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8/22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1 - 美 킹목사 기념관 28일 워싱턴 D.C.에 개관 22일 일반 공개..개관행사에는 오바마도 참석 미국의 흑인 민권 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 목사를 기리는 기념관이 워싱턴 D.C. 내셔널 몰에 완공되어 28일 개관한다. http://www.yonhapnews.co.kr/international/2011/08/22/0608000000AKR20110822136800009.HTML
2004 - 제1회 '에너지의 날' 에너지의 날이란? 매년 8월 22일. 에너지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고, 미래를 대비한 에너지 절약과 친환경적인 신재생에너지 개발 및 확대 보급의 절실함을 널리 홍보하기 위해 제정된 날. “에너지의 날”이 처음 제정된 것은 2004년인데요. 왜 8월 22일이 에너지의 날로 정해진 걸까요? 그 배경은, 제정 1년 전인 2003년 8월 22일로 거슬러 갑니다. 이 날은 34도의 무더운 날씨로 인해, 전력 수요가 최고치인 4598만KW를 갱신하여 우리나라 역대 최대 전력소비를 기록한 날이었다고 합니다. 이에 에너지의 중요성을 깨닫고, 국민들의 적극적인 실천을 이끌어내기 위해 매년 8월 22일을 에너지의 날로 재정하게 되었답니다. '지루함 뺄SEM' /삼성전기 2014/08/12 15:33
오늘은 ‘에너지의 날’ 에너지의 날의 메인 행사는 저녁 8시 30분부터 약 30분간 불을 끄는 행사인데요. 지난 2004년 8월 22일, 세계 최초로 소등 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에너지의 날은 8월 22일 일까요? 8월 22일은 2003년 한 해동안 가장 많은 에너지소비를 기록한 날인데요. 이 날을 에너지시민연대에서 "에너지의 날"로 지정하였다고 합니다. 우리 이야기 /에너지관리공단 2013/08/22 08:30
- 'The Scream'
2004 - 화가 뭉크의 걸작 `절규' 도난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의 뭉크 박물관에서 22일 표현주의 화가 에드바르드 뭉크의 걸작 `절규(The Scream)'와 `마돈나(Madonna)'가 도난당했 다고 경찰이 밝혔다. (오슬로 AP=연합뉴스) /국민일보 쿠키뉴스 2004.08.22 23:36
1994 - 제21차 만국우편연합(UPU) 서울 총회 개막 우리 나라는 대한제국 당시인 1900년 가입했다. /YTN
1991 - 한국-알바니아 국교 수립 북한과 1948년 11월 29일 국교 수립에 이어 1954년 7월 30일 대사관을 교환 설치하였던 반면에 우리 나라와는 비록 1996년 12월 1일 공관은 설치되었지만 대사급 외교 관계는 1991년 8월 22일 수립되어(북한 공관은 1992년 10월 18일 폐쇄됨) 주 그리스 대사가 공관 업무를 겸임하고 있다. 양국간에는 1995년 5월 세레키(Serreqi) 외무장관이 방한하여 ‘과학기술 협력 협정’을 맺고 있다. 무역 관계에 있어서는 우리 나라는 TV, 전기 기기 등을 수출하고 우표, 고(古)화폐 등을 수입하는(1994년 현재 수출 1억 7700만 달러, 수입 240만 달러) 등 점차 증대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990 - 한국-니카라과, 국교 수립 양국은 1962년 1월 26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1979년 산디니스타 정권 출범 후 관계가 동결되었다가 1990년 차모로 정부가 들어서며 외교관계가 정상화되었다. 1969년 2월 양국간 문화협정이, 1995년 4월에는 사증면세협정이 서명되었다. 1995년 6월 주한 니카라과 대사관이 개설되었으나, 1997년 5월 니카라과 정부의 재외공관 감축 계획에 따라 폐쇄되었다. 북한과는 산디니스타 정권수립 후인 1979년 8월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1979년 12월 주니카라과 북한대사관이 설치되었다가 1995년 5월 철수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982 - 전두환 대통령 아프리카 4국(+캐나다) 순방 중 가봉 공식방문(22~24일) 전대통령 아주·加·순방 전두환 대통령은 영부인 이순자 여사와 함께 8월 17일부터 31일까지 14박 15일간 아프리카의 케냐·나이지리아·가봉·세네갈 등 4국과 北 미의 캐나다를 순방, 정상외교를 폈다.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아프리카」를 방문한 전대통령은 거대한 잠재력을 갖고 있는 검은 대륙의 정상들과 대좌, 우의의 새 장을 열었다. 전대통령의 방아는 비동맹에서의 대 북한 열세를 만회했고 그들과 자원 교류의 길을 터 놓았다. http://blog.empas.com/sidezone10/read.html?a=11936536&c=1155785
1980 - 전두환 대장 전역식 [책갈피 속의 오늘]1980년 전두환대장 전역식 “국가원수라는 자리는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가족들에게 ‘이제 우리는 불우한 남을 위해서 살아가자’고 말했습니다.” 대통령이나 영부인의 발언이 아니다. 1980년 8월 21일 예편을 하루 앞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 전두환(全斗煥) 대장의 부인 이순자(李順子) 씨가 전역식 전야제 행사에서 한 말이다. 신군부의 군홧발이 정치무대를 장악한 1980년의 서울에서는 이런 비정상이 일상적으로 가능했다. 헌법상 대통령과 사실상의 국가원수가 따로 있던 시절이었다. 공군참모총장의 건배 제의도 이랬다.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차기 국가원수로 전두환 대장을 추대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전 장군의 앞날에 무한한 영광과 행운이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다음 날인 22일 서부전선 1사단 사령부 연병장에서 열린 전역식은 사실상의 대통령 행사였다. ‘국가수반 경호경비 계획’에 준하는 사전 조치가 취해졌다. 사령부 내 모든 창문이 완전 봉인됐고 주변 일대는 비행금지구역으로 지정됐다. 전역식 동안 모든 군사훈련이 중지됐으며 행사 요원을 제외한 사병 전원은 내무반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다. 12·12쿠데타로 집권한 ‘전 장군’을 위한 철저한 사주경계였다고나 할까. 전역식 자체는 그보다 더 화려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경제부총리를 비롯한 국무위원 전원, 중앙정보부장(현 국가정보원장), 합참의장, 육해공 3군 총장 등이 참석했다. 사단 이상을 호령하는 2성, 3성 장군들도 말석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같은 달 5일 ‘별 넷’을 달았고 그로부터 17일 만에 군복을 벗은 ‘전 장군’은 전역식 5일 뒤인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당시 유엔군총사령관 겸 한미연합사령관이었던 존 위컴 씨는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 이 전역식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한국의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민간인이어야 하므로 그는 전역할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은 미국의 지지를 얻으려면 헌법 절차를 따라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동아닷컴 2005-08-22 03:03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50822/8221146/1
- Kenya, 100 Shillings (2004. Banknote)
1978 - 케냐의 독립운동가, 초대 대통령 조모 케냐타(Kenyatta, Jomo) 사망 케냐타 [Kenyatta, Jomo, 1894?~1978.8.22] 케냐의 민족주의자, 정치가, 초대 대통령. 이차웨리 출생. 키쿠유족(族) 출신으로 그리스도교계 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받았다. 그 후 나이로비에서 공공사업국의 사무원으로 근무하다가 1921년 키쿠유족 청년 H.투쿠가 백인정부에 저항하여 벌인 케냐 최초의 아프리카인 정치운동을 계기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1930∼1946년 영국 ·소련 등에 체재하면서 범아프리카주의운동에 종사하는 한편, 문화인류학을 배워 키쿠유족의 고유문화에 관한 연구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귀국 후 독립운동을 지도하였는데 1952년 부당하게 체포되어 마우마우단 사건 때는 옥중생활을 하였다. 1961년 8월 석방되어, 케냐아프리카민족연맹(KANU)의 의장이 되었고, 1963년 5월 선거에서 승리하여 총리에 임명되었다. 그 해 12월 케냐가 독립하자 그는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74년 종신 대통령이 되어 1978년 8월 재임 중에 죽었다. /naver
- Brasil, 100 Cruzados (Banknote)
1976 - 브라질의 대통령 주셀리누 쿠비체크(Kubitschek, Juscelino) 사망 쿠비체크 [Kubitschek (de Oliveira), Juscelino, 1902.9.12~1976.8.22] 브라질의 대통령(1956~61). 새 수도 브라질리아의 건설과 같은 야심적인 공공사업을 추진함으로써 유명해졌다. 쿠비체크는 디아만티나 신학교를 마친 후 미나스제라이스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하여 1927년에 졸업했다. 파리·빈·베를린에서 외과수련의 과정을 밟았다. 1932년 미나스제라이스 주에 있는 육군 의무반의 외과반장이 되었고, 1934~37, 1946~50년에 미나스제라이스에서 연방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40~45년 벨로리존테 시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도시계획 및 진료소와 공공 서비스 시설의 건립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1951~55년 미나스제라이스의 주지사 시절에는 고속도로 건설, 발전소 설립, 농공업의 개발에 주력했다. 그는 대통령에 출마해 '동력·수송·식량'을 공약으로 유세활동을 벌였다. 대통령 재임중에 총연장 1,440㎞에 달하는 밀림횡단 고속도로 건설에 착수했고, 미래의 수도 브라질리아를 건립했다. 그러나 그의 정부는 급속한 인플레이션에 성공적으로 대처하지 못했으며, 북동부의 한발피해 지역을 복구하는 데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야 했기 때문에 경제문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는 1962년 상원의원에 당선되었고 1964년 사회민주당의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었다. 같은 해 군사혁명정부가 권력을 장악하자 망명했다. 1967년 브라질로 돌아와 은행가로 활약하다가 1976년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브리태니커
1976 - 그리스의 피아니스트 지나 바카우어(Bachauer, Gina) 사망 바카우어 [Bachauer, Gina, 1913.5.21~1976.8.22] 지나 바카우어(Gina Bachauer, 그리스어: Τζίνα Μπαχάουερ 치나 바하우에르, 1913년 5월 21일 - 1976년 8월 22일)는 그리스의 피아니스트이다. 아테네 근교에서 태어나고, 왈데말 프리만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또한 스승의 소개로 대작곡가이자 명피아니스트인 라흐마니노프에게 배웠다. 1935년, 명지휘자 미트로푸로스와 협연하여 데뷔했는데, 1937년에는 파리로 나와서 코르토에게 배우고, 독주회도 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영국으로 건너갔고, 1950년엔 미국으로 데뷔, 각지에서 연주회를 열고 절찬을 받았다. 착실한 기교의 소유자로서 베토벤, 브람스, 리스트 등 레퍼토리의 범위는 넓으나 스승인 라흐마니노프의 곡 연주에 정평이 있으며, 자신도 또한 그것을 가장 좋아하였다고 한다. /위키백과
1968 - 교황 바오로 6세, 콜롬비아 방문 교황 바오로6세가 1968년 오늘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를 방문한다.
1966 - 아시아개발은행(ADB) 발족 [오늘의 역사]아시아개발은행 발족 아시아 지역의 경제성장과 경제협력 및 지역 내 개발도상국의 경제개발을 촉진할 아시아개발은행이 1966년 오늘 발족했다. 아시아개발은행은 회원국에 대한 대출, 기술 원조, 특정 프로젝트에 대한 융자 등으로 주로 활동한다. 일반 재원은 자본금과 차입금으로, 차입금은 아시아개발은행채의 발행으로 충당되고, 이외도 다목적 특별기금, 기술원조 특별기금 그리고 아시아개발기금 등 3가지 특별기금이 있다. 아시아개발은행은 각 회원국의 재무장관들로 구성된 총회와 12개 주요 이사국 대표로 구성된 이사회를 두고 있다. 우리나라는 설립 때부터 가입했고, 지난 2003년 현재 가맹국은 아시아 44개국과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포르투갈 등 역외 국가 17개국으로 총 61개국였다. /충청투데이 2008.08.21 19:00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6642
- Flight of Sputnik 5, Aug. 19~20
1946 - 국립서울대학교 설립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 발표
엘리엇 [Eliot, Charles William, 1834.3.20~1926.8.22] 미국의 교육자. 40년간 하버드대학교 총장을 지냈으며, '5피트 선반에 가득찬 책들'이라고 불리는 전50권으로 된 〈하버드 고전 Harrard Classics〉의 편집인으로 일했다. 1853년에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하고 1858년 하버드대학교의 수학 및 화학 조교수가 되었다. 1867년에 유럽을 여행했으며, 이 여행을 통해 유럽의 교육제도에 대해 연구시찰하게 되었다. 1869년 〈애틀랜틱 먼슬리 The Atlantic Monthly〉에 기고한 시찰보고서는 새로운 총장을 찾고 있던 하버드대학교 이사들의 관심을 끌었다. 엘리엇은 1869년 10월에 총장으로 취임했고, 1909년에 퇴직할 때 하버드대학교를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학으로 끌어올렸다. 엘리엇은 미국의 고등교육은 '폭넓어지고, 심화되고, 활성화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교양교육의 충실한 프로그램에는 인문학뿐만 아니라 과학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창했다. 당시의 관례에 따라 교과내용이 미리 정해지는 하버드대학교 교육과정의 경직성을 타파하기 위해 엘리엇은 필수과목제를 폐지했다. 후임 총장인 A. 로렌스 로웰이 재직할 때 필수과목과 선택과목 간의 균형이 이루어졌다. 엘리엇은 중등교육에까지 영향력을 끼쳤다. 그가 총장으로 있는 동안 하버드대학교의 입학자격이 엄격해졌으며, 다른 주요대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따라 중등학교 수준이 높아지게 되었다. 중등교육에 관한 전국위원회의 보고서(1892)에서 그는 중등학교의 7학년 과정에 외국어와 수학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주장은 1910년 미국에서 주니어 하이 스쿨 제도의 도입으로 구체화되었다. 엘리엇의 저작으로는 〈교육 개혁:평론과 연설집 1869~97 Educational Reform:Essays and Addresses 1869~1897〉(1898)과 〈대학행정 University Administration〉(1908) 등이 있다. 1930년 헨리 제임스가 엘리엇의 저서·논문·연설문 등을 실어놓은 14장의 문헌 목록이 포함된 〈찰스 W. 엘리엇 Charles W. Eliot〉(2권)을 출판했다. /브리태니커
1922 - 아일랜드 독립투쟁의 영웅 마이클 콜린스(Collins, Michael) 피살 콜린스 [Collins, Michael, 1890.10.16~1922.8.22] [역사속의 인물] 독립의 아버지 마이클 콜린스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도 다양한 평가가 있기 마련이다. 아일랜드의 마이클 콜린스(Michael Collins)가 그렇다. 독립의 아버지, 테러리스트, 분열주의자…. 콜린스는 1890년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독립 운동에 투신했다. 1916년 더블린의 부활절 봉기에서 살아남은 후 아일랜드공화국군(Irish Republican Army:IRA)을 창설, 테러와 암살을 주도했다. 테러에 골머리를 앓던 영국은 1921년 북아일랜드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독립을 제안했다. 임시정부 수반이던 콜린스가 협상 대표로 이 조약에 서명하자, 찬성파와 반대파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1922년 오늘, 내전 중지를 위해 반대파 지도자를 만나러 갔다가 매복한 반대파 청년들의 총에 죽었다. 당시 콜린스가 북아일랜드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세계 최강국 영국이 순순히 독립을 허용했을지 의문이다. 그러나 북아일랜드의 IRA가 아직도 독립 투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는 콜린스의 선택에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다. 1996년 미국 워너브라더스가 제작한 ‘마이클 콜린스’는 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다. 리엄 니슨, 줄리아 로버츠가 출연하는 수작이다. 박병선 사회1부장 /매일신문 2009년 08월 22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37222&yy=2009
- 'Fahrenheit 451'
브래드버리 [Bradbury, Ray (Douglas), 1920.8.20~ ] 미국의 작가. 과학소설, 향수를 담은 단편, 시와, 라디오 극, 텔레비전과 영화의 대본을 썼다. 작품에서는 별난 것, 기괴한 것, 감상적인 것을 잘 다루어냈다. 1940년 첫 단편소설을 발표한 뒤 곧 여러 잡지에 많은 작품을 기고하게 되었다. 많은 단편소설이 각종 문학상을 받았으며 700가지가 넘는 선집에 실렸다. 첫 단편집 〈어둠의 축제 Dark Carnival〉(1947)에 뒤이은 작품 가운데 〈화성 연대기 The Martian Chronicles〉(1950, 영화화 1966, 텔레비전 미니시리즈 1980)는 과학소설의 고전으로 꼽히며 〈삽화 인간 The Illustrated Man〉(1951)·〈화씨 451도 Fahrenheit 451〉(1953), 그밖에도 〈태양의 황금사과 The Golden Apples of the Sun〉(1953)·〈10월의 나라 The October Country〉(1955)·〈민들레 술 Dandelion Wine〉(1957)·〈우울을 고치는 약 A Medicine for Melancholy〉(1959)·〈R는 로켓을 나타낸다. R Is for Rocket〉(1962)·〈무언가 악한 것이 다가오고 있다 Something Wicked This Way Comes〉(1962)·〈내 몸에 전기가! I Sing the Body Electric!〉(1969) 등을 발표했다. 아동소설과 희곡뿐만 아니라 〈모비 딕 Moby Dick〉(존 휴스턴 공저, 1956)을 비롯한 영화대본도 썼다. 시집도 여러 권 펴냈는데 그 가운데는 〈앞마당에 목초가 마지막으로 꽃피었을 때 When Elephants Last in the Dooryard Bloomed〉(1973)·〈로봇 쥐와 로봇 인간이 로봇 마을에서 뛰어다니다 Where Robot Mice and Robot Men Run Round in Robot Towns〉(1977) 등이 있다. /브리태니커
1911 - 파리 루브르 박물관서 <모나리자> 도난 발표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이 모나리자 도난 사실을 발표한 1911년 8월22일은 모나리자에게는 오히려 제2의 생일이 됐다. 그때까지 모나리자는 다른 르네상스 걸작들에 비해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었다. 그런데 신문들이 루브르의 관리소홀을 질타하고 한편으로는 연일 모나리자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한 기사를 쏟아내자 관심이 모나리자에게 세간의 뜨거운 관심이 집중됐다. 프랑스인들은 프랑스가 그런 명작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됐고, 자신들이 ‘라 조콩드’라고 부르는 모나리자의 미소도 새롭게 알게 됐다. 경찰은 피카소를 혐의 선상에 올리면서까지 철저한 수사를 진행했지만 진척이 없었다. 시간도 어느덧 2년이 흘러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점차 잊혀져갈 무렵, 우연한 기회에 범인이 잡힌다. 페루지아라는 이탈리아 화가가 피렌체 우피지 미술관에 그림을 10만달러에 팔려다가 덜미를 잡힌 것이다. 페루지아는 모나리자가 탄생지 이탈리아에 있지않고 프랑스에 있다는 사실에 격분해 그림을 훔쳤다고 강변했지만, 사실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가 프랑스왕 프랑수아1세에게 돈을 받고 팔아 넘긴 그림이다. 재작년 모나리자는 500살 생일을 맞았다. /조선
- 일제의 을사5조약 날조 100년, 2005
일제의 한국 병탄은 일련의 치밀한 과정을 거쳐 전개됐다. 1905년에 가쓰라ㆍ테프트밀약(7월), 제2차 영ㆍ일동맹(8월), 러ㆍ일강화조약(9월)을 체결, 한국에서의 독점적 권리를 국제적으로 승인받은 일제는 한국과도 3차에 걸쳐 한일협약을 강제로 체결해 재정ㆍ외교ㆍ내정권을 모두 빼앗는다.
[책갈피 속의 오늘]1910년 이완용, 한일 병합안 강제가결 ‘한국 황제폐하와 일본국 황제폐하는 양국 간의 특수하고 친밀한 관계를 회고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코자 하는 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서는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만 같지 못한 것을 확신하여 이에 양국 간에 병합조약을 체결하기로 결하고 일본국 황제폐하는 통감 자작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한국 황제폐하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명기 전권위원으로 임명함.’
1908 - 프랑스의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Cartier-Bresson, Henri) 출생 카르티에 브레송 [Cartier-Bresson, Henri, 1908.8.22~2004.8.3] [어제의 오늘]1908년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출생 ㆍ손끝으로 건진 ‘결정적 순간’ 숱한 ‘결정적 순간’을 포착해낸 프랑스의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1908년 오늘 태어났다. 1930년대부터 사진 경력을 시작한 카르티에 브레송은 다양한 역사의 현장에서 셔터를 눌렀다. 인도에서는 간디를 만난 지 1시간 만에 그가 암살되자 장례식을 밀착 취재했다. 중국의 내전 사진을 통해서는 국민당의 몰락과 공산당의 등장을 전 세계에 알렸다. 54년 서방 작가로선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했고, 사뮈엘 베케트, 마틴 루터 킹, 장 폴 사르트르, 파블로 네루다 등의 초상 사진을 찍었다. 백승찬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9-08-21 17:56:2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0908211756275&code=100100&s_code=ap005
1904 - 중국의 정치가 덩샤오핑[鄧小平] 출생 덩샤오핑 [鄧小平, 1904.8.22~1997.2.19] 덩샤오핑은 1970년대말부터 1980년대에 걸쳐 중국을 이끈 혁명가이자 정치인이다. 그는 전통적인 공산주의 원칙에 '중국적인 성격을 가진' 자유기업제도를 도입·절충함으로써 정체되어 있던 중국 사회를 역동적인 산업 노동력을 갖춘 사회로 탈바꿈시켰다. 1921~26년 프랑스와 소련에서 유학을 마친 후 귀국해 중국공산당의 유력한 조직가로 활동하면서 역량을 키워나갔다. 1934~35년 공산당의 1만km 장정에 참여했으며,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1952년 총리가 되었다. 덩은 중국의 미래가 잘 교육받은 관리자들과 뛰어난 기술자들에게 달려 있다고 확신했는데 이러한 생각은 마오쩌둥의 노선과 갈등을 빚어 한때 실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덩은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본격적으로 개혁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장기적인 경제계획, 개인적 책임, 능력 있는 관리자나 노동자에 대한 물질적 혜택, 경제발전에 필요한 인재 교육 등이 그의 개혁정책의 요지였다. 1987년 그는 자신의 개혁정책에 반대해온 당 원로들의 사임을 유도하기 위해 스스로 중앙위원회에서 사임했다. 1989년 6월 일어난 톈안먼 사건을 무력진압으로 대처해 정치적 거취가 불안해보였으나 위기를 극복해 은퇴 후 사망 직전까지 중국의 명실상부한 지도자로 군림했다. /브리태니커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잡을 수 있으면 좋은 고양이다."
- 덩샤오핑
1864 - 국제적십자 조약(제네바 협약) 성립으로 적십자 탄생 [책갈피 속의 오늘]1864년 국제적십자 출범 스위스의 청년 실업가 장 앙리 뒤낭은 1859년 프랑스-사르디니아국(이탈리아 왕국의 하나) 연합군과 오스트리아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의 참상을 지켜본 뒤 ‘솔페리노의 회상’이란 책을 썼다. 그는 젊은이들의 생명을 구할 단체를 설립하고 이 단체가 전쟁터에서 활동할 수 있는 국제조약을 체결할 것을 제안했다. 반향은 컸다. 뒤낭은 ‘국제부상자구호위원회’(일명 5인 위원회)를 조직해 1863년 10월 스위스 제네바회의에서 흰색 바탕에 붉은 십자 모양의 표장을 선정하고 10개 조문의 적십자 규약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듬해 8월 22일 미국 등 16개국이 제네바에서 ‘육상전쟁 부상자 보호를 위한 최초의 제네바협약’을 채택하며 국제적십자위원회(ICRC)가 공식 출범했다. ICRC는 이후 해상전쟁 시 보호, 포로 대우, 전시의 민간인 보호 등의 협약을 채택하며 많은 전쟁 희생자를 구했고 결국엔 ‘국적, 종교, 계급, 인종 또는 정치적 견해에 대한 차별 없이 희생자들의 생명을 구한다’며 모든 인도적 활동으로 영역을 넓혔다. ICRC는 제1, 2차 세계대전과 이후 수많은 분쟁 지역에서 다양한 구호 활동을 펼쳤다. 창시자인 뒤낭은 1901년 제1회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ICRC는 1917, 1944, 1963년 등 세 차례나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현재 적십자 운동은 크게 ICRC와 국제적십자사연맹(IFRC)이 주도하고 있다. 무력충돌 지역에선 ICRC, 재해재난 지역에서는 IFRC가 주도적인 활동을 펼친다. 한국은 대한제국 시절인 1903년 제네바협약에 가입해 1905년 대한적십자사가 탄생했다. 이슬람권 33개국은 기독교를 연상시키는 십자가 대신 무슬림을 상징하는 붉은 초승달을 사용해 ‘적신월사’로 불린다. 최근 큰 충격을 준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의 한국인 인질사태 땐 아프간 적신월사가 여성 2명을 석방시키는 데 큰 도움을 줬다. 기독교인인 한국인들을 위해 무슬림 적신월사가 도움을 준 것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은 종교도 뛰어넘는다는 ICRC의 이념이 구현된 것이다. 지난해 ICRC와 IFRC의 도움을 받은 사람은 전 세계 2500여만 명. 분쟁과 재해로 고통 받는 인류에게 국제적십자는 ‘어둠을 밝히는 빛’ 역할을 하고 있다. 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동아닷컴 2007-08-22 03:02:00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70822/8480841/1
- France, 20 Francs (1995. Banknote)
1862 - 프랑스의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Debussy, Claude) 출생 드뷔시 [Debussy, (Achille-)Claude, 1862.8.22~1918.3.25] 프랑스의 작곡가. 파리 근교 출생. 어려서 양친을 따라 파리로 나와 1871년 칸에 사는 고모의 주선으로 피아노 교습을 받았다. 파리로 돌아와서는 시인 베를렌의 숙모 모테 부인에게 정식 레슨을 받았으며, 그 덕택으로 1872년 가을 파리음악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1884년 칸타타 《방탕한 아들》로 로마대상을 받았으며, 졸업할 때까지 솔페즈 부문에서 1등상, 피아노 부문에서 2등상, 피아노 반주과에서 1등상 등을 받았으나, 화성법에서는 관습적인 규범에 반발한 이유로 아무 상도 타지 못하였다. 한편, 학비를 벌기 위해 여름방학 동안 폰메크 부인의 피아노 반주자로 3년간 러시아와 유럽 각지를 여행, 감수성과 취미를 기르고 바니에 부부와 알게 되어 교양을 쌓았으며, 바니에 부인을 영감을 주는 여성으로 받들어 《만돌린》(베를렌의 시)과 그 밖의 가곡을 작곡하였다. 베를렌의 시세계와의 접촉(가곡집 《화려한 잔치 제1·2집》 등)도 마찬가지 뜻에서 중요하다. 그리고 그 후 앞서 말한 《현악4중주곡》 및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에서 《빌리터스의 노래》(루이스의 시)와 모음곡 《피아노를 위하여》, 관현악을 위한 《녹턴》을 거쳐 오페라 《펠레아스와 멜리장드》(1893∼1903)의 완성에서 초연에 이르는 10년간은 드뷔시의 개성적인 양식이 확립·확인된 시기에 해당된다. 이와 같은 그의 양식을 대표하는 《펠레아스와 멜리장드》가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초월한 보다 새로운 차원에 있는 작품이라고 한다면, 1905년에 작곡된 관현악곡 《바다》는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를 한걸음 더 앞선 작품이다. 《바다》와 그 전후에 작곡된 피아노곡집 《판화(版畵)》, 《영상 1》, 《영상 2》에 의하여 그의 원숙기가 전개되었다. 이것은 피아노모음곡 《어린이의 세계》와 관현악을 위한 《영상 3》(《이베리아》 포함), 가곡집 《프랑스와 비용의 시에 의한 3개의 발라드》, 피아노곡 《전주곡집 1》 등으로 계속 이어졌다.
- Nipkow's Phototelegraphy Diagram
니프코브(닙코) [Nipkow, Paul Gottlieb, 1860.8.22~1940.8.24] 포메라니아 라윈부르크 출생. 베를린대학에서 헬름홀츠에게 수학하였으며, 망원경 ·광학 ·전화에 흥미를 가졌다. 1884년 원판(圓板)에 다수의 작은 구멍을 나선형으로 뚫어 전송 물상(物像)을 렌즈를 통해 원판 위에서 연결해 놓고 즉시 광전관(光電管)을 놓으면 원판이 회전하면서 구멍에 의해 물상의 명암 모양을 주사하는 니프코 원판을 발명하였는데, 이것이 최초의 주사방식(走査方式)으로서 텔레비전 개발의 선구가 되었다. /naver
1860 - 스웨덴의 서정시인 구스타프 프뢰딩(Fröding, Gustaf) 출생 프뢰딩 [Fröding,Gustaf, 1860.8.22~1911.2.8] 스웨덴의 시인. 베름란드의 알스터 출생. 스웨덴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향토의 자연과 농민생활을 깊은 애정으로 묘사하였다. 풍경이 아름답고 전설이 풍부한 고장에 살면서 일찍부터 비상한 천분을 나타냈으나 몹시 내성적이었으며, 또 정신병의 유전으로 고통당하였다. 웁살라대학교 중퇴 후 고향인 칼슈타트에서 신문기자로 일하면서 남몰래 시를 써오다가 정신병의 발작이 심해져 치료를 위해 독일에 있는 요양소에 들어갔는데, 그 동안 시작에 전념하였다.
귀국 후 이를 모은 처녀시집 《기타와 손풍금 Guitarr och dragharmonika》(1891)이 출간되었는데, 이는 그를 신시단의 제1인자로 만들었다. 이어 《신시집 Nya dikter》(1894), 《물방울과 넝마 Stänk och flikar》(1896), 《성배(聖盃)의 물방울 Gralstänk》(1898) 등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정신병이 악화되어 1898년에는 착란상태에 빠져 웁살라병원에 입원, 창작활동은 불과 6년으로 끝났다. 만년의 12년간은 정신병환자로서의 생활을 보냈다. /네이버
1847 - 오스트레일리아의 탐험가, 정치가 존 포레스트(Forrest, John) 출생 포레스트 [Forrest, John, 1847.8.22~1918.9.3] Baron Forrest of Bunbury라고도 함(1918). 오스트레일리아의 탐험가, 정치가. 탐험대를 이끌고 오스트레일리아의 서부 내륙지방을 개척했다. 1890~1901년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의 초대 총리를 지내면서 공공건축사업을 지원했고, 1901년에는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를 연방에 가입시켰다. 1865년 포레스트는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의 조사국에 들어갔다. 1869년 실종된 탐험가 루트비히 라이하르트를 찾기 위해 탐사대를 조직했고, 1870년 퍼스에서 그레이트오스트레일리아 만을 따라 애들레이드까지 탐험했다. 1874년에는 챔피언 만에서 애들레이드와 포트다윈 사이의 전신선까지 4,300㎞에 달하는 대륙횡단에 성공했다. 1883~90년 주의 조사국장으로 재직했던 그는 1890년에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의 총리가 되었다. 식민지 재무장관을 지내면서 항구와 철도 개발을 지원했고, 금광지에 상수시설 건설 계획을 추진했다. 또한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고, 거주지역을 확대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887~1901년에 걸친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구성을 위한 협상에서 작은 주들의 이익을 옹호했는데, 특히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는 철도와 그 요금 수익금을 차지했다. 1901년 초대 연방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된 이후 1901~03년 국방장관을 지냈으며, 1905~14년 여러 자유당 내각에서 재무장관을 역임했다. 또한 윌리엄 모리스 휴가 이끄는 전시 연립내각에서도 재무장관(1917~18)으로 있었다. 1918년 포레스트는 오스트레일리아 태생으로는 처음으로 영국의 귀족이 되었으나,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사후에 작위는 소멸되었다. 저서로는 〈오스트레일리아 탐험 Explorations in Australia〉(1875)·〈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에 관한 기록 Notes on Western Australia〉(1884)이 있다. /브리태니커
1791 - 아이티 흑인 노예 폭동 [책갈피 속의 오늘]1791년 아이티 흑인 노예 폭동 “신은 우리를 굽어보시고 백인들이 한 모든 짓을 알고 계시나이다. 선량하신 우리의 신께서 (우리의) 원수를 원수로 갚으라 명하시나이다. 신께서 우리의 전쟁을 주관하시고 우리를 도우시나이다.”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80822/8620969/1
1771 - 영국의 공작기계 발명자 헨리 모즐리(Maudslay, Henry) 출생 모즐리 [Maudslay, Henry, 1771.8.22~1831.2.14] 영국의 발명가·기술자. 금속 선반과 다른 기구들을 발명했다. 울리지 군수공장의 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자물쇠를 제조하던 J. 브라마의 견습공이 되었다. 곧이어 감독이 되었지만 임금을 올려받지 못하자 직장을 그만두고 개인사업을 시작했다. 처음 시작한 일은 M. I. 브루넬의 선박용 도르래 공장에 쓰일 기계류를 조립하는 것이었다. 그뒤 30여 년 동안 산업혁명에 매우 중요했던 기계들을 발명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금속 선반이다. 또한 천의 사라사 날염법(捺染法)과 선박의 보일러용 바닷물의 염분 제거법을 개발했으며 0.001㎜까지 정확히 잴 수 있는 측정기계를 완성했다. 그는 기계공장에서 공구를 유도할 때 정밀한 평면이 매우 중요함을 처음으로 깨달았으며, 자기 공장의 직공들을 위해서 아주 매끄러운 표준 평면을 만들었다. 또한 수많은 정지 및 선박용 기관을 설계·제작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뛰어난 공학자들이었던 J. 네이즈머스와 J. 휘트워스 등은 그의 공장에서 전문기술을 배웠다. /브리태니커
1741 - 헨델 오라토리오 <메시아> 작곡 메시아 [The Messiah] 독일의 작곡가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사이아 또는 구세주라고도 한다. 헨델의 대표작이자 동서고금을 통틀어 종교음악의 백미로 꼽힌다. 영국의 시인 찰스 제넨스(Charles Jennens)가 성서와 기도문를 인용하여 영어로 쓴 대본을 바탕으로 헨델이 56세 때인 1740년 8월 22일부터 9월 14일까지 24일만에 초고를 완성했다. <예언과 탄생> <수난과 속죄>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3부로 구성되며, 테너의 독창 <그대들 나의 백성을 위하라>로 시작하여 아리아와 합창곡 등 53곡이 연주된다. 연주시간은 약 2시간 20분이다. 초고가 완성된 뒤 헨델이 연주회를 거듭하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 악보를 수정하였기 때문에 정본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서사적 묘사라기보다도 전 인류의 구세주로서의 그리스도의 존재를 강력히 호소한다. 알기 쉬운 웅장한 표현 속에 생생한 종교적 감동이 잘 나타나 있다. 1742년 4월 13일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열린 자선행사에서 초연된 이래 지금도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세계 각처의 자선연주회에서 이 곡을 연주하는 것이 관습처럼 되어 있다. 1743년 3월 23일 런던의 왕립극장에서 공연할 때 국왕 조지 2세는 제2부의 마지막 곡 <할렐루야 코러스>가 합창되자 감동에 겨워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로부터 유래하여 오늘날의 연주회에서도 이 곡이 합창되면 청중이 기립하여 감상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naver
1741 - 프랑스의 해양탐험가 라 페루즈(La Pérouse, Jean) 출생 라 페루즈 [La Pérouse,Jean-François de Galaup, 1741.8.22(23)~1788?] 프랑스의 해양탐험가. 1756년 해군에 입대하여 7년전쟁에 참가하였고, 다시 미국독립전쟁에 참전하였다. 1785년 태평양 쪽으로부터의 북서항로(北西航路)의 발견과 태평양 조사의 임무를 띠고 브레스트항(港)을 출발하여 이듬해 6월 알래스카 남동안의 세인트 일라이어스에 이르렀다. 거기에서부터 하와이제도(諸島) ·마카오 ·필리핀제도를 돌아 일본 ·한국 ·연해주 연안을 조사하고 라페루즈해협을 통과한 후 캄차카에 도달하였다. 거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사모아제도를 거쳐 1788년 1월 오스트레일리아 동해안의 보트니아만(灣)에 이르렀으나, 그것을 마지막으로 탐험대의 소식이 끊겼다. 1828년 뉴헤브리디스제도의 바니코로섬 해안에서 배의 잔체(殘體)가 발견되었다. 미리 본국으로 보낸 그의 노트를 바탕으로 1798년 《세계주행기》(4권)가 간행되었다. /naver
1647 - 프랑스의 물리학자 드니 파팽(Papin, Denis) 출생 파팽 [Papin, Denis, 1647.8.22~1712?] 블루아 출생. 앙제대학에서 의학·자연과학을 공부한 뒤 파리로 가서 C.호이겐스의 조수로 근무한 후, 런던으로 건너가 R.보일과 함께 공기 펌프를 개량하였으며, 33세에 영국 학사원 회원으로 추천되었다. 대기압을 동력으로 이용하는 연구에 착수, 그 연구의 일부는 압착공기에 의한 총포(銃砲)의 연구로 발전하였다. 1688년 독일의 마르부르크대학의 수학교수가 되었으며, 수역학(水力學) 이용의 연구, 회전 펌프의 제작, 동력의 전달 기구, 잠항정(潛航艇)의 실험(1692) 등이 진행되었다. 또한 탄광에서 이용되는 여러 기술의 개량에도 힘썼다. 유명한 대기압 피스톤 기관은 호이겐스의 화학기관 개선의 연구과정에서 발명된 것이다. 화약을 수증기로 바꾸어 수증기의 압력과 그 응축(凝縮)에 의한 대기압의 작용을 이용하여 피스톤을 움직이게 하는 실용적 동력기관으로서, 후에 뉴커먼의 증기기관 발명의 기초가 되었다. 더욱이 파팽은 이 기관을 장치한 배와 운반차에 대한 이용, 양수 기관 등을 연구하였다. /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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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