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양 요셉 신부님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마태오 20,17-28
예수님의 제자교육
자녀 교육을 위해서는 온 몸이 부서져도 보람으로 여기고 뒷받침을 하는 것이
이 세상의 모든 부모들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 부모들은 유별나지요.
“기러기 아빠”니 “까마귀 엄마”니 하는 말이 생길 정도로 온 가정이 자녀의 교육에 열심이고
자녀의 미래를 위해서 최선의 뒷받침을 해주고자 노력합니다.
좋은 일이지요. 재산을 물려주기보다는 교육을 시켜서 스스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하고,
또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커나가도록 도와주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많은 부모들의 이러한 교육에 대한 뒷받침이 가난했던 이 나라를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시키는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편 우려되는 면이 없지 않아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높은 교육의 열만큼 교육의 내실 또한 제대로 채워져 있는 지 염려스럽고
그 염려가 기우에 그치지 않고 실제 결과로 드러나는 경우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교육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르친다고 무조건 교육적인 것은 아닌 것이지요.
「깡패수업」이라는 영화가 있었다는데 깡패 되는 법을 교육받으면 깡패가 되는 것입니다.
또 소매치기들은 그들 세계에서 나름대로 기술을 가르치는 학교를 운영한다고 합니다.
교육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바른 지향으로 올바른 방법을 통해 모두가 함께 잘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교육이 제대로 잘 가고 있는가 하는 부분에서 의문이 떠나지 않습니다.
세속적으로 자녀를 키우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적지 않은 자녀들이 자기 자신만 알고 이웃 사람은 몰라볼 뿐 아니라
심지어 부모까지도 우습게 여기는 극단의 이기적인 사람으로 자라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그렇게 헌신하며 자식을 키웠지만 나이든 부모들은 갈 곳이 없어
탁구공이 튀듯이 이 집 저 집 전전긍긍하며 초라한 노후를 보내고 있으며,
막상 부모가 이 세상을 떠나도 장례 예식 조차 참석하지 못하는 자녀들이
늘어가고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노후 대책을 자녀와 상의한다는 것을 기대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지요.
이 모두가 우리 교육의 방향과 목적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우리의 자녀들이 자라날 때
사회는 안정적으로 성장이 되고 부조리와 변칙이 판을 치는 혼란이 적을 터인데
지금 우리의 사회는 나만 잘 살고 보자는 극도의 이기심과 욕심으로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우리 신자들의 교육관이 어떻게 다를까요?
불행하게도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자녀의 신앙 교육의 의무마저도 소홀히 하여 가르치지도 않을 뿐더러
자녀가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면 부모가 오히려 우려하는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성당마다 흔히 목격되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세속적인 부모의 모습이지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베대오의 어머니와 다를 바 없는 모습입니다.
제베대오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들을 위해 예수님께 청탁을 드립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20,21)
여러분은 자녀를 위해서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제베대오의 어머니와 다른 모습인지, 아니면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인지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사람의 아들이신 당신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것임을 미리 예고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말씀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엉뚱한 생각만을 하고 있습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과 그 어머니는 노골적으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높은 지위를 청하고
이 모습을 본 다른 제자들은 저마다의 욕심으로 불쾌해 하며 화를 내고 있지요.
이렇게 서로 욕심을 부리며 다투는 제자들과 주변 사람들을 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요?
무수한 조롱과 채찍질 그리고 십자가 죽음을 눈앞에 두신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당신의 수난을 예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엉뚱한 생각만 하는 제자들 앞에서
참다운 스승의 모습을 보이십니다.
절망하고 화를 내며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변함없이 고요한 모습으로 타이르실 뿐이었지요.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20,26-27)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어리석음을 꾸짖기보다는 조용히 가르치시고
알아듣기 쉽게 다시 설명하십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나라가 서면 한 자리씩을 차지하고자 서로 눈치 보며 다투는
이 철없는 제자들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살아가도록 결국 다 변화시키셨습니다.
교육은 이렇게 인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교육하면서 내 생각대로 내 의지대로 순간순간 눈에 보이게
무엇인가가 확연히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안될 때는 실망하고 안달을 하며 힘들어합니다. 인내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향이 올바라야 합니다.
올바른 지향으로 인내롭게 한결같이 기도해야만 바른 교육의 열매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강조하시며 가르치신 것은 이것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20,26-27)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녀를 양육해 보십시오. 어찌 노년이 불행하고 참담하겠습니까?
하느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세속적으로 속물적인 교육관을 고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나의 노후가 편안해지려니 생각하고 끝없이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는 것은 열매 없는 빈 쭉정이 뿐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그런 세속적인 치맛바람이 아니라 영적인 치맛바람을 일으켰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자라나면
부모들은 그 보람의 결실을 노후에 풍요롭게 거두어들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말씀을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당신의 모든 것, 피와 살까지도 우리에게 내어주심으로써
섬김과 나눔의 극치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다툼을 벌였던 철부지 제자들을 변화시킨 힘은
예수님의 끊임없는 기도와 실천, 그리고 한결같은 인내심이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녀 교육은 역시 부모들의 신앙과 삶의 모범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말로는 누구나 할 수 있지요.
우리의 자녀들이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자녀로 성장하면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본인이 행복하지요.
이기적인 사람은 외롭고 힘든 삶을 살아가게 마련합니다. 누가 가까이 하려고 하겠습니까?
참으로 자식을 사랑한다면 하느님을 알게 해 주어야 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평화와 영원한 세상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이 세상의 어떠한 어려움도 정화가 되고, 인생을 지혜롭게 살 수 있는 바탕을 갖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나눔과 섬김이라는 바른 지향을 가르치시고
그것을 몸소 보여 주심으로써 제자들을 변화시키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섬기는 사람이며,
자신의 것을 나눔으로써 예수님의 고통을 기꺼이 함께 하려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참 스승이신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들도 신자다운 바른 지향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자녀들을 올바로 이끌어가야 하겠습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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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대 마르코 신부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마태오 20,17-28
진정한 권위는 서로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날이 점점 구체화되어 가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미 갈릴래아 활동기(4,12-18,35) 중에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받고
즉시 첫 번째 수난예고(16,21-23)를 들려주셨다.
그 때 베드로가 스승을 붙들고 이를 말리려다가 부끄러운 질책을 받았다.
갈릴래아 활동기가 마감될 즈음에 두 번째 수난예고(17,22-23)가 있었다.
그 때 제자들은 매우 슬퍼하였다고 마태오는 전하고 있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한 상경길목에서
세 번째 수난예고(20,17-19)를 들려주신 것과 어머니를 동원한 제베대오 형제의 청탁과
이를 계기로 예수님의 진정한 사명이 밝혀지는 내용이다.
이번의 예고는 앞의 두 번보다 더 구체적이고 노골적이다.
예수님의 동족인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가 사형선고를 받게되고,
이스라엘을 지배한 이방인 로마군인들에 의해 조롱과 침 뱉음, 매질과 채찍질을 받으며
결국에는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흘만에 있을 부활 또한 어김없이 예고되어 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날이 점점 구체화되어 가고 있는 만큼
이에 따른 부활의 영광 속에 깃들여 있는 예수의 참모습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 예고이다. 이제 연습은 끝이고 실전(實戰)만 남았다.
그러고 보면 오늘 복음의 분위기는 예수님의 실제적인 수난과 죽음 이전에 제자들이 맞이하는
최고조의 심각한 분위기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어머니를 동반하여 분위기를 깨고 있다.
마치 신랑을 빼앗겨 통곡하는 혼인 잔칫집에 와서 축가를 부르는 듯 하다.
두 제자의 어머니가 예수께 와서 엎드려 절하면서
"주님의 나라가 서면 저의 이 두 아들을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주십시오"(21절) 하고 간청하는 것이다.
다른 열 제자가 두 제자를 보고 화를 냈다고 하나 모두 같은 통속이다.
그들의 머릿속엔 예수님의 간절하고도 처절한 수난예고의 말씀은 온데 간데 없고,
앞서 예수께서 추종하는 자에 약속한 상급에 대한 말씀(19,29)만 꽉 들어차 있다.
재산이 많은 부자청년이 예수 추종을 거부하고 떠나자 베드로가 나서서 물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게 되겠습니까?"
예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나를 따랐으니 새 세상이 와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때에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게 될 것이다. 나를 따르려고 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백 배의 상을 받을 것이며,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마태 19,27-29) 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고,
이에 제자들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게 될 때까지는 아직 멀었다.
그 전에 치러야 할 실전(實戰)이 남아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두 제자 어머니의 청을 거절한 것은 제자들 전체의 청을 거절한 것과도 같다.
사실은 예수께서는 이런 종류의 어떠한 청도 들어주실 수 없다.
그분은 이 세상에 스스로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28절)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거절은 곧 초대이다. 이 초대는 사람의 아들과 함께 섬기자는 것이며,
세상을 위하여 함께 아파하고 목숨을 내어놓자는 초대이다.
그러나 이 초대는 진정한 권위에로의 초대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진정한 권위란
서로에게 봉사하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아니다
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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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호 빈첸시오 신부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마태오 20,17-28
예루살렘으로 가는 두 마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심장과 같은 곳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 그 중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민족을 택하셔서
당신 뜻을 알려주신 모든 가르침이 살아 숨 쉬는 곳이고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도 가장 이스라엘다운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하느님과 그분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이 사는 곳.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은
마치 하느님께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한마디는 여러 가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고 있기에 우선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이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는 것과 그분이 당하셔야 할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이것 이외에도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다는 것은
하느님 말씀이 당신의 자리를 찾아 가신다는 의미 또한 포함됩니다.
이스라엘이 받아들인 하느님의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살아있는 그 계명을 보는 순간 이방인의 손을 빌어 없애버릴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기에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진실로 믿고 있지 않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의 마음속에 이미 사랑의 수난이 각오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이 결국 사람들에게 죽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과 사랑의 힘을 보여 줄 것이라는
확신을 예수님이 가지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이 예수님의 이런 마음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의 뒷부분은 예수님의 말씀 넘어 세상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하는
전혀 분위기에 맞지 않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스승은 죽으러 간다는데, 그 죽음 뒤에 오는 세상에서 잘 살게 해달라고
한 자리를 청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얄미운 것을 넘어 슬프기까지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 그리고 그분께 가깝다고 불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아서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청을 드리는 제자들과 그들의 어머니에게 물으십니다.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느냐?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
예수님은 그들에게 당신의 죽음의 의미를 알고 있는지와 함께 할 수 있는지를 물으십니다.
욕심 많은 제자들은 진심인지 모를 확신에 찬 대답으로 응합니다.
“마실 수 있습니다”하고 말입니다.
결국 이런 제자들의 욕심은 자신과 함께 한 동료들과의 불화를 낳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 수난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접고 제자들에게 싸우지 말 것을 타이르십니다.
또한 당신에게 무모한 청을 드린 제자들과 더불어 정말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스스로를 낮추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가르치십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그 길에 예수님과 제자들의 이 엇갈린 마음의 모습은
지금 우리에게도 늘 일어나는 흔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느님 앞에 나서면서 여전히 우리는 주님의 마음과 각오보다는
제자들과 그 어머니의 맘으로 주님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기 일수 입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 앞에서 무릎을 꿇으면서 정작 우리가 청하는 것의 대부분은
다른 이들 위에 서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에 목숨을 바치시는데, 사람은 그 사랑으로 군림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무릎을 꿇기전에 그분께서 이미 십자가로 우리보다 더 밑으로 내려가셨는데도
자신이 그분 앞에 고개를 숙일 수 있다고들 생각하면서
정작 속으로는 엄청난 이기심을 채우기에 급급한 현실이
오늘 복음과 어찌 이리도 닮을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셔서 돌아가셨고 말씀하신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죽음에 오늘 약속한 제자들은 목숨을 함께 바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후에 주님의 말씀대로 그들 역시도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지만
그들이 그런 각오를 가질 수 있을 때까지 그들의 주님을 어떻게 대했던 가를 생각해본다면
그들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웠을지 모르겠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우리는 지금 예수님과 한 마음입니까?
아님 제자들과 한 마음입니까?
방향을 정하고 마음을 맞추어 봅시다.
부산교구 정 호 빈첸시오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