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 만남 후회없는 삶
불교의 근본 목적은 ‘상락아정(常樂我淨)’입니다.
상락아정 이란 열반의 네가지 덕〔四德〕을 말합니다.
즉 열반은 영원하며〔常〕, 안락에 가득차고〔樂〕, 절대이며〔我〕, 청정하다〔淨〕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이루어 열반의 경지가 항상 나타나 있으므로 상락아정이라 합니다만
범부는 미혹(迷惑)하여 열반을 모르고 번뇌(煩惱)와 현상경계를 보며
그것에 집착하고 거기에 빠져 살고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범부들이 집착(執着)하고 있는 현상에 대하여 그것은 고(苦)요, 공(空)이며,
무아(無我)이며, 무상(無常)이라고 설파하시어 미혹된 집착을 떼게 합니다.
미혹한 집착을 떼기만 하면 그곳은 바로 열반이요, 상락아정입니다. 원래 이 모든 것이 한 길입니다.
부처님이 우리들의 가슴에 심어 주고 싶으셨던 말씀이 바로 이 네글자로써,
자기와 세계의 진상을 알지 못하여 영원히 존재하고, 즐겁고,
자기 마음대로의 주체성을 가졌고, 교만과 열등감과 경멸 등을 버리며 애착과 집착까지 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 마지막 끝에 남아 있는 진실 즉 정토(淨土)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 끝에 서서 마지막으로 하는 사랑이 바로 진실(眞實)입니다.
진실한 사랑을 위해 우리는 가고 또 가고 있는 것입니다. 진실한 그것이 바로 정토입니다.
허공에 있으나 떨어지지 않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해와 달과 별입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은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돌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태어났다’는 것은 태어날 뿐이고, ‘죽었다’ 라는 것은 죽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즉 생사(生死)하고 우리 본래의 나 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상락아정이라는 말의 증거가 나타납니다. 한 철학자가 “정신과 육체는 둘이 아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잘한 사람이 박수를 받는 것은 잘 못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못한 사람에게도 박수를 보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잘하고 못하는 것은 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도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평등(平等) 사상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사상은 태조 왕건 때에 처음 나왔고,
원효스님 때의 ‘화전원륭사상’과 일맥상통합니다.
또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선의 검객으로 알려진 임제선사의 어록에 나오는 말입니다.
풀이하면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고 서는 곳마다 참되게 한다’라는 말입니다.
우선 중생의 삶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중생의 속성인 번뇌는 바로 우리의 불성(佛性)으로부터 나옵니다.
즉 불성이 바로 주인(主人)이고 번뇌는 객(客)인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의 삶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불성에서 나온 번뇌가 오히려 불성을 가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인이 주인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내가 나의 생각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생각에 끌려 다니고 있으니까요.
이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악(惡)도 많이 저지르게 되고 뜻하지 않은 행동도 하게 되어
뒤죽박죽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수행을 통하여 부처가 되면 바로 이런 전도된 상황이 바로 잡히게 됩니다.
내가 주인(主人)이 되어 내 생각을 마음대로 쓰게 됩니다.
중생처럼 내가 원하지 않아도 흘러나오는 생각들은 없어지고 내가 원하는
생각만을 필요한 때에 쓸 수 있게 됩니다.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 생각을 마음대로 쓸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처가 된 뒤에 마음껏 쓰는 생각은 중생의 번뇌와는 달리
‘반야지(般若智)’라고 합니다. 즉 한마디 한마디 모두가 바로 진리의 말들입니다.
종합해서 이야기하면 내가 부처가 되면 내가 가는 어느 곳이나 내가 주인이 되어
그곳을 진리의 땅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주적이고 자립적인 정서를 21세기의 철학으로 꼽고 있습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이 바로 주체적인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은 지위의 높낮이, 하는 일의 귀천을 무겁게 여기지 않습니다.
지금 있는 처지에서 빛을 내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없고,
모든 사람들이 손에 때 묻히지 않는 일만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사람의 빛남은 일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어떻게 나의 일로 받아들여서 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무한경쟁의 사회에서 이런 가르침은 더욱 소중합니다.
불교라는 것은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돌고 있듯이 자신이 스스로 믿고 스스로 행하고,
스스로 알아 가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지구 위의 인간과 60만종의 생명체가 그저 공(空)이나 무(無)로 돌아가 버리는 것
이 아니라 무량무수(無量無數)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기 의지대로 능동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생명력입니다.
결국 이것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아는 것이 없으면 힘이 없습니다.
참으로 아는 경지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최고의 법문인 부처님의 법문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시간과 공간적으로 어떠한 학문이나 진리도 부처님의 법문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합니다.
그러니 불자들은 부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를 알고, 이 위대한 법문을 여러 사람들이 알게 해야합니다.
부처님의 법문은 소승(小乘)과 대승(大乘)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소승은 자기 한 사람만의 해탈을 목적으로 하여 자신의 번뇌를 없애는 것으로 마지막을 삼는데 비하여
대승은 수행의 목적인 열반의 경계에 적극적 의미를 인정하고
자기 스스로 이로움과 타인의 이로움을 함께 추구하는 보살도를 주장하는 불교입니다.
소승이 철저하게 개인적 수행과 해탈을 주장하고 있는 데 비하면 대승은 대중적인,
사회 공동적인 주장이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소승이 현실적인 육체와 번뇌를 토대로 하여 그 극복과 해탈에서 열반에 이르는 경과를 밟는 것에 비하면,
대승은 깨달음 자체에 믿음을 두고 깨달음의 진리에는 자타(自他)가 둘이 아님을 보며
개인과 국토를 함께 성숙시킨다는 근본 입장에 선다 하겠습니다.
그래서 소승은 미혹에서 출발하고 대승은 깨달음과 믿음에서 출발하는 차이가 있다 하겠습니다.
이외에 타율적이라고 해서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의 힘을 빌리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빌리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율적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본래의 마음속에 있는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을 꺼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염불이라는 것은 상대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을 끄집어내는 것으로 자율적인 것입니다.
불교는 4차원의 세계라 했습니다. 인생은 끝도 시작도 없고, 앞뒤도 없으며,
위 아래도 없는 아무 걸림이 없는 세계가 바로 불교의 세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