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의 문수산에서 바다를 건넌 혈맥은 덕정산을~~~
백운산에서 갈라진 한남정맥의 또 한줄기는 서쪽으로 그 방향을 틀어
김포까지 달려가 김포평야를 만들어내고 살찌우고 있는 것이다.
김포의 문수산에서 바다를 건넌 혈맥은 덕정산을 소조산으로 삼은
고려시대의 대 시인이자 문장가였던 이규보 선행의 묘가 만들고 있다.
덕정산 종주후 풍수지리에 의해 이규보 선생의 묘을 찾은 후
다시 진강산 산행을 하며 역사는 그 후손들에 의해 다듬어지는군아..
백운 이규보
1.생애:
시대배경: 고려 무신의 난은 1170년 8월 국왕의 보현원 행차를 틈타 정중부ㆍ이고ㆍ이의방 등 부신들이 그동안 쌓여 왔던 불만을 폭발 시키며 문신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무신들이 정치 권력을 장악하고 정치 운영을 좌지우지하였다. 무신의 난 직후에는 반란 주도자들 사이에 치열한 권력 다툼이 벌어져 ,먼저 이고ㆍ이의방 등이 제거되었다. 이어 정중부ㆍ경대승ㆍ이의민이 차례로 권좌에 올랐다. 이들 무인 집권자들의 성향은 일정하지 않았고, 그들 간에 갈등 또한 심각하였다. 더구나 조위총ㆍ김보당 등이 무인 정권에 대항하여 왕정을 회복하려는 봉기를 일으켜 무인 정권은 몹시 불안정하였다. 그러나 1196년 최충헌이 이의민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뒤로는 정국이 안정되었으며, 그 이후 무인 집정의 자리는 최우ㆍ최항ㆍ최의에게 차례로 계승되었다. 그러다가 1258년 최의가 정변으로 살해당하자, 새로운 집권자로 김준이 등장하였다. 그 후 임연과 그 아들 임유무에게 차례로 권력이 넘어갔다가 마침내 원나라의 압력으로 임유무가 제거됨으로써 왕정이 회복되어, 무인정권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이규보(1168-1241)는 바로 무신정권의 한 가운데서 생의 가장 왕성한 활동시기를 보낸 무신정권기의 사람인 것이다. 특히 1196년부터 최씨 정권은 향후 60년간 장기 집권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실무를 맡길 새로운 문인지식층을 보다 적극적으로 등용시켰던 바, 이규보는 그때 발탁된 “신진사인”의 대표적인 한 사람이다. 그는 유교적 교양과 문학적 역량을 쌓아 국가를 위해 영예롭게 역량을 발휘해야겠다는 시인으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고 관인으로 진출하였으나, 최씨정권의 지배 구도하에서 “능문능리”의 실무자 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정도로 생을 마칠 수박에 없었다. 소년시절: 이규보는 “아홉 살부터 글 읽을 줄 알아, 시서육경ㆍ제자백가ㆍ사필의 글로부터 유경벽전ㆍ범서ㆍ도가의 설에 이르기까지 비록 그 깊은 뜻은 궁구하지 못했지만, 그를 섭렵하여 좋은 글귀를 따서 글 짓는 자료로 삼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 스스로 회고한 바 있거니와, 14세에는 최충의 문헌공도로 공부하면서 두각을 나타내었던 점으로 그의 소년시절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6세,18세,20세에 사마시에 응시하여 세 번 모두 낙방하고 말았으니 23세가 되어서야 겨우 동진사에 합격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연이어 대과에 응시하지 않았다. 다음해인 24세에는 부친상을 당하여 천마산에 살면서 백운거사라 자칭하고 백운거사 어록과 전을 지었다. 그리고 26세 되던 해 4월에 『구삼국사』를 구해 보고 장편 서사시 「동명왕을」지었다. 이 작품에서는 이규보의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이규보는 시인로서의 사명감을 지니고서 문필력으로 국가를 빛내려는 원대한 포부를 품은 채 시문에 열중하여 수련에 수련을 거듭하며 소년기, 청년기를 다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나이 서른이 되도록 오히려 한 군현의 직임도 얻지 못하였다. 그는 가슴 깊이 품은 시인으로서 이상과 포부, 현실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점차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외롭고 괴로운 심정과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온갖 상황을 시로 읊고 술을 마시고 방랑하며 나날을 보냈다. 아마 다음 문장으로써 이규보 당시에 심정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남쪽의 어떤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때마침 강을 건너는 배가 두 척이 있었다. 두 배는 크기나 사공의 수도, 배에 탄 사람과 말의 수 등도 거의 비슷하였다. 그런데 조금 후에 보니, 저 쪽 배는 나는 듯이 물을 가르며 벌써 언덕에 닿았지만, 내가 탄 배는 아직도 머뭇러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래서 그 까닭을 물었더니 배 안에 있는 사람이, “저 배는 사공에게 술을 먹였기 때문에 그들이 있는 힘을 다하여 노를 젓는 거지요.”하였다. 나는 너무도 부끄러워 잠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조금 후에, “이 조그마한 배가 가는데도 오히려 뇌물이 있고 없음에 따라 더디거나 빠름에 앞뒤가 있거늘, 하물며 벼슬을 다투는 마당에서랴. 돈이 없는 나의 처지를 생각하면 오늘날까지 하급 관직 하나도 얻지 못한 것이 오히려 당연하구나.”하였다. 이것을 기록하여 뒷날에 참고로 삼으려 한다.』--(주뢰설) 그자 32세 되던 해, 최이의 초대를 받아 시를 지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6월에 전주목사록이 된 것이 관인으로서의 첫 발을 뗀 것이었다. 그러나 탐욕스럽고 방자한 통판낭장에게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모함을 받았고 겨울 12월에 파직되어 전주를 떠나게 되었다. 이규보가 40세 되던 1207년 이규보의 관직생활은 초대 시험에서 일등으로 다시 시작되어 한림원에 보직되었다가 이듬해에 정식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46세 되던 때, 시로써 최충헌을 감동시켜 탁용될 기회를 얻었다. 아마도 이규보는 시문을 통해 모든 것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을, 시문의 수준이 높아갈 수록 현실적 지위도 자연스럽게 높아질 것을 믿고 자신의 문학적 성숙에 정열을 쏟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현실에 적응하는 제스처를 달리해서 적극적 진출을 위해 노력했지만, 50세에 우사간지제고를 거쳐 「한림별곡」의 호칭대로 좌사간에 임명된 때는 어느덧 그의 나이가 51세였다. 그러나 그도 몇 차례의 탄핵을 받아 파직 당하기도 하고 유배되기도 하는 시련을 겪는다.1232년에 최씨 정권은 그 다음해 몽고의 침입이 시작되자 민족의 사활을 걸고 대결해 나가는 쪽으로 방향을 정하고 강화도로 천도했다. 이규보는 강화도로 천도한 다음해 66세의 나이로 정승의 직위에 올랐지만 실질적인 힘은 없는 명목상의 재상에 불과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시인으로서의 포부가 남달랐던 만큼 관인으로 진출해서도 문필을 담당하는 직책에 있을 때나 일정한 직책이 없이 관계만을 보유하는 산관의 처지에 있을 때나 외교문서를 맡아 작성하는 일은 한결같이 온 마음을 다해 성실히 수행하였다. 강화도에서 대몽항쟁을 하는 시기는 그의 문필이 가장 현실적인 위력을 발한 시기였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재상의 지위에 오르는 출세를 했건만 사실은 무신 정권에 자기의 재능이 이용당하고 만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이규보가 69세부터 두 번씩 나이로 벼슬에서 물러나려고 하였다. 74세 되던 7월에 병이 심해져 9월에 생을 마쳤다. 그가 병으로 앓아 눕자 최이는 이름난 의원을 보내 분병과 치료를 하게 하였고 이규보의 문집 53권을 모두 가져가다 공인들에게 새기도록 하여, 이규보가 살아 생전에 한번 보이고 마음을 위로해 주려 하였으나 공역을 미치지 못하여 그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꿈속에 미녀를 만나 사랑을 나눔 (夢色詩) 이규보(李奎報) 꿈속에서 있었던 정사를 읊은 시들이다. 이중 이규보(李奎報)는 스스로 삼마시(三魔詩)를 쓰고 그 중에서도 색마시(色魔詩)를 수위에 둘 정도로 호색 적인 면이 있었던 시. 그의 말년의 작품 중 '몽여미인희이제지(夢與美人戱而題之)'는 꿈속에서 만난 미녀에 대한 정회를 읊은 것이다. 我年七十四 久斷衾中事 아년칠십사 구단금중사
云何夢魂中 偶與美人戱 운하몽혼중 우여미인희 ?髮?烏雲 明瞳注秋水 숱만흘 진(?+眞) 휘늘어질 타(享+單) 진발타오운 명동주추수 豈惟以心挑 摩撫袖中臂 기유이심도 마무수중비 佯若露연頰 未幾開笑齒 연(幷+頁)얼굴예쁠연 양약로연협 미기개소치 ?反邀我愛 解作百般媚 이에 내(?+西) 내반요아애 해작백반미 嘗謂夢覺同 伊此例生死 상위몽각동 이차예생사 我今已斷慾 夢裏何未爾 아금이단욕 몽리하미이 因恐比所熏 淸淨一心地 인공비소훈 청정일심지 口口不如今 妄意自疑耳(두 자없음) ? ? 불여금 망의자의이 飜思是器界 一切皆夢寐 번사시기계 일절개몽매 摩登伽亦夢 留汝者是誰 마등가역몽 유여자시수 況以夢中夢 而疑眞與僞 황이몽중몽 이의진여위 毋謂此眞心 生死或有異 무위차진심 생사혹유이 내 나이 일흔 넷이니 방사를 끊은 지 오래인데 어찌해서 꿈속에서 우연히 미인과 희롱했을까 아름다운 머리털은 휘늘어진 검은 구름이요 밝은 눈동자는 가을 물을 부은 듯 어찌 마음으로만 도전했으리요. 소매 속 팔뚝도 어루만졌구나. 거짓 노기 띤 안색 드러내는 듯하더니 얼마 안 되어 웃는 이를 보이다. 이에 오히려 나를 맞아 사랑하여 온갖 아첨을 능숙하게 해댄다. 꿈과 깨임이 같다 할 수 있다면 이것으로 생사의 한 예로 삼았으면 내 이제 욕심을 끊었거늘 꿈속에서는 어찌 아직 못하나 인하여 두럽구나 이것이 빌미되어 청정한 마음 바탕을 불태울까 (두 글자 없음) 지금만 못하다. 망년된 생각에 스스로 의심할 뿐이다. 뒤집어 생각하면 이 세상살이 일체가 모두 꿈이요 잠자리이니 마등가녀(摩登伽女)가도 역시 꿈이었으니 너를 머무르게 한 이가 그 누구냐(능엄경에 보인다) 다만 이 세상 경계를 해탈할 수 있다면 (세상 경경들 해탈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이 꿈과 같다) 한 바탕의 졸음을 깬 것과 같으리라 하물며 꿈속의 꿈을 가지고 진짜냐 가짜냐 의심하겠느냐 이 마음을 참이라고 이르지 말라 생과 사가 혹시 다를지도 모른다네.
明日夢又與美戱寤而又作(명일몽우여미희오이우작) (다음 날 꿈에 또 미인과 희롱하고 깨서 또 짓다) 我今與家婦 異寢已幾年 아금여가부 이침이기년 汝幸我孤宿 頻來媚嬌姸 여행아고숙 빈래미교연 人間遮箇事 已悉於前篇 인간차개사 이실어전편 胡不信受之 入夢踵相連 호불신수지 입몽종상연 革囊雖見試 灰心寧復燃 혁낭수견시 회심녕부연 吾聞入道者 魔必先妨? 기전 오문입도자 마필선방전 汝豈此類歟 去矣勿稽延 여기차류여 거의물계연 내가 이제 집 사람과 잠자리를 달리한 지가 이미 몇 해 인데 너는 나의 외로운 잠을 꾀어 자주 와서 교타로 아첨하는구나. 세상살이 저러한 일을 앞 시에서 다 말했거늘 어째서 믿어 주지 안이하고 꿈에 돌되 연이어 쫓느냐 가죽주머니가 된 몸 비록 시험당해도 재가 된 마음이 어찌 다시 불타겠느냐 내가 듣건대 도에 든 사람에게는 마귀가 반드시 먼저 단심을 방해한다니 너는 어쩌면 이러한 무리이냐 가거라 머리를 늘어뜨리지 말고 그가 임종을 반년 정도 앞두고 이런 꿈을 꾸었다는 점이 실로 이채롭다. 이것은 자신의 마음을 만족시켜 주지 못했던 것에 대한 집념의 재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첫댓글 수고 하셨네요 좋은시간 되세요
삶은 하룻밤 묵어가는 여인숙같은것이라고.... 이루지못한 집념의 재현이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다 버리고 가는것을.................글 잘보았습니다....오늘의 양식이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