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최필규:문경 봉천사 주지)
고녕가야를 세운 태조 즉 고로왕을 이어 즉위한 2 대 마종왕 (156 - 220)은 156 년 ( 병신년 ) 에 즉위하여
65 년간 재위하였다. 매우 긴 기간 동안재위하엿던 마종왕에 대한 기록 또한 남아 있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다.
마종왕의 재위 기간은 금관가야의 수로왕 ( 42 -199 )- 거등왕 ( 199 - 259 ), 신라 의 아달라왕 ( 154 - 184 )-
벌휴왕 ( 184 ~ 196 )-내해왕 (196~ 230 ) 의 재위 시기와 겹친다. 대개 영민한왕들에 의해 개국된 1 세기
초기에는 큰 대립이 없 었다. 그러다가 점차 각국이 영토 확장을 시도하면서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 삼 국사기 」에는 가야와 신라의 상호 관계에관한 14 번의 기사가 실려 있다. 대개 서기 77 년부터 562 년
대가야가 항복하기까지의 기사가 중심이다. 하지만 이들 관련 기사의 대부분은 너무 소략하여 어느 가야와
관린된 기사인지 파악하기어렵다.80 )
만일 서기 42 년에 건국한고녕가야국이 185 년에 신라 벌휴왕의 침공 을 받고 무너졌다면 이 연대는 고녕가
야국은 144 년 동안 유지한 것이 된다. 재위에 오른 마종왕은 선왕인 태조왕이 승하하자 태조왕릉과 왕비룽
을 축조했으며 현존하는 왕릉과 왕비룽의 규모를 통해서나마 마종왕 당시고녕가야의 위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고녕가야국은 태조왕을 이은 2 대 마종왕재위시절보다는 3 대 이현왕 시절에 첨해왕의 공격을
받아 가야연방과 합군하여 신라를 격퇴한 뒤 합동하여 분치하고 김해로 도읍을 옮겼다는기록이 더 정확성이
있어 보인다.
태조왕의 재위기간은 금관가야의 수로왕 ( 42 - 199 ), 신라의 유리왕 ( 24 ~ 57 )- 탈해왕 ( 57 - 80 )- 파사왕 ( 80 ~
112 )- 지마왕 ( 112 ~134)- 일성왕 ( 134 - 154 )- 아달라왕 ( 154 - 184 ) 의 통치 시기와 겹친다. 고녕가야의 태조는
고녕기원 원년인 서기 42 년 태조왕 ( 신라 유리왕 18 ) 에 건국하여 156 년까지 115 년간 재위하였다.
여기서 고로왕이 개국조로서 재위를 115년간이나 했다는 것은 고녕가야국의 국가적 기반을확보하는기간이었을것
으로이해된다.
긴 재위를 마치고 고로왕은마종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를 이은 마종왕은 선왕의 재위를 거울삼아
고녕가야를 이어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고녕가야국의 존속 기간에 대해서는 벌휴왕대로 보는 기록과
첨해왕대로 보는 기록이혼재해 있다.먼저 " 신라 伐休王 2 년 ( 185 ) 에 왕이 장사 구도 ( 仇道 ) 를 보내 고녕가야
국을취하였다"는 기록은 마종왕 때의 사실로 볼 수 없다. 이 해에는 파 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해 ( 仇須兮 ) 를
등용하여 좌우 군주 ( 左右軍主 ) 로 삼아 소문국 ( 召文國, 의성군 ) 을 쳤다"고 하였다.
이 해는 소문국을 쳤다 고 기록되어 있을 뿐 고녕가야를 쳤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아무리 허약한 소국이
었다 하더라도 115 년 동안 재위하였던 영민한 왕의 개국 이후 2 대 왕 때 한 나라가 무너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벌휴왕이 소문국을 칠 때 처음으로 ' 군주' ( 軍主) 의 명칭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로국 즉 신라는
고녕가야 인근에 자리했 던 소국인 소문국을 먼저 치고 점차 낙동강 상류를 품고있는 가야 대국 인 고녕가야를
겨냥했던 것은 아닐까? 이렇게 본다면 마종왕 때까지 고 녕가야는굳건하게 건재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80 ) 서기 77 년, 94 년, 96 년, 106 년, 115 년, 116 년, 201 년, 209 년, 212 년, 505 년, 522 년, 524 년, 532 년
( 금관가야 항복 ), 562 년 (대가야 항복 ).
<한국불교사연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