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얘기
자유공원 아래 천 베드로 부제에게 갔을때 일이다.
창밖에서 바람결에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고양이 소리인줄 알았는데 누군가 마지막 숨을 다해 우는 처절한 신음소리였다.
창문을 여니 낮은 슬레트 지붕아래 창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그 소리를 따라 빙 돌아 가보았더니 육십이 넘었을까 초로의 아주머니가 누워서 울고 계셨다.
이웃집 세든 이가 알려주기를 그녀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몆마디를 건네 보았다. 몇 칠을 아무것도 못 먹었다 했다. 방 한쪽 구석에 두유 박스가 놓여 있었다.
사정인즉 위장이 아파서 몆칠 째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고 하소연을 했다. 옆집 아주머니에게 물으니 아픈지 한 달은 되었는데 가족이 아무도 없어 병원을 데리고 갈수가 없었다고 라고 말끝을 흐렸다.
그 집은 마당을 한가운데 두고 여러 가구의 셋집이 빙 둘러싸는 셋방을 놓아 임대료를 내는 나그네들 같은 세입자들의 집이었다.
아주머니를 들쳐 업고 가정동 세브란스 병원으로 향했다.
진단결과 위암이었고 병원 측은 수술을 해보겠다고 했다. 가족이 없어 내가 보증을 서고 종양제거 수술을 시작했다.
담당의사는 수술이 끝나자 문 앞에서 기다리던 내게 떼어낸 암 덩어리를 보여주었다. 울퉁불퉁 멍게를 닮은 암덩어리가 어른 주먹만 했다. 저 흉물스런 덩어리를 뱃속에 넣고 있었으니 그 긴 시간 동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병원 측은 가망이 없다고 했다. 암은 장기 여러 곳에 붙어있었다.
임종을 준비하라고 했다.
수술비도 갚아야하고 조만간 장례를 치러야할 상황이었다.
돈은 처음부터 없었다. 때 마침 뜸으로 자원봉사를 하시던 김0월
란 분을 병원 입구에서 만났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정을 말씀드렸다, 저간의 사정을 듣고 나서 그분이 모자란 병원비용을 모두 채워 주셨다.
숨을 거두기 전 그분의 죄를 고백하고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죄의 용서와 보속을 줄 사제의 신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지막 가는 이의 소원이라 그녀의 무거운 마음의 짐을 덜어주고 싶었다. 과거를 듣기로 했다.
그녀는 천주교 신자였으며 세례명은 마리아였다.
군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인천으로 올라와 미용사로 생활을 하다가 중늙은이의 재취로 갔다.
사내아이 하나 낳고 아이가 병으로 죽자 버림을 받았다고 했다.
그 후로 미용실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외로움에 젖어 홀로 지내던 그녀가 돌발행동을 시작했다.
빙의와 환각에 시달렸다. 처음엔 “봉사해라”, “어디다 무었을 바쳐라” 환각 속에 천사가 나타나 시키는 대로 했단다.
나중에는 다니던 답동 성당 성모 마리아 상과 아기예수상에 “모자를 만들어 씌워라” 했는데 어느날 “망치로 성모상을 부수라”는 환청을 듣고 새벽에 성당마당으로 들어가 망치로 부쉈다는 말을 전했다.
그후로 마음의 짐이 생겼다고 한다.
그의 고백을 다 듣고는 당신의 죄가 아니라고 했다.
마음과 몸이 아파서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저지른 일이다.
환각속에 빠져 환시와 환청속에 지은 잘못이니 죄가 안된다. 고 말해 주었다. 걱정 말고 편히 가시라고 했다.
임종을 기다리는 그녀를 위해 이웃들 몇 사람이 모여 있었다.
인공호흡기를 떼었다. 그리고 그녀는 곧 숨을 거두었다.
길벗의 이름으로 보내드린 첫 별세자 였다.
진심으로 편안히 가기를 기도했다.
고단했던 세상의 짐을 내려놓고 그녀의 성모 마리아님 곁에 가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녀의 사정을 잘아는 천주교 신자의 도움으로 특례처럼 일요일 오후 답동 성당에서 장례미사로 봉헌되었다.
그리고 한줌의 재로 한 많은 인생을 마감했다.
임종을 하자 병원으로 그녀의 친언니가 장조카를 데리고 나타났다. 조카는 대사관에 근무한다고 했다.
장례를 마치고 조카는 내게 미국행 비자가 필요하면 언제든 자기를 찾아오라고 말 했다.
근데 삼십년이 지났지만 나는 미국에 한번도 갈일이 없었다.
그 조카가 선심을 쓰듯 말했지만 지금 나는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쯤 은퇴 했을테니 말이다
그녀는 하늘에 별이 되어 아직도 우리활동을 지켜보고 계실 거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