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적인 뮤지컬 매니아가 아니어서 많은 작품을 섭렵하지는 못했다. 그저 런던에서 흔히 말하는 Big 4인 팬텀, 레미, 레이디, 캣츠에 맘마미아 정도를 런던에서 봤고, 한국에 찾아온 레미와 명성황후, 그리고 몇 작품의 한국 작품을 봤을 따름이다. 워낙 뮤지컬을 처음 보기 시작한 것이 런던에 있었을 때 인지라 브로드웨이 뮤지컬인 시카고를 봐야겠다는 생각은 그닥 들지 않았었다.
그런 내가 이번 시카고를 찾게된 것은 충분히 충동과도 같은 것이었다. 브로드웨이팀도 아닌 바로 런던팀이 오는 것이였고, 두번째는 영화 시카고가 불러일으킨 국민적 호기심이 내게도 자리했기 때문이다.
2. 한국에서 본판 뮤지컬 보기
한국이라는 곳에서 본판 뮤지컬을 보면 실망스럽고 화가 난다. 표값부터 본판보다 비싸고, 또 전용극장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시스템적 결함이 도출된다. 조명, 세트, 음향시스템 등이 그것이다. 게다가 본판의 1진과 2진이 아닌 튜어를 도는 후보군들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슬퍼진다. 내가 바라던 tone은 저게 아닌데, 내가 바라던 저 캐릭터의 모습은 저 것이 아닌데 하고 말이다.
시카고를 보기 까지도 망설임과 주저함의 통과의례를 쉽사리 뛰어넘지는 못했다. 꼭 봐야할까 말까. 일단 극장 자체가 국립극장이다. 국립극장은 내겐 참 익숙한 공간이다. 워낙 한국 전통공연을 잘 보러다니는 나이기 때문이다. 국립극장은 시설 자체가 노후해져 있어 보통 국립극장 단원들의 무대로 쓰여지는 공간이다. 늘상 거기서 공연을 보러 갈 때면 왜 우리 전통 공연은 이런 시스템에서 공연을 해야 할 까 라는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값비싼 시카고가 여기서 공연을 한다니 속으로 '이 치들 장사 제대로 할 모냥이군'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 것이다. 자그마한 공연장에서 배우의 주름 주름에서 나타나는 연기, 소리 음표 하나하나가 세포 세포로 스며드는 느낌을 여간 받기 힘들 것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좋은 공연을 보고 싶다는 한 관객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이런 기획 공연들이 성공하고, 또 이 성공의 기운이 수입 공연이 아닌 창작 공연으로 나아갈 수 있겠다는 희망으로 통과의례를 건너뛰게 된다.
3. 공연 시작전 로비의 시끌벅적함
여유스럽게 공연장에 도착하여 모인 사람들의 움직거림을 바라보는 것은 또하나의 공연을 바라보는 듯 그 맛이 제법 솔솔하다. 게다가 워낙 값비싸게 올려진 공연은 마케팅 차원에서 여러 유명 인사 모시기에 열을 올리게 된다. 내가 봤던 4일 금요일의 공연에서 눈에 띄인 인사는 한나라당의 홍사덕 의원과 컨츄리꼬꼬의 신정환. press day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그닥 많은 얼굴들이 찾아오지 않았는 모양이다.
학생들 무리들도, 연인 무리들도, 공연전에 요기를 하는 무리들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이들도, 팜플렛을 사려는 사람들도 이래 저래의 소음으로 잔치판 다운 소리를 울려낸다.
예비종의 규율에 맞추어 일사분란하게 자리를 찾아들어가는 무리에 끼어 나도 1층 B열 13번의 자리에 앉아 mobile의 빨간 버튼을 쿡 눌러 재워둔다.
4. 레이리 앤 재러맨 (Lady and Gentleman)
이내 극은 시작된다. 기대했던과는 달리 England 악센트가 아닌 America악센트. 시카고가 미국이라는 공간이라서 발음을 미국식으로 흉내낸다. 처음부터 벨마 켈리의 All that jazz로 강하게 치고 나간다. 이번 팀의 캐릭터중 가장 색깔있고 관중을 쥐고 놓는 장악력은 단연 벨마 켈리에게 있었다. 깔끔한 발음, 눈빛의 강렬함, 발가락 하나 손가락 하나에 들어있는 힘은 그가 뱉어내는 선율과 함께 열(熱)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5. 영화 시카고 그리고 뮤지컬 시카고
이야기의 진행은 영화와 같기 때문에 별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아는 이야기라도 누가 이야기 하느냐에 따라, 아니 같은 사람이 이야기 하더라도 시차를 두고 하면 매번 달라지게 되고 그 달라지는 것이 또한 한 재미이다. 같은 시카고 스토리를 두고 영상으로 풀어내는 해석과 뮤지컬의 몸짓으로 풀어내는 해석을 비교해보는 것은 또하나의 재미인 것이다.
공간 이동을 세트에만 의존해야 하는 뮤지컬. 영화에서는 쉽사리 공간 이동을 하여 촬영하고, 나중에 편집만 해도 되는, 시간성을 타지 않지만 뮤지컬은 현재 모든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면에서 리얼리티 구현은 영화가 나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 낫다고는 할 수 없다. 이쪽과 저쪽의 공간이 한눈에 보이면서 다른 공간이라는 연기를 통해 불러일으키는 관객의 상상력은 리얼리티 이상의 맛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살인 장면 같은 처참한 장면을 어떻게 보일 것인가 하는 문제도 그러한 것이다. 진짜 총으로 쏘고 피를 낭자하게 보여주는 것이 극 진행에 큰 도움이 되진 않는다. 중요한 것은 죽였다는 사실이고, 이것은 하나의 극 진행의 징검다리이다.
세트가 크게 움직여야 할 막과 막의 넘김, 영상에서는 커트 편집을 하거나 디졸브를 준다거나 하는 편집 방식으로 쉽사리 넘기지만, 뮤지컬이나 연극은 이것이 하나의 골치거리이다. 우리나라 뮤지컬이 많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 이 부분이다. 막과 막에 불을 끄고 왔다 갔다 세트 바꾸고 하는 통해 극의 몰입을 튕겨내기 때문이다. 이 시카고에서는 불 끄고 넘겨야 할 부분을 드러내고 양성화한다. 마치 카바레 쇼처럼 지휘자가 다음 쇼는 뭡니다 하는 식으로 넘겨준다. 시간 순서상으로 공간 순서상으로 이질적인 것을 엮어내는 솜씨인 것이다.
6. 재미만 있다고 뮤지컬이 아니다
연극의 가장 기본적인 미학이 밀고 당김, 긴장과 이완이다. 이것이 서로 잘 맞물려야 관객의 마음을 삼킬 수가 있다. 일단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재미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재미만 으로는 그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리고 남는 무엇인가가 없다. 거기에 메세지를 담어야 한다. 이 재미와 메세지를 어떻게 비율비 맞게 배합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하느냐에 따라 세계적인 공연이 되느냐 마느냐의 갈림이 된다.
시카고에서 던져주는 고민거리만 꼽아보면 상당히 골치 아플 정도이다. 여성 감옥, 그리고 자신들의 정부나 남편을 죽일 수 밖에 없는 사정을 항변하는 대목은 여성이라는 인권을 들먹거리고 있고, 사회의 값싼 주목에 몰려다니는 기자들의 움직임은 쇼비즈의 허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순애보 록시의 남편 에이모스를 통해 인간 소외의 면을 엿볼 수 있고, 간수와 변호사, 그리고 죄수의 오가는 거래는 충분히 이 사회에도 있을법한 짜고치는 고스톱을 연출해내고 있다. 이런 등등의 것들이 있음에도 하나도 머리 아픔 없이 웃고, 올댓재즈하며 흥얼거리고 나오게 했으니 정말 잘만들긴 잘만든 것이다.
7. 그렇긴 해도 불만은 불만이다.
극을 보면 칭찬보다는 오히려 조목조목의 비판을 해주어야 한다. 이 비판을 통해 연출하는 이와 관객이 함께 안목이 커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카고에서 중요시 되는 인물은 록시와 벨마이다. 그리고 변호사 빌리플린, 남편 에이모스, 그리고 마마가 그 뒤를 따른다. (물론 캐릭터의 불만은 개인 감정이 많이 좌우한다. 예를 들어, 캣츠의 메모리를 가냐린 사라브라이트만이 부르는 것이 좋다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남루하고 뭉툭한 목소리가 낫다고 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이중 가장 캐릭터가 확실했던 이는 벨마였다. 가장 떨어지는 것이 록시와 마마이다. 록시는 벨마와 양분하는 주연이다. 그런데 그만큼 연기가 따라가질 못하고 있다. 표덕스러운 마마의 연기도 문제이다. 노래와 연기 모든 부분에서 미숙함을 드러낸다. 빌리플린과 에이모스의 연기 또한 벨마의 연기처럼 볼만 했다. 깔끔한 발음과 절도있는 발짓과 손짓은 역시 Lawyer class의 기품을 잘표현해냈다. 소외된 인간의 전형인 에이모스의 체격은 영국인임에도 딱 American이라는 느낌을 주고 있고(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발음은 캐스팅중 가장 영국적이었다), 그의 우유부단하고 실의에 찬 연기는 웃음과 동정의 눈길을 함께 이끌어냈다.
8. 그래서 잘했다는거야 못했다는거야
결국 사람들은 궁금해하는 것은 결과이다.
단연 난 잘봤고, 잘 즐겼다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극을 보는 내내 이 정도의 시스템 가지고 저 2층 3층에 있는 사람도 나와 같은 깊이의 느낌을 받을 수 있을가 걱정은 되었다. 하지만 나만을 한정시켜서는 그런대로 좋았다라고 말하고 싶다.
뮤지컬이 좋다 나쁘다라고 말하는 내 나름의 기준이 있다면 몇가지가 있는데, 먼저, 사람들이 극을 보고 나와서 계속적으로 흥얼댈 수 있을 정도로 머리에 각인되는 멜로디가 있느냐이다. 따라서 이 멜로디는 그리 어려워서는 안된다. 아주 단순한 선율이고 극중에서 반복적으로 쓰여야 한다. 시카고에서는 All that jazz가 그것인데 사실 이것을 흥얼거려보면 알겠지만, All that jazz라는 가사 외에 다른 부분은 흥얼거리기 쉽지 않다. 오히려 이 노래보다는 이 노래의 반주로 쓰이는 트럼펫 소리가 더 뇌리에 오래 남을 것 같다.
또 중요한 것이 아까도 말했던 막 간의 변경을 어떻게 해내느냐이다.
그다음으로 봐서는 극장을 비롯한 service를 보게 된다. 거기의 모든 staff는 같이 연기를 하게 된다. 친절하게 자리를 안내해주는 모습, 웃는 모습 하나 하나가 이미지를 심는다. 일단 뛰어나진 않지만 그래도 성실하게 만든 팜플렛에서 상당히 staff에 대한 점수를 주고 싶다. 하지만 staff이 공연장 안에서 잘 안보인다. 아마 극장 staff이 극장 안을 맡았기 때문인 듯 보였다. 유니폼이 다르기 때문에 눈에 빨리 들어온다. 자막 서비스도 하나의 서비스이다. 뛰어쓰기야 한정된 모니터에서 많은 것을 보여주려면 어쩔 수 없다고 인정되지만 명백히 틀린 오타들이 눈에 띄었다. 계속 전광판만 보고 수정하려면 난 극을 하나도 못볼 판이어서 간간히 봤는데 많지는 않고 하나 정도 찾아냈다.
9. 우리 뮤지컬의 미래를 위해
외국의 뮤지컬을 볼 때는 늘상 한결같은 소원을 한다. 언제까지나 이런 극들을 수입하지 말고 창작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이렇게 밖의 것들을 많이 보고 느낄 필요가 있다. 이 뮤지컬을 연출하는 사람들이야 본거지에 갈 수 있지만 문화의 성숙은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만 한발 나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같이 한발씩 딛어나갈 때에야 가능해진다. 이른바 문화판이 형성이 되는 것이다.
배우가 대사하기 전에 전광판을 다 읽고 나서 먼저 웃어버리는 모습을 보면서 역시 우리는 우리극을 봐야 제대로 된 느낌을 갖겠구나라는 생각을 해봤다. 그렇다고 팬텀과 같이 우리 극으로 번역만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의 역량으로 우리의 뮤지컬을 수출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우리 영화가 보여주는 가능성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카고가 그 가능성을 위한 하나의 디딤돌 하나를 놓았다고 하겠다. 좀더 많은 사람이 다같이 향유했음 하는 바램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