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五章 고향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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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구소(海口所)는 을씨년스러웠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 포구에 나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배를 띄울 사람도, 관군(官軍)도, 그물을 다듬는 사람도, 자
판을 늘어놓은 사람도.
텅 빈 포구는 끈적끈적한 바람과 장대처럼 굵은 빗발만 가
득했다.
꾸르릉……! 촤아악……!
거칠게 다가온 파도가 방파제에 가로막혀 산산이 흩어졌다.
퉁겨 오르는 하얀 포말.
상(象)은 다점(茶店)에 앉아 누렇게 출렁이는 바다를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았다.
그는 장마철이 싫었다.
다른 날 같으면 북적이는 사람들 때문에 잠시도 앉아있을
틈이 없으련만 왱왱거리는 파리만 쫓고 있는 신세라니. 그나
마 해남파에서 마중 나온 사람들이라도 있으니 일당이라도 벌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공치는 하루가 되었으리라.
'이런 날에 배를 띄운 놈이나 탄 놈이나……'
상의 마음은 마중 나온 해남파 무인들의 마음이기도 했다.
침울하게 가라앉은 다점 분위기가 그랬다.
광란하는 바다 앞에 인간은 한낱 미물에 불과하다. 아무리
거대한 범선도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았다.
해안소를 떠난 배가 무사히 돌아오리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
도 없었다. 또 그들의 마음을 대변하기라고 하듯이 범선은 예
정된 시각을 훨씬 넘겨 저녁밥 짓는 연기가 솟을 때까지 모습
을 비추지 않았다.
"이보게, 여기 차 좀 더 갖다 주게."
"야! 죽치고 앉아 있지 말고 차나 더 가져와!"
거의 동시에 주문이 터져 나왔다.
상은 망념(妄念)에서 깨어나 화로(火爐)로 걸어갔다.
주담자를 꺼내 말을 곱게 한 유가 무인에게는 두 번째 우려
낸 차를, 말을 험악하게 한 석가 무인에게는 처음 우려낸 차
를 담았다. 그리고 음성이 들린 곳으로 막 걸어가려는 순간,
"아!"
그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토해내고 말았다.
파리 날아다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던 다점은 탄성
하나로 족했다.
"배다!"
"배가 들어온다! 배가 들어와!"
다점 안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터트렸다.
그렇게 험한 폭풍우 속에서 바다에 투신한 여족 청년 네 명
과 천해원 네 명 그리고 선장과 시녀 한 명, 도합 열 명만 실
종 되고 모두 무사하다는 것은 기적이었다. 주돛까지 부러진
상태에서.
범선은 역정이 얼마나 험했는지를 보여주는 듯 처참한 상태
였다.
돛은 갈기갈기 찢겼다. 삼판이 부서졌다. 오다가 암초(暗
礁)라도 들이받았는지 선두(船頭)도 갈라졌다. 배의 측면은
꼭 화약이 터진 듯 잔구멍이 많다.
승객들이 싣고 탄 짐들은 누구 짐인지 모를 만큼 어지럽게
널려있고, 다친 사람들이 많아 더욱 처참해 보였다.
수리를 한다 해도 한 달 내에는 출항하지 못할 것 같았다.
"아이고! 살아 돌아왔구나."
"이것아, 아무리 돈이 없어도 그렇지 이런 날 배를 타!"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물밀 듯이 쏟아져 나온 여족 주민들이
가족들을 껴안고 아우성쳤다.
해남파 무인들과 마찬가지로 일가족을 마중 나온 사람들이
었다.
그들은 다점에도 들어오지 못하고 피를 피할 수 있는 곳에
쭈그리고 앉아 하늘과 바다만 원망하고 있었으리라.
해남도에서 해남 무인의 권위는 하늘과 같았다.
상대할 수 없는 절대적인 무위(武威)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것보다는 생계수단을 해남파가 해결해 준다는 의미에서 고개
를 숙인다는 쪽이 현실적인 대답이었다.
그들은 가급적 해남파 무인들을 피했다.
우화가 살수를 고용해 무차별 공격을 시작한 다음부터 한족
과 여족간의 관계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 위태위태했다.
당하는 쪽은 늘 여족인이었다.
중원 최남단에 위치해 있고, 중원에 나가지도 않는 문파가
구파일방으로 거론될 만큼 성세가 드높으니 그런 사람들에게
낫과 쟁기를 들고 무슨 수로 싸운단 말인가.
여족의 소망은 꿈에 불과한가!.
한족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너무 거대했다.
황제(皇帝)의 칙명(勅命)을 받들고 있는 관부(官府)와 무림
의 거대문파 해남파.
여족은 그 중 어느 한군데도 상대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끈질기게 죽음을 자초하는 사람들. 죽음을 두려
워하지 않는 사람들. 태연히 한족을 비웃으며 죽을 수 있는
사람들.
그것은 마치 언덕 위에서 굴러 내리는 수레바퀴와도 같았
다. 부서지기 전에는 결코 멈출 수 없는 수레바퀴. 천 년을
넘게 싸워왔고, 앞으로도 언제까지 싸워야 할지 모르는 숙명.
우화는 죽을 것이다.
언제 잡힐지 모르지만 섬바닥에서 도망 다니는 데는 한도
가 있고, 많은 선지자가 당해왔듯이 상금 몇 푼에 현혹된 누
군가의 밀고, 이어지는 검날에 피를 뿌리며 죽어가리라.
그 때가 되면, 우화가 죽고 우화대가 해체되면 해남파는 주
민들을 다독거리기 시작한다. 그 순간까지 여족인들은 살아남
는 것이 최대 과제였다.
마중 나온 무인들이 준비해 놨던 마차를 끌고 왔다.
"소저(小姐), 마차에 오르시죠."
유가에서 나온 무인은 최대한 공경스런 태도를 취했다.
유소청은 묵묵히 마차에 올랐다.
그녀는 몹시 피로해 보였다. 유가에서 자란 사람들은 괴로
움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법인데 그녀의 걸음걸이에는 힘이
없었다.
"객잔(客殘)을 잡아놨습니다. 피곤하시더라도 조금만……"
"아냐. 달려 줘. 해구에서 벗어나 줘."
유소청은 축 쳐진 음성으로 말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앵가해까지는 팔백 이십여 리. 적어도 닷새는 더 지나야 오
랜 여정이 끝난다. 중간에 해남본문에도 들려야 하리라. 아버
지는 분명히 해남 본문에 계실 것이고, 으레 하는 일이지만
자식 된 도리로 해안소에 다녀온 결과를 말씀드려야 한다.
어차피 객잔을 골라 투숙해야 한다.
하지만 적엽명이 머물 것 같은 해구에서는 머물고 싶지 않
았다. 빨리 도망치고 싶었다. 그와 같이 배를 타고 왔던 오늘
하루동안-엄밀히 말하면 그와 만났던 어제 아침부터- 한시도
편하지 않았다. 마음이…… 마음이 무척 괴로웠다.
"알겠습니다. 끼럇!"
히히힝……!
우렁찬 말울음 소리와 함께 마차가 사람들 사이를 질주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비켜서기 급급했다.
"잠깐만요, 잠깐만!"
유소청은 황급히 제지했다.
꼭 무엇인가 하나를 빼놓고 온 것 같은 기분.
가져갈 것도 잃어버린 것도 없는데 왠지 허전한 느낌.
유소청은 휘장을 걷고 포구를 돌아보았다.
빗줄기가 차갑게 얼굴을 때린다.
적엽명은 범선에서 아직 내려오지 않고 있다. 부상이 심각
한 중년인과 중년부인, 어린 소녀, 늑대. 그는 많은 짐을 짊
어졌다.
왜 그런 일을 사서하는 것일까?
유소청은 차가운 빗물 속에 미지근한 빗물이 섞여든다고 생
각했다.
눈물…… 괜히 눈물이 쏟아졌다.
야속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고, 섭섭하
기도 한 복잡한 감정.
"가요."
유소청은 휘장을 닫았다.
달려가는 말발굽 소리에도 눈물이 묻어 나오는 듯 하다.
'불쌍한 사람……'
자꾸만, 자꾸만…… 적엽명의 후줄그레한 몰골이 마음에 걸
렸다. 그리고 그만큼 고생이 심했을 지난 세월이 상상되
고…… 괴로웠다.
'역시…… 아직 잊지 못했었어.'
범위는 빗물이 좀 더 억세게 쏟아져줬으면 하고 바랬다.
답답했다. 목이 터져라 외쳐보았으면. 빌어먹을 세상! 개
같은 세상! 저주라도 흠뻑 쏟아 봤으면.
범위는 늘 유소청과 함께였다. 그러나 유소청은 그렇지 않
았다. 가까이 다가가면 그만큼 멀어졌다. 그 실체가 눈앞에
드러났다. 적엽명…… 그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고.
그는 유소청이 이번처럼 흔들리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이제는 질투심도 일지 않았다. 가슴이 뻥 뚫린 듯 허전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녀를 잃었다는 절망감은 범위를
깊은 나락으로 떨어트렸다.
"마차에 오르시죠."
"……"
범위의 귀에는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유소청이 탄 마차가 대로(大路)를 돌아 시야에서 완전
히 사라질 때까지 줄곧 그녀만을 바라보았다.
한광은 머리가 유난히 검은 중년인을 마주보고 앉았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중년인은 콧수염을 팔자(八字)로 가지
런하게 기르고 있어 무척 청수해 보였다. 수염이 머리털처럼
검은 윤기가 흘러 그런 인상을 풍기는 지도 모른다.
"하파(何杷), 비파에 대해서 알고 싶은데 말해 줄 수 있
나?"
"없습니다."
하파의 대답은 늘 간단명료했다.
"알고는 있지?"
"네."
"인원수라도 알면 안 될까?"
"권한이 없습니다."
"좋아. 그런 대답을 할 줄 알았지. 그럼 비파에게 부탁을
할 게 있는데 해도 되나?"
"말씀하십시오."
"적엽명이 돌아왔어."
"……"
하파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사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기보
다는 천성이 그런 사람이다. 육십에 가까운 나이인데도 언뜻
보면 중년인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하파. 그의 침착함은 해남
도 제일이었다.
"흑월이라고 들어봤나?"
"죽음을 뜻하는 여족인들의 흑호……"
"그만!"
한광은 신경질적으로 말문을 차단했다.
"이번에 우화가 고용한 자객이 흑월이야. 나는 그 놈이 적
엽명과 동일인이라고 생각하는데?"
"가능합니다."
하파는 새로운 사실을 들었음에도 눈빛 한 올 흔들리지 않
았다.
"적엽명…… 그 놈이 중원에 가서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녔
는지 샅샅이 알고 싶어. 조사해."
"언제까지입니까?"
"이삼 일 내로."
"불가능합니다."
"가능하도록 만들어."
"불가능합니다."
"신경질 나는군. 좋아. 그럼 하파가 말해봐. 언제까지면 되
겠어?"
"최소한 보름입니다."
"보름. 너무 길어. 십 일로 해."
"보름입니다."
"좋아. 보름. 보름 안에 모든 걸 샅샅이 알아다 줘. 단, 아
버님에게는 비밀이야."
하파는 고개를 끄떡였다.
한광과 하파의 인연은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
해남파 장문인은 다른 가문의 여식을 아내로 맞아야 한다.
그러나 현임 장문인 한민은 그런 전통을 깨고 미인이 많기로
유명한 소주(蘇州)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다.
무가(武家)의 여식은 아니었다. 원(元)과 대적하여 싸우던
우국지사(憂國之士)이자 현재 소주자사(蘇州刺史)로 있는 황
병(黃 )의 딸로 재색(才色)이 뛰어난 여인이었다.
당시 가주들은 전통을 내세워 난색을 표시했지만, 미색을
보고 난 다음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한광의 뛰어난 용모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어머니가 시집올 당시, 가마를 호위하고 온 사람이 바로 하
파였다.
그는 장문인의 자녀 육 남매 중에서 어머니와 가장 많이 닮
은 한광을 특히 좋아했다. 학문도, 무공도 그가 기초를 닦아
주었을 뿐 아니라 시비를 시켜도 될 자잘한 일까지 손수 해주
었다. 어떤 때는 귀찮을 정도로.
그의 보직은 가물함(價物函) 수좌(首座).
방대하게 퍼져있는 한가의 모든 재원을 관리한다 해도 과언
이 아니었다.
그리고 하파는 비파의 파주(波主)로 추측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것 참 이상하단 말야. 우화가 고용한 살수라면 보통내기
가 아닐 텐데, 배 안을 샅샅이 훑어봐도 검께나 들 만 한 놈은
눈에 띄지 않더란 말이지. 적엽명, 그 놈을 빼면."
하파는 한광이 하는 말을 먼 동네 이야기처럼 담담히 들었
다.
"아무래도 적엽명 그 놈을 제일급 관찰 대상자로 선정해야
겠어. 그렇게 되면 누가 관찰자가 될까?"
"오진검 범위 공자입니다."
"왜?"
"소공(小公)께서는 이번 마수광의 사건을 처리했고, 청혼검
전공자님은 우화의 밀정 순을 처리했습니다. 해남오지 중 남
은 사람은 세 사람. 그 중 취옥검 유소저는 사람을 죽여본 적
이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습니다.
범공자와 석공자가 남는데, 석공자는 본문을 책임지고 있습
니다. 범공자입니다."
"그런가? 그건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이 아니란 것도 잘 알
테지? 본문에 도착할 때까지 방법을 생각해. 팔 년이 지났으니
옛날 죄는 사면됐다는 점을 잊지 말고. 아! 놈은 중양절에
죽일 계획이야. 파랑검을 가져오라고 했거든. 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파랑검을 가져올 거야.
후후후! 옛날, 그 놈에게 당하면서 맹세했지. 파랑검을 내 손
으로 부러트리겠다고. 놈이 흑월이든 아니든 내 손으로 고해(苦
海)뿐인 세상을 정리해 주어야지? 나는 놈을 너무 사랑해서 탈이
란 말야."
하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떠한 질문에도 되면 된다 안 되면 안 된다 확실히
의사를 표시했다. 그리고 된다고 대답했으면 확실히 지켰다.
해남도 제일의 침착함과 해남도 제일의 지모(智謀)를 지녔다는
명성에 맞게.
한광은 거듭 확인했다.
"아버님이 흔쾌히 승낙할만한 방법을 찾아내야 될 거야."
* * *
그 많던 사람이 땅 속으로 꺼진 듯 모두 제 갈 길로 가고
난 포구는 다시 적막에 휩싸였다.
"소협?"
중년 부인이 멍하니 포구를 쳐다보고 있는 적엽명을 일깨웠다.
"많이 변했군요."
적엽명은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고향에 돌아온 포근함.
옛날과 전혀 변함이 없는 포구 모습하며 낯익은 주루, 객잔이
그를 반겨주었다.
낯 선 도읍에 온 듯한 이질감.
해구는 번화해졌다. 낯 선 건물이 많이 들어섰고, 지금쯤이
면 고요에 파묻혔을 도읍이 휘황찬란한 야경(夜景)을 연출하
고 있는 점이 색달랐다.
적엽명은 중년인을 등에 걸쳐 업고 범선에서 내려왔다.
그가 중년부인과 어린 소녀를 이끌고 찾아간 곳은 해구소에
서 한참 떨어진 조그만 촌락이었다.
바닷가에 세워진 어촌?
어촌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집이라고 해봐야 겨우 대여섯
가구. 저녁밥을 짓는 구수한 내음도 전혀 풍기지 않는 특이한
마을이었다.
"여, 여긴?"
중년 부인이 놀라서 물었다.
"들어갑시다."
"안돼요. 관에서 알면 즉시 참형(斬刑)이에요."
적엽명은 중년부인을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우화대원이 되었을 때는 죽음을 각오한 것 아닙니까?"
"그것과 이것과는 틀려요. 해남파에 죽으면 값있는 죽음이만
관군에게 참수 당하면 개죽음이죠."
"하하! 그렇군요. 들어갑시다. 비록 이 마을에 근접하면 안
된다고 하지만 관군은 그림자도 비치지 않죠. 순라(巡邏)라고
해봐야 한 달에 한 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적엽명은 중년인을 이끌고 마을로 들어섰다.
그는 마을에 대해서 잘 아는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가장
안쪽에 위치한-마을에서 가장 초라한- 집으로 불쑥 들어섰다.
중년 부인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긴 한숨을 내쉬고
뒤따라 들어섰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허허허! 기후(氣候)가 헌앙(軒昻)해 졌구먼."
집안에서는 반가운 정담(情談)이 솔솔 새어나왔다. 보아하니
적엽명은 오래 전부터 집의 주인과 잘 아는 듯 했다.
중년부인은 어린 소녀를 이끌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풍채 좋은 노인이 보였다. 그는 방금 전까지 책을 읽고 있
었는지 서탁(書卓)에 고서 한 권이 펼쳐져 있었다.
살림은 단출했다.
책 몇 권과 침상 하나가 고작.
웬만한 여족보다도 못한 살림이었다.
"어서 오시오."
노인도 한족이 분명한데 거리낌 없이 맞아주었다.
중년부인은 아이를 이끌고 노인이 권하는 자리에 가서 앉았
다.
"임시로 치료는 했는데 상처가 중합니다. 어르신께서 보아
주셨으면 하고 찾아왔죠."
"허허! 그게 무슨 어려운 일이라고."
노인은 침상 밑에서 목함(木含)을 꺼내들었다.
목함 안에는 크고 작은 침(針)들로 가득했다.
형체도 곧바른 것, 구부러진 것, 갈고리처럼 생긴 것 등 다
양했다.
"초기 치료가 잘 되어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쯧쯧!"
노인은 침을 꺼내 전신 곳곳에 찔러 넣었다.
시간이 일 각 정도 흐르자 목함에 가득 찼던 침들은 절반
정도가 비었다. 그제야 노인은 손을 멈추고 돌아섰다.
"돌아오자마자 일을 벌이는구나. 언제나 철이 들는지."
노인이 힐문(詰問) 하듯이 말했다.
"해남도 상황이 예전보다 더욱 어지러워진 것 같습니다."
"하루 이틀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 아직 식전이지? 저녁
이나 들면서 이야기하지."
방 한 칸이 고작인 움막에는 주방이 따로 없었다.
바닥도 흙바닥 그대로였다. 여족이 장붕(帳棚)에서 생활하
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양가죽 대신 진흙으로 쌓은 담벼락
이 다를 뿐.
식사 준비는 방 한 귀퉁이에 모닥불을 피우고 솥을 걸어놓
으면 그만이었다.
중년 부인이 노인 대신 식사준비를 했다. 손을 놀리고 있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무리 손님으로 왔다지만.
움막이 워낙 부실하다 보니 먹을 것이라고 변변한 것이 있
을 리 없었다. 쌀 몇 줌과 야채 몇 가지가 고작. 하지만 중년
부인은 이렇게 사는 모습에 너무 익숙해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생각하셨던 책은 쓰셨습니까?"
"썼지. 허허허! 세상에 나가지도 못할 책이지만……"
노인은 쓸쓸하게 웃으며 책들을 쌓아놓은 곳에서 세 권을
꺼내 건네주었다.
- 간혈경(懇穴經)
본원진경(本源眞經)
약초비경(藥草秘經)
세 권 다 의서(醫書)였다.
간혈경에는 혈도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세밀하게 기술해
놓았고, 본원진경에는 우주(宇宙) 삼라만상(森羅萬象)과 인간
과의 관계가 노인의 주관적 견해에 따라 씌어있었다. 약초비
경에서는 해남도에서 자생(自生)하는 모든 약초들이 세밀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새롭군요. 그런데 부도술(副刀術)은……?"
"허허! 할 일이 많은 것도 아닌데 급히 서두를게 뭐 있나?
천천히 쓰지."
노인은 적객(謫客:귀양살이하는 사람)이었다.
노인뿐만이 아니라 마을 전체가 그랬다.
나라에 죄를 짓고 귀양살이하는 사람들.
특히 해남도에까지 유배될 정도라면 복권될 가능성이 전무
하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황궁(皇宮)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곳이니. 따라서 관부에서도 그들에게 신경 쓰는 일은 거의 없
다.
굶어죽건 말건 일체 신경 쓰지 않는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관졸을 보내 쌀 몇 줌 건네주는 것이 고작이다.
해남도에 유배된 적객은 거의 대부분 굶어 죽거나 바다에
투신하는 것으로 생을 마감한다.
관부에서는 누구누구가 몇 날 며칠에 죽었다는 짤막한 상신
(上申)을 올리는 것으로 의무를 마친다.
"만천강 물귀신은 가끔 들립니까?"
"보름에 한 번 정도. 덕분에 못난 목숨 죽지도 못하고 살고
있지. 허허허!"
적엽명은 문득 만천강 물귀신이 보고 싶어졌다.
만날 사람은 많다. 황함사귀는 이미 만났고, 만천강[萬泉
河] 수귀(水鬼)를 비롯하여 백석산(白石山)의 황유귀(黃
鬼), 감은성(感恩城)의 호귀(狐鬼).
모두가 보고 싶은 얼굴들이다.
적엽명은 적객으로 유배되어 온 유사(儒士)에게 학문을 배
웠다. 적객으로 온 장군(將軍)에게는 무공을, 의원에게는 의
술을 배웠다.
그것이 해남파에서 파문된 결정적인 동기였고, 관부에 수배
(手配)된 죄목이다.
적엽명은 해남도를 떠나며 적객들의 수발을 만천강의 수귀
에게 부탁했다.
목숨을 건 위험한 일.
적객들과 주민들과의 접촉은 엄격히 금지되었고, 어길 시에
는 참형으로 죄를 묻는다.
만천강 수귀는 지킬 의무가 없는 일을 팔 년 간이나 꾸준히
해 준 것이다. 혈배(血杯:의형제나 평생 지기(知己)를 맺으면
서 서로의 피를 섞은 잔)를 들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져가서 읽어보게. 새롭게 깨닫는 바가 있을 거야."
적엽명이 의서에서 눈을 떼지 않자 노인은 기꺼이 양도해
주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르신의 평생이 담겨 있는 역작인데."
"허허허! 죽으면 바다에 던져질 몸이야. 이 움막은…… 새
로운 주인을 맞이하겠지. 허허허! 책이라고 해봐야 어차피 불
에 태워질 것 아닌가? 자네가 읽어준다면 그게 바로 책을 쓴
보람이지."
의서는 귀중했다.
단지 의서라고 치부해 버리면 그만이지만 무리(武理)와도
맞물려 돌아가 새로운 경지의 무학(武學)을 눈뜨게 해 주리
라.
* * *
대황촉(大黃燭)이 어둠을 사르는 대청(大廳).
진귀한 음식이 가득한데도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손을 대지
않았다. 이윽고 눈이 부리부리하여 호목(虎目)을 연상시키는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대장군, 관충(冠沖) 장군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들었네."
대장군이라 불린 사람 또한 중년인이었다. 이제 갓 오십을
넘었을까? 이목구비(耳目口鼻)가 단아(端雅)하여 장군이라기
보다는 문사(文士)가 어울려 보였다.
"포기한 모양이지요?"
"딱한 사람…… 관충(冠沖) 장군은 싸움 앞에서 물러선 적
이 없는 장군이야."
"……"
대황촉 불빛이 소리 없이 타 들어갔다.
싸움터에서 잔뼈가 굵은 듯 어깨가 단단해 보이는 호목의
중년인은 말없이 대장군만 바라보았다. 대장군이라 불린 사람
의 시선은 조그만 술잔에 머물러 있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
작조차 할 수 없었다.
대장군이라 불린 사람이 입을 열었다.
"흔히들 하는 말로 기창(騎槍), 기도(騎刀), 기편(騎鞭),
기검(騎劍), 기사(騎射). 어느 부분에서도 홍암을 당적 할 수
없다고 하지. 마상무공(馬上武功)의 달인. 그가 조용해."
"홍암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저도 그 것이 이
상해서 알아봤는데 놈은 우군(右軍) 운남도사(雲南都司)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호목의 중년인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홍암이 조용해…… 그 자야 말로 관장군의 수족이 아닌가?
쉽게 움직일 수 있는 홍암을 운남도사에 묶어둔다? 이해가 안
돼. 열 일곱에 전장에 뛰어들어 원(元)의 맹장(猛將) 무릴샤
[木里沙]를 죽인 놈…… 뿌리도 없는 놈이 스물 여섯 살이란
어린 나이에 종사품(從四品)이라…… 홍암이 왜 움직이지 않
을까? 자신의 밀정이 죽었는데."
이윽고 그가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홍암이 운남도사에서 움직이지 않은 것은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그럼 더욱 이해가 안 돼."
대장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움직이지 않았다면 뭔가 있는 거야."
"밀정을 심어뒀습니다. 놈이 움직인다면 채 세 걸음도 걷기
전에 제 귀로 들어올 겁니다."
호목의 중년인은 이빨을 드러내며 씩 웃었다.
"움직였어야 돼. 움직였어야……"
"대비해두겠습니다."
"해남에 전하게. 모든 일을 매끄럽게 처리하지 못한다면 내
사람이 아니라고. 만약 일이 잘못되면…… 내가 치겠다고."
"알겠습니다."
용모가 단아한 대장군은 그제야 화채(花菜:잘게 썬 유자를
석류알, 잣과 함께 꿀물에 타서 먹는 음식)에 손을 댔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