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도시와 ‘방황하는 나그네’ 20년 전에도 그 도시는 거기 있었다.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할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 도시는 거기 그대로 있다. 변모가 없는 도시, 적어도 외관상으로….여든 살 퇴직 초등학교장 겸 노인학교장은, 대신 늙을 대로 늙었다. 그런데도 그 도시는 늙은 나그네를 품에 안아 준 것이다. 나그네는 태어나서 이 땅에서 비로소 따뜻함이 뭔지 깨닫고 있는 중이다. 여생? 노루 꼬리만 하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수이랴! 이쯤에서 그 도시의 이모저모를 설명해 보자. 그게 순서일 것 같다. 한마디로 압축해서 표현하라면 그 도시는 우린 수도 서울의 이른바 위성도시다. 서쪽으로 어느 광역시와 접촉되어 있고, 남쪽엔 시흥시와 맞닿아 있다. 오른쪽은 광명시다. 중심가에서 11시 방향에 김포 국제공항이 자리 잡았다. 예서 그 도시가 어떻다느니 하며 외관이나 피상을 서둘러 덧붙인다는 게 무관하다. 어차피 촌보(寸步)를 조금씩 떼면 뗄수록 그 정체성이 드러나게 마련이니. 마지막 글자로 끝을 내어도 그 도시의 이름은 안 밝혀졌으면 좋으련만! 다만 이 몇 가지는 열거해 두고 싶다. 어차피 순서 따위는 뒤죽박죽일지 모른다는 전제를 깔았으니….행정 구역 29개 동, 3개 지역구, 총인구 약 83만 3200명. 명승지를 열 개만 꼽아보라 한다 치자. 화자가 임의로 상동호수공원, 도당공원, 진달래동산, 옹기박물관, 무릉도원수목원,석왕사,솔안공원,공강선사유적공원,유럽자기박물관, 하이주 등등이 되리라. 자, 이제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11월 중순을 갓 넘기고 있을 무렵이었다. 무대는 우리나라 최남단의 부산광역시, 아 참 더 상세히 말하면 북구 화명동 어느 초등학교 교장실. 마치 강시처럼 차려 입은 이 방의 주인인 제갈종천(諸葛鍾天)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는 후들거리는 걸음으로 자리에 앉으려 했는데, 다리가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아니 그보다 먼저 잠시 선 채로 거울을 들여다보았음을 밝히자. 제갈종천은 놀랐다.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오늘 따라 얼굴이 더 백짓장 같군. 이러다가 죽는 거나 아닐까?” ‘강시’란 말할 것도 없이, 죽었으면서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시체를 말한다. 예서 설명을 곁들이자. 교내 사고로 한 어린이가 생명을 잃은 뒤, 그 일로 말미암아 제갈상장의 건강이 말이 아니게 나빠졌다. 그런데 하필이면 아내가, 새로 생긴 한복집에서 간이 두루마기를 한 번 맞춰 주었던 것이다. 그게 그를 ‘강시’로 둔갑(?)시킨 것! 말을 억지 춘향 식으로 꿰다 보니 그는 버릇처럼 남들에게 두루 허풍(?)을 떨었다. 약간 여유가 있을 때엔. “이게 보기보다 따뜻하단 말이야! 강시는 추위를 많이 타거든?” 말은 그래도 가끔 제갈종천이 섬뜩한 느낌에 빠져 허우적대기도 했다. 보온(保溫)은 단순한 체감을 덧씌울 뿐이지만, 어쩌면‘강시’란 실존을 의미하는 것이 모른다? 뭐 그 정도로 해 두자. 아내의 정성이 고맙긴 하지만, 그는 그렇게 갈팡질팡했다는 뜻이다. 아닌 게 아니라 제갈종천은 심각한 사건에 휘말려 있었다. 그 무렵 한 어린이가 교내에서 실신했다가 병원에 가서 끝내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그 충격으로 제갈종천 자신이 두 번이나 거리에서 쓰러졌으니, 더 강조해 무엇 하랴. 이 이야기의 시발도 그것과 얽혀 있었는지 모른다. 오후 네 시, 제갈종천이 ‘마음 어쩌고저쩌고 하는 수련원’에 다녀오는 길이었으니….아무리 난치명이라도 치유가 가능하다는 꾐에 빠져 한 달째 거기 드나들었던 거다. 그날도 그는 오후 한 시부터, 반은 앉고 반은 누운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곳에서의 화두(話頭) ‘죽음 연습’에 몰입했다 오는 길이었다. 산 사람으로서는 참으로 참혹한 짓이었다. 몹쓸 고문도 '죽음 연습'의 고통보다는 덜하리라. 식은땀을 흘리고 앉아서 종회에 참석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교감 둘이서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교장 선생님, 종회 시간에 특별히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학교 폭력 예방을 위한 훈화를 누가 하든지 그것만은 특별히 학교일지에 기록하고 적색 볼펜으로 흔적을 남기라고 직원들에게 전해 주세요. 지난번 판사도 그 얘길 했어요.” “알겠습니다, 교장선생님. 사모님이 오들도 모시러 오시지요?” "예, 이래저래 걱정 끼치는군요. 미안합니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그럼 저희는 실례하겠습니다.” 제갈종천은 조금 어지러뜨려 있던 다기(茶器)들을 대충 정리하고 나서, 간이 병풍 뒤의 침대(라꾸라꾸)에 몸을 뉘었다. 벌써 몇 달째 그는 그 침대 신세를 지고 있었다. 그 어린이 사망 사건 뒤로 종일은 도무지 앉아서 집무할 수가 없어, 수시로 그 위에 몸을 던지곤 하던 참이었던 것이다. 외부 손님은 반드시 행정실을 거치도록 해 두었으니, 그야말로 궁여지책으로 연명해 나갔다고 하자. 허태열 국회의원도 그런 상장의 모습 아니 몰골을 두 번이나 목격하고 돌아갔다. 정형근 의원이나 권익 청장도 마찬가지. 그들은 제갈 상장이 운영하는 무료 노인대학에 음으로 양으로 관계하던 인사였다. 바로 그 전날에는 신라대학교 법산(法山) 김용태 총장도 들렀다가 그 참상 앞에서 거의 넋을 잃었다. 그렇게 침대에서 한숨만 쉬고 누운 뒤 10분쯤 지났을까?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이 울린 것이다. 제갈종천은 겨우 몸을 추슬러 일어나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제갈종천의 목소리엔 신음이 묻어났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예, 감사합니다. 명실초등학교장 제갈종천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은 위압이 섞인 질문을 던지는 게 아닌가? “여보세요. 제갈종천 교장선생님 맞습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어디십니까?” “여긴 부* 검찰지청입니다. 나흘 뒤 11일 오후 두 시까지 우리 청(廳)에 좀 오셔야겠습니다.” “아니 난 부*이 어딘지도 모르는 사람이오. 왜 저를 거기서 부릅니까?” “이것 봐요, 제갈 교장님(*어느새 ‘교장선생님’에서 ‘선생’은 빠져 있었다.) 제갈 교장님은 업자로부터 20만 원 짜리 상품권을 지난해 추석에 여기 업자로부터 받은 혐의가 있어요.”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저는 상품권의 ‘상’ 자도 모릅니다.” “뭐라구요? 우리가 아무런 근거 없이 출석 요구를 하겠습니까? 14호 검사실로 오세요. 혼자가 아닙니다. 전임 박순자 여자 교장은 현찰 30만원을 받았다니, 그 교장실이 뇌물 수수의 온상이라도 된 듯한 느낌입니다.” 그 순간 제갈 종천은 수화기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모로 쓰러졌다. 이윽고 심상치 않은 낌새를 채리고 달려온, 행정실장과 검찰청 수사관이 나머지 통화를 한 모양이다. 제갈종천은 구급약으로 준비해뒀던 우황청심환을 두 환(丸)을 끄집어내어 씹어서 먹었다. 다시 20분 가량 지나자, 어느 정도 안정이 되고 맥박도 정상 가까이 돌아오는 것이었다. 행정실장이 귀띔을 했다. 수사관이, 약속을 지켜야지 이유 없이 출석을 늦춘다면 당연히 불이익이 돌아간다고 하더란다. 그러면서 하나 우스꽝스러운(?) 정보를 알려 준다. 현직에 있는 제갈종천은 왕복 비행기 삯과 기타 교통비, 식대 등을 공금으로 처리 가능하다는 게 아닌가? ‘무죄추정의 원칙’이란 말을 익혀 들었던 터라,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전임 박순자(세 회 선배)교장은 민간인 신분이니, 해당되지 않는다며 행정실장이 마치 자기가 생색을 내는 듯한 미소를 보였다. 여기서 여담 하나 안 끼울 수 없다. 들먹여보자. 박 교장을 보고 재갈종천은 평소 선배라기보다 누님이라 불렀다. 그게 훨씬 더 정감이 있어서였다. 업무 처리도 공정하게 하고, 특히 금전 즉 학교 경리 문제가 깨끗하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말하자면 그 덕분에 주위로부터 칭찬을 받는 터였다. 박 교장이 그런 사건에 연루됐다는 자체에 제갈종천은 고개를 갸웃거렸고말고. 하여튼 제갈종천은 급하게 집에다 전화를 내었다. 아내한테였다. 좀 일찍 왔으면 좋겠다고. 그는 예순이 넘을 때까지 자동차 면허증도 없어서 천연기념물이라는 별칭을 얻은 터라, 때 아닌 쓴웃음이 입가에 흘렀다. 그 옛날 부산일보 칼럼을 쓸 때 ‘무차회(無車會) 회장의 변’이란 제목으로도 한 꼭지 채웠던 기억이 왜 되살아났는지 모른다. 갑자기 제정신이 아닌 듯, 파안대소가 터져 나오려 했다. 혼미의 나락으로 급전직하하고 있는 중 자기에게 쏟는 소리인지도 모르게 그의 입에서 튀어 나온 말이 이랬으니, 병신 새끼! 다섯 시를 20분 남겨 두고 그는 교장실 문을 잠갔다. 근무상황기록부에 ‘조퇴’라고 기록하고 자신이 결재했다. 그 순간에 지나지 않는 동안에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르는 일! 어린이 사망 사고 때부터 생긴 습관이었다. 교문을 나서는데 저만치 채월단 노인학생(85세)이 바구니를 들고 서 있다. 아니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무심히 지나칠 수가 없다. 하지만 말은 걸지 못했다. 채월단 학생은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다. 차창 너머로, 실루엣으로 잘못 비쳐졌다는 표현이 차라리 맞을 정도? 한데 채월단 학생은 쓰레기통의 빈병을 주워 담고 있었던 것이다. 제갈종천은 충격에 빠졌다. 혼자 중얼거렸다. “아, 나는 죄인이다. 며칠 전이었지. 아내가 다른 볼 일로 말미암아 나를 데리러 못 왔을 때, 저 학생이 나를 불러 세웠지. 방과 후 교육활동을 마치고 귀가하는 어린이들 수두룩한데, 치마를 걷고 속곳 주머니에서 만 원 짜리 한 장을 꺼내서 하던 말, ‘선상님요, 몸도 안 좋은데 걸어 버스 타지 마이소. 택시로 가이소. 알았지예?'” 매주 토요일 오후 3시간씩 무료 노인학교를 운영해 온 지 18년, 많은 눈물겨운 이야기 속에서 살아왔다. 빈병 주워 선생에게 촌지(?) 바치는 학생! 그야말로 유일무이한 사건이다. 눈물범벅된 제강종천을 백미러로 아내가 봤다. “여보, 오늘 무슨 나쁜 일이 또 있었어요? 그 학부모와의 합의에 진척이 없는 모양이지요? 너무 걱정 말아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데….제가 2천 만 원 더 마련할 테니, 모금한 1천만원에 보태서 위자료로 내세요. 판사의 강제 조정인가 뭔가 하는 수준에 가까운 금액 아니예요?“ “여보, 나쁜 소식이 또 덮쳤어. 내가 작년 추석 때, 컴퓨터 교실 업자로부터 10만원 상품권 두 장을 받았다는 거야.” “아니 그게 무슨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소립니까?” “글쎄. 며칠 뒤에 부천 검찰 지청에 출석하라는 요구가 왔지 뭐야.” “당신이 받긴 했어요?” “천만에, 다른 부정이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이번 일은 정말 얼토당토않는 가짜야. 뭔가 흑막 아니면 오해가 있어. 하늘이 두 쪽 나도 그 런 일이 있을 수 없는 이유가 있어.” “하데 여보, 종일 컨디션이 안 좋았다는데 어쨌든 우황청심원에 너무 기대지 마세요.” “안 그러면 못 사는데 어쩌겠어? 남순자 학생(95세) 있잖아? 그 학생의 발가벗은 몸은 자기는 안 보고 내게 보여준 아들 김 약사가 ‘주사(朱砂)’가 안 들어가서 요즘 우황청심원은 하루 서너 개까지는 허용된다던데….” 그랬었다. 남순자 학생은 김 약사와 겸상을 차리고 밥을 먹는다. 상 밑에서 아들과 다리가 맞닿을까 봐 엄청 조심스러운데-겁이 난다?-제갈종천과는 야유회 때 일부러 ‘발바닥 박치기’를 시키는 그런 사이였다. 그렇게 울면서 둘은 집으로 돌아왔다. 딸처럼 키우는 요크셔테리어 후로다가 한 치도 될까 말까 한 꼬리를 흔들며 반겼다. 하나 제갈종천의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파킨슨병 환자의 얼굴 특징 데쓰마스크(Death Mask), ‘죽은 이’의 얼굴 표정 바로 그 자체였으니…. 제갈종천은 며칠간 끙끙 앓았다. 수면제를 두서너 알 삼켜도, 잠은 근처에조차 오지 않았다. 애꿎은 우황청심환만 밤낮으로 목구멍으로 우겨 넣었다. 중학교 후배인 정흥태가 이사장인 부민 병원에 걸핏하면 실려 갔다. 제갈종천이란 한 인간이 왜 그렇게 어리석은지, 아무것도 아니랄 수 있는 그 일에 대처할 방법을 몰랐다. 하기야 예순 살을 넘기기까지 그는 이 사회 생활에서 너무나 뒤처져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그 개가 들어 웃을 일들을 적어 본다.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눈곱만한 까닭 하나. 소주 한 잔만 들어가도 얼굴이 홍당무가 되고 숨을 헐떡거리는 것이다. 1년에 소주 한 병도 그에게는 과량(過量)이다.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어쩐지 겁이 난다? 그게 무슨 명분(?)이 되는가 말이다. 중학교 때 한 개비 담배를 피우곤 쓰러졌다 깨어난 이후 그는 한 번도 그 담배를 입에 물지 않았던 것. 그 흔해 빠진 사교춤도 못 춘다. 모름지기 지도자란 위 서너 가지는 통달해야 인기를 얻을 수 있다. 한데 그는 어쩌다가 노래방에 가서 여자 교감이 장난삼아 블루스를 추자며 가까이 다가오면 기겁을 한다. 고스톱은 계산이 안 된다. 바둑의 ‘바’ 자도 모른다. 당구의 큐? 그거 잡아 보지 못했다. 장기는 맥(脈)만 아는 주제다. 골프? 아서라, 그는 되레 거기 혐오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 교장으로서는 0점이었다. 그 중 백미(?)는 60명 직원(식당에서 일하는 일용직 포함) 중에서 유일하게 자동차 면허가 없다는 사실. 해서 중언부언하지만, 제갈종천은 언필칭 ‘천연기념물’로 교직 사회에 회자되었고말고. 앞서 거론한 ‘무차회장’은 30년 이상 유효했던 것. 1천 명 가까운 시내 교장 중에서 유일한 자동차 운전 무면허. 희소가치로 따졌을 땐, 기념비(?) 같은 존재 바로 그거였다. 대신 노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불렀고, 노래 많이 오래 하기 대회 (비공식)에서 내로라하는 상대를 모조리 거꾸러뜨렸다. 왜 김지하 시인과 이동순 시인(교수)의‘노래 맞장뜨기’에서 이 교수가 이기지 않았다던가? 단지 유명 인사가 아니라서 거기 못 끼었지만, 만약 삼자 대결이었다면 우승은 제갈종천이었다! 이건 자타가 공인하는 하나의 명제다. 내친김에 그 얘기. 김지하와 이동순이 의기투합했더란다. 둘이서 노래 시합을 하는데, 대중가요 뭐든지를 목에 실을 수 있다는 첫째 조건. 상대 김지하가 끝내면 1분 내에 이동순이 무엇이든지 불러야 한다. 아니면 감점! 계속 이렇게 진행되는데, 3절까지 계속하면 일정 점수를 플러스. 제갈종천이 합류했더라면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곡을 선보였으리라. 황금심의 낙화유정 따위를 누가 알 건가 말이다. 낙화유정 뒷골목에 누구를 찾아/ 정든 고향 다 버리고 흘러온 타향. 하룻밤 풋사랑에 잘난 돈과 못난 돈에/ 내도 날짜 기다리며 내도 날짜 기다리며/ 기다리는 여자라오… 하지만 생사의 갈림길 아니 명재경각의 시점에서 하찮은 가요 따위가 무슨 소용이랴. 이미 몇 주째 휠체어에 앉아 김영순 노인학생이 지휘하는 애국가와 ‘고향의 봄’을 부르다가, 정신 잃기 직전에 돌아 나오곤 했으니까. 노이학교에서 말이다. 공군5전투비행단 양하윤 중사와 대한항공사우회 음악반장 김광종 색소포니스트, 색동어머니 부산지회 이숙례 회장, 북구문화원 백이성 원장, 황정혜 바이올리니스트 등이 없었다면, 그의 노인학교도 문을 닫을 뻔 했다. 그러는 중에서도,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법산(스님) 김용태 총장이 이상정을 가끔 불렀다. 제갈종천의 집 바로 위에 그의 절 원효정사(元曉精舍)가 있었으니, 아내의 부축을 받으면 억지로 올라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참고로 말하면 교육감 선거에 나설 의향을 가진 그는 초중등 학교의 세세한 정보를 죄다 꿰뚫고 있었다. 법산 스님은 절에 올라온 상정을 보고 가부좌를 튼 채 이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찬불가 ‘청산은 나를 보고’였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유수는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 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법산 스님 앞에선 약간 안정이 되는 듯했으나 돌아서면 ‘도로아미타불’이었다. 스님(총장)은 그런 제갈종천에게 또 다른 위로를 건네었다. “제갈 학장, 선대부인께서 불자이셨다면서요? 지난번 북구문인협회 창립총회에서 이 학장이 말했어요. 저승의 엄마에게 ‘찬불가(讚佛歌) 한 곡을 가르쳐 드리고 싶다.’고 말입니다. ‘청산은 나를 보고’는 백이성 문화원장이 워낙 노인 학교에서 많이 들려주었던 터라 익히기가 쉬울 겁니다. 나는 적어도 이 학장이 그 상품권을 받을 사람이 아닌 걸 압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은 단순한 사자성어가 아니라 진실입니다. 나무아미타불! 이 노래 부지런히 부르세요.” 그렇게 며칠이 속절없이 흘렀다. 아내가 동행하지 않으면 도무지 불가한 운신이었다. 하물며 출두였다 하랴. 그의 아내가, 명예 퇴임한 양호교사(현 보건 교사)였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다면, 무능력의 표본인 제갈종천은 그 도시를 밟기 전에 목숨이 다했을지 모르는 일이다. 세월이 제법 흐른 지금, 날짜를 기억할 수는 없다. 전날 종회 때, 직원들이 하던 말이 떠올랐으니, 목요일 아니면 금요일에 그 도에 끌려갔다(?)는 걸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아내가 모는 아반테 승용차를 타고 공항으로 나가는 길, 들판엔 가을걷이가 한창이었다. 한참 시간이 보니 저 멀리 오른쪽에 맥도 부락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아내가 입을 열었다. “여보, 저기서 오는 학생이 열대엿 분 되지요?” “그럴 거야. 참 대단한 열정을 가진 분들이야. 토요일 오후엔 만사 제쳐 두고 노인 학교로 우르르 몰려오니…. 김갑순 학생, 금요일 밤샘을 한다는 거 아냐? 토요일 오후 노인학교에 나오려고 말이야. 그러니 강의나 노래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대로 앉아 졸 수밖에.” “이 와중에 그런 얘기가 나오다니, 당신은 노인학교가 그렇게 좋아요?” “그럼. 네 삶의 의미 자체요. 한데 오늘 무사히 돌아올 수는 있을까?” “여보, 마음 편히 가져요. 그깟 상품권 받았다고 거짓 고백을 한다고 쳐도, 그걸로 처벌을 받겠어요? 40년 동안 당신은 한 번도 징계 위원회에 회부된 적도 없었고, 큰상은 수도 없이 받았으니, 20만원으로 바가지를 쓴다 해도 구제될 거예요.” “징계 처분 받으면, 퇴임 때 훈장 수훈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게 걸려. 분명히 무슨 모함이나 악재가 사이에 끼어들었단 말이야. 난 수긍할 수 없어, 안 받은 게 확실해.” “믿어요, 당신을. 자, 용기를 내세요.” “여보, 우리 둘은 왜 이렇게 어리석을까? 바보에 가까워, 둘 다. 지난번 어린이 사망 사고 때, 변호사와 의논한 적이 있었잖아? 그런데 정작 나 자신이 직접 연루된 일인데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생각 근처에도 못 가 보고, 오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되다니 말이오.” “그러게 말이에요. 당신도 나도 눈앞의 창피에 쉬쉬하는 쫌생이밖에 안 되는 삶을 산 것 같아요.” “여보, 죽고 싶소.” “또 그 말씀을 하다니, 여보! 우리 딸들은 어쩌려고 그래요?” 그러고 나서 아내는 차를 갓길에 세우는가 싶더니, 핸들에 머리를 박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좀 진정되는가 싶었지만, 헛일이었다. 시간이 촉박해 있는데도 아내는 어깨만 들썩이지 않을 뿐, 그 자세였다. 20분쯤 지나 아내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다시 시동을 걸었다. 둘은 간신히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나서 한참 지나, 문득 그 도시가 알고 싶어 핸드폰을 열었다. 이리저리 두드리다 상장은 한곳에 시선이 딱 멎었다. 그 도시 경찰관 문*동/ 성고문 사건. 다른 데로 옮기려 했는데, 뜻대로 안 되는 게 아닌가? 마치 그 도시의 상징이라도 되는 듯한 착각이 제갈종천을 붙들고 있었다. 10여 년 전이다. 당시 다학에 재학 중이던 권*숙은 주민등록증을 위조하여 노동 운동을 위해 위장 취업을 했다. 붙잡힌 권*숙은 소사 경찰서 문 아무개 경사에게 성추행을 당한다. 그자가 자기 성기를 권*숙에게 갖다 대기도 했다. 그 도시로 지금 자신이 피의자로 간다? 실로 기가 막혔다. 그 도시의 아무것도 제갈종천은 알지 못했다. 다만 허태열 의원이 거기 시장으로 있었다는 건 어렴풋이 들었다. 그 밖에는 어느 한 귀퉁이도 꿈에서조차 본일이 없었다. 밀양군 단장면 태룡초등학교 26회 동기 강성룡 친구가 그곳 교회 장로라는 풍문? 그게 무슨 소용이랴.접한 적이 있어도 그게 무슨 소용이랴! 아내가 옆에 있지만, 제갈종천 자신은 혈혈단신이란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망망대해의 난파선에서 튀겨져 나온 나뭇조각과 다름없는 신세였다.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그 도시로 향하였다.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택시는 검찰지청 앞에다 둘을 내려놓고 횅하니 돌아갔다. 인도(人道)에선 미화원들이 끊임없이 빗자루로 청소를 했지만, 낙엽은 끊임없이 뒤섞여서 곤두박질을 했다. 낙하(落下), 그 두 음절이 스산한 느낌으로 둘의 몸을 휘감았다. 그런 중에 도로 건너편에 옷을 귀부인처럼 차려 입은 중년 여인이 자기보다 더 화려한 털을 바람에 나부끼는 아프간하운드 한 마리를 앞세우고 걷고 있었다. 제갈종천의 눈에는 그 모습이 꼭 딴 세상의 풍경 같이 보였다. 잠시 어지러움을 느끼면서 아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여보, 저게 사실이 아니고 미지의 세계 한 폭의 그림으로 보는 것 같아.” “아니, 이참에 개 이야기가 나오다니….당신은 정말 애견가에요. 정신 좀 차려요. 그러나저러나 저 아프간하운드가 우아함은 세계에서 1등, 머리는 꼴찌래요.” 둘이서 잠시 웃었다. 그리고 이내 청사 정문을 들어서서는 묻고 물어 ㅇ 호 검사실을 찾았다. 입구엔 541실로 먼저 찾으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다시 가슴이 두근거리고 전신에서 맥이 빠져, 움직이기조차 힘들었다. 541엔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어느 여직원이 들어오더니, 약간은 불친절하게 물었다. “부산에서 오셨습니까? 성함은요?” “예, 제갈종천입니다.” “보호자는 1층으로 내려가서 기다리세요. 끝나면 바로 연락드릴게요.” “제가 워낙 몸이 아픈데, 아내가 곁에 있도록 배려하실 수 없습니까?” “불가할 겁니다. 변호사 외는 입회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오늘 부산과 몇몇 도시의 교육계 인사들이 대여섯 명 출석하기 때문에, 문답(제갈상정에게는 ‘취조’로 들렸는지 모른다)은 한 시간 안에 끝날 거예요.” 아내가 나가고 보니 제갈종천의 몸은 사시나무가 되고 만다. 목은 마르고 했지만, 탁자 위에 놓인 물병에 손을 뻗칠 수가 없다. 잠시 여직원에게 양해를 얻고, 소피가 마려워 화장실에 갔다. 한데 지퍼만 내렸을 뿐 다음 볼일을 볼 수 없다. 방광에 압통만 심해지고…. 신음 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져 나왔다. 아, 죽었구나! 하지만 제갈종천은 돌아서 나와서 다시 541호실로 들어갔다. 눈물이 났다. 자기 자신 상품권이라니 그 근처에도 간 본 기억이 없는데, 천리타관 검찰청에서 그걸 받았다는 혐의로 취조를 받게 되다니…. 마침내 건장하게 생긴 30대 후반의 수사관(?)이 들어섰다. 둘은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수사관은 컴퓨터 모니터를 보며 말문을 열었다. “멀리서 오시느라 수고 많이 했습니다.” “…….” “저희들로서는 확증을 갖고, 출석을 요구했습니다.” “확증이라니 무슨 뜻입니까?” “상품권을 전달한 사람의 증언입니다. 9월 중순, 추석을 일주일 앞둔 토요일 오전 회사 직원이 교장실로 찾았다고 합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나는 작년 9월 1일자로 금의환향(錦衣還鄕)하는 기분으로 그학교에 부임했습니다. 교장으로서 대미(大尾)를 장식하겠다는 각오도 대단했었구요. 마침 저는 20년째 매주 토요일 오후 노인학교를 운영해 오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요? 그것과 상품권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있지요. 그날은 노인학교 수업을 하는 대신, 교장실에 모두 모여 민요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북구 문화원에서 주최하는 민요 경창대회가 열리게 되어 있었거든요. 연례 행사였습니다. 당일 지역문화원장과 구의회 부의장도 제 방에 있었습니다. 노인학생이 자그마치 1백 명이 넘었습니다. 학생회장과 총무 등 간부들의 안내로 그 1백여 명의 학생이 교장실과 그 바로 앞 연혁실을 꽉 채우고 있었구요. 다른 날이라면 혹시 모르지만,” “이 교장님, 말씀 그럴듯하게 하는군요. 이거 한 번 생각해 보세요. 40년 이상 교직 생활을 한 사람에게 20만원 상품권이 건네졌다 칩시다. 형사처벌 ? 안 받습니다.” “그래도 명예지요. 양심을 걸고 맹세합니다. 그런 일 결코 없었습니다.” 갑자기 다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그 정도라면 제갈종천 자신도 안다. 빈맥(頻脈)이 온 것을. 가만히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맥박을 재어 봤더니, 120회가 넘는다. 상장은 바지 오른쪽 주머니에서 액상 우항청심원을 내어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단번에 마셨다. “교내에서 어린이 사망사고가 난 충격으로 공황장애가 왔습니다.” 매정하고 버르장머리 없어 보이는. 수사관은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별다른 반응도 없이. “이 교장님, 그러니까 자백을 하세요. 교장의 자존심도 없습니까?” 제갈종천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왔으나 그걸 표출하기에는 전신이 무력하기만 했다. 이런 걸 두고 설상가상이라 하는지 모르겠다. 끝없이 옥신각신 실랑이를 이어나갔다. 제갈종천은 내내 생각했다. 이 친구 내 딸 나이를 겨우 넘겼을 것 같은데, 자기는 아비도 없는가? ‘교장의 자존심도 없다’라니. 이가 갈린다.‘교장 선생님의 자존심을 살리셔야지요.’정도는 했어야지. 수사관이 이어 점점 막다른 골목으로 제갈종천을 몰아넣는 것이다. “설사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도 신분에 영향을 안 줍니다. 내일 모레가 정년퇴임인데, 시 교육청에서 그런 사람에게 처분을 내리겠습니까?” “나는 안 받았습니다.” “정 그러신다면 뇌물 공여자(供與者)와 대질신문을 하시겠습니까?” “…….”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또 한풀 꺾이고 만 거다. 윤은희, 그 맑고 깨끗한 얼굴을 한 여사장이 그날 분명히 상품권을 주었다고 우기면? 교내 시설이며 공간 등을 훤히 알고 있는 윤은희다. 거짓으로 말이다. 화장실에 가는 내 뒤를 밟아서 호주머니에 찔러 넣어 주었다고….그 새롭고 낯선 상황에 대처할 능력이 제갈종천에게 남아 있을 턱이 없다. 거기서 심문은 끝이었다. 둘의 발언이 평행선을 달리는데, 결론이 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수사관은 맥심 직접 커피 한 잔을 대접하려 했다. 하지만 상장에게는 카페인이 한 모금이라도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면 발작(?)하기 명약관화한 노릇, 끝내 입에 대지 않았다. 대신 이한마디는 잊지 않았다. 혼신의 힘을 담아서 낸, 수모를 준 그에게 맞받아친 것이다. 마지막 발악을 속사포에 장전하고 방아쇠를 당긴 것. “내일 모레면, 내가 무료 노인학교 운영을 한 지 20년이 되는 날입니다. 매주 토요일 오후 그래 왔습니다. 해서 말인데, 나는 나이 많은 사람에게 일단 공손한 말을 쓰는 게 버릇입니다. 체질화되었어요. 그런데 오늘 당신은 나를 너무 고압적으로 대했습니다. 나, 다시는 평생 이 도시를 향해서 오줌도 안 누겠습니다. 잘 먹고 잘사시오, 예끼 이 버르장머리 없는 사람 같으니라구.” 제갈종천이 그렇게 나오자 수사관도 적이 당황할 수밖에. 이번엔 수사관의 표정이 꺾였다. 그 퍼런 서슬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부*을 향해서 오줌 운운’을 한 번 더 그의 얼굴에 퍼부엇을 때 왜 그렇게 통쾌한지….지렁이도 밟히면 꿈틀거린다고 했으렷다! 마지막으로 검사실로 들어갔다. 인상이 좋은 검사는 최대한으로 자신을 낮추고, 일어서서 제갈종천을 맞았다. 누구 배려인지 모르지만, 아니면 보호자가 도와줘도 괜찮다는 얘기가 오갔는지 휴게실에서 오래 기다렸던 아내도 검사실로 들어오는 게 아닌가? 커피를 못 마실 정도의 건강 상태라는 이야기를 건넨 모양이었다. 검사는 여직원에게 인삼차를 내오라고 시킨 걸로 봐서. 물론 두 잔이다. 검사가 이야기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제 선고先考)께서도 교장선생님으로 계셨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귀임하시지요. 경험에 의해 예단하자면, 형사처벌? 안 받으십니다. 시교육청에서 징계위원회에 회부하겠지요. 그래도 제일 낮은 ‘견책’까지도 안 나올 겁니다. 차라리 ‘상품권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으면, 그 가벼운 처분이 내릴 텐데. 교장 선생님, 건강이 매우 안 좋으신 것 같은데, 귀가하셔서 몸 조리 잘 하시지요. 교장선생님의 자존심, 기억하겠습니다.” 다시 자기 주장을 내세우려다 제갈종천은 그만 입을 닫았다. 처음으로 검사에게서 위안을 받았다는 자체가 가치로웠다고 하자. 하지만 초주검이 되어 다시 택시를 타고 비행기로 환승하여, 집에 돌아오는 도중, 도무지 견딜 재간이 없다. 부민 병원 응급실로 직행할 수밖에. 그리고 다시 일주일 병가를 내고 입원을 했지만, 모두가 헛일이었다. 제갈종천은 이후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사신(死臣)과의 싸움을 계속해야만 했다. 메리놀 병원으로 옮기기까지 하고, 정신과 치료를 집중 받았어도 차도가 없었다. 몰래 부른 제자 동의대 한의학과 김중한 교수가 진맥을 하더니, 정신분열증 염려 어쩌고저쩌고 했다. 얼마나 괘씸했으면 제갈종천이 버럭 화를 냈을까? 이 고이한 놈! 이렇듯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병이란 병은 다 앓았으니, 거짓말 보태어 한국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였으리라. 좀 과장되긴 했지만…. 보름 이상 그렇게 시달렸다. 그 사이에 한번 병원의 허락을 받고 외출을 하여 태종대로 나갔는데, 아내가 복국 한 그릇 먹자고 했다. 하지만 숟가락으로 국물을 병아리 눈물만큼 떠놓고는, 그걸 식힌 뒤 입에 넣으려 했으나 숟가락을 든 손이 몇 치도 웁직이지 않았으니 얼마나 재갈종천이 아팠는가 말이다, 더 이상 필설을 동원할 필요? 아서라 그럴 필요 없었으리라. 그렇게 20분 동안 울면서 앉아 있으려니 학교 동기이자 교장 강습 동기인 조명래 친구가 생각났다. 워낙 상정이 마구 먹어대니까-‘폭풍 흡입’이란 말이 맞으리라- 그가 하던 말이 이거였으니…. 이 교장 여럿 있을 때 음식 욕심 내지 말게나, 밉보이네! 그런 제갈종천, 복국 한 모금이 버거우니 어쩐단 말인가? 결국 둘은 음식을 고스란히 남겨 두고 일어섰다. 무심하게도 시 교육청에서 징계위원회를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몇 날 며칠까지 청내(廳內) 어느 공간에 나와야 한다는 전화도 걸려 왔다. 그 동안에 집중 치료를 받은 덕분인지, 조금 차도가 있어 제갈종천이 출근했다.. 외출을 끊어 놓고, 그 ‘죽음 연습’ 연수원에서 두 시간 버티고 와서 오랜만에녹차를 달여 입에 머금고 누워 있었다. 그런데 시교육청 백차흠 장학관이 불쑥 교장실로 찾아온 게 아닌가! 그 역시 교장 강습 동기. 그가 입을 뗐다. 제갈종천은 사범학교, 백 장학관은 교대 출신이라 나이 차이는 다섯 살이다. 그의 말. “정년퇴임 직전에 두 가지 일로 괴로움을 당하시다니….위로드립니다.” “고맙네. 가장 불행한 교육자로 기록될 거요, 내가. 애가 내 방에서 죽질 않나. 20만원 상품권이 ‘불명예제대’ 로 나를 몰아가지 않나.” “형님, 까짓 상품권 인정하시지요. 그러면 징계까지 가지 않습니다. 박 교장님에겐 아무 조치가 없었습니다.” 거기서 제갈종천은 붉으락푸르락 얼굴색이 변하더니 오히려 벽력같은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와병 후 두 번째 불같은 항거다. “또 그 소리. 그게 되레 사실을 왜곡하는 거라면, 당신 책임질 거야?” 겸연쩍은 표정을 하고 백 장학관은 자리를 떠날 수밖에. 종천은 허탈한 표정으로 우황청심원을 한 병 들이키고 다시 병풍 뒤 침대에 누웠다. 시체나 다름없는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느니 한숨이요, 신음소리였다. 드디어 징계위원회 출석 통지가 왔다. 제갈종천은 죽기를 각오하고 그 자리에 가서 진술하기로 작정하였다. 그 요지를 말하면 이랬다. “업자가 상품권 두 장을 전했다는 그날, 저는 교장실을 비워 본 적이 없었습니다. 허태열 의원 외 다른 사람을 만나지도 않았구요. 제가 설사 그걸 받겠다는 의지가 있었다손 치더라도, 120명의 노인학생이 교장실과 연혁실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수수(授受)가 불가했습니다.” 그러나 끝내 종천은 징계위원회가 열리는 공간에 들어가지 못했다. 서거나 앉아 있기조차 힘들었기 때문이다. 잠깐 이야기가 옆길로 샌다. 얼마나 아팠으면, 퇴임 6개월을 앞둔 며칠 전 사표를 들고 지역 교육청에 갔을까 말이다. 한사코 초등과장이 만류하는 바람에 그냥 돌아오긴 했지 않았던가! 어쨌든 시 교육청 주차장 구석에 아내가 몰고 온 승용차를 세워 놓고, 둘이서 붙잡고 울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휴대 전화로 담당관에게 호소를 했더니, 사정이 그렇다면 귀가해서 기다리는 방향으로 해 보겠단다. 조금 있으려니 걱정이 되는지, 두 명의 관계자가 나와서 둘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러곤 몇 번 냈었던 진술서를 참고로 하겠단다. 다시 입원을 해야만 했다. 이미 지역사회에서는 소문이 났던 참인 모양,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인사들도 저 멀리서부터 애써 고개를 돌렸다. 그렇 땐, 너무나 괴로워,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버릇처럼 수도 없이 해 봤다. 어느 날 권익 북구청장이 교장실에 들렀다. 중학교 두 해 선배다. 참 허태열은 네 해 후배고. 권익 청장이하던 말 “제갈 교장, 왜 그렇게 어리석소? 변호사와 만나 의논했어야지….” 꿀 먹은 벙어리마냥 할 말이 없었다. 그만큼 그가 세상을 어리석게 살았던 증좌라고나 하자. 해서 말이다. 두렵긴 한이 없어도 차라리 곱다랗게 숨이 넘어갔으면 하는 은근한 바람을 가질밖에. 세월 아니 날짜는 무심히 잘도 흘렀다. 며칠 뒤에 앞서의 백 장학관이 교장실로 서류 봉투를 하나 들고 왔다. 지난번 호통(?)을 당한 적이 있는지라 백 장학관은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주의 촉구 처분이 내렸습니다. 이건 형님 신분에 아무 영향도 없습니다. 따라서 정년퇴임 때 황조근정훈장 수훈하시는 데 장애가 안 됩니다.” “…….” “노여움 거두십시오. 저도 형님이 연루되지 않으셨다는 걸 확신합니다. 교육감님도 형님의 말씀을 진실로 받아들이십니다. 해서 지난번 어린이 사고도 말입니다. 1천1백만 원 조의금 모아 주신 것에다가, 1천9백만 원을 보태어 3천만 원으로 사건 매듭을 지으시기로 했다더군요. 담임선생님을 위로하라는 말씀도 하셨어요. 물론 구상권(求償權) 청구 안 하신답니다.” “여보, 내가 몇 마디만 하겠소. 교육감님께 감사하다는 내 뜻을 전해 주오. 안 그래도 담임교사가 출장 전에 특별히 친구들에게 주의를 주고 조치를 취했는데, 불가항력으로 일어난 일이라 지금 심한 위염을 앓고 있소. 담임도 매우 억울해 하고 있어.” “그랬었군요.” “또 하나. 그 사건 발생 때 제일 기분 나빴던 일이 있소. 세상에 일개 경사가, 저들의 직급이 7급일 텐데 말이오. 내 방에 와서 뭘 알아본답시고 조서 비슷한 것을 꾸미더라오. 세상에 그자가 내 앞에서 담배를 꼬나물지 뭐요? 검찰이니 경찰! 정말 돼먹지 않았어.” “쯧쯧, 교장은 4급 예우인데….” “누가 아니래? 경찰서장과 교장의 직급은 같아요.” 근데 정작 진짜 사건은 며칠 뒤에 일어났으니, 소름이 끼친다. 아니 눈물은 지금도 난다. 강서구 어느 마을 김 아무개 여학생(78)한테서 등기 편지가 온 것이다. 뜯기 전부터 섬뜩한 느낌이 드는 게 이상해서 그런지 제갈종천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지금도 가슴이 쿵쾅거리고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 내용을 아래에 요약한다. 워낙 글씨가 엉망이고 두서도 없는데도 그 길이가 만만찮았다. ‘존경하는 학장님 전 상서’라 서두를 떼고서 쓴 편지…. 학장님 돌아가시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 상품권을 제가 도둑질했습니다. 사건이 있었던 그날, 노인학생들이 전부 교장실로 모인다는 소식을 듣고 저도 달려갔습니다. 좀 늦었지요. 버릇없는 학생들은 학장님 앞에서 치마저고리를 벗고 깔깔대며 좋아라 날뛰었습니다. 한복 교복이 참 아름답습디다. 저는 돈이 없어 교복을 못 사입었습니다.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제 사정을 학장님이 아시면 한 벌 사 주셨겠지만, 전 그럴 체면이 아니었지요. 다른 노인학교와는 달리 교복을 안 입어도 학장님은 모든 학생을 다 무대에 올려 세워 주셨지만…. 한 아저씨가 박카스 한 상자를 학장님께 드리라고 제게 건네주더군요. 그걸 받아든 학장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자 먼저 본 사람이 임자지요. 한 병씩 마시고 ‘양산도(陽山道)’ 연습합시다.” 제게도 박카스가 돌아왔습니다. 단번에 동이 나고 빈 상자를 제가 치우게 되었지요. 그걸 구겨서 들고 화장실 쓰레기통에 넣으려 가는데, 밑바닥에 봉투가 하나 들어 있었습니다. 펼쳐 보니, 상품권 10만원 짜리 두 개였습니다. 누가 볼세라 얼른 전 그걸 속곳 호주머니에 쑤셔 넣었습니다.(중략)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일곱 남매를 낳아서 다 저승에 먼저 보냈습니다. 남편도 여의었구요. 강서 너른 들판 비닐하우스 여기저기가 제 숙소입니다. 기쁨이라곤 오직 노인학교 출석입니다. 학장님은 이 못난 저를 89년도 대만 여행 때 데리고 가셨습니다. 열다섯 중 한 명은 무료라고 하면서….87명이 갔는데, 여섯 명에 저를 끼워 주셨지요.(중략) 저는 지금 곧 바로 낙동강 샛강으로 나갑니다. 이 세상에서 마지막 쓰는 편지를 학장님께 드리다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저승에 가서도 다른 노인학생들이 입버릇처럼 말했듯이 학장님을 기다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추신/ 저의 기도입니다. 하느님, 제가 떠나 주님의 품에 안기지 못하더라도, 저희 선생님 가정에 행복이 충만하시도록 은총을 주시옵소서, 성부와 성자와 성부의 이름으로, 아멘! ‘방황하는 나그네’를 부르고 떠납니다. 김ㅇㅇ 올림(*노인학생들은 꼭 자기를 학생이라 불러 주기를 원했다.) 그 사연들이 제갈종천을 또 천길만길 낭떠러지로 밀어 넣었다. 단 하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이라는 기도가 그로 하여금 온 몸을 부르르 떨게 하는 마력을 주는 게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이런 추억 아닌 추억도 있었다. 어느 학생이나 가족이 이 세상을 떠났을 때, 제갈종천이 명복을 빌자고 하면, 김 아무개 학생은 언제나 십자성호를 그었었지, 각기 종교가 다른 학생들은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떠나보냈고. 실눈을 뜨고 보면, 요지경이었ㄷ면 외람된 표현일까? 자기들의 종교 의식(?)대로 뭐러뭐라 지꺼리는 것이다. 무당 제자 넷은 손을 빌었다. 과연 이튿날 급하게 강서 분회장 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김 아무개 학생이 샛강에 투신하여 숨을 거두었다는 것. 제갈종천은 입을 닫았다. 강서 분회 학생들조차 김 아무개 학생이 생활고 혹은 외로움을 못 이겨 그 길을 택하였다고 생각했으리라. 죽은 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제갈종천은 여태껏 함구하여 왔다. 참, 지금은 학생들이 다 입적, 소천, 아니면 선종해서 이승에 없다. 밝혀도 괜찮으리라. 더구나 이 글의 압권은 '그 도시' 부*을 다시 찾는 연유에 있으니, 가슴 펴고 또 하나의 기록을 써 나간다, 제갈종천은 2004년 8월 31일, 43년간 정들었었던 교문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할 세월 동안 토요일 오후면 출근해 왔었던 노인학교도 관두었다. 하지만 중병은 그 마수(魔手)를 거두어들이지 않았다. 거기로부터 벗어날 수단은 없었다. 그런 중 시쳇말로 백수가 된 그에게 기쁜 소식이 날아들었다, 누가 큰딸 중매를 했는데, 당사자끼리 몇 번 만난 모양이었다. 상대는 삼성에버랜드에 근무한다고 했다. 딸이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엄마 아버지, 미국에서 유학을 했습니다. 공부도 할 대로 했고, 몇 번 만나는 동안에 사람 됨됨이가 좋아 보였어요. 무엇보다 키가 183센티미터예요. 우리 집에도 장신(長身) 식구가 있으면 좋겠어요.” 녀석은 소리 내지 않았지만 웃었다. 어리둥절해 있는데 녀석이 덧붙인다. “아버지, 그 연수원에 다니지 마세요. 사이비 종교 집단이라 소문이 났습니다. 어느 신부님이 신랄하게 비판하더군요. 내친김에 말씀드리는데, 미스터 박은 5개째 가톨릭을 믿는 집안이래요. 저더러 개종을 권했습니다.” “너만 개종이냐? 아니면 우리 식구 모두 다 그래야 하니?” “엄마 아버지만 괜찮으시다면, 이참에 가톨릭 가정이 됐으면 합니다. ” 다섯 가족이 의논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작은딸도 쉬 동의를 한 것이다. 두 종교가 닮은 점이 많아서 그런지 가톨릭에 친근감이 갔다. 큰딸은 성당에서 교리교육과 세례를 이내 받았다. 제갈종천 내외와 작은딸도 마찬가지. 결혼 후 큰딸은 몇 년 동안 근무했던 사립 고등학교에 사표를 내고, 제 짝 박 돈보스코의 직장에 따라 용인으로 올라갔고. 이어서 아들을 낳는 바람에 제갈종천 내외는 딸 집에 올라갈 수밖에. 덕분에 2년 남짓 공부하여 공립학교 교사 채용 시험에 합격, 시내 생물 교사로 있다. 그리고 둘째 출산, 내년이면 초등학생이 된다. 돌이켜보면 아찔하기만 하다. 낯선 땅에서 적응을 하지 못해 고생께나 했다. 청승맞게 ‘나그네설움’은 왜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지…. 그렇게 2년이 지났을 때 경기문학인협회 사무국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저, 제갈종천 교장선생님.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슨 부탁입니까? 초야에 묻힌 촌로에게….” “그곳 성당에서 들었습니다. 교장선생님 복음성가를 잘 부르신다구요.” “시원찮은데….과찬을 전했군요. 그런데 왜 그러십니까?” “‘경찰 방송’이라고 기독교 방송이 있는데, 매주 목요일 오후 목사님과 전도사님, CCM 가수들이 와서 찬양을 합니다.” 제갈종천은 움찔했다. 하필이면 '경찰'이라니. 해서 물을밖에. 걱정하지 말란다. 순수한 기독교 찬양 방송!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 “찬양이라면?” “‘복음성가’ 부른다는 뜻입니다. ‘방황하는 나그네’아십니까?” “흉내를 정도지요. 둘째 소절부터는 주님께 가까이 가서 고통도 슬픔도 없이 지낸다는 흑인 영가지요. 그건 그렇고. 어디 있습니끼? ”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사무국장은 너무나 뜻밖에도 부*이란다. 제갈종천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까무러칠 뻔했다는 게 옳으리라. 세상에, 이날 이때까지 그쪽을 보고 오줌도 누지 않겠다는 각오로 살아오지 않았던가? 단박 거절할 생각으로 수화기를 놓으려는데, 천하의 소리꾼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그의 머리를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게 있었다. 원수를 사랑하라! 그 도시일수록 네가 찾아가야 할 게 아니냐? 그건 하느님의 말씀인지 자신의 생각인지 구분이 안 되었다. 마침내 오케이 사인을 보내고 말았다. 지하철을 이용한다 치자. 동백역을 거쳐 기흥역에서 1호선으로 환승, 구로역에서 하차한다. 그리고 인천행 열차를 타고 중동역에 내리면 15분 거리에 방송국이 있다 했다. 제갈종천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 것은 부*역을 스쳐지나간다는 점. 그만큼 그 도시 이름 자체가 그에게 치욕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그랬다. 약속대로 그는 목요일 경찰방송 스튜디오에 모습을 드러냈다. 예상보다 편안한 분위기를 그 공간이 주었다. 여남은 분이 출연하는데, 이런! 목사님이 다섯 분이나 되지 않는가? 게다가 남녀 비율이 1:4! 경기문인회 정다겸 사무국장이 사회를 하는데 어찌나 매끄러운지 탄성을 질렀다. 차례가 되어서 제갈종천은 무대에 올라서서 ‘방황하는 나그네’를 봉헌했다. 오 나는 약한 나그네요/ 이세상 슬픈 나그네/ 수고도 병도 위험도 없는 내가 가는 그 밝은 곳/ 나는 가네 내 아버지께 더 이상 방황 없는 곳/나는 가네 십자가 앞에 주님 품에 돌아가네… 약간 색깔이 든 안경을 썼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황보종천이 흘리는 눈물을 보고 스튜디오 안의 모두가 이상하게 생각했으리라. 그들이 팔순의 노인에게 열거하지 못할 기나긴 사연이 있는 줄 몰랐음에야. 그로부터 월 1회 그는 부천을 아니 방송국을 찾았다. 중동역이 부* 시내라 시간이 흐를수록 민감했던 정서도 누그러뜨려지고, 되레 정이 들어가는 것 같아 흠칫 놀라기도 하였다. 그게 간사함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 그 도시 쪽을 보고 오줌도 누지 않겠다는 결심은 어디 가고 그 도시 한가운데 기독교 방송국에서 바지춤을 내리다니…. 3년 동안 정말 부지런히 다녔다. 가슴에 맺힌 한을 푸는 걸 하느님이 도와 주시는 느낌에 빠졌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소위 복음성가, 그 곡은 같아도 가사는 다른 데가 더러 있다. 하나님: 하나님/ 독생자: 외아들/ 복락: 행복 등등. 제갈종천은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명제대로 경찰방송에선 개신교 가사를 그대로 부른다. 3년 남짓 동안 특히 혼신의 힘을 쏟은 곡이,‘살아 계신 주’, ‘바람 속의 주’,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오늘 집을 나서기 전(가톨릭 제목 ’기도’), /‘방황하는 나그네’,‘사랑의 종소리’등등 스무남은 곡이다. 몇 달 전 제갈종천은 큰맘 먹고, 지척에 있는 검찰 지청 정문을 통과하여 들어갔다 나왔다. 실로 켜켜이 쌓이고, 얽혔다가 또 설킨 만감이 소용돌이를 쳤다. 오히려 몸서리 쳤다고 하자. 하지만 이윽고 한없는 평온이 전심을 감싸는 게 아닌가! 그런데 이제 다시 부산으로 갈 일이 생겼으니, 경감 계급장을 단 둘째딸이 곧 첫애를 낳을 예정인 것이다. 둘째 딸 간호를 하는 동안에는 부산 사돈(내외)이 여기 와. 당신 자식 식구들을 돌보아 주겠단다. 그 도시를 떠나기 이제 오히려 섭섭하지만, 제갈종천은 말한다. 어디에든 그분이 계신다. 주교좌 성당 남천성당과 중앙성당(부산은 주교좌 성당이 둘) 노인학교에 가서 ‘방황하는 나그네’ 등을 쏟아내자. 하지만 목요일이면 그 도시가 생각나리라. 부산에 머물러도 제갈종천은 용인을 거쳐 가끔 그 도시로 가려는 당위성 아니 숙명이다 하나만 덧붙이자. 제갈종천은 퇴임 후 몇 년 지나 '부산교육상'을 받았다. 교육자에게 최고 영광이요, 가문의 영광! 그가 상품권 10만원 짜리 두 장을 받지 않았다는 걸, 모두가 은연중 합의한 결과 아니고 뭘까. 사족. 허태열이 공교롭게도, 부천시장으로 있었다니 그와의 인연도 우습다고나 하자. 사족 더하기 하나. 그 도시의 작가들을 몇몇 안다. 그들과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쉽고말고. 최희영 작가는 스튜디오에까지 왔었음에야! 떠나기 전에 이룬 소원. 재작년 캄보디아 행 비행기 안에서 집 가까운 비구니 도량(道場) 주지 스님께 썼었던 편지를 일주일 전에 보냈더니, 날짜를 잡아 줄 터인즉 가까운 시일 내에 와서 불자들 앞에서 찬불가 한 곡 부르란다. '청산은 나를 보고'다. 짐을 쌀 준비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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