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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저우(沙州)시장의 노천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모까오쿠(莫高窟)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기울기 시작하고 있었다. 서둘러 관광안내소로 가서 한국어 가이드를 찾았다. 문화재 보호를 위한 중국 정부의 통제 때문에 실제로 관람객들이 구경할 수 있는 굴의 숫자는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그것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게 아니라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정해진 장소만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중국어 가이드를 따라서 몇 개만 휙 돌아보는 것은 정말 무의미한 짓이 될 것 같았다. 한국어 가이드를 미리 예약하고 간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일단 물어나 보고 나서 안 되면 영어 가이드라도 부르자는 심정으로 얘기를 꺼냈는데, 뜻밖에도 잠시 뒤에 가이드가 나타났다.
“니하오(你好), 런스니헌까오싱(认识你很高兴)!”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이번에도 나는 중국어로 상대는 한국말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공손한 자세로 서 있는 가이드는 머리가 조금 벗겨진 중년사내였다. 조선족이냐는 내 물음에 그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니요, 한족(漢族)입니다. 하지만 제가 한국말을 조금 할 줄 압니다.”
그는 겸손하게 ‘조금’이라고 말했지만, 한두 마디만 들어봐도 그의 한국어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나는 의외라고 생각하며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사내는 키도 작달막하고 옷차림도 수수했으나 표정에서는 왠지 모르게 온화한 기품이 느껴지는 것이 중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선족 출신의 한국어 가이드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화를 하다 보니 말투에서도 조선족 특유의 옌벤 억양을 별로 찾을 수 없었다.
그의 이름은 리신(李新). 둔황의 석굴과 불교유적들을 연구하는 학자라고 했다. 오래 전 동북지방의 따롄(大連)에서 한국 여성에게 한국말을 배웠는데, 그가 한국말을 배운 이유도 한국의 역사학자들과 교류하기 위해서였고, 지난 10여 년 동안 이곳을 찾았던 한국의 내로라하는 학자와 연구자들을 여러 차례 안내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그를 따라 들어간 첫 번째 굴은 335호 석굴이었다. 그는 벽화에 그려진 조우관(鳥羽冠) 쓴 인물을 손전등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예상대로 그것은 고구려 사신을 그린 벽화였는데, 한국에서 온 우리 일행의 관심사를 고려한 듯 맞춤형으로 진행되는 그의 명쾌하고도 차분한 해설에 모두들 곧 심취해들었다. 첫 번째 굴을 나와 서너 개를 더 돌고 나올 무렵 그에 대한 나의 호기심은 서서히 호감과 고마움으로 바뀌고 있었다.
여행을 다니면서 유적지나 박물관을 많이 둘러본 편이기는 하지만, 솔직히 따로 가이드를 고용해서 상세한 설명을 들은 적은 많지 않았다. 웬만큼 기본적인 것들은 스스로 공부해서가는 게 더 편했고(그 이상의 전문지식이 꼭 필요한 경우도 별로 없었다), 가이드를 썼을 때에도 너무 건성으로 진행되는 판에 박힌 그들의 영어해설이 별로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리신 선생(나이와 경력 등을 고려해서 이렇게 불렀다)은 그야말로 열과 성의를 다해서 해설을 해주었으며, 단순한 관광가이드가 아니라 자신의 일에 대해 전문가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있는 멋쟁이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그야말로 요식행위에 그쳤을 모까오쿠 관람은 오랜만에 진지한 학습과 탐구의 시간이 되었다. 게다가 그의 배려로 일반관광객들에게 허용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20개 가까운 석굴을 친절한 설명과 함께 둘러볼 수 있었으니, 이 어찌 행운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특히 237호 석굴에는 통일신라의 왕자로 추정되는 인물이 그려져 있고, 172호 석굴을 비롯한 여러 곳에 조선고(朝鮮鼓)라 불리는 장구 그림이 있다는 것, 또 148호 석굴의 거대한 와불(臥佛) 뒤에 도열해 있는 72명의 제자 중에는 흑인도 있다는 것 등등 여러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된 건 순전히 특별한 가이드 덕분이었다.
석굴 관람을 계속하는 동안 난 가끔씩 옛 생각을 떠올리며 마음이 불편해졌다. 지금이야 카메라를 들고 석굴 안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만큼 엄격한 통제가 이뤄지고 있지만, 13년 전에 내가 이곳을 찾았을 때만 해도 유적보존을 위한 관리체계는 꽤 허술한 편이었다. 가이드와 함께 개방된 석굴들만을 돌아볼 수 있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당시엔 굴 안에서 사진도 찍을 수 있었고 외국인의 경우에는 가이드들이 석굴 문만 열어준 뒤 밖에서 담배를 피우며 기다리곤 했기 때문에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행동의 자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 바람에 난 석굴 안에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었다. 그것도 플래시까지 펑펑 터뜨리면서!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토록 무지하고 무례한 짓을 할 수 있었는지 나 자신이 이해가 안 된다. 내가 불교미술을 연구하는 전공학자도 아니고, 그 사진을 찍어서 도대체 무엇에 쓴단 말인가? 어차피 찍어봐야 뭐가 뭔지 정확히 구분도 못하는 주제에! 그 시절 나의 치졸한 마음속에는 단지 내가 본 것을 카메라에 담아 영원히 ‘소유’하겠다는 탐욕만이 들끓고 있었던 게 아닐까? 불과 10년 남짓한 사이에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마모되고 훼손되어 사라져가는 인류최고의 문화유산들을 내 눈으로 다시 확인하고 있노라니, 그때 찍은 사진들을 모두 찢어버리고 싶을 만큼 후회가 밀려왔다. 리신 선생은 설명하던 도중 간간히 벽화와 유물을 도굴해간 서구의 소위 탐험가들(?)에 대해 언급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그의 차분한 목소리 뒤에 숨어있는 깊은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일행들 또한 벽화가 통째로 뜯겨져 나가 흉한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흙벽 앞에서 마치 절친한 이웃의 살가죽이라도 벗겨진 것처럼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약탈자들의 만행을 소리 높여 비난하기도 했는데, 나는 그들의 감정에 백배 공감하면서도 나 또한 그 만행의 숨은 공범일 수도 있다는 자책감 때문에 어둠 속에서 홀로 얼굴이 뜨거워졌다.
관람 마감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야 아쉬운 발길을 돌리면서 나는 고마운 마음에 리신 선생에게 저녁식사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일행과 상의한 결과 다른 가이드들의 경우처럼 돈 몇 푼 팁으로 주는 것보다는 저녁식사에 정식으로 초대하는 게 낫겠다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리신 선생이 흔쾌히 응했으므로 우리는 7시쯤 우리가 묵는 숙소 앞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일단 헤어졌다.
리신 선생의 안내로 찾아간 곳은 전통 화궈(火鍋) 요리로 유명한 식당이었다. 리신 선생은 복잡한 메뉴판을 내밀며 나에게 무엇을 시킬지 물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화궈는 팔팔 끓는 육수에 갖가지 재료를 넣어 익혀먹는 일종의 전골 요리다. 그런데 우리나라 전골요리의 경우 대개 들어가는 재료가 정해져 있는 것과는 달리, 중국의 화궈 요리는 수십 가지 재료 중에서 손님이 먹고 싶은 것을 일일이 직접 골라 주문해야 한다. 하지만 간체자로 씌어 있는 복잡한 식재료의 이름을 내 어찌 다 알 수 있단 말인가? 기껏 알아볼 수 있는 건 야시에(鸭血; 오리피로 만든 선지)나 요우차이(油菜; 청경채), 투떠우(土豆; 감자), 요우위(鱿鱼; 오징어) 정도가 전부였는데 말이다. 결국 리신 선생에게 이것저것 물어가며 익숙지 않은 재료는 빼고 비교적 무난해 보이는 것들로 적당히 주문하는 수밖에~~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의외로 야시에였다. 오리피라니? 처음엔 비리지 않을까 좀 망설였지만, 가만 생각해 보니 우리가 즐겨먹는 선지와 비슷하겠다 싶어 한번 시켜봤는데 대성공이었다. 흡사 묵처럼 생긴 네모반듯한 오리선지는 담백하면서도 야들야들하고 쫀득쫀득한 게 소피로 만든 선지보다(소피로 만든 선지는 솔직히 약간 퍽퍽하지 않은가?) 훨씬 맛있었던 것이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는 동안 리신 선생은 밖에 나가서 커다란 바이져우를 세 병이나 사들고 돌아왔다. 세 병이라니! 헉! 그 독한 빼갈을 세 병씩이나? 더구나 우리 일행 중에는 술을 잘 못 마시는 여자들도 끼어있었는데...... 이젠 죽었구나 싶은 마음에 덜컥 걱정이 앞섰다. 중국인들의 무시무시한 술 실력(?)과 막무가내식 음주습관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3년 전 직장동료들과 함께 단체로 중국의 허난성 쩡저우(郑州)를 찾았을 때, 중국인들과의 만찬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술공세에 모두들 사망 일보직전까지 퍼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었던 악몽이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술잔이 몇 순배 돌고나자 리신 선생은 중국인 특유의 호방한 웃음을 터뜨리며 좌중의 모든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술을 권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 중에는 한국어보다 중국어의 비중이 높아졌고, 엉터리 통역 역할을 하느라(사실 내 중국어 실력은 간단한 일상회화를 옮기기에도 벅찰 만큼 형편없었지만) 그의 바로 옆자리에 앉았던 나는 그 융단폭격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되었다. 취중에도 리신 선생은 연신 반갑고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한국말을 계속 더 배우고 싶어도 여기서는 방법이 없습니다. 오래전에 배운 것을 자꾸 잊어버리니까 정말 힘듭니다. 이렇게 가끔씩 한국분들을 만나면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한국어 학습에 목이 마른 중년사내의 엉뚱한 푸념을 들으니 왠지 가슴 한쪽이 숙연해졌다. 나는 그의 나이를 묻지 않았지만, 그의 순수한 열정은 우리 일행 중 가장 젊은 S양의 에너지보다도 더 크고 진지해보였기 때문이다. 학자였기 때문일까? 그에게서는 중국인 특유의 허풍이나 과장을 찾아볼 수 없는 것 또한 더더욱 마음에 들었다. 아마 그런 기분 때문이었을 것이다. 묘한 친근감과 뒤섞인 배려의 감정, 상대의 호의에 최선을 다해 호응해주고 싶은 마음 말이다. 나는 위험한 한계선을 넘어간다는 걸 알면서도 그가 건네는 술잔을 남김없이 들이켰고, 마침내...... 2차로 옮겨간 노천 주점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만취의 대가는 컸다. 필름이 끊어진 탓에 소상히 알 수는 없지만,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의 조각들을 꿰맞춰 보면 리신 선생은 우리를 데리고 노래방을 찾아 둔황시내를 헤집고 다닌 듯했다. 아마 한국에서 온 방문객들과 어울릴 때는 늘 그런 코스를 밟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게 리신 선생의 선택이었는지, 아니면 한국 방문객들의 요구사항이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하지만 불운인지 행운인지 우린 노래방을 찾지 못했고(리신 선생이 안내한 곳은 문을 닫은 상태였다) 결국 새벽 1시쯤 되어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신발도 못 벗고 침대에 쓰러진 것까지는 좋았는데, 목을 쥐어짜는 갈증 때문에 새벽에 눈을 떴을 때 난 문득 어제 대절했던 승합차 기사와의 약속을 상기해내고 머리를 쳤다. 나는 그 기사와 아침 7시에 숙소 마당에서 다시 보기로 예약을 해두었던 것이다. 둘째 날의 목적지는 지질공원과 양꽌(陽关), 위먼꽌(玉门关), 시치엔포똥(西千佛洞) 등이었는데, 지질공원까지 가는 데에만 두 시간 이상이 걸리는 터라 아침 일찍 출발하기로 일정을 잡아놓은 상태였다.
“이런, 정말 낭패가 아닌가? 사람들이 과연 제 시간에 일어날 수 있을까?”
사실은 남 걱정을 하기 전에 내 몸이 견딜 수 있을지 그것부터 문제이긴 했다. 하지만 여행 초반부터 약한 모습을 보이며 전체 분위기를 흐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후들거리는 내 다리를 일으켜 세웠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래도 여행경험이 비교적 많고 이 지역에도 와 본 적이 있는 나의 판단이나 결정을 믿고 따를 것이므로, 내가 먼저 개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일단은 마실 물이 필요했다. 이미 동이 튼 뒤라 사방은 훤했으나, 숙소 밖으로 나가봐도 조용한 거리에는 문을 연 가게가 없었다. 한 30분 가까이 돌아다니다 결국 물 사는 것을 포기하고 돌아왔을 때, 호텔 마당에는 벌써 승합차가 도착해 있었다. 허겁지겁 위층으로 뛰어올라가 사람들을 깨우고, 짐을 챙기고, 부산한 움직임 끝에 일행 모두가 차에 올랐을 때는 이미 1시간 이상 시간이 지난 뒤였다.
“뚜이부치, 쭈어티엔완샹 워먼허헌뚜어져우러(对不起, 昨天晚上 我们喝很多酒了; 미안합니다, 우리가 어젯밤에 술을 많이 마셨어요)”
“뿌용러, 메이꽌시(不用了, 没关系; 괜찮아요, 상관없습니다)”
사람 좋게 생긴 기사는 손을 내저으며 내 사과를 막았다. 대로변의 한 상점에서 겨우 생수 몇 병을 구한 뒤에, 우리를 태운 승합차는 지질공원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차창 밖으로 길게 이어진 밍샤샨의 위용은 전날 보았던 관광지 입구의 놀이공원 같은 풍경과는 사뭇 달라보였으나, 그 경관을 제대로 감상하기에는 간밤에 뱃속으로 들이부은 알코올의 양이 너무도 많았다. 차안에서 복숭아 한 조각과 물 몇 모금으로 쓰린 배를 달래보려 했지만, 모두들 최악의 컨디션으로 죽상을 하고 있었고 몇몇은 심한 멀미까지 했다. 게다가 그렇게 고생하며 찾아간 지질공원은 우리의 노고를 전혀 보상해주지 못했다. “역사 유적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둔황에서 가장 흥미로운 곳 중의 하나일 것”이라는 여행가이드북의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진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고, 피로와 숙취에 지친 모든 사람의 얼굴에는 어두운 실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타인에 의해 준비되고 조직되는 모든 관광이 다 그렇듯이 단체로 투어버스를 타고 정해진 길을 따라 두어 군데를 둘러보며 기념사진이나 찍는 ‘지질공원 투어’ 따위는 애당초 내 입맛에 맞는 게 아니었다. 물론 이곳의 특이한 지형이 지질학적으로는 매우 값진 곳일 수도 있겠으나(투어를 시작하기 전에 입구의 안내소에서 보여준 홍보영화의 내용을 보면 그랬다), 솔직히 여기 오는 관광객 중 전문적인 지질학의 설명 따위에 신경을 쓸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예컨대 유명세로 치자면 지질공원 따위와는 비교조차 안 될 터키의 카파도키아에서도 그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화산재가 쌓여 만들어진 응회암(凝灰巖)이라는 것을 아는 방문객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어떤 장소의 지질학적 가치나 지리적 특성을 따지는 거야 학자들의 몫이고, 일반인들에게는 일단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을 만큼 강력한 포스가 있어야 ‘멋진 경관’이라는 평을 들을 텐데, 안타깝게도 지질공원에는 그런 포스가 20% 이상 부족했다. 그래도 난 혹시나 포토제닉한 풍경사진이라도 몇 장 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 따라나섰는데, 그 또한 꽝이었다. 물론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에 깎이고 패이면서 만들어진 사막 지형 안에는 보는 이의 눈길을 끌만한 형상들도 많았지만, 건조지대 특유의 외계혹성 같은 풍광을 이미 본 적 있는 여행자들이라면 이 또한 그다지 새롭거나 특별하게 여기지는 않을 것 같았다. 예컨대 터키의 카파도키아나 칠레 아타카마 사막의 달의 계곡에 이미 다녀온 여행자가 지질공원을 보고 경탄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지질공원을 나와 둘러본 위먼꽌 또한 공원에 실망한 사람들을 위로해 주기에는 미흡했다. 사실 역사유적을 둘러보는 투어는 역사에 문외한인 일반인들에게는 그다지 좋은 관광 코스가 못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우리 일행은 역사에 대한 관심이나 지식의 수준에서 평균적인 일반관광객들보다 훨씬 나은 사람들이었지만, 그래도 허허벌판에 2천 년 전의 흙무더기 하나만 달랑 남아있는 유적 앞에서 특별히 진한 감동을 느끼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릇 역사 유적을 돌아보는 것이 의미 있고 유익한 여행 일정이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꼭 필요하다. 하나는 철저한 사전준비(관련된 사실과 배경지식을 미리 공부하고 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풍부하고도 집요한 상상력이다. 그런데 후자 또한 전자를 바탕으로 해서만 가능하므로 결국 요체는 사전준비(공부)인 셈이다. 예컨대 한나라 무제(武帝)나 서역을 개척한 짱치엔(張騫), 고대 실크로드의 역사와 교역의 현황, 중국 변방의 군사적 방어시스템과 행정체계, 실크로드 주변에 살던 다양한 이민족 등등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으면 아무리 중요한 유적 앞에서도 상상력이 작동할 수 없고, 결국 단순한 감각을 통해 현재 남아있는 과거의 초라한 잔재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 잔재들은 너무나 초라하고 빈약해서 보는 이들을 좌절시키고 만다.
“에계계, 이게 뭐야? 겨우 무너진 돌무더기밖에 없네.”
이 같은 사태는 세계 어디서나 벌어진다. 그게 고대 그리스의 신전이든, 옛 몽골 제국의 영화를 증명하는 왕궁이든, 사라져버린 마야문명의 도시 유적이든,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성지순례든 간에! 하지만 깊이 있는 사전지식으로 무장한 열성파라면 볼품없는 흙더미를 보면서 옛 시인의 시구를 떠올릴 수도 있고, 다 무너진 성벽 위에서 화려한 옛 도시를 그 어떤 CG 기술보다 훌륭하게 상상으로 복원해낼 수도 있다. 그러니 보잘 것 없는 유적 앞에서는 자신의 빈약한 지식과 메마른 상상력을 탓해야지 엉뚱하게 유적지의 돌멩이에다 대고 비난을 퍼부어서는 안 된다. 사전공부가 부족했다면 그냥 중요한 역사적 장소를 몸소 방문했다는 것, 거기에 자신의 족적을 남겼다는 것만으로 만족하자! 여행자가 방문하는 세상의 모든 장소가 다 눈부시게 아름답고 감동적일 수는 없는 법이니, 그렇게 하는 게 유적지를 찾는 여행자가 지켜야 할 선인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다. 그리고 그 도리를 지킬 자신이 없는 사람이라면 아예 유적지 따위는 찾지 않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위먼꽌에 적잖이 실망한 우리 일행은 양꽌 방문을 포기하고 차를 돌렸다. 사실은 지질공원에 다녀오느라 모두들 아침부터 점심까지 계속 굶었기 때문에 차안에서는 폭동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둔황시내를 벗어나면 외곽지역에서는 그 어디서도 식당을 찾을 수 없었고, 우리는 결국 투어를 모두 마친 뒤 시내로 돌아가 밥을 먹기로 결정했다.
마지막 방문 장소는 시치엔포똥(西千佛洞). 모까오쿠 못지않게 중요한 불교 유적이라지만, 사람들은 이미 지쳐있었다. 어젯밤 마신 술의 숙취에다 별 소득도 감동도 없이 새벽부터 이어진 강행군, 게다가 뱃가죽을 사정없이 조여 오는 허기~~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진부한 얘기를 굳이 꺼내지 않더라도, 이런 판국에 뭘 본들 즐거울 것이며 어떤 설명을 들은들 귀에 들어올 것인가? 아무튼 둔황시 외곽에 거의 버려진 듯 숨어있는 시치엔포똥 석굴은 대낮인데도 찾는 이들이 거의 없어 고즈넉하기만 했다. 석굴 앞쪽으로는 이 일대 사막 지역의 상징과도 호양(胡楊)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는데, 그 중 몇몇은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을 버텨온 듯 나무줄기의 굵기가 보는 이를 압도했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고목이 되어 천년, 다시 목재로 만들어져 천년, 도합 3천 년을 간다는 호양나무 그늘 아래 서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갑자기 사막의 불볕이 따사롭게만 느껴졌다.
둔황의 석굴들 중에서 비교적 초기에 조성되었다는 시치엔포똥 관람은 불과 30분만에 아주 간단히 끝났다. 중국어밖에 할 줄 모르는 젊은 가이드는 우리가 중국어를 못한다는 걸 알고 나자 거의 입을 다물어버렸고(물론 북위, 수, 당 등과 같은 왕조의 이름 몇 개는 말해주었지만), 심하게 훼손된 석굴들을 해설조차 없이 돌아봐야 하는 우리 일행 또한 별 말 없이 발걸음을 재촉했기 때문이다. 볼 만한 벽화가 거의 남아있지 않아서 모두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조금이라도 그림 흔적이 보이는 곳이면 여기저기 손전등을 비춰댔는데, 그러다가 L선생이 어느 굴에선가 기막힌(?) 발견을 한 것이 유일하게 기억나는 사건이었다. 축 처진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그랬는지, L선생은 천정 가까이 자그마하게 그려진 북위시대 부처 모습을 보고 “저거 텔레토비 아냐?”라고 농담을 했는데, 이 바람에 모두들 주린 배를 움켜쥐며 폭소를 터뜨렸던 것이다. 이 일 이후로 L선생은 “시치엔포똥에서 세계 최초로 텔레토비를 발견한” 사람이 되었고, 이 얘기는 여행 내내 모두의 입과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둔황시내로 돌아와 점심 아닌 점심을 먹고 나자 할일이 없어졌다. 밤차를 타고 투르판(土露番)을 향해 떠날 예정이었으므로 저녁까지는 약간 시간이 남아있었다. 갑자기 방향감각과 목적의식을 상실한 우리 일행은 운전기사가 소개한 카펫가게에 가서 잠시 시간을 때웠지만, 엄청난 고가의 실크카펫(방석보다 조금 큰 벽걸이형 카펫의 가격이 1,200만원이었는데, 감촉과 품질만은 내가 지금껏 봤던 모든 카펫 중 최고였다 ㅠ.ㅠ)을 주로 파는 그 상점에서 우리는 불필요한 이방인이었을 뿐이다. 사람들은 가게를 나온 뒤에 다시 시장 골목을 쏘다니기 시작했다. 남는 시간에 둔황박물관을 보자는 소수의견도 있었으나, 유적지 때문에 다운된 분위기를 업시키는 데에는 역시 시장이 최고였던 것이다. 기차에서 먹을 과일과 견과류 등 간식거리도 사고 여기저기 민예품 상점들을 들락거리며 구경도 하고, 둔황의 시장통에는 어울리지 않는 서양식 카페 “오아시스”에 들어가 차도 한 잔 마시다 보니 어느새 기차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투루판으로 가는 기차를 타려면 둔황역이 아니라 180㎞나 떨어진 려우위엔(柳园)역까지 가야했기 때문에 승합차 기사와 다시 요금흥정을 해야 했다. “한궈, 쫑궈, 하오펑요”(韩国, 中国, 好朋友; 한국과 중국은 좋은 친구)와 같은 유치찬란한 중국어로 승합차 기사를 한참이나 설득한 끝에 결국 100위엔에 가는 걸로 합의를 보았다. 우리 일행이 다섯 명이나 되는 걸 감안하면 그다지 비싼 가격은 분명 아니었으니, 나도 불만은 없었다.
모까오쿠(莫高窟)로 들어가는 입구~~
막고굴에서 가장 화려한 외관을 자랑하는 9층 누각~~ 베이따쓰(北大寺)라고도 하는 이 대불전(大佛殿)은 16호 석굴 안에 있는
높이 35.6 m 짜리 세계 최대의 실내불상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것인데, 지금은 막고굴을 상징하는 건물처럼 되었다.
청나라 말기 모까오쿠를 관리하던 왕도사의 부도~~ 그는 장경동(藏經洞)에서 나온 귀중한 필사본 서책들을 서구의 약탈자들에게 팔아넘긴 인물인데, 왜 그의 부도를 모까오쿠 앞에 그대로 세워뒀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수치스럽고 오류로 얼룩진 역사까지도 그대로 보존하려는 노력일까?
위에 있는 세 장의 사진은 13년 전 둔황의 모까오쿠에서 찍은 것들이다. 네가 필름으로 찍은 평범한 사진을 스캔까지 했으니 화질은 보나마나인데, 본문에도 썼지만 이 사진들은 내 부끄러운 과거의 오류를 증명해주는 기록이다. 그때의 바보짓을 반성하는 의미로 여기에 공개한다. 불상의 얼굴이 시커먼 것은 얼굴에 칠했던 동물성 안료(주로 달걀 흰자 등)가 썩으면서 변색됐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래도 이 사진을 보면 불상 뒤쪽의 벽화는 꽤 생생하게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 가보니 상당수의 벽화들이 전보다 더 심하게 퇴색되어 있었다. 솔직히 이 석굴을 찾는 일반 관광객 중 불교미술의 역사에 대한 최소한의 기본상식이라도 갖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냥 유명한 명소니까 찾아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텐데, 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이 귀중한 문화재를 계속 이렇게 공개해야 하는 건지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하는 건 아닐까?(나는 이미 봤다고 이런 말을 하는 건 절대 아니다!) 정말 관람이 꼭 필요하다면 외국의 주요 동굴 벽화들(예컨대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 벽화)처럼 정교한 모조품을 만들어 관람시켜도 될 것 같은데...... 중국 당국이 단지 돈벌이를 위해서 문화재의 지속적 훼손을 수수방관하는 게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위의 세 장 사진은 모두 다 둔황 인근에 있는 소위 "지질공원" 풍경이다. 맨 마지막 바위는 스핑크스의 모습을 닮았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하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하긴 이런 볼거리들에서는 실제 모습이 얼마나 멋지냐보다 거기 붙여진 이름이 얼마나 그럴싸하냐가 훨씬 더 중요한 것 같다. ^^
한나라 때부터 서역으로 가는 관문이었던 위먼꽌 유적~~ 이곳은 중화문명의 최변방이자 실크로드의 주요 통로였다.
둔황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시치엔포똥(西千佛洞)~~ 오른쪽의 거대한 나무가 호양나무이다.
둔황시내에 있는 카펫 공장에서~~ 이곳의 카펫은 양모나 면을 사용하지 않고 100% 비단으로만 짜는데, 그래서 그런지 최고의 품질과 함께 최고의 가격을 자랑한다. ㅠ.ㅠ
둔황시내에 있는 샤저우(沙州)시장의 견과류 노점~~ 과일의 천국답게 갖가지 과일을 말려서 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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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실크로드는 몇번 가본 중국여행중에서 가장 인상깊었습니다. 뭔가 여백이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잘 봤습니다. ^^
항상 관심 가져주셔서 거듭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