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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랲 스크랩 임진왜란의 원인, 경과, 결과
세잎크로버 추천 0 조회 89 12.02.07 11: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임진왜란 1--원인]
2005/11/02 오후 1:59 | 역사-임진왜란

전쟁은 인류의 문명이 시작한 고대사회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살고 있는 도처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으나 고대 도시국가에서는 타민족의 정복과 영토획득이 주목적이었고 근현대에 이르러서는 자원확보나 시장확장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침투와 보존을 위하여 전쟁을 하였다. 그러나 전쟁의 원인을 단순히 정치적 혹은 경제적인 이유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시대에 따라 비중과 정도는 다르겠으나 그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여기서 임진왜란의 원인을 정치·경제·사회·군사적인 요인으로 나누어 설명해 보고자 한다.

먼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쟁을 일으킨 요인으로는 정치적 요인이 가장 크게 작용함을 알 수 있다. 군국주의적인 패권야욕과 제국주의적 영토팽창, 그리고 국내적 불만 전환을 위함이 그것이다. 전국시대의 막바지에 이른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을 아우르고 류구국(琉球國;현 오키나와), 고산국(高山國;타이완), 루손(呂宋;필리핀)을 공략한 다음 천축(天竺;인도) 땅까지 지배하에 놓고 명의 베이징을 중심으로 하는 일대통국(一大統國)을 건설한다는 야심에 차 있었던 것이다. 흔히들 이에 대하여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광기' 나 '몽상' 으로 폄하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당시 군사적 현황을 비교하면 일본이 조선과 명을 압도하고 있었고 최소한 조선과 명을 아우르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다만 전쟁의 귀추가 군사력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 결과는 함부로 언급할 수 없는 문제이다.

다음으로 경제적 요인을 들어보자. 이 시기의 토지자원은 부의 가장 직접적인 온상이었다. 조선의 경우 신하들에게 지급하는 봉급이 녹봉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고 일본의 경우도 공신에 대한 상급이 토지로 행하여졌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이미 천하통일 사업이 종결단계에 있었고 천하통일을 끝낸다고 하여도 더이상 영지를 입수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따라서 휘하 영주들을 묶어두기 위한 방책으로써의 토지자원의 확보가 절실했던 것이다.

세번째로 사회적인 요인을 들면 문화적 갈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고대로부터 대륙과 한반도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었던 일본의 경우 조선의 문물이 커다란 매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임진왜란의 성격 규정에 있어서 '문화전쟁' 이란 표현이 자주 사용되는 것은 이를 반영한다. 실제로 일본군이 문화재 약탈과 화공, 도공 등 기술자 납치에 주력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군사적 요인을 들어보자. 국내의 전쟁은 이미 막바지에 이른 상황이다. 그러므로 통일이 종결된 이후에 휘하 무장들이 삼삼오오로 단합을 하여 저항세력으로 변할 경우 전통적인 가신집단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던 토요토미 가문의 지배권 유지가 어려워진다. 따라서 가장 손쉽게 잠정적인 적대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써 외국원정의 길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이것으로 임진왜란의 원인에 해당하는 정치·경제·사회·군사적 요인들을 살펴보았다. 이를 종합하여 임진왜란의 목적을 이 단락의 결론으로서 내리고자 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은 위의 여러 요인을 총체적으로 해결하는 데 그 목적을 두었으며 궁극적으로는 동남아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전초전이요, 일차적으로는 조선을 점령하여 대륙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있었다고 결론짓고자 한다.

1) 대륙침공전략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륙침공을 위한 진출경로로 다음의 두 가지를 상정하였다.

① 류구를 경유, 해로(海路)로 명나라 동남해안에 진출한다.
② 조선을 경유, 육로(陸路)로 요동, 산해관을 거쳐 명나라 내지로 진출한다.

이에 대한 제반여건을 검토하고 가능성을 타진한 결과 조선-요동-산해관을 연하는 육로를 진군경로로 결정한다. 조선을 진군경로로 선택한 이유는 다음을 들 수 있다. 먼저 류구로 군대를 파견할 경우 해상이동로가 길어지기 때문에 해상사고의 위험율이 높아진다는데 있다. 이는 보급에도 막중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게 된다. 또다른 이유는 명의 종속국인 조선이 명의 요청으로 배후를 차단할 수 있다는 전략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조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전략을 구상하였다.

제1안 : 조선에 외교적인 위압을 가하여 조선을 일본의 영향하에 들게 하고, 조선군의 선도하에 중국대륙으로 진출한다.
제2안 : 조선을 침공하여 조선 전역을 단기간 내에 점령한 후, 명나라와 외교적인 협상 을 하면서 전열을 강화한 다음, 사태의 추이에 따라 중국대륙으로 진출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쟁의 주체인 일본의 손실을 극소화하고 조선·명·일본의 3국을 용이하게 통합하기 위하여 제1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이에 따라 수차례에 걸쳐서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였으나 결국은 아무런 성과도 얻을 수 없었고 결국 무력침공을 감행하기로 결정한다.

2) 전쟁준비

선조 24년(1591년, 일본 天正 19년) 3월 9일,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휘하 중신인 5명의 타이로(大老), 3명의 쥬로(中老), 5명의 부교(奉行) 등을 오사카(大阪)성에 소집하여 출정을 논의하였고 그의 계획대로 원정을 결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8월, 전국의 대명들을 교토(京都)에 소집하여 조선 출병의 결의를 선포하고 전쟁준비명령을 하달하였다.

큐수의 나고야(名護屋)를 출항지로 결정하고 10월에 성을 구축하기 시작하여 이듬해(1592년) 2월에 완공, 대본영(大本營)을 설치하였고 이키(壹山支)·쓰시마(對馬島) 등의 섬들이 병참기지(兵站基地)로 결정되어 시설들을 구축해 나갔다. 또 조선(造船) 명령 포고령은 선박건조(船舶建造)에 소요되는 시일을 감안하여 원정 발표 이전인 1591년 3월에 이미 발령되어 전국의 영주들에게 2천여척의 전함과 그에 소요되는 선원들을 차출하도록 하였다. 또한 전국의 대소 대명 88명을 동원대상으로 지정하여, 각 대명의 영지와 미곡 수확량에 따라 차등을 두어 병력을 동원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동원된 일본군의 총수는 30여만명으로 다음과 같이 구분하였다.

제1선 병단(조선 출정부대) 9개군 158,700명
제2선 병단(대본영 대기부대) 8개군 102,960명
수군(해상작전 및 엄호부대) 4개대 9,200명
대본영 직속부대 5개대 29,000명

그리고 1591년 12월 현재, 나고야성에는 48만명 분의 1년치 군량과 기타 군수물자가 모여졌으며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간바쿠의 자리를 조카 토요토미 히데츠구(豊臣秀次)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다이코(太閤)이 되어 전쟁지도에 전념하였다.

3) 조선 침공계획

① 작전 방침

조선 출정부대인 제1선 병단(158,700명)은 조선에 상륙하는 즉시 가능 한한 빠른 속도로 한성을 향해 진격하여, 한강 이남지역에서 조선군의 주력을 섬멸하고 조선 전국을 점령, 확보한다.
조선 점령후 제2선 병단(102,960명)을 남서해 수로로 파견, 평양에서 합류하여 명나라로 진공한다.

② 작전 부서

총대장 : 우키다 히데이에
총감독 : 마쓰다 나가모리, 이시다 미쓰나리, 오타니 요시쓰구
조선(朝鮮) 관리역 : 후쿠타 시게카스
육군대장 :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수군대장 : 쿠키 요시타카, 도타 카토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③ 공격경로

중로 : 부산 - 대구 - 조령 - 충주 - 용인 - 한성
동로 : 울산 - 경주 - 죽령 - 원주 - 여주 - 한성
서로 : 김해 - 성주 - 김천 - 추풍령 - 청주 - 한성

④ 부대편성

제1군 :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8,700명
제2군 : 가토 키요마사(加藤淸正) 22,800명
제3군 : 쿠로타 나가마사(黑田長政) 11,700명
제4군 :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14,700명
제5군 :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25,000명
제6군 : 고바야가와 다카카게(小早川X景) 15,700명
제7군 : 모오리 테루모토(毛利光軍元) 30,000명
제8군 :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10,000명
제9군 : 하시바 히데카스(羽X秀勝) 11,500명
수군 : 도타 카토라(藤堂高虎) 9,200명

 

 

1) 후퇴기
-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은 부산 점령을 시작으로 파죽지세로 북상한다. 이에 조선은 몇차례에 걸쳐 방어선을 구축하지만 모두 무너지고 6월 15일에는 평양성이 함락된다. 이에 선조는 의주까지 서행(西幸;피난)하고 명에 구원을 요청한다. -


(1) 개전 직후의 상황

1592년 3월 1일, 일본군은 코니시 유키나가가 거느리는 1군의 오사카 출발을 시작으로 속속들이 출발하기 시작하여 4월 12일에 부산 앞바다에 도착한다. 부산포의 첨절제사(僉節制使) 정발(鄭撥)은 이 사실을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 박홍(朴泓)과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에게 알렸고 박홍은 이를 각도의 수사와 조정에 알리고 그 자신은 도주한다. 원균도 이 사실을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에게 알렸다.

이때 원균의 행적에 관해서는 몇가지 설이 있는데 경상우수영의 모든 군선, 화포, 병기를 버리고 1만이 넘는 수군의 복무를 해제하고는 도주했다는 설과 출군하여 부산과 웅포(熊浦;熊川) 해상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73척의 군선과 병기를 모두 잃었다는 설, 그리고 원균의 수군이 일본수군의 소탕망(掃蕩網)에 걸려서 싸워보지도 못하고 모두 나포되었다는 설이 그것이다. 지금에 와서 그 사실 여부를 확실히 알 수는 없겠지만 흔히 첫번째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러나 이순신을 턱없이 높게 평가하는 것처럼 원균을 턱없이 낮추는 것 역시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 그 근거로 다음의 예를 들어보고자 한다.

당시 수군은 수영에 그 지역을 담당하는 군선이 모두 모여있는 것이 아니었다. 주요 지역마다 많게는 십여척에서부터 적게는 몇척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지금과 같이 교통통신시설이 발달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시에 한 장소로 집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제로 이순신이 관내의 10개 기지 대장들에게 선단을 이끌고 여수항으로 모이도록 명령을 내린 것은 4월 20일이었고 집결 완료일이 4월 29일이었다.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 이억기(李億棋)의 함대는 5월 3일에 이순신의 함대와 합류하기로 하였으나 끝내는 날짜를 맞추지 못하여 전라좌수영 부대의 1차 출전에서 같이 행동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필자의 견해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원균은 당시 우수영 본영(;거제도)에 있던 몇몇의 전선으로는 도저히 대응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본영의 병기를 모두 버린 뒤 휘하의 전선 몇척만을 이끌고 도주하여 숨어있다가 이순신 함대에 합류하여 활동하였다고 보는 것이 가장 무리가 없을듯 하다. 다만 경상좌수영의 본영인 동래(東萊)는 7년의 전쟁기간 중 내내 일본군의 점령하에 있었기에 경상좌수영은 끝까지 재건하지 못하고 종전을 맞이한다.

이제 전황으로 넘어가도록 하겠다. 별다른 저항없이 부산포에 상륙한 일본군은 부산진성(釜山鎭城)을 함락한 뒤 그들의 작전계획에 따라 3개의 진격로로 진군하였다. 제1군은 중로, 제2군은 동로, 제3군은 서로로 병진하기 시작하여 침공 10일만에 경상도 거의 전역의 주요 읍성(邑城)을 점령하였다.

(2) 조선의 종심방어작전

일본군의 침입 소식은 4월 17일이 되서야 박홍이 보낸 파발마에 의해 겨우 알려지게 되었다. 영의정 이산해(李山海)는 조신들을 소집하여 긴급회의를 열었다. 조선은 전시에 임시로 군무관(軍務官)을 지명할 수 있는 특별조항이 규정되어 있어서 이 군사법규를 적용하여 인사작업에 착수하였다.

먼저 도순변사에 이일(李鎰)을 뽑아 조령(鳥嶺)을 중심으로 하는 충주(忠州) 방면의 중앙로(中央路)를 방어하게하고 좌방어사에는 성응길(成應吉), 우방어사에는 조경(趙儆)을 각기 죽령(竹嶺)과 추풍령(秋風領)으로 보냈다. 뒤이어 조방어사 변기(邊璣)와 유극량(劉克良)을 조령과 죽령으로 보내어 지원책으로 삼고 신립(申砬)을 삼도순변사로 세워 이일군의 후방을 지원해 주도록 하였다. 이는 한성을 중심으로 일본군의 예상 공격로에 이중으로 군사를 배치하는 이른바 종심방어작전이었다.

이일은 도성안의 정병(情兵) 300명을 거느리고 출동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한성에서 모집할 수 있는 병력이 없어서 사흘이나 지체한 끝에 군관들만을 대동하고 경상도 상주성(尙州成)으로 갔다. 그러나 분군법(分軍法)에 의거 대구에 집결하고 있었던 경상도의 병력은 일본군이 대구에 진입하기도 전에 흩어져서 지휘할 군사가 없었다. 그리하여 상주에 들어간 이일은 4월 24일, 쌀배급을 미끼로 근처의 농민 팔백명을 모아 훈련시켰다. 그러나 그또한 4월 25일, 일본군의 급습을 받아 궤멸되고 이일은 간신히 도망쳐서 신립과 합류하게 된다.

4월 26일, 신립은 종사관 김여물(金汝山勿)과 충정도의 병력 8천을 거느리고 충주 남쪽의 단월역(丹月驛)에 진영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몇몇 장령들을 거느리고 조령을 정찰하였다. 그러나 이미 이때에는 일본군 제1군이 문경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하여 조령을 포기하고 훈련이 미숙한 병사들의 투지를 끌어내기 위한 방편으로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 신립은 기마를 활용한 야전(野戰)으로 공을 세운 장군으로 결전을 야전으로 택한 것은 이해될 수 있으나 탄금대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기병 운용의 요체는 말이 가진 기동력을 활용하는 것에 있는데 탄금대는 주변이 온통 논인 저습지대로 보병들도 기동하기 어려운 지역이었다. 28일, 일본군 제1군과 맞써싸운 신립군은 접전을 벌인 끝에 궤멸당하였고 신립은 남한강에 투신하여 자결한다. 결국 조선의 방어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일본군은 29일, 제1군과 제2군이 충주에서 합류하여 각기 동로와 중로로 진격하기로 하여 30일, 한성을 향해 출발하고 제3군은 청주에서 곧바로 북상하여 제2군을 뒤따라 한성으로 진군하였다.

한편, 선조의 서행과 수성안을 놓고 팽팽히 맞서고 있던 조정은 4월 26일에 이일의 패전보고를, 이어 29일에 신립의 패전 보고를 접하면서 서행을 결정하게 된다. 이양원(李陽元)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아 도성을 막게 하고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로, 신각(申恪)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한강에 방어선을 구축하도록 하였다. 그 무렵 서울에는 약 7천여의 병사가 있었다고 일부 기록이 전하고 있는데 이일과 신립이 출전할 때 군사가 없어 군관만을 대동하고 떠난 것에 비추어 보면 그 병사의 수도 과장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급히 징발한 군사들이었음은 쉽게 추측이 가능하다.

다음날인 4월 30일, 선조는 세자 광해군(光海君)과 함께 백여명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서행길에 오른다. 그 사실을 알게된 백성들의 일부가 난동을 일으켜 도성은 아수라장이 되고 일본군의 위세에 놀란 김명원은 싸워보지도 않고 도주하여 한강 방어선 또한 아무 저항없이 무너지게 된다. 5월 3일, 일본군 제1군과 제2군의 한성 점령을 시작으로 제3군, 제4군도 속속들이 후속하여 입성하였다.

(3) 일본군 2차 작전계획

한성을 점령한 일본군 휴식을 취하면서 앞으로의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당초, 일본군은 한성을 점령하면 조선왕을 포로로 잡거나 항복을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고 조선왕을 인질로 조선전역의 치안을 확보하고 조선군을 명을 치기 위한 선도부대로 삼으려 했었다. 그러나 선조는 이미 피난을 가버리고 빈 성만을 점령하게 되자 조선군의 협력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이에 5월 10일, 제2군을 임진강 방면으로 보내 조선군의 반응을 살피면서 새로이 작전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5월 16일,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한성 점령의 보고를 받고 아직 대마도에 머물고 있던 제9군과 5천명의 증원군을 부산에 파견하고 제9군으로 하여금 부산지역을 담당하게 하였다. 5월 중순, 총대장 우키다 히데이에가 한성에 도착하여 제1군을 평안도 방면으로 제2군을 함경도 방면으로 북진을 계속하기로 협의하고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추인을 받는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6월 3일, 지휘체제를 개편하여 제3군과 제4군을 쿠로타 나가마사 지휘의 제3군으로 통합하고 제5군을 제4군(후쿠시마 마사노리), 제5군(하치스카 이에마사), 제6군(쵸소카베 모토치카)으로 분할 제6군은 7군으로 서열을 바꾸고 제7군은 예비대로 전환시켰다. 이와 함께 다음과 같이 분지(分地)를 실시하여 점령지에 군정(軍政)을 실시하고 현물납세(現物納稅)를 받게 하였다.

경상도 : 모리 테루모토 - 예비대
전라도 : 고바야가와 다카카게 - 제7군
충청도 : 후쿠시마 마사노리 - 제4군
경기도 : 우키다 히데이에 - 제8군
강원도 : 모리 요시나리 - 제3군(이하 모리의 제3군)
황해도 : 쿠로다 나가마사 - 제3군(이하 쿠로다의 제3군)
평안도 : 고니시 유키나가 - 제1군
함경도 : 가토 키요마사 - 제2군

한편 서행길에 오른 선조는 개성에서 가용한 모든 병력을 전부 임진강 방어에 투입하여 일본군의 북진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이에 남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서 초모하여 북상, 도성을 수복하기를 기대하였다. 그리고 다시 평양까지 후퇴하고 임진강 방어를 다시금 김명원이 맡게 하였다.

전라감사 이광은 이미 4월 29일, 관할지역에서 군사 8천명을 징발하여 북상을 시도하였으나 도성 함락 소식을 듣고 회군한 바 있었다. 그러던 차에 선조의 명령을 받은 이광은 전라도 방어사 곽영(郭嶸)과 함께 군사를 군사를 징발하여 4만명의 숫자를 갖추고 충청감사 윤선각의 군사 8천여와 합류, 도합 5만여의 군세를 이루었다. 이는 임진왜란의 기간 중에 조선이 한번에 동원한 최대의 군세였으나 이들은 대부분이 급히 징발된 병력이어서 지휘체계가 제대로 서 있을리 없을 뿐더러 훈련 또한 하나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6월 6일에 용인에서 2천명 미만의 일본군의 급습을 받고 참패당하여 분산한다.

임진강 방어선도 5월 27일에 뒤따라온 일본군 제2군에 의해 무너지고 일본군 제1군과 쿠로다의 제3군이 뒤따라 개성에 입성하여 제2군은 함경도 방면으로 진출하고 제1군과 쿠로다의 제3군은 아무런 방해없이 황해도를 지나 평안도 방면으로 진격하기 시작한다.

시시각각으로 북진하는 일본군의 위협으로 평양 역시도 위험에 처하게 된다. 따라서 만일을 위해 세자(世子) 광해군을 수반으로 하는 분조(分朝:제2정부)를 설치하여 국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고 영변을 거쳐 의주까지 서행하였다. 선조는 서행 도중에 명으로의 망명까지 결심하고 그 뜻을 명측에 전했다. 그러나 선조의 망명이 일본군에게 침공의 구실을 줄 것으로 판단한 명은 이를 허가하지 않고 구원병을 구실로 망명을 하지 못하도록 못박았다.

일본군의 북상은 계속되어 5월 14일에 대동강 방어선은 무너지고 15일에는 평양성을 함락하였다. 이리하여 개전 두달만에 평양성은 함락되고 평양성에 비축되어 있던 양곡 10만 석을 고스란히 일본군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한편 함경도 방면으로 진출한 제1군은 6월 17일에 모리의 제3군과 안변(安邊)에서 합류하여 분지계획에 의거 각기 함경도와 강원도로 진군을 시작하였다.

제2군은 7월 18일, 해정창(海汀倉)에서 북병사 한극함(韓克言咸)의 6진 소속의 병사 천명과 일전을 벌여 패퇴시키고 7월 23일에는 당시 회령(會寧)으로 피난와 있던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생포, 함경도 일대를 석권하였다. 또한 모리의 제3군은 남하하여 강릉까지 진출, 강원도 지방을 석권하였다.

 

 

 

 

2) 저지기
- 초반 밀리기만 하던 조선군은 해상과 육상에서 적의 저지를 시도한다. 해상에서는 조선 수군 의 활동으로 남서해를 통하는 보급로를 지켜내고, 육상에서는 각지의에 의병에 의해 보급로를 차단당한다. 이에따라 평양까지 점령한 일본군은 더이상 북상을 하지 못하고 발이 묶이고 만다. -

(1) 해전 상황

개전 당시 남해안에는 전라도와 경상도에 각각 2개의 수영이 설치되어 연안 경비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산에 일본군이 대거 침입하자 경상좌수사 박홍은 언양으로 도주하고 원균도 남해도 쪽으로 도주한다. 이렇게 되자 일본 수군은 아무런 장애없이 남해안을 따라 서진하기 시작한다.

4월 20일, 경상감사 김수(金日卒)가 '일본군이 내륙으로 북상함이 밝혀졌기에 전라도 수군도 경상도쪽으로 나와주기를 조정에 상신했으니, 이순신 수사도 미리 준비를 해둠이 좋겠다.' 는 사전보형 공문을 보내왔다. 4월 27일, 조정에서도 이 건의안을 받아들여 전라좌수영과 우수영에 경상도 수군과 합류하여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순신은 4월 20일에 관내 기지의 대장들에게 병선을 이끌고 여수항으로 29일까지 집결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이억기의 함대를 기다렸으나 약속한 5월 3일에 도착하지 않아 다음날 단독으로 출발하였다. 수군 1차 출전때 전라좌수영의 전력은 판옥선(板屋船:대형전선) 24척과 협선(挾船:중형선) 15척, 포작선(鮑作船:소형 쾌속선) 46척으로 병력은 약 5천명 정도였다. 이순신은 이날 원균의 판옥선 1척과 합류하고 5일과 6일에는 경상우수영 소속의 몇몇 수군 함선이 모여 경상우수영은 판옥선 4척, 협선 2척으로 전력이 증강된다.

1차 출전에서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의 연합함대는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3차에 걸쳐 일본함 42척을 격파한다. 그리고 연이어 2차 출전에서도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에서 4차에 걸쳐 일본함 72척을 격파했으며 전라우수영 함대도 합류하여 판옥선 50여척, 보조선 100여척, 병력 1만의 수준으로 전력이 증강되기에 이른다.

여기서 초기 육전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이유를 몇가지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다. 먼저 함선에 대해 살펴보자. 15세기부터 임진왜란까지 쓰인 함선의 이름은 30여 종류에 이른다. 그러나 전함, 전선, 병선, 함선 등의 용어는 일반적으로 수군이 사용하는 약간씩 다른 크기와 형태의 배들에 대한 범칭으로 쓰이기도 했고 또 전선, 병선, 맹선을 같은 뜻으로 쓰기도 했다. 이중 임진왜란 때에 조선군의 주력 전함이었던 판옥선은 명종 10(1550)년 을묘왜란이 일어나던 해에 개발된 것으로 칼을 들고 상대방의 배에 뛰어들어 공격하는 것을 전술로 하는 왜구들을 상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판옥선은 선체가 높은 것이 특징이고, 바닥이 평평해서 얕은 바다가 많은 조선의 남서해안에 특히 알맞다. 이로 인해 일본군은 해전에서 그들의 전술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였다. 또한 일본의 배는 개전 1년전에 급조한 것으로 선체가 약하다는 취약점을 안고 있었다.

다음으로 무기체계를 살펴보자. 15세기에 들어와서 현저하게 발달한 무기는 화약무기였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지속적으로 화약무기를 만들었고 이는 기술의 진보를 가져와 1448년에는 {총통등록} 이라는 무기 해설서를 발간하였다. 화약무기는 세조 이후 그 생산이 침체되었다가 삼포왜란과 을묘왜란을 계기로 다시 활성화되었다. 특히 명종 대에는 화포제조에 총력을 기울였고 판옥선을 개발, 화포 10여 문씩을 적재할 수 있도록 건조하여 전국의 수영에 배치하였다. 이때까지 꾸준히 발달되어온 화기들 가운데 많은 것이 수군용으로 사용되었다는데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임진왜란시 수군의 승리는 이러한 화약병기의 적절한 활용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연이어 수군이 패하자 6월 28일 '쿠키 요시타카,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등의 수군장(水軍將)이 협력하여 조선 수군을 단번에 무찌르라' 는 엄명을 내렸다. 여지까지 일본함과의 전투는 여기저기에 주둔해 있던 소규모 선단과의 전투로 일본군의 주력과의 전투는 아니었다. 따라서 이번 전투는 해전에 있어서의 조선과 일본의 전력을 비교할 수 있는 최초의 전투인 셈이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의거하여 일본측 세개의 함대가 남해안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접한 조선수군은 7월 6일, 3차 출동을 감행하여 8일에 한산도에서 9일에는 안골포에서 연이어 승리하여 일본함 76척을 깨뜨리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 해전이 바로 한산도 대첩이다.

이 해전은 전략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다. 당초 일본군의 작전 계획은 수군과 육군의 병진책이었다. 그러나 이 전투의 패배로 말미암아 일본군은 해상으로의 보급이 불가능해져서 이미 내륙 깊숙히까지 진군한 일본군은 고립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고야에 주둔하고 있던 예비병력 10만여명이 발이 묶여 투입되지 못하였다. 이로써 남해에서 서해에 이르는 해안을 보전할 수가 있었고 중국도 요동(遙東)과 산동(山東) 반도 지방이 일본군의 직접적인 위협을 받지 않게 되어 원병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한산도 해전은 연패의 늪에서 빠져나와 반격의 실마리를 잡은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뒤이어 8월 24일, 4차 출전에서는 부산포에 집결되어 있던 일본 함선 430여척에 대해 공격을 가하여 100여척의 함선을 격침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군의 해상 활동은 더욱 위축되어 일본-부산간의 보급로 확보와 해안 기지 보호에만 급급하였고 이후 오랜 기간 남해에서는 해전다운 해전을 찾아 볼 수 없었다.

(2) 육전 상황

초반에 밀리기만 하던 육전의 상황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각지에서 무력한 관군의 역할을 대신하여 민간인 군사집단인 의병이 봉기(蜂起)하기 시작했다. 4월 하순, 곽재우(郭再祐)가 의령에서 기병(起兵)한 것을 효시(嚆矢)로 전국에서 100여 부대에 수만명이 들고 일어 났다. 조정에서는 6월 하순에야 이 소식을 듣고 각지의 의병장에게 초토사(招討使)·토적사(討賊使)·창의사(倡義使) 등의 직함과 그에 상응하는 관직을 내려 격려하였다.

한편, 일본군은 6월 중순 이후부터 전라도로 침입할 기세를 보이다가 하순부터는 본격적인 침공에 나섰다. 전라도는 조선의 곡창지대로 그 전략적 중요성을 말하자면 먼저 보급기지의 역할과 함께 남서해를 돌아가는 해로를 갖추고 있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일본군이 이 지역을 초반에 공략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주 공격선(부산-한성-평양)이 아니었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현재 주 공격선을 모두 확보한 일본군은 그들의 분지 계획에 따라 함경도, 강원도, 전라도 지방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전라도를 맡은 부대는 고바야가와 다카카게의 제7군이었다. 먼저 창원에 주둔한 승장(僧將) 안고쿠지(安國寺惠 )는 진군도중 5월 23일, 의령에서 곽재우에 의해 저지당하고는 무주(茂朱)로 침입하였고 고바야가와의 본대는 금산(錦山)으로 침입하였다. 무주와 금산을 점령한 일본군은 이를 거점으로 삼아 전라도 침공을 계획, 7월 초에 용담, 진안을 거쳐 전주로 침입할 태세를 갖추었다. 안고쿠지의 부대는 웅치(熊峙)로 방면으로 진격하고 본대는 이치(梨峙) 방면으로 진격하여 전주를 함락하기로 하고 진군을 개시하였다. 당시 전주에 있던 전라감사 이광은 일본군이 전주와 남원을 공격할 것으로 보고 김제군수 정담(鄭湛)과 나주판관 이복남(李福男)에게 일본군의 전주 진입을 막도록 하였고 정담과 이만호는 웅치에 진영을 설치하였다. 남원이 있던 광주목사 권율은 웅치 방어전을 지원하려 했으나 일본군이 이치 방면으로도 진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동복현감 황진(黃進)과 함께 이치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7월 7일과 8일, 이틀에 걸쳐 진행된 웅치 방어전은 패하고 말았지만 이치 방어선은 끝까지 제구실을 발휘하였다. 또한 의병장 고경명·유팽로·안영 등의 부대가 금산을 목표로 남하하자 일본군은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7월 10일, 고경명 등의 금산성탈환작전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뒤이은 의병장 조헌과 승장 영규 등의 분투에 결국은 전라도 점령을 포기하고 9월 16일에는 전군을 후퇴시켰다.

경상도 지방의 상황도 이와 마찬가지로 각 지역의 의병에 의해 일본군의 점령지역이 크게 위축되었다. 9월 8일, 경상좌병사 박진(朴晉)의 경주성 탈환과 10월 10일, 임진왜란의 3대대첩으로 꼽히는 진주성 전투의 승리는 일본군의 부산-한성간의 보급로 유지와 부산지역 일원의 기지 확보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다.

여기서 의병군의 성격과 활동, 그 의의에 대해 몇 가지 살펴보고자 한다.

당시 의병군의 성격을 현대 군사학적 시각으로 바라보면 정부군에 대비한 민병 내지는 스스로 궐기한 농민군의 성격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비정규군이라 하겠다. 그러나 정규군과의 구분은 사실에 있어서 모호한 점이 많다. 대체로 지휘자가 관료일 경우 관군, 전직관료나 재야 인사일 때는 의병으로 구분할 수 있으나 일단 의병을 일으키면 조정에서는 그 지휘자에게 벼슬을 내려주어 결국은 기병(起兵) 시점의 구분밖에 되지 않는다. 군사의 구별은 더욱 애매하다. 당시 조선의 병역제도는 병농일치제였다. 집에서 농사 짓던 사람이 관아에 의해 소집되면 관군이 되고 의병장에 가담하면 의병이 되었다. 실제 전투에서도 관군과 의병의 구별 없이 합동작전이 많았고 통합 지휘도 관록에 따라 의병장이 맡기도 했다. 따라서 이들의 성격은 단순히 비정규군이 아닌 준정규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의병군의 활동에 대해 알아보자. 그들의 전투는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국가 방위 개념의 정규전이고 또 하나는 비정규전, 즉 유격전이다. 성을 탈환하는 등의 대규모 정규전은 관군의 역할을 의병이 대신했다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할 만하나 군사적으로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주목해야할 것은 의병들의 유격활동이다. 전쟁이 터진 해와 다음해에 이르기까지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의병들은 적게는 수십명에서 많게는 수천명까지 백 수십개의 부대에 이르렀다. 이들은 일본군의 보급로과 수송대에 대해 수시로 기습을 감행하였고 그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일본군은 보급로의 경비에 6만여의 병력을 배치해야 했다. 여기에 서울, 개성과 강원도, 함경도의 후방 경비병력까지 포함하여 도합 10만 전후의 병력이 점령지역과 보급선 확보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이에 가용 병력은 5만 안팎정도에 불과하였고, 증원군의 투입 없이는 더 이상의 진격이 불가능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여기서 의병군 활동의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의병군의 활동은 수군의 해상보급로 차단과 함께 일본군의 보급로 차단에 크게 기여하여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반격의 실마리를 제공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3) 교착기
- 공세의 한계에 직면한 일본군은 명군의 참전과 함께 경상도까지 후퇴한다. 일본군은 경상도의 기지를 중심으로 진주성을 함락 전라도 진출을 노렸으나 세력의 약화로 더이상 진출할 수 없었다. 수군 역시도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고 조선을 배제한 가운데 명과 일본의 강화교섭이 진행된다. -

(1) 명군의 참전

조선 조정은 일본군이 침입하자 4월 하순에 요동으로 이 사실을 통보하였고 5월 7일, 선조가 평양에 도착하고 다시금 통보하였다. 이때까지는 아직 원병 요청을 하지 않았으나 5월 중순에 이르러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명에 원병을 요청하고 최악의 경우 선조가 명에 피난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명의 조정 일각에서는 일본군의 빠른 북상이 조선군과의 공모에 의해서가 아닌가라는 의견이 대두되어 사신을 파견하여 상황을 확인한 후 7월 26일, 조선 출병을 결정하였다. 조선 출병의 논의가 계속되는 동안 우선 요동병력의 일부를 급파기로여 요동 부총병 조승훈(祖承訓)이 지휘하는 명군 3천여명이 6월 중순에 조선에 진입하였다. 명군은 7월 17일, 평양성에 당도하였으나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순식간에 궤멸당하고 조승훈도 부상당하여 겨우 수십기의 병력을 수습하여 요동으로 돌아갔다.

이러는 와중에서 명은 파병을 결정하였으나 바로 병력을 투입할 수 없었다. 당시 명의 부총병 발배( 拜)가 1592년 3월에 영하(寧夏)지방에서 일으킨 반란이 평정되지 않아서 많은 병력이 이 반란 평정에 동원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시간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심유경(沈惟敬)으로 하여금 외교적으로 일본군의 북진을 지연시키려하였다. 조선에 급파된 심유경은 평양성의 고니시와 회담하여 명과 일본이 화친한다는 조건으로 9월 1일부터 50일간의 잠정적인 휴전협정을 맺었다. 회담이 쉽게 성사된 이유에는 일본군측에서도 다음과 같은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측에서도 조선과의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명과 전투를 벌이기에는 여력이 부족했고 남도에서의 상황이 불리하여 그 활로를 뚫을 시간적 여유가 필요했던 것이다. 더구나 단기전으로 계획되었던 전쟁이었기에 월동준비가 되어있지 않아 이를 준비하기 위한 시간 또한 절실했던 것이다.

명나라 조정은 9월에 영하지방의 반란이 평정되자 동정군(東征軍)을 편성하였다.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지휘 책임을 맡아 9월부터 출병 준비에 박차를 가하여 압록강이 결빙하는 12월 하순에 조선으로 진출하였다. 이여송 지휘의 명군 4만과 김명원 지휘의 조선군 1만명의 연합군은 1953년 1월 6일과 7일 양일에 걸쳐 평양성에 주둔한 고니시의 일본군과 탐색전을 벌이고 8일에는 평양성에 대해 공격을 감행하여 큰 타격을 입혔는데 이때 피아간의 사상가가 1만여명에 이르렀고 이중 백병전으로 죽은 일본군은 1,285명이었다. 이여송은 자군의 희생자가 느는 것을 염려하여 부대를 후퇴시키고 일본군에게 자진 철수를 종용하였고 고니시는 퇴로를 보장해 달라는 조건을 붙여 철수하였다. 이때 고니시군의 병력은 당초 18,700명에서 6,600명으로 격감된 상태였다. 개전 이후부터 평양성 함락까지 크게 낭비된 병력이 없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군량 보급의 두절이나 동사(凍死) 등의 전투 외적인 병력 손실이 전투에서 손실된 병력보다 더욱 컸음을 알 수 있고 고니시군의 전투수행능력은 조명 연합군의 3차 평양성 탈환 작전 전에 이미 마비 상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평양성을 잃고 고니시의 제1군이 서울까지 퇴각하자 서울의 일본군 총대장 우키다 히데이에 등의 수뇌진은 서울 이북 전 일본군의 철수를 지시하고 서울 자체의 포기문제도 심각하게 거론하였다. 1월 25일 이여송은 개성에 입성하였고 연합군의 수뇌진 사이에서 서울 탈환 문제가 논의되었다. 이여송은 26일 직속 병졸 3천과 더불어 임진강을 건너 서울 북방 80리 지점의 오산까지 진군하였고 후속부대도 도착하여 병력은 2만명으로 증강되었다. 27일, 일본군의 수색대의 활동으로 이같은 동향이 서울에 보고되었고 일본군은 총대장 우키다 히데이에가 지휘하는 2만여명의 병력으로 벽제관으로 진출하였다. 여기서 일본군과 명군이 일대 접전을 벌였다.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계속되면서 전세는 명군측에 불리해졌고 결국 패퇴하고 말았다. 명군은 개성으로 철퇴하였다가 평양을 지켜야 한다는 구실로 평양까지 후퇴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명군의 참전 경위와 그 역할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명은 이미 일본의 침공 가능성에 대하여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명의 군정을 맡은 이는 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으로 그는 일본에 있는 정보조직을 통하여 일본의 전쟁준비에 대해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에 더하여 일본의 위험에 노출된 류구국도 명나라의 원조를 얻기 위하여 정보제공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명은 조선에 파병하기 전에 이미 일본군의 침략에 대비해 각종 무기제작과 군사징집을 실시했고 소주(蘇州), 밀운(密雲), 천진(天津), 영평(永平) 등지에 수비병력을 증강하였다. 명이 직접적으로 조선에 파병을 결정한 이유는 명의 칙사(勅使)인 설반(薛潘)의 조선 사정에 관한 다음의 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요진(遼津)은 경사(京師:수도=北京)의 팔이요 조선은 요진의 담장입니다. 200년간 복건(福建)과 절강(浙江)에 왜적이 침범했으나 요양은 그렇지 않았으며 이는 조선을 담장으로 삼은 까닭입니다. 만약 왜적이 조선을 점령한다면 요양이 하루도 안심할 수 없으며 배를 타고 오면 수도의 앞뜰인 천진도 화를 당할 것이며 북경이 진동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빨리 출정하면 조선 사람 힘을 빌려 왜적을 치는 것이되고, 늦게 출정하면 왜적이 조선사람을 이끌고 와서 우리와 싸우게 될 것입니다.]

이는 결국 명의 출병이 대국으로써의 호혜적인 입장에서가 아니라 명나라 자신의 국가 안보를 위한 예방전쟁이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그러면 명군의 역할을 조명해 보도록 하자. 앞서서 말했던 것처럼 일본군의 공세는 명의 참전 이전에 이미 한계에 달하였다. 평양성 전투는 그야말로 한계에 다다른 일본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고 이를 자신의 실력으로 오판한 명군은 벽제관에서 참패,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평양까지 후퇴하였던 것이다. 순수한 군사력의 견지에서 보자면 명군의 참전은 별다른 사태 해결의 실마리가 되지는 못하였다. 다만 명군 참전의 의의는 수세의 조선군에게 공세로의 전환을 유도하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 행주 수성전

수원 근교 독산산성에서 유격전을 전개하고 있던 전라도 순찰사 권율은 조명연합군이 평양을 수복하고 남하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서울 수복전의 일익을 맡기 위해 서울 서쪽 20리쯤에 위치한 행주(幸州) 고지로 부대를 이동시켰다. 일본군은 조명연합군과의 본격적인 수성전을 벌이기에 앞서 배후의 조선군을 토벌해야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2월 12일, 3만여명을 동원하여 공격하였으나 결국은 함락시키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이것이 흔히들 말하는 3대대첩 중의 하나인 행주대첩이었다.

여기서 임진왜란 3대대첩에 관해 고찰해 보자. 우리가 3대대첩으로 부르는 전투는 이순신의 한산도 해전과 김시민의 진주 수성전, 권율의 행주 수성전 세가지이다. 어떤 경위로 3대대첩을 꼽은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이는 부당한 평가이다.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전체의 전황 속에서 그 전투가 어떤 의의를 가지고 있는가인 것이지 단순히 소수의 아군으로 다수의 적을 무찌른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한산도 해전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일본군의 수륙병진책을 무산시키고 적의 한팔을 꺽어버렸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김시민의 진주 수성전과 권율의 행주 수성전은 별반 의미를 갖지 못한다. 진주 수성전의 경우는 조선에서 일본군의 기반을 약화시킨 측면이나마 찾아볼 수 있지만 행주 수성전은 그나마도 찾아볼 수 없다. 말 그대로 단순히 행주에 주둔한 소수의 조선군이 다수의 일본군과 싸워서 이겼다는 것이 전부인 전투였다. 화살이 떨어지자 아낙네들이 행주치마에 돌을 날라 그것으로 싸웠다는 따위의 근거없는 전설로 채색된 행주 수성전은 대첩일 수 없다. 굳이 3대대첩이 필요하다면 명량해전이나 하다못해 3차 평양 수복전으로 갈음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3) 일본군의 철수

행주산성 전투 이후 한성의 왜장들은 2월 29일, 작전회의를 열고, 그 결과 채택된 다음 3개항의 작전계획을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건의하였다.

① 3월에 태합(太閤:토요토미 히데요시)이 도해(渡海)한다는 계획을 연기해야함.
② 군량은 4월 11일까지의 분량뿐이며, 부산에서 운반하는데 10여일이 소요되므로 이에 대한 타개책이 시급히 요구됨.
③ 전라·경상 양도의 보급차원이 용이한 지역에 축성을 하여 장기전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됨.

이는 일본군이 한성에서 철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3월 중순 토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철수 명령이 하달되었다. 한성의 일본군은 안전 퇴군을 보장받기 위해 명군과 접촉을 시도하여 '명이 강화사(講和使)를 파견하고, 명군이 요동으로 철수하면 조선 왕자를 조선에 송환하고 4월 8일부로 한성에서 철수하겠다' 는 뜻을 명군측에 전달하였다. 명군측도 이러한 일본군측의 요구에 응하여 조선의 입장이 배제된 가운데 강화회담이 진행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일본군은 철수하였고 4월 20일에는 조명연합군이 입성하여 만 1년만에 한성을 수복하였고 선조는 10월 초에야 환도하였다.

한편 조명연합군의 방해를 받지 않고 철수한 일본군은 경상도 해안 지역에 축조한 왜성(倭城)에 주둔하였다. 일본군은 이미 1592년 7월부터 동해안의 서생포(西生浦:울산 남쪽 60리)에서부터 남해안의 거제도에 이르는 해안 및 도서지역 10여 곳에 12개의 본성(本城)과 6개의 지성(支城)을 축조하기 시작하여 완공 단계에 있었다.

적의 해안지대 요새화는 수군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반격의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조선의 수군 함대도 공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조선 함대의 5차 출전에서는 2월 6일부터 4월 3일까지 무려 55일간 웅포 한곳에서 전후 네차례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적의 접전 회피와 포구의 요새화로 일본함 20여척만을 파괴하였을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5월 7일, 연이은 6차 출전에서도 교전 없이 대치상태만 계속되다가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이러는 사이 일본군은 진주성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준비하였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진주성과 전라도 공략의 실패가 철수하게 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로 보았으며 사실도 그러했다. 이에 1차 진주전의 복수를 명목으로 철수명령을 내릴때부터 시작하여 다섯차례에 걸쳐 진주성 공격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전략적인 견지에서 보면 별다른 효과가 없는 작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원한 군사만도 10만여명이었고 더구나 작전계획은 극비로 하는 것이 상식임에도 공공연하게 전개하였다. 진주성 공략을 제1의 명제로 본다면 이는 어찌보면 탁월한 작전이기도 했다. 상식을 벗어난 이 작전에 조명연합군은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진주성은 고립무원(孤立無援)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6월 20일부터 29일까지의 열흘간의 혈전 끝에 진주성은 함락되었고 군민 6만여명이 살해당하였다. 이후 일본군은 전라도를 향해 진군하여 구례 지방까지 진출하였으나 전력이 약화된 관계로 전라도 진출은 포기하고 7월 14일에 철수하였다.

(4) 강화회담

강화회담에 대해서는 글 전체의 흐름과 별다른 연관이 없으므로 간략히만 다루겠다. 먼저 각국의 입장을 살펴보자. 조선의 경우 강화회담에 전면적으로 반대하였고 이는 피해국의 입장에서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종주국인 명은 자국의 전력 약화를 바라지 않았으므로 조선을 배제한 가운데 강화회담에 열을 올렸고 일본 또한 전력이 약화되어 강화회담에 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명과 일본이 강화조건으로 바라는 바가 판이하게 달랐으며 졸렬한 잔꾀와 얕은 수작만이 사신을 따라 오가는 사이에 결국 1596년 9월 2일을 끝으로 강화회담은 결렬되고 만다. 이리하여 조선측은 명에 원군을 다시금 요청하였고 일본군은 다음해에 재침하는데 이를 정유재란이라 한다.

 

 

 

4) 반격기
-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강화회담의 결렬과 함께 재침을 단행한다. 일본군은 조선 수군의 패전에 힘입어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를 점령하였으나 직산전투와 명량해전의 패배로 수세에 몰리게 된다. -

(1) 재침 직후의 상황

강화회담이 결렬된 다음해 1월 14일 가토 키요마사군의 선봉이 서생포에 상륙했고 고니시 유키나가군은 그에 앞서 웅천에 상륙해 있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1597년 2월, 다시 침공군을 총 12만 1,100명으로 편성하였다.

제1군 : 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4,700명
제2군 가토 키요마사(加藤淸正) 10,000명
제3군 쿠로타 나가마사(黑田長政) 10,000명
제4군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12,000명
제5군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10,000명
제6군 쵸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 13,300명
제7군 하치스카 이에마사(蜂X賀家政) 11,100명
제8군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40,000명

여기에 조선에 잔류하고 있던 2만 300명을 포함하면 도합 14만 1,400명의 병력으로 개전 초기와 맞먹는 규모였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침공군에게 14개항의 작전계획을 하달하였는데 그 중에 [전라도는 철저히 공략하라. 충청·경기는 가능하면 공략하라] 는 명령이 포함되어 있었다. 2차 침공의 목적을 분명하게 명시한 자료는 없지만 강화조건으로 남도 4개도를 요구한 점과 위의 작전 내용을 근거로 살펴보면 한반도의 남부지방을 정복하는 것에 주안점을 둔 것으로 알 수 있다.

한편, 조선 조정은 일본군의 재침이 확실시된 1596년 9월 이후 대응책에 고심하였으나, 일본군의 침공 목표와 방향조차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채 청야작전을 실시하여 군·민의 피해를 줄이고 일본군의 군량 사정을 악화시켜 전진 속도를 지연시킨다는 소극적인 방책을 세웠다. 청야작전은 종심으로 깊숙이 쳐들어오는 적에 대한 방어책으로는 효과적일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는 효과적인 방책이 될 수 없었다. 한마디로 조선 조정에서는 전국(戰局)을 읽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군이 재침해옴에 따라 조선은 명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명측은 5월 8일, 부총병 양원(楊元)의 요동병 3천명, 6월 14일에는 오유충(吳惟忠)의 남병 4천명, 7월 3일에는 제독 마귀(麻貴), 9월 3일에는 경리 양호(楊鎬)를 파견하였다. 11월까지 조선에 들어온 명군은 경략 형개 휘하 본진 2만 2천, 양호 휘하 4천, 제독 마귀 휘하 5만 4천명 등 도합 8만여명이 되었다.

(2) 조선 수군의 와해

솟속들이 조선에 상륙하던 일본군은 좀처럼 전라도로 진공하지 않은 채 세월만 보내고 있었다. 일본군이 조선의 남부지방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수군이 가장 큰 방해물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고니시는 모략으로 이순신을 제거할 방법을 모색하였다. 고니시는 가토 키요마사군이 1월 21일에 부산포에 상륙한다는 정보를 조선 조정에 건네주었다. 그러나 당시 대마도에 정박하고 있던 부대의 출항시기는 특정한 날이 아니라 파도가 잔잔한 날이었으므로, 일기예보가 없는 당시에 바람 좋은 날을 예측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그러나 조선 조정에서는 이를 근거로 이순신에게 공격을 명령하였다. 이순신은 적이 제공한 정보를 믿고 움직일 수 없다는 이유로 움직이지 않았고 이에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체포하여 파직하였다. 이순신은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 하였고 그 후임에는 원균이 임명되었다.

원균이 이순신의 후임으로 한산도에 부임한 뒤, 7월 초순에 6백여척의 일본군 선단이 부산에 입항하였다. 이에 도원수 권율은 원균에게 이 일본 함대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원균은 7월 14일 새벽에 3도 수군 134척이 출동시켰다. 그러나 일본군의 유인책에 휘말린 원균은 다음날 칠천도(漆川島) 해상에서 기습공격을 받아 섬멸적인 타격을 입고 경상우수사 배설만이 12척의 전함을 이끌고 일본군 포위망의 탈출에 성공하여 한산도 본영을 불태우고 전라도 쪽으로 퇴피하였다. 이리하여, 일본군은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였고 수륙병진책을 효과적으로 전개하여 전라도에 침입하게 되었다.

(3) 육전상황

일본군의 주력이 7월 8일, 부산에 도착하였을 때 조선에는 잔류병력 2만여명이 서생포성·부산포성·죽도성·안골포성·가덕도성 등 경상도의 5개 지역에 분산 주둔하고 있었다. 이를 발판으로 삼아 일본군은 전라도 진출을 계획하였고 수군의 승리소식과 더불어 전라도로 진출하게 된다. 8월 3일, 일본군 총대장인 고바야가와 다카카게는 우키다 히데이에를 좌군(49,600명) 대장으로 삼고 모리 히데모토를 우군(64,300명) 대장으로 삼아 좌군을 고성-사천-하동-구례-남원-전주로 진군하게 하고 우군을 거창-안의-진안-전주로 진군하도록 하였다. 또 도타 카토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등의 수군(7,200명)은 좌군과 병진하여 하동으로 진출 섬진강(蟾進江)을 따라 올라가 구례에서 좌군과 합류하도록 하였다.

우군의 선봉인 가토군은 진격 중, 황석산성에 이 일대의 군민이 집결되어 있음을 알고 8월 16일 밤에 야습을 감행하여 이튿날 아침에 점령하고 육십령을 넘어 전라도로 진군하였다. 좌군은 아무런 방해 없이 계획대로 진격하여 8월 5일에는 하동으로 진출하였고 7일에는 선봉이 구례를 점령, 본진도 11일 하동을 출발하여 우군보다 먼저 전라도에 진입하였다. 구례에서 북상한 좌군은 남원을 목표로 2개 제대로 나누어 남원성의 서쪽과 동북쪽에 진영을 설치한 뒤 남원성을 정찰하였다. 당시, 남원에는 명의 부총관 양원의 3천병력과 조선군 1천여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16일, 공성 준비를 마친 뒤 일제히 공격하여 다음날 아침에 남원성을 함락하였다. 이 무렵 전주성의 부윤 박경신(朴慶新)과 유격장 진우충은 남원성의 함락 소식을 듣고 공주로 달아나고 전주는 8월 19일, 일본군 좌군에 의해 무혈점령 되었다. 한편 우군도 전주에 도착하여 그들 본대와 합류하였다.

일본군은 10여일간 전주에 주둔하면서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우군은 계속 북상하여 충청도를 장악하고 좌군은 일단 충청도 지방에서 남하하여 전라도 장악에 주력하면서 해로를 차단하기로 결정지었다. 이에 따라 일본군은 8월 29일에 전주를 출발하여 충청도에 진입하였다. 일본군 좌·우군은 9월 중순까지 충청도 주요 지역을 장악하였으나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았으며 뒤이어 남하한 좌군도 별다른 저항없이 정읍·장성·광주·담양·나주·화순·해남·강진 등을 확보하였다.

충청도 지방이 일본군에 의해 장악되고 경기지방으로 북상함에 따라 조선은 동정군의 출동을 요청하였다. 이에 명군은 9월 5일, 부총병 해생(解生)이 지휘하는 기병 4천을 파견한다. 명군은 7일 새벽에 직산에서 일본군 우군 선봉인 쿠로타 나가마사의 5천 보병과 맞닥뜨려 접전을 벌인다. 6차례에 걸친 접전 끝에 일본군을 격퇴하였고 일본군 본대는 기세가 꺾여 경기도 진입을 포기하고 경상도로 남하한다. 이에 따라 일본군은 9월 중순 이후 수세에 몰리게 된다.

(4) 명량해전

원균이 지휘하던 조선 수군이 칠천량 앞바다에서 와해되자 조정은 크게 당황하여 이순신을 7월 22일에 복직시킨다. 이순신은 일본군을 피해 임지로 부임하면서 병력과 전함을 수습하여, 8월 29일에 진도(珍島) 벽파진(碧波津)에 이르러 12척의 전함을 수습할 수 있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확보한 전함 12척으로는 해전 수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육지에서 싸울 것을 명령한다. 이에 이순신은 다음과 같은 장계를 올려 수군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임진년 이후로 5-6년동안 왜적들이 감히 충청·전라도 지방에 침입하지 못한 것은 오직 우리 수군이 적의 해상 진출을 성공적으로 차단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에게는 아직도 싸울 수 있는 전함이 12척이나 있으니, 죽을 각오로 싸우면 능히 승산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만일 우리 수군을 전폐한다면 이는 오히려 왜적들이 원하는 바가 될 것이며, 적은 호남 연안으로부터 한강까지 단숨에 북상할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가장 걱정하는 바입니다. 전함의 수가 비록 적다고는 하나 보잘것 없는 신이 아직 죽고 있지 않으니, 왜적이 감히 우리를 가볍게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이순신은 12척의 전함으로 일본 수군의 전함과 맞서게 되었다.

일본 수군은 하동에서 서진하여 9월 7일에 어란포(於蘭浦)에 진출하였다. 이들은 어란포에서 명량수로(鳴梁水路)를 통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보고를 받은 이순신은 9월 15일에 벽파진 진영을 명량수로 서쪽의 전라우수영으로 이동시키고, 간만시에 명량수로의 조수가 역류하는 현상을 이용하여 일본 수군을 격파하기로 계획하였다. 9월 16일 아침, 일본군 함선 130여척이 명량수로로 진입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출동하여 명량수로의 서쪽 출구를 봉쇄하였다. 또한 배후에 피난선 100여척을 전개시켜 주력함대가 진을 치고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일본군 함대에 선제공격을 가하였다. 때마침 역류하기 시작한 조수로 인해 일본군의 혼란이 가중되었고 이틈을 타서 일본군 선두 제대 31척을 격침시켰다. 일본군 함대의 본대는 끝내 수로를 통과하지 못하고 패주하였고 이 승리로 조선 수군은 전라도 일대의 제해권을 회복하였다. 이에 더하여 조선 수군은 8천명의 병력을 확보하고 10월 29일에는 목포 앞바다의 고하도(高下島)에 본영을 설치하여 일본 수군에 대한 공세작전을 준비하였다.

 

 

 

 

5) 격퇴기
- 전의를 잃은 일본군은 경상도 해안지대에 구축한 왜성으로 후퇴하여 농성을 준비한다. 이에 따라 조명연합군은 공격에 나서나 실패로 돌아가고 전쟁은 또다시 소강상태에 접어들게 된다. 그러나 1598년 8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일본군은 전면 철수를 단행한다. -

직산과 명량해전의 패배는 일본군의 위축을 가져왔다.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를 휩쓸던 일본군은 모두 경상도 해안 지방으로 물러나 왜성 안으로 퇴각하였고 1957년 12월까지 왜성의 수축과 방어태세 구축에 전력을 다하였다. 명군도 대부분이 경상도로 진출하여 조선군과 연합하여 총공격 준비에 전력을 다하였다. 12월 22일, 조명연합군은 4만 8천의 병력으로 울산성에 공격을 가했으나 일본군의 결사적인 저항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계속해서 답보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전황에 획기적인 전기를 가져온 사건이 발생하였다. 조선 침략을 주도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1598년 8월 16일, 63세를 일기로 사망한 것이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의 권력구조는 측근 실력자들에 의한 집단지도체제로 전환되었다. 이들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사실을 숨기고 8월 28일과 9월 5일, 두차례에 걸쳐 철군 명령을 조선 출병군에 하달하였다.

① 조속히 화의를 성사시킬 것.
② 화의는 조선의 왕자(王子)를 인질로 하든, 조선에서 공물(貢物)을 바치든 일본의 대외적인 위신문제를 고려하여 제장이 협의한 후, 적절히 결정할 것.
③ 병력 수송을 위한 선박 2백척을 축차적으로 보낼 것임.

이러한 요지의 철군 명령은 보안이 유지된 가운데 10월 1일에 부산에 도착하였고, 이 명령은 10월 중에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 왜교의 코니시 유키나가, 울산의 가토 키요마사에게 전달되었다. 이에 따라 각지의 일본군은 11월 15일까지 철수준비를 완료하여 부산에 집결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과의 강화는 불가능한 상황이었기에 각 군별로 현지에서 조명연합군과의 휴전을 모색하여 안전하게 철군하는 길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일본군 철수의 분위기를 감지한 조명연합군은 최후의 공세에 들어간다. 육군을 동·중·서로 나누어 울산·사천·왜교을 동시에 공략하고 수군해상에서 서로군의 왜교성 전투를 지원하면서 일본군 퇴로 차단한다는 4로 병진책이었다.

명군
동로군 : 제독 마귀(麻貴)군 24,000명
중로군 : 제독 동일원(董一元)군 13,500명
서로군 : 제독 유정(劉 廷)군 13,600명
수로군 : 도독 진린(陳 璘)군 13,200명

조선군
동로군 : 경상좌병사 김응서(金應瑞)군 5,500명
중로군 : 경상우병사 정기룡(鄭起龍)군 2,300명
서로군 : 전라병사 이광악(李光岳)군 10,000명
수로군 : 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군 7,300명

9월 21일, 경주에 집결한 동로군은 울산성과 동래성을 동시에 공격하였다. 동래성은 곧바로 탈환하였으나 울산성 공격은 실패하여 25일에 경주로 귀환했다. 그러나 11월 28일, 일본군의 철수로 동로군이 입성하였다.

중로군은 9월 17일, 합천을 출발하여 19일 진주선 입성, 22일 곤양 점령하고 28일 사천 구성(舊城)을 점령하였으나 10월 1일에 적의 주력이 주둔한 사천 신성(新城)에서 패하여 성주로 퇴각하였다.

서로군은 수로군과 협공으로 9월 19일에 왜교성에 대해 포위 공격을 감행하여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되풀이하였다. 그러나 중로군의 패배 소식을 들은 서로군의 유정은 전의를 잃고 10월 6일에 전군을 철수시켰다. 이에 수로군도 9일에 귀항하였다.

11월에 들어 조선의 일본군은 전면적인 본국 철수 준비를 본격화하였고, 11월 11일부터 거제도와 창선도(昌善島)로 집결하여 축차적으로 철수하려 하였다. 왜교성의 왜군이 11월 10일에 철수한다는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9일에 고금도를 출발, 10일에 여수 바다를 통과하고 13일에는 아예 왜교성 5리 앞까지 진출했다. 왜교성의 코니시 유키나가는 철군을 앞두고 명군 사령관 유정과 진린에게 뇌물을 보내 퇴로의 안전을 구하고자 했으나 이순신은 한사코 거부하였다. 14일, 일본군은 시마즈 요시히로군을 주축으로 하는 전함 300여척으로 구원군 함대를 편성하였다. 19일, 노량 앞바다에서 최후의 결전이 벌어져 일본함 200여척을 격파하고 이순신이 전사함으로써 전쟁은 마무리 된다.

 

 

 

[임진왜란8] 전쟁 그 후
 

일본에서는 곧바로 전쟁이 일어나 토요토미 가(家)가 몰락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장악했다. 전쟁이 끝나고 2년째인 1600년, 당초 이 전쟁에서 예비대로 편성되었으나 끝내 참전하지 않음으로써 힘을 보전하는데 성공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귀환한 참정군 사령관들 중에 제2군 가토 키요마사 등을 포섭하여 최후까지 토요토미 가에 충성하는 제1군 코니시 유키나가 등의 저항을 세키가하라(關原) 전투에서 격파한 뒤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를 설립, 일본 전역을 지배했다.

명나라는 이 전쟁이 끝난 뒤 46년 만인 1644년에 만주 여진족 청(淸)나라에 중원을 내주고 멸망했다. 명나라는 이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조정이 부패했었고 당쟁이 격화된데다가 각지에서 반란이 잇따르고 있었는데, 때마침 조선 출병으로 막대한 전비가 소모되고 국력이 극도로 피폐해져 결국 망국으로 치달은 것이다.

조선은 이 전쟁으로 국토가 폐허가 되고 인구의 절반이 희생되는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이에 더하여 1627년과 1636년 두차례에 걸쳐 여진족(野人)의 청나라로부터 또다시 침략을 받았으나 1910년 한일합방 이전까지 계속해서 나라를 지탱해 나가게 된다.

 

이제까지 전쟁 전의 상황과 그 경과에 대하여 전략적인 요소를 가미해서 살펴보았다. 1592년 임진년(壬辰年), 일본군의 조선 침략으로 인해 조선과 일본 그리고 명나라 3국사이에서 시작된 전쟁은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면 여기서 이 전쟁은 누구의 승리인지에 대해 말해보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전쟁의 승패는 전쟁 당사국들 중 어느 쪽이 전쟁의 목표를 달성하였는가로 판가름한다. 일본의 전쟁 목적은 조선을 점령 일본에 합병하고 그 세력을 명나라까지 확장하는데 있었으며, 조선은 이를 좌절시켜 국가를 보전하는데 있었다. 일본은 조선에 대해 두차례에 걸쳐 대규모 침공을 감행하였으나 끝내 점령은 실패로 돌아가고 조선은 국토가 폐허가 되고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었지만 마침내 침공군을 격퇴하고 국가를 보전하는데 성공하였다. 조선이 승리하고 일본이 패배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전쟁을 임진왜란이라고 칭하고 있다. 이는 일본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오류이다. 전쟁에는 승리와 패배가 존재하나 난에는 평정되었다는 안도감만이 존재한다. 당시 조선에서는 이 전쟁을 국가간의 전쟁으로 보지 않고 반란으로 파악하여 임진왜란이라는 명칭이 붙었고 지금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아직도 이 명칭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사고방식은 임진왜란을 전쟁으로 인식하는 것에, 더구나 승리한 전쟁으로 인식하는 것에 너무 인색하다. 앞으로는 임진왜란이 우리의 조국을 지켜낸 승리한 전쟁이었음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겠다. 그리고 이 전쟁의 성격을 좀더 명확히 규명하여 그에 부합되는 적절한 명칭이 사용되어져야 하겠다.

이 글을 쓰기 전에 생각했던 몇몇 내용들이 부실하게 다루어졌다. 조선의 병력동원제도와 화약무기, 의병 특히 호남지방 의병의 특징, 분조, 일본 지배세력의 역학관계 등을 묘사해 보려고 했으나 전혀 다루지 않았거나 언급만 되는 것으로 끝나있다. 또한 전쟁에서 있어 외교적인 측면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언급이 없는 것과 전쟁 후의 삼국의 향방에 관하여 간략히만 언급한 것 역시도 아쉽게 느껴진다. 앞으로 기회가 닿는대로 이런 부분들에 관해 고민하도록 하겠다는 말로 이 글을 마친다.

출처블로그:http://blog.naver.com/ktmpem/80011703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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