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始祖)
태사공(太師公) 신달(莘達)
탄강사(誕降史)
경기도 파주시 파평산 기슭에는 아득한 태고(太古)적부터
큰 연못이 있어 이를 용연(龍淵 : 一名 嘉淵)이라 불러왔다.
또 이 못속에는 용인(龍人)이 살고 있어 연못가가 불결해지
면 뇌성(雷聲)이 울리고 풍우(風雨)가 몰아쳤다고 전한다.
옛부터 우리 종 중(宗中)에 전해오는 가첩언전(家牒諺傳)
및 그 밖의 문헌에 의하면 신라 진성여왕 7년(893년 : 癸
丑) 음력 8월 15일 이 연못가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
욱하게 피고 그 연못 위에 한 옥함(玉函)이 떠올라 마을
사람들이 기이(奇異)하게 여겨 고을 태수(太守)에게 고하
자 태수가 연못가에 나가보니 옥함이 떠올랐다가 연못 복
판으로 밀려 들어가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러던 중 날이 저물 무렵 연못가에서 빨래를 하던 노파가
옥함이 다시 떠오르는 것을 보고 이를 건져보니 그 속에 오
색의 우모(羽毛)에 싸인 어린 옥동자가 들어 있었다.
이 아이가 바로 우리 시조 태사공 신달(莘達)이시다. 그런
데 이 옥함에 관해 일부 문헌에는 석함(石函)이라고 기록
되어 있고 태사공 묘지에는 금궤(金櫃)로 기록되었다.
어쨌든 찬연한 서기(瑞氣)를 발산하면서 옥함에서 나온
옥동자는 융준 용안(隆準 龍顔)으로 코가 우뚝하고 용의
상(相)을 닮았으며 양쪽 어깨에는 붉은 점이 있어 일월(
日月)을 상징하고, 좌우 겨드랑이에는 비늘이 81개 돋아
있으며, 발에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어 북두칠성(北斗七星)
의 형상을 하였고 온 몸에서는 광채가 솟아 눈이 부셨다고
한다.
이 아이가 태사공으로 득성(得姓)하신 것은 용연에서 옥
함을 건져낸 노파의 성(姓)이 윤성(尹姓)이라 윤씨라 하였
다고 전하나 가첩(家牒) 및 그 밖의 문헌에 따르면 옥함 자
체에 윤자(尹字)가 새켜져 있었기 때문에 윤성(尹姓)이라
하였다고도 하고 옥함에서 나오실 때 공의 손바닥에 윤(尹)
이라는 손금이 뚜렷이 그어져 있어 윤가라 했다고도 한다.
어쨌든 옥함에서 나오신 태사공께서는 이 노파(尹할머니)
의 극진한 정성과 사랑으로 양육을 받으시며 기골이 장대
하고 재기(才器)가 뛰어나게 자라셨다. 또 태사공께서는
파평산 아래에 사시면서 학문과 무예(武藝)를 닦으셨는데
파평산 마루에는 말이 달릴 수 있는 치마대(馳馬台)라는
궁마훈련장(弓馬訓練場)이 있었다. 이곳에는 지금도 태사공
께서 쌓아 놓으신 석축(石築)이 일부 남아 있다.
이 치마대에는 태사공께서 후련하시다가 애마(愛馬)가 죽
게 되자 작은 철마(鐵馬)를 만들어 그 곳에 놓아두셨는데
후일에 어떤 철공(鐵工)이 철마를 훔쳐갔다가 그만 즉사(卽
死)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또 그 때 함께 갔던 사람은 두려운 생각이 나서 흙으로 작
은말을 만들어 구워서 그 곳에 가져다 놓았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지금은 그 흔적이 없다.
한편 태사공께서 학문을 닦으시던 사찰인 금강사(金剛寺)
는 형적도 없지만 그 사지(寺趾)는 아직도 역력하게 남아있다.
태사공께서는 일찌기 파주에서 개경(開京) 조정(朝廷)까지
매일 임진강을 건너 내왕(來往)하셨다. 공이 강을 건너실 때
에는 으례히 강물이 갈라지며 홀연히 백사장이 드러나므로
신발을 적시지 않고도 강을 건너시게 되니 사람들이 신기하
게 여겼다는 전설이 있다.
또 태사공께서는 송도(松都)에 있는 조정에 출사(出仕)히
시고 돌아오실 때도 말을 타고 파평읍(坡平邑)에 있는 사저
(私邸)로 내왕하셨는데 말이 빠르기가 나는 듯 하고 강을
건널 때는 물이 양쪽으로 갈라지므로 세인(世人)들이 이를
두고 물결을 끊고 마시듯 강을 건넜다 하여 이 곳을 여음진
(如飮津)이라 했는데 이 말이 후에 음진(飮津)으로 변하고
이것이 다시 후세(後世)에 이르러 음(音)이 변하여 임진강
(臨津江)으로 바뀌었다고도 한다.
용연 동쪽 산에는 금강사의 유허(遺墟)가 있다. 이 곳은
원래 태사공께서 자라시던 구기(舊基)로서 3세(3世) 복야
공(휘:金剛)이 그 곳에 절을 짓고 승려(僧侶)를 두엇다고
전해오고 있는데 문숙공(文肅公)과도 깊은 인연이 있는
성소(聖所)로 전해지고 있다.
그 인근에는 암자 미타사(彌陀寺)가 있다. 지금은 축대 일
부와 옛우물만 남아 있다. 우리 나라의 고사(古史)를 보면
건국신화(建國神話)와 씨조설화(氏祖說話)가 있다.
여러 가지 신화 중 삼한통합(三韓統合)에 위공(偉功)을 세
우신 우리 시조 태사공의 경우도 탄강하실 때의 설화가 지
생설(地生說)로 전하고 있다.
씨조탄강(氏祖誕降)에 얽힌 고대설화(古代說話)는 천강설
(天降說), 지생설(地生說) 등 몇 가지가 있는데 우리 시조의
용연탄강설화는 지생설에 속한다.
우선 파주 용연의 지리적 위치가 우리의 주목을 끈다. 즉
한반도(韓半島)의 중심부에 위치한 파주에서 탄강하셨다
는 점이 다른 대성(大姓)들의 관향(貫鄕)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에서도 우리 윤씨가 전국 방방곡곡에
고루 퍼져 번성하고 있다는 것과 무관치 않다.
파주의 산명(山名)이나 지명(地名)에는 「용(龍)」자가
많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특히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에 의하면 용연 바로 옆
의 파평산은 원래 미라산(彌羅山)이라고 하였는데 미라(
彌羅)는 한자(漢字)로 말하면「두루 사방으로 퍼진다」는
뜻이 되고 또한 「미라」는 용(龍)을 뜻하는 우리의 고어(
古語) 「미르」와도 통하여 파평산은「용의 산」 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 점에 비추어 시조께서 용인(龍人)이 살고 있다
는 용연에서 탄강하시고 「용의 산」이라고 할 수 있는 파
평산 하에서 자라나서 백만(百萬)을 헤아리는 동방(東方)
의 일대거족(一大巨族)의 비조(鼻祖)가 되셨다는 것은 너
무도 상징적이며 영이(靈異)로운 일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파평산 주변에는 용이 서리고 있다는 반용산(蟠龍
山)이 있고, 용이 일어난다는 용발산(龍發山)이 있으며,사
찰(寺刹) 중에는 용상사(龍床寺)가 있고, 지명(地名) 중에
는 용지동(龍池洞)이 있으며, 미륵불이 솟아 있는 용미리
(龍尾里) 등이 있다.
이는 용연(龍淵)을 중심으로 한 파주 땅이 삼한갑족(三韓
甲族)인 우리 파평윤씨의 발상지의 성지(聖地)임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용(龍)은 또 임금의 상(象) 또는 천자(天子)의 사물(事物)
에 쓰는 글자이다. 용연에서 탄강하신 우리 시조 태사공의
후손 중에서 여섯 분이나 국모(國母)가 되시어 이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을 일곱 분이나 생탄(生誕)하신 것 또한 너
무도 신이(神異)로운 일이다.
태사공 약사(太師公 略史)
우리 시조 태사공께서는 신라(新羅)의 천년사직(千年社稷)
이 붕괴(崩壞)되고 후삼국(後三國)이 생겨나는 혼 란기를 지
나 나라가 재통일되는 역사적인 일대 변혁기에 탄강하시어
마침내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三韓)을 통합하신 공신(功臣)
이 시다.
신라 경명왕(경명왕) 2년(918) 태사공께서는 유금필(臾금
弼)홍유(洪儒) 등 동료들과 협심하여 궁예(弓裔)를 무찌르
고 왕건(王建)을 국왕(國王)으로 추대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셨다. 이로써 삼한(三韓)을 통합한 고려왕조를 수립한 것
이다.
당시 신라는 귀족 사회의 부패와 국왕의 난정(亂政)으로
도처에 도적이 횡행하고 각지에서도 토호(土豪)들이 반란
(叛亂)을 일어키는 등 전국적인 동란기(動亂期)의 와중(渦
中)에 있었다.
따라서 신라는 국력이 극도로 쇠퇴하고 각처에서 군벌(軍
閥)이 봉기하여 궁예(弓裔)가 송도(松都) 개성(開城)에 후
고구려(後高句麗)를 건국하고 강원도 ·황해도 및 평안도
까지 점령하고 있었다.
궁예는 그 후 철원(鐵原)으로 국도(國都)를 옮기고 왕건(王
建)은 그 휘하에서 대장(大將)으로 활동하고 태사공은 왕건
의 동료로 계셨다.
궁예는 천성(天性)이 잔인 횡포하여 폭정과 학살을 자행하
여 민심이 일찌기 이탈하였기 때문에 태사공께서는 제장(諸
將)과 더불어 궁예를 물리치고 왕건를 국왕으로 추대하셨다.
그 때 궁예는 궁중에서 주색(酒色)에 파묻혀 살다가 왕건
이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왕건과 윤신달이 쳐들어
온다면 나는 이제 끝났구나.’하면서 궁중을 빠져나가 도
망치다가 강원도 평강(平康) 산골에서 백성들에게 잡혀피
살되었다고 한다.
그보다 앞서왕건과 그 부인 유씨(柳氏)는 태사공의 인품이
비범함을 알고 궁예를 정벌할 당시에 제신(諸臣)들과 함께
태사공의 힘을 빌렸던 것이다.
왕건 태조는 등극(登極)과 동시 국호(國號)를 고려(高麗)라
정하고 송도(松都) 개성(開城)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 뒤에 신라를 자주 침범하는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
의아들 신검(神劒)을 수 차 정벌한 사실이 있었는데 태사공
께서는 그 때마다 왕건태조와 함께 출정하셨다.
또 왕건 태조가 고려를 건국한 뒤 18년이 지난 서기 935년
신라의 경순왕(敬順王) 김부(金傅)는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유지할 수 없음을 깨닫고 태자(太子) 이하 신하(臣下)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려 왕건 태조에게 나라를 바치고 투항하
였다.
왕건 태조는 투항해 온 경순왕 에게 왕녀를 하가(下嫁)시켜
별궁(別宮)에 거주 (居住)케 하면서 백관(百官)의 상위(上位)
에 올려 우대했다.
그 때 왕건 태조는 또 서라벌 동경(東京 : 경주 : 慶州)에 대
도독부(大都督府)를 설치하고 대도독(大都督)으로 하여금 신
라 유민을 다스리게 했다. 그 때가 고려 태조 19년(936)의
일이었다.
태사공께서는 왕건 태조가 삼국을 통일하기까지 항상 왕건
에게 ‘인의(仁義)와 도덕(道德)으로 백성을 다스려 천하(
天下)를 이(利)롭게 해야한다’고 간(諫)하셨다. 왕건 태조
는 그 충간을 감명깊게 받아 시행하였다고 전한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을 통일한 뒤에 조회석상(조회석상)에
서 왕건태조는 중신(중신)들에게 ‘이 대업을 이룬 데는
윤신달(尹莘達)의 공이 크다.’고 유시(유시)한 바 있다.
그 때 공신은 1등이 5명, 2등이 12명, 3등이 10명, 4등이
2명으로 모두 29명이였다.
태사공은 2등공신으로 벽상삼한익찬공신(壁上三韓翊贊
功臣)의 공신호와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의 관작(官
爵)을 받으셨다.
태사라는 관작은 太傅(태부) · 태보(太保)와 더불어 삼공
(三公)의 예우를 받는 지위 이다.
이 때 공신으로 함께 책훈(策勳)된 사람은 신숭겸(申崇謙 :
平山申氏 시조), 배현경(裵玄慶:慶州裵氏 시조), 홍유(洪儒:
義城洪氏 시조) 복지겸(卜智謙:汚川卜氏 시조), 김선평(金宣
平:新安東金氏 시조), 유차달(柳車達:文化柳氏 시조). 이도(
李棹:全義李氏 시조), 장길(張吉:仁同張氏 시조) 등이 있다.
공의 일휘(一諱)는 협신(협莘)이시다.
공께서는 성년이 되시면서 어느 재상댁(宰相宅)의 문객으
로 계신바 있다. 그 때 가뭄이 극심하여 곡식이 타 죽게 되었다.
나라에서는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기로 결정하고 국왕이 이
재상에게 제문을 지어라 명을 내렸다.
이 때 재상은 자택에 돌아와서 제문을 지으려 하였으나 머
리 글귀가 떠오르지 않아 고민 하고있었다.
이 때 태사공께서는 ‘이렇게 지으시면 어떠하리까?’하시
면서 의군신지유죄 감수재앙 계초목지 무지 등몽초열 宜君
臣之有罪 甘受災殃 溪草木之 無知 等蒙焦熱 이라고 써서 재
상에게 내놓으시니 재상이 그 글귀를 보고 과연 명문(名文)
이로구나 칭찬하고 그 글을 글머리로 제문을 지어 국왕에게
바쳤다고 한다.
그 글 뜻은, ‘ 임금과 신하가 죄가 있으면 마땅히 재앙을
받겠지만 어찌 초목까지 타 마르게 하나이까’라는 내용이
었다.
태사공께서는 이 재상의 추천으로 여러 관직에 오르셨다고
전해 오고 있으나 자세한 기록은 없다.
고려 건국 후 28년만인 서기943년 왕건 태조가 승하하고
제2대의 혜종(惠宗)이 등극하였다.
원래 동경(동경 :慶州) 대도독부와 서경(서경 :平壤) 대도호
부(大都護府)에는 가장 신망(信望)이높은 중신(重臣)을 보
냈던 곳인데 혜종은 등극과 동시에 안심이 되지 않았던지
서경대도호부사에는 가까운 왕족을 보내고 동경대도독에는
태사공을 보냈다.
그 때 태사공의 보령(寶齡)은 52세였다. 그런데 아드님이신
공신공(先之)께서는 종신토록 송경(松京)에 볼모가 되셨다.
그 이유는 중국에서 천자(天子)가 작은 나라를 점령하고 제
후왕(諸候王:오늘의 총독)을 봉(封)하는 때에는 아무리 신임
하는 사람을 보내더라도 반란을 일으킬 것을 염려하여 제후
왕의 장자(長子)는 볼모로 삼아 왕경(王京)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던 일에 근거한다.
따라서 헤종도 그렇게 신임하는 분을 보내면서도 신라의
유민(遺民)이 많았기 때문에 만일을 염려하여 공신공을 송
경(松京)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태사공께서 동경
으로 부임하시어 30년간 재임 하시다가 81세에 서거하셨
는데도 그간에 부자(父子)분께서는 한 번도 상면(相面)하
실 기회가 없었다고 한다.
신라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바칠 때 태자(마의태자)와
중신(重臣)들이 크게 반대하였으므로 신라 백성 중에서도
원래 적대시했던 고려에 대하여 불복(不服)하고 반항심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고려사(高麗史)』
와 기타 어느 문헌에도 신라 유민이 반항했다는 사기록(史
記錄)은 없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태사공께서는 대도독으로 부임하시
어 신라유민을 통치함에 있어 얼마나 훌륭한 왕도정치(王道
政治), 즉 도의 정치를 펼치셨는지 그 선정(善政)의 정도를
헤아릴 수 있다.
그 뿐 아니라 조정에서 30년이나 그 자리에 유임시킨 것도
태사공의 통치가 목민(牧民) 위주의 정치였다는 것을 입증
하는 것이다.
태사공의 묘소는 실전(失傳)하였으나 수 백년이 지나서
찾았는데 그 지방민들이 그 곳을 「윤 능골」이라고 전
해 온다는 말을 들은 것이 단서가 되어 심묘(尋墓)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신라 유민들이 태사공의 덕치(德治)에 감동하여
마치 왕과 같이 섬긴 데 연유한다 할 수 있다.
태사공께서는 서거하실 때 까지 동경에 머무시며 30년 동
안이나 신라 유민을 상대로 선치(善治)하여 완전하게 고려
의 충성된 백성으로 감화시켰기 때문에 공께서 서거하신지
10년 후인 성종(成宗) 2년 대도독부를 폐지하고 각 군(各
郡)을 그 고을 수령(守令)에게 맡겼으며 경주(慶州) 1개군
만 다스리는 동경유수를 두도록 직제를 개편했던 것이다.
공이 고려 광종(光宗) 24년(973:癸酉)에 임소(任所)에서
서거하신 때는 향년 81세 때이다.
공의 묘소는 포항시 기계면 봉계리 운주산(雲柱山) 구봉
산(九峯山) 아래 유원(酉原)에 모셨는데 중간에 실전했다
가 영조(英祖) 때 심묘(尋墓)하여 개봉축(改封築)하고 영
조 16년에 입비(立碑)하였다.
배위는 봉강재 소장(鳳岡齋 所藏)의 태사공 심묘기(太師
公 尋墓記)에는 경주 남면 봉동산(慶州 南面 鳳洞山) 아래
박달리(朴達里) 감룡 자좌오향 득수진파 동서분(坎龍 子坐
午向 得水辰破 東西墳)으로 모시고 비석을 묘아래에 묻었
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태사공 묘표기(墓表記) 및 묘지(墓誌)에는 합장되었다는
기록이 없어 앞으로 규명해야 할 과제로 남았다.
태사공 심묘기(太師公 尋墓記)
공의 묘소는 조선조 중엽 어느 때에 경주의 토호(土豪) 품
관(品官)인 이하지(李厦榰)라는 자가 묘소의 표석을 분질러
묻고 투장(偸葬:몰래 묘를 씀)해 실전했었다.
그 후 후손들이 공의 묘소를 찾았으나 거기에는 딴 사람의
묘가 축조 되었으므로 알 길이 없었다.
그러던 중 경주에 사는 후손 윤숙(尹繡)이 공의 묘소를 일
찌기 짐작하던 터라 숙종 45년(1719:기해) 정월에 서울에
올라와 경중제족(京中諸族)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서울에
있던 후손들로서 당시영부사(領府事) 지완(趾完), 참관 헌
주(憲柱), 승지 봉조(鳳朝), 사부(師傅) 봉구(鳳九), 직장(
直長) 봉휘(鳳輝), 광주 부윤(廣州 府尹) 전 판부사(前 判府
事) 지선(趾善), 한림 세주(世柱), 이조 좌랑(吏曹 佐郞) 선
(善), 현감 이풍(以豊) 등 요로에 있는 종인들이 경중(京中)
에 통문을 돌려 종회를 개최하고 협의한 끝에 종중 사인(舍
人) 정로(鼎老)를 경주에 보내어 경주 부윤에게 소청을 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청원이 토호인 이가(李哥)의 간계로
도리어 무고로 몰렸다. 이하지는 숙(繡)을 그가 거주하는 동
리 이임(里任) 등과 결탁하여 붙잡아 가두고 그 입을 봉하고
자 죽여 없애려는 악랄한 흉계까지 꾸미고 경주 부윤도 오래
된 일이니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여 무슨 증거가 있느냐고 들
어 주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공갈과 위협으로 대하고 이
정당한 청원에 대해 처리를 고의로 회피하는 형편이였다.
태사공은 여조(麗朝)의 통합 공신이시고 그 후손 중 국구(
國舅:임금의 장인) 성모(聖母:왕비)가 여러 분 계셨으며 명
상(名相) 현신(賢臣)들이 많을 뿐 아니라 그 후예의 수효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거족이거늘 먼 시골의 일개 품
관(品官) 따위가 농간을 부려 수령까지도 말려들었다는 것은
실로 개탄스럽고 통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서울의 제종들은 이에 대한 대책을 숙의(熟議)한 끝에 각종
전기, 보책 등 사료(史料)를 수집하였으나 확실히 증거될 만
한 자료를 얻지 못하고 오직 심증(心證)으로만 공의 묘소가
과연 그 곳이라는 것만 알고 계속하여 찾아내기에 최선의 노
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 후 후손 이(理)가 경주 부윤이되어
현지에서 물적 증거를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했다.
영조 13년(1737:정사)에 후손 봉정(鳳廷)이 본부 영장(本
部營將)이 된 후 그 곳 민간들 의 증언을 듣고 「태사공 묘
소가 여기」 라고 지목되는 바로 믿을 파헤쳐 본 즉 과연 깨
어진 비석 한 조각이 들어났다. 양각(陽刻)에 각자된 대부윤
(大夫尹) 이라는 큰 글자가 나온 것이다.
이를 근거로 이가(李哥)를 문초한 즉 자백을 하므로 세 사
람을 옥에 가두고 엄하게 다스려 자백을 받아낸 것이다.
영조 15년(1739:기미에 이(理)의 아드님 익헌공(翼獻公)
양래(陽來)가 본도 감사(감사)에 도임하고 부근 일대의 좌
우 양쪽을 파헤쳐 보자 또 다시 선지·금강(先之·金剛)이
라는 넉자의 음기(陰記) 돌조각이 있었다. 이로써 더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되었으니 선지(先之)는 태사공의아드님이신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시고 금강(金剛)은 공의 손
자이신 복야공(僕射公)이시다.
종중(宗中)은 이 사실을 중외(中外)에 통고하는 동시, 성
금을 모아 영조 16년(1740:경신)에 묘표를 세우고 당시 후
손 중 재산가들이 제전(祭田)을 마련하고 분묘를 다시 축
조하는 등 수호채비를 하였다.
영조 27년(1751:신미)에 후손 지돈녕(知敦寧) 광소(光紹)
가 안동 부사(安東 府使)가 되었을 때 묘암(墓庵)을 창건하
고 재실(齋室)을 묘 좌편에 짓는 한편 제기의물(祭器儀物)
을 마련하여 중을 두고 수호케 하였으며 후손 판서(判書)
방(坊)이 본부에 도임하여 이를 더 확장하여 모두 40여 칸
이나 되었다.
그후 임신년(1752)에는 정승(政丞) 동도(東度)공이 본도
감사로 왔을 때 제전 한 섬 13두락을 더 마련하고, 또 후손
광안(光顔)과 성대(聲大)가 본도 감사와 동래 부사(東來 府
使)가 되었을 때 묘사를 다시 중수하고 제전을 증가시키는
동시에 후손들 중 재산가나 각 읍 수령인 사람들에게 돈과
곡식 지물(紙物) 등을 거출케 하여 중으로 하여금 전답문권
을 작성케 하여 본부에서 수호하고 받드는 방도를 만들어
비로소 만전을 기하게 되었다.
그 후 또 묘소 2리 근처에 봉강서원(鳳岡書院)을 창건하고
공을 향사(享祀)하였다. 제사는 봄 가을로 채전(菜奠)을 드
리게 하였는데 고종(高宗) 5년 무진년(1868)에 대원군(大
院君)에 의해 철원(撤院)케 되니 후손 울선(蔚善)이 제전 1
68 두락을 바치고 원답(院畓)을 재소(齋所)에 환속시켰다.
공의 묘소에는 묘표(墓表)와 묘지(墓誌)가 세워졌는데
묘표는 二十五세손(世孫) 이조 판서(吏曹 判書) 혜교(
惠敎)가 찬(撰)하고 글씨는 二十四세손 경주 부윤(慶州
府尹)휘정(彙貞)이 섰으며 묘지는 三十세손 이조참판 겸
홍문관 제학(吏曹參判 兼 弘文館 提學) 태준(泰駿)이 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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