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와 엿장사
이마에 띠를 매고 한복을 입은 남자가 북을 둘러멘 채
사람들의 발길에 닳은 오래된 계단을 올라가고 있다.
축 처진 어깨의 뒷모습이 삶에 지친 듯한 느낌이다.
그는 술을 파는 야간업소 출연해서 창을 하는 삼류 소리꾼이었다.
나비넥타이를 한 업소 지배인이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프로그램이 개편돼서 박씨가 하던 무대가 없어졌어요.”
말을 듣는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는 봉투 한 장을 받아들고
힘없이 집으로 향한다. 그는 엿장사였다. 밤에는 엿을 만들고 낮이면 골목길이나
시장에서 무쇠 가위로 장단을 맞추며 소리를 하며 엿을 팔았었다.
그는 다시 자유로운 엿장사로 돌아갔다.
그의 소리재능을 이어받았는지
아들은 음대 성악과를 졸업하고 평범한 회사원이 되었다.
아들은 회사생활에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아들은 사표를 내고
아내에게 아버지와 같이 엿장사를 하겠다고 했다.
아내와 어머니는 대학 성악과까지 나온 사람이 장터에서 소리를 하면서
엿을 판다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결심을 얘기한다.
아버지의 표정이 착잡하다.
“네 결심이 그렇다면 한번 해 봐라”
아버지는 벽에 걸려있던 손때 묻은 북과 무쇠 가위를 내려 아들에게 소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온 가족이 엿을 만드는 장면이 보였다.
단단한 반죽을 양쪽에서 잡아당겨 늘이고 그걸 접어서 다시 늘이고 하는
작업이 끝없이 이어졌다.
마치 짜장면집에서 밀가루 반죽으로 길다란 면발을 만드는 과정과 흡사했다.
길다란 엿가락을 가위로 일정하게 자르고 거기에 깨를 묻혀 작은 상자들에넣기도 했다.
가족 경영의 엿 공장이었다.
리어커 위에 엿이 수북이 담긴 엿판이 놓여지고 북을 멘 아들과 무쇠 가위를 든
아버지가 장돌뱅이 한복차림으로 시장을 향해 가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후 시장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신명 나게 한판 노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 장면을 보면서 나는 그 부자의 용기에 마음으로 박수를 쳐 주고 있었다.
유튜브에서 본 다큐맨터리의 프로그램이었다.
일흔 여덟살의 실존하는 엿장사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얘기였다.
내 세대만 하더라도 관료사상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고시에 합격하면 봉건시대 과거에 급제한 것으로 취급했다.
그런 생각들이 전문직이나 대기업에 들어가야 성공한 것으로 간주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그런 고정관념이 조금씩 풍화되는 모습이다.
대기업 회사원인 친구가 있었다. 그는 삼십대에 회사를 그만두고 뒷골목에
작은 국수 가게를 차렸다.
그는 삼십년 동안 한 자리에서 규모도 늘리지 않고
칼국수만을 만들어왔다. 단골손님이 늘어나고 그 가게는 맛집으로 인정받았다.
요즈음은 그의 아들이 새벽에 주방에 들어가 은은한 불에 오랫동안 사골국물을
우려내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의 이대 칼국수 가게가 탄생했다.
근엄한 재판장이던 분이 있다. 천재로 소문난 그의 재판을 여러번 보았었다.
그가 법관직을 그만둔 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굳이 나의 손을 잡고 한 빌딩의 귀퉁이에 있는 작은 파스타 집으로 데리고 갔다.
젊은 주방장이 내가 있는 테이블로 나와 인사를 했다.
재판장을 했던 법조 선배는 서울법대를 졸업한 자신의 아들이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그리고 앞으로 그 음식점을 자주 이용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의 사무실 근처에 작은 가게가 있다.
찐 계란도 팔고 김밥도 판다.
가게의 젊은 주인이 없을 때면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물건을 팔고 있다.
아들을 대신해서 팔고 있었다. 찐계란을 파는 노인은 유명한 대학 선배였다.
대기업 이사도 하고 도의원도 했었다.
허영심에 무리해서 아들을 미국의 로스쿨로 유학시킨 집이 많다.
언어가 무기인 변호사 사회에서 그들이 미국에 뿌리내리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들이 한국으로 돌아와도 법정에 설 수 없다. 그렇다고 법률문서를 만들 능력도
경험도 얻기 어렵다.
많은 젊은이들이 어두운 방에 들어박혀 백수로 인생을 허비한다.
인간은 타고 날 때부터 그릇의 크기와 재능이 다르다.
모두 일등급이 되고 명문대를 나와 전문직이나 대기업사원이 될 수 없다.
자식의 진정한 행복을 위한다면 일찍부터 자식이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설정해 주어야 하는 건 아닐까
과연 나는 위에 말대로 그렇게 하였나
다행이 아들딸 모두 제앞길을 스스로 개척해 주어 그런일을
설정해주지 못했다
부자엿장수는 자꾸 자꾸 뇌리에 매돈다
첫댓글 글에 공감 합니다~
딱 우리들에 이야기 아닌가 생각 합니다~
이번 명절에 첫째 손자는 뭘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둘째는 뭘 했으면 좋겠다 글케 말했다가 며느리한테
한방 먹었습니다~
아버지 지들이 하고싶어 하는걸 할수 있도록 뒷바라지만 할거에요 합니다~
며느리 말이 백번 맞습니다~
난 또 이런 생각을 합니다~학원 많이 보내지마라~놀았다고 꾸중하지 마라 합니다~
난 공부만 하는 아이들보다 건강하게 자라나는 아이들 모습이 훨씬 좋드라 그랬습니다~
모두에게 공감되고 한번쯤은 생각들해볼 말씀인듯 합니다~
직업이 귀천이 없음을 느낍니다
자신이 주어진 곳에 삶을 찾아 가는 젊은 세대들~~ 참 용기가 대단하다 생각을 합니다
누군가 말합니다
자신의 적성에 사는 것이 행복인 것을 ~~ 공부하여 대통령이 된다면 한 사람만이 필요 한것인데
나머지는 어디로 가는가~~ 각자의 자리가 있는 것을 ~ 부모의 욕심으로 힘들게 하는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개척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에 찬성 표를 보내고 싶어요
어렸을 때 엿장수 아저씨가 오면 집에 빈 병이나 찌그러진 냄비 그리고 고무신을 들고 뛰었던 기억이 나네요.
글을 읽으며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보았어요.
이전과 달리 퇴직후 진로전환을 해서 또 다른 일을 하는 어르신들을 뵌 적이 있어요. 정말 직업엔 귀천이 없어요. 각자가 다른 일을 해야 사회가 돌아가지요. 평탄하게요.
저는 아이들이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칭찬하고 격려해 주었어요. 한 배에서 태어났어도 각자의 욕구가 있으니까요.
글을 읽으며 엿장수 아버지의 아들을 믿고 지지해주는 모습이 보기좋았어요.
평안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