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입니다. 그러니까 산상수훈이 설파되는 자리에도 있었을 것이고 그는 산상수훈에서 예수님(형님)이 말씀하셨던 맹세하지 말라는 말씀이 이런 의미였구나 하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고 그것을 우리에게 확인을 시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5장)
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12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받음을 면하라
너희는 욥처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알게 되기까지 너희 자신을 위해서 살 수 있는 자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너희 인생을 덮으시고 너희를 목적지까지 끌고 가는 과정 중에 있기 때문에 너희는 너희 자신을 위해서 살 자격도 능력도 없는 자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맹세하지 말라는 의미예요.
(로마서 14장)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이것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하신 맹세입니다. 이 하나님의 맹세가 지금 우리의 삶에 실행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임을 계속 확인당하면서 살게되는 삶의 여정 가운데서 성도는 하나님의 맹세의 내용들을 즐거워하고, 자랑하고, 이웃과 나누면서 증거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대해 분명한 ‘예’와 ‘아니오’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야고보서 5장)
13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고난, 병듦, 아픔 절망의 아고의 삶을 살아내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자기 맹세가 우리 성도에게 실행되고 있는 과정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장로를 불러 기도하라는 겁니다. 장로를 불러서 기도 한다고 육의 병이 낫고 문제가 해결됩니까? 그런 뜻이 아니거든요. 기름을 바르고 기도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맹세의 내용 곧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우리라는 것을 말씀을 통해 함께 나누라는 겁니다. 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눌 수 있을 때 우리는 마침내 어던 고난 가운데서도 찬송할 수 있는 자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은 얼핏 간단한 것 같지만, 여러분 인생 전체에서 실행되는 하나님의 맹세는 결코 만만한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인생이란 고난을 통해 어떤 사람들은 절망하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겠지만, 성도들은 그런 고난 가운데 찬송하게 되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기도는 말씀을 나누는 거예요. 프로슈코마이... 하나님의 말씀이 그런 현실 속에서 소망으로나누어지고 소망 가운데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찬송할 수 있게 되는 것..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맹세입니다. 이 맹세를 모르고, 또 이 맹세가 자기 인생에 실행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버려두신 자입니다.
본문을 좀더 살펴보겠습니다
야고보서 5:13-16
13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16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본문에 보면 고난당하는 자의 기도와 즐거워하는 자의 찬송이 나옵니다. 그리고 병든 자를 일으키는 믿음의 기도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구원과 죄 사함이 나옵니다. 그럼 이 믿음의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면 기도이지 믿음의 기도는 무엇일까요? 15절에 보면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한다고 되어있는데, 이런 내용을 가지고 종교인들이 사기를 많이 칩니다. 요즘 시끄러운 만민중앙교회 이재록이 교회를 그렇게 키운 것도 그런 병 고침 때문이에요. PD수첩에 보니까 별의 별게 다 나오더라고요. 이재록이 기도하면 없던 쌍꺼풀이 생기고... 무좀이 낳고 ㅎㅎ 거기 모인 사람들은 성경을 전부 이재록이 말씀으로 들어요 성경을 읽고 들을 눈과 귀가 없으니까 이런 것을 데살로니가 후서에서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거짓 것을 믿게 하셨다고 하는 거에요 그게 심판입니다 (살후2:9-12) 이재록이 뿐 아니라 세상교회 대부분이 그렇게 예수를 믿는 게 아니라 목사를 믿습니다. 그래서 목사란 직업이 참 위험한 거에요
성경을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말씀을 자기 목적에 이용하는 것을 두고 ‘하나님의 저주’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라는 그 저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성상 그리할 수밖에 없는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어떤 선택이나 행위도 나 중심으로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성경 안에서 예수라는 진리를 읽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진리의 영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그들만 문자 층 밑에 숨어있는 진리의 층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에 찾아진 사람들은 부득불 그 복음의 진리를 전할 수밖에 없는 자가 됩니다. 그들이 운명공동체로서 유기적인 교회, 같은 통점을 가진 한 몸의 교회입니다. 병든 자가 있으면 장로를 청해서 기도하라는 말씀이 그런 뜻입니다. 너희는 같은 통점을 가진 유기적 한 몸인 것을 확인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인간은 기도 하면서 삽니다. 예수를 믿든지 부처를 믿든지 삼신할매를 믿든지 신적 존재를 향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빕니다. 무신론자라 할지라도(무신론자는 없지요 자기가 신이니까) 아침에 눈을 뜨면서 하루의 행운과 안녕을 기원하는데 그게 기도입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아침부터 재수 없는 사람이 찾아오면 소금을 뿌려요. 그렇게 액운을 막고 싶은 겁니다. 그런 게 다 기도에요
모든 인간은 자신의 유익과 행복을 위해서 신을 찾습니다. 그러니까 그 신은 자기가 조작한 자기를 위한 신이에요. 자기를 부정하는 신은 아예 멀리 하죠. 대표적인 사건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한 사건입니다. 그분이 세상에 있는 이상 자기들의 어둠이 드러나니까 (요1:1-14)
이렇게 신에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빌고 치성을 드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안에 있는 부정하고 더러운 것들을 깨끗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할머니 어머니들 보면 치성드릴 때 일단 목욕 재개를 하고, 다음엔 제물을 준비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교회에도 일천번제도 하고(빈손으로 오면 안되지요) 별미헌금이란 것도 생겼더라고요. 세상에 대한민국 하나님같이 돈을 좋아하는 하나님은 없습니다 ㅎㅎ 옛날 할머니들도 장독간에 빌면서 하다못해 물 한사발이라도 떠다놓고 빌어야 응답이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
자 이런 종교성에서 나온 신학이 성화론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필요한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나에게 있는 더러운 것부터 제거해야 한다는 겁니다. 생각도 행실도 깨끗해야 하나님게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가 한 때 교회에 흰 옷 입는 것이 유행일 때도 있었어요. 예전엔 부활절 행사에 보면 다들 흰 한복 입고 그랬거든요 특히 부흥사들 흰색 양복에 백구두 신고 할렐루야~
교회에서 거룩이 너무도 오해되고 왜곡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성수(聖守)(거룩하게 지킴)입니다.
주일 성수, 그리고 특정 시공간의 거룩화.. 흔히 세상교회에서 그러잖아요 기도발이 새벽에 제일 잘 듣는다고 특별한 시간과 날을 거룩화 하는 거예요. 같은 물건일지라도 예배당 안에 두면 성구가 됩니다. 목사나 성가대가 입는 가운은 성의입니다. 목사나 성가대는 왜 꼭 가운을 입어야 하죠? 왜 일반 교인들과 구별을 하냐고요? 지붕에 십자가가 선 예배당은 거룩한 곳이고 그 중에서도 강대상 위는 더 거룩한 곳입니다. 지성소? 예전에는 여자 교인들 거기에 못 올라갔어요. 기껏해야 꽃꽂이나 하지... 이런 모든 것들은 다 유대교에서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들의 종교적인 아이디어를 총합한 것이 유대교라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제가 이땅의 교회들을 대한 유대교라고 하는 거에요
이런 사고의 연장으로 믿음의 기도 역시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한 종교 행위로 생각을 합니다. 만일 믿음의 행위가 그런 것이라면 예수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구별이 없습니다. 다른 종교인들이 오히려 그런 종교행위엔 더 열심을 냅니다. 이슬람 교인들은 천국 가기 위해서 목숨도 버려요. “알라후 아크바르!” 폭탄테러 하면서 외치는 마지막 기도란 말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가 얼마나 이교화 되고 변질되어 있는가 하면 모두 나 중심의 하나님, 나를 위한 하나님, 나의 죄를 씻어주는 예수 십자가, 죽어도 내가 영원히 사는 부활 영생인데, 이 모두의 중심에 ‘나’가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상섬김을 믿음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곳이 교회요 목사입니다. 이천년의 신학이 그런 인본에 바탕을 둔 인간들의 신관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개혁했다는 교회가 그런 것을 진리로 가르치고 있단 말입니다. 웃기는 게 기도도 평신도가 하는 기도보다는 목사가 하는 기도가 영발이 더 센 줄 알아요. 그래서 교인들이 개업하면 목사를 부르지요 자기 사업에 축복해 달라고 그럼 사업 망하면 그때도 목사 불러야지요 폐업 축하 해달라고.. 그래야 믿음 있는 신자 아닌가요?
자 이렇게 믿음의 기도와 종교인의 기도가 어떻게 다른지 하나씩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에 보면 믿음의 기도가 병든 자를 구원한다고 되어 있어요. 이런 구절 때문에 아파도 병원 안가고 이재록이한테 기도 받다가 죽은 사람도 있답니다. 방송에 나와요 그게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13절)
고난당하는 자는 굳이 신자가 아닐지라도 저절로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천지사방에 기댈 데가 없으면 마지막으로 신을 찾죠. 하다못해 무당을 찾거나 대구에서 유명한 팔공산 갓바위라도 가서 빌어요. 그래도 효과 없으면 신을 원망합니다 욥의 아내처럼 이게 자기사랑 자기숭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에요
이 구절을 문자대로만 읽으면 고난 당할 때 병들었을 때 하나님을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는 의미로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병이 낫지 않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건 믿음이 없어서 그런 거라고 하잖아요 하나님은 병 고쳐주고 문제 해결해 주고 싶어서 안달인데 인간들이 믿음이 없어서 의심이 많아서 응답을 못 받는다는 겁니다. 부흥회 가면 젤 많이 써먹는 말씀이 그거지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이나 질병이나 행복 불행 그런 인생문제 해결에 대해 관심이 없어요. 하나님의 관심은 자기 사람들에게 생명 주시는 일, 곧 그리스도 안에서 새피조물로 완성되는 그 약속에만 전능하신 분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자기목적을 위해 성경에서 방법론을 찾는 것을 성경은 탐심이라 하고 탐심은 죄라고 하는 거에요.
이스라엘의 우상숭배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들을 얻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도 섬기고 바알 산당도 지었습니다. 자기들보다 문명이 발달한 가나안 원주민들의 신앙을 좇아간 거에요. 당시는 농경시대였기 때문에 농작물을 많이 수확하고 가축이 새끼를 많이 얻는 것이 복이었습니다. 그런 다산 문화 때문에 바알 신당에선 제사를 드릴 때 남녀의 성행위도 종교행사로 벌어지는 거에요 비를 내리게 하려고... 이런 것이 고대 농경사회에 있었던 제사 의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시 그런 인본의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에게 모세를 시켜 노래를 지어 부르라고 했습니다 니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싫어하는지...
그런 이스라엘의 역사나 오늘날 새벽부터 교회에서 주여 삼창하는 것이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인간들이 원하는 것은 모두 같습니다. 그래서 수천 년이 지나도 유대교의 한계에서 조금도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언약의 하나님 대신 유대교를 믿도록 내버려 두신 겁니다. 그런 선악과 먹은 아담의 탐심이 어떤 결과를 가져 오는지 자기 사람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해 이스라엘의 역사가 있는 거에요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를 한 이유는 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가 아니에요. 그들은 나름 열심을 다해 율법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다만 그들은 율법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몰랐던 거에요 바꾸어 말하면 율법을 온전히 지켜 완성하실 분이 누구인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지키지도 못할 율법을 자기 백성에게 주셨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율법의 문자대로만 지키면 복을 주실 거라고 믿은 겁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이 율법을 지킨 노림수는 그런 종교행위를 통해 하나님에게 얻어낼 것이 있어서 였지 하나님 자신을 사랑해서 그런 게 아니었단 말입니다. 결국 그들이 섬겼던 것은 바알과 맘몬이었다는 것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함으로 드러나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 교회들이 섬기는 하나님도 다르지 않습니다. 온통 기복주의 번영신학에 빠져 헤매는 게 대한 예수교니까.. 그래서 예수께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맘몬)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신 거에요. 우리 성경에는 재물이라고 번역이 되어있는데 이것은 원래 ‘맘몬’이라는 재물의 신입니다. 이스라엘이 바알과 아세라 몰록을 섬긴 것이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교회에서 주여 삼창을 하면서 복을 비는 것이나 하나도 다를 게 없어요. 이 세상 역사는 세상 끝날까지 반복되는 것입니다. 세상 본질은 절대 변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는 기도는 그런 병고침이나 고난의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한 기도가 아니에요 암에 걸려서 기도원 가고 안수받아 낫아도 결국 죽어요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 살리셨잖아요 그 나사로 다시 죽습니다. 여러분 지금 형편이 어렵고 여런 문제들이 있어서 기도했는데 로또 한방에 문제가 다 해결됐다고 칩시다 그 사람 그 돈 때문에 예수 안 믿습니다. 돈을 이기는 사람은 없어요 자크엘룰이 그랬나요 돈을 이기는 방법은 하나 뿐이라고 그냥 내다 버리는 것...
본문에서 말하는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는 기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그분의 다 이루심을 다시 확인받고 누리는 것을 기도라고 합니다. 기도라는 단어 프로슈코마이는 ‘무엇을 향해서 구하다’라는 뜻인데, 예수님은 우리더러 무엇을 구해야 할지도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하라.. 하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디를 향해 무엇을 구해야 할지부터 알고 구하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기도는 그런 무지한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기도가 아니란 말입니다. 다시 말해 기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열심을 내서 구하면 주실 거라는 말이 아니에요 불교처럼 무릎이 다 나가도록 삼천배 하면 소원 들어주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니까요 구하고 두드린다고 열리는 세계가 아니에요 잠도 안자고 밥도 굶어가면서 두드린다고 들어주는 하나님 아니에요 하나님은 자기 약속에만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에요 정말 구하고 두드리고 찾아야 할 것은 따로 있는데 자꾸 엉뚱한 것을 구하고 찾는 게 죄란 말입니다(하마르티아. 표적이 잘못되었다는 뜻) 그런데도 그렇게 죄 짓도록 부추기는 게 세상 교회들이지요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기도의 내용들은 그 속을 들추어 보면 모두 자기 사랑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고 하거든요 그럼 주도 사랑하고 나도 사랑하면 안됩니까? 오늘날 기독교가 바로 이렇습니다.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니까 저를 사랑해주시고 제가 원하는 것도 들어주세요.. 이게 하나님과 거래하겠다는 거지요 그런 노림수에 하나님이 속으시겠습니까? 당연히 아니죠.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것들은 이방인들(약속밖에 있는 자)이 구하는 것이고 너희는 그의 의와 그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게서 우리로 하여금 그의 의(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자로 또 너희들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 내시겠다는 일방적인 선언인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에 기록된 언어들은 표피적으로 읽어선 안되는 거에요 예를 들면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정신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럼 이 말씀의 진의를 모르면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율법을 지킨 자가 되려고 하지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자기가 율법을 모를 때는 살았었는데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어느 인간도 율법행위로 의에 이를 자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나 외에 어느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죄인이란 불편한 진실부터 알아야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누굴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한분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살아날 수 있는 것이 죄의 권세 아래 갇힌 인간의 현실이란 것을 알게 되는 것이 기도의 시작이란 말입니다. 그런 불가능한 죄인이 구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긍휼, 불쌍히 여기심 밖에 없는 거에요 그게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거반 죽은 자에게 자비를 베푸신 분이 이땅에 이방인 사마리아인으로 오신 예수님인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받은 자들은 자기가 누굴 사랑할 수 있는 자가 아니라 오직 그분의 무조건 적인 은혜 일방적인 사랑을 받아야 산존재가 된다는 것을 알고 그 이름 앞에 마침내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하나님게 영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몇 개 개척하고 수천억짜리 예배당을 짓고 장로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라 불가능한 죄인이 예수 이름 앞에 항복하고 그 이름만 높이는 것 그것이 창세전 하나님이 약속하신 은혜의 영광에 참여된 성도의 찬송인 것입니다.
영원 전에는 죄도 사망도 없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완료된 하나님 나라는 눈물도 없고 사망도 없다고 하잖아요. 창세 전의 어느 한 시점에서 하나님이 창조를 시작하셨는데, 그 하나님의 목적대로 세상과 역사가 진행되고 이 역사가 끝나는 때에 시작과 끝이 붙어버리면 다시 영원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죄, 사망 구속 이 모든 것은 다 한시적이란 얘기에요. 그럼 하나님이 왜 이런 것들을 시작하시고 허락하셨을까요? 로마서에 보면 한 사람 아담을 통해서 죄가 들어오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을 세상 속에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첫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인 오실 자 예수가 함께 창세전 하나님의 언약(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들이 완성되는 것,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하늘적 존재들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 세상 속에 세상과 구별된 믿음의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지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만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만 무엇을 구해야 하는 지를 아는 거에요 그들에게 예수님은 너희들이 내 이름으로 구하는 모든 것을 다 주시겠다고 하신 겁니다. 그렇게 기도는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귐이며 누림이에요
예수님은 그 일을 위해 이 땅에 죽음을 심으러 오셨습니다. (죄인이 죽는 것은 그냥 죽은 자가 목숨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생명이 있는 분의 버림이에요 그것을 언약의 죽음 다나토스의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 죽음 안에서 자기 사람들을 진리로 완성되게 하는 죽음이에요. 이렇게 진리로 완성되는 이 죽음 안에 부활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활장이라고 하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자신은 날마다 죽는다고 한거에요 그 죽음 안에 예수의 생명도 나타나기 때문에 (고후4:10-11)
이렇게 기도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내가 있고 그 언약이 작동하는 현실을 살고 있음을 확인하는 겁니다. 우리는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조차 모르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가 기도할 것을 가르쳐 주셨을 때, 다시 말하면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셨을 때, 내가 그분과의 관계 안에 있음을 알때 비로소 나의 존재 목적을 알게되는 것이 믿음의 기도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십자가라는 창으로 나와 세상을 보게 되면서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십자가만 높이고 찬송하게 되는 것이 성도의 기도입니다.
그런다고 우리가 다른 기도를 안 하느냐..? 기도해야지요. 그런데 그렇게 나를 위한 기도를 하면서 나는 절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존재가 맞구나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고백하게 되고 그분의 은혜와 용서 그 자비만으로 부족함이 없는 자리로 가게되는 것이 기도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병이 낫는 이야기를 하다가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하면서 죄 사함과 용서에 관한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일으키시리라’가 ‘아나스타시스(부활)’입니다. 기도의 종착지는 그 생명의 부활, 곧 예수님의 다 이루심,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늘과 땅의 통일입니다.(엡1:10)
우리가 그동안 워낙 기도의 개념을 잘못 알고 있었지요 기도는 한마디로 자신의 무능함을 폭로당하는 겁니다. 자신의 불가능함과 무가치한 죄인인 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면서 주의 공로만 들고 나가는 것을 기도라고 합니다. 조금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전적 무능함을 알기에 기도하는 거에요 나의 부족한 것을 채워달라는 게 아닌 거에요
교회에서는 기도에 대해서 보통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는 불가능을 가능케 한다.. 기도는 만사를 형통케 한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를 절대 외면하지 않으신다.. 기도하는 집안의 자손이 잘못되는 법이 없다.. 조지 뮬려는 평생 동안 오만 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다.. 이런 얘기를 자꾸 듣다보니 기도 만능주의 알라딘의 램프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문제 해결의 수단이나 방법으로 인식하고 액운을 사전에 방지하는 부적 정도로 알기 때문에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 수시로 기도원을 찾고 새벽 제단을 쌓자하고 (예수님께서 영단번의 제사로 이미 다 이루셨는데 왜 자꾸 제단을 쌓는다고 하는지 왜 교회를 성전이라 하는지 모르겠어요), 철야 기도, 금식기도 성전건축 기도, 보좌를 흔드는 기도 이런게 다 하나님께 행패부리는 거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기도가 아니란 말입니다 또 이런 내용을 가르치는 책이 기독교서적 베스트셀러 입니다. 이땅의 기독교 수준이 참...
양복 입은 무당들이 교인들을 대신해 굿판을 벌여주는 곳이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종교행사가 신나고 재밌으니까 그런 굿판에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여기에 이재록이나 조용ㅇ 이나 김삼ㅇ처럼 능력의 종이라는 소문이 나게 되면 복채를 싸들고 몰려 갑니다. 그런 주의 종들을 만나려면 헌금 말고 따로 예물을 준비해서 만나야 해요. 따로 만나서 사진 한 번 찍고 하는데 기본이 오십 만원, 백만 원 이렇답니다. 그렇게 예물을 바치는 날이 되면 줄을 서서 바치는데, 그거 하려고 빚을 내기도 한답니다. 투자인 거죠. 백만 원 내면 천만 원 돌아온다고 가르치니까 그래서 워낙 들어오는 돈이 많으니까 비서실 직원들이 한 방 가득 앉아서 돈 세는 기계로 돈을 세고 포장해서 가지고 가더라고요. 이게 계시록에서 말하는 귀신의 처소 부정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에요 오늘날 기도가 기독교가 이렇게 변질되었습니다. 기독교 인구가 수천만이고 교회가 수십만이면 뭐합니까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믿고 있는데 그렇게 다들 집단자살하는 게 땅의 현실이에요
한가지 더 세상 교회들이 기도를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하는 성경이 히스기야의 기도입니다. 열심히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목숨을 연장해줬다는 거죠. 여러분 아시다시피 히스기야 다시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살리신 것은 목숨 연장에 뜻이 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실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거에요 그리고 죽은 나사로 예수님이 불러내셨을 때 아마 속으로 투덜거렸을 거예요. 잘 쉬고 있는데 예수께서 세상으로 불러내셨으니까 인생 다시 살게 된 나사로 살짝 기분 나빴을 수 있어요
이렇게 교회가 사람들에게 성경까지 인용하면서 욕망을 펌프질 하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이 교회 출석이나 여러 가지 종교 활동에 열심인 이유는 그런 노림수를 믿음으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자기와 자기 가족을 지키는 수호천사이고, 그들에게 성경은 예수 이용 설명서에 다름 아니에요 그렇게 교회생활 하는 것도 죽은 이후에 극락을 보장해주는 보험하나 들어두는 거에요 바울은 이런 종교인들을 십자가의 원수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늘 내가 하는 말, 십자가 지신 예수의 주되심, 오직 십자가 은혜 이 말을 반복하는 것이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제일 안전하다는 거에요 거기에 사람의 지식이나 열심히 끼어들 수 없다는 겁니다
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하나님께 잘 보이려고 율법 행위 종교행위를 하는 자들이 개다 그런 행악을 주의하라는 말입니다.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자기 목적을 위해 율법도 지키고 착하게 살고 할례도 행하고 절기를 지키는 모든 것들, 요즘 말로 하면 주일 성수하고 십일조 하고 목사 잘 섬기고 성경공부 열심히 하고 구제 선교하는 것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땅의 일은 특별한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 즉 자기를 위한 종교적 열심을 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정욕이지요 이것이 하나님 앞에 행악하는 것이고 십자가의 원수라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자기를 믿지 않는다는 뜻인데 더 나은 자기를 위해 더 행복한 인생을 위해 예수믿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바라고 그분께 구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어서 이 몸을 벗고 약속하신 하늘의 형상 진짜 몸을 입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성도는 우리 이 몸을 가지고는 절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행위를 내어놓을 수가 없음을 알기 때문이지요. 자기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는 몸입니다. 로마서 8장에서 그 육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 살리라고 한 것입니다.그 일을 하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그 일이 이미 이루어졌음을 알게 되는 것이 우리의 기도이며 현재적 구원인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등장을 하는 겁니다. 제가 여러 번 말했는데, 믿음은 우리 행위의 부정입니다. 어떤 선한 행위도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음을 아는 것이 믿음 안에 있는 거에요 그들만 십자가의 공로만 평생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자의 기도는 이미 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언약의 하나님을 안단 말이에요. 그리고 그분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심을 아는 거에요 그 하나님을 모르니까 자꾸 엉뚱한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를 아는 것이 구원이고 영생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이 단순히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그분과 하나 됨의 앎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귐이며 동행입니다. 평생토록 함께 하시며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소원대로 그가 원하시는 뜻이 이루어지는 인생을 살게 하시는 그분을 알진대 어떻게 내 인생 내 행복을 위한 기도를 하겠느냔 말을 오늘 본문이 하고 있는 거에요 물론 예수 믿는 우리도 감당하기 힘든 고난 앞에서 그런 기도를 할 수는 있지만 성도는 그 기도를 통해서 다시 우리의 무능과 불가능함을 하나님 앞에 들키게 되고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자신을 맡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울면서 기도를 하셨어요. 하나님이신 그분도 이 잔이 나에게서 지나가게 해주세요.. 그러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능력으로 순종하신 예수님의 기도였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를 하신 겁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면서 하나님이신 예수입니다. 그 예수님의 영이 저와 여러분에게 임했기에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거스려 그분의 기도를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어떤사람들은 복음을 알고 나니까 기도할 게 없다고 하는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고 십자가 공로만 의지할 수 있도록 믿음과 소망을 주시도록 매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도 약한 우리의 육을 알고 자신만을 사랑하는 불가능한 죄인임을 알기 때문에 기도해야 하는 거에요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이 그런 뜻입니다. 결국 기도란 자기부인의 고백인 거에요
그래서 이런 기도를 할 수밖에 없도록 신자들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이 고난이고 징계입니다. 모든 인간이 생로병사의 한계와 고해의 인생을 살고 있지만,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고난에 대한 해석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를 신뢰하지 않고 세상에 기대하지 않게 되는 고난이며 징계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고난이 그런 목적이고 죄를 서로 고백하고 병이 낫기를 서로 기도하라는 것이 그런 이유입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말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우리는 끝을 알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에 갇힌 사람들이 아니고 이미 세상과 인생을 벗어난 사람들이에요. 하늘로 옮겨져 영생 안에 있다니까요. 그래서 교회는 주님이 다스리시고 돌보시는 그분의 몸 된 교회이기 때문에 누구 한 사람도 그 몸 된 교회에서 낙오할 수가 없습니다. 히브리서의 ‘우리가 아니면 그들도 온전하지 못하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아담으로부터 오늘까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하나의 유기적인 생명체로서의 한몸이기 때문에 같이 아프고 같이 즐겁고 같이 기뻐야 합니다. 구원은 그렇게 내 구원이 아닌 집단적인 구원,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구원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서부터 그 몸 된 교회로서 하나 됨을 확인해 주는 사건들이 교회 안에서 계속 발생이 되는 거예요. 말씀의 사건으로서 교회입니다. 그러한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가 한 몸 된 교회,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교회임이 확인되어집니다. 그래서 계시록의 일곱 교회처럼 옥에 던져지기도 하고 병든 자가 나오기도 하고 여러 가지 실패를 경험하기도 하는 사건들이 교회에서도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 내용처럼 병든 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는 것이 교회로 하여금 교회의 머리되신 주의 이름을 알고 부르게 하심이고 우리가 그의 피로 거룩한 교회임을 다시 확인하게 하심입니다.(고전1:2-3) 프로슈코마이, 믿음의 기도는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피로 사신 거룩한 교회의 정체성을 다시 확인하게 되는 사건들로서 기도입니다. 그것을 야고보서에는 장로를 청해서 기름을 바르고 기도를 한다는 것으로 표현 했습니다. 성령 안에서 말씀이 나누어질 때 우리는 별세를 경험하면서 산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장로는 말씀을 살아낸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장로는 요즘처럼 투표해서 뽑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도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떠나면서 장로들을 부른다고 하죠? 그들이 말씀을 먼저 살아낸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교회에 일어날 모든 사건들 이리떼들이 쳐들어올 때 교인들로 하여금 말씀, 하나님의 약속만 꼭 붙들 수 있도록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은혜와 말씀에 맡길 수 있도록 양을 치듯이 뒤에서 그들을 지켜 보면서 말슴으로 섬기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장로인 것입니다.
이제 장로를 청해서 기름을 바른다는 말이 올리브유를 바른다는 말이 아니란 것을 아시겠지요?. (실제 고대사회에서는 올리브유가 만병통치약이었지만) 여기에서 기름을 바른다는 말은 성령의 역사 (성령이 하시는 일은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시고 우리고 하여금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성령은 말씀의 영입니다.), 곧 말씀 나눔, 예수 나눔을 통해서 주의 뜻이 무엇인지를 다시 확인하고 말씀 안에서 병든 자가 일으키심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은 죄인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일으켜 세움을 받는 것입니다. 부활(아나스타시스)입니다. 우리가 그 부활의 생명 안에 있음을 다시 확인시켜주는 일이 장로를 청해서 기름 바르고 기도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교회가 지금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5, 16절에는 죄 사함과 죄 고백이 나옵니다. 이렇게 말씀을 나누었을 때 병이 낫는 사람도 있고 병이 낫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과 상관없이 중요한 것은 죄 사함의 권세 십자가의 다 이루심의 은혜의 영광이 믿는 자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역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의인의 기도요 믿음의 기도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그 예수님의 기도, 성령의 기도를 통해 부활의 생명 안에서 생기를 호흡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주님의 기도로 함께 은혜와 신령한 복을 누려왔습니다. 충분히 못 누린 사람도 있고 누린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러분 각자가 주님의 기도, 즉 복음에 참여한 자로 똑바로 일어서야 합니다. 그것이 스타우로스 자기 십자가입니다. 주님께서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이 그런 뜻이에요 말씀으로 양육되어 똑바로 언약의 기둥(십자가)에 세워지는 것이 교회의 역할입니다 젖 먹는 어린 아이에서 딱딱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장성하고 음의 일꾼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그것을 위해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열심히 말씀 읽으시고 장로에게 열심히 질문하세요. 장로는 그렇게 이용당하라고 있는 거에요 다른 열심 말고 그런 열심 내시면 됩니다.
(로마서 1장)
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바울만 빚진 자가 아니고 성도, 즉 복음에 참여된 자라면 부득불 이 빚 갚음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안디옥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도록 바울을 파송하는 것이 나오죠? 모여서 기도하고 보내고, 모여서 예수를 나누고 또 보내면서 담대히 복음을 전하도록 기도 하는것이 교회의 본무입니다. (엡6:18-20)
(고린도전서 9장)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팔자입니다.
오늘은 기도에 대해서 나누었고 다음 시간에는 찬송에 대해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까 얘기했던 부활에 대해서 잠깐 더 설명을 하겠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부활을 잘 보여주는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눅15:17-19)
탕자는 아버지에게서 재산을 받아서 세상에 나옵니다. 고대 율법에는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재산을 먼저 달라고 하는 자식을 동네 사람들이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법이에요. 그런데도 아버지가 유산을 줘서 내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간 탕자가 나중에 돼지우리에서 쥐엄 열매 다툼을 하고 있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돼지는 개와 함께 유대인들에게 가장 부정한 짐승입니다. 요즘도 이슬람은 돼지고기를 안 먹지요. 아들이 세상에 나가서 자기의 원대로 열심히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았는데, 어느 순간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이 돼지우리로 보이더라는 겁니다. 부정한 돼지들과 자존심 다툼 생존 경쟁이나 하는 자신을 보면서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많은데 이 세상에는 생명의 양식이 전혀 없음을 알게 된거에요 아버지집에선 품꾼들도 배불리 먹는다고 하는데 여기서 품꾼은 ‘양식을 관리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양식으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복이며 소중한 것인가를 세상이라는 돼지우리에서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하늘에 완료된 아들들인 우리를 일부러 세상에 하나씩 보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왜 아버지의 양식이 아니면 그 생명이 아니면 안 되는가를 우리로 알게 하십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든 실패한 사람이든 모두가 돼지우리 안에서 서로 쥐엄 열매 다툼, 자존심 싸움이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 아닌 생존이에요 그래서 탕자는 자신이 그들과 같은 부정한 돼지였음을 안 거예요. 이것이 세상에 죽음을 심으러 오신 예수님의 그 죽음에 참여 된 죽음입니다. 그 십자가의 죽음이 나누어 진것입니다. 그 상태를 살았다고 하는 것이고 그들만 아버지집을 바라보는 믿음과 소망이 주어진 것입니다.그렇게 교회는 살았다고 하는 자들이 와서 죽게 되는 곳입니다. 성도들의 무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더 잘사는 방법을 가르치는 곳이 교회가 되어버렸으니 교회와 세상이 구별이 없어진 것입니다. 세상이 좋아하는 것 똑같이 좋아하고 세상이 구하는 것 독같이 구하는 그런 교회는 세상이지 교회가 아닌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내가 알고 있던 모든 것을 배설물(똥)로 여긴다고 했습니다.비워짐, 털려나감입니다 탕자는 돼지우리에서 자신이 주려 죽는다고 했어요. 생명의 양식이 없으니까. 주려죽는다는 말은 완전히 파괴됨, 멸망을 의미합니다. 자기 죽음, 자기 부인을 말하는 거에요. 그렇게 주려 죽는다고 하던 탕자가 내가 일어나 아버지 집으로 간다 고 합니다. 이게 바로 부활이에요. 내가 아버지 집을 향해서 일어나는 것이 부활입니다. 이 부활이 있기 전에 돼지우리 안에서의 죽음이 먼저 있었습니다. 죽음이 있는 자들만 생명의 양식을 향한 일어남이 있는 거예요. 그 죽음이 없으면 일어남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아들들을 세상에 나가서 열심히 간음하고 부정한 돼지들이 구하는 것과 같은 것을 구하면서 살아보라는 겁니다. 그렇게 세상에서 죽어서 아버지 집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 부활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는 말은 내가 엉뚱한 것에서 양식을 구하고 엉뚱한 곳에서 행복을 구하고 엉뚱한 곳에서 내 존재를 찾았다는 말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진짜 양식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아버지 집에만 있는 그 생명의 양식을 날마다 구하는 사람이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 내일의 양식을 주옵시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죽은 자들에게 도저히 들을 수 없는 생명의 말씀이 우리 귀에 들리고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게 된 것이 어찌 우리의 육신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은 탕자처럼 육신대로 사는 것뿐인데 주께서 우리의 가는 길을 가시로 막고 담으로 막아서 생명 양식이 있는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앞으로 남은 날들도 주께서 저희와 동행하시면서 주님과 한 멍에를 멘 복된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일을 위해 기도를 쉬지않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