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의 추억 #59, 한창 시끄럽던 그때
이환스님의 기록중에 ‘한창 시끄럽던 그때’라 함은 1970년대 초, 중반을 말한다. 세칭 동방교에서는 그동안 끊임없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며 각종 메스콤에 이름이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었는데 특히 이때는 1대 교주 노광공이 당뇨합병증으로 1967년 (음)6월19일에 사망하고 그 아들 노영구가 다음 대를 물려받아 교주 행세를 하고 있던 시기이다.
어느 단체나 조직을 막론하고 창업자로부터 다음 대로 넘어가는 시기는 진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세칭 동방교내의 일반 신도들은 새까맣게 모르고 있지만 교주의 권력 이양은 험난했다. 우선 사주(四柱)목사와 사주(四柱)장로가 터억 버티고 있지 않은가, 당시 노광공교주의 두 아들 노영도와 노영구는 사실상 노광공 창업교주와 사주목사, 사주장로의 눈밖에 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큰 아들 노영도는 바람둥이요 작은 아들 노영구는 발음도 어눌하고 시원찮아 어줍짢은 청년에 불과했다. 오히려 아버지의 교주 행각에 반항심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각 대기처(천국을 가기위해 이땅에 임시로 머물며 대기하는 곳, 집을 나온 세칭 동방교 신도들이 집단으로 머무는 곳을 말하는 은어-隱語)에 산재해 있는 연단선님들과 대기자(가족과 생이별하고 무단가출해서 가족과 연락을 끊고 세칭 동방교 안으로 들어와 생활하는 신도들을 통칭하는 동방교의 은어-隱語)들에게 왜 그런 고생을 사서 하는지 모르겠다고 도망가라고 회유할 정도였다.
그런 그가 어느날 성령 받았다고 나서면서 교주의 아들이라는 후광을 업고 실권을 장악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사주(四柱)목사인 정재덕 요나단목사는 쫓겨나게 되고, 양학식 베드로목사는 형무소를 나오면서 바로 잠적해 버렸고, 말께나 하고 억세고 다루기 힘든 중간간부들은 교묘한 방법을 동원한 2대 교주 노영구와 새롭게 형성된 그 주변 인물들의 지략(?)으로 세칭 동방교를 떠나가게 된다.
각설하고, 빈집초월(세칭 동방교에 충성하기위해 집을 나오는 것을 말하는 세칭 동방교의 은어-隱語)해서 부산의 주학교회에서 나의 후임으로 일하던 이봉상 갈렙전도사가 드디어 2대 교주 노영구의 부름을 받고 세칭 동방교의 본부로 올라와 사주(四柱)목사와 중간간부들이 없어진 자리에 노영구 2대 교주를 바로 보필(?)하는 지근거리에서 일하게 되었다.
순회자들이 각 지방을 나누어 매 주일 해당지역으로 가서 교주의 지시를 하달하고 지성(헌금)을 모아오면 이봉상씨가 이들을 은밀한 장소에서 만나 모두 보고를 받아 취합하여 교주에게 보고, 전달하고 지시를 받아와서 하달하는 중요한 일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그즈음 세칭 동방교에서 사건하나가 터지게 된다.
서울에서 세칭 동방교를 뛰쳐나간 사람들이 모여 피해집단을 결성하고 진명, 숙명여고 출신의 세칭 동방교 신자들과 헤레나장로(오인숙, 사주(四柱)장로의 한사람)의 큰언니등이 세칭 동방교는 엉터리이고 신도의 재산을 갈취한다는 등의 폭로가 이어졌고, 메스콤을 타게 되면서 2대교주 노영구는 고발되어 지명수배를 당하게 되고. . .
---인터넷검색자료---
6천만원 손배소송, 동방교신도 65명, 법률구조협통해
경향신문 1974.12.07 기사(뉴스)
대한법률구조협회는 6일하오 세칭 동방교 신도였던 이정옥씨(27,서울 관악구 흑석동 200의 45)등 65명을 대리해 세칭 동방교를 상대로 6천8백54만9천1백65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서울민사지법에 냈다.
법률구조협회는 이씨등이 지난22일 세칭 동방교 간부에게 지성금등의 명목으로 6천여만원의 재산을 빼앗겼다고 주장, 진정서와 함께 법률구조신청을 내어 법률구조에 나서 것이다. 장준택변호사를 통해 제출한 이 소장에서 원고들은 “세칭 동방교의 대표이사인 양학식씨등 4명이 지난 4월30일 상습사기및 상습공갈혐의로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되었으므로 지성금이란 명목으로 빼앗긴 신도들의 재산을 마땅히 돌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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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와중에 2대 교주 노영구의 행동이 제약을 받게 되므로 이봉상씨가 중간에 나서서 대신 보고를 받고 교주의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세칭 동방교의 2대 교주 노영구는 피해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때 노영구는 서울의 J 여고와 E 여대를 다닌 얼굴 반반한 여신도 한사람(세칭 동방교의 명명은 유스도)을 빈집초월(무단가출)시켜 동거하고 있었다.
그녀는 일반 기독교 집안 장로의 딸이었다. 세칭 동방교에 전도되어 출입하던 그녀를 노영구가 눈여겨 보아오면서 좋아하던 사이였고 후에 불러내어 동거하게 되었던 것이다. 감히 누구의 명이라고 거절할 수 있었겠는가. 이즈음 이봉상 갈렙전도사는 세칭 동방교내의 중요한 소임을 맡아 일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내가 이게 무슨 짓인가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하여 세칭 동방교내에서 전설처럼 전해오는 이적기사가 있었다는 곳에 사람을 보내어 사실을 알아보게 한 결과 여러 가지가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더라는 것이다.
창업교주가 사망하고 없는 세칭 동방교를 무작정 끌고 나가기에는 역부족이라, 불안한 진로의 타개책으로 앞으로는 빈집초월(무단가출)한 대기자및 각 지방에서 전도사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결혼도 시키고(그때까지 대기자들은 결혼이라는게 없었다) 차츰 일반 기성교회처럼 운영방법을 바꾸어 나가거나 어떤 영력있는 단체나 법사에게 맡겨 운영하거나 하는 방안을 심도있게 고려하는 중이었다고 한다.
여하튼 피해집단의 고소고발, 지명수배, 창업교주가 사망하고 없는 세칭 동방교의 진로불안 등으로 긴장도가 높아진 이봉상씨가 머리도 식힐겸 어느 절간으로 바람쐬러 떠나서 산사의 뒤편 조용한 마루턱에 걸터 앉아 쉬고 있는데 뒤쪽에서 갑자기 “어허 아깝도다아! 아깝도다!” 하는 소리가 들리더라는 것이다. ‘한창 시끄럽던 그때’란 이런 골치아픈 시절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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