하다. 70년대 모토로라 무전기를 연상시키는 배터리는 아마도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다이어트를 나날이 해나갈 것이다.
된서리가 곱게 내린 들판은 선블록을 잘 펴 바른 여인의 얼굴 같다. 그림자가 자전거를 뒤세우고 안내하며 달린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6단까지 있는 파스(PAS, 페달링을 도와주는 전기구동력의 세기)를 1단으로 하고 달린다. 어시스트라는 말이 실감난다. 둔중한 페달링을 도와주는 전기의 힘은 차분하다. 잠들어 있는 아가의 심장이 만드는 새근거림같이 겨울바람에 이내 묻혀버린다.
보성은 녹차수도다
보성의 브랜드 가치는 녹차에서 완성된다. 조그만 소읍에도, 들판에도 온통 ‘녹차수도’라는 광고에 자부심이 그득하다. 자극과 욕망 사이에 지친 현대인에게 녹차는 구원이다. 성인병, 콜레스테롤, 처지는 피부에 중년은 우울하다. 비타민C, 카테킨, 테아닌 따위의 이름은 복잡하다. 2008년 우주인 이소연이 지구를 바라보며 마신 것도 바로 보성녹차였다고 자랑하니 귀가 솔깃하다. 노화 방지에 최고라는, 남도의 끝자락 보성녹차는 유혹이자 복음이다.
게다가 겨울은 녹차관광에 제철이다. 봇재에서 다향각까지는 200만개 LED등이 형형색색으로 연출하는 빛의 향연이 한창이다. 발아래 회천 율포 솔밭해변은 겨울바다의 낭만을 찾아오는 연인들을 사랑의 미로에 빠지게 한단다.
보성은 전국 차 생산의 40%를 차지하고 있으니 수도라 할만하다. 1939년부터 인공차밭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유독 이곳이 차 재배에 적격인 것은 해양성기후와 대륙성기후가 접하는 천혜의 조건에 있다. 게다가 연평균 13.4도의 온난한 기후와 강우량 1,400㎜와 맥반석 토양에 바다, 산, 호수가 어우러져 있다. 유난히 자주 끼는 안개는 차광효과까지 더해 모자란 강우량을 보충하기까지 한다니 더할 나위가 없다.
길이 없는 물길, 보성강의 속살
동서로 이어지는 2번 국도가 고속도로만큼이나 뻥뻥 뚫린 탓일까, 보성강을 따라가는 옛 국도는 한산하다. 주유소는 망했고, 자전거여행객에겐 축복이다. 끊임없는 속도전쟁 속에 탄생하는 먹고 먹히는 여백이다.
대야리를 지난다. 겨울은 강물이 줄어 지난해 큰물이 들이친 제방 보수공사를 하기에는 제격이다. 한바탕 몸을 비트는 강을 따라 말뫼마을 강둑으로 접어든다. 보성강이 장흥 땅에 살짝 걸치는 구간이 장동과 장평이다. 탐진강이 시발하는 유치면 소양마을 산골짜기 사람들이 80리가 넘는 장흥장 대신 재 넘어 화순 이양장이나 장평장을 가던 그 장평이다.
광평리에서 다시 보성강줄기를 잡고 마을길로 접어든다. 녹양리 도내교에 들어서자 낭주 최씨 집성촌의 고옥이 아늑하고 기품 있다. 배산임수의 명당이 이런 곳이리라. 강둑으로 길이 있을까. 햇살에 언 땅이 녹아 질척거리는 길로 끈질기게 유혹하는 것은 대나무 숲과 서걱거리지 않는 고요다. 물주머니가 제법 넓어진 강물은 녹색과 연두의 절묘한 배합이다. 에메랄드 아님 사파이어? 순간 사치의 색깔들이 언뜻 스치지만 마뜩찮다. 그렇다. 녹차빛깔이다. 넋을 잃고 강둑에 선다. 벼랑에 막힌 강둑으로 더 나아가지 못해도 이 불편한 차단이 선물한 적요(寂寥)다. 오늘 가야할 여정에 되돌아 나오면서도 귀한 선물에 거긴 남겨두어야 할 곳이 된다. 다시 836번 지방도를 달려 노동면 소재지다.
노동(盧洞)과 미력(彌力), 낯설지만 의미 있는 땅이름
오전 10시가 넘어서도 인적이 드문 면소재지 노동, 어디 노동만의 일인가. 사람이 줄어가고 있는 농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노동농협, 노동면사무소, 노동보건소, 노동파출소, 노동택시, 관청이 들어선 마을의 구색들이 영화의 세트장처럼 휑하다.
전혀 다른 한자(漢字)임에도 ‘노동’이 주는 어감은 내겐 서늘하다. 그걸 트라우마라고나 해야 할까. 그 신성한 노동이 내 일생의 대척점에 있다. 노동은 거칠었고 생존이었지만 나의 배역은 그 노동이 충돌하는 지점의 방패였다. 내 역할은 그 방패의 끄트머리였다. 노동의 대열 앞에서 나는 출동했고, 질서의 이름으로 노동을 외면했다. 나도 노동자면서 노동자의 이름에 늘 가슴이 서늘했다. 노동은 여전히 내게 녹지 않는 이물질일지도 모른다.
보성읍은 4㎞ 남짓하다. 강가에 소읍이라 해도 관청이 들어설만한 너른 땅이 없다보니 보성읍은 한 발치 물러나 자리 잡았다. 미력면으로 강을 건넌다. 미륵의 힘, 미륵암에서 비롯되었다하니 얼마나 멋진 이름인가. 미륵의 힘을 일상으로 차용한 그 신앙심의 근저는 아마도 고달픈 민초의 삶이었을 것이다.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의 조상들이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어사 박문수는 복숭아가 많아 도개리(桃開里)였던 이 마을에 들러 “앞으로 이쪽으로 큰 길이 날 것이다”고 예언했다. 해서 아예 이름을 道開里로 바꾸었단다. 실없는 소리가 아니었다. 임실로 가는 18번과 담양으로 가는 29번 국도가 교차하고, 목포-광양 간 10번 고속도로에다 경전선 기찻길까지 곁을 지나가니 말이다.
득량만으로 바꾼 물길, 보성강댐
용정삼거리에서 우로 돌아 강줄기를 잡고 달리면 갑자기 거대한 호수가 나타난다. 보성강저수지다. 강 건너 겸백면 용산리에 막은 보성강댐이 만든 물주머니다. 1937년에 완공했으니 남한에 남아 있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수력발전소다. 더구나 2.2㎞의 도수로터널을 뚫어 득량만의 넓은 평야로 물을 보내는 유역변경식이다. 규모야 적지만 1948년 북한이 수풍댐을 비롯한 북녘의 전기를 끊자, 극심한 전력난 속에서 청평댐, 섬진강댐과 더불어 효자노릇을 했다. 이제는 발전량(3,120kw)이 적다보니 농업용수로 전용해야 하느냐 마느냐 논란이 뜨겁다. 그래도 득량만을 적셔 이 지역 사람들이 ‘애당쌀’로 부르는 예당쌀을 탄생시킨 공을 모른다 할 것인가. 문자 그대로 득량(得糧)한 게 아닌가.
주암댐, 호남의 물 창고
겸백면에서 북행하면 율어면이다. 율어는 산첩첩 오지에 그래도 농토가 조금치나마 있어 6.25 전란 속에서는 빨치산들 식량의 보급창 역할도 하게 된다. 복내면에 들어서야 문덕, 복내, 율어면 17개리를 삼킨 주암호의 영향권이 확실하게 증명된다. 주암댐이 생기고, 탐진강댐의 물을 가두자 전라남도의 물은 한결 풍성해졌다. 그러나 복내는 수몰로 인해 마을이 물러나 앉았다.
복내대교에서 바라본 주암호는 가뭄으로 드넓은 습지가 붉게 타오르고 있다. 수생식물들의 목마름인가보다. 작은 소읍에 2면이나 되는 잔디구장이 놀고 있다. 남도로 겨울전지훈련을 오라는 신호라는 것이다. 복내면 시천리 마을 앞은 백사장이 유명했었다. 사람들은 천렵하고, 매운탕을 끓여먹으며 강변에서 농사의 고된 신역을 달랬었다. 개울은 섶다리 건너 동교리로 내왕했다. 이제는 몇 십리는 돌아가야 하는 마을, 굳이 갈일도 없어져 남남이 되었다.
빳빳한 보성의 자존심, 3보의 향기
문덕면에 들어서면 주암호가 강섶 길을 저만치 밀어낸다. 강한 자의 위세일까, 유순하던 길도 산허리로 올라붙으며 고도를 높인다. 거친 숨소리에 헛기침을 하다가 18번 국도와 15번 국도의 교차점에서 ‘서재필기념공원’을 만난다. 서재필이 누구인가. 국사가 입시에서 사라져버려도 그는 익숙하다. 한글전용인 독립신문을 만들고, 갑신개혁을 주도했던 꿈꾸는 혁명가. 그 시절 미국문물을 보고 온 이 시대의 선각자가 아니던가. 보성이 삼보(三寶)의 고장이라고 자랑하는 ‘의향(義鄕)의 대표인물이다. 벌교태생인 민족종교 대종교의 창시자인 나 철 선생 또한 보성사람이다. 예향(藝鄕) 보성의 소리세계도 깊다. 맑고도 높고, 아름답고도 슬픈 여성적 기교의 계면조(界面調)다. 서편제의 비조(飛鳥)인 박유전(1835~1906)이 순창 태생이나 보성으로 이주했고, 그 맥은 보성소리의 창제자인 정응민과 명창 조상현으로 이어진다.
또 한 사람 우리 현대음악사의 거목 채동선(1901~1953)이다. 바이올린을 ‘빠요링’이라 하고, 유식하게 ‘제금가(提琴家)’라 하던 시절을 아시는가. 벌교 지주의 아들 채동선은 경성제1고보(경기고)를 거쳐 일본 와세다에선 영문학을, 독일에선 음악을 공부했다. 민족의 서정과 민요의 채보, 교향곡의 작곡 등 음악사적 공헌이 너무나 큰 산이다. 노래가사의 주인이 3번이나 바뀐 비운의 작곡가다. 일제 때 정지용의 시 ‘고향’에 붙인 곡은 정지용의 월북으로 사장된다. 화급히 박화목 작시의 ‘망향’이 붙여져 출판되어 두 번째 손을 거친다. 채동선 사후 12년이 지나서야 이은상 시 ‘그리워’에 붙여져 이 곡은 불후의 가곡으로 우리 곁에 남았다.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도
그리운 옛님은 아니뵈네
들국화 애처롭고
갈꼿만 바람에 날니고
마음은 어디고 붙일 곳 없어 먼 하늘만 바라본다네(중략)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서
진종일 언덕길만 헤다가네(이은상 시)
날은 어두워진다. 제법 큰 앞가랭이재에 올라붙자 배터리 잔량의 눈금이 헐떡거린다. 벌교에서 올라오는 15번 국도와 만나는 곡천삼거리(순천시 송광면 봉산리)에서 하루 여정을 접는다. 겨울해가 짧기도 하다.
송광사와 선암사로 가는 길목
보성강은 원래 벌교와는 인연이 없다. 그래도 벌교 얘기 없이 넘어갈 수 없는 것은 벌교가 1929년에 이미 읍으로 승격한 나이배기이기 때문이다. ‘채동선음악당’이 벌교읍에 들어선 것은 채동선의 출생지기도 하지만 벌교가 보성읍보다 인구가 많은 제1의 소읍이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순천만 꼬막과 조정래 소설 <태백산맥>의 무대가 벌교다. “여수 가서 돈 자랑하지 말고, 순천 가서 인물자랑 하지 말고, 벌교 가서 주먹자랑 하지 말라”는 전국구 3행시다. 전라남도의 알짜, 쇠불알처럼 기가 똘똘 뭉친 고흥땅 사람들이 벌교에서 한차례 텃세를 당했던 얘기는 심심찮은 추억거리다. 벌교에서 철길 건너 고흥 동강 땅에 들어서서야 수문장처럼 지켜선 첨산(313m)이 반겨줘 안도의 숨을 쉬었다는 것이다.
벌교는 보성 땅을 녹차밭과 꼬막여행으로 가고자하는 사람들 몫으로 남겨놓는다. 송광사 쪽으로 가는 아침은 발이 시리다. 그냥 도보여행이라면 송광사에서 선암사로 넘어가는 굴목이재를 넘고 말았을 것이다. 낙안민속마을에서 살아있는 민속촌의 모습을 10여년이 지난 지금 다시 보고 싶기도 하고.
이제 강둑도 멀어졌다. 문길삼거리(순천시 주암면 요곡리)에서 창촌 방향으로 접어든 것은 순전히 압록이란 이정표 때문이다. 지도를 들여다보지 않은 불찰이다. 월경재를 넘는다. 왼손 편에 아미산(583m)이다. 산꾼들에겐 이름난 산이다. 옥녀봉까지 남북으로 뻗어서 보성강을 더욱 잘 조망하는 산이다. 목사동천은 겨울잠에 졸린 해마저 살얼음 속에 잡아 가두고 흐른다. 주암댐의 영향이 거의 끝난 곳에서 목사동1교를 건넌다. 이제 12㎞더 가면 압록이다.
태안사전투와 조태일 시문학관
압록까지는 선택이 없는 국도여서 자동차 소리를 역겨워 해선 곤란하다. 길 끄트머리로 얌전하게 가면 될 일이다. 보성강물도 지루하리만치 동행했으니 심드렁해도 좋다. 죽곡을 지나 유봉리에서 이정표만 확인한다. 태안사 입구다. 한때 송광사와 선암사를 말사로 거느릴 만치 큰절이었던 태안사는 다음 기회로 젖혀둔다.
‘태안사’라는 이름이 평생을 경찰관으로 보낸 내게는 ‘태안사전투와 위령탑’으로 와 닿는다. 6.25 때 곡성 압록교에서 북한 제603기갑연대를 타격(북한군 3명 생포, 사살 52명)한 전투는 경찰 몫이었다. 군대는 전선을 지키기도 모자랐다. 그 보복으로 태안사경찰작전지휘사령부를 습격한 전투에서 곡성경찰관 46명이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 호국의 정신을 기리고자 만든 승전탑은 압록리 길가로 나와 있다.
‘조태일시문학관’은 태안사 깊은 골짜기에 있다. 시집 <국토>는 한때 불온서적이었다. 시대와의 불화가 만든 브랜드다. 태안사 대처승의 아들로 태어나 의지한 문학, 시로 표현되는 우중충한 시대는 그의 뜨거운 피를 이해하기에는 참 허술했다. “시인의 삶과 건축의 물질성이 일체를 이룬 몇 안 되는 문학관”이라는 평가는 적확하다. 곡성에서 아류증기기관차를 타고 온 관광객이 찾아가기에 이 골짜기는 너무 깊고도 무겁다. 쫄바지 입고 자전거 타고, 땀 식히며 들러 가기에 그의 시는 너무 절절하다.
<참고자료>
1. 보성군청, 지명의 유래, 보성군 홈페이지
2. 한국의 발견, 전라남도, 보성군, 뿌리깊은나무
3. 한상우의 클래식FM, 채동선의 생애, 북랩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